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07(목)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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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드 베랑저(Olivier de Berranger) 주교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2026년,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저(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올리비에 드 베랑저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993년까지 17년 동안, 그는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며 척박한 노동 현장의 한복판을 지켰다.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한 그는 프라도수도회(Association des Prêtres du Prado)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창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있었다. 1994년 로마 교황청 전교회 프랑스 지부장을 거쳐 1996년 상드니(Saint-Denis) 교구 주교로 서품된 그는, 1999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출간하며 두 나라에서 마주한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끝없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자신이 처음 수도 서원을 했던 초심의 자리로 향해 있었다. 그의 은퇴 후 행보는 그를 아는 프랑스와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화려한 노후 대신 자신이 처음 입회했던 리옹 근처의 수도원을 찾아가 '문지기(수위)'로 살기를 자청했다.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수도원의 문을 열고 닫으며 방문객을 맞이하는 수위로 살다 생을 마감한 그의 뒷모습은,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증명해 보였다. 
 
드 베랑저 주교의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초임 교사나 보육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깊이 공명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과 깊은 통찰이 박제된 훈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삶의 가치를 실천하며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서 지역 교육에 중요한 책무를 다했던 최 모 前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그가 선택한 곳은 안락한 원로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낯선 타국에서 온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로서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수도원의 문지기로 돌아간 베랑저 주교의 정신이 그러했듯,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온기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평생 쌓아온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으로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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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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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문지기를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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