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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제의 목요칼럼] 불법 합성물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무엇인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딥페이크 범죄가 떠오르고 있다. 뉴스는 의료대란보다 즉각적이고 요란하다. ‘한국, 딥페이크 음란물 취약국 1위’, ‘딥페이크 성착취물 등장 53%가 한국인’,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 60%가 미성년자’, ‘가해자도 피해자도 10대’ 이런 기사 제목이 마른 벌판에 들불 퍼지듯 불붙고 있다. 한국이 세계 1위라는 것과 10대가 주축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딥페이크'는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의미하는 '페이크(fake)'를 합쳐 만든 조어다. 딥페이크 기술은 더욱 범위를 넓혀가며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를 막는 인공지능 기술이나 법적 대응도 함께 발전하겠지만 한계는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인간을 해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총기류와 같게 된다. 위험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태는 예견된 것이다. 교내방송을 통한 10분 안팎의 예방교육으로 인성교육과 성교육이 해결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상대를 무너뜨려야 하는 상대평가와 경쟁교육 속에서 예견할 수 있는 재앙이다. 인간 존엄성 침해를 ‘장난’이나 ‘호기심 대상’으로 여긴다면 생명에 대한 침해가 되는 날도 멀지 않다. 상대를 인격체로 대한다면 딥페이크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처벌 강화, 예방 교육이라는 원론적 방안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문제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학교에서 토론, 행사, 발표, 교육과정을 통하여 인간 존중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애초에 교육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덕목이었다. 학교는 ‘인력사무소’ 역할을 그만두어야 한다. 인간적 품위를 지키고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기본인성과 철학적 기반교육을 학교가 강화해야 한다. 인성의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학교현장의 현실이다. 소수에게 필요한 심화과목은 선택적이어야 한다. 다수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인성과 철학적 기반의 독서토론과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시간과 집단협력을 위한 다양한 캠프 활동이 필요하다. 이 난국을 해결할 중심은 교육부, 국가교육위원회,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중심주체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킬러문항을 없애고 입시과목을 이리저리 재배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한국교육에 진취적 비전이 필요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에도 학교폭력 건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놀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학교폭력과 일맥상통한다. 왕따를 하거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범죄도 마찬가지다. 모습만 다를 뿐이다. 딥페이크도 놀이가 아니라 심각하고 중대한 범죄임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도구가 될 수 없다. 교육이 인간존중이라는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면 길을 잃게 된다. 적대적 불신관계에서 벗어나 신뢰와 공감으로 행복한 인격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교육 관계자 모두가 책임감을 느끼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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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전재학의 교육칼럼] 다시금 청소년의 가슴에 ‘큰 바위 얼굴’을 품게 하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이 말은 성인이면 누구나 그 시기를 거친다. 청소년의 특징 중 하나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증폭이다. 특히 자신이 닮고자 하는 사람을 대표적 이미지로 삼거나 롤모델로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이는 꿈 많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표징이다. 그러나 요즘은 꿈이 없고 심지어 꿈꾸기가 두렵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이제 그들에게 다시금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1804~1854)의 <큰 바위 얼굴>을 소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우리 사회에 뜨끈한 아랫목과 같은 스승이나 사회의 사표가 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는 더욱 그렇다. <큰 바위 얼굴> 주인공 어니스트(Ernest)는 올곧고 근면하며 자비로운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듣고 자란다. 그러면서 그를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흠모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 소설은 사람은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위인의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고 성장하며 성숙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교육에 시사할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은 청소년기에 꿈꾸고 소망하는 인물로 변모되어 간다. 이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꿈의 실현(R=VD)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각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실현된다(Realization)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소중히 간직한 인물은 개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닮고 싶은 역사상 또는 현실의 ‘큰 바위 얼굴’은 누구일까? 필자는 몇 해 전에 학생들에게 3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닮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데 롤모델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에 학생들(응답자 40명)의 반응은 역사 속의 인물로는 김구, 이순신,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비스마르크 등이었으며 현실 속 인물로는 스포츠 스타인 김연아, 코비 브라이언트, 메시, 힙합 가수인 트레버스 스캇, 걸그룹의 태연, 외과 의사인 이국종, 웹툰 작가인 자마, 프로게이머 페이카, 그리고 연예인으로 유재석을 선호했으며 그 외에 법조인, 기업인, 교사 등을 거론하였다. 그야말로 1인 1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가족을 상당수(8명-20%)의 학생들이 선택했다. 이는 평소에 자주 만나면서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그만큼 친근해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청소년답게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보는 만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인 것 같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에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연히 일어서 백성을 이끈 지도자가 많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된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강감찬 장군과 영화 ‘노량’의 이순신을 보라. 역사를 통해 후손들이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위기 시대, 절망 시대, 상처 시대, 위험 시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앞장서 극복하고 이끌어주며 솔선수범은 물론 국민통합을 이끄는 보이는 지도자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오히려 온갖 혐오만 조장하고 사상적으로 국민을 갈라치기 한다. 시나브로 온전한 ‘큰 바위 얼굴’의 부재 시대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꿈과 끼와 낭만을 심어주고 바람직한 인성을 갖춘 이타적인 인물로 성장하도록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큰 바위 얼굴’ 스토리를 재소환해야 한다. 이는 그들에게 다양한 진로지도와 같다. 모든 어른이 청소년의 큰 바위 얼굴이 될 수는 없지만 언행일치와 실천궁행으로 청소년들이 보고, 듣고, 배우고, 본받아 그런 삶을 꿈꾸며 도전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관점과 시선으로 매사 꾸중과 비난을 앞세우기보다는 청소년을 널리 이해하고 연대하고 함께 꿈꾸는 어른이자 스승이 되길 소망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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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4
  • [육우균의 周易산책] 신의 뜻을 따르는 열락의 기쁨(택뢰수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택뢰수괘는 위에 연못(☱)이 있고,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이다. 못 속에 우레가 들어있는 모습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는 낮에는 활발히 움직이지만 저녁이 되면 집으로 들어가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택뢰수의 수(隨)는 ‘따른다’의 뜻이고 따른다는 ‘때’를 말함이다. 못 속에 우레가 들어있는 모습, 그 때에 맞춰 군자도 저녁엔 집에 들어가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현대의 바쁜 일상 중에 저녁이 있는 삶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주역』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을 택뢰수에서 말했다.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이다. 고대에는 해마다 봄이면 제사 음식을 싸서 가까운 산과 언덕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단오를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나온 게 수(隨)다. 수(隨)는 “阝(언덕)에 辶(오르는데) 左(손에는 주술 도구)와 月(肉-고기)를 든 모습”이다. 줄줄이 행렬을 이루던 데서 수행한다는 의미가 나왔다. 수시로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이때는 아름다운 옷들을 차려 입었고 산과 들에서 남녀의 교제도 자유로이 행해졌다. 실제로 남녀가 자유분방하게 어울리는 일도 허용되어, 이로부터 야합(野合)이라는 말도 나왔다. 인생은 언제나 미래로 향하는 여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여정이 때로는 우레로 덮인 연못같은 어러움과 도전으로 시작된다. 택뢰수괘는 우리에게 인생의 출발점에서 알아야 할 교훈을 제시한다. 이처럼 수(隋)는 ‘따름’이다. 따름은 신의 뜻을 묻는 것이며,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결국 택뢰수괘는 신이 사는 곳을 따라가서 그곳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신의 뜻을 묻는 것,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은 종종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와 관련된 문학 이야기 중 하나는 유명한 신화인 『오디세이아(Odyssey)』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이타케로 떠난 지 10여 년째 되는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여 40여 일에 걸친 이야기가 모두 12,110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다. 그리스 알파벳 순서대로 24권으로 나뉘어 있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이용한 전략으로 트로이를 멸망시킨 후 전리품을 챙겨 금의환향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오디세우스는 6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12척의 배로 트로이를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배와 부하들을 모두 잃었고, 고향인 이타케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온갖 고난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인 이타케로 귀향하여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를 괴롭히고 자신의 재산을 탕진한 구혼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 『오디세이아(Odyssey)』는 서양 인문학의 뿌리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택뢰수괘의 전형을 이루는 이야기로도 활용된다. 택뢰수괘는 ‘군자는 낮에는 활발히 움직이지만,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고 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갖 고난과 맞서 싸워야 했다. 예를 들면 외눈박이 거인 커클롭스, 마녀 키르케, 괴물 스칼라와 카립디스 등을 물리치고 집에 도착하지만, 그의 집에는 불한당 무리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고, 그의 재산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탕진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자기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신과 인간들이 뒤섞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파란만장한 모험과 복수의 대서사시다. 아테나 여신과 제우스신 등의 조력을 받아 싸움을 그만두고, 화해와 평화의 서약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집에 들어가 편안과 휴식을 취한다’는 말처럼 오디세우스는 집을 나와 모험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20년이 걸렸다. 집에 돌아와 제반 정리를 하고 평화를 유지시킨 뒤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길고 힘든 여정은 그의 성품, 지혜, 신앙을 시험하는 수많은 시련으로 특징지어진다. 또한 여행 내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욕망과 신의 뜻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했을 때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해 여행이 길어졌다. 그러나 포기하거나 절망에 굴복하는 대신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신, 특히 아테나의 인도에 대한 인내와 신뢰를 보여준다.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에게 시련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 힘, 보호를 제공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재회와 회복의 기쁨이 핵심인 성경의 탕자의 비유될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은 것처럼, 오디세우스도 정당한 자리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정한 길을 따를 때 은총과 은총의 상태로 돌아가는 기쁨을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오디세이아(Odyssey)』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 즉 믿음으로 시련을 견디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궁극적으로 더 높은 목적에 따른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평화와 기쁨, 성취를 찾는 기쁨에 대한 우화로 볼 수 있다. 수괘의 수는 ‘따르다’는 의미다. ‘수필’도 ‘붓을 따른다’는 의미로 자유롭게 쓰는 문학의 한 양식이다. 무엇을 따르는가? 바로 신을 따르는 것이다.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결국 『오디세이아(Odyssey)』는 신이 함께 하고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 끝엔 무엇이 있나? 평화와 휴식이 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기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한다. 이순신처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부당한 결과로 돌아왔을 때도 백의종군하듯이 자신의 삶에서 성실한 자세로 임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두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그의 여정을 보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용이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내게 주어진 것이 작고 소박할지라도 성실하게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면 결국은 인생에서 승리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남과 비교하여 작다고 불평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면 승리는커녕 이미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만다. 『주역』의 핵심 요소는 성실함과 베풂이다. 성실함과 베풂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꿋꿋이 삶을 버텨나갈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가수 강산에의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은 택뢰수괘의 가르침과 공감이 잘 어울린다. 이 노래는 무엇이든 극복하며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 끝에는 축복과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여러 갈래길 중 만약에 이 길이/내가 걸어가고 있는/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 일지라도/딱딱해지는 발바닥/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난 쉴 수 있겠지”의 부분이 그렇다. 택뢰수괘는 하늘이 준 운명에 순응하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늘의 뜻으로 믿고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일한다면 반드시 기쁜 일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이다. 우리의 인생길도 그 끝엔 평화와 휴식이 놓여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노인이 청새치를 잡고 그 청새치를 상어들이 먹어 뼈만 남은 청새치를 배에 매달고 항구에 도착한 후 깊은 잠에 빠지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택뢰수괘의 모습이다. 인내하고 모험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그 앞에 놓인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어 집으로 돌아와 평화와 휴식을 즐긴다. 그것이 열락의 기쁨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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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2
  • [육우균의 周易산책] 어미 새가 사랑으로 알을 품고 있는 모습(풍택중부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풍택중부괘는 위에 바람(☴)이 있고, 아래에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못 위에 바람이 있는 모습이다. 못 위로 바람이 불면 파랑이 인다. 이는 바람이 불 듯이 사람이 진실로 사람에게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감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풍택중부(風澤中孚)의 중부(中孚)는 우리의 가슴 속에 진실함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의미다. 부(孚)는 새알의 부화다. 알이 깨어나 생명이 움트는 모습이다. 결국 중부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요, 배려의 마음이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느낌이다. 갓 태어난 병아리를 어미닭이 보듬고 부화시키는 모습이다. 어미의 사랑과 헌신이다.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에 보면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도 그렇다. 태아는 세상에 나와 스스로 걷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출산한 여성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자식을 1년 이상 젖을 먹여 키우고, 그 이후 자립할 수 있도록 12∼13세까지 양육을 책임진다. 이때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데 바로 ‘교육’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씨앗인 사랑을 심어 놓는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개념과 유사하다. 인(仁)은 무엇인가. 씨앗이다. 살구씨를 한자로 ‘행인(杏仁)’이라 한다. 그러면 인(仁)은 어떤 씨앗인가? 바로 ‘사랑의 씨앗’이다. 즉 자기 희생적 배려다.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이다. 배려라는 씨앗을 심은 인종이다. 이들이 살았던 곳(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을 뒤져보니 화로, 주먹도끼, 나무창이 발견되었다. 특히 쇠닝겐창의 발명은 더 빠르고 더 날카로운 무기였다. 이 쇠닝겐창을 창조한 이면에 폭력성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술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선별해서 엮어내는 능력이다. 쇠닝겐창은 나무와 가죽, 돌을 서로 엮어내어 자신들의 도구를 한층 더 혁신시켰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자신보다 훨씬 큰 육식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상상력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료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인간은 얼마든지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다스리면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심을 동시에 길러 나갔다. 이를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황금률(Golden rule)’이라 칭했다.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라는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사람을 포함해 생물은 다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기적)인데, 왜 이타 행동을 할까?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슨은 생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았다. 결국 그가 쓴 책의 핵심 내용은 ‘유전자 선택론’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그 무엇도 설계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복제할 뿐이다. 자연선택은 어떤 종, 어떤 개체한테도 특권을 주지 않으며 진화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유전적 연관도가 전혀 없는 타인에게도 이타 행동을 한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고등동물일수록 더 확실하게 이타 행동을 한다. 이기적인 행동보다 이타적인 행동이 훨씬 고귀하다. 철학자 밀이 “남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은 유전자는 복제할 뿐이고, 인간 개체는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란 뜻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 이기적인 동물을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는 데 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후대 등장하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 후 성인들의 각성과 전파로 이타적 유전자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어주는 마음이 바로 중부(中孚)의 마음이요 이타적인 발효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중심을 잘 잡는 일이다. ‘명학재음(鳴鶴在陰)’이라 했다. 학이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있어도 그 울음소리로 학의 가치를 알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늘에서 우는 학처럼 중부란 드러나지 않아도 그 힘이 엄청나다. 중부는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 문화의 정수다. 그래서 조직의 리더는 흔들리면 안 된다. 흔들리는 순간, 그 조직은 무너진다. 리더는 중심을 잡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중부(中孚)에 관해 「대상전」에서는 ‘의옥완사(議獄緩死)’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옥사에 관한 말인데, 특히 사형은 한번 집행되면 돌이킬 수가 없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때 중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연민의 정을 살려, 사형의 죄를 경감시키는 인(仁)의 마음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대에 와서 뜨거운 논쟁이 된 사형폐지에 관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현대의 의식 수준이 고조선 시대 옛 선조들의 의식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묻지마 범죄 등의 인륜적으로 말이 안 되는 범죄가 행해지고 있어 사형제도를 다시 도입하자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지만 그런 범죄에 있어서는 죄인에게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판결해서라도 사형 폐지론을 유지해야 한다. 누쿠이 도쿠로가 쓴 중편 소설 『종이 올빼미』(직선과 곡선)를 읽어보시라. 이 소설은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일본의 사형제도를 비판한 이야기다. 섣불리 사형제를 시행하자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판결의 형법주의가 아니라 우리 옛 선조인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중부(中孚)의 마음,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는 마음이 현대에도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부(中孚)는 성(誠)과 경(敬)과 신(信)을 한 마디로 줄인 말이라는 도올의 견해는 탁견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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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의 체념을 부추기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소위 ‘복지부동(伏地不動)’ ‘체념(滯念)’이라는 말과 혼용되면서 쓰이기도 한다. 그 어느 것이든 이들은 부정적인 현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면 당연히 자기의 책임을 지지 않거나, 주위 사람 눈치 보는 얍삽한 처신으로 일관하는 매우 소극적인 행위이며 또한 조직의 업무를 정체시키거나 침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명제의 핵심이다. 이는 대개 정권 말기나 권력 누수기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흔한 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질책하는 국민이 늘고 있지만 최근에는 교육계에서조차 교사들 사이에 이 말이 널리 보편화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교육활동에 경종을 울리면서 우리의 미래 세대 청소년 교육에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다. 적어도 십대의 공교육을 책임지는 학교에서만큼은 교사들이 눈치 보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업무 태만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이를 마냥 나무라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학부모의 힘이 강해지면서 일부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 갑질, 아동학대 신고로 인한 소송, 교권 침해나 추락을 유발하는 과도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직면하는 교사들이 오죽하면 마지막 해결책으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 벌써 최근 6년 사이에 100명이나 되며 이중 절반은 초등학교 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젠 생명 보존을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하는데 거기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체념이 압도적이다. “올해만 잘 버티면 내년에는 또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최근 몇 년 전부터 내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더 나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어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아이에게 좀 전문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 상담 때 조심스럽게 ADHD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부모님께 권했어요. 그런데 부모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며 몹시 불해하시더라고요. 제가 무슨 모욕을 했다는 것처럼요. (…) 교사는 아이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당연한데, 그렇게 불쾌해하시니 그냥 그 아이에 대해서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송은주, 『다시 일어서는 교실』) 안타깝게도 교사는 자기 결정권이 많지 않은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교사는 자기 효능감이 떨어지거나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 인식은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어느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자율권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비상시 학교별 대응을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학교가 자율에 대한 적응이 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고 은근히 비난의 화살을 학교나 교사로 돌렸다. 평소 상명하달, 위계에 따른 일방적 지시로 일관한 교육부가 교사나 학교의 자율권에 신경이나 쓰면서 이런 말을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여기저기서 교육 자치를 말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학교의 자율성도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로 몇몇 특수목적교나 혁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의사결정에 교사의 영향력이 아주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자기결정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 교사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잔뜩 웅크리고 있거나 새로운 정책이나 조치에 일단 부정적으로 일관하고 행동조차 체념한 채, 묵묵히 지켜온 관행만을 철저히 고수하려고 한다. 최근에는 교사의 체념이 명예퇴직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래저래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차라리 가만히 있고자 하나 양심상 이를 묵과할 수는 없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학부모나 국가가 이를 조장하고 교사의 체념을 확대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교사가 체념이외에 무슨 다른 수단이 있을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교사의 성찰과 자성에만 맡기기에는 이미 늦었다. 획기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사의 체념을 과감하게 회복할 수 있는 정책이나 계기를 수립하지 않으면 우리 교육은 무한 답보상태에서 맴돌 것으로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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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한겨울의 따스한 붕어빵 온기를 상상한다. 얼음바람이 몰아치던 한겨울 그때는 얼마나 온기가 그리웠던가. 이제 내리꽂는 햇살이 살갗에 따갑게 닿으면 한겨울 얼음바람이 그리워진다. 인간의 몸은 이토록 간사하다. 달콤하고 고소한 붕어빵은 중년에게 추억의 아이콘이다. 붕어빵의 노점 숫자는 불황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붕어빵 먼저 먹는 부위로 성격을 추측하기도 했다. 붕어빵에는 붕어대신 달콤한 팥이 들어 있다. 따스한 붕어빵을 손으로 감싸면 따스한 온기가 온몸에 전해졌다. 호두과자는 충청남도 천안시가 원조 지역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터미널의 대표 간식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천안이다. 천안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천안 호두과자 속에는 호두가 있다. 팥도 있지만 호두가 씹히는 맛이 없다면 원조호두과자라 할 수 없다. 명실상부란 내용과 모양이 일치할 때 쓰는 말이다. 붕어빵 교육은 사람들이 입에 잘 올리는 말이다. 틀에 넣고 찍으면 같은 형태의 빵이 나온다. 사람은 풀빵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잠재력과 성향이 있다. 붕어빵틀 교육은 정말 벗어나야 한다. 빠른 시간에 효율적으로 순응형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은 퇴행적 교육이다. 21세기 인공지능시대에도 큰 틀에서는 붕어빵틀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교육은 잔인한 교육이다. 성격과 환경과 경험과 성향이 모두 다른데 틀 안에 우겨넣고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교육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경제성과 인력 부족과 편리성으로 미화하면서 전국이 단일한 틀로 학생을 구워내고 있다. 붕어빵틀에 넣고 졸업장을 주는 교육은 이제 과거의 추억이 되었으면 한다. 호두과자에 호두가 있듯이 교육에는 인간의 삶이 있어야 한다.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하고 책임과 합리적 이성이 있어야 한다. 미래역량과 민주시민교육을 지향하면서 명문대입시를 지상최대의 목적으로 하는 줄세우기 입시교육은 그만해야 한다. 내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AIDT)를 도입한다. 지식 교육은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맡기고 ‘개인 맞춤교육’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교과서 대체로 선진국 교육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화된 교육은 매체보다 삶의 질에 초점을 두는 교육이다.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지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아왔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일률적인 교육과정 틀을 고집하면 안 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정답을 찾고 정형화된 교육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틀은 이제 버려야 한다. 학벌과 직업만을 위한 붕어빵틀 교육은 버려야 한다. 아직도 스스로의 삶과 소통과 협력으로 자신이 대면하는 세상과 풍요롭고 조화로운 삶을 위한 교육은 한국에서 불가능한가. 한국 교육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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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2
  • [육우균의 周易산책] 혁명은 삶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화풍정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화풍정(火風鼎)괘는 위에 불(☲)이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 때의 바람은 나무를 가리킨다. 나무 위에 불이 있으니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물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솥의 모양이 정(鼎)이다. 정(鼎)은 본래 흙으로 빚어 곡식과 고기를 익힐 때 사용되었다. 제사에 바칠 제물을 삶으면서 예기(禮器)의 하나가 되었는데, 특히 청동으로 점점 크게 주조하면서 종교의식과 국가의 큰 잔치에 쓰는 중요한 예기이자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때문에 사당에 비치된 정(鼎)을 빼앗긴다는 것은 곧 나라의 패망을 뜻했다. 정(鼎)은 거대한 세 발 솥이다. 세 발 솥의 쓰임은 단단한 것을 푹 익혀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즉 물체를 변혁시키는데 있다. 혁(革)괘에는 과감하고 강건한 리더가 필요하고, 정(鼎)괘에는 온유하고 포용적인 리더가 필요하다. 혁괘는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제거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고, 정괘는 사물이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물질로 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생성의 새로움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결국 정(鼎)은 변화를 완성한다는 의미를 지닌 괘다. 즉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법률을 제정하고 반포함으로써 혁명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없다면 오직 혼란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혁명은 단순한 정치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대동사회다. 화풍정괘에 잘 맞는 역사 속의 인물이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공민왕 사후 이인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유배와 유랑살이를 전전하다 이어 혁명을 결심, 이성계와 의기투합하여 숱한 역경을 헤치고 조선을 건국한 혁명가다. 조선왕조 개창 이후 권력의 정점에서 건국사업을 주도하다 요동 정벌을 목전에 두고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화풍정의 괘사에서 ‘정위응명(正位凝命)’이라 하여 ‘그 위(位)를 바르게 하고, 천지의 모든 기운을 나에게 응집시켜 천명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천명은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뜻을 새로운 국가의 방향으로 제시하여 새로운 질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혁명이 성공한다. 진실한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닌 삶의 혁명, 도덕적 혁명이어야 한다. 민중의 협력이 없는 혁명은 허상일 뿐이다. 괘사를 보면 ‘정원길형(鼎元吉亨)’이라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고 가마솥으로 끓인 음식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역사적으로 보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고대 부족 국가의 농경 제천 의식이다. 고조선 시대부터 대동 사회란 농경 제천 의식처럼 가마솥에 음식을 가득 만들어 서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지칭했다. 나라 전체가 크게 모여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대동 사회다. 풍류 사회는 결국 대동사회의 한 정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수풍정, 택화혁, 화풍정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혁명은 완성된다. 그런데 택화혁이나 화풍정이나 모두 혁명이다. 이들은 어떻게 다른가? 택화혁은 대하소설 『장길산』이나, 4. 19 혁명처럼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혁명을 가리킨다. 화풍정은 사회 구조의 변혁을 말한다. 고려말의 혼란과 조선 초의 변혁이 그것이다. 정도전은 조선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여 실천한 위대한 혁명가이며 정치가였다. 김탁환은 그의 소설(『혁명1-광활한 인간 정도전』)에서 정도전을 ‘법, 제도,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 등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새 세상의 전망과 방안을 모두 갖춘 인물’로 평가한다. 우리 역사에서 책사들은 한명회처럼 자기의 주군(수양대군)을 용상에 앉히는데 집중한 반면, 정도전처럼 혁명을 위해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여 실천한 인물은 없다. 사회 구조의 변혁을 말하는 화풍정괘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화풍정의 괘사에서 ‘정위응명(正位凝命)’이라 하여 ‘그 위를 바르게 하고, 천지의 모든 기운을 나에게 응집시켜 천명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천명은 국민의 뜻이다. 국민들의 뜻을 새로운 국가의 방향으로 제시하여 새로운 질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혁명이 성공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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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 [육우균의 周易산책] 멈춰라, 욕망!(중산간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산간(重山艮)괘는 위와 아래에 공통으로 산(☶)이 있는 모양이다. 위에 산이 중첩되어 각기 제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산간(重山艮)’의 ‘간(艮)’은 ‘멈춤’, ‘억제’, ‘절제’를 의미한다. 멈춰야 할 때 멈춰야 한다. 절제를 말한다. 욕망을 멈추는 것이다. 간(艮)은 산의 형상이며, 산에는 안정적이고 무겁고 견고하고 내실이 있다. 그래서 자기의 지위나 직분에 넘어서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 즉 자신의 주제넘은 욕망에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 각각의 산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며 살아간다. 자크 라캉이 말한 대타자의 욕망과 관련된 괘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까마귀와 독수리」 이야기가 있다. 독수리가 양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잡아채어 날아가는 모습을 본 까마귀가 나도 독수리처럼 해보고 싶어서 양을 낚아채려고 하다가 발톱이 독수리처럼 날카롭지 못해서 양털에 엉겨 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할 때 양치기가 까마귀를 잡았다. 옆에 있던 양치기가 “까마귀가 왜 그랬어?” 하니까, 다른 양치기가 “지가 독수리인 줄 알았나 보지” 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욕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개념을 잘 설명해 주는 우화다. 하덕규 작곡, 정덕수 시의 「한계령」을 들어보자.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버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화자는 자신의 지식으로 삶의 본질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또한 삶의 애증을 털어내지 못한 채 병든 나무처럼 힘겨워하고 있다. 그래서 첩첩산중의 한계령을 찾아간다. 그러나 한계령은 내게 말한다. ‘내려가라’며 등을 떠민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현실이다. 내가 있기 싫은 곳, 불만으로 가득 찬 곳,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현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나를 키운다. 나에게 밥을 준다. 그런 환경 속에 있어야 한다. 인간의 굴레다. 인간의 속박이다.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도 현실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예수님도 ‘일상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는 천국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에서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하늘에 천국은 없다. 한계령은 고요와 평정을 회복하는 귀한 치료약이다. 영적인 필수품이다. 현대 문명의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숨겨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 한계령이 나를 밀어낸다면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처음 품었던 신념을 앞으로도 계속 품고 갈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움켜쥐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혼란스럽다. 우리가 믿어왔던 앞길을 인도하기는커녕 걸림돌이나 족쇄가 되지 않게 하려면 멈춰 서서 다시 걸음을 옮길 용기를 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사막 여행은 원시 자연의 적막한 침묵을 가르친다. 모닥불 위에 쏟아질 듯 피어나는 별무리를 관찰하게 된다. 관찰은 통찰이 된다. 초저녁 사막의 모래 평원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여행에 돌아온 뒤에도 모래를 향한 그리움이 남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현실을 보라. 달라져 있을 것이다. 현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관점이 달라져 있어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다. ‘지금 여기’를 온전하게 음미할 줄만 알면 어떤 기적이라도 가능하다. ‘여긴 어디’, ‘난 누구’, ‘why not’을 생각하라. 그리고 내가 나서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판단하라. 멈춰야 할 때 멈춘다는 것은 중단이나 실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의 약진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흐르는 물도 웅덩이를 만나면 전진을 정지한다. 물이 부풀어 올라 웅덩이를 메울 때까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성장하는 수목도 겨울이 되면 잎을 떨어뜨리고 가지를 움츠린다. 봄이 다시 올 때까지 내면의 충실을 준비한다. 지금 힘을 기르는 일은 지금 행동하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밤에 휴식과 수면을 취하는 일 없이 낮에 일할 수는 없다. 낮에 맑은 머리와 활기에 넘치는 체력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수면의 공적이다. 한 발을 내딛기 위하여 한발은 정지시켜야 한다. 인간의 일에 대한 실패는 일 자체를 처리하는 활동의 빈곤에서보다도 차리리 그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실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지금 잠깐 활동을 정지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지 말고, 다음의 활동기가 올 때까지 자신만만한 힘을 기를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간(艮)괘는 ‘멈춤’의 괘다. 우리는 감각기관에 따라 직접적인 자극을 받는다. 「반야심경」에서도 ‘안이비설신의’라 했다. 눈, 귀, 코, 혀, 피부, 뇌(의식). 모든 감각기관이 우리 몸의 전면(前面)에 위치해 있다. 전면에 감각기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몸의 후면인 척추(등)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주역』의 중산간괘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뒷모습이 진짜 모습이다. 얼굴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망아(忘我)다. 인생에서 자신의 뒷모습이 어떨지 늘 생각하라. 그리고 갖가지 걸림돌이 많은 인생길에 자기만이 통제할 수 있는 신호등 하나씩은 가져야 한다. 중산간괘의 “멈춰라!”라는 명령은 내일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현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미학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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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2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는 수업으로 말해야 한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의 교육은 이대로 좋은가? 국내외의 교육 전문가나 미래 학자, 석학들은 대한민국의 교육이 디지털 대혁명 시대에 이대로는 안 된다고 혁신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오고 있다. 그것은 내부적으로 수업혁신에 대한 것으로 집약된다. 최근 교육부는 AI시대의 ‘교실혁명’이란 기치 아래 2025년도 실시될 디지털교과서 수업을 대비하고 있다. 사실 이런 조치의 배경이랄 수 있는 수업시간에 잠자는 교실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는 크게 보면 우리 교육제도의 문제로부터 나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든 것을 시스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여기엔 교사가 수업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줄기찬 요구와 불만이 존재한다. 이는 공교육의 불신과 붕괴로 이어져 그 대척점에 있는 사교육의 의존도가 날로 높아짐으로써 사교육비는 공식적으로만 2023년 27조 1000억 원에 이르렀다. 매년 눈덩이처럼 증가하는 ‘사교육 공화국’의 실체다. 이제는 사교육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업에만 전념할 수 없는 교사의 근무 여건이 가장 크다. 각종 행정업무와 생활지도, 그리고 수업과 상관없는 일상 업무들이 교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니 수업 혁신은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가 되었다. 깨어있는 교사는 이러한 한계에 대해 스스로 “우리 이대로 살아도 좋은가요?”라는 양심선언이자 가슴 아린 절규를 쏟아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수업혁신의 방안으로 최근 교육부와 17개 시도교육청은 수업혁신에 대한 의지와 전문성을 갖춘 '교실혁명 선도 교사' 연수 대상자로 1만 2천여 명을 최종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를 학교급별로 보면 초등학교 6770명, 중·고등학교 5483명, 특수학교 144명이다. 이들의 평균 교육 경력은 11.7년이다. 앞으로 이들에게는 해외 연수 기회 등을 제공하고 수업⋅평가 연구비를 지원받고 전국 교사 연구회 200곳은 참여에 따라 일정 금액의 연구비를 제공받는다. 이는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디지털 기반 수업 및 평가 방식의 혁신을 주도하고 이를 동료 교사와 주변 학교로 확산하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관계자는 밝혔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 ‘수업 나눔 광장’을 통해 교사 누구든 좋은 수업 콘텐츠를 개발해 공유하면 복지비를 지급하고 수업 영상을 제공한 당사자나 이 영상을 시청한 교사는 연수 실적으로도 인정한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바는 과거 유사한 정책의 도입이 관 주도 형식으로 제약이 까다롭고 교사의 자발성이 오히려 저해되는 부작용이 컸다는 점이다. 그래서 특히 경제적 보상은 보다 신중해야 할 이유다. 하지만 그저 무덤덤하고 무자극적인 수업보다는 긍정적인 참여 교사에게는 교육혁신 사례를 자극하여 주변의 많은 교사가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분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교사의 수업 역량 계발에도 동기부여가 된다는 믿음마저 지울 수는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근래 1~2년 사이에 챗GPT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활용이 중등교육은 물론 대학교육을 흔들고 있다. 이는 날로 질문하는 역량의 중요성을 인식케 하고 교사는 학생의 질문을 이끌어내는 분위기를 적극 조성하여 토론식 수업 모델을 개발할 필요성과 연계된다. 일찍이 스승 소크라테스는 제자와의 대화에서 좋은 교사란 훌륭한 질문을 하는 교사이며 더 좋은 교사란 훌륭한 질문을 하는 제자를 기르는 스승이라 말 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공교육 교사는 학생의 기대와 학부모의 만족도를 높이는 수준 높은 수업과 지도 역량의 계발이 요구된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학생’을 지도하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는 교사의 수업혁신에 달려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모든 학교에 대한 지속적인 공간혁신을 위한 과감한 투자와 입시교육에의 탈피를 위한 선진 교육제도의 기반 조성이 우선이다. 하지만 교육의 주체이자 교실혁명의 강력한 실천자가 될 교사들이 현실에 안주하여 입시교육만을 강조해 ‘불가능하다’ 말해도 일부 혁신교사라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실천함으로써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된다면 이는 교사 개개인의 수업역량 계발로 이어지는 선순환 내지 나비효과가 될 것이다. 교사는 수업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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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1
  • [김홍제의 목요칼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직업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보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힘들고 고단한 일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김훈 작가의 말대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위험하고 노동의 강도가 높지만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임금을 많이 받지는 못 한다. 가족을 위해 온몸을 쏟아 부어 땀을 흘리는 모습은 감동을 자아낸다.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모두가 힘들다고 한다. 아기를 키워본 여성들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을 꼽으라면 '육아'라고 한다. 공부도 취업도 힘들지만 육아는 다르다. 모든 일의 기준이 아기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은 엄마라고 하는데 그래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가슴에 오래 남는 이름이다. 그렇게 힘들게 애지중지 귀한 ‘아기’를 키워서 보내는 곳이 바로 학교다. 부모가 가장 힘들게 키운 금쪽이들을 학교에 모아놓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많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가장 힘든 일은 인간관계라고 한다. 인간은 가족, 사회, 공동체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사람 수만큼이나 경우의 수가 많은 것이 인간관계의 개별성이고 복잡성이다. 앞으로 분석적인 업무는 AI가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분쟁 조정이나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설득하는 작업은 AI가 하지 못한다. 요즘 식당에 종업원은 없고 키오스크만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고급 식당일수록 키오스크 대신 종업원이 안내를 한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더라도 손님의 마음을 보면서 서비스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MRI도 마음을 꿰뚫어 보지는 못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가장 힘든 육아와 가장 힘든 인간관계를 지혜롭게 조정해 나가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학부모가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모아 놓고 그 사이의 여러 관계를 조정하고 이끌어야 하는 업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당연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갈등의 시작은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어려움을 상대방에게 설득하기에 최선을 다한다. 상대방은 자신만큼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역지사지’라는 말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다. 육아와 인간심리를 보살펴야 하는 교직이라는 일은 겉보기와 다르게 힘든 직업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이고 가장 보람 있는 일도 자기가 하는 일이다. 타인이 하는 일은 타인의 보람이고 타인의 성과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가장 힘든 일은 가장 큰 보람을 준다. 산이 높을수록 계곡도 깊다. 어려움이 클수록 보람도 크다. 보람을 느끼는 교직 생활이 되기를 기원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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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8
  • [육우균의 周易산책]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기적은 찾아오네(천뢰무망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천뢰무망괘는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이다. 하늘 아래 우레가 다니는 모습이다. ‘무망(无妄)’은 ‘망령됨이나 허황됨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되다’의 의미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일이 가끔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과 불행이다. 무망은 실리 자연이다. 이것은 리얼한, 실제의 이치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으로 인위적 조작을 떠나 있는 천리의 실상을 말한다. 괘상에서 보듯 진(우레)은 동(動)이니 그 움직임을 하늘로써 하면 무망이 되고, 그 움직임을 인욕으로써 하면 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이 부당하다고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좋은 업을 쌓아야 한다. 우레나 번개는 모든 사물에게 진실한 계기를 부여한다. 그것이 자연의 도리다.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렌덤으로 로또에 당첨되는데 이것이 자연의 도리인가 하겠지만 불교적 논리를 생각해 보면 매우 타당하다. 불교는 업으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자기가 전생에 좋은 업을 쌓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복을 누리며 산다. 삼성가에 태어나지 못한 자신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업을 탓하라. 남과 공평하지 않다고 비교하지 마라. 불평하지 마라. 원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교적 인생의 논리다. 그러니 우연적으로 일어난 인연으로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 좋아할 것도 불평 불만을 할 것도 없다. 신은 우연을 가장한 기적을 주신다. 그 기적은 자기 스스로가 쌓은 업이다. 때문에 현세에서 좋은 업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복을 달라고 신께 기도하지 말라. 복은 스스로가 쌓은 업의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라. 그리고 남에게 베풀라. 그것이 복을 달라고 떼쓰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다. 『주역』도 말하지 않는가. 지성진실(至誠眞實)하게 모든 사태에 대처하면 모든 사업이 번창하리라고. 여기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 『동방박사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 이란 작품이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작품이다. 오 헨리는 유년 시절 부모를 잃고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소년이었다. 젊은 시절 은행에 취직하여 공금 횡령이라는 죄를 저질러 도주하다 자수하여 교도소에서 5년형을 살다가 2년 감형을 받아 3년만에 출소했다. 오 헨리에게 교도소는 오히려 인생의 대전환점이 됐다. 교도소에서 싹튼 그의 문학적 재능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인생은 수학 공식이 아니다. 그는 47세 폐렴으로 사망하기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내놓았다.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의 마술사라는 평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의 짧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1달러 87센트. 그게 전부였다. 델라는 사랑하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시계줄을 사고 남은 금액이었다. 그녀는 시계줄 값으로 21달러를 지불하고 87센트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줄을 왜 선택했냐 하면, 짐이 가지고 있는 시계가 고급인데도 줄이 가죽끈으로 되어 있어 짐이 몰래 꺼내보아야 하는 모습을 죽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델라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20달러에 팔아 시계줄을 선물로 샀던 것이다. 한편 그 시간에 짐도 델라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델라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예쁘게 빗겨줄 머리핀 세트를 산 것이다. 이후 크리스마스 이브. 둘의 만남. 서로에게 선물을 보여주는데… 델라가 먼저 말했다. “당신에게 선물을 주지 않고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어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어요. 머리카락은 곧 다시 자랄 거예요. 괜찮죠? 그렇죠?” 그러자 짐은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하며 넋이 나간 모습으로 “당신 머리핀 살 돈을 만드느라 시계를 팔았어. 이제 고기를 올려놓아야 할 것 같은데.” 델라가 산 짐의 시계줄과 짐이 산 델라의 머리핀은 어떨까? 시계를 판 짐에게 시계줄은 의미가 없는 선물이다. 머리카락을 판 델라에게도 머리핀은 당분간 필요 없다. 한때 이들 선물은 각자가 원한 최고의 선물이지만 지금은 효용가치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 선물은 세계인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억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은 마음이 준 감동 때문이다. 서로를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판 델라와 짐. 그들은 선물보다도 더 소중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뜻하지 않은 하늘의 선물이다. 무망(无妄)이다. 둘은 서로에 대한 희생, 사랑의 징표로써 크리스마스 선물을 품게 되었다. 이런 것이 천뢰무망의 모습이다. 물(物)에게 생명적 진실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 기대하지도 않았던 망외의 복. 무망괘는 원(元)・형(亨)・이(利)・정(貞)의 4 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대로 자연의 모습이다. 지성진실하게 모든 사태가 돌아간다. 델라와 짐은 앞으로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넉넉히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무망은 허망이 없다. 가수 장기하의 노래 중에 「새해 복」이 있다. 꿈만 꾸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 이루어진다는 내용으로 된 이 노래는 우리 현실에서 천뢰무망의 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새해 복만으로는 안 돼” 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장기하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가사와 빈티지한 곡의 분위기가 인상적으로 담겼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의 어패, 열심히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복 달라고 비는 행위의 어패를 재치있게 담았다. 복 받을 사람은 이미 결정되었다. 사람만 모르고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복은 전생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쌓은 업의 결과다. 현세에도 열심히 살아 좋은 업을 쌓아야 내세에 가면 복을 받을 수 있다. 이 현실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자. 복 달라고 구걸하지 말자. 복 많이 받으라고 하지도 말자. 인간에게 복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천뢰무망괘의 효사를 보자. 지(地)의 자리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횡재하면 나머지 인생이 고달프다. 한 번의 꿈같은 경험은 일확천금만을 노리게 된다. 갑자기 생긴 돈을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불행한 미래를 맞는 경우도 적지 않다. 로또 당첨금으로 인해 지인, 가족을 잃고 인생을 낭비하기도 한다. 도박에 빠져 나머지 돈도 모두 잃고 결국에는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다가 감옥에서 인생 종치는 경우다.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고집멸도(苦集滅道)’다. 인생은 고통이다. 왜? 집착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멸이다. 그럼 멸은 어떻게 없앨 수 있나. 8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人)의 자리다. 본인이 착하게 살았는데도 세상일은 이해타산으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많은 친구를 두는 것도 좋지만, 한 명의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 한 명의 적이 나의 인생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 성실함과 베품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 천(天)의 자리다. 늙어지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말라. 재앙이 따른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 모아둔 재산을 탕진할 수 있다. 젊을 때는 재산을 탕진해도 된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과 힘이 있으니, 그러나 늙어서 재산을 탕진하면 다시 재기하기가 힘들어진다. 추억을 떠올리며 반성하는 삶을 살아라. 죽음이 곁에 있다. 욕심을 버려라. 무아(無我)가 되라.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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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5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꿈을 꾸는 전문가이어야 한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언제부터인가 우리 초중고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 중에는 “나는 꿈이 없어요” “꿈꾸기가 두려워요”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데 꿈을 꾸어서는 뭐해요?”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다.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은 패기의 아이들에게 무엇이 꿈꾸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또 꿈을 꾼들 이룰 수 없다고 체념을 하게 만들며, 아예 남들 다 갖는 꿈조차 없이 살아가게 할까? 대한민국 유사 이래 이렇게 풍요롭게 산 적이 한 번도 없었건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 할 것인가, 왜 아이들이 이렇게 되었을까? 과거 어렵게 살던 시절, 대통령이나 장군, 과학자...등등이 되고 싶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모습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된 듯하다. 그것은 바로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교육사다리가 무너진 냉엄한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극히 비정상적이게도 학력(學力)이 높거나 한때 ‘공부의 달인’이라 불리던 아이들이 자신의 전공을 버리고 다시금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 또한 직장인으로 이미 사회 조직에 편입된 사람들조차 의사란 직업에 재도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 둘의 경우는 꿈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딘지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경제적 입장의 한 곳에만 기울어진 꿈이라 그 자체가 씁쓸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들만을 탓할 수만 없는 이유는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훨씬 높은 연봉이이 주는 매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꿈이 없이 사는 것과 보다 나은 물질적 보상을 꿈꾸며 꿈 갖기에 도전하는 모습은 우리 교육이 낳은 극과 극의 모습이다. 한때 촛불정부를 탄생시켰던 국정농단 사건의 당사자였던 최순실(최서원)의 딸 정유라는 “능력 있는 부모를 둔 것도 실력이다”고 말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부의 세습이 갈수록 일반화 되어 버린 이 시대 우리에게 이제는 자녀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더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위 ‘부모 찬스’가 가능한 젊은이들은 어찌 보면 타고난 운명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다. 이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현실이며 ‘빈익빈 부익부’ 사회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 교육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꿈을 꾸지 못한 체 체념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라야 한다’고 자학하며 운명론자가 되어 살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운명은 개척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눈물겨운 경우도 많다. 적어도 그들에게 우리 교육은 더 이상의 차별을 멈추어야 한다. 이는 일찍이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교육에는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평등사상을 설파했던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공자는 멀리서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일정 이상의 작은 수업료를 내면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했다.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의지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려는 배움에의 적극성과 자발성이었다. 교사는 아이들의 현실을 다 아는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꿈을 꾸는 전문가가 될 수는 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장 잘 하는 것,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도록 교육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꿈을 꾸되 혼자서 가면 빨리 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면 멀리 달릴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이는 가치 있는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연대와 협력 의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야만적인 경쟁(競爭)교육을 멈추고 연대와 협력을 통한 상생(相生, win-win)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정책이나 교육개혁을 통해 이루어야 할 대과업(大課業)이다. 그 중심에는 교사가 존재해야 한다. 교사는 미래를 개척하는 주체이며 선도자여야 한다. 이를 위해 교사 자신이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 못지않게 모든 아이들이 예외 없이 ‘꿈꾸기 운동’을 전개하여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도록 이끄는 교육전문가여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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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30
  • [육우균의 周易산책] 낯선 만남, 깨달음의 죽비 소리(천풍구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천풍구괘는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는 모양이다. 하늘 아래라 하는 것은 만물이요, 바람은 만물을 두루 만나는 것이다. 천풍구(天風姤)는 많은 남성들(5양효)이 한 사람의 여성(1음효)과 만난 상태를 상징한다. 남자만의 사회에 오직 한 사람의 여자가 출현한다면 이는 남자 사회에 여왕으로 군림할 가능성을 가진다. ‘천풍구(天風姤)’의 ‘구(姤)’는 ‘만남’이다. 그것도 약속 없이 문득 만나는 일이다. 낯섦이다.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낯익은 것과의 만남을 피하고 낯섦과의 만남을 즐겨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산속에서 깨달음의 도를 닦고 있던 한 스님이 ‘내가 진정 깨달음이 있는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고 싫증도 느꼈다. 산속에서 속세로 만행(卍行)을 떠났다. 그때 프리다이빙을 접했다. 프리다이빙은 수중에서 호흡 장비 없이 무호흡으로 다이빙을 하는 활동을 말한다. 프리다이빙을 경험한 스님은 점점 재미있어진다. 10m, 20m, 30m, 이어서 100m까지 내려가 잠영하는 자유를 느끼는 정도가 됐다. 이제 프리다이빙이 없으면 삶에서 아무 재미를 못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 속 깊이 들어가 숨을 참게 되면 뇌로 가는 산소가 적어져 몽롱하게 된다. 그런 몽롱함 속에서는 의식이 없어진다. 망허(忘虛)나 몰아(沒我)가 찾아온다. 선의 경지로 들어선다. 이 경험은 마치 산 속에서 명상하던 때의 경험과 유사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산속에서 명상하는 것이나 물속에서 잠영하는 것이나 명상하는 경험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프리다이빙을 계속했다. 그러다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낯섦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흔히 친구를 사귈 때 자기와 비슷한 경험이나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사귄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인 등산동호회, 음악동호회, 드럼동호회 등에 가입하여 친구를 사귄다. 물론 기쁨이 있다. 하지만 깨달음은 없다. 그럼 무엇이 깨달음인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선종에서 하는 간화선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통해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참선법 중의 하나다. 그럼 깨달음의 척도는 무엇인가? 객관적인 선의 경지를 측정할 수 있을까? 깨달음의 척도는, 자기가 원치 않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 그리고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 여부다. 그러나 이것도 주관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다 객관적인 척도는 없을까? 여기에 프리다이빙을 통해 깨달음의 객관적인(과학적인) 척도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몇 미터 내려갔는가, 몇 시간동안 잠영했나? 하는 것을 시계로 잴 수 있다. 어떤 스님은 자살하려다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고, 숫돌에 칼을 갈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스님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원효스님의 경우도 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폭풍우를 만나 작은 동굴 속에서 이틀간 잠을 잤다. 첫날 밤은 꿀잠을 잤다. 이튿날 밤은 꿈에 귀신을 보게 되었다. 원효는 생각했다. 생각의 끝에서 ‘마음이 바뀌면 사물도 바뀌는 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원효는 세상 만물은 똑같으나 사람의 마음 먹기에 따라서 사물도 달라진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명상과 프리다이빙과의 낯선 만남, 그것은 사람의 의식을 한껏 높여주는 의식의 계단이 된다. 낯선 것과의 만남, 에이허브 선장과 거대한 흰 고래와의 조우, 모비 딕(Moby Dick)은 에이허브 선장이 가장 혐오하는 커다란 흰 향유고래로 다른 항유고래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몸집을 지녔으며(당시 존재했던 배들과 소설의 묘사로 간주했을 때 27미터가 넘는 거구로 추정) 다른 고래들과 달리 매우 교활하다. 수많은 고래잡이들을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작살에 아주 많이 맞아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듯 고래잡이들과 싸웠다. 에이허브 선장의 한쪽 다리를 잃게 한 고래다. 뱃사람들과 모비딕과의 만남은 마치 인류가 외계인들과 조우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 정신적 충격은 창조의 모태가 되고 창작에 영감을 준다. 버지니아 울프도 『모비딕』을 세 번 읽고 난 뒤 『폭풍의 언덕』과 비교하며 그녀의 일기에 “넓은 백지 상태의 바다에 고래의 지느러미가 날아오른다”는 비전으로 그녀의 작품이 『모비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고 섭공(葉公)처럼 낮선 것을 대하면 안 된다. 섭공은 용을 아주 좋아했단다. 그는 집안의 대문이나 책상, 이불 등 어디든 용을 새겨 놓고 즐겼다. 그 소식이 용에게까지 전해져 실제 용이 섭공의 집에 찾아왔다. 진짜 용을 처음 본 섭공은 너무 무서워 얼굴이 창백해지며 혼비백산 도망갔다는 이야기다. 섭공호룡(葉公好龍)의 고사다. 낯선 것과의 만남도 그 진정한 내면의 깊이를 갖기란 쉽지 않다. 필자는 고교 2학년 때 바다를 처음 보았다. 필자가 그동안 상상만 해오던 바다와는 차원이 달랐다.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낯선 것과의 만남은 이처럼 설레고 죽비처럼 자신의 고정관념을 탁하고 깨는 순간이어야 한다. 천풍구괘는 길운의 괘는 아니다. 그러나 각자의 신분의 한계를 자각하고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간다면 행운으로 전환할 수 있는 괘다. 한 여자가 많은 남자를 상대로 하는 그러한 상황이 이 괘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만난다’는 뜻의 구(姤) 자체는 행운과 기쁨을 의미한다. 다만 만난 때의 서로의 마음의 자세와 몸가짐에 탈선이 없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사심이 없이 각자의 정상적인 위치를 고수한다면 구(姤)는 행복한 괘인 것이다. 『주역』은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만나서 만물이 개성을 발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괘가 행운이 될 수도 불운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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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9
  • [육우균의 周易산책] 곤궁에서 빠져 나가는 의지의 힘(택수곤괘)-'칼의 노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택수곤괘는 위에 연못(☱)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는 모양이다. 연못에서 물이 다 빠져 내려가 물이 없는 모습이다. ‘택수곤(澤水困)’의 ‘곤(困)’은 ‘곤궁하다’의 의미다. 곤(困)은 낡은 초막집 안이 다 무너져 내려 나무가 헝크러져 있는 모양이다. 또 담으로 둘러싸인 집이나 동네를 막고 있으니 출입이나 소통이 어려운 상태이기도 하다. 군자가 소인에게 둘러싸여 곤궁한 모습이다. 이와 같은 택수곤괘와 유사한 문학작품으로 김훈의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충무공 -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단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백의종군 무렵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후 좌의정에 추정되고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참 후인 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여기까지가 이순신의 이력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배운 다 아는 이야기다. 인간 이순신의 삶 속 이야기는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이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의 힘이다. 역사가 담아낼 수 없는 인간적인 영웅의 삶을 이 소설이 보여준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혈육의 죽음에 대한 심정, 여인과의 통정 등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까지 서술되어 있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몰입도 상당하고, 함께 고뇌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 힘을 김훈의 작가 정신이 보여준다. 그의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의 힘은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의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이 소설이 출판되고 난 후 김훈의 뒷 담화다.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꽃은 피었다”로 할까, 몇 번 망설이다가 “꽃이 피었다”로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훈의 작가 정신은 그의 문장 쓰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실로 압도적인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간 이순신의 내적 갈등을 잘 표현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신의 몸이 살아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순신은 왜 ‘아직’이란 말을 사용했을까. ‘밖에’가 아니고. ‘12척밖에’가 아니고, ‘아직 12척의 전선이’라고 했을까. 이순신의 긍정의 힘이다. “비관주의자는 어떤 기회 속에서도 어려움을 보고, 낙관주의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본다‘고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위기는 기회다. 인간은 곤궁의 지극함 속에서 후회와 반성을 아니할 수 없다. 후회와 반성이 없는 곤궁은 파멸일 뿐이다. 『난중일기』를 통하여 지극한 후회와 반성의 삶을 산 이순신은 택수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택수곤괘의 효사(상6)에서 ‘유회정길(有悔征吉)’ 즉 ‘후회가 있기 때문에 나아가면 길하다’라는 묘사는 바로 인간 이순신의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매일 전쟁 중에도 일기를 썼다. 일기는 하루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일기를 썼다는 것은 습관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앞날이 길할 수밖에 없다. 택수곤괘의 효사를 보자. 지(地)의 자리다. 초9의 효사와 같이 이순신은 무과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만다. 결국 4년 뒤인 32살에 두 번째 응시하여 무과에 급제했다. 62효사와 같이 선조는 이순신의 장군으로서의 면모와 능력을 무시하고 그를 시기하여 백의종군하게 만든다. 인(人)의 자리다. 63의 효사와 같이 원균과의 경쟁에서 패한다. 원균은 칠천량까지 쫓겨가서 재기하려고 함선 100척에 거북선 5척 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단을 구성하여 일본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수군의 집중포화를 맞아 지리멸렬하면서 겨우 12척만 탈출에 성공한다. 5000년 해군 역사상 유일한 패배를 불러온 장본인인 원균도 이곳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 후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12척만 탈출시킨 배를 가지고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94의 효사와 같이 이순신은 한산도, 명량, 노량에서 대첩을 거두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다. 천(天)의 자리다. 95의 효사와 같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했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죽고 나라는 살았다. 의로운 죽음이다. 다음은 상6 효사다. 인조 때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1643). 이순신이 죽은 지 45년이 되던 해이다. 곤(困)이란 글자는 口속에 木으로 되어 있어 나무가 상자 속에 있는 형상이다. 나무란 원래 두텁고 넓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높고 시원스럽게 트인 공간으로 줄기가 오르고 가지가 퍼지면서 아무런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라나는 식물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비로소 성장하고 무성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집을 지을 때 서까래나 기둥이 되고, 또 아름드리 거목이 되고 하늘을 찌르는 교목이 된다. 이러한 나무가 네모진 상자 속에 들어가 있으면 꼼짝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곤괘는 상자(口)를 타개할 의지와 노력이 없는 자에게는 발전의 길이 없다. 험난 속에 있으면서 오히려 이를 즐길 줄 알고, 곤란하면서도 형통할 줄 하는 길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굳은 신념이 있는 큰 인물에게는 길한 괘다. 말이 많으면 궁지에 빠진다. 이순신 장군은 택수곤괘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하든 유리하든 따지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이순신은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보고 참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도 상관의 부당한 인사에 반대해 좌천되기도 하고, 상관의 부정한 행위를 반대하다가 미움을 산 적도 있다. 심지어는 임금의 명령까지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은 하늘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순신은 택수곤괘에서 말하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라는 양심의 지시에 따라서 이순신은 부정에 결코 굴복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전투를 이겨 놓고 싸웠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순신의 전략과 행동을 보면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고,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용(龍)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늘의 뜻이라 믿고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일한다면 반드시 기쁜 일이 찾아온다는 택수곤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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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2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국가적 낭비 초래”하는 대한민국 교육, 그 극복 방안에 대하여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韓고교는 황금티켓(상위권 대학 입학) 향한 생사의 전쟁터 … 국가적 낭비 초래” 이는 지난 7월 12일자 동아일보 A2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이 신문은 경제협력계발기구(OECD) ‘2024년 한국경제보고서’를 인용하여 덧붙여 설명하기를 ‘황금티켓’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한국의 교육현장이 학생들에게 ’생사의 전쟁터(life-or-death battlefield’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OECD가 비꼬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이 비효율적인 경쟁에 참여하면서 국가적인 낭비가 발생하고 또 아이를 키우는 비용까지 늘려 인구절벽을 초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 교육, 특히 고교 교육의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점은 이미 국내외의 각종 전문가들을 포함한 다수의 지식인들도 인정하여 우려를 쏟아내고 있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친한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동안 많은 진심어린 염려와 걱정을 토로(吐露)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에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이롭다(忠言逆於耳利於行)’는 가르침을 옛 고전은 이 시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하고 있다. OECD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OECD 38개 회원국 중 꼴찌인 0.72명으로 떨어진 데 대하여 “너무나 극단적인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구가 앞으로 60년 동안 절반으로 줄어들고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의 58%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낮은 출산율이 아이를 키우는 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우리 교육 시스템에 의한 결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사교육비는 27조 1,000억 원으로 학생 1인당 월평균 가구 처분가능소득의 10%에 해당하는 43만 4000원이었다. 여기에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을 뜻하는 ‘황금 티켓 신드롬’은 국가적인 낭비라는 불명예스런 평가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 교육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야만적인 경쟁에 참여하고 이 가운데 극소수만이 승자가 되는 승자독식(winner-take-all) 시스템이다. 참담한 사실은 한국의 대학생 10명 중 8명이 고등학교를 ‘생사의 전쟁터’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비율은 미국(40.4%), 중국(41.8%), 일본(13.8%)보다 월등히 높다. 특히 돋보이는 점은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닮아간다는 일본은 이미 야만적인 경쟁보다는 연대와 협력을 가르치는 유럽의 교육선진국 체제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탈아시아를 꿈꾼 일본의 야망이 이미 효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수많은 기초학문 분야의 노벨 수상자들을 보라. 이제 우리 교육은 교육부가 사교육비 절감을 이유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는 등의 부분적인 교육개혁 조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태다. 여타의 노력, 예컨대 학벌 타파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깨는 등의 근본적인 개혁이 동반되지 않고는 해결책이 요원하다. 실제로 ‘상위권 대학’ 졸업생은 ‘하위권 대학’ 졸업생보다 24.6% 정도 많은 임금을 받는 등 불공정이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의대 진학을 위한 학생 및 직장인들의 N수생 증가는 이공계열의 몰락과 함께 심각한 교육의 편중 현상을 낳고 있다. 대한민국 교육은 대학입시 제도에 얽매여 ‘백 가지 약이 무효’다. 진보교육학자들은 대학입시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선 지 오래다. 2023년 27조 1,000억 원의 사교육비를 지출한 우리 교육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낭비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이 없이도 교육선진국이자 경제, 문화의 대국으로 살아가는 유럽의 국가들을 보라. 경쟁이 없으면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고 학습 부진아를 양산하여 학교 교육이 망할 것 같은 우려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사상적 편견이다. 이는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세습제도의 고착이다. 학벌파괴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혁파하는 등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으로 우리 교육은 정체와 퇴보의 길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생존의 확실한 길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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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6
  • [육우균의 周易산책] 변화와 항상성은 삶의 균형 인자다(뢰풍항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뢰풍항괘는 위에 우레(☳)가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는 모양이다. 우레와 바람은 항상 같이 간다. 우레와 바람은 움직임 속에서도 만물을 소통시키고 생장시킨다. 그 모습이 항상성이 있다. ‘뢰풍항(雷風恆)’의 ‘항(恆)’은 하늘과 땅 사이(亘)에서 가장 한결같은 日(태양)처럼 변함없는 忄(마음)을 표현한 글자다. 그래서 ‘항상’, ‘지속’을 의미한다. 즉 ‘항상’은 ‘변화의 지속’을 말한다. 예를 들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변화하지만 지속되고 또 순환한다. 한결같은 변화가 지속되는 곳에서 삶은 유지된다. 한용운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의 첫 구절은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다. 강물은 늘 흐른다. 강물은 논개가 살던 임진왜란 당시에도 흘렀고, 지금 논개의 충절을 노래하는 한용운이 살던 시대에도 흐른다. 그러니 남강은 흐르지 않고 그냥 거기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남강은 흐른다’는 변화를 말하고,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흐른다’는 ‘지속’을 말한다. 따라서 ‘항상’은 변화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다. 변화가 지속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아남는다. 가만히 있으면 죽음으로 간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식물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임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절묘한 균형 감각의 유지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살아있을 때 줄곧 죽음이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을 늘 생각하는 자가 현명한 인간이다. 과학이나 의학에서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우리 몸의 혈관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혈관이 원활하지 못하면 뇌혈관 질환 즉 치매, 파킨슨병 등이 와서 삶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 뇌혈관 질환을 예방하려면 당연히 운동과 비타민 C를 겸해야 하고, 이것을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해야 한다. 항상성이다. 노자는 자신을 아는 것이 밝음(明)이라 했다. 자신을 어떻게 아는가? 우선 항상성을갖춘 자연의 도(道)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비로소 밝아진다. 무엇이 밝으려면 주위는 어두워야 한다.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에 보면 일엽스님이 제자에게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밝은 달이냐고 묻는다. 제자는 보름달이라고 답한다. 스님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먹(墨)을 갈던 제자는, 한참을 생각하다 까만 먹물 속에 먹이 자나가며 순간적으로 만드는 그믐달이라고 답한다. 밝을 명(明)자도 갑골문에 보면 해 일(日)이 창문의 상형인 빛날 경(冏)이 변한 것으로 ‘창문에 비치는 달빛’이란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해와 달이 합쳐져 밝다’는 뜻이 아니다. 밝은 창문 옆에 달을 배치한 모습이다. 어두운 밤 밝게 비치는 창문을 보니 거기 달이 걸쳐 있다. 이보다 더 밝은 희열을 느낄 수 있나? 해와 달이 함께한다는 단순한 결합보다 훨씬 극적이고 문학적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항상은 변화의 지속이다. 변화하는 삶도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굴곡진 삶으로 볼 수도 있고, 항상성이 있는 삶으로 볼 수도 있다. 넘치는 파도를 바로 앞에서 보면 집채만한 크기이지만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보면 바다의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길게 멀리 보는 시각을 가져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논어』에서도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라 했다. 멀리 보지 않으면 가까이에 근심이 있는 법이다. 항성성은 밸런스를 유지해야만 한다. 틀에 박힌 규제 속에서의 삶이 좋다고 기득권만 유지하려고 하면 삶의 비상은 없다. 틀에 박힌 규제 속의 삶에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비상할 수 있다. 그래야 삶의 역동성이 살아나고 만물이 생장한다. 안정된 삶 속에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한결같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다. 한결같음 속에서 신뢰가 쌓이고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결같다’는 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샘물은 항상 새로운 물을 뿜어낸다. 그래서 항상 맑다. 변화와 항상성은 늘 함께 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늘 변화해야 한다.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인 폴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보면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오직 차이만 있다는 말이다. 쌍둥이도 얼굴이 다르다. 차이만 있다. 심지어 자기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한다. 신경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루리아도 변화에 민감해서 아침의 ‘너’와 저녁의 ‘너’가 다르다고 말하며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했다. 들레즈는 반복과 차이의 철학을 만들었다. 차이란 반복의 결과라 하며, 반복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라 했다. 반복은 같음이 아닌 차이의 생성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역』에서 말한 ‘변화와 항상성’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들뢰즈는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모네의 그림(루앵 성당 연작들)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모네는 루앵 성당을 계절, 시간, 기후,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들을 그렸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빛을 포함한 여러 조건들에 의해 루앵 성당은 시시각각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차이’가 있었다. 이정우 교수에 의하면 A가 A′로 변화했을 때 그 둘의 공통인 A는 반복된다. A가 A′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만일 A와 A′가 완벽하게 동일했다면, 즉 차이가 없었더라면 A는 더 이상 반복될 이유가 없다. 모네의 경우로 말하자면, 더 이상 루앵 성당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반복은 헐벗은 반복과 내적이며 풍요로운 반복이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내적 반복과 외적 반복의 구분은 차이를 낳느냐 낳지 못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역으로 차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반복이 있다. 차이와 반복은 뫼비우스띠처럼 얽혀 있다. 여기에서 차이와 반복의 철학적 의미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자. 차이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천덕꾸러기처럼 생각되어 왔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논리로 정해진 일관된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는 사회 통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이 소수자들이 만들어내는 생성이다.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관용이나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차이를 계기로 사회가 조금은 변화되고, 그것이 질적으로 더 나은 생성이었다면 우리는 차이 나는 것들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게 된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99년 한(漢)나라 조정은 크게 술렁였다. 이릉(李陵)이 흉노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릉은 뛰어난 무장으로 보병 5000명을 거느리고 열 배가 넘는 흉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 화살은 모두 바닥이 났고 병사들도 지쳐갔다. 흉노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채 며칠 밤낮을 싸웠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릉은 남은 부하라도 살리기 위해 부득이 흉노에 투항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漢武帝)는 크게 진노했다. 문명 대국 한나라의 군대가 오랑캐로 치부하는 흉노에게 패했으니,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황제의 자존심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제의 눈치를 보던 신하도 하나같이 이릉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다른 목소리를 낸다. 바로 사마천이었다. “이릉은 항상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하며 작은 것도 나누었기에 부하들은 죽음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비록 패하였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적은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훗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뒤에서 편안하게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신하들이 그의 단점을 부풀려 말하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러면서 최고 지휘부의 작전 실패도 지적했다. 이릉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으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사마천에게로 향했다. 작전 실패를 거론한다는 것은 무제가 총애하던 이광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인 데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황제에게 찬물을 끼얹으니 황제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광리를 비난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기원전 97년 항복한 이릉이 흉노족 지도자에게 병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면서 이릉의 가족이 몰살됐고, 사마천의 처지도 더욱 어려워졌다. 사형을 앞둔 사마천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냥 사형을 받든지, 돈 50만 전을 내고 감형받든지, 아니면 대신 궁형(宮刑)을 당해 사형을 면제 받든지다. 이 중에서 사마천은 궁형을 자청했는데, 그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치욕적인 궁형의 치욕을 감내하고 불후의 저작인 『사기(史記)』를 쓰게 되었다.(중앙일보 2018. 04.16.) 이처럼 사회가 좀 더 선순환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차이’에 있다. 그것은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생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변화를 가져온다. 반복은 차이를 낳고 차이는 항상성을 낳는다. 우리 몸도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 인체의 전체 세포가 교체되는 회전 주기는 80일로 밝혀졌다.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 몸도 세포가 죽고 사는 반복으로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우리 몸을 성장시킨다. 변화와 항상성은 우리 삶의 균형 인자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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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얼굴 책임지며 살기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거창한 가치관이나 인생관은 없다. 내 얼굴 하나 편안하게 가꾸며 살고 싶다. 그것이 환갑을 맞이한 내 작은 소망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모를 가졌더라도 거친 언행을 하면 만나고 싶지 않다. 인격이나 품격은 언어와 몸가짐에서 온다. 교사에게 품격 있고 평안한 얼굴은 중요하다. 학생은 교사에게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면도하면서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본다. 마음을 보려고 얼굴을 찬찬하게 본다. 교육청으로 출근을 하면서 아침 인사를 한다. 힘들어서 짜증이 가득한 얼굴도 있고 무엇인가를 부탁해도 들어줄 것 같은 편안하고 여유 있는 얼굴도 있다. 남에게 좋은 얼굴 하나를 아침에 보여주는 것으로만 해도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고 믿고 싶다. 좋은 얼굴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날카로운 콧날과 하얀 피부, 큰 눈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편안한 것이고 진지한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매사에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손톱만큼도 자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완고한 얼굴은 보는 이에게 불편함을 준다. 연수나 출장에 가서 편안하고 배려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나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연수도 교육도 사람의 인상에 따라 분위기는 달라진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부부의 갈등이나 자녀 교육, 시부 갈등에 대한 상담 프로그램이 자주 나온다. 인물의 얼굴 변화에서 가끔씩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상담이 시작되기 전에는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는 얼굴이나 몸짓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무뚝뚝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와 분노에 가득차서 일그러져 있다. 보는 내내 불편할 정도이다. 후반부에서는 상담과 치료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를 웃으며 대하는 얼굴을 보면 같은 사람인데도 어쩌면 저리도 사람이 달라지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놀란다. 같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얼굴 모습은 정반대가 된다. 그 변화는 교육계에 있는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성형수술을 할 필요도 없고 따로 좋은 약을 먹을 필요도 없다. 그저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긍정하면 된다. 과거에 대한 분노가 아닌 미래에서 서로가 꽃길을 걷게 하고 싶다는 배려로 공유를 하면 된다. 그러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된다. 자기 마음에 꽃길을 만들어 보자.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미소를 짓고 긍정적이고 밝고 능동적인 심성을 갖도록 해 보자. 교사가 먼저 마음이 환해야 학생에게 밝은 기운을 줄 수 있다. 주변 사람이 내 마음의 꽃길을 걸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가슴을 활짝 열어주자.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사색도 하고 산책도 해 보자. 타인에게 상처받기보다는 내면에서 깨끗한 영혼을 퍼 올려 보자. 얼굴이 환해지면 세상도 환해질 것이다. 직장과 학교에서 서로가 환한 얼굴로 상대를 대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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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1
  • [전재학의 교육칼럼] 중구난방(衆口難防)의 미래교육 담론, 이대로 좋은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때 교육부가 “자, 이제 교육은 앞만 보고 갑니다”라고 선언하자 17개 시⋅도 교육청과 산하 교육기관은 서로 경쟁을 하듯이 모든 정책에 ‘미래’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미래교육 담론이 없이는 낡은 과거 교육을 지지하거나 고수하는 보수분자가 되거나 이른바 ‘라떼’를 선호하는 꼰대의 입지를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교사와 아이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과거의 서사를 낡아빠진 폐기물로 간주하고 현재의 삶은 미래를 위해서 버텨야 하는 희생적 가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미래교육 담론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이 진정한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이 말은 사실일까? 이로써 교육 현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각종 미래교육 담론은 듣기 좋은 말처럼 들리고 또 희망적인 메시지를 기대하지만 너무 화려한 개념들을 남발하는 측면이 강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여기에는 우리 교육이 지향할, 아니 지향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생태환경교육, 에듀테크, 디지털 리터러시, AI 교육, 디지털 교과서, 세계 민주시민, 창의, 혁신, 공존, 자율, 역량, 상상력, 공감, 비전, 나눔, 배려, 연대, 협력 등등의 말들이 잔칫상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잠시 현실을 직시해 보자. 만일 사교육 공화국이 되어버린 우리 교육이 근본적인 이유는 제켜놓고 ‘사교육 없는 세상’을 완전하게 실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그 내면에 깊은 고민과 숙의된 정책, 또한 공감혁명과 같은 전 국민의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지도 않으면서 대책 없는 일방적인 공언과 하등 다르지 않다. 미래교육은 유초중등교육 현장에서 각종 합성어, 신조어를 창조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이 말의 태동을 가져온 교육부와 교육청은 과거와 견줄만한 뛰어난 안목도, 지원할 의지도, 수행할 능력이 존재하는가? 왜냐면 발표하는 모든 정책이 당사자인 교사, 학생, 학부모를 중심에 두지 않고 소위 탁상공론이자, 현상유지에 따른 책무처럼 쏟아내기에만 바쁘다는 의심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이제 미래교육이란 추상명사는 교육의 중추인 교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되었고 교사는 이를 견뎌내야만 하는 고문이 되었다. 초등교사 서재민은 『미래교육 이전에 내 미래가 더 걱정이다』에서 교사로서의 무력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2019년 7월, 서울시교육청은 ‘혁신학교’와 ‘미래학교’를 합친 ‘혁신미래학교’라는 새로운 학교 모델을 만드는 정책을 발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제시한 ‘혁신미래학교 4대 중점과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사회를 대비한 교육과정과 학교환경’(미래학교)과 ‘교원의 성장과 협력의 학교문화’(혁신학교)를 한 학교에서 구현하려는 구상이다. 정말 ‘잘 되면 좋겠다’고 먼 곳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정철희, 『교사의 고통』, 2024) 이처럼 미래교육 담론은 그야말로 신기하고 오묘한 말들의 조합이 앞선다. 이는 현장 교사들의 삶을 더욱 지치고 어둡게 만든다. 왜냐면 미래교육 담론은 갖가지 통합적 가치들을 마치 교사들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처럼 화려하게 장식하여 학교라는 쇼윈도우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교육 담론은 결코 학교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사들의 진정한 변화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공포 조성과 현상 유지의 두 부정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 교육당국은 각종 미래교육 담론을 내세워 교사에게 지나친 강요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한 그 이면에 정책 입안자들의 현상 유지를 위한 아이디어 남발은 없는지도 살펴볼 일이다. 오늘도 학교 현장에 배달되는 각종 공문은 교사의 자발성과 교육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지 세심한 검토와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과유불급’이라 하듯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없는 것만 못하다. 현재 교육부가 쏟아내는 중구난방의 미래교육 담론은 하나라도 제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이상 교육 현장을 혼란케 하여 교육개혁 주체인 교사들의 정서적, 심리적 안정성과 자발적 의지를 박탈하는 일은 자제하기를 바란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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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9
  • [육우균의 周易산책] 군대는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지수사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지수사괘는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는 모양이다. 땅 속에 물이 있는 모습이다. 왜 ‘땅 아래’라 하지 않고 ‘땅 속’이라 했을까? 그것은 땅 속의 물이니 냇물이나 샘물처럼 노출되어 있는 물이 아니라 숨겨진 ‘지하수’를 의미한다. 고조선 시대에는 병농일치의 사회였기 때문에 군(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농(農) 속에 병(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 시대 농부는 평상시는 농부였다가 전쟁이 나면 병사로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다. 어제까지 농부였다가 오늘 갑자기 독립군이 되는 그런 시대였다. 군대는 힘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또한 군대는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에 비유할 수 있다. 군대는 고도로 조직되고 효율적인 단위를 나타내고, 기계의 다양한 구성 요소는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 장비 및 시스템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모는 다중의 다양한 조직을 하나로 각지게 잘 다듬는 것을 말한다. 훈련소에 가면 제식훈련을 통해 말하는 습관(-다. -나. -까.)까지 바꾼다. 마치 마모된 기계를 기름칠이 잘 된 기계로 바꾸는 것같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는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다.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라는 은유는 군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규율과 질서뿐만 아니라 고장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 깊은 유지 관리를 의미한다. 의용소방대, 경찰, 소방대원 등 유니폼을 입은 조직도 모두 군대라는 조직처럼 하나로 움직인다. 명령에 죽고 사는 조직인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요건은 다섯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는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야 한다. 나폴레옹, 징기즈칸, 히틀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졌다. 그와는 달리 침략전쟁에 맞서 싸운 장수들도 있다. 이순신, 처칠, 맥아더 장군 등이다. 이들은 전쟁에서 대의명분이 서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훌륭한 장수들이다. 둘째는 훌륭한 지휘자가 있어야 한다. 훌륭한 지휘자란 몸가짐이 바라야 한다. 필승의 신념이 있고, 정의를 위하여는 언제든지 한 몸을 나라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부하를 아끼고,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할 수 있고, 공정하고, 정당하고, 의젓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충분한 역량이 있어야 한다. 지혜와 식견과 전략과 판단의 현명과 실천의 과단 등등의 요건이 겸비된 탁월한 장수라야 한다. 넷째는 군대의 통솔에는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집단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의 확립이다. 질서의 확립은 규율에서 나온다. 규율이야말로 군대의 생명인 것이다. ‘군명여산(軍命如山)’이라 했다. 군명은 태산같이 무게가 있고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에 규율이 해이하면 그것은 오합지졸이고 명령 계통이 설 수 없다. 제갈량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떠올리면 된다. 이밖에도 우수한 무기, 풍부한 보급과 경제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전쟁은 돈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쟁은 실패한다. 다섯째는 군인의 정신력이다. 정신력은 무기보다 중요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을 보아 알 수 있지만 미국의 우수한 무기를 그렇게 쏟아 붙고도 전쟁에서 참패했다. 그 원인은 바로 월남군의 정신력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6일 전쟁을 보아도 실감난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스라엘 대학생과 이슬람 대학생의 행동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는 하숙집 주인의 말이다.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를 듣고 이스라엘 대학생은 바로 비행기표를 샀단다. 왜 비행기표를 샀냐고 했더니 내 나라에서 전쟁이 났는데 나라도 가서 도와줘야 한다고 했더란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시작하고 끝맺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일화다. 전쟁과 관련된 문학작품을 찾아보면 우선 2001년 출간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들 수 있다. 위에서 말한 훌륭한 지휘관의 요건을 갖춘 장수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시작할 무렵부터 임진왜란 중 장렬하게 전사하기까지의 삶을 당대의 국내외적 사건 속에서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자신의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은 영원한 호국정신의 한국적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명량’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져 천만 관객을 동원하였다. 6.25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이제 징병제냐 모병제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답은 나와 있다. 모병제다. 왜? 현재는 인구 절벽 시대를 넘어 인구 소멸 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징병제를 하려고 해도 군인으로 뽑을 사람이 없다. 대안은 모병제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모병제를 하면 일자리도 많아지고 전문적인 군인을 만드는 데도 유리하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요즘 전쟁은 드론 전쟁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최첨단 현대전이다. 6・25 때처럼 백병전하는 구식 전쟁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960여 차례 이민족의 외침을 당한 민족이다. 그러한 외침에 굴하지 않고 오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나라다. 그러한 유전적인 힘은 바로 ‘용민휵중(容民慉衆)’에 있다. ‘민중(民衆)’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힘 있는 군대를 육성하려면 그래서 세계 평화를 바란다면 먼저 백성을 포용하고 그러한 포용심으로 다중의 힘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저마다 파란만장한 군대 시절이 있다. 삶을 사는 내내 저마다 경험한 군대 시절을 꺼내볼 일이다. 왜? 우리는 그때 젊었으니까. 모든 게 용서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의 화양연화는 군대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그렇게 가슴 뛰는 열정이 있었나 되새겨 본다. 최백호의 「입영 전야」를 가만히 불러본다.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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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8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가 ‘애도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매년 7월이 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추억의 교과서에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로 시작되는 이육사의 ‘청포도’가 등장한다. 이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현대인의 작은 낭만이자 소회의 시간이다. 하지만 올해는 서이초 교사의 가슴 아픈 죽음을 애도하며 그동안 누리던 소시민의 문학적 낭만을 대체하게 되었다. 왜냐면 학교 공동체가 사람의 존엄을 기르는 대체 불가의 장(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의 철학’에서 출발해 학교가 만들어가야 할 ‘애도 공동체’의 탄생이다. 애도는 상실을 마주하는 것으로 떠남과 죽음에 대한 공허함에서 연유된다. 곁에서 함께 하던 사람의 죽음은 지극한 슬픔이다. 그래서 부모의 죽음은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칭하며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절정을 상기한다. 이러한 상실감의 정서를 극복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애도의 시간이다. 교육철학 전문가이자 17년차 교사이며 작가인 정철희는 저서 『교사의 고통』에서 “애도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상실을 견뎌낼 수 있는 근원적 힘”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그에 의하면 ‘애도 상실의 문화’는 상실과 마주하는 시간을 ‘사치’로 여긴다. 애도가 잉여의 시간이 되면서 우리 사회의 상실에는 등급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죽음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묻기 시작했고, 그것이 어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애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일찍이 이러한 ‘애도의 등급화’를 비판한 미국의 철학자가 바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이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죽음을 온전히 애도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어떤 삶은 애도가 가능하고 어떤 삶은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즉 ‘애도 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실례로 미국의 9⋅11 참사 이후에 벌인 생명에 대한 정치화는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을 ‘공적 부고란’에 올리면서도 그 사건의 용의자들은 수용소에 무기한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으로 정치적 구별을 당했다. 이와는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태원 압사 참사로 인해 156명의 희생자 역시 허망한 죽음으로 애도의 대상자 이면서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이라도 했나?”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부 정치권과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비판자들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그들의 유가족과 젊은이들을 자녀로 둔 다수의 국민들은 그 애통함을 달랠 길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진상 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만 구천을 맴도는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다. 애도는 상실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영원한 변화의 인정’에 있음을 버틀러는 주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수많은 교사들의 상실(최근 6년 사이에 100명의 죽음)에 진정한 애도를 보여주려면 그 상실이 가져올 영원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 상실을 초래한 원인을 근원적으로 바꾸기 위한 일들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본질적인 애도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학교라도 그 역할을 기꺼이 해야 한다. 이는 더 이상의 죽음을 교사가 선택하지 않도록 영원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애도 공동체’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교사는 동료의 얼굴에서 눈빛이 아닌 눈치를 읽어내는 것에서 탈피하고 감정이 아닌 검증을 공식화해야 한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가는 교사들과 휴직을 청한 교사들이 건강한 마음과 몸을 회복하거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학교는 다정한 배려와 격려가 필요하다. 교사 상호 간에는 ‘너’없이 ‘나’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추모와 애도의 7월을 맞으며 그동안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동료 교사들에 대한 진정한 돌아봄의 시간을 통해 학교가 ‘애도 공동체’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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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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