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07(목)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문덕근 사진.jpg

학교는 왜 존재할까? 학생들에게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해서 밝고 힘차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남의 생각이나 물건 그리고 남의 제도를 따라 하면서 살았다. 남의 것을 가져다 썼다. 따라 하고 가져다 쓰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숭배하며 살았다. 그러다 서양의 것은 위대하고 우리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더 심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크다. 


우리들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서양 철학자들의 먼 이야기로만 들렸었다. ‘나’로 살지 않은 그런 삶이 대부분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살았으며, 또 나에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이 분명하면 거기에 맞춰서 모든 일이 질서를 가진다.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이 차례를 갖는다. 우주도 질서를 갖고 있으며, 작은 질서는 큰 질서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몸에는 언제나 마음이 함께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몸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종종 우리는 그 사람의 말과 몸이 일치하지 않을 때를 만나게 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내 몸속의 가능성을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다. 身(몸 신)이라는 글자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면 우리 동양 철학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몸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마음을 신고(담다.) 있다는 말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살이’, ‘살림살이’, ‘弘益홍익’의 개념을 알게 되고, 우리 민족의 철학이 세계 철학으로 태어나야 할 까닭을 알게 되고, 우리 민족의 위상을 세계에 펼쳐야 할 당위성을 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憂患意識의 일종인 大人의 憂患病을 앓고 있다. 즉 스트레스성 근심병이다. 노자는 『道德經』11장에서 “當其無有器之用”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도 비어 있어야 쓰임이 있듯이, 그릇도 비어 있을 때만이 그릇의 쓰임이 있다는 말이다. 신영복 교수는 노자의 이 말을 ‘當無有用’으로 쉽게 명확하게 말했다. 진흙을 반죽해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의 하나는 ‘자신은 다 알고 있다.’라는 자만심, 그래서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찻잔 한 개를 고를 때에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 색깔, 무늬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 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 ‘도무수유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물이다. 지엽枝葉에 마음앗기는 일이 없이 항상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어 있지 않은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 그래서 겸손이 무기인 것이다. 


무엇이 한 나라를 부강하고 선도적인 나라로 만들까? 무엇이 한 나라를 강대국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까? 무엇이 한 사람을 능력 있고 지도자로 만들까? 무엇이 한 사람을 지도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까? 자신과 국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국가와 정부는 언젠가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되고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時代精神)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시대정신이란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공동체적 공감 능력을 일컫는 것으로, 공동체의 영속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도 이 시대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늘 깨어 ‘자신’과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공자는 예를 논하는 데 있어서도 “삼무사三無私”를 말한다. 子夏가 묻는다: “삼무사란 무엇이오니이까? 何謂三無私?” 공자께서 대답하시었다: “하늘은 만물을 덮어주는데 사사로움이 없으며, 땅은 만물을 실어주는데 사사로움이 없으며, 일월은 만물을 비추는데 사사로움이 없다. 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家語』「論禮」)


이 말은 무엇인가?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의 보편적 사고는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私覆, 私載를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선인․악인을 가리지 않고 다 비추듯이 사심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효孝의 본질은 大公대공을 향한 마음에 있다.


유교의 본질은 가까운 윤리의 실천을 통하여 “天下爲公”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효孝의 공적인 측면이 망각 되면 유교의 윤리는 왜곡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자식이 위대한 가치의 전승자와 담지자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식 교육을 시킨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든지 간에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식 교육에 헌신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인문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편은 사라진다.


유교는 한자와 한글, 천부경의 설계도인 하늘, 음양, ○□△, 天地人적 사고에 따른 철학을 펼치고 있다. 유학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철학인 셋의 사고로 세상을 본다. 상대방을 살려주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예를 들어 影(그림자 영)에서, 그림자가 존재하려면 빛(日)이 있어야 하고, 또 빛을 가리는 사물(京)이 있으면 저절로 그림자(影)는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천지인적 사고는 ‘상대방을 살리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살림, 살림살이’의 철학으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인류 보편의 철학이다.


‘살림, 살림살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弘益’이라는 말이다. ‘홍익인간’이 되려면 道를 깨우쳐 德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道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치는 질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 세상은 온갖 질서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질서는 항상 큰 질서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이치로 움직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天時, 地理, 人和가 이치다.


지구가 아무리 마음대로 돌고 싶어도 해가 끌어당기는 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도 태양의 궤도에 따라서 도는 공전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질서다. 따라서 만물은 해와 지구의 운행에 순응을 해야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질서를 알아야 한다. 태양계에서는 99.86%가 해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 세상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은 해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아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이 ‘德’이다. 세상의 큰 질서가 운행되도록 내가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태양을 닮은 사람, 해와 하나 되는 사람, 해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이른다. 해가 하는 일은 만물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이 되어서, 태양처럼 만물을 살리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말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日(해 일)은 ‘너, 해와 같이 되어야 해’, ‘너, 해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돼’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지금도 자기 마누라를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이런 말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나=우리’라는 의식, 이것이야말로 공공동체 의식의 발로, 별도의 존재는 없다는 사고 체계다. 


‘我(나 아)’ 자는 自我라는 쓰임이 있으며, 오로지 나의 나다움 즉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 초기의 我 자는 형과 동생이 무기를 들고 공동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 我 자의 본 의미로, 형제로 표현된 이 모양은 우리 겨레가 즐겨 사용하는 ‘우리’를 나타낸다. 그래서 ‘나쁜 놈’이라는 말은 공동체를 저버리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대 조선인이 생각한 ‘나’는 ‘우리’였던 것이다. ‘나의 나다움’은 ‘우리의 우리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의 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의식을 키우는 방법은 책임감이다. 나의 가족, 공동체, 나라, 인류와 자연에 대한 책임 의식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다. 해는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그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 만물을 살리는 일인 것이다. 


이제는 해처럼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해처럼 밝게 빛나 세상을 밝혀야 할 해 같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하여야 할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생활 용어로는 ‘살림살이’다. 자기 삶의 목표를 ‘살림’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구상에 이런 삶의 철학을 가진 종족은 우리 한겨레가 유일하다. 우리가 바로 그런 위대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우리 한민족 최초의 나라 조선의 건국 이념이 성통공완性通功完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이 홍익인간은 우리나라 국민교육이 지향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弘益’은 ‘해의 영향은 크고 미치는 영역은 넓다’라는 의미다. 홍익이라는 말이 ‘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天符經’은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고 태양을 닮으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양과 밀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지만 세상에서는 태양이 만물을 살아가게 한다. 태양과 같아져야 한다는 의미는 이것이다. 해처럼 그저 자기의 일을 할 뿐인데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다른 생명체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태양이 말하는 홍익이다. 세계인을 하나로 품을 수 있는 ‘살림살이’ 철학의 이해와 실천! 너와 내가 하나 되는 행복의 길이다. 

 

문덕근 사진.jpg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전체댓글 0

  • 88854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고] ‘살림, 살림살이’ 철학, 세계인의 상식으로 거듭나야 한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