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배움과 성찰의 지난한 반복의 과정으로 채워진다. 배움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으며, 최근의 경향은 평생학습사회의 길을 재촉하고 있고, 그 기여는 더욱더 강화․심화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론과 지식만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자기의 삶을 창출하는 능력을 갖춰가는 길, 즉 일상이 달라지는 삶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길의 추구라는 점에서 배움을 '의미 찾기'와 '의미 만들어 내기'로 표현하고 있는 김성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배움의 길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 세계는 모두가 질문에 의해서 건설된 것이지, 대답에 의해 건설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제도, 새로운 생각은 전부 다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人格이다.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을 그대로 삼켰다가 어떤 사람이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중간역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데 남이 가르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암기하는 데 급급한 배움은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고 보기 힘들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할 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만들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莊子는 ‘有眞人而後眞知.’라는 말을 남겼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내용을 공부했다고 해서 똑같은 발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강의 내용을 똑같은 색깔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장자의 이 말은?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를 많이 결정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핵심이다. 질문과 대답은 비교를 자주한다. 자기의 일상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배움의 기본이고 기초다.
인간의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교육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점심 차림을 정하는 것보다 고민을 적게 하는 것 같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나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수함으로써 진화·발전되어 왔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타인과 교류하는 특이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으로 학습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배움에 대한 수동적 이해해 초점을 둔 입장은 노장철학 분야의 석학인 최진석 교수의 저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책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에서 그는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보내버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배움을 끊으라고 권하고 있다. 최진석 교수의 의견은 아마도 배움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만을 습득하고 따라 하는 수동적 배움은 그만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이에 대해 강남순 교수는 소극적인 배움을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 적극적 배움을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배움이 왜곡된 배움이며, 어떤 종류의 배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먼저 제시되어야 함을 웅변하는 것이다. 크게 보자면 두 종류의 배움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율곡 이이는『격몽요결』에서 ‘人生斯世에 非學問이면 無以爲人이니 所謂學問者는 亦非異常別件物事也.’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새해 아침, 배움이란? ‘나’를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힘으로 작동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배움은 표현과 창의로 거듭나야 한다. 배움의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학문이 없는 자를 가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배움이 부족한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배우고 싶어도 여간 배울 기회가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이 들으면 억울한 심정일 수도 있겠다. 배움의 많고 적음의 정도는 누가 판단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를 배울 때, 그래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제대로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불만을 품고 살았다. ‘그냥’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옛날부터 그랬어.’라는 주입식보다는 설명하는 태도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해소되기를 기대한다. 학문이란, 묻고 물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정말 아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에게 설명해 보라. 어떤가? 정말 알고 있는가? 그래서 최고의 아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에게는 ‘설명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큰 틀에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세상 어떤 것도 ‘수명이 있다.’라는 절대적 명제 앞에 서 있는 존재다. 그런데 지금 지성인, 지도자들은 어떤가? ‘자신의 말과 지식이 영원하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맹신하는 집단과 개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배움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이 주어진다. 그러나 실제는 집단의 생각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고유한 생각으로 자신을 가꾸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은 특별하게 탄생된 단 하나의 고유명사다. 나도 너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가치가 자신에게만 유일하고 구체적이고 특별하다. 어떻게 하면 부여받은 이 고유명사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고유명사로의 나의 삶’, 이것이 ‘일상’이 되고, 종속적이 아닌 주도적이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 앞선 ‘나’를 만드는 새해 삶의 주제로 만들고 싶은 ‘나’만의 꿈을 그린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