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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익히고 되새김질하는 고전의 밥상으로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지식이 단순히 인식의 차원에 머물고,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삶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객관적인 세계와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항상 가치와 이념을 매개로 관계하게 되는데, 세계와 관계할 때 사용하는 자신만의 특정한 가치론적 규정을 莊子는 ‘成心’이라고 표현하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정해진 마음 즉 편견을 스승처럼 받드는데”, 그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큰 오류로서 ‘세계의 진상과 인간을 크게 어그러지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자에게 마음 쓰는 존재다. 인류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공감 능력을 타고난다.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서로 협력하는 탁월한 공감력 없이 인류의 집단 성취인 문명은 불가능했다. 요즘 이런 생각에 머문다. 열심히 뭘 하긴 하는데, 가슴 한구석에 ‘늘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해야 한다고 동서양 막론하고 성현들은 말한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게 맞아, 그렇게 해야지.’라고 주먹을 불끈 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 전에 한 후배에게 이런 넋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 같네.’라고 하니까 ‘형님, 그럼 말씀 하지 마세요. 잘 살아왔고, 잘 살고 계시는 겁니다.’라는 답변에 약간의 치유를 받았지만, 도로아미타불,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 요즈음 나를 휘감는다. ‘내 생각’과 내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어리석고 밉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의 본질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시작도 결국에는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귀결된다고 믿는다. 모든 것이 배움의 장이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배워야만 살 수가 있다. 그 아는 만큼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한다. 다시 말해 생각을 또 생각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앎과 생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주 거창한 질문인 것 같지만 답은 매우 간단하다. 생명은 앎을 향한 운동이다. 이것 포기하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버리면 소외의 삶, 인생 자체가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동안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붙들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미친다. 요즘 남학생들도 이마에 여드름만 좀 나도 학교가 아니라 마사지 숍을 간다고 한다. 지금은 ‘이런 시대’가 된 것이다. 자기를 위한 투자, 자기 계발,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위한 게 아니라는 거, 정말 헌신적인 삶인 것 같다. ‘헌신적’이란? 자기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오직 타인을 위한 헌신이라는 말이다. 왜 이렇게 남을 위해 애를 쓰는 걸까? 나한테 이로운 건 별로 없고, 오로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내 삶이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인정 욕망이라고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지수는 훨씬 줄어든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언어가 귀에 못이 박혔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욕망과의 거리 두기가 더 중요한 시대는 아닌가? 『東醫寶鑑』을 배우면서 몸에 대한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리듬을 잘 타려면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우리의 감정, 즉 칠정은 항상 널뛰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일상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걸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춘기에나 하는 짓인데, 나는 평생을 사춘기로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머문다. 사람의 감정은 원숭이 같다고 한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원숭이한테 가장 어려운 일이 앉아서 명상하는 일이라고 한다. 『西遊記』를 보면, 손오공도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딱 한 가지,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것만은 못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감정을 타고난다고 한다. 그래서 내 감정을 어떻게 제어하는가가 내 일생, 그리고 내가 맺는 관계를 결정하게 되는 거다. 감정은 훈련을 통해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나를 제멋대로 끌고 다니게 된다. 『東醫寶鑑』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들어가 있는데, 도교는 주로 단전호흡을 통한 정기신(精氣神)의 순환을 통한 양생의 기예를 펼치고 있다. 유학은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기준이다. 이 오상에 맞춰서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이 제도화되고 예법화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든 다 인의예지신을 지켜야 한다. 지키면 군자, 못 지키면 소인이 되는 거다. 왜 지키지 못할까?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수신제가(修身齊家)는 물론이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불가능하다고 성현들은 말한다. 동양에서 고대의 지혜라고 하면 유교, 불교, 도교를 말할 수 있다. 중화문명에서 유교와 도교가 발달했고, 나중에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오면서 삼교가 서로 혼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공부할 때, 삼교회통(三敎會通)을 중시했다. 지금도 이 정도의 기본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인류 지성사의 기초․기본이기 때문이다. 『논어』 외우고, 『불경』 외우고, 『동의보감』도 외우면 평생 자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 아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권위자가 아니어서 그럴까? 고전은 다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지혜란 본디 중생과 만물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자격이나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해야 한다. 그걸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반드시 해야 하는 소명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고매한 경전일수록 일용할 양식으로 써야 하다. 고전을 아득한 시공에 모셔두기만 하면 안 된다. 가장 고귀한 것은 일상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하고,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듯이, 이런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고귀한 것이다. 고전도 마찬가지다. 빛이고 공기고 물인 것이다. 빛과 공기, 물을 이해한 다음에 사는 게 아니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일단 암송한 다음 계속 되새겨야 한다. 자기 몸에 딱 붙여야 한다. 장자(莊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제(齊)나라 15대 왕 환공(桓公)과 수레바퀴 깎는 장인 윤편(輪扁) 사이의 이야기다. 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윤편은 그 앞 정원에서 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대청으로 올라와 환공에게 물었다.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무엇을 기록한 것입니까?” “옛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살아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환공이 노해서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감히 바퀴를 만드는 자가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내가 납득하도록 설명하면 모를까 아니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윤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퀴의 구멍을 깎을 때 느슨하게 하면 헐렁해서 빠지고, 빠듯하게 하면 빡빡해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빠듯하지도 않은 것은 손에 익고 마음이 그에 호응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비밀이 거기에는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들에게도 가르치지 못했고, 아들 역시 저에게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저는 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폐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 『繫辭傳上篇』12-2장에 ‘書不盡言(서부진언), 言不盡意(언부진의)’라는 말이 있다.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가슴 속의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다 드러낼 수 없다. “조선에는 공자가 들어오면 왜 공자의 조선이 되려고 하지? 조선의 공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조선 말 신채호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보자. 『般若心經』에서 관세음의 ‘觀’은 ‘본다.’보다도 ‘보여준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들, 그 현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보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11면의 얼굴을 지닌 보살이 바로 관세음(관자재)보살이라고 한다. 미래에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내게 보여준다. 사실을 전한다는 기자는 많아도 이상호 기자처럼 세상의 아픈 소리를 들어야만 기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숨겨진 소리, 보통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안 들리는 소리, 그 소리를 찾아 나선다. 기자는 모름지기 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그토록 용감하게 자신을 현장에 던지고 사는 기자는 많지 않다. 세월호 속에 사라진 슬픈 소리도 이상호의 대변이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널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호는 그러한 삶의 자세 때문에 본인이 항상 아프다. 고통스러운 소리를 들으면 같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상호를 박해하고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수없이 고소를 당하면서 얼마나 깊은 시련을 겪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제야 저도 철이 드는 걸까? 옛말에 ‘생긴 대로 논다, 산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心經』을 만나,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더 생각하고, 타인의 苦厄을 동감하며, 진리에 대하여 개방적 자세를 유지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공부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이제야 살아가야 할 소명을 더 생각하고 생각한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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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기고] AI 보편교육, 이제는 ‘노코드’로 학교 현장에서 실현해야 할 때
    [교육연합신문=김수랑 기고] 전 세계적으로 생성형 AI와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교육 현장은 ‘AI 보편교육’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교육부 역시 2025 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초·중·고 전 학년에 AI 및 소프트웨어(SW) 교육을 확대하고, 모든 학생이 디지털 소양을 갖추도록 정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다소 다르다. “시간은 늘었지만, 학생 수준차가 너무 크다”, “블록코딩만으로는 실생활 문제 해결과 연결이 안 된다”, “코딩 문법에 막혀 창의적인 시도를 못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AI 보편교육이 ‘AI 사용법 익히기’ 수준에 머물 위험이 크다. AI 보편교육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학생 모두가 디지털 소양을 갖추고, AI 시대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학생들의 수준 차이가 크고, 블록코딩으로는 실생활 문제 해결과의 연결이 부족하며, 코딩 문법 학습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창의적인 시도가 제한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소프트파워가 개발한 ‘스마트메이커 AI+’는 국산 교육용 노코드 플랫폼으로서, 순수 한글 기반에 완전 노코드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프로그래밍 문법 학습 없이도 앱, 웹, AI 콘텐츠를 직접 제작할 수 있으며, ChatGPT, Gemini,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 등 다양한 AI 서비스와도 연동된다. 교과 프로젝트에 즉시 적용 가능한 것이 큰 강점이다. 이미 전국 72개 대학과 1,300여 개 초·중·고교에서 스마트메이커 AI+를 활용하고 있다. 정규 수업뿐 아니라 자유학기제, 창의융합 프로젝트, 방과 후 수업 등 다양한 교육 활동에 적용되며, 교사 연수 역시 2~3일이면 충분해 프로그래밍 비전공 교사도 바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현장에서의 적용 방안은 명확하다. 정규 수업에 통합하고 자유학기제와 정보 과목 실습에 활용한다. 방과 후 활동과 동아리 운영에 투입하며, AI·데이터 활용 프로젝트에도 적극 적용한다. 교육청 주관 공모전과 캠프 프로그램과도 연계할 수 있다. 기대 효과도 크다. 학생들 간 수업 격차를 해소하고,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한다. 실생활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산출물을 제작하며, 교사의 수업 부담을 줄인다. 예측 불가능한 오류나 문법 문제 없이 수업을 운영할 수 있어, 농산어촌과 소규모 학교에서도 동일한 품질의 AI 교육을 구현할 수 있다. AI 보편교육은 단순한 도구 사용법 교육이 아니다. 학생이 문제를 정의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해법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과정이다. 노코드 솔루션은 이러한 교육 철학을 실제 학교 현장에서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교육청과 학교가 이를 적극 도입하고, 교사 연수와 커리큘럼 개발에 연계한다면 AI 보편교육은 선언적 정책이 아닌 현장 혁신으로 완성될 것이다. ▣ ㈜소프트파워 김수랑 대표 ◇ 現 ㈜소프트파워 대표이사 ◇ SW창의교육연구소 소장 ◇ 슬기로운 코딩 교육 위원장 ◇ 미래부 노코드 기반의 앱만드는 강의 초빙교수 ◇ 삼성전자, 하나카드, 포스코 등 대기업 임직원 대상 DX(Digital Tranceformation) 강의 ◇ 카이스트, 서울대대학원, 연세대 등 다수 대학에 노코드 기반의 앱만들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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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2
  • [기고] 왜?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하고 종속적인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오늘 아침에도 내 발걸음은 텃밭을 향한다. 몸은 걷기를 바라고 눈을 텃밭의 실태를 보고자 한다. 그래서 아침 시작을 이렇게 하는 것을 나의 ‘계율’로 삼고 지킨다. 기후 변화가 심하다는 말만으로는 폭염과 폭우의 깊고 큰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타들어 가는 식물의 모습이 폭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고, 산사태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의 복구 모습과 씻겨 내려간 농작물의 모습을 보고, 자식 같은 모습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농민들의 한숨에서 대통령과 지도자, 한 가정의 가장 마음과 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천재지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험난한 일을 자식에게는 이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논밭을 팔아서까지 자녀들을 유학시겼던 것이리라. 흰 와이셔츠에 번지르르한 양복, 파리도 낙상할 정도의 눈부신 구두를 입은 자식의 모습을 그리며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정성도 중요하지만 천재지변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는 하늘 농사를 시키고 싶지 않았던 조부모님, 부모님 마음에 목이 맨다. 눈물이 맺힌다. 조부모님, 부모님의 뜻은 공부도 부모님이 농사일을 하는 것처럼,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대응을 하고, 상황에 따라 조치를 달리하는 삶의 원칙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다가, 책상만을 잡고 사는 삶에서 지금부터 조금씩 세상일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사는 삶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야 공부의 원칙을 깨닫는다. 모든 이론은 현장에서 시작한다.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부모님, 조부모님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요즈음 뉴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지도자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정치가를 만난 듯하여 내가 우주의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새롭게 역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정치가가 아닐까? 이런 정치가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이런 정치인을 내 시대에 보고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한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바꿀 수 있고, 삶을 바꾸는 것은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길을 내는 것이다. 어려운 경제와 민생,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파고 속에서 국익을 구현하고, 경제와 민생을 다시 일으키고 국민의 평안한 삶을 중심에 두는 길이어야 한다. 앞으로 정치가 국민 속으로, 현장 속으로,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시선이 높이가 높지 않고, 함량의 크기가 작고, 사람의 두께가 굵지 않고, 깊이가 깊지 않으면, 권력의 정점에 이루기 위해서 온갖 권력을 동원하여 사생결단으로 투쟁하고, 상대방을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에만 의지한다. 그것이 소위 적대적 공존이다. 적대적 공존의 폐해는 항상 상대를 제거하려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갈등을 키우는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한다. 요즘 우리 정치인 중에는 나라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이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국회의원 자리만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평안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만이 최고의 길이다. 그래서 대정부 질문의 날은 다음 선거를 위한 사생결단의 날이다. 지역 구민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선명성만 부각하고, 논리는 없고, 성깔이 묻어나는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녹음기 질문을 한다. 문장은 반복되면 각인이 더 잘된다. 그래서 노래도 가사를 반복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고, 대신 자신이 스스로 성공했으며,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정신 승리’인 ‘내로남불’, ‘부정적 사고’ 등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길을 간다. 이것이 아Q들이 걷는 실패의 길이다. ‘하고 싶은 공부’와 ‘해야 하는 공부’가 있으면 둘이 충돌하나요? 하고 싶은 것이 강렬하면 그것을 할 때 다가오는 지루함이나 조급함은 디 극복할 수 있다. 체력을 기르고 싶으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한계의 수고를 견뎌내야 하는 것과 같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 하는 일은 감내가 된다. 반대로 해야 하는 것만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없으면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먼저다. 그래서 자기를 궁금해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묻는 태도 있는 상태에서 하는 공부가 좋은 공부다. 그것도 없이 그냥 지식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꿈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꿈은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자신을 궁금해하는 물음 던지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는 최고 권력자만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이르러 권력을 누리려는 자만 있었다. 거기에 이르러 국민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할까 하는 꿈이 없었다.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의 꿈은 없다. 백성을 위해서, 국력을 기르기 위한 일은 내가 임명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대통령을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당선된 뒤로부터는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일은 수석들에게 맡기고, 개나 끌고 다니고, 좋은 안주 찾아, 좋은 술 찾아, 아첨하는 친구 찾아 비교하고 비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다음에서 다음으로 꿈을 꾸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꿈 교육이 교육에서 일어져야 꿈을 꾸는 지도자,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행복한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꿈은 새로운 질서를 찾아 건너고 건너가는 자인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자는 ‘어떠한 역사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꿈을 꾸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나쁜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좋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이제는 훌륭한 사람을 훌륭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어야 훌륭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경우 주요한 사안에 대해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그게 좋은가 나쁜가 같은 기준으로 문제를 판단한다. 전쟁에 대해서도 그렇다. ‘전쟁은 나쁘니까 무조건 피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전쟁이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나요.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전쟁에 관한 온갖 얘기가 오고 가는데, 그 수준이 너무 저열하고 천박해요. 전쟁에 반대하면 ‘종북’이고 찬성하면 ‘전쟁광’이고, 이제는 이런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지금까지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전쟁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알게 되면 좀 더 깊고, 넓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국무회의를 국가 경영의 토론 장소로 만들고, 국가 경영의 최고 결정 과정을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고, 책상에서 만든 국민 정책이 국민들에게 현장 변화를 가져오는 정치를 위해서, 장관이 자신의 정책을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듣고 수정하는 이런 정책을 펴고 국민에게 알려주는 政治家, 이제까지 보았는가? 보았으면 나에게 말씀해 주소. 대통령은 무엇이 되고,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조금만 겸손해도 우러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은 다 직업을 살지 않고 꿈을 살았다. 공자가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위리(委吏)나 가축을 관리하는 승전리(乘田吏)가 되기도 했지만, 공무원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위키백과는 다산 정약용을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 과학자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문신, 저술가, 시인,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산의 꿈은 “나의 낡은 나라를 새 롭게 하겠다(新我之舊邦)”는 것이었다. 이제는 국민들이 답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쓰신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는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런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다. 이미 짜인 판을 벗어나 새로운 판을 짜고, 남이 세운 목표나 모범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목표와 모범이 될 수 있는 나라. 새로운 국무회의 진행, 통치는 남이 하던 것을 ‘따라 하는’ 정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배 두드리고 행복해하는 ‘요순 시대’를 꿈꿔볼까 하는 고민 속에서 싹이 튼다. 우리나라가 선진 국가가 아직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따라 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이유다. 선진국이 되려고 하면 ‘따라 하기’에서 ‘먼저 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생각이 앞서면 앞선 문명을 이루고, 앞선 문명을 이루면 앞선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제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현재 교육이 생각을 키우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떤 인재를 기를 것인가?’ ‘인재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인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늘 자신에게 묻는 사람이 교육의 책임자가 되는 시대를 꿈꾼다. 생각이 물건을 만들고, 제도를 만든다. 하이데거가 ‘인생은 비교와 잡담 속에 망한다.’고 했다. 비교는 나를 잃어버리는 거고, 잡담은 이미 있는 내용을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가며 시간을 보내는 거다. 비교와 잡담을 멈추고 자신을 궁금해하는 기본을 묻는 시간을 많이 갖는 교육, 내가 열리고 가정이 열리고, 나라가 열리고. 미래가 열린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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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05
  • [기고] 아시나요? '아무거나, 아무 말 대잔치'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친구들과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 식당으로 향하면서 한 친구가 ‘뭘 먹을래?’ ‘오늘은 내가 쏜다.’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다시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뭐, 먹을 거야?’ 귀찮다는 듯이 ‘아무거나 먹어.’라고 한 친구가 말하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무거나 먹자’라고 합창을 한다. 우리 민족은 ‘獨唱’은 부끄러워서 하지 않으려고 하고, ‘合唱’은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올림픽 축구에서 하는 ‘떼창’이 세계 축구인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k-culture’로 피어나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사람으로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욕과 식욕이 발동되거나 실현될 때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안주, ‘아무거나’를 아시나요? 이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재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반응이 직접적으로 바로 나타난다.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런 반응은 주어진 상황을 자세하게 살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으면 좋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게 귀찮다는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하는 데에는 힘이 들고, 힘이 드니까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생각은 네가 하고, 나는 그저 따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삶을 보고 따라 사는 것도 의미가 있다. 태어나서 많은 말 중에서 ‘책 읽어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지 않는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많이 회자되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데 하지 않으니까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말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서도 한다. 어느 한쪽 면만을 보려 하는 사람은 반쪽 세상을 보는 것이다.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困辱을 치르기도 한다. 상대방 말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말을 모르면 ‘적대적 공존’만 가능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잘 읽어야 한다. 하늘도 사람도 잘 읽어야 한다. 국가 경영자는 국민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면 국민들이 사용하는 말과 문자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나무를 우리는 죽(竹; 대 죽)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대’라는 말은 무슨 말이고, 죽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며, 자녀를 낳을 때, 대문에 왜 ‘새끼’를 두르는지? 장례식 때, 상주들은 왜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새끼’를 두르는지를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겨레가 어떤 가치관으로 말과 문자를 만들었는지를 이해하고, 민족 공동체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말로는 민심에 부응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서 당선이 되면 민심 따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뻔뻔하게 구는 것은 왜일까? 당선되기까지 한 말은 ‘아무 말 대 잔치’ 대회에서 ‘아무거나’ 하는 그런 구태의 모습은 아닐까? 국가의 기둥은 국방과 조세이며, 운영 중심축은 정치와 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정치’가 생겨나고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정치’가 횡횡한다. 교육은 ‘어떤 사람을 키울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은 신뢰를 잃은 지가 오래며, 교육의 정치화로 ‘교육’에 전념하는 지도자보다는,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표’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치기’에 전심전력하는 교육 행정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문해력 신장 연수’ 한두 시간 하고 사진 찍었다고 문해력이 신장되는가? ‘체험 학습’ 한 번 했다고 체험 학습 가기 전과 후가 달라졌는가? 교육은 나라의 뿌리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의 재목으로 자라는 것이다. 지식이 무엇이고 인재란 무엇인지 개념 정의가 학생들의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한, 아무리 ‘창의성’을 강조하는 연수를 한다 해도 공염불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요즘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사실과는 상관없이 내 편이니까,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내 자리를 위해서, 자기의 잘남을 과시하기 위해, 내 마음대로 질러버리는 것이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질이고 품격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물론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국가의 정체성,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 등을 생각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 국민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만이 유능하고 자질 있고 교양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한 자리인가 하는 답답함이 든다. 우리 청소년들과 나라를 위해서는 국민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는 국민의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 이제는 국가적인 인재가 국회로 모이는 제도를 생각할 때다. 국민들의 높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든 제도라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 편’인가에 따라 말하는 내용과 태도가 천양지차다. 요즘 국회의원들의 말에 대한 인식은 진짜로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 전국 대회를 시청하는 것 같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국회의원들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수신(修身)의 첫 번째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몸을 닦는가? 말을 담고 있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말을 들을 때 몸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愛(사랑 애)’라는 글자의 음가는 ‘애’다. ‘아낀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또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고, ‘절약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 말은 자신만의 가치에 집착해서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지나치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말을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이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야 후환이 없다. 요즘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결점을 밝히는 것을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흑심을 감추는 교묘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 태도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왜 저렇게 말을 하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태도를 갖추어야 세계의 주도 국가가 될 수 있다. 주위에서 ‘좋아’,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너는 안 돼’ 등의 말을 많이 본다. 생각이 없는 사람의 자기표현일 뿐이다. ‘남의 말 따라하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이 말은 철저히 인간 편에서 한 말이다. 강산은 어제도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변화를 겪는다. 생각도 변한다.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물건, 제도, 철학은 생각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제도는 물건이 생산되어 흐르는 길을 만든다. 그 제도는 생각의 결과다. 공동체의 ‘문제’와 ‘불편함’을 볼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그 문제와 불편함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와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이 인재고 지도자다. 인재는 현재의 다음 단계를 꿈꾸고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다. 『道德經』 제5장에 “말이 많으면 금방 한계에 봉착한다. 중을 지키는 것이 제일이다.”(多言數窮, 不如守中)가 나오는데, 말(言)은 하나의 체계, 하나의 내용으로 지속된다. 즉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있는 말’만 내뿜어질 뿐, 말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다른 내용을 동시에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전체적인 국면을 말로는 포착할 수가 없고, 그런 의미에서 말은 제한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은 얼른 한계를 드러내고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이 모두 빠진 말도 자신이 모두 들어 있는 말도 없다. 말은 자신의 한쪽 면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쉼 없이 읽는다. 책도 읽고, 사람도 읽고, 하늘도 읽고, 식물도 읽고, 동물도 읽는다. 즉 책을 읽지 않더라도 자기와 마주치는 모든 세계와 사건을 읽고 또 읽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읽기’다. ‘오늘 뭐 할까?’,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하고 자신을 읽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학(學)’은 ‘지(知)’여야 하지 않을까? 『論語』「學而」편 제1장, 16장, 그리고 제20편인 「堯曰」편을 보면, ‘知’ 자가 여러 번 나오는데, ‘안다는 것’은 내 안에 담아두려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삶에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論語』를 20편으로 저술한 것도 『周易』20번째의 괘가 風地觀인 것도, ‘천하는 물론 우리가 대하는 사람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백성들의 삶이 어떤 줄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잘 보이는 곳에서 ‘보는 것’ 그것이 觀의 첫 번째 의미이지만, ‘본다.’는 것은 잘 보이기 위한 것이므로 ‘보이다.’라는 수동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호상적 봄이다. 그래서 ‘본다.’는 말은 ‘읽는다.’는 말을 전제한다. 그래는 ‘안다(知)’는 것은 본 것을 끊임없이 살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지식인에게 중요한 요소는 곰곰이 살피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살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思惟)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 사유(思惟)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타고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확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경탄’이라 했다.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찌하면 내게 진정 나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일’이다 라고 했다. 데카르트, 소크라테스, 타고르, 몽테뉴가 한국에 와서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그래서 지금도 나훈아는 ‘테스 형’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생각 없이 무조건 따르겠다는 사회적 현상을 절절하게 표현한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나 보다. 인생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즉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펼쳐나가는 과정이지 않는가?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 남이 생각한 대로 살겠다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는 한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한국인이 생겨날 때부터 있었던 ‘아무거나’는 왜 변하지 않을까? 인문적 통찰이란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그 조짐을 알기 위해 옛날부터 ‘점’을 쳤던 것이다. 말은 ‘말’이다. 즉 ‘끝’을 말한다. 말을 잘하면 끝이 좋고, 말을 잘 못하면 ‘끝’이다.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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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기고] 時中? ‘만물은 각자 자신의 시간을 산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어떠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요즘 나를 맴돈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일 것이다. 뭔가 인생을 정리할 때인가?라는. 요즘 폭염으로 만물이 고통을 호소한다. 집 근처 텃밭에 생각이 미쳤다. 식물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식물은 움직일 수도 없으니 안타까웠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텃밭의 크기가 작아서 관정 시설도 없다. 이 식물에게 생명수를 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수레에 물통을 싣고 냇가로 가고 오기를 6회를 했다. 옛날 같았으면 ‘왜 이런 고생을 하지?’라고 했을 것은 같은데, 타 들어가는 식물이 나에게 ‘時中을 아는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옛날에 어른들이 하는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단다.’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후회된 일 중의 하나가 나는 ‘교원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다. 교재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교재를 문자적으로만 익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삶과 결부되어서 숙성되지 못한 채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기만 했던 것 같다. 특히 우리말의 기원과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단에 섰던 것이 너무나 아쉽다. 더 나아가 漢字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 없이 교단에 섰던 것이 후회스럽고, 나와 함께 했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 부끄러움이 앞선다. 나만 ‘때’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제자들에게도 ‘때’가 있는데, ‘때’를 모르고 ‘때’를 가르친 후회가 엄습한다. 유학의 4대 경서중 하나인 중용(中庸)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용은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꽂힐 때의 적중(的中)과 같이 딱 들어맞음을 의미하는 중(中)과, 떳떳함을 의미하는 용(庸)의 조합으로, 모든 일에 떳떳하게 들어맞는 진리를 뜻한다. 그리고 이 같은 중용의 도(道)를 원리와 상황 등 때에 맞춰 알맞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을 시중(時中)이라 한다. 초등학생 시절, 모내기 철이 되면 농부들이 자신의 논에 먼저 물을 대기 위해 크게 싸움박질하는 것을 많이 봤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왜 싸움을 하지? 말로 해야지,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만 했었다. 이제 퇴직을 하고 농사를 짓다 보니, 벼농사는 日照量이 벼 생육과 수확량에 비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역시 ‘때에 맞게 배워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孔子의 好學 정신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실감이 난다. 품종에 따라 씨뿌리고 김매고 거두고 저장하는 시기도 다 다르다. 중용 제20장에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일야(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고,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알게 되는데 마침내 알았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라는 의미다. 공자는 어느 유형에 속할까요? 술이편에 답이 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자왈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라는 것이다. 공자는 15세에 천명을 궁구(窮究)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여 50세에 천명을 깨달았습니다. 時習은 時中이어야 한다. 시중은 타이밍(Timing)과 가장 가깝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말이나 행위도 타이밍을 놓치면 아무런 뜻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빨라진 시대에 그때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임(Time) 자체보다 타이밍(Timing)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결국 시중이란 영혼의 민감성이요 정신의 순발력이기에,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지혜이다. 시중은 유학 실천 방법이다. 이는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한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대목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선비는 고정된 틀에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항시 겸손한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심오한 학문과 원리를 터득했다 해도 말과 행동이 때에 맞춰 적절히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머릿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살다 간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시간을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비교에 빠지고, 다른 사람이 조금만 잘 나가도, 다른 사람이 조금만 앞서도 속이 터지고, 상대를 비난하는 데 모든 것을 건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앞선 것이 생기면 우쭐대고 집안 자랑, 동문 자랑 등에 우쭐한다. 동물을 보면 막 태어나서 걷는 송아지도 있고, 1년이 다 되어야 걷는 인간도 있다. 老子 『道德經』 8장에 나오는 말이다. ‘動善時’, ‘動善時’라는 말은 때에 맞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청명이 되면 논밭을 갈고 곡우가 되면 씨앗을 뿌려야 된다. 이때에는 군사를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모두 때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보자. 자신의 계절이 지나면 그대로 뒤로 하고 다음의 길, 다음의 때로 간다. 자신의 열매를 뒤로 하고 그저 또 다른 길을 갈 뿐이다. 꽃피는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인지 각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가 보다. 그래서 老子는 인간의 길을 자연의 운행 원칙에서 찾았을까? 봄이 봄 자신의 성취와 정당성에 취해 여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봄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그래서 쓰임을 받는 시간도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일찍 취업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직장을 잡는다. 늦공부 터졌다는 말도 한다. 모든 식물이 같은 시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햇빛을 더 받기 위한 싸움과 질투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모든 것에 ‘자기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사회와 만물의 삶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습관은 時中의 결과다. 시간의 계획적이고 지속적 활용은 습관을 만든다. 습관은 바로 그 사람이다. <타이탄의 도구들>의 저자 팀 페리스는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에 관한 책을 썼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정리를 정성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큰 차이를 만드는 지점이다.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작은 행동이지만 매일매일 실행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어 긍정적인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좋은 습관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아는 것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생각이 많으면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다. 습관은 처음에는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해서 몸에 배어야 한다. 습관은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마음이 서면 뭐가 되었든 따지지 말고 바로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첫 시작이 어렵다. 거창하고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할 수 있다. ‘습(習)’은 배운 것을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행동과 실천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 ‘습’이다. ‘관(慣)’은 생각에 의해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한번 해봤다고 해서 '관'이 되지 않는다. 자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일어나자마자 하는 행동, 책을 읽는 행동, 운동, 글쓰기, 말하는 태도, 인사하는 것 등 인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 '관'이다. 習慣은 時中의 결과다. 지도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상황에 맞게 적절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화를 내야 할 때 적절히 화를 내거나 슬퍼해야 할 때 적절히 슬퍼할 줄 아는 것처럼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한다. 상황(時)은 늘 변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가장 균형 잡힌 최적의 황금률(中)을 찾아내는 것이 시중(時中)이다. 여기서 중(中)은 정해진 실체가 아니다(中無定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이다(隨時而在). 옛 어른들은 ‘사람은 때(時)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서야 할 때가 있고, 물러나야 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은 늘 때를 알아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를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왜 바탕이 다른가?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는 말한다. 行己有恥를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출발이고 時中의 결과다. 자기 시간의 적절한 활용이 답이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時中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사람’이,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사람’이 태어난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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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기고] 질문하는 교실, 세계를 향한 첫걸음
    [교육연합신문=이재웅 기고]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 좌동초등학교가 최근 세계적 교육과정인 국제 바칼로레아(IB) 초등 프로그램(PYP) 인증을 공식 획득하며, 대한민국 공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인증은 단순한 학교의 성취를 넘어, 공립학교에서도 세계 수준의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좌동초는 지난 2년간 관심학교 및 후보학교 과정을 거쳐 교사 연수, 커리큘럼 재구성, 학부모 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학교 전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실천해 왔다. IB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글로벌 교육과정으로, 창의적 사고와 탐구 중심 학습, 다문화 감수성을 핵심 가치로 한다. 그간 일부에서는 ‘귀족 교육’으로 여겨졌지만, 좌동초의 도전은 공교육 내에서도 IB가 실현 가능함을 입증한 첫 사례로 주목받는다. 좌동초 교실에서는 "왜요?"라는 학생의 질문이 허용되고, 토론과 사고가 중심이 되는 수업 환경이 조성되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습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학부모 또한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학부모는 “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IB는 단지 수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학교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는 교사 연수의 정례화, 학부모 대상 설명회, 서포터즈 활동 등을 통해 가정과 함께하는 교육공동체 모델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좌동초의 성과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탐구 중심 수업을 설계·운영할 수 있는 교사의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 둘째, 연수비, 평가비용, 자료 개발 등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창의성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IB 교육과 입시 중심의 현실 간 괴리를 해소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좌동초의 사례는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벽임을 보여준다. 좌동초의 IB 인증은 한 학교의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학교들이 새로운 교육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신호탄이다. 학생의 질문을 소중히 여기는 교사, 변화를 지지하는 학부모,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청의 정책적 지원이 조화를 이룬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정답을 말하는 교육에서 질문을 기르는 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교육에서 사고를 키우는 교육으로, 경쟁 중심의 구조에서 공동체 속 배움으로 나아가는 전환점. 좌동초의 도전과 성취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미래를 밝히는 이정표다. 이 작은 교실에서 시작된 “왜요?”라는 질문이 더 많은 학교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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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5-07-11
  • [기고] 특수학교 개교, 그때의 목발과 여정 - 김미영 부산한솔학교 초대 교장
    [교육연합신문=편집국] 해마다 6월이 오면, 제 마음속엔 하나의 장면이 조용히 떠오른다. 병원 침대 위에서 바라보던 흐린 창밖 풍경과 제 다리에 채워져 있던 석고 붕대. 그리고 그 이후의 믿기 어려운 여정. 그 모든 시작은 바로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학교, 부산한솔학교의 개교에서 비롯됐다. 2013년 봄, 명지에 문을 연 부산한솔학교는 유치원부터 전공과정까지 갖춘 특수학교였다. 그러나 그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설계도에 그려진 건물 하나였을지 모르나, 저에겐 기적을 바느질하듯 하나하나 꿰매며 만든,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었다. 개교 두 달 전, 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골절했고, 침대에 누운 채로 ‘초대 교장’ 임명장을 받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병실을 박차고 일어나 목발을 짚었다.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었고, 그 누군가는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저는 아침 6시면 목발을 짚고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건물은 아직 덜 지어졌고, 담장 하나에도 수많은 허가와 설득이 필요했다. 교직원은 모이지 않았고, 책상 하나도 조달이 늦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교실마다 들어설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입학할 예정인 110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할 80명의 교직원. 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웠다. 책상 위에 앉을 작은 손, 복도 끝에서 휠체어를 밀고 올 엄마의 손길, 첫인사를 건네며 눈을 피하던 학생의 수줍음까지… 그 모든 것이 제게는 기도로, 사명으로, 힘으로 다가왔다. 개교식 날, 아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스크린에 상영된 준비 과정 영상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이 무너졌다. 흘린 땀이 다 의미 있었음을, 그들이 제게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육이란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것임을. 그것이 목발을 짚고라도 제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스스로 작아지는 날도 많다. 그러나 그 시절, 목발을 짚고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의 공기와 아이들의 눈동자 속 따뜻한 희망이 여전히 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그때의 목발과 여정은 제게 가르쳐주었다. ‘누군가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두려운 일인가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교사들과 아이들이 또 다른 시작의 문 앞에 서 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다시 용기를 내고, 누군가는 함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그날의 교장으로서, 저는 오늘도 그날의 기억을 품은 채,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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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기자수첩] 왜, 아이들은 함께 떠났을까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6월 어느 새벽,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세 명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누군가는 먼저 아팠고, 누군가는 그 아픔에 함께 울었고, 결국, 세 아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서가 남겨졌다는 소식은 이들이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왜 아이들은 함께였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이들은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아이들은 여러 번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지각이 잦아졌을지도 모른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용한 구조 요청은 어른들의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혔다. 혹은, 누군가 보았지만 그 사실은 ‘공유’되지 않았다. 학교는 너무 바빴다. 수업, 평가, 행정, 민원에 쫓기느라 정작 아이들의 ‘마음’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도,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교사 간 소통은 왜 단절되었는가. 이제 교육 현장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복잡한 곳이 됐다. 한 반의 담임이 아이의 모든 신호를 감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교사들 간에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서로 신뢰하고 함께 바라본다면, 그 조각은 하나의 '위험 신호'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도 ‘말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 학생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나 혼자 감당하고 있진 않은가”라는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교무실. 이제 학교는 교사들을 위한 회복 공동체로도 거듭나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관심’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딱 한 명의 따뜻한 관심만 있었어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요즘 많이 지쳐 보여”,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가 된다. 관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하굣길 발걸음 하나에 스며든 감정의 진심. 우리의 ‘조금 더 보는 눈’, ‘조금 더 듣는 귀’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대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행정, 정치권, 언론 모두의 역할이 있다. 학교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과,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학부모는 결과보다 아이의 감정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행정은 예산과 제도로 관계를 뒷받침해야 한다. 언론은 자극보다 성찰을, 소문보다 구조를 보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경쟁이 아니라 관계야”,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몰랐다”는 말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 어떤 죽음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떠났다는 이 사실은, 사회 전체가 무너진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경고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잊히듯 보도될 것이고, 또 다른 부모가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건 그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 교육의 민낯이며, 우리 사회의 현재이며, 그리고 바로 ‘내일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는 말만의 애도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행동,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 마음을 보듬는 학교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더 이상 죽음을 ‘함께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진짜 ‘대책’이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애도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책임이 남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이 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도이자, 가장 큰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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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기고] 질문과 수고하는 습관, 행복한 삶을 만든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모든 수양과 수련은 필요한 수고를 일부러 찾아서 하는 일들이다.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나아지는 일은 없다. 孔子와 플라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孔子나 플라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자세와 시선(생각)의 높이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자세와 시선의 높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세히 살피고, 깊이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바람직한 것’, ‘해야 하는 것’, ‘좋은 것’에는 ‘내’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발성이나 자율성이 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통치술(지식)을 팔러 여기저기 제일 열심히 돌아다닌 사람이 공자였다. 공자가 한 그런 활동을 ‘周遊天下’라고 한다. 공자는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원하고 전쟁 종식을 위한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전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14년 동안의 周遊天下를 할 수 있었던 저력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지시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몰입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오직 몰입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경험만이 사람을 생기 있게 만드는 보약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먼저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었다면, ‘너 생각은 어때?’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치지도 않고 쉼도 없다. 이것은 자기 쾌락, 자기만족, 자기 희열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자유롭고 주체적이면서 창의적이며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한 여정의 길인 것이다. 길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예측 가능해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그 신뢰가 자신을 길을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모습이 사람이다. 『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非吾罪也, 人之罪也. 내 죄가 아니다. 사람들의 죄다.” 사람들은 입장이 같으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입장이 서로 다르면 반대한다. 생각이 같으면 옳다 하고,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옳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개는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으려 하고, 옳은 소리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을 때만 긍정적으로 동조한다. 즉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생각에 갇혀서 듣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악마화’하고 자신들은 ‘천사화’ 하는 사태에 이른다. 깊이 듣기는 힘이 든다. 『장자(잡편)』第27篇 寓言(우언)에 나오는 말이다. “是爲耆艾, 年先矣, 而無經緯本末以期年耆者, 是非先也.” 옛날에는 어른들이 한 말은 대개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年先矣’, 즉 ‘나이가 앞서면서도,’ ‘無經緯本末’, 즉 말이나 태도에 ‘질서가 없고 앞뒤가 안 맞으면서’ 나이가 많은 것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是非先也’ 즉 ‘앞선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끔 보면 어른이 나이만 믿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모범을 보이더라도, 말로만 하면 꼰대가 되니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있다.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젊은 사람한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모범을 보이려면 힘이 많이 들고 어렵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어른이 많지 않다. 모범을 보이는 것을 ‘德’이 있다고 한다. 장자는 어른이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젊은 사람보다 공공질서를 잘 지키고, 독서를 더 많이 하고, 신용을 더 잘 지키고, 더 예의를 잘 지키고, 더 단정하고 의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살았으니까. ‘不言則齊’, ‘不言’ 하면 세상의 흐름과 가지런히 잘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 『道德經』에도 나온다. ‘不言之敎’. 여기서 ‘不言’은 ‘특정한 의미로 정해서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딱 정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無言’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言’은 특정한 의미를 담아서 하는 말이다. 이는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과 관계된다. 소유적 태도라고 한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존재적 태도, 무소유’라고 한다. 그래야 삶의 질과 양을 높일 수 있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 경우가 있는가? 처음에는 아주 힘들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색칠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과정은 지난하고 생각보다 많은 장애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세상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생도 인위적으로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면서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면 지치지 않고 생기 있는 삶이 된다. 가장 단순한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삶이다. 반복은 사람에게 고통과 번뇌와 고달픔을 준다. 하지만 반복은 높은 수준의 達觀과 達道를 가져다 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반복하게 되어 있는 일이다. 오늘부터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고 기록하고 뚝심으로 밀고 나간다면 행복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즉, 自快, 자기만족, 자기 희열의 순간순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서 하루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싫증 내지 않고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천지자연의 섭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당신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꾸준히 그렇게 일하는 당신을 보고 사랑하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해보라.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당신의 삶은 쉬워진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당신은 ‘피리 부는 사나이’로 태어날 수도 있다. 성공과 행복은 어려운 길로 들어서서 쉬운 길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인생의 선순환이다. 어려운 길을 택하라. 시간이 지나면 루틴이 생기고 그 어렵던 길도 편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즐거움은 지치지 않는 생명수가 되고, 즐거움은 자신이 바라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혼자 즐기고 혼자 행복할 수 없다. 그건 잠깐의 행복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것처럼 “전체로부터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 떼어놓고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전체를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전체를 위해 성장하고 성장을 통해 얻은 것을 전체에게 계속 나눠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성장과 나눔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자신만의 성장으로 행복할 수 없고, 전체를 위한 나눔이 없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왜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조금 젊었으면’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시간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부터 당장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도 하기 싫을 때는 핑계부터 찾는다. 진즉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부질없는 짓을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변명과 핑계를 대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대처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다그친다. 이 세상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일 뿐이기 때문이다. ‘듀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 중 45%는 결정이 아니라 습관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습관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의 힘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습관은 쉽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면서부터 천부적으로 습관이 재능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바꾸기 위해서 쉬지 않고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 훈련에 힘쓰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는 자투리 시간도 모으면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반복적으로 습관(루틴)을 훈련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게 되면 새로운 나 자신이 만들어지게 된다.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잘 다스려지지 않은 나라로 가라.”는 말은,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안주하지 말고, 혼란스러운 나라에 가서 바로잡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바로잡는 선비의 자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말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안회는 스승에게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말했다. 최진석 교수의 글을 종합해 끝맺음을 한다.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 한 나라가 돌아가려면 정치와 교육, 두 톱니바퀴가 필요하다. 어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를 하는가다. 정치하는 사람을 공급해 주는 게 교육이니, 교육은 나라를 움직이는 근본 문제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상황은 우리나라 교육이 만들어 낸 결과다. 우리나라 사람은 질문이 아니라 대답에 익숙하게 적응됐다. 과거형 교육이란 얘기다. 이미 있는 지식을 가지고 누가 빨리,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느냐만 따진다. 과거를 사는 사회가 된 거다. 미래에 좋은 것은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어떨 때 제일 행복한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몸에 밸 때, 종속국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묻는 것은 힘이 드나 열매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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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6
  • [기고] 책 읽기,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경전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얻은 감동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해 감동이 삶으로 체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었다고 문구를 외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읽은 감동이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부과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동력이다. 경전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전이 있기에 내 삶이 풍요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성현의 삶이 내 삶의 연료가 되어 내가 거기에 스며들고 섞이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경전을 읽고 느낀 감동이 그 사람의 삶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전의 내용이 그 사람의 길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자신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에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사람의 생각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한다. 인생이란 어쩌면 생각의 구체화다. 누군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고, 그것이 방향타가 되어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방식이 서서히 바뀌던 경험, 인생의 몇몇 지점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니 내가 변하는 느낌을 받고, 그들과의 만남 뒤에 성장이 있었음을 이제야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은 흙을 사용해도 그것을 만지는 도공의 손길에 따라 도자기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은 천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남의 상대를 바꾼다. 인생에서 만난 누군가가 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다. 누구는 책이기도 하고 연극이기도 하고 영화, 자연이기도 하다. ‘지적 능력’이란? 인간이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면 사람은 조그마한 것도 자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겸손은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해 본다는 느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도 더 커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도 많아진다. 용기, 절제, 생각도 지적 능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를 ‘지적 인내’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베풀었다면, 보답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내면이 단단해지고 두께가 굵어져서 지적으로 성장하고 시선이 높아진다. 겸손함이 내공으로 쌓인 사람에게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는 선배들이나 책으로부터 좋은 내용에 감동도 하고, 다짐도 한다. 하지만 아는 것으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앎을 실천함으로써 지혜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선현들의 책이나 말씀은 실천행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씁쓸하다! 성현들의 말씀을 숙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대한 간절한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동력으로 전개될 때만이 활기찬 삶을 만들고, 지치지 않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고 지치지 않을 수 있으며 행복한 인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일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삶은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된다. 자신이 규칙을 만들어서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규칙이 자신의 삶이 될 때까지. 인생이란?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서 삶은 즐거운 과정이다. 어떨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욕됨, 치욕, 비난도 견뎌내야 한다. 공자도, 붓다도, 예수도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욕됨, 치욕, 비난을 이기고 나면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되고 싶은 자기가 분명할 때가 견디는 힘을 길러준다. 수고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솔선수범을 먼저 하는 습관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만 생각도 어제와 다르게 잉태된다. 한 사람이 겪어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일반화시켜 적용하거나 반복해서 겪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 스토리나 부자가 된 성취경험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인지를 깨달을 때 나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혀서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격변하는 시기일수록 수많은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저마다의 주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평가한다. 그 이론들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스며들어 있어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이론 구축을 시작했으며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절박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개념과 이론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축한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평생을 남들의 사유에 물들어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각자의 관점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고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남의 생각에 물들어 내 생각을 다르게 잉태시킬 수 없다. 깊은 주체적 사고 없는 경험이나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로 깨닫는 각성은 맹목일 수 있다. 좌우명이나 인생론에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인생 이론에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근거,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적 통찰력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근본적 원리나 이치가 담겨 있다. 결국 자기만의 성장 이론은 경험의 텃밭에서 경전을 일궈내는 가운데 독서와 인간관계로 나의 경험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탄생되는 이론이다. 자기만의 이론적 깊이와 넓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여기에 독서와 인간관계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 근거나 행동 규범을 갖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보장 담론을 사회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가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공자도 이런 욕망과 유혹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을 논어(語)에서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불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생기는 삶의 지혜다. 이제 나를 흔드는 뿌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인 `나의 욕망'에 있다는 점이 불혹 이전과 구분된다. 저자의 생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쓰는 데 활용했던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부딪힌 현실의 문제, 즉 병을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 그 고뇌와 태도를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실천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시종일관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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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생명존중칼럼]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한국의 자살률 관련 질문을 했으며, 지난 10일에도 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약집을 통해 자살 예방을 위해 향후 5년간 초·중등 전 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실시해 자살 위험군 학생에 대해선 전문 기관과 연계해 치료가 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청소년 상담 1388 통합 콜센터’를 신설해 24시간 전화상담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라고 해 미래를 밝게 열어줬다. 한국의 자살예방은 복지부가 2004년 시작된, 자살예방기본계획이 5차(2023~2027)까지 시행해 왔으나, 매번 목표 자살률은 달성되지 못했다. 알다시피 2024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2명으로 OECD 국가 평균(11.1명)의 2배 수준이다. 2004년 이래 줄곧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자살은 우리나라 10~30대 사망 원인 1위이며, 40~50대에서는 사망 원인 2위다. 특히 자해·자살 환자 중 10~20대 비율이 10년 새 15.4%포인트 늘어날 정도로 증가세가 가파르다.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총리실에 둔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대통령실에 자살대책위원회 신설 운영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자살예방센터 운영과 종교계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그간 종교계는 생명존중문화 확산을 위해 개별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으나 자살문제는 매우 소극적이다. 2019년 6월 18일 한국종교인연대는 한국이 경제개발도상국가(OECD)중 1위인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어나고자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라고 반성과 참회로 ‘생명살리기, 자살예방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했다. 이후 다행히 종교계는 자살예방 인식개선 사업을 종교인연대 소속 7대 종단(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협의회)이 ‘생명존중 문화확산 생명살리기 교육사업’을 전개, 고무적이나 아직도 자살률 낮추는 교육·홍보사업은 미흡하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 예산 등이 확충되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종교계는 선교, 포교, 교화에 우선하기보다는 설교나 설법, 강론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앞장서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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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기자수첩] 사각지대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청주시 이자 지원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교육연합신문=유기성 기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며 청주 지역 자영업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이를 지원하겠다며 청주시가 내놓은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대출 이자 지원 사업'이 정작 가장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신청 자격 요건이다. 이자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세 체납, 지방세 체납, 건강보험료 및 4대 보험료 미납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장사가 안 되는데, 뭘 먼저 내야 합니까" 청주시 상당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최모 씨(55)는 올해 초 은행 대출로 월세와 인건비를 겨우 맞췄다. 하지만 3개월 전부터 건강보험료가 밀리기 시작했다. "2년째 매출은 줄어드는데 월세는 그대로예요. 알바도 못 쓰고, 새벽부터 밤까지 부부가 나와 일하는데도 매달 적자입니다. 카드 돌려막기 하다가 4대 보험료, 세금까지 손댈 수 없었어요. 대출 이자도 감당이 안 돼서 청주시 지원을 신청하려 했더니 건강보험료 체납으로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너무 허탈했어요." "이자 감면만 돼도 숨통이 트일 텐데" 청원구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이모 씨(39)도 비슷한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한동안 버티다 시설을 리모델링하며 대출을 받았고, 신용등급이 6등급까지 떨어졌다. 이자 부담을 덜 수 있을까 싶어 시청의 이자 지원 정책을 찾아봤지만, 지방세 체납 1건이 발목을 잡았다. “아파트 관리비도 밀리고 있는데 세금이 우선일 수가 없죠. 이런 상황에서 자격 요건이 너무 까다로우면 정책 의미가 없지 않나요? 정작 필요한 사람은 아예 문턱에도 못 가는 구조예요.” "진짜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 “현장에선 지원 조건이 오히려 '낙인효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체납이 있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순서를 정한 사람입니다. 행정기관이 실질적 상황을 반영한 융통성을 가져야 진짜 도움이 됩니다.” 실제 경기 불황으로 인해 자영업자의 70% 이상이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체납으로 인해 각종 금융지원에서 배제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특히, 신용등급이 낮거나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일수록 체납 가능성이 높아, '저신용·저소득'을 위한 제도가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청주시 관계자는 "성실 납세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기준"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정책의 실효성을 따져볼 때 자격 조건을 완화하거나, 체납자에 대해서도 일시적 사유가 입증되면 예외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청주시뿐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유사 정책들도 대부분 동일한 한계를 보이고 있어, 전국 단위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원이 절실한 이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현실.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다. 전국 자영업자 절반 이상이 체납 위험으로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2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자영업자의 약 52.3%가 최근 1년 내 건강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중소기업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소상공인 금융접근성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8.6%가 "대출은 필요하지만 체납 등으로 지원받기 어렵다"고 했고, 이 중 40% 이상이 “정책금융의 자격 요건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답했다. 청주시 소상공인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청주시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 청주시 내 사업자등록 소상공인 약 6만여 명 중 1만 3천여 명(약 21.7%)이 국세·지방세 체납이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까지 포함하면 전체 소상공인의 30~35% 이상이 지원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현재 경기침체로 하루 매출이 100만원 하던 매출이 10~20만원으로 줄어 투잡, 쓰리잡을 해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그렇다고 직원 인건비를 줄일 수도 없고, 매달 생활비도 되지 않는 현실에 점포 폐업을 고민하는 최모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뇌리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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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기고] 제대로 된 꿈 교육! 왜 해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요즘 사회 병폐 중의 하나는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와 나라 발전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미리 생각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일, 즉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일에 너무 게으르다는 것이다. 걱정은 위대한 말이다. 나와 공동체를 지키고 하나 되는 가치관과 행복한 삶을 만드는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自問自答, 자기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설명, 결정하는 태도가 먼저다. 걱정과 관련, 공자께서는 『繫辭傳』5-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망할 것이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그 존재를 보호하는 것이다. 危者, 安其位者也; 亡者, 保其存者也.” 이것은 자신과 나라, 사회를 지키는 양면의 지혜, 즉 실력과 임기응변할 수 있는 유능함과 순발력 있는 자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시대정신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걱정이네.’ 이런 말을 듣기도 참 어렵다. 특히 大人의 걱정은 공동체에서는 중요하다. 갈등이나 분열, 증오 나아가 혐오가 빈번한 사회에 대해, ‘나 몰라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는 등 하나 되는 공동체 가치관과 어긋나는 사람이 늘어감에도 말이다. 사회나 국가, 지역 의 문제에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여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언 중 최고의 명언이 있다. 모피우스가 니오에게 하는 말인데,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라는 명언이 있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고 회자되는 문제와 병폐가 ‘문해력’이라고들 한다. 문해력 신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문해력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문해력 신장 연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언론에 게재하는 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그런데 교육 기관에서는 지금도 전시행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다. ‘지적 게으름’의 표본이다. ‘본질에는 멀고 표는 가깝다.’는 국민들의 시각을 외면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 결과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 길을 아는 것과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며 그 길을 걷는 것은 하늘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습관이 절실하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誠이다. 성이란 자신의 소명을 알고 책임감 있게 하나하나 실천하는 일이다. 왜 성실하면 다 된다. 우주가 성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성실한 언어생활을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체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실의 일차적 의미는 말의 성실함에 있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려면 한자와 한글이 만나야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아는 것은 생각이고, 걷는 것은 행동이다. 우리는 알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행동을 했을 때만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때 가서야 안다고 할 수 있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겠다고 한다. 그런데 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왜 힘들다고 말하느냐?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이다. 왜 못할 정도로 힘이 드느냐? 힘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인위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자연적이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인위적인 세상에 맞추려면 우리는 인위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 하나는 문명은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연이란 우리가 인위성을 발휘하고 발휘하고 발휘하고 또 발휘하다가 원래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숙명처럼 가지고 가야 하는 ‘우환(憂患) 의식’에 대하여 맹자는 ‘종신지우(終身之憂)’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내 몸 다할 때까지 종신토록 잊지 말아야 할 숙명 같은 지도자의 근심이다. 그 근심은 개인의 근심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혼신을 다하는 근심 즉, 평생 이웃과 함께 고민하는 우환 의식이 군자의 덕목이며, 내 안위와 출세만 생각하는 일조지환(한나절 짧은 고민)은 소인의 근심이라고 맹자는 말한다. 과연 ‘大人之憂’를 따를 것인가?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학문이자 지도자를 키우는 큰 가르침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면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인류가 인간의 고통 문제를 감정적으로 외면하지 않고 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유학의 문제의식이다. 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규범인 義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교적 현자들의 삶의 전통이 곳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림들의 시대정신은 유교적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실천을 통해서 유교의 참뜻을 알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유교는 존재의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은 무엇이고,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누가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본다. 그 몸의 움직임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래서 身을 ‘몸 신’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신’이란 ‘신다’, ‘담다’의 뜻이다. 그 행동이 마음을 담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는 뜻이다. ‘마음’은 ‘하늘’의 상대적 의미다. 몸이란 하늘을 닮아야 하고, 하늘을 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삶의 격, 삶의 효율성, 삶의 생산성, 삶의 진실성은 생각에 의존한다. ‘나는 지금도 헤어진 첫사랑을 생각한다.’ ‘지금도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은 잡념이다. 생각은 일단 목적이 분명하고 지속적이며 일정 의식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감각과 본능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수고가 많이 들고 어렵다. 따라서 수고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생각하는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일은 그 사람이 부지런한지 아닌지도 알게 해 준다. 생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일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 제도, 철학까지도 문제와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다. 생각한다는 것은 불편함, 문제를 느끼거나 발견해서 고쳐가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없다. 우리는 간혹 남의 일에 박수치면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論語』를 읽으면 자기가 공자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道德經』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노자가 된 사람처럼 생각한다. 다이어트를 고민하면 자신이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가끔 우리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보고 듣는데, 어쩌면 책 속에는 저자의 길이 있는 것이지, 그 길이 독자의 길은 아닌 거다. 자신의 길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길을 닦고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삶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존재다. 인간의 생존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장치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이 문명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만드는 일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지식을 수입하고 수용하는 일에만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 생산보다는 지식 수입에 더 의존하고 있다. 지식 생산 국가는 선도 국가라고 한다. 종속 국가, 추격 국가, 전술 국가는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탐욕이 먼저고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 상황은 어렵다. 우리나라 전체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어서다. 우리나라가 꿈이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할 일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싸울 일밖에 없는 거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기자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꿈이 없어진 거다. 검사가 되겠다. 검사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지금 성장이 멈춘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나라도 성장을 멈추게 될 수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필리핀이 그 예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어떤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존재론적 문제다. 삶에서 효율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꿈, 판타지를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꿈으로 자기 현실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결정하는 삶이다. 모든 일은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성장의 해법이다. 예를 들어, ‘꿈이 뭐에요?’ 하고 물으면 ‘기자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우리나라가 말의 질서가 무너져서 사회 분열, 갈등,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하자. ‘아! 말의 질서를 바로 한번 세워보겠다.’ ‘말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좋고 유용하겠다.’ 하는 것이 꿈이고 포부다. 왜 배우는가? 자신에게 갖춰지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갖춰지지 않은 것을 갖추기 위해서다. 왜 갖추는가? 생존의 질과 양을 높이기 위함이다. 매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남에게 의존하는 양이 줄어든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주도적이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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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기고] 코로나19와 눈높이 안전교육이란
    [교육연합신문=서동욱 기고] 최근 다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 각국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방역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것은 마스크와 손소독제였다. 마스크는 많은 이들의 호흡기를 지켜냈으며 손소독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사멸시켰다. 하지만 손소독제는 꽤나 많은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버튼은 공용 부분이니 많은 사람들이 누르게 되고 이로 인해 엘리베이터 안에 손소독제 비치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 아파트의 관리사무소에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손소독제를 엘리베이터의 손잡이 부근에 고정시켜두었다. 이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그 손소독제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통상 엘리베이터의 손잡이는 중간 부분 즉 성인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다. 이 위치가 허리를 덜 굽혀도 되니 효율성 측면에서는 좋은 위치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높이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눈높이다. 손소독제는 에탄올과 이소프로판올이 주성분이며 눈에 들어갈 경우 각막화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날 아파트에 탑승한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다. 그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손 소독의 필요성이 떠오른 듯 보였다. 손소독제로 다가가 그 학생은 버튼을 눌렀는데 그 순간 손소독제 입구에서 에탄올이 그 아이의 눈으로 튀어들어갔다. 아이는 눈을 손으로 비비며 고통을 호소했고 보호자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 과연 관리사무소에서 선택한 그 손소독제의 높이가 합당한 높이인가. 효율성 측면에서는 합당한 높이지만 안전 측면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높이라고 봐야 한다. 이 사건은 눈높이 안전교육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성인의 입장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예상하고 대처해야 한다. 나는 교실에서 손소독제는 가급적 구석 쪽에 비치하여 사방으로 튀는 것을 막고 높이는 아이들 기준 무릎 높이 정도로 낮춘다. 그리고 손소독제를 사용할 때 학생들이 반드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누르도록 지도한다. 손소독제가 튀어도 손안에서 튀도록 해야 옆의 학생들 눈으로 손소독제가 들어가는 화상사고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높이 안전교육은 우리의 시각을 학생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효율성과 안전을 맞바꿀 수는 없다. 효율성의 반대말은 비효율성이지만 안전의 반대말은 위험 또는 부상 또는 생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서는 선진국이지만 아직도 안전분야에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눈높이 안전교육이 일상화된 그런 나라가 되어 안전에서도 당당하게 선진국이라고 외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원해 본다. ▣ 서동욱 ◇ 초등학교 교사 ◇ 미국 화재폭발조사관(CFEI) ◇ 소방안전교육사 및 소방학교 외래강사 ◇ 한국119청소년단 지도교사 ◇ 소방안전교육사 국민안전교육실무 교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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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5
  • [기자수첩] 중도층이 움직이면 세상이 바뀐다…21대 대선 ‘결정권’은 유권자에
    [교육연합신문=유기성 기자] 21대 대선이 단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국은 치열하게 요동치고 있고, 여야 모두 총력전에 돌입했다. 각 진영의 지지층 결집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결정적인 열쇠는 바로 중도층 유권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 SBS-입소스의 2차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중도 성향이라고 밝힌 유권자는 전체의 37%로, 보수(33%)나 진보(23%)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유권자 3명 중 1명은 '중도'로 이념 양극화가 극심한 현재 정치 지형에서 중도층의 무게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중간에서 중심을 잡는 표, 그 힘이 이번 선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중도층 유권자들이 새 대통령에게 가장 기대하는 국정과제는 중도층이 가장 원하는 건 ‘경제’와 ‘통합’ 단연 ‘경제 살리기’(45%)와 ‘국민통합 및 정치갈등 해소’(32%)다. 진영 논리나 이념보다 민생과 상식, 실용을 우선하는 민심이 중도층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표로 표현될 때만 실현된다. 전체 응답자의 89%가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밝혔지만, 중도층은 여전히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 과거 대선에서도 중도층의 투표율은 낮은 경향을 보였고, 그 결과는 때로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한 표 차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접전 구도에서 유권자의 표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 정치에 실망했든, 모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든, 기권은 더 나은 대안을 만들지 않는다. 중도층의 침묵은 결국 극단의 목소리만을 남기고 만다. 변화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이번 대선은 이념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지도자를 고르는 기회다. 침묵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중도층의 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민심의 중간값이며, 대한민국의 균형을 잡는 소중한 무게추다. 어느 한 쪽의 승리가 아닌, 모두를 위한 중심을 선택하라. 유권자의 한 표가 대한민국의 중심을 바로 세운다 투표는 권리가 아닌 책임이며, 국가의 주인은 투표하는 국민이다. 투표하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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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1
  • [기고] 문제는 사람이야, 바보야!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간은 성실하게 노력해야만 먹고 산다. 특히 농경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일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인생은 막대한 노력의 양에 비례한다. 공자는 말한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한국 사람들처럼 好學의 사상이 몸에 밴 사람들은 세계에서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물으면, 어떻게든 가르쳐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물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방법을 찾는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없는 한국인만의 특징이다. 끌어당김의 따뜻함이다. 이런 문화야말로 선도 국가로 나가는 바탕이다. 세계가 한국을 찾는 이유다. 이것이 하늘 사상이고 천지인적 사고다. 공동체적 정신은 천지인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먼저 있어야 세 번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살리는 정신이다. 이것이 ‘살이’고 ‘살림’이고 ‘살림살이’다. 影(그림자 영)자에서 보듯이 그림자는 해빛이 있고 햇빛을 가리는 사물이 있으면 저절로 생겨난다. 한글과 한자도 음양과 천지인적 사고를 설계도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말을 제대로 알려면 한자와 한글이 서로 만나야 한다. 우리말과 글은 우주 질서를 표현하고 있다. 우주 질서는 절제를 요구한다. 현대를 절제를 상실한 시대라고 말한다. 무절제는 혼란과 갈등을 수반하게 되고 증폭시킬 뿐이다. 그 상황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생각하는 전략적이고 선진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 말과 행동을 절제하는 교육이 필요한 때다. 무슨 결정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태도를 습관화해야 한다. ‘이게 나한테 무엇이지?’ ‘내가 원하는 것인지?’ 등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이 부여한 일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전략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먼저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많다는 생각이 미치도록 말과 행동, 태도를 지녀야 한다. 천지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외감이 몸에 배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함부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자제력을 길러야 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찬禮讚이 사람의 길인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길에 나침반이 될 것이다. 장자는 『大宗師』편에서 “有眞人而後有眞知”라는 말을 한다. 참된 지식은 그 사람이 참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을 나타내는 ‘人(사람 인)’ 자는 ‘사람의 형상’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므로 사람의 내면적 가치는 ‘인’이라는 음가에 달려 있다. 사람을 ‘인’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을 해와 같은 뿌리로 여긴다는 뜻이다. 해는 세상 만물의 ‘중심’이므로 사람이 곧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待其人而後行(中庸, 27-4). 모든 것이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하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인재를 키워놓지 않으면 모든 조직은 파멸한다. 그것은 인간세의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법칙이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을 키우지 않고 조직만을 키우려 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孝라는 말도 가치의 계승과 전통이라는 말의 다름 아니다. 사람은 말귀를 알아먹을 때, 집안 어른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그 사람의 좌우명이 되는 경우가 많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사람됨의 기저가 된다. 그래서 부모님을 보면 자녀를 알 수 있고,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난 것 같다. 제 어머니는 6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지금도 제가 가는 길에 등불이 되었다. 제가 어렸을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다. ‘사람이 그러면 쓴다냐?’ ‘그러면 못 써야!’ 이 말은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까지 제 말과 행동의 지침으로 작동되었다. 한 사람이 개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공동체에 대한 태도로 직결되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몰인정, 무시, 일말의 폭력성을 노정하는 사람은 그 어떤 전문성이나 능력 등을 가졌는지와는 상관없이 한겨레의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어록이라고 하는 ‘논어’의 ‘안연 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실하게 하고, 백성들이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뭘 버려야 합니까(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라고 질문을 하자, 공자는 ‘군비’라고 답한다. 자공이 또 다시 “남은 둘 중에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오리까”라고 묻자, 공자는 “양식을 버려라.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었으나,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세(經世)에 있어서 핵심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실상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책과 경영에서 ‘사람’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 프레드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들고 나오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지만, 기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국가와 기업은 물론 개인마저도 무서울 정도로 무한 경쟁체제에 놓이면서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다. 흔히들 '역지사지'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라.’는 뜻과 다름 아니다. 많은 정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정책의 대상인 사람을 고려치 않고,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볼로냐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킹스 칼리지 런던 법학 명예교수인 신디 L. 스카흐(C.L. Skach)는 그의 저서 <하우 투 비어 시티즌, How to be a citizen>에서 성문화된 규칙 및 법질서의 존재가, 사람들이 규칙 없이 내던져지면 서로 죽이고 훔치는 야만인으로 되돌아갈 거라는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칙, 더 세목으로 들어가는 법의 제정으로 해결하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은 것은 시민들이 정치 엘리트와 사법 엘리트에게 더 의존함에 따라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스카흐는 의원내각제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바가 없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체제의 비교를, 훗날 스카흐 자신이 부정하면서 규칙·제도·체계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기대와 의지 자체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글자로 쓰인 규칙만 잘 준수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래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질문하는 법을 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카흐는 민주주의의 리더십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입헌주의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념을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키케로(고대 로마의 정치가)의 의무론에서 가져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류애와 동료에 대한 의무, 공감과 연민을 포함한 ‘태도’를 꼽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부정하고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며 시민성을 완전히 결여한 사람들이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벌어지는 참극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고 나면 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을 대하는 태도,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위시한 '시민성'의 여부를 지도자에 대한 평가의 제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기준에 완벽히 미달한 사람들이 아직 한국의 지도자에 남아있다. 이들을 축출하는 일부터 완수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더 나은 제도와 체제를 위한 논의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착각하는 CEO’라는 책이 있다. 경영 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 정책적 판단 오류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다양한 심리학 자료로 풀어내고 있는데,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은 ‘새로운 시스템과 제도를 아무리 많이 도입해도 그것이 뿌리내리는 토양(사람)이 비옥하지 않다면 의미 없는 시도’라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나 경영자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과 고집을 내려놓고 과연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슴과 귀를 열어 놓으라고 말하고 있다. 子思는 말한다:『中庸』 27-4에서 ‘故君子尊德性而道問’, 인간 존재의 당위성은 問學과 德性의 겸비에 있다. 인간은 물어서 배울 줄 알고 덕성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問學은 외부를 향한 묻고 배움이다. 묻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다. 덕성은 인간이 내면의 수양을 통해서 절제, 극기, 솔선수범, 불편감수, 불편자초 등 내면적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다. 학문만 있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아울러 덕성만 있고 학문이 없는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 배움과 덕성은 사람다움을 숙성시키는 토양이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보다는 ‘至誠無息’, ‘利見大人’, ‘天命之謂性’ 등 동양철학을 내면화하는 교육이 실천된다면 후학들의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예전처럼 기승을 부리지는 않고 있지만, 여전히 치열한 경쟁사회인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구호는 이것이 아닐까? “문제는 사람이야, 바보야.” 한자한글연구원장 고전연구가․ 교육학박사 전 강진교육장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 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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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2
  • [생명존중칼럼] 경제생활문제로 인한 자살 크게 늘어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생명존중시민회의(상임대표 김대선)는 3월 31일 국내외 통계자료들을 분석해 2025년 자살대책 팩트시트(factsheet)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3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 3978명으로 1일 평균 자살 사망자 수는 38.3명이며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는 27.3명, 전년 대비 2.2명(8.5%) 증가했다(통계청, 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이 증가율은 자살자 수가 가장 많았던 2011년 이래 2018년 9.5% 증가에 이어 지난 10년 사이에 두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20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24.1명으로 OECD 국가 42개국 가운데 압도적 1위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OECD 자살률 통계비교(2020년 기준)에서 인구 10만 명당 15명 이상의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이어 리투아니아(20.3명), 헝가리(16.1명), 슬로베니아(15.7명), 일본(15.4명), 에스토니아(15.1명) 등 6개 나라다(OECD DATA, Suicide rates). OECD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그래프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021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5.8명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많다. 그린란드(59.6명), 가이아나(31.3명), 리투아니아(27.9명)에 이어서 4번째이다. 러시아(24.1명), 수리남(23.6명)이 뒤를 잇는다. 경찰청의 자살 원인 분석에 따르면 경제생활 문제로 인한 자살은 2023년 3656명으로, 자살 원인의 25.9%를 차지한다.(2023 경찰통계연보, 경찰청) 경제생활 문제로 인한 자살은 2021년(3190명, 24.2%), 2022년(2868명, 22.5%)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10대, 20대, 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40대, 50대 사망원인 2위가 자살이다. 2023년 기준 50대 사망원인의 11.1%, 40대 사망원인의 23.4%, 30대 사망원인의 40.2%, 20대 사망원인의 52.7%, 10대 사망원인의 46.1%를 자살이 차지한다.(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통계청) 2023년 도·특별자치도의 인구 10만 명당 연령표준화 자살자 수는 충남 29.4명, 충북 28.6명, 제주 27.3명 순으로 많고, 특별시·광역시는 울산 28.3명, 인천 24.6명, 대구 24.4명 순으로 많다.(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통계청) 1만 8449가구 3만 5304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사회조사 결과,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사람은 4.8%에 달하는데, 이것은 2년 전보다 0.9% 감소한 것이다. 여자가 5.9%로 남자(3.7%)보다 자살 충동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충동의 이유는 신체ㆍ정신적 질환, 우울감, 장애(37.2%), 경제적 어려움(25.8%), 직장문제(11.2%), 외로움·고독(9.0%), 가정불화(8.0%) 순이다(2024년 사회조사 결과, 통계청). 자살 충동 이유로 10대는 학교성적과 진학문제, 20~30대 및 50대 이상은 질환․우울감․장애, 40대는 경제적 어려움이 주된 이유이다. 전국의 800개 학교 5만 8285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청소년 자살 시도율은 2.8%로 중학생 3.1%, 고등학생 2.4%이며 남학생 2.2%, 여학생 3.3%에 달한다. 자살 시도율은 2018년 3.1%, 2019년 3.0%, 2020년 2.0%로 낮아졌다가 다시 꾸준히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제20차 청소년건강행태조사 통계, 질병관리청) 같은 조사에서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또는 ‘많이’ 느끼는 여학생은 49.9%, 남학생 35.2%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인지율은 지난 10년간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3년 여학생 44.2%, 남학생 30.8% 대비 5% 이상 높아졌다. 지난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는 우울감 경험률은 27.7%(여학생 32.5%, 남학생 23.1%)로 이것도 10년간 증가 경향을 보였다. 전국 1만 9000가구 3만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 낙심하거나 우울해서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경우,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비중은 79.8%로 2년 전보다 0.2%p 증가했다. 사회적 관계망이 취약한 사람이 20%를 상회한다.(2023 사회조사, 통계청)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지난 1년 동안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0.6%로 2년 전 대비 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했던 자원봉사 경험률이 약간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년 동안 기부 경험이 있는 사람은 23.7%로, 2년 전 대비 2.1% 증가했다. 향후 기부 의사가 있는 사람은 38.8%로, 2년 전 대비 1.6% 증가했다.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 단체활동 참여율, 기부 경험률 등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던 이들 사회자본 관련 항목이 증가 추세로 돌아선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반전이다. 하지만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이 10년 전 대비 절반 수준이고, 기부 경험률 현저하게 낮아진 것은 사회적 자본의 복원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은 경제적 압박, 학업 스트레스, 정신 건강 치료 시 낙인에 대한 과도한 우려, 미디어의 영향, 문화적 역동성, 법 제도의 미비 등 여러 요인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생명존중시민회의는 자살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신건강 차원의 접근이 아닌, 국가 및 지역사회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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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0
  • [기고] ‘높은 시민 의식’과 ‘무형의 가치 교육’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지금 보여주는 정치, 보여주는 교육에 더 치중하는 감이 없지 않다. 자연의 성실함과 인간의 성실함을 일치시켜 나가는 정치, 교육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철학적 기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유형의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와 교육 지도자보다는 무형의 변화, 즉 형이하학적 변화보다는 형이상학적 변화를 추구하는 지도자를 뽑아서 나라와 교육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 모든 국가의 질서는 무형의 질서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 무형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성誠이다. 즉 우주적 질서와 인간의 법칙을 일치시켜 나가는 것이 성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야말로 우주적 법칙대로 산 사람들이다. 삶의 의미는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산다고 하는 것이 괴롭게 된다. 자사子思는 삶에서 성誠을 강조하는데, 천지天地의 성실함에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지도자를 기르는 것이다. 지도자에게는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관, 철학, 윤리 등의 무형의 자산이 필요하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지도성을 발휘하는 학생에게는 수시 모집 대상의 우선권이 주어진다. 지도성은 삶의 마디마디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지도성은 성誠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공동체적共同體的이다. 자신만을 앞세우기보다는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솔선수범을 말한다. 천지天地의 성실함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다. 그 가치는 선한 영향력이다. 선한 영향력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줄 버팀목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야 한다. 四書 중의 하나인 大學에서도 교육은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스승의 자질 중의 자질은 ‘선한 영향력’이다. 국민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5. 4월 4일(금) 11시 22분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고 선고한 뒤, 김장하 선생을 함께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많은 사람들이 관련 글을 올리고 있다. 문형배 대행이 2019년 4월 국회 청문회 때 했던 말이 이번에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저는 경남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하게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간직한 저의 초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에서 머슴살이하다가 18살에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한약방을 열어서 생활하셨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른 김장하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 선생님의 선한 마음과 실천으로 많은 꽃과 열매를 맺었듯이 나도 세상에 그런 일을 하다 죽고 싶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기다려 주고 지켜줄 수 있는 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망도 갖게 되었다.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가 부르고 살맛이 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재를 키우는 것이 교육에 있고, 그 교육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김장하 선생이 계시기에 문형배 재판관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문형배 재판관의 선한 영향력은 수많은 선인을 낳게 할 씨앗이다. 그래서 子思는 ‘기법其法’ 아니라 ‘기인其人’을 강조한 것이다. 저의 조부모님과 부모님도 ‘착하게 살아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닿도록 하셨다.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착하게 살아라.’는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라.’는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뜻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인생이란? 성誠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성지誠之’호의 기차를 타고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성誠’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사회 대개혁'의 시작은 학교여야 한다. 학교가 지닌 모든 교육적 자산을 명문대 진학에만 쏟아부었던 관행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더 많은 '윤석열'을 길러내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표여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갖추고 공공선을 행하는 성숙하고 올곧은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본령이 되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집권과 파국은 우리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학벌과 벼슬을 기준 삼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윤 대통령의 파면은 오로지 명문대 진학에 애면글면해 온 학교 교육의 방향타를 돌리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미래의 '윤석열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학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孔子는 말한다. 국민을 다스리는 데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강제로 하거나 법에 의해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부작용만 만들게 된다. 위정자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솔선수범한다면 국민도 언젠가는 따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상명하복이 유교의 본질이 아니다. 물이 위로부터 아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윗사람의 귀감이 되는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스며들게 해야 한다. 사회의 지도자나 어른들의 덕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방법이다. 집안에서 효에 대해 모범을 보이는 부모가 있다면 자녀들도 분명히 효도를 배우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실제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윗사람이 모범적인 언행을 하는 것보다 좋은 교육은 없다.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동문이 많은 학교가 명문”이다.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공부는 문해력이다. ‘치治’의 ‘다스리다’라는 말은 ‘하늘이 와서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며, 하늘이 하는 일은 하늘이 낸 만물을 살린다는 뜻이다. ‘治(다스릴 치)’자는 ‘氵’와 ‘台’로 되어 있으며 ‘台’는 ‘별 태’, ‘나 이’라는 의미로, 속뜻은 ‘하늘이 내려오다’, ‘하늘에서 내려오다.’의 뜻으로 쓰이고, 그리고 ‘氵’는 ‘물 수’, ‘삼 수’라고 하며 속뜻은 ‘작용’을 나타낸다. ‘치治’는 하늘의 마음으로 백성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 하라는 하늘의 명령, ‘천명天命’이다. 한겨레가 세계에서 빼어난 정신문화를 가졌다는 것은 한마디로 웅변하는 말이 ‘살림’이고 ‘홍익弘益’이다. 갈등이 만연한 혼탁한 오늘의 세계에 인류를 살릴 한줄기 샘물과도 같은 말이 ‘살림’이고 ‘홍익弘益’이다. 우리는 그런 영웅들의 후예다. 자부심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살림과 홍익을 외쳐야 한다. 우리 민족을 자랑하면 국수주의國粹主義라고 폄훼하며 백안시白眼視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는 국수國粹의 뜻도 모르고 우리의 ‘살림살이’ 정신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살림살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인류를 위한 살림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자신 있게 외치고 펼쳐 나가자. 오늘의 정치에서 ‘治’자의 의미만 회복해도 서로를 살림의 대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니 궁극적으로 인류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의 바탕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에서 ‘治(다스릴 치)’로 외우기만 하는 공부에서, ‘治’자는 ‘다스리다’를 왜 ‘치’라고 할까를 생각하는 방법으로, ‘다스리다’와 ‘치’를 알아야 ‘治’자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즉 우리말인 ‘다스리다.’와 ‘치’를 알아야 ‘治’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때의 실패나 고뇌는 미래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 과정이다. 이 시기에 여러 직접적인 경험과 책이나 매체와 같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앞서간 현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키워야 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깨치고 그 확고함에서 성공을 만드는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남이 옳다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는 옳을 수 있으나 내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당장에 이익이 되는 것도 자신의 원칙이나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살펴서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수도 없이 살펴봐야 한다. 또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의 문제를 짚어줄 수 있는 믿을만한 친구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속 깊은 곳에 확고하게 내재화된 좋은 가치 기준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서 필요에 따라 작동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들을 지탱해 줄 자신만의 원칙과 기준, 본질적인 가치를 내면화해야 한다. 당장에 좋아 보이는 유행과 같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고뇌를 통해 자기만의 성공의 법칙을 완성해야 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잘 살펴보자. 미래에 바라는 것에 비춰 현재 당신 모습을 점검하라. 당신 삶에 필요한 정답이 되어 줄 것이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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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0
  • [기고] ‘바른 인성人性’, 天命과 교섭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막스 베버는 관료제에서 강조해야 할 요소로 ‘비인격성(impersonality)’을 제시했다.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는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판단, 연줄, 관계에 끄달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로지 그 자리에서, 그 직분에서 합리적으로 결단하고, 그 법질서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즉 비인격성이란 조직에서 업무를 행하는 경우 인간적인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행정을 수행하는 사람은 공공 서비스를 받는 당사자와 친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해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역이란 하늘의 뜻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고, 사람의 입장에서 하늘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易之所以天治人, 而非以人測天也).”라는 왕부지(王夫之, 1619년 ~ 1692년)의 역설은 막스 베버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오류가 많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더하여 “吉凶者, 貞勝者也. 天地道也, 貞觀者也(『繫辭傳』하편 1-2.)에서 말하는 것은, 길흉이라는 것은 바르게 극복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천지의 도는 바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길흉과 천명을 잘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천명天命과의 교섭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개선을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즉 하늘이 끊임없이 나에게 명하는 것을 듣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天命之謂性이라는 것이며, 性(성품 성)은=忄+生의 글자로 만물을 生하게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천명天命이고 사람의 본성이다. 그 본성을 회복하는 일에 우리는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되면 인성교육人性敎育이 말로만이 아니라 그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실천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천지天地와 성인聖人의 가슴을 만나야 한다. 그 가르침을 일용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모든 국민들이 이 계사전의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살기를 소망한다. 우리 청소년들도 하루 한 번 낭송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수능이 끝나면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이때 ‘사람의 길’, ‘사람의 정체성’ 등과 같은 시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 누군가 지방자치를 시작했는지는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때부터 교육감분들이 ‘교육’보다는 ‘표’로 눈길이 쏠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다시 최소한 교육감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 제 자리에 서고, 몸소 보여주는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른 교육을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날마다 이 문장을 암송하고 있다.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曰仁, 何以聚人曰財, 理財正辭, 禁民爲非曰義” 『繫辭傳 下篇』1-4. 천지는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大德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인의 위位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인민이야말로 국가의 근본이다. 인민의 마음이 모아지지 않으면 국가도 유지 안 되고 位도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국가의 재화와 관련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준엄한 하늘의 명령이다. 하늘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늘이 모두고, 전부다. 그래서 동양 사상, 그리고 한자와 한문의 설계도는 ‘하늘로부터’가 그 본연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 첫째는 理材, 국가의 부의 혜택이 공평하게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질서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 둘째는 正辭, 국가를 운영하는 자는 시와 비가 엄정해야 한다.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다. 그 언어를 바르게 써야 한다. 그 셋째는 禁民爲非, 백성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용인해서는 아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관권의 비리가 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법률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고, 도덕적인 목표를 향해 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처참하다. 너무 슬프다. ‘나는 누가 임명해 준 자리이니 임명권자의 입장을 지켜줘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 되어버렸고, 이 논리가 국가의 상부뿐만 아니라 하급 기관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논리가 우리나라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범람하고 있다고들 대놓고 말한다. 이러한 비정상의 상식을 국민의 상식으로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부정의를 정의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 순간에도 이해관계에만 귀를 기울일 것인가? ‘내 편, 네 편’만이 있고, 옳고 그름은 없다? 따지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임명했는가만이 중요한 사회가 돼버렸다. 인간은 땅을 걸으면서 생명을 다하는 존재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도울 김용옥 교수는 말한다. “윤석열의 계엄은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했다. 민중이 방심하면 단단하다고 여긴 민주주의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에 윤석열과 같은 독버섯이 생긴다는 것”을, 제주 4·3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소설 <순이 삼촌>을 쓴 작가 현기영 작가(84)는 이달 발간한 에세이 <사월에 부는 바람>(한길사)에서 한 말이다. 나는 ‘윤석열의 계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윤석열이 많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혹시 나도 ‘윤석열’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섭고 섬뜩하다. 나는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 이전부터 계속돼 온 기득권 세력, 정치적 이익 때문에 모인 이들이 그간은 도덕적 흠결로 인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가, 이제 ‘우리도 옳다’며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 불어온 이승만 전 대통령 우상화 현상 등이 잠복해 있던 극우가 모습을 드러낸 시초라 할 것이다. 다만 한강 등 작가 400여 명이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성명을 낸 문학계에서는 희망을 발견했다. “한강이 노벨상을 받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민주화의 문제, 사회 정의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와 제주를 다룬 두 작품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았다. 계엄령이 문학계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30 여성 등 젊은이들이 내란에 맞서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 모습에도 놀랐다. 기성세대로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겪은 사람으로서 현시대 젊은이들이 사회 현상에 대한 인식보다는 일상에 함몰돼 있다고 생각했던 면이 있었다. 계엄령 이후 바람처럼, 기적처럼 젊은이들이 나타난 모습을 보고 놀랍고 반가웠다. ‘내가 젊은 세대를 많이 오해했구나’ 자괴감까지 느꼈다. 아기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것은 아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다. 말을 빨리 배우는 아이도 있고 걸음마가 늦은 아이도 있다. 말이나 글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문화다. 다른 나라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인 말은 소용이 없다. 말이나 글이란 모르면 불편하다. 말을 잘한다거나 글을 잘 쓴다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이 어둔하고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다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왜 뜬금없이 다 아는 소리를 하느냐고? 다 아는 사실, 그걸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한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정말 그 ‘다 아는 사실이 통하는’ 세상일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좀 더 살기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말이 어렵지요? 상식적으로 얘기해 보자. 교육을 왜 받아야 할까요? 교육을 ‘사회화’ 혹은 ‘재사회화’라고도 한다. ‘사회화’란 사람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가치, 기술, 지식, 규범 들을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사회화를 통해 인간다운 품성과 자질을 획득해 나가며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화를 서울에서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광주나 부산에서 하면 덜 훌륭한 사람인가? 서울에 소재한 대학을 나오면 더 훌륭한 사람이고 부산이나 광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 덜 훌륭한 사람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그 사람의 외모나 성, 학교, 직업, 경제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 유능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훌륭한가 아닌가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완용이나 히틀러 같은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사람은 똑똑하기는 하겠지만 훌륭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될 사람을 SKY 출신이어야 하거나 변호사나 판검사를 지냈던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원칙과 기준이 없이 뒤틀린 가치관으로 보고 판단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공정과 상식, 정의를 내걸고 당선되지 않았는가? 공정과 상식,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어느 학교 출신인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까지 달라지는 현실을 어뗗게 생각하는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사람이 SKY에 합격하면 학교 정문이나 시내 곳곳에 “축 000 서울대학교 합격”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서 남과 더불어 오순도순 사는 것!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음양과 천지인적 사고다. 人性敎育, 天命을 아는 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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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기고] 학교에 ‘엔클리어(EnClear) 소화기’ 도입이 시급한 이유
    [교육연합신문=정용규 기고] 학교 교실은 이제 단순한 학습 공간을 넘어 다양한 전자기기가 밀집된 디지털 학습 환경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태블릿PC, 노트북, 전자칠판, 태블릿PC 충전함 등 다양한 기기가 수업에 활용되면서 학습의 효율성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전력 사용량 증가와 전기적 과부하로 인한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는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충전함에 20~30대의 태블릿PC가 동시에 충전되는 사례가 흔해지면서 전력 집중으로 인한 발열, 과충전, 배터리 폭발 등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교육시설안전원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발생한 학교 화재의 46.3%~51.4%가 전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디지털 학습 환경이 확대됨에 따라 전기적 위험 또한 커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태블릿PC와 노트북과 같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자기기는 충전 중 과열, 내부 단락, 충격 등에 의해 발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과충전으로 인한 배터리 폭발 사고가 자주 보고되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전자기기 과열로 인해 교실 내 연기가 발생하거나 소규모 화재가 일어난 사례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특히, 전자기기 사용이 증가하면서 충전 관련 사고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부산의 태블릿PC 충전함 화재, 서울에서 발생한 노트북 과열 화재와 다중 충전 케이블로 인한 사고 사례들은 모두 전자기기 사용이 증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전기적 안전관리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학교와 같은 공공 교육시설에서는 다수의 전자기기가 동시에 사용되는 환경이므로 전력 과부하 방지대책, 정기적인 점검, 적절한 소화장비 마련 등의 안전 조치가 필수적이다.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태블릿PC와 노트북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이 배터리는 과충전, 충격, 내부 단락 등의 이유로 발열 및 화재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특히,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고온은 유독성 가스와 함께 화재를 급속히 확산시킬 수 있어 밀집된 교실 환경에서 치명적일 수 있다. 현재 학교 교실에 배치된 분말소화기는 전기화재 진압에 적합하지 않다는 한계를 지닌다. 분말소화기는 화재 발생 시 불꽃을 진압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소화 후 남는 잔여물이 전자기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특히, 태블릿PC, 노트북, 전자칠판과 같은 정밀 전자기기에 분말이 침투하면 내부 회로가 부식되거나 기능이 저하될 위험이 크다. 반면, 비전도성 액체 소화약제를 사용하는 ‘엔클리어(EnClear) 소화기’는 전기화재에 특화된 솔루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소화기는 전기를 사용하는 환경에서도 감전 위험 없이 화재를 신속하게 진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액체 형태의 소화약제는 불꽃과 열을 효과적으로 냉각시켜 재발화를 방지하며, 분말소화기와 달리 소화 후 잔여물이 남지 않아 전자기기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장점이 있다. 특히,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화재는 일반적인 소화기로는 진압이 어렵지만, 엔클리어 소화기는 배터리 열폭주를 억제하고 불꽃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엔클리어 소화기는 학교 교실뿐만 아니라 전기차 충전소, 데이터센터, 연구실 등 다양한 전자기기 밀집 공간에서의 필수적인 화재 대응 장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디지털 학습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전자기기 화재 대응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고, 전자기기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도 화재를 안전하게 진압할 수 있는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의 도입이 시급한 이유다. 인천시교육청은 디지털 학습 환경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엔클리어 소화기를 시범 도입하였으며,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다. 특히, 감전 위험 없이 안전한 진압이 가능하다는 점과 소화 후 잔여물이 남지 않아 전자기기의 추가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이에 따라 추가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또한, 공항철도 역시 전동차 내 전기화재 발생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엔클리어 소화기를 도입하였다. 열차 내부는 밀폐된 공간으로 화재 발생 시 연기와 유독가스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어, 기존 분말소화기 사용이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다. 엔클리어 소화기의 배치는 승객 안전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전동차 내 정밀 전자기기를 보호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의 도입이 단순한 화재 진압 장비 보급을 넘어, 전자기기가 밀집된 환경에서의 안전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디지털 학습 환경의 확대는 교육의 혁신을 이끄는 중요한 변화이지만, 동시에 전기화재라는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함께 가져왔다.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디지털 교육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를 교실과 충전시설에 배치함으로써 전기화재 발생 시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기적인 전자기기 점검과 체계적인 화재 예방 교육을 병행하여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 위기 발생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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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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