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0(월)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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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진 능력을 ‘지적 능력’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면 조그마한 것도 과시하고 싶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겸손은 수준 높은 지적 능력임을 모두가 알지만 행하기가 그렇게 어렵다. 겸손한 사람이 겸손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성공할 확률도 커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될 확률도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능력’이라고 정의한 것일까? 


그래서 실천이 중요하다. 그것도 지속적인 실천이다. 앎을 실천하기는 항상 어렵다. 하지만, 앎은 실천을 거치며 크고 단단해진다.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 불신이 만연하게 된 것은 성현들의 말씀만 기억하고 말씀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기보다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덕이 있는 사람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근본적인 것은 실천이 다른 사람이 부과한 것이 아니라 자청한 것이어야 한다. 외부에서 부과된 것은 오래 할 수 없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는 실천을 자청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이야말로 사회의 병폐로 남는다. 실천은 반복해야 한다. 반복해야 넓어지고 차이가 생긴다. 인격적인 변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 달라졌네.’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인격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論語』를 공부하는데 선생마다 다 다른 해석을 내놓아 난감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누구의 『論語』가 진짜 『論語』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한다. 어디서 제대로 된 『論語』를 배울 수 있는지를 묻곤 한다. 『論語』를 찾아가는 규칙을 오래오래 지키면, 언젠가는 넓어지고 차이가 만들어져서 자신의 반복이 허락하는 언젠가에 진짜 『論語』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해준다. 말씀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지식이 나오고 지혜가 움트는 것이다. 앎이 실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行이지, 앎 자체가 아니다. 행하면 반드시 알게 되지만, 앎은 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어떤 특정한 관점, 이념, 창, 틀로 이 세계를 바라보거나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게 된다. 


『淮南子』의 「繆稱」편에 ‘信在言前也’라는 말이 있다. 지도자가 보통 사람들이 쓰는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도자가 위에서 지랄발광을 해도 백성이 콧방귀도 뀌지 않는 것은 그 지도자의 진정성과 정책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周易』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亢龍에게는 후회할 일만 남아 있다.” 믿음이 간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실천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山雷頤卦의 대상전은 말하고 있다. 山下有雷, 頤. 君子以愼言語, 節飮食. 군자는 이 괘의 형상을 본받아 입에서 나가는 언어를 신중히 하여 덕을 기르고,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절제하여 몸을 기른다. 입과 언어와 음식은 존재의 삼위일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는 채움에 관한 반추가 없다고 한다. 입안을 충실히 채우고 있는 자들이 그 채움에 관해 반추를 하지 않고, 한없이 먹으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나의 구실(口實)이 무엇인지? 내가 왜 먹고 있는지를 반성함이 없다는 것이다. 검찰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환경에 처하고 있다고 해도, 왜 권력을 휘둘러야 하는지에 대한 반추가 있어야 한다. 음식은 養生, 養形과 연계되어야 한다.

 

둘째로 ‘愼言語’의 미덕을 결하고 있다. 윤석열이 입을 열기만 하면 국민들은 불안해 한다. 너무도 ‘愼’을 모른다. 아니면 모른 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그가 또 어떤 사고를 칠까, 무슨 엉뚱한 약속을 할까, 이번에는 어떤 망언을 쏟아놓을까,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지도자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백성이 지도자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말은 養德, 養仁과 이어져야 한다.

  

經綸이란? 세상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다. 즉, 사유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水雷屯, 象曰, 雲雷, 屯. 君子以經綸).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로잡고 질서 지우는 것이며, 세상에 대한 학문이지 세상을 버리는 학문은 없다.’고 한 南冥 曺植의 강단과 기개가 그립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經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를 어떻게 짜들어 가느냐에 있다. 철학도 예술도 문학도 경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조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조화 방식을 배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愼獨이 전제되어야 한다. 愼獨은 자기 존재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과시, 분열이 아닌 조화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동양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의 명제도 공존과 조화에 두어야 한다.  


나아갈 때 나아가고 멈출 때를 알고 멈춰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학문이다. 人事를 통해서 天理를 논하지 않으면 그것은 天理가 아니다, 하학(下學)을 해서 상달(上達)하는 것이다(南冥 曺植). 과식(過食) 하나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매일 공부한다. 공부를 통해서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진실로 안다면, 그 앎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난다. 진실을 알아가면서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로 말미암아 달라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안다고 하지만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닐 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입으로는 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실로 알기는 매우 어렵다. 진실로 안다면 그 앎을 통해서 자신에게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論語』를 몇 번 읽었다고, 더 나아가 四書三經을 몇 번이나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공자의 말을 외우고 있을 뿐, 공자의 삶을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을 읽었다면 공자의 말씀이 그 사람의 언행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문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유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는 것이다. 言行으로 구체화 하는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앎은 진짜가 아니다. 앎이 지식으로 멈추지 않고, 내 삶과 자신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안타까운 점의 하나는 ‘德’, ‘丈人’ 등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낱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유덕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丈人을 찾고 모시는 문화,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립다. 자기가 아는 사람, 관계된 사람만 찾고 있다. 이는 갈등과 대립, 파벌만 만들 뿐이다. 먹이사슬처럼 얽혀만 가고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孔子는 말한다: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즘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어린이는 예찬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다. 방임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훈도(訓導)의 대상이다. “예법에 아이가 스스로 찾아와서 배운다는 말은 있어도, 선생이 아이에게 찾아가서 가르쳐준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禮問來學, 不聞往敎.)(『禮記』 「曲禮」). 어릴 때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교육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교육은 조임(규제)과 풀림의 조화다. 즉 리듬이 있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공동체의 윤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한다. 커서 가르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린이에게 해가 뜨고 지는 장면을 보게 하라.’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는 교육의 의미가 이제야 내 마음에 걸어 들어온다. 어린이를 교육시키겠다고 찾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교육을 받겠다고 찾아오도록 하는 세상,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周易』山水蒙卦).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왜 역사를 배워야만 하는가? 역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역사로부터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철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儒者들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책임이 있다. 이들이 잘해야 이 세계는 평온해지고 모든 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다. 철저하게 지식인의 책임을 묻는 큰 가르침이 儒敎라는 말이다. 하늘의 뜻이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소리라는 것을 철학화 한 것이 儒敎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깨달아서 천명을 구현해 가느냐 하는 것이 유교의 위대함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안다고 하면서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진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사람은 아는 것은 많은데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위대한 유학자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은 무지한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인간이 修身하는 儒學者의 모습이다. 儒學을 알지만 儒學의 맛을 아는 선비가 그립다. 大義를 향한 憂患 의식, 염려, 걱정에서 君子로 되어가는 긍정적 자기 변혁의 주체가 儒學者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안개 정국으로 세상이 온통 뿌옇다. 지천태 괘의 효사인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 추운 겨울이 가야지만 따듯한 봄이 오듯이, 돌아옴 없는 떠남 또한 있을 수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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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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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无首, 無我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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