[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여름 보름달 아래,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있는가. “강강수월래―” 소리를 높이면, 어느새 우리 몸은 노래와 하나가 되고, 둥근 원 속에서 삶의 고단함도 흩어진다. 이 단순한 원무(圓舞), 곧 손잡고 도는 춤은 어쩌면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 공동체의 원초적 몸짓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춤’이라는 글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을까. 오늘 우리가 쓰는 ‘舞(무)’자는 갑골문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단순한 몸놀림 이상의 의미, 곧 공동체가 하늘에 기도하고 자연과 소통하던 오래된 제의적 기억이 숨어 있다.
□ 팔 벌린 사람, 손에 든 도구
갑골문 속 ‘舞’는 단순하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사람의 형상(大) 위에, 양손에 나뭇가지나 깃털, 혹은 꼬리 같은 도구가 들려 있다. 이 도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이는 소의 꼬리라고 했고, 어떤 이는 깃털 장식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제의적 도구, 이를테면 바람과 비를 불러들이는 가지나 부채와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림 21] ‘舞’ 참조)
중요한 건, 춤의 본래 모습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양손에 든 도구는 하늘에 대한 기도, 특히 기우제와 같은 제천의식의 상징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흔들고, 땅을 두드리며, 무리를 지어 돌던 춤. ‘舞’의 출발은 곧 공동체 전체가 하나 되어 하늘과 소통하던 몸짓이었다.
□ 발자국이 더해지다
흥미로운 점은 글자의 변화다.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팔 벌린 사람과 도구만 그려졌지만, 금문(청동기에 새겨진 문자)과 소전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바로 발자국이다.
글자 아래 ‘止(발자국 지)’ 모양이 덧붙으며, 이제 ‘무’는 단순히 도구를 든 사람이 아니라 발을 옮기며 움직이는 장면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춤은 손의 동작과 함께 발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며 본격적으로 ‘춤’의 의미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舞’와 ‘無(없을 무)’가 일시적으로 의미 관계를 맺은 흔적도 보인다. 어떤 제의에서는 손에 든 도구를 불 속에 던져 태움으로써 ‘없어짐’을 상징했는데, 이런 의례적 맥락이 ‘무(無)’의 뜻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학적 세부는 복잡하지만, 분명한 것은 춤과 제의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춤은 제사였다
우리는 춤을 흔히 예술이나 오락으로 본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춤은 무엇보다 제사였다. 춤은 신과 만나는 길이었고,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었다.
중국의 종묘대제 기록에는 ‘무구(舞具)’라는 도구가 등장한다. 북과 피리뿐 아니라, 춤추는 이들이 손에 들던 도구가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종묘제례악에서도 춤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다만 조선시대의 종묘무는 송나라와 고려를 거쳐 들어온 양식을 계승한 것이어서, 갑골문 ‘舞’의 원형과 동일시하기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의식에서 춤이 빠질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춤은 곧 기도였고, 기도는 춤이었다.
□ 고고학과 민속의 증언
문자의 해석을 넘어 고고학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요하 지역의 우하량 유적에는 제천을 위한 원형 재단이 발견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구현한 구조다. 흥미롭게도 강화도의 참성단도 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우연일까, 전승일까?
또한 중국과 티베트 일대에서는 4~5천 년 전 도자기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는 무리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선 채 발을 구르며 춤을 춘다.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문득 오늘날의 ‘강강수월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강수월래가 곧 갑골문 ‘舞’의 원형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화는 복잡하게 전파되고 변용된다. 그러나 원무, 즉 원을 그리며 집단으로 추는 춤이 인류 보편의 오래된 제의적 몸짓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강강수월래는 그 기억의 한국적 변주라 할 수 있다.
□ 춤은 어떻게 전승되었나
고대의 춤이 제의적 기원에서 출발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수용과 변용의 과정이었다. 송나라에서 유입된 궁중무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종묘제례악에 자리 잡았듯, 춤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옷을 갈아입으며 이어졌다. 고구려의 넓은 소매춤을 갑골문 ‘舞’와 직접 연결 짓는 해석도 있지만,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춤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과 형식을 입었어도 그 뿌리에는 늘 공동체적 기도와 제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곧 춤의 본질이었다.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춤이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춤은 곧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풍년이 들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늘에 기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몸을 흔들고, 손에 도구를 들고,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하늘에 비를 빌기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그러나 축제와 무대, 혹은 운동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노래하며 몸을 흔들 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춤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강강수월래는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한 오래된 기도의 기억이자, 공동체가 함께 살아남고자 했던 몸짓의 유산이다.
□ 맺으며
갑골문 ‘舞’는 단순히 춤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팔 벌린 사람과 양손의 도구, 그리고 발자국이 새겨진, 살아 있는 의식의 기록이다. 춤은 오락이 아니라 제사였고, 기도였다.
우하량의 재단, 강화도의 참성단, 고대 도자기의 원무, 그리고 오늘날의 강강수월래. 이 모든 것이 서로 닮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춤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몸짓으로 하늘에 닿고, 서로의 마음에 닿고자 했던 몸의 언어.
‘舞’라는 글자 속에는 바로 그 언어가 새겨져 있다. 춤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였고, 글자는 그 기도를 잊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수천 년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그 글자 속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