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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의 고용정책 칼럼] 함께 성장하는 조직이 경쟁력이 된다
[교육연합신문=이수연 칼럼] 좋은 조직은 우수한 인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소통하고 협력하는 문화가 있을 때 조직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뛰어난 기술과 훌륭한 제도를 갖추고 있어도 구성원 간의 신뢰와 협력이 부족하다면 기대하는 성과를 만들기 어렵다. 최근 기업과 공공기관을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업무환경의 변화, 다양한 세대가 함께 일하는 조직문화 속에서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조직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협업 역량을 높이는 과정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며 느끼는 것은 조직마다 필요한 교육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조직은 리더십이 필요하고, 어떤 조직은 소통과 협업이 우선이며, 또 다른 조직은 민원 대응이나 조직문화 개선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교육은 정해진 프로그램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특성과 목적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공공기관과 기업을 대상으로 다양한 맞춤형 교육과 워크숍을 운영하며 조직의 성장과 변화를 지원해 왔다. 교육에 앞서 기관의 특성과 업무환경, 구성원의 요구를 분석하고, 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참여형 워크숍을 통해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단순한 강의보다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낸다. 실제로 조직활성화와 리더십 교육, 팀워크 향상을 위한 참여형 프로그램, 스트레스 관리, 특별민원 응대교육, 공공재정환수법 교육, ESG 교육, 장애인 고용 담당자 역량강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운영하며 기관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 왔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종류가 아니라 교육 이후 구성원들의 행동과 조직의 변화이다. 교육이 업무에 적용되고 조직문화 개선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교육의 가치는 완성된다. 교육은 사람을 성장시키고, 사람의 성장은 조직을 변화시킨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업무의 효율성은 높아지고 조직에 대한 신뢰도 함께 커진다. 결국 조직의 경쟁력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앞으로의 HRD는 교육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조직의 변화를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기관과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역량과 조직문화를 함께 키우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직의 미래는 사람에게 달려 있고, 사람의 성장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구성원 한 사람의 변화가 조직을 바꾸고, 조직의 변화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사람과 조직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HRD의 가치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고용서비스, 시니어와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일자리 지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수연 ◇ 인천대학교 경영대학원(MBA) ◇ (주)채움HRD 대표이사 ◇ 고용·교육정책 및 HRD 분야 전문가 ◇ 인천지방고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 ◇ 인천출입국·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위원 ◇ 인천해양경찰서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 인천발달장애인훈련센터 전문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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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적 교사’를 기다리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언제부터인지 우리 학교 현장의 교사들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교사의 정상적인 교육활동조차 “아동학대”, “정서적 학대”로 얽혀 고소·고발을 당하며 교실의 사법화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2023년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교권 5법’이 순차적으로 시행된 지 3년이 흘렀으나 현장에서는 갈수록 악성 민원에 의한 교권 추락으로 공교육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오죽하면 최근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이 취임하자마자 교사 살리기에 나서 악성 민원인을 형사고발까지 하기에 이르렀을까? 이러한 시기에 우리의 유·초·중·고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교사는 진정 어떤 인물인가? 세상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 인물 돈키호테를 흔히 무모한 이상주의자나 환상에 사로잡힌 정신이상자로 기억한다. 우스꽝스러운 투구를 쓰고 거리의 거대한 풍차를 거인이라 부르며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현실 감각이 결여된 행동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외친 “풍차를 향해 싸우라(Fight the windmill)”라는 사자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타성에 젖은 세상을 깨우는 거대한 용기와 결기가 숨어 있다. 현역 시절 덕장이자 명장으로 알려진 강신철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현 국방부 장관)이 장병들에게 돈키호테의 정신 자세를 주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대하고 불투명한 위협 앞에서도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정의를 위해 주저 없이 돌진하는 야전의 군인 정신, 그것이 바로 현대판 돈키호테의 본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쟁터와 비견될 만큼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학교 교육 현장은 어떠한가? 교사들에게도 이 돈키호테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요구된다면 지나친 비교이고, 비현실적인 것인가? 안타깝게도 현재의 초중고 교육 현장은 서두의 표현처럼 무력감과 몸 사리기가 팽배해 있다. 교권 추락, 악성 민원, 과도한 행정업무 속에서 수많은 교사들이 ‘무사안일’과 ‘중립’이라는 안전지대로 피신하고 수동적 방어 태세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풍차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숙이고, 거인이 나타나도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이 영리한 처세술로 통한다. 그러나 소신을 버린 교사 밑에서 아이들이 삶의 본보기와 용기를 배울 수는 없다. 지금 교육 현장에 필요한 것은 관성에 맞서 올바른 교육적 신념을 향해 돌진하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교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교육적 인물들 역시 당대에는 모두 ‘무모한 돈키호테’라 불렸다. 19세기 말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John Dewey)가 개혁적 진보주의 교육을 주창할 당시, 전통적 주입식 교육에 젖어 있던 사회는 그를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로 치부했다. 그러나 듀이는 타성이라는 풍차를 향해 끝없이 교육 개혁의 창을 내던졌고, 마침내 현대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미공군 사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 활동을 통해 민족 교육에 앞장섰던 임창호 목사나 노백린 장군 역시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광인처럼 보였다. 무장 투쟁과 교육이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모든 것을 던졌던 그들의 무모한 용기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교육에서 소환하고자 하는 돈키호테 정신이란 무작정 현실을 무시하고 돌진하는 가벼운 호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옳은 길이라면 세상의 비웃음과 난관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단단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교사는 입시라는 거대한 구조적 풍차 앞에서도 학생 한 명 한 명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이다. 당장 눈앞의 성과나 안전에 연연하기보다, 교육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교단에 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교사가 홀로 외롭게 풍차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돈키호테 곁에 충직한 산초 판사가 있었듯, 교육 당국과 학부모, 그리고 사회는 소신 있게 교육 활동을 펼치는 교사들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안전망이 되어주어야 한다. 학생 교육이라는 본질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려가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돈키호테 교사’들이 늘어날 때, 비로소 우리 교육의 타락한 풍차는 멈추고 새로운 희망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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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넘어지지 않는 아이는 자전거를 배울 수 없다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학교는 기성품이나 완제품을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개인의 가능성을 최대로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 아이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균형을 잃을 때마다 자전거는 쓰러졌다.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아주던 부모가 슬며시 손을 놓는다. 아이는 그것을 모른 채 페달을 밟는다. 얼마를 달린 뒤에야 혼자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홀로 바람을 가르던 기쁨. 그 성취감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요즘 부모와 학교를 볼 때 걱정스러운 면이 많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가 넘어질 기회를 줄이려 하고 있다. 지는 것도 안 되고, 뒤처지는 것도 안 되며, 다른 아이와 비교되는 것도 조심스럽다. 서울 초등학교에서 교내 상장이 줄어들고 운동회가 경쟁보다 놀이 중심으로 바뀌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경쟁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일만 배우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최선을 다했어도 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해 준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졌다면 아이는 묻게 된다. ‘왜 졌을까. 무엇이 부족했을까. 다음에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이 질문들이 바로 성장의 시작이다. 넘어졌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패배는 인격의 패배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다음 시도를 위한 배움 자료이다. 학교 교육과정 내용과 가정교육의 경험과 실증을 통하여 이 진실을 느끼도록 교육해야 한다. 상을 받았을 때 기뻐하는 것도 배움이지만, 상을 받지 못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더 큰 배움이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경험은 시험지에 답을 적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험이다. 지고도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운 아이가 긴 인생에서는 더 단단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위대한 성취는 위대한 실패의 덕분이다. 도전과 실패는 인간을 성숙시킨다. 학교가 점점 이런 경험을 배우기 어려운 공간이 되고 있다. 교사는 칭찬 하나에도 형평성을 걱정하고 질책 하나에도 민원을 염려한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더 깊은 사랑은 상처받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고 회복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학교 밖의 세상은 학생의 감정을 배려해 주지 않는다. 원하는 대학에 모두 갈 수 없고, 원하는 직장을 모두 얻을 수도 없다. 성실해도 선택받지 못하고 옳은 일을 하고도 실패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실패를 피하는 능력이 아니다. 회피는 문제를 없애주기보다는 더 심각하게 키우게 된다. 실패를 해석하고 다시 시작하는 능력은 실제로 성장에서 매우 핵심적인 능력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학교가 더 깊이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실패를 견디고, 갈등을 조정하고, 타인의 승리를 인정하며, 자신의 패배를 딛고 다시 도전하는 힘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학교가 그 힘을 키워 주어야 한다. 좋은 교육은 아이 앞의 모든 돌을 치워주는 일이 아니다. 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리고 가르치는 일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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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의 고용정책 칼럼] 함께 오래 일하는 힘
[교육연합신문=이수연 칼럼] 좋은 채용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어렵게 채용한 인재가 오랫동안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고, 근로자 역시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며 미래를 준비하고 싶어 한다. 결국 채용만큼 중요한 것은 좋은 인재가 오래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인력 확보보다 인재 유지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채용 이후 짧은 기간 안에 이직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기업은 반복적인 채용 비용을 부담하게 되고, 근로자는 경력 형성의 기회를 충분히 쌓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속 가능한 고용을 위해서는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내일채움공제는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재직자 지원사업이다.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일정 금액을 적립하여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근로자는 목돈을 마련하며 기업은 핵심 인재를 안정적으로 육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단순한 금전적 지원을 넘어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는 내일채움공제 위탁판매기관으로서 기업과 근로자가 제도를 보다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상담과 신청을 지원하고 있다. 제도의 내용을 안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상황과 근로자의 여건을 함께 살펴 적합한 참여 방안을 제시하며, 사업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사람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결국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근로자 역시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조직에 대한 신뢰와 만족도는 더욱 높아진다. 장기근속은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기업은 숙련된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근로자는 경험과 역량을 쌓으며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선순환은 기업 경쟁력을 높일 뿐 아니라 지역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앞으로의 고용정책은 단순히 일자리를 늘리는 것을 넘어 좋은 일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만큼 사람을 성장시키고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기업은 사람을 남기는 기업이고, 좋은 일자리는 오래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자리이다. 기업과 근로자가 미래를 함께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내일채움공제가 가진 가장 큰 가치이며 우리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이유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사람 중심의 조직문화를 만드는 공공기관·기업 맞춤형 교육과 조직문화 혁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수연 ◇ 인천대학교 경영대학원(MBA) ◇ (주)채움HRD 대표이사 ◇ 고용·교육정책 및 HRD 분야 전문가 ◇ 인천지방고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 ◇ 인천출입국·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위원 ◇ 인천해양경찰서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 인천발달장애인훈련센터 전문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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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의 생존 치트키: 인성(人性)교육의 중요성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자고 나면 쏟아지는 언론의 화두는 인공지능(AI)이다. 그만큼 괄목상대하게 발전하는 시대의 대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 이세돌 국수와 최근 신진서 국수의 AI 알파고와의 바둑 대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알파고의 후예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지막 희망’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이 필요하다. 만약 인공지능(AI)과 인공인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미래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코딩? 파이썬? 데이터 분석? … 미안하지만 이 시대 그런 기술들은 이미 생성형 AI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도 지치지도 않고 초과 근무 수당도 요구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지식의 양으로 AI와 맞짱을 뜨겠다는 건,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 장인이 되겠다고 덤비는 어리석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는 정답을 빠르게 콕 집어내는 ‘정답 기술자’수능 교육의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 인간이 AI를 제치고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치트키’는 무엇인가? 실리콘밸리의 천재 개발자들이 수조 원을 들여 슈퍼컴퓨터를 돌려도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영역, 바로 ‘인성(Human Character)’이라 할 것이다. 과거의 인성이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를 키우는 도덕 교과서적 이야기였다면, AI 시대의 인성은 거친 황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강력한 시장의 경쟁력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데이비드 데밍(David Deming) 교수는 그의 유명한 논문 《The Growing Importance of Social Skills in the Labor Market》에서 “미래 노동시장에서 수학적 기술보다 사회적 기술(Social Skills), 즉 타인과 협력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높은 인재의 연봉 상승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증명했다. 쉽게 말해, 똑똑하기만 한 ‘참을성 없이 가벼운 인간’은 AI로 대체되기 1순위지만, 주변을 배려하고 소통할 줄 아는 ‘진정한 인성의 소유자’인 인재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초·중·고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인성이 경쟁력이 되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바르게 살자” 현수막을 걸어놓거나 명심보감을 무작정 베끼게 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여기에는 아이들의 뇌세포를 깨우고 가슴을 울릴 획기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첫째, ‘질문과 경청’의 토론 시합의 운영이다. 이제 학교는 ‘누가 더 깊이 공감하고 경청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시민 교육 모델인 ‘유겐트 데바티어(Jugend debattiert: 청소년 토론)’ 방식을 변형한 ‘경청 점수제 토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밥상머리 ‘공동체 질문(Quest)’의 부활이다. 요즘 아이들은 디지털 기기 속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 살지만, 역설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인기 방송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과 같은 1인 가구의 증가와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나와 다른 타인과 부대끼며 갈등을 해결하는 ‘실존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엔 우리의 고유한 전통의 ‘격대(隔代) 교육’, 즉 조부모와 손자녀 간의 세대 융합 교육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셋째, 메타인지를 깨우는 ‘실패와 감사 일기’의 일상화이다. AI는 자의식이 없으므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즉 메타인지 능력이 인간과 다르다. 반면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메타인지’와 ‘영성’이 있다. 긍정 심리학의 대가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감사 훈련을 지속한 집단은 회복탄력성과 대인관계 능력이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 인성은 나이스(NEIS) 시스템의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 난에 몇 줄의 미사여구로 기록되는 성적표가 아니다. 그것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친구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빛 하나, 복도에서 마주친 청소 여사님께 건네는 유쾌한 인사 한마디, 그리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동료의 목소리를 끝까지 경청하는 인내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유기체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AI를 비서처럼 거느리며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파하는 진짜 ‘인간 리더’의 육성이 필요한 시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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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의 고용정책 칼럼] 좋은 채용은 좋은 지원에서 시작된다
[교육연합신문=이수연 칼럼] 기업들은 한목소리로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청년들은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서로 원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만남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채용은 단순히 사람을 뽑는 과정이 아니라 기업의 미래와 개인의 삶을 함께 설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기업은 우수한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은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기업은 적합한 인재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채용 지원을 넘어 기업과 청년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정책이 필요하다. 청년일자리도약장려금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고용지원사업이다. 청년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의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에는 신규 채용에 대한 부담을 완화하여 지속적인 고용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중요한 것은 지원금 자체가 아니라 청년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기업이 인재를 장기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다. 우리는 청년일자리도약장려금 사업을 운영하며 다양한 기업과 청년들을 만나왔다. 채용을 희망하는 기업에는 제도를 이해하기 쉽게 안내하고, 지원 대상과 절차를 함께 검토하며 원활하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청년에게는 단순히 취업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역량과 기업의 특성을 함께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일자리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좋은 채용은 단순히 채용 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은 함께 성장할 사람을 찾고, 청년은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기업을 만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고용이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과 청년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청년일자리도약장려금 역시 단순한 재정지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채용 이후에도 직무교육과 현장 적응, 조직문화 형성, 경력개발까지 함께 이어질 때 정책의 효과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까지 연결될 때 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고용정책은 사람과 기업을 단순히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청년에게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에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결국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좋은 일자리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사람을 믿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며, 청년 역시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야 한다. 사람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연결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청년일자리도약장려금이 가진 가장 큰 가치이며 우리가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이유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내일채움공제와 재직자 지원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수연 ◇ 인천대학교 경영대학원(MBA) ◇ (주)채움HRD 대표이사 ◇ 고용·교육정책 및 HRD 분야 전문가 ◇ 인천지방고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 ◇ 인천출입국·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위원 ◇ 인천해양경찰서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 인천발달장애인훈련센터 전문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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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약손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약손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투박한 손마디가 마른 배를 더듬는다 “엄마 손은 약손” 낮은 주문에 통증은 잠들고 눈을 뜨면 아픔은 먼 데로 물러나 있다 지금 우리는 앓고 있다 서로의 상처를 할퀴는 시대 조건 없이 덮어 줄 그 손길이 유난히 그립다 그 손 끝에서 시작될 평온한 하루를 다시 기다려 본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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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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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실존주의 철학사상이 다시금 우리의 교실에 던지는 질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는 한때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방식에 반대해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장 폴 사르트르가 지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상징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은 철학사의 명제이자, 오늘의 교육을 향한 질문이다. 인간은 어떤 ‘정해진 틀’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급진적인 자유의 철학은 성취와 효율을 중시해 온 대한민국 사회, 특히 교육 현장에 불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교육은 오랫동안 학생의 본질을 성적으로 규정해 왔다. 등수와 점수는 학생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언어였고, 대학 서열은 가능성의 지도를 대신했다. 그 결과 학생은 ‘아직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미 평가된 존재’로 취급되곤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교육이 가장 경계해야 할 오류라 할 수 있다. 왜냐면 학생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가는 과정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도록 단죄된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명제는 오늘의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진로를 선택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대신 정해 주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밀려간다. 이를 반영하듯이 한때 우리의 청소년들은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부모가 교수에게 학점을 따지며 관리하고,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지휘관에게 훈련 및 모든 과정을 밝히길 요구하며, 취업에도 일일이 나서 관여하는 등 매사 개입하고 지시하는 등 믿기지 않는 상황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비록 일부라 하더라도 우리의 청소년들이 선택 그 자체보다, 선택의 책임을 배울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의 역할은 명확하다. 교육은 정답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선택을 사유하고 그 결과를 성찰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프로젝트 수업에서의 실패, 토론 수업에서의 소수 의견, 진로 탐색 과정에서의 흔들림은 제거해야 할 잡음이 아니라 교육의 핵심 장면이다. 그 경험 속에서 학생은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과 책임의식을 얻게 된다. 잠시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어느 고등학생이 안정적인 진학 경로 대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탐구 활동을 선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선택이 당장 높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이미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즉,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삶의 방향을 고민해 보았다는 사실이다. 실존주의적 교육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를 지도해야 할 교사 역시 변화가 요구된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질문하도록 돕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다른 선택은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수업 기법을 넘어, 학생을 존재의 주체로 존중하는 태도다. 사르트르는 개인의 선택이 곧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이는 우리 교육의 목표인 민주시민 양성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자신의 결정이 타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는 학생은 규칙에 의거 길들여진 존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한다. 교육은 결국 인간을 다루는 일이다. 점수와 결과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실존주의는 다시 오늘의 우리 교실에 이렇게 묻고 있다. “이 학생은 어떤 점수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이 학생은 어떤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 교육은 다시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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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실존주의 철학사상이 다시금 우리의 교실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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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성심당 빵집이 던지는 질문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내 고향은 대전이다. 초,중,고 학교를 대전에서 다녔다. 대전은 유명한 ‘노잼 도시’였다. 그런데 새롭게 관광명소가 된 곳이 있다. 역사적인 사찰도 아니고 단풍이 고운 명산도 아니다. 빵집이다. 성심당 빵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고 주변 칼국수 가게까지 사람이 늘더니 대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주말과 평일 가리지 않고 대전 중구 은행동 성심당 본점 앞에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쟁반 가득 빵을 골라 담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궁금했다.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는 성심당의 힘은 무엇인가. 빵에 대한 진심, 합리적 가격, 약자를 위한 기부 등 성심당이 실천하는 '착한 기업'의 가치가 인기의 비결이라고 한다. 과연 성심당은 어떻게 70년 동안을 이어오고 있을까.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가. 학교도 이렇게 학생이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성심당은 빵집의 본질이 ‘빵의 맛’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본질에 대한 집요함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입시 성과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배움이 실제로 일어나는 교실이다. 보여주기식 정책, 단기 성과, 수치화된 결과에 몰두하면 정작 수업의 질과 교사의 전문성이라는 핵심은 뒤로 미뤄진다. 성심당이 반죽과 오븐 앞을 떠나지 않듯 교육 역시 교실과 아이들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성심당은 빵을 통해 말한다. 교육도 그래야 한다. 성심당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빵집이 되지 않았다. 대신 ‘대전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남았다. 모든 학교가 똑같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똑같은 성취 기준만을 좇는 현실에서 학교는 특색이 없다. 학교는 지역의 역사와 삶, 아이들의 현실을 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과거에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심당은 등록상표 43건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부단한 연구와 상품개발을 통해 입맛을 선도하는 빵집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원칙이 있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했는데 과거의 틀을 고집하는 분야에서 성장은 없다. 성심당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복지단체에 빵 기부, 수억 원 넘는 장학금, 미혼모와 신생아를 위한 병원 진료비 기탁 등을 해왔다고 한다. 법인 설립 뒤 20여 년 동안 펼쳐온 기부활동은 모두 12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성심당의 인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상승장만 가는 주식이 없듯이 언젠가는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빵을 만들어서 한 지역을 관광명소로 만드는 일은 드문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배울 점이 있다. 성심당 임선 이사가 강연에서 밝힌 성심당 성공 공식은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집중한 게 성공 비결’이라고 한 적이 있다. 오늘 학교는 과연 본질에 충실하면서 따뜻한 가치를 존중하는가. 대전의 작은 빵집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성심당은 묻는다. “우리는 빵을 통해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학교는 과연 무슨 가치로 교육을 하고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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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성심당 빵집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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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 멀리 미국의 미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지난 1월 6일~9일까지 미국 소비자 가전협회에서 주관하는 ‘CES 2026’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영역까지 넘보는 AI 시대, 올해는 피지컬 AI인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로봇의 진화된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진 우리의 자랑스런 스타트업 기업들의 AI 시대를 선도하는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미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한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드시 학생들에게 읽혀야 할 책이 있다. 바로 MIT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의 『라이프 3.0: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의 미래』이다. 이 책이 AI 시대의 필독서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라이프 3.0』은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공지능 이후의 인간 정체성, 윤리, 교육, 민주주의를 다룬 사유의 대표성을 가진 책이기 때문이다. 테그마크는 생명의 진화를 라이프 1.0(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생명), 라이프 2.0(학습은 가능하지만 신체와 지능은 스스로 설계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라이프 3.0(스스로 지능과 목적을 재설계하는 존재)으로 구분한다. 인공지능은 인류를 라이프 3.0의 문턱에 세운 존재이며, 문제는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이다. 교육적으로 이 책을 강력히 권장하는 이유는 정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묻는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설정해야 하는가?”, “효율이 최선의 가치가 될 때,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 담론이 아니라, 교실에서 토론 수업과 프로젝트 학습으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본다. 한 고등학교에서 『라이프 3.0』의 일부를 읽고 ‘AI가 교사가 되는 사회’라는 주제로 토론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AI 튜터의 장점(개별 맞춤 학습, 공정성)과 한계(공감의 부재, 가치 판단의 문제)를 스스로 분석했다. 이후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AI는 답을 잘 주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깨달음이야말로 AI 시대 교육의 핵심 성취라 할 것이다. 『라이프 3.0』은 교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AI가 빠르게 대체할 수 있지만, 가치를 해석하고 책임을 가르치는 일은 인간 교사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생뿐 아니라 예비 교사, 현직 교사, 교육 정책가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라이프 3.0』은 그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교실로 들여와야 하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AI를 두려워하지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도 않고, 책임 있게 설계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학생들은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AI 시대에 반드시 읽고 이해할 필요성과 가치가 큰 서사에 눈길을 돌릴 계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각급 학교에서는 독서를 적극 권장하고 활용하여 혁명적인 AI 시대의 흐름과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발전 모습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실용적인 교육을 실시할 것을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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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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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새해에 내 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직원과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지인이다. 전화하는 대부분은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에 부탁을 하는 것이다. 부탁을 듣고 나니 소화가 안 된다. 나도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살다 보면 잡다한 고민이 많다. 선택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준다. 무엇을 내가 중요시하는지도 알려 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에게 문제를 던져 주는 상대방은 주로 내가 나쁜 사람 역할하기를 원한다. 사료를 먹고서 졸고 있는 개를 보면 행복해 보인다.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고 남에게 부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본능에 충실한 삶이 평안을 준다. 옛날보다 쌀밥과 고기반찬을 더 많이 먹는데도 행복감이 적다. 인간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얕고 넓은 모임이 많아지고 선택은 고민을 낳는다. 청렴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비우는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 가을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어보자. 매일 조금씩 버려보자. 법정의 ‘무소유’에서 비움의 철학을 살뜰히 말하지 않았던가. 물건을 버리면 집착이 없어진다. 삶이 불편할 정도로 비워내고 싶다. 현대는 적어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차고 넘쳐서 병이 되고 있다. 이발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샤워를 하고 거실에 누워 눈을 감으면 실구름처럼 몸은 가볍고 마음은 평안하다. 담담함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형형색색의 간판이 있는 도시의 거리보다 조용한 오솔길을 걸을 때에 얼마나 영혼이 충만하고 좋았던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쓸모가 없어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도 버리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을 보라. 그들은 잠자가 죽자 모두 훌륭하게 자신들의 생활을 잘 꾸려 나갔다. 세상일에서 내가 아니면 망할 것 같은 망상을 버리자. 세상은 내가 아니어도 잘 돌아간다. 자유롭고 싶다면 비우자. 비우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손에 움켜쥔 것을 놓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짐승들은 몸이 아프면 단식을 한다. 자신의 몸을 비운다. 비우는 것이 자연이 가르치는 최상의 치유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잠자던 반려견처럼 자신에게 충실해 보자. 신이나 타인에게 주는 관심을 자기 내면으로 돌려보자. 새해가 되어 많은 성취를 꿈꾸고 체계적인 계획을 구상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겨울나무처럼 중요한 뼈대만 남기고 정리해야 한다. 너무 많은 계획도 욕심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면을 깨끗이 하자. 새해맞이 집안 대청소도 필요하지만 내면의 묵은 때를 벗기는 시간도 필요하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했는지 내 안을 들여다보자. 자기가 아닌 나머지는 버리자. 2026 병오년 말처럼 자유롭게 달리려면 먼저 안장 위 짐을 확 줄이자.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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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새해에 내 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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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의 위치와 한국 사회의 철학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학교는 언제인가부터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입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집단적 고백이다. 도시는 가장 비싼 땅에 무엇을 세우는지를 통해 사회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백화점, 고급 주거지, 상업시설이 중심을 차지하는 동안 학교는 늘 외곽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의 미래보다 더 값진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학교는 가장 비싸고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 나는 시골 지역에서 교장을 할 때 학생 화장실에 비데 있는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행정실에서 돈이 없다고 했지만 우선 층마다 몇 개라도 만들자고 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학생이 꿈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하는 공간이며 한 사회의 철학이 형성되는 장소이다. 민주시민의 경험이 길러지는 공적 공간이다. 그렇기에 학교는 접근성이 가장 좋고 안전하며 문화, 자연, 공공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학교는 문화센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육 시설의 열악함은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 낡고 비좁으며 비인간적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세계의 교육 선진국들은 학교를 도시의 자산으로 인식한다. 학교는 지역의 문화 거점이다. 공원과 도서관, 예술 공간과 연결되며, 주민과 함께 숨 쉬는 장소로 설계된다. 학교가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특권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사회중심에 두겠다는 선언이며 교육을 투자로 보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좋은 자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올바른 철학을 학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우리 사회의 미래다. 학교는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고 가장 멋진 투자이다. 공간을 같이 쓴다면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학교는 공공기관으로서 가장 많은 지역에 있다. 이 시설이 주민과 하나가 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문화시설, 회의실, 영화관, 수영장, 도서관, 농구장, 공연장이 학교와 같이 한다면 학생과 주민이 모두 성장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60년대 석탄이 이제 전기 난방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학교 부지와 시설은 가난하다. 오죽하면 학생에게 학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감옥을 연상하겠는가. 중고등학교도 강당만이 아닌 도서관과 동아리실, 수영장, 운동시설, 휴게실, 회의실을 모두 모아놓은 학생회관 건물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지역의 군수나 시장과 협의하여 주민시설을 학교 옆에 지어서 함께 이용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과감하고 놀라운 결단으로 학교 부지와 시설을 가장 좋은 곳으로 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은 나라의 가장 귀한 보배이고 미래이다. ‘학교를 어느 곳에 세우고 어떤 대우를 하느냐’라는 문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철학을 보여준다. 반성해야 할 일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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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의 위치와 한국 사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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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2026년 고전의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교육개혁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망을 품고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묻는다. “우리 교육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시대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변화의 폭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만큼은 보수적 성향의 특성대로 아직도 과거의 형틀에 묶인 채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 새해 정초의 시점에 우리는 지혜의 보고(寶庫)인 고전(古典)의 지혜를 빌려 교육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고, 과감한 개혁의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일찍이 스승 공자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有教無類)”고 했다. 빈부의 격차나 지위고하의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정한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교육의 첫 원칙이라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3,00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지역·계층·학교에 따라 기회가 갈리고, 출발선의 격차가 결과의 격차를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 국가가 올해 반드시 세워야 할 교육개혁의 첫 축은 바로 공정한 출발선의 회복, 곧 공자가 말한 ‘차별 없는 배움’의 실천이어야 한다. 맹자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 했다. 이는 단순 암기 중심의 지식 축적이나, 근거 없는 사유만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지금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AI)이 지식을 대신 정리하는 시대, ‘잘 외우는 학생’보다 ‘깊이 생각하고 새롭게 연결하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 학생이 스스로 탐구를 설계하고 경험을 조합할 수 있는 학습경험의 혁신, 교실을 넘어 지역·대학·기업과 연결되는 확장된 배움의 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순자는 “국가의 밝음은 교육을 바로 세움에서 비롯된다(國之明在於興學)”고 강조했다. 교육의 질은 곧 국가 경쟁력이며,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은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 행정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구조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사는 과도한 행정과 무분별한 민원의 파도 속에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다. 교사를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습의 설계자’ 또는 ‘학습의 길잡이’로 재정립하고, 전문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확고히 해야 한다. 교실을 교사에게 돌려주지 않고는 어떤 교육개혁도 현장에서 실현될 수 없다. 《대학》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말하며, 모든 변화는 개인의 성찰에서 시작한다고 일깨운다. 교육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정권마다 바뀌는 정책, 이해관계의 충돌로 흔들리는 행정, 현장의 피로를 외면하는 결정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개혁이 불가능하다. 교육의 원리에 기반한 정책의 일관성, 공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협치 체계, 그리고 국가·교육청·학교 간의 명확한 책임 구조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교육정책은 정치에 예속되어 갖은 변덕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인재를 기르는 ‘도(道)’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제 병오년의 아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육 과제를 던진다.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해라면, 교육도 그 변화의 문을 열어야 궁합이 맞을 것이다. 고전의 가르침이 일러주듯, 교육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국가의 백 년 기틀을 다지는 작업이다. 한 세대가 미루면 다음 세대가 감당해야 할 짐이 더 무거워질 뿐이다. 올해만큼은 더 이상 말을 앞세우지 말고, 교육위기라 일컫는 이 시대에 보다 합당한 실천과 결단을 수행해야 할 때다. 병오년 정초에 다시 새기자. 교육개혁은 희망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희망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교육계의 지혜와 사회의 신뢰, 국가의 책임이 하나로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세대에게 떳떳한 미래를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질 내일이 오늘의 많은 교육 현안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한 해가 되도록 과감한 결단과 함께 그의 실행을 기대하고자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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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2026년 고전의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교육개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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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전쟁과 올바른 교육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전쟁은 먼 이야기이고 생뚱맞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계에서 전쟁이 그칠 날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전쟁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최후의 수단이다. 전쟁은 무력을 써서 행하는 싸움이다. 전쟁은 살상을 초래하고 일상의 온전한 파괴를 감수한다. 오직 상대를 굴복하기 위한 가장 비참한 수단이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다녀왔다. 기말시험이 끝나서인지 힉셍들이 현장체험으로 많이 왔다. 전쟁은 기념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기념하기보다는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승자의 역사에서 전쟁은 영웅을 기념하지만 우리는 살상과 잔악함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무엇보다 비인간적이다. 전쟁은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 전사자 수, 난민 규모 같은 통계 속에서 개인의 얼굴은 사라진다. 경쟁 교육 역시 그 얼굴을 닮고 있다. 성적, 등수, 진학률로 줄 세울 때 교육은 전쟁의 언어를 닮아간다. 경쟁과 승패, 효율과 성과만이 강조될 때 교육은 평화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거대한 범죄는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생각하지 않는 교육, 질문하지 않는 수업, 정답만 외우는 학습은 언제든 폭력의 토양이 될 수 있다. 과거 학교에서 교련을 배우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진정한 질문은 없었다.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순종만이 미덕이었다.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미사일이 아니라 공감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다른 관점을 이해하는 이성, 갈등을 언어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교육은 모든 수업에 녹아있어야 한다. 국어 시간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 이야기를 읽고 역사 시간에는 승자의 기록뿐 아니라 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과학 시간에는 기술의 윤리적 책임을 함께 토론해야 한다. 세계가 종교, 민족, 영토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한국은 현재도 휴전상태에 있다. 전쟁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은 ‘다른 선택은 없는가’를 계속 묻는다. 전쟁을 상상하기 이전부터 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교실에서 사유와 양심, 명령보다 질문, 적대보다 공존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의 시대일수록 교육은 무엇보다 인간다운 인간을 가르쳐야 한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믿는다. 인류가 전쟁을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 전쟁이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다. 전쟁은 명령에 따르는 인간을 원한다. 올바른 교육은 질문하는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세계에서 ‘공존과 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종주국이 되는 꿈. 그 꿈이 대한민국의 올바른 교육으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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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전쟁과 올바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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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한국의 교육 현실은 낙관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폭력 갈등은 여전히 반복되고, 교사의 권위는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했으며, 학부모와 학교는 자녀 교육을 위해 한곳을 바라보는 동반자가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 서 있다. 지역·계층에 따른 학습 격차는 심화되고, 디지털 환경의 급변은 학생들의 집중과 정서를 흔들고 있다. 교실은 더 복잡해졌고, 교사는 갈수록 지쳐 간다. 이제 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조차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먼저 떠오르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 말고 무엇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인가? 사회적 양극화, 기술 격차, 세대 간 단절, 빠른 변화 속의 불안 등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서 결국 해답은 사람의 역량, 태도, 감수성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역량을 가장 체계적으로 키울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교육이다. 현실이 결코 녹록하지 않기에 그럴수록 교육은 더 강한 희망이어야 한다.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2학년 한 학생은 스마트폰 중독과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수업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고, 잦은 문제 행동으로 교사와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는 아이였다. 학교는 촘촘한 상담 지원과 기초 학습 코칭, 또래 멘토 프로그램을 함께 적용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성적이 아니라 ‘관계’였다.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조용한 관심을 계속 기울이자, 그 학생은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미워하지만은 않는구나”라는 감정을 느꼈다. 1년 뒤 그는 단번에 모범생이 되진 않았지만, 지각이 줄고 담임교사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고, 교내 드론 동아리에도 참여했다. 한 교사, 한 또래의 작은 손길이 한 아이의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이는 교육이 변화시키는 것은 성적표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사례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종 제도 개편과 규정 강화에만 눈을 돌린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이 희망이 되려면 제도의 효율이 아니라 관계와 의미의 회복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는 곳,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곳, 불확실한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을 내면의 기준을 세우는 곳, 이 모든 것은 교육이 아니면 대신할 수 없다. 더 나아가 AI 시대가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기술은 많은 것을 대신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스스로 사고하는 힘,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인간다움을 기르는 교육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 기반이어야 한다. 어두운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진 교육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외면한 낭만이나 로망이 아니다. 지금의 혼란은 교육이 중요한 만큼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다는 방증이며, 복잡한 문제 속에서도 교육만이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교육은 오늘 당장의 성과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희망은 교육이 완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비록 학교는 혼란스럽고 교사는 지치고 학생들은 불안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을 붙들어야 한다. 교육을 포기하는 순간,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피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희망은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며,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내일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육을 신뢰하는 한, 현실은 흔들리더라도 미래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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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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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세 개의 방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세 개의 방 우리 집엔 아이들 방이 세 개 있다. 기숙사처럼 복도형 구조, 거실에서 보면 큰애는 맨 끝방, 둘째는 가운데, 막내는 가장 가까운 방ㅡ 보살핌과 작은 비밀을 고려한 배치다 한때는 왁자지껄하던 방들, 지금은 적막하다. 아이들 물건도 그대로인데, 금방이라도 "엄마, 배고파!" 하며 들어올 것 같은 현관문은 무료하게 졸고 있다. 어릴 땐 직장과 돌봄에 지쳐 빨리 커서 독립하길 바랐는데, 막상 하나둘 떠나고 자주 못 보게 되니 괜히 서운하다. 이젠 가족 단톡방에서나 말 섞고, 성장이 멈춘 가족사진을 보며, "자식도 품어야 자식이다"라는 말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사무친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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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세 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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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 자율성과 교육의 품격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과거에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교육법 75조 규정에 매여 있어야 했다. 1998년에 ‘교장의 명’이 아닌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는 내용으로 바뀌기 전까지의 일이다. 교육에서 창의성과 자율성과 주인의식이 필요하다면 그 시작은 교사의 자율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율성이 없다면 전문성도 기대할 수 없다. 학교 상황은 천태만상이지만 모두 같은 지침에 매여 있다. 자율성이 없는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전달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진정으로 학생을 성장시키려면 교사를 믿어야 한다. 한국 교육의 변화는 늘 더디고 제한적이었다. 교사가 교실의 주체로 설 수 없다는 구조적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교육의 전문가로서 기초적인 자율권마저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이 근원적인 걸림돌이다. 교육 혁신은 결국 교사의 손에서 완성되지만 정작 교사는 경직된 행정 체계, 촘촘한 평가 기준 속에 갇혀 있다. 변화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는 만큼 할 수 없는’ 현실이 교사를 무력감에 빠지게 하고 있다. 오늘날 교실은 다양한 요구와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와 흥미는 천차만별이다. 디지털 기술은 학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습 환경을 설계하고 학생의 경험을 조율하는 ‘교육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현실은 수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해도 과도한 평가 기준과 행정 규정에 막히기 일쑤다. 교사는 교육과정과 평가와 복무에 대한 자율성은 없고 민원과 상담과 부가적 업무에만 자율성을 강요받고 있다. 교사의 자율성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학생의 특성과 지역의 환경에 따라 효과적인 교육 방식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교실과 농촌의 교실, 학습 동기가 높은 학생이 많은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는 전혀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 체제는 모든 학교가 동일한 방식으로 평가받고 동일한 방식으로 수업하도록 강요한다. 교사는 교실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이다. 교사에게 더 큰 판단권과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교사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은 교사를 편하게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율성은 곧 책임을 의미한다. 교사가 수업 방식과 교육과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도록 전문성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야 한다. 교사가 수업 연구와 연수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도록 행정 업무를 대폭 줄여야 한다. 학생 수준과 교실 조건의 복잡한 과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주체가 바로 교사다. 교육정책에서 ‘교사를 믿는가 통제하는가’는 중대한 핵심 요소이다. 교사를 믿지 않는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세계 주요 선진국이 교사에게 높은 자율성과 전문적인 판단권을 부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교사의 자율성은 교사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품격은 통제와 규제 중심의 체제가 아닌 자율과 책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교육은 교실에서 일어나며 교실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교사의 자율성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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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 자율성과 교육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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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KBS '트랜스휴먼'이 던지는 교육적 메시지와 미래교육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최첨단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즈음에 우리는 오래된 질문 앞에 다시 선다. “인간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최근 KBS의 다큐멘터리 '트랜스휴먼'은 인공지능, 유전공학, 뇌과학, 로봇기술이 결합하며 인간 능력의 경계를 다시 쓰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과학 소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교육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우리에게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방송이 보여준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공지능이 의사결정을 돕고, 유전자 편집이 질병을 지우고, 인간의 사고와 기계가 연결되는 세상, 이 변화 앞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기존의 지식 전달 중심 교육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을 능가해 지식을 더 많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암기한다. 따라서 단순 지식의 우열을 가리는 교육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트랜스휴먼'이 주는 가장 큰 교육적 의미는 ‘교육의 목적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지능과 초연결의 세계에서 교육은 더 이상 지식을 나열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만의 고유한 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초인류’를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교육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미래교육은 기술을 선도하는 교육이 아니라 기술을 이끄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한다. 인공지능과 함께 일할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알고리즘보다 더 큰 사고력, 즉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학생들은 정답을 찾는 법이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술의 목적을 묻고, 기술의 한계를 고민하는 윤리적 상상력이야말로 초겸손의 미래를 살아갈 진짜 능력이 될 것이다. 둘째, 초인류 시대일수록 감성·공감·관계 능력 배양이 더욱 중요하다. 기계는 계산할 수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안아주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다. '트랜스휴먼'이 보여주는 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감성과 관계를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따라서 미래교육은 학생들에게 협력하는 법, 갈등을 해결하는 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는 어떤 AI도 대신해 주지 못할 인간의 본질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유연성이다. 급변하는 미래는 정해진 길(定道)을 따르는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 실패를 통한 성찰, 끊임없는 자기 재창조가 가능한 학습 환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교육은 학생들에게 ‘정답을 외우는 힘’이 아니라,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혁신의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넷째, 미래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교육이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뛰어넘는 시대에 진짜 위기는 ‘능력의 격차’가 아니라 ‘존재의 균열’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기보다 “너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를 묻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트랜스휴먼'은 우리에게 인간을 기술 뒤에 놓지 말고, 기술 앞에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초인류가 오는 시대, 교육의 역할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대비’시키는 것을 뛰어넘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길잡이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길의 끝에 어떤 인간이 서게 될지는 교육이 결정한다. 기술은 인간을 확장시키지만, 교육은 인간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 완성은 더 빠른 인간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으로 향하는 길이어야 한다. 초인류의 시대를 대비하는 교육을 넘어서, 초인류의 시대를 이끌 인간을 기르는 교육, 그것이 바로 '트랜스휴먼'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강력한 교육적 메시지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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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KBS '트랜스휴먼'이 던지는 교육적 메시지와 미래교육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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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차선 변경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차선 변경 어차피 목적지는 정해졌는데, 운전을 하다 고민한다. 차선을 바꿀까, 다른 길로 돌아갈까. 그 고민이 도리어 더 아프게 한다. 인생도 그렇다. 고민했고, 망설였고, 그러다 그냥 흘러갔다. 그래도 도착한다.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길. 그러려니 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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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차선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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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이제 그만해야 하는 대입수학능력시험 제도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11월 13일 목요일 전국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공화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연 이 시험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수능은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의 상징’이 아니다. 학생은 ‘사람’이 아니라 ‘정답생산기’로 길러진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수능 폐지는 단순히 시험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객관식 선다형 사고로 사는 나라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라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교사들은 신분상의 위험까지 안고 수능 감독관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한다. 학교에서 어린 나이순으로 감독관 참여를 강요받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작은 몸짓과 언어에도 소송이 뒤따를 수 있다는 위험은 교사에게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돈을 내고라도 수능 감독시험에 착출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수능 업무에 대한 힘겨움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수능은 학교교육과정을 파행으로 이끌고 있다. 수능을 위한 EBS 수업을 정규 수업시간에 공공연히 한다. 교실 수업은 오직 수능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진행되다가 수능이 끝나면 모든 수업을 할 수 없는 ‘시장판 교실’이 된다. 교사들이 이 과정에서 겪는 자괴감은 매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수능을 치르고 난 후 고등학교 교실은 교과과정이 유명무실해진다. 교사가 교실에서 앉아 있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체적으로 많은 행사를 하지만 이미 대입에 실패한 학생이나 입학이 확정된 학생에게 아무런 참여 의지가 없다. 교사의 권위나 말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자괴감을 교사가 느끼는 계절이다. 수능이 지속되는 이유는 효율성과 공정성 때문이다. 수능 존치론은 공정성, 효율적 선발, 기초학력 검증을 말하고 폐지론은 창의력 억압, 불평등 심화, 한 번의 시험이라는 비인간적 제도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대안이 한 번에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능 폐지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 대안을 만들어 시행해 나가야 한다. 학교생활 전반을 평가하는 과정 중심의 학생부 중심 종합전형을 해야 한다. 학습 태도와 성실성을 반영하고 꾸준한 노력과 성장 과정을 보아야 한다. 물론 학교와 교사의 평가 신뢰성, 지역별 교육격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학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교육과정을 준수하는 제도가 시행되어야 한다. 교육과정 붕괴의 수능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충실히 하는 학생이 대학에서도 존중받는 학생이 되도록 그 길로 가야 한다. 수능으로 미래 사회형 인재를 선발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학생 사고력, 표현력, 가치관을 평가하는 방식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볼 수 있는 평가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다. 나중에는 어찌 되든 당장 좋은 것만 취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곶감먹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다. 학교, 학부모, 교직원, 교육청, 학생이 고통받는 제도와 학생의 미래역량에 역행하는 제도는 이제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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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이제 그만해야 하는 대입수학능력시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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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3대 강국’을 외치면서 인재를 유출하는 현실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한 ‘AI 3대 강국’을 꿈꾸고 있다. ‘국가과학자’제도를 신설해 AI인재 해외유출을 막으려 하고 있다. 5년간 100명을 뽑아 개인당 연 1억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논의되고 있다. 또한 AI 분야 등 해외 연구자 2000명을 유치하겠다며 “과학 문명 투자한 국가는 흥해”라는 대통령 발언도 강조하고 교육부, 과학기술부, 대학 총장들까지 나서 총체적으로 AI 인재 육성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제 AI가 미래 산업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과거에도 정부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AI 대학원을 설립하고, 코딩과 데이터 과목을 초등학교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겉으로는 혁신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화려한 구호 뒤에는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바로 지금도 AI 인재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어렵게 석·박사 과정을 마친 젊은 연구자들이 미국, 중국, 캐나다, 유럽의 연구소나 빅테크 기업으로 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연구 환경이 열악하고, 창의적 연구보다 ‘성과 지표’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연구실은 여전히 상명하복식 구조에 묶여 있고,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혁신의 싹을 자르고 있다. 정부는 “AI 인재 10만 명 양성”을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토양은 만들지 못했다. 이 모습은 단지 AI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 전체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찍어내는 공장형 구조로 고착되고 있다. 교실은 여전히 정답 중심, 주입식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질문하기보다 ‘어떤 전공이 유망한가’를 계산하며 진로를 택한다. 인문학적 사유와 예술적 감성은 ‘비경제적’이라며 밀려나고, 교육이 산업의 수요에 종속되면서, 청년은 점점 더 좁은 틀 안으로 몰리고 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AI 강국’을 표방하면서도, AI 인재를 잃어가는 나라가 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 한국 출신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는 연구보다 보고서를 쓰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아이디어보다 상사의 눈치를 먼저 봐야 했죠.” 그의 말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느끼는 시스템적 피로의 고백이다. 우리가 청년을 ‘미래 자원’으로만 대하는 한, 그들은 언젠가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교육 선진국 핀란드나 캐나다의 교육을 보면, 그들은 인재를 붙잡기 위해 억지로 “AI 전공자를 늘리자”라고 외치지 않는다. 대신 창의와 실패의 자유를 보장하는 교육 생태계를 만든다. 학생이 철학을 전공하다가 데이터 과학으로 옮겨가도, 사회는 그것을 ‘진로 방황’이 아니라 ‘탐색’으로 이해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때 선택한 계열이 평생의 족쇄가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불편한 존재로 취급된다. 정작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AI 기술이 아니라 AI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상상력을 두려워하고, 다른 길을 걷는 청년을 ‘비효율’로 본다. 미래는 기술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철학, 윤리, 창의력이 함께해야 한다. 우리가 “AI 강국”이라는 구호에 취해 있는 사이, 귀한 청년들은 떠나고 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 자율이 없는 문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때문이다. 지금처럼 교육이 국가의 산업정책을 위한 하청 구조로 머무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의 ‘두뇌 유출국(Brain Drain)’으로 남게 될 것이다. 청년을 낭비하지 않는 교육은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교실은 인재를 공급하는 공장이 아니라, 인간이 꿈꾸는 실험실이어야 한다. “AI 3대 강국”이라는 구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강국을 이끌 청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한국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교육이 없는 한, 우리의 미래는 구호 속 숫자로만 남을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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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3대 강국’을 외치면서 인재를 유출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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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시간을 잊고 사는 하루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일 년에 한 번씩 오는 명예퇴직 공문을 만지작거린다. 해마다 오는 공문인데 정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관심을 담아서 보게 된다. 이제 한 번만 옮기면 40년 가까운 공직 생활이 끝날 것이다. 친구 말대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한다는 말인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명예퇴직을 한 친구들이 여유로운 생활을 자랑하며 단톡방에 올리는 여행 사진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올라온다. 아침 6시 45분에 아파트를 나선다. 동절기에는 사방이 어둡다. 출근을 하면 매일 조용한 날이 드물다. 학교폭력이 언론에 나고 교육 비리, 학생 사고, 학교 시설 민원, 전입학에 대한 민원, 각종 행사와 위원회 참석 요청, 수능시험장 학교 폭발물 신고까지 온갖 민원이 늦가을 낙엽처럼 가득하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과 달을 관찰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집트 사람들은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했다고 한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면서 합의된 시간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1884년 국제자오선 회의에서는 전 세계를 24시간대로 나누었다. 시간이 전 세계의 공통어로 자리 잡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알람 시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알람 시계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에 의지해 일어났다. 옛사람들은 아침 햇빛, 닭의 울음소리가 아침 신호였다. 기계식 알람 시계는 1787년 미국 뉴햄프셔에 살던 시계공 리바이 허친스(Levi Hutchins)가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해가 뜨기 전인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터로 가야 했다. 시계 문자판의 숫자 '4' 위치에 핀을 박고 시침이 핀에 닿는 순간 지렛대 장치가 움직여 종을 울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제 시간은 아침햇살처럼 모든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직장인의 아침 침대에서 알람이 울리고 있다. 시계와 화폐가 발명되면서 사람은 그것에 노예가 되다시피 살고 있다. 편리함을 위해 만든 대상인데 이제 사람이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때로 그것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운 인간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버림으로 더 크고 진실한 것을 얻는 예를 보았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기존의 틀을 깨는 것에서 커다란 변화와 변혁이 시작되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과거만 가지고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학교에서 예술과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한 활동은 스스로 추동의 힘을 갖고 기존의 것에서 더 새롭고 자유롭고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하루 정도는 공적 시간을 벗어버리고 싶다. 핸드폰과 시계를 멀리하고 오직 ‘존재’와 ‘마음’과 ‘삶의 의미’를 사색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타인과 사회에 맞추는 시간은 잠시 멈추고 나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이번 휴일에 가져보려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현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생각하며 내 안의 여행을 가려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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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시간을 잊고 사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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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기프티콘 세상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기프티콘 세상 선물보다 기프티콘이 더 익숙해진 세상. 포장지를 뜯던 그 설렘은 어디에 쌓였을까. 선물엔 주는 이의 시간과 정성이 겹겹이 쌓이고, 눈빛과 마음이 서로 스며든다. 알림 소리로 도착한 기프티콘은 고맙지만, 빈 메아리처럼 스쳐 간다. 오늘은 그리운 손길의 선물을 받고 싶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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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기프티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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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깊어가는 가을, 교육의 수확을 바라보며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전국이 온통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가고 하늘은 높고 청명하기만 하다. 깊은 가을의 공기는 한층 차분하고, 그 속에는 성찰의 향기가 배어 있다. 황금빛 이삭을 거두어 들인 논과 밭에서는 철새들이 줄지어 날아들고, 나무들은 한 해의 결실을 잎의 빛깔로 드러낸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릴 때 이미 가을의 수확을 그리지만, 그 수확은 단지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다. 비와 바람, 햇살과 토양의 조화 속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문학인들은 ‘기다림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결과에 대한 칭송을 노래한다. 교육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가르침과 배움의 세계는 ‘가을의 수확’처럼 시간의 축적과 정성의 누적 속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교육의 본질을 농경의 순환에 빗대어 보면, 가을은 학습의 성찰기이자 성장의 확인기라 할 수 있다. 봄의 파종이 교육의 시작이라면, 여름은 열정적인 성장의 시기, 그리고 가을은 그 모든 노력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에게도 가을은 한 해의 교육 여정을 마무리하며, 자신이 던진 ‘교육과 배움의 씨앗’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매년 가을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나의 성장 나무’를 그리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은 지난 1년 동안 자신이 배운 것, 느낀 것, 새롭게 도전한 것을 나뭇잎 하나하나에 적는다. “처음에는 글씨를 잘 못 썼지만, 지금은 일기 쓰기가 즐거워졌어요.”, “친구와 싸우지 않고 대화로 해결했어요.”… 작은 문장 속에는 아이들의 성장이 오롯이 담긴다. 교사는 말한다. “이 나무는 아이들이 지식만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증거이죠. 그 잎사귀 하나하나가 교육의 결실이에요.” 이처럼 교육의 수확은 점수나 등수가 아니라 성장 그 자체에 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가을 배움 축제’를 연다. 학생들은 자신이 한 해 동안 탐구한 주제나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교사와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한다. 누군가는 과학 실험의 결과를 공유하고, 누군가는 자작시를 낭독하며, 또 누군가는 지역 노인정과 함께한 봉사활동을 영상으로 소개한다. 그 축제는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배움의 열매를 나누는 장’, 즉 교육의 수확제(收穫祭)다. 교사들은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의 성장을 실감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이 사회와 연결된다는 기쁨을 배운다. 그러나 모든 가을의 수확이 풍성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뭄이나 태풍으로, 혹은 잡초의 번성으로 기대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교육도 그렇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가르쳐도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가을이 일시적 실패의 계절이 아니라, 다음 해를 준비하는 순환의 고리이듯, 교육의 여정에서도 실패는 다음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된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돌봄의 의지’다. 교육의 수확은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변화 속에서 더욱 깊게 익는다. 한 중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아무 말 없던 아이가 요즘은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 오늘 수업 재밌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제게는 올해 가장 큰 수확이에요.” 가을의 들녘에서 단 한 줄의 벼라도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순간, 농부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교육의 현장에서도 한 명의 아이가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때, 그 한 해의 교육은 이미 결실을 맺은 거다. 깊어지는 가을, 우리는 또 한 해의 배움의 끝자락에 서 있다. 학교와 교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교육이란 밭을 일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노력 하나하나가 내일의 결실로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교학상장”, “심은 대로 거둔다”, “인과응보”, “절차탁마”… 비슷비슷한 언어의 향연이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한 만큼 그 결과로 수확하는 진리를 품고 있다. 이제 가을의 나무가 잎을 떨구며 내년을 준비하듯, 교육의 여정도 쉼과 성찰을 통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결국 교육의 가을은 끝이 아니라 인고의 겨울을 나면서 새로운 봄을 잉태하는 계절이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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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깊어가는 가을, 교육의 수확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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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는 교육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교육은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가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입시 중심, 일방향적인 교육 정책,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이 제한된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교육’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바로 교육자치에 있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조차 “교육자치의 꽃은 학교자치”라고 우리 교육 정책의 방향을 한 마디로 압축하기도 했다. □ 교육자치란 무엇인가? ‘교육자치’란 학교 구성원들이 교육의 방향과 내용을 함께 결정하고 실행하는 민주적인 과정이다. 이때 교사, 학생, 학부모는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가 된다. 특히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는 점수와 경쟁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삶과 성장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 아니라 ‘자치’다. 자율이 개인의 자유라면, 자치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책임지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다. □ 사례 1. 핀란드 교육의 본질은 ‘신뢰와 자치’ 핀란드는 교육자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교사는 커리큘럼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삶을 중심으로 한 수업을 운영한다. 시험은 최소화되고, 비교와 경쟁보다 성장과 협력이 강조된다. 모든 학교에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존재하며,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가 실제 학교 운영에 반영된다. 핀란드 교육부의 슬로건은 단순하다. “신뢰하라(Trust).” 이 신뢰가 교사에게, 학생에게 자율성을 넘어 자치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된다. □ 사례 2. 지방 A 중학교 - 삶 중심 교육의 실현 국내에서도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의 모범 사례가 있다. 2023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공식 블로그에 의하면 지방의 A 중학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혁신학교이다. 이 학교는 수업, 생활지도, 동아리 활동까지도 학생 자치회와 교사 공동체가 함께 결정한다. 매년 ‘삶을 나누는 축제’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기획한 공연과 작품이 학교 전체를 채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삶을 함께 꾸려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 사례 3. 서울시교육청의 ‘학생자치활성화 조례’ 2020년 서울시교육청 보도자료에 의하면 서울시교육청은 학생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학생자치활성화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는 모든 학교에 학생 자치기구 구성과 운영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으며, 학교장은 이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야 한다. 실제로 이 조례 이후 많은 학교에서 학생회가 교육과정, 급식, 학교 축제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학생들은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학교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다.” □ 교육자치가 가꾸는 것은 '삶'이다 교육자치는 단순한 행정 절차나 학교 운영의 민주화를 넘어, 사람을 살리는 교육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자치가 있는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하며 수업을 만들어가고, 학부모는 아이들의 일상에 함께 참여한다. 교육의 중심이 ‘지식’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순간, 교실은 변화한다. 그 변화는 점수로 환산되지 않지만, 아이들의 눈빛과 목소리, 태도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답을 잘 맞히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를 길러야 한다. 그 시작은 교육자치이며, 그 끝은 모두의 삶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교육의 공동체다. 어느 교사의 교단 일기에는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돕는 일이다. 그것이 진짜 교육이다"라고 쓰여있다. 이는 우리 교육이 지향할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 압축한 것이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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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는 교육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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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고교학점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김불이’는 117cm의 작은 키를 가진 노동자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난장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습니다”와 “저희는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은 소외에 대한 절규라고 할 수 있다. 교실에서 ‘학습 미도달자’에 대한 방관도 사회적 소외이다. ‘난장이’로 표상되는 ‘학습 미도달자’나 ‘학습 포기자’에 대한 우리의 교육은 얼마나 양심적이었는가 하는 윤리적 반성을 하게 된다. 고교학점제가 폐지론이 강하게 나올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 고교학점제가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대입제도는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다. 절대평가제를 설계로 했지만 입시는 상대평가제를 유지하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학생-교사’의 관계를 ‘학생-학습’으로 이동시키려는 구조적 개혁이라고 하지만 최소성취보장제에서 국가의 책임교육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확인하였다. 과거에 학교부적응 학생은 스스로 자퇴를 했다. 최소성취보장제도의 미도달학생이라는 말은 이런 학생들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교사들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학교에 나오지도 않고 수업에 아무런 흥미도 없는 학생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성적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신평가제도가 9등급에서 5등급으로 전환한다고 하니 변별력이 없어진다고 학원은 선전하고 학부모는 불안해하고 있다. 학생은 진로를 선택하기도 전에 진로에 대한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니 불안하기만 하다. 교사는 증원은 없고 업무는 증가하여 불만이 많다. 교실은 점점 일상적인 수업이 힘든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정서행동 문제와 게임중독, 자살 위기, 무기력이 모두 한 교실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수업을 받고 있다. 물고기, 독수리, 거북이, 사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법으로 달리기를 요구받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학습 저성취 학생’에 대하여 특단의 대책으로 수업과 평가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교실에서 방치되고 있는 것은 인권 침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는 동일 반복의 은유이다. 가난한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은 그 띠 위의 무한 반복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뫼비우스의 띠’는 현실이 가진 이중성과 모순도 보여준다. 피해자와 가해자, 선과 악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이라는 길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고 선을 악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학습 부진은 곧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좌절과 수치는 학생을 학교에서 떠나가게 한다. 학교는 학생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뿌리가 썩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줄 교육과정은 있는가. ‘작은 공’은 희미한 희망을 상징한다. 고교학점제가 불러온 소외된 학생에 대한 관심이 ‘하늘로 날아간 작은 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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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고교학점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