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0(월)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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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처럼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 유학자는 공동체의 윤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유학은 ‘하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윤리이며, 한자와 한글의 제작 원리도 하늘을 기반으로 한다. 즉 ‘하늘’, ‘음양’, ‘천지인’ 사고를 근본으로 한다. 하늘처럼 만물을 살리는 ‘살림’ ‘살림살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나쁜 놈’이라는 낱말도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孟子는 ‘孺子入井’이라 말했다. 우물가에 놀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손을 뻗어 아이를 도우려 한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내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 남을 위해 살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 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롭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나무도, 풀도, 물고기, 곤충도 모두 다른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만이 아니다.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05쪽. 최진석 교수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구절이다. 저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고명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에 알람을 끄고 좀 더 자는 것이 저것이고, 바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이것이다.’ ‘출근하며 월급날이 며칠 남았나 세어보는 게 저것이고, 오늘 할 일을 미리 계획해 보고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출근하는 것이 이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목소리로『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29쪽을 읽어보자.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지만,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기준이 없어서다. 실행에 옮기려면 힘이 든다. 당신이 뭔가를 할 때 고통스럽지 않다면 의심하고 점검하라. 자, 일단 오늘 당장 휴대전화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책을 가까이 하자. 이것만 바꿔도 인생이 성공한다. 놀자를 버리고 노자를 취하라!


고전은 우리보다 먼저 살아본 선배들이 남겨놓은 실패하지 않는 법에 대한 매뉴얼이다. 고전은 온통 실패와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다. 선배들이 창피한 얘기를 기록 해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신립은 날쌔고 용맹한 장수였으나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패한 장군이다. 유성룡은 신립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명나라 장수가 신립을 향해 한 말,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나 후손에게 경계가 될 곳이라 여겨 상세히 적어둔다는 평가도 거침없이 기록했다.


여기에 너무도 정확한 삶의 매뉴얼이 있는데 우리는 고전을 읽지 않는다. 물건을 사면 매뉴얼이 있는데 읽지 않고 AS부터 찾아간다. 고전에 해답이 있는데도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 고전의 답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고전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실패할 수 없는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고전은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수천 년의 고통과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삶의 비밀은 한눈에 바로 볼 수 있는 해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읽고 또 읽고, 받아쓰고, 생각해서 자신에게 맞는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고전은 미래의 답안지다! 대체 불가능한 ‘나’를 만드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야 한다. ‘나만의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고명환은 말한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며, 남들이 따라 할 수 없어야 한다.’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맛있게 먹었는가? 고전은 정신이 건강해지는 가장 정갈한 음식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함이 없기에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미리 겪어보고 깨달아 후대 사람들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글이 고전이다. 홍삼, 산삼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말(言)과 행동(行)은 서로 교차해서 생각하면서 인생의 윤리를 그려나간다. 인생이란 말과 행동이 서로를 규제하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言顧行, 行顧言은 우리 사회를 지키는 원리다. 특히 신(信)은 현실에서 입증가능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질러대는 말로 인해 국력을 낭비하고 있음을 목도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지도자, 특히 유림 지도자들의 言行은 어떠한가? 묻고 또 묻고 싶다.


더 나아가 인생의 방향을 ‘나’ 중심에서 ‘남’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치’는 ‘같이’ 사는 것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가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겻이다.” 최진석 교수님도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높이만큼 이미 발전했다. 더 발전하려면, 선진국이 되려면 더 높은 수준의 생각이 필요하다.” 나 하나만을 위한 작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남을 위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생각을 하라. 고민은 사색이다.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걱정과 불안은 잡념이다.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다. 독서를 통해 걱정하지 말고 사색하라.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즉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해야 한다’는 긍정형의 황금률이 존재했다. 1988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제18차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인류의 황금률(golden rule)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투표를 한 결과 『論語』의 ‘己所不欲 勿施於人’이 투표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즉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서양의 황금률에 대한 반동으로 동양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論語』의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이래야 나라에 대한 원망이 없고, 집안에 대한 원망이 없다. 따라서 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관임을 증명하는 결과다. 인류의 권한을 진술하는 문장도 긍정형보다는 부정형의 진술이 더 타당하다. 긍정형의 진술은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고는 제국주의로 흐를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이 『12. 3. 윤석열 계엄』으로 나타난 것이다. 


의식이 높은 사람은 책임감이 큰 사람이다. 사람의 책임감은 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 또한 책임감은 공동체적이다. 선비 역시 공동체적 개념이다. 이것이 싹으로 선비를 나타내는 까닭이다. 밝고 환한 세상으로의 진출을 희망하는 공동체의 염원을 시대적 과제로 삼아 실현해야 하며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가 일컫는 ‘선비’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적 염원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서 그 염원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선비’다. 이 선비의 모습이 식물의 싹과 같다는 의미에서 ‘싹(士)’으로 ‘선비’를 나타냈다.


유교의 가르침은 내가 스스로 본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는 말로서가 아니라 teaching by example이다.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음식이 고전이다. 꾸준히 섭취해야 한다. 고전의 지혜로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고전의 지혜는 온갖 풍파를 이겨내는 갑옷이 될 것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천 년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고전이 아니고서는 내 약점을 막아줄 그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러니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 한 문장이라고 들고 끝까지 물어라. 묻고 또 물어라. 그 고전이 답해줄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 고전의 내용이 나로 변한다. 그 고전은 어떤 무기보다 단단한 갑옷이 되어서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고전은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당시의 교육자를 비판한다. “교육자는 아이에게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완성된 생각을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쓸 뿐이다.” 우리 유학자들에게 주는 회초리(回初理)는 아닐까? 문덕근이에게 주는 회초리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실각을 하고 14년간 열국을 편력할 때 했던 말이다. 이 천하주유의 시기에 공자를 시종 굳건히 지킨 것은 자로와 안회였다. 이 때 공자가 제안을 하나 했다. “제자들아! 우리가 제각기 인생에 품고 있는 이상이 있지 않겠니? 심심한데, 우리 그것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이때 공자가 했던 말이 무엇일까?


子曰: “老子安之, 朋友信之, 少子懷之.” “늙은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며, 젊은이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老子는 과거요, 朋友는 현재요, 少子는 미래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다 현재를 반성하고 개방하면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3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少子懷之”다. 우리 유림은 과연 “少子懷之”를 말할 수 있겠는가? 儒學者들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는 젊은 세대가 있을 것인가?


어른들이 자기의 생각을 少子들의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는가? 누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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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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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전이 답했다! 그런데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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