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6(토)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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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서양의 근대 문화에 접하게 된 조선 정부는 구래의 전통적 유교 교육을 청산하고 서구의 신문화를 섭취하기 위한 신식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민간 유지들에 의해서도 일종의 민중 교육 운동이 추진됐고 조선에 진출한 기독교계 선교 단체들에 의해 선교 계통의 학교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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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교과서 전시 모습 ◀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한 이 시기 교육 운동가들의 구호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시기의 교육 운동은 국권의 수호를 위한 결의였으며, 생존을 위한 실력 배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민중 교육 운동은 보통 교육 분야뿐만 아니라 중등 교육 내지 전문 교육의 영역으로 확대돼 가고 있었으며, 여성 교육과 기술 교육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근대 초기의 교육은 학교급이 나눠 시행된 것이 아니었으며,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근대 말기에 이르러서야 초등 교육 기관과 중등 교육 기관으로 학교급이 분별되게 됐다. 학교급의 분화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소학교의 경우에 소학교령(小學校令)이 1895년 7월 19일부로 처음 초등 교육의 관제(官制)가 정해졌다. 이 영(令)은 본령 4장 29조로 돼 있다. 1장은 소학교의 목적 및 종류·경비로 돼 있고, 2장은 소학교 편제 및 취학, 3장은 학교 설치 및 감독, 4장은 직원에 대해 각각 규정하고 있다.


▮ 중학교는 1899년 4월 4일에 공포된 중학교 관제에 의해 처음 중등 교육에 대한 관제가 정해졌다. 전문 17조로 된 학규(學規)로 돼 있다.


▮ 외국어 학교의 경우에 1895년 5월 10일 전문 11조로 된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됐다. 외국어 학교는 외국의 어학을 교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1조), 외국어의 종류는 필요에 따라 학부대신이 정하도록 했으며(2조), 학부대신은 필요에 따라 지방에 분교를 둘 수 있고(3조), 직원은 학교장 1인, 교관 4인 이하, 부교관 5인 이하, 서기 3인 이하를 두되(4조), 필요한 경우에는 교관·부교관 또는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으며, 그 인원수는 학부대신이 필요에 따라 정하도록 했다(11조).


▮ 실업학교에 대한 관제는 1889년 3월 24일 의(醫)학교 관제, 동년 6월 24일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 관제가 발표됐다. 설립된 학교는 1889년 2월 정부에 의해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뒤에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발전됨.), 같은 해 5월 상공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예과·본과를 두고, 농·상·공업을 가르쳤다. 이후 5년 후에는 1904년 농공상학교로 개칭했다. 편제는 농과·상과로 나누고, 수업 연한을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 정했다. 그 뒤에 농과는 수원농과학교, 공과는 경성공업전습소, 상과는 선린상업학교로 발전했다. 또, 1900년 8월 광학(鑛學)·실업을 가르치는 광무학교(鑛務學校), 1897년 우무학당(郵務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이 나타났으나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둘 다 폐지됐다. 또, 1895년 3월 당시 법원이었던 평리원(平理院) 안에 새로 법관양성소가 생겼는데 이것이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前身)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는 적용 면에서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 하나는 민간인 발행 교과서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교육부라고 할 수 있는 학부에서 발행한 정부 주도의 교과서이다. 이 시대의 교과서의 특징은 민족주체성 확립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민간 발행인 교과서가 더욱 그러했다.


▮ 1895년 정부 기관인 학부 발족과 함께 가장 주된 업무가 교과서 편찬 발행과 각급 학교의 설치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정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국민소학독본』과 『조선역사』 등을 시작으로 학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과서들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부대신 보좌원으로 일본인들을 고용하게 되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교육 행정의 실질적인 권한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됐다.


▮ 교과서 검정제가 1907년부터 일본인에 의해서 생겨남으로써, 이후 민간 발행인 국민 교육 도서가 사라지게 되고 서서히 일본인의 구미에 맞는 친일파적인 교과서로 변해 가게 됐다. 1909년에는 대부분의 우리 교과서들이 금지되고, 1910년에 20여만 권이 넘는 교과서가 일본인들에 의해 압수돼지고 불태워지게 된다. 이 시기 교육의 핵심은 외국어 교육, 교사 양성, 실업 교육에 비중을 뒀으며, 기회 균등 사상이 각성됐다. 

 

교과서의 특징으로는 근대적인 인쇄술 및 장정술이 도입됐고 용지 등의 자재 사정이 개선됐다. 주로 정부의 학부에 의해 국정 교과서로 발행됐으며, 교과서에 처음으로 삽화가 도입됐다.


▮ 소학교용 교과서(심상과 3년)로는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한국 지리』, 『국사』, 『도화』, 『외국어』 등이 있었다. 

 

고등과(2년 또는 3년) 교과서로는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본국 지리』, 『본국 역사』, 『외국 지리』, 『외국 역사』, 『이과』, 『도서』, 『체조』, 『제봉(여아)』, 『외국어』 등이 발행됐다.


▮ 중학교 교과서(심상과 4년)로는 『윤리』, 『도덕』, 『작문』, 『역사』, 『지리』, 『산술』, 『경제』, 『박물』, 『물리』, 『화학』, 『도화』, 『외국어』, 『체조』 등이 있었다.

개화기의 교육 기관으로는 경학교, 사범학교, 한성사범학교, 한성중학교, 중학교, 실업학교, 소학교, 서당, 사숙, 외숙, 강습소 등이 대표적이었다. 

 

당시에 발행됐던 몇몇 교과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국민소학독본』은 1895년 7월에 간행된 최초의 관찬 교과서로서 신식 학교의 교과서로 처음으로 국문이 교과서에 정식으로 등장했다. 명현의 행덕을 중심으로 도덕 교육에 중점을 뒀으며 처음으로 국문이 교과서에 등장했다. 애국심에 관한 것, 교육(면학), 국제 이해, 역사, 지리, 기술, 동식물, 경제, 과학, 사회 윤리, 이렇게 열 개 분야로 내용이 편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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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소학독본』 ◀


▮ 『신정 심상소학』은 3권 체제의 교과서로서, 학교와 학년 체제에 맞춰져 있고 비교적 언문일치에 가깝다. 농·공·상에 대한 것, 동식물에 관한 것, 자연 현상과 사회생활 등 여러 내용이 혼합돼 있다. 교과서 본문에 처음으로 삽화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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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정 심상소학』 ◀


▮ 『유년필독』은1907년 현채가 초등학교의 역사와 지리 교육을 위해 편찬한 교과서이다. 4권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휘문관(徽文館)에서 발행했다. 국한문 혼용체이며, 한자에는 한글토를 달아놓았으며 총 132과(課)로 구성돼 있다.

책머리의 범례를 통해 살펴본 이 책의 간행 목적은 애국사상의 고취를 위주로 해 역사·지리 교육을 통해 민족의 전통적 주체성을 확립시키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세계 사정을 익혀 국제 경쟁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국민을 교육함에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책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와 세계 사정을 개괄, 설명, 소개한 글로 엮어져 있다. 유년용 교과서로서 그 대상이 아동에 한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기 쉬우나, 편찬자의 의도는 장년과 노년층까지를 포함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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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필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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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교과서박물관이 전하는 교과서 이야기㈎ - 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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