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04(화)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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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낀 안경의 색깔에 갇혀, 세상을 오직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사람은, 선입견을 내려놓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즉 ‘보여지는 대로’ 직시하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전자가 편견과 도그마의 노예라면, 후자는 진실과 사유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통(疏通)이 시대의 담론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소통의 중요성만 강조될 뿐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론이 생략돼서입니다. 어쩌면 소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우리 사회에 불통이 지배한다는 논리가 역설적으로 성립합니다. 


소통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서양의 대표적인 학자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J 하버마스를 들 수 있다. 그가 창안한 커뮤니케이션이론(communication theory)은 지난 50년 가까이 서양의 사회과학계를 꾸준히 지배해 왔을 정도로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이 높은 이론입니다. 


하버마스는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 사회 문제들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을 부탁받는 자리에서 “명륜당과 해인사에 모든 답이 있는데 굳이 내 철학을 통해 한국 사회를 연구하려느냐?”는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은 한국 학자들을 위한 단순한 말 잔치가 아니라 체류하는 동안 유가와 불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그 당시 장자를 접했더라면 장자 사상이 소통 해법의 진수라고 말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장자가 제시하는 소통의 해법은 무엇인가? ‘소요유’, 대붕(大鵬)의 비상에서 보듯이 대붕처럼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나 생각도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걸 발견할 것입니다. 이때 타협은 물론이고, 소통의 가능성까지 열립니다. 그래서 장자는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큰 지혜(大知)와 큰 말(大言)로, 또 한 단계 더 낮거나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작은 지혜(小知)와 작은 말(小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莊子는 성심(成心)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면 어느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현자(賢者)만이 어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愚者)에게도 스승이 있다는 경고를 남깁니다. 성심이란 ‘이룬 마음’인데 이는 각자가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마음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이룬 마음이 있어 이것이 불통(不通)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장자는 이룬 마음 그 자체를 불통의 원인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누구나 다 이룬 마음을 지닌다는 현실을 수용해서입니다. 장자가 문제시하는 건 이룬 마음을 각자의 스승(師)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각자의 의견을 절대시하면서 타협은 고사하고, 소통의 가능성마저 없애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모와 자식 간의 불통도 따지고 보면 각자 만들어낸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부모라도 자식의 이런 이룬 마음을 무시하면 서로 간에 당장 갈등이 빚어지고 맙니다. 여기서 자식 된 도리, 즉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식의 복종을 강요하면 이는 유가적 해법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유가처럼 윤리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또 자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갈등을 막연히 빈 마음(無心)으로써 벗어나고자 하면 이것은 불가적 해법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불가에 비해 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넘칩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해서 아는데’란 어법을 자주 사용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 참모들은 침묵이 최선의 처신임을 바로 깨닫습니다. 


이 점에선 박근혜 대통령도 비켜 나가지 못합니다. 박 대통령 말을 곰곰 씹으면 분명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리로 인해 자기 생각만을 스승으로 삼으면 호소력이 반감됩니다. ‘머리와 머리 간(brain-to-brain)’ 소통은 가능해도 ‘가슴과 가슴 간(heart-to-heart)’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통(疏通)이란 단어는 통함(通)과 뚫림(疏)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누군가와 통하려면 뚫림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성심으로 막혀 있는 걸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을까요? 莊子는 성심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허심(虛心)입니다. 허심은 무심(無心)처럼 빈 마음으로 번역되지만, 뉘앙스에선 큰 차이가 있다. 허심이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면 무심은 마음 자체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런 허심의 모습을 ‘산목(山木)’ 편에서 보여줍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좁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화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당장 비키라고 소리칩니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거기에는 욕설이 따릅니다.


아까는 화내지 않다가 지금 화내는 것은 아까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어서입니다. 자기를 텅 비움으로써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 어느 누가 그를 해치겠습니까?  


장자(莊子)가 《제물론(齊物論)》에서 말한 ‘성심(成心)’이란,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지식, 편견으로 굳어진 ‘정해진 마음(고정관념)’을 뜻합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이념의 말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상대 진영의 말은 아무리 객관적인 진실이라도 무조건 거짓이자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대표적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성심’이라는 틀로만 재단하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비현실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며,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집착의 노예가 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님이 펼치고 싶었던 세계는 만물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조화와 비움의 공동체’였습니다.


인간을 짐승이나 기계와 구별 짓고 가장 고귀한 단계로 올리는 동력은 ‘아무도 보지 않는 홀로 있는 공간에서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내면의 양심(신독·愼獨)’입니다. 외부의 처벌이나 남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도덕적 자존감을 지키려는 의지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성숙이란 타인이 만든 개념(남의 시선, 사회적 성공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치란 무엇인가?”, “나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만의 고유한 삶의 개념을 스스로 정립하고 거기에 삶을 매칭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즉, 성숙은 ‘종속적 주체’에서 ‘자율적 주체’로 변모하는 인격의 완성 단계입니다.

 

사회의 수준은 시민의 수준과 지도자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시민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질문을 권장하는 사회’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특히 오지 선다형 시험을 폐지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묻는 서·논술형 평가와 토론 수업을 의무화해야 합니다. 가짜 뉴스나 진영 언론이 던져주는 자극적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이 프레임의 전제는 무엇인가?”를 의심해 보는 시민 인문학 교육을 확산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날이 그날이라고 지겨워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이 일침은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해하는 인간의 무지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며, 매 순간의 일상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우주 전체에서 단 한 번도 똑 같이 반복된 적이 없는 ‘새로운 순간의 연속’입니다. 지루함은 세상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관찰하는 내 마음의 감각이 마비(成心)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은 덕(德)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덕(德)은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답게 발현시키는 내면의 동력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멈추고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맹자가 말했듯,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측은지심(사랑), 수오지심(정의), 사양지심(겸손), 시비지심(지혜)이라는 선한 싹에 매일 질문과 성찰의 물을 주어 울창한 나무로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이라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려면 내 안의 고집과 편견(성심)을 비워내는 ‘심재(心齋)’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비움(虛)’과 ‘경청(聽)’입니다. 내 잔이 이미 내 주장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어떤 고귀한 지혜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틀림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과 다름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깊은 경청’을 실천할 때 비로소 사람의 함량과 품격이 거대해집니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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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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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을 반드시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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