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0(일)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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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也者, 各指其所之『繫辭傳』3-2. 말 하나하나가 인생이 지향해야 바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이다. 말은 함부로 해서도 안 되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세상은 찾고 있고 그리워한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것은 언어 속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꽃을 꽃이라 불러야 꽃이 되듯이, 사람도 주변에 있는 가족, 친지, 지인에 대해 합당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며, 이때부터 자신이 무엇이라 부르는 사람과의 올바른 인간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言行, 君子之樞機”(『繫辭傳』8-2)라고 하지 않는가? “언행이야말로 추기와도 같이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소이의 핵심이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어는 본디 미추(美醜)의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울러 미추의 관념이 존재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니 사실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고 표현할 뿐이다. 신체의 각 부분을 가리키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신체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신체 각 부위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나 생긴 모양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사실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다. 

 

‘아버지’라는 말은 ‘아부지’가 바른말이라고 한다. 아부지는 ‘아+부+지’의 합성어라고 한다. 여기서 ‘아’는 ‘아이’를 뜻하고, ‘부’는 ‘부르다.’이며, ‘지’는 ‘신체의 일부나 남성의 오지’를 가리킨다. 풀이하면 ‘아이를 이 세상에 불러오거나 낳아준 사람’이라는 뜻이며, 자식이 생부를 부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라고 한다.    


한유의 말을 빌린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문장이 나타내고자 하는 절박한 실제 내용이 있어야 한다.” 고(古)의 도(道)란 반드시 도(道)를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文以明道). 그것은 도를 전하는 도구이며 그 자체로 굴러가는 의미 없는 허깨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고(古)의 도(道)는 세인들을 구차스럽게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데 쓰잘데 없는 언어를 낭비하지 않는다. 문장이란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쓰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한유의 말이 이어진다. 고인(古人)을 사모해도 직접 만나볼 길은 없다. 그러나 古道를 배운다는 것은 반드시 그 고인들의 문사(文辭)를 포괄적으로 통달해야 한다. 그 문사를 통달한다고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그 古道에 뜻을 두어야 한다. 道란 古道를 말하는 것이다. 古道란 선왕(先王)의 예악형정(禮樂刑政)이요 인간 의식주행(衣食住行)의 구체적 길(道)이었다. 고문이라 해서 고(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절실한 創新의 古였다. 고(古)란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논리-철학 논고』에서 “도대체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여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다. 길거리를 지나는 무학(無學)의 노파에게 자작시를 들려주고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구절은 뜯어고쳤다는 전설을 남긴 백거이(白居易)의 언어관과도 동일한 시대정신의 표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시대를 특정 짓는 시대정신(독일어 표현"Zeitgeist"과 영어식 표현 "spirit of the age, spirit of the time")이란 용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러더가 제시한 민족정신 개념으로 시작했다. 그는 인류사를 인간 정신 완성으로 향하는 보편적 역사로 파악하여 주장했고 실제 우리의 역사 또한 조금씩 서구와 동양의 정신들이 결합되고 부정되면서 어떤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대정신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인 정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시대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 통일 열망과 같은 사회적 상식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운동이 몸에 대한 신뢰라면, 인간 사회의 시작점은 말에 대한 신뢰이다. 사람은 ‘말에 대한 신뢰’라는 얄팍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살아간다. 말을 신뢰하지 않으면 앎과 경험을 주고받을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 편이다. ‘지금 밖에 비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지금 비가 내리겠거니 생각한다. 누군가가 하는 말을 믿을지 말지 매 순간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믿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모든 말을 똑같은 무게로 신뢰하는 건 아니다. 누구 말은 신뢰하지만 누구 말은 결코 믿지 않는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는다.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메주에 물을 주면 꽃이 핀다.’고 해도 믿는다. 신뢰는 사적인 인연과 감정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사회적 공통 감각, 배경지식, 직업․지위․성별․지역․나이․정치적 성향에 따라 집단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차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세상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에 조건을 단다. “멋있게 남 보란 듯이 살고 싶니? 그러면 열심히 돈 벌어야지!” 이런 투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된 뒤에 다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모든 것을 알고 책임질 수 있으며, 실수하지 않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며 매사에 합리적인 사람은 없다. 아무리 어른이어도 빈틈이 있고 실수도 한다. 더구나 인간이기에 나이 들어도 감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른도 운다. 어른도 겁을 내고 무서울 때가 있다. 어른도 아이 같은 면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 시절 우리가 원했던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을 어른이란 이름에 덮어씌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완벽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른이란 제 인생의 짐을 제가 들고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직 힘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사회가 그 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나 스스로 그 짐을 들어야 한다. 그 짐은 무겁고 힘들지만 좋은 점도 참 많다. 부모님이 내 짐을 들어 줄 때는 싫든 좋든 부모님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그 짐을 드는 순간, 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거나 시냇물에 발을 담글 수도 있다. 오솔길로 가도 되고, 큰길로 가도 된다. 가다가 낮잠을 잘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것을 주울 수도 있다. 물론 그러다 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내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기꺼이 책임질 수 있다.


내 짐을 내가 들고 인생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인생길을 가는 동안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아마도 그것이 나잇값의 대가로 얻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지난 조선 500년 동안 사회의 어른을 유림이라 칭하였다. 유학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仁)’이라는 데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럼 ‘인(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씨’, ‘씨앗’이라는 의미다. 씨앗은 싹이 터서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는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상황과 교섭하면서 자란다. 주변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랄 수가 없다. 따라서 씨앗은 우주를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누가 여기 다쳐서 누워 있다. 피를 흘리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그 어려움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인(仁)이다. 


여러 제후들이 공자에게 훌륭한 제자들을 보내달라고 하니까, 염구, 자로 등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한 말은 仁한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인(仁)’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지고의 인생 목표로 삼은 것이다. 仁이란 계속 깨어 있어야 하고, 느낄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맞추어주고 저기에도 맞추어주는, 상황에 맞게 느낄 줄 알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儒는 지도자를 말한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민중을 위해 하늘에 비는 사람을 儒林이라 한다. 그러한 儒를 가르치는 사람이 孔子였다. 이런 儒林이 얼마나 있을까?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유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나아가 고전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유교를 도외시 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나’부터 日新富有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다짐을 한다.


오늘날 지식인 되고자 하는 사람,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유교의 가르침을 자기 몸에 습득해야 한다. 그런 유교적 소양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유림이라는 말을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유학은 禮만 따로, 樂만 따로 말하지 않는다. 禮樂을 언제나 붙여서 말한다. 왜일까? 이러한 孔子의 뜻을 깊이 새겨보는 오늘, 禮異, 樂同의 의미를 깊이 느끼는 유림, 젊은이들로부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유림을 꿈꾸어 본다.

  

니체의 말을 빌어서 오늘을 정리한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왠지 모르게 위대해 보이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과거 의견을 계속 가지고 있을 뿐, 그 시절부터 정신 또한 멈춰 버린 사람에 불과하다. 결국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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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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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少子懷之 - "젊은이들로부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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