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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나주!
[교육연합신문=이정은 학생기자] 긴 추석 연휴를 맞아 전라남도 나주시를 방문했다. 오랜 역사를 품은 도시인만큼 문화유산과 유적지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나주향교는 향교 건축양식을 대표하고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유산이다. 향교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요즘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학교로,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의 성현 27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며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유학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제향 기능), 학생들이 유학을 교육하기(강학 기능)때문에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이 핵심공간이 된다. 특히, 나주향교는 대성전이 명륜당 앞쪽에 위치해 있는다는 것이 가장 큰 특색이다. 향교가 자리 잡은 곳이 평지인 터에서는 앞 쪽에 제향공간을, 뒤쪽에 강학공간을 배치해 제향공간이 높은 위상을 갖게 하고, 경사진 터에서는 높은 뒤쪽에 제향공간을 두고 앞쪽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어 높이 차이를 이용해 제향공간의 위상을 높인다. 즉,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인 대성전은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고 평지에 건축돼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향교의 가장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보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대성전 건물 가운데 규모나 격식 면에서 가장 유교건축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특히나 대성전 벽 흙은 공자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하며, 서울의 성균관을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을 때 나주 향교 대성전을 참조해 지었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다. 전라남도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나주 향교를 비롯해 금성관, 나주학생독립기념관, 영산강,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등 생생한 역사 현장의 발자취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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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 청소년들, 어떤 느낌이 들었나?
[교육연합신문=임선아 학생기자] 제25회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대한민국에서 8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총 12일간 진행된 후 폐막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이후 처음으로 열린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이다. 영국, 미국, 벨기에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스카우트 대원들이 이번 행사에 참가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잼버리 대회 준비 과정에 있었던 미흡함과 진행 중에 발생했던 각종 사건사고들을 보도하며 그 책임 소재를 가리고자 하고 있다. 실제 잼버리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한국 스카우트 대원인 노OO 양은 "잼버리의 장점과 단점을 알려줄 수 있겠냐"는 질문에 "외국 친구들과의 우정을 다질 수 있는 좋은 만남이었으나, 시설과 환경의 열악함, 그리고 뜨거운 더위는 견딜 수 없었다"고 답했다. 또한 "마지막 날 보았던 K-Pop 콘서트도 인상적이었지만 외국인 스카우트 대원들과 벌였던 춤판, 그리고 장기자랑이 가장 즐거웠다"고 말했다. 공식 일정이 끝난 이후에도 한국에 남아 경복궁과 남산타워 등 여러 관광 명소들을 방문하고 있는 여러 스카우트 대원들의 얼굴에 띄워진 환한 표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열린 이번 세계잼버리대회는 분명 수많은 스카우트 대원들에게 뜻깊고 즐거운 시간이 됐을 것이다. 세계잼버리대회는 결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열리는 행사가 아닌, 세계 각국에서 온 청소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 종교, 문화를 초월해 우정을 나누고 추억을 만드는 청소년들의 행사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청소년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이 행사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그 의의를 충분히 느끼며 의미 있는 12일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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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굴욕의 역사 위에서 내일을 생각하자
[교육연합신문=정예원 학생기자] 서울 송파구 송파나루길 256, 이 곳에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에겐 놀이동산 등으로 익숙한 지역이며, 즐겁고 신나는 추억들이 많은 이 지역에 굴욕스러웠던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다. 이 곳에 위치한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는 1639년(인조17)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의 강요에 따라 세운 공덕비이다. 원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이며, 이 비문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원래 석촌호 주변에 세워졌으나, 청일전쟁 이후 고종 32년에 치욕적인 역사를 잊고자 이 비문을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굴욕의 역사를 각인시키고자 다시 비문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치욕의 역사를 잊고자 이 지역 주민들이 땅속에 삼전도비를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인해 다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삼전도비를 지금의 장소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한다. 삼전도비를 찾아가보면 비석은 하나인데 비석 받침대가 두 개이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의 비석이 조성되기를 원하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 만들어진 비석 받침대는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궤구고두례(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으로 세 번 무릎을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도 치욕스러운데, 비석 받침대가 두 개인 이유를 알게 되니 더욱 서글퍼졌다. 삼전도비는 그 옛날처럼 강변에 우뚝 선 랜드마크가 아니며, 555미터 높이의 롯데월드타워 아래에 있는 5.7미터 높이의 초라한 유물이다. 삼전도비에 새겨져있는 치욕의 글자들도 400년의 풍파에 시달려 거의 알아보기 어려웠다. K-pop이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GDP 13위(2022년 기준)에 빛나는 우리나라, 이대로 치욕의 순간은 끝난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미, 중, 러, 일 등의 국가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있다. 심심치 않게 '삼전도의 굴욕'이 신문 일면에 오르내리는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 번 지나간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역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다를 것이다. 굴욕의 역사가 주는 의미를 곱씹어 생각하면서, 우리의 내일을 준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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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및 명칭 변경…진행 상황은?
[교육연합신문=강문현 학생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국보‧보물‧사적‧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국가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지정 시 부여된 번호(이하 지정번호)를 표기하지 않도록 문화재 지정번호제도를 개선하고, 행정 서식 등에도 적용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2021년 11월 19일부터 시행했다. 문화재 지정번호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 지정 시 순서대로 부여하는 번호로, 일부에서 문화재 지정순서가 아닌 가치 서열로 오인해 서열화 논란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었다.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마치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 중 가장 서열이 높고 중요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청 내부에서만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었다. 따라서 숭례문은 ‘국보 1호 숭례문’이 아닌 ‘국보 숭례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됐을 때의 불편함 또한 제기됐다. 2개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문화재이다. 각각 제78호와 제83호였으나 지정번호를 더 이상 표기하지 않게 되니 검색과 관련한 문제 등이 생길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자, 지정 연도, 지정 순번 등을 붙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 안내판과 안내도의 수정으로 인한 만만치 않은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사실상 이 정책은 실효성이 없다. 당장 지자체 관리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었고, 문화재 안내판이나 홈페이지에서는 아직도 예전 표기방법으로 적혀있는 곳이 대다수이다. 문화재청은 올해 이와 같은 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재 지정번호의 폐지가 논의됨과 동시에 ‘문화재’라는 명칭의 변경도 같이 논의됐었다. 문화재라는 용어는 무형유산 등을 포괄하기에는 사물의 느낌이 있어서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바 있고 논의를 거쳐 2022년 4월 21일, ‘문화재‘ 대신 ’국가유산‘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실효성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홍보가 부족할 뿐더러 대중들도 잘 알지 못해 거의 10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사용된 용어를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대중들의 국가유산에 대한 관심과 문화재청의 노력이 더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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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영화 '엘리멘탈', 누적 관객 수 500만 돌파
영화 엘리멘탈, 누적 관객수 500만 명 돌파, 그리고 그 속의 인종 차별에 관한 메시지를 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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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킴이기자단] 세조의 길을 비켜준 정이품송
[교육연합신문=신주란 학생기자] 이 소나무는 충청북도 보은군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 103호인 정이품송이다.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오래된 소나무이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조선 세조(1455~1468)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임금이 탄 가마인 연이 나무가지에 걸리어 지나가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해 세조가 ''소나무 가지에 연 걸린다.''라고 말하자 밑가지가 저절로 들려 그 밑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세조는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소나무는 '연걸이 소나무' 또는 '정이품송'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을 그 시대에 어린 단종의 왕좌를 빼앗고 왕이 된 세조(수양대군)가 '자신은 신성한 존재인소나무도 길을 내어주는 신성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소나무가 서 있는 앞마을의 이름을 진허(陣墟)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 당시 세조를 수행하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다는 데 연유한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충성스러운 전설을 안고 오래 살아오는 동안 각종의 피해도 받았는데, 특히 1970년 이후부터 우리 나라의 소나무에 큰 피해를 준 솔잎혹파리가 이 나무에도 피해를 주어 1982년 넓은 보호구역을 만들어 철책을 치고 길을 약간 우회시키는 등 보호 조치를 취해 생기를 되찾게 한 바 있다. 그리고 1993년 2월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와 2004년 3월의 폭설이 서쪽가지를 훼손했다. 정이품송이 더 훼손되기 전에 방문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