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말의 성찬’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는 화려한 수사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련된 말재간, 그리고 타인을 설득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완이 곧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진실, 그리고 말에 대한 엄중한 책임 의식이 빠진 말들은 당장의 이득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결국 서로의 품격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진단할 때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진단은 바로 ‘염치(廉恥)의 실종’과 ‘말의 타락’입니다. 말이 도구화되고 수치심이 사라진 사회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너진 말의 질서를 바로잡고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본질적 질문에 답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타인을 비난하고 시기하는 거친 말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본질에는 외부의 문제가 아닌 자기 내면의 깊은 불안과 결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은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말의 질서가 무너질 때 사회 전체가 붕괴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그 말 속에 과연 진실과 책임이 담겨 있습니까?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를 떠나는 것 같지만, 그 말이 만들어낸 파문과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타인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내면의 결핍을 오롯이 마주하고 성찰하는 ‘반구저기신(反求諸己身)’의 태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 속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오디세우스는 서양 문학사에서 지혜롭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윤리를 저버린 간교한 사기꾼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무력에 의존하던 기존의 영웅들과 달리 탁월한 지략과 이성을 활용하여 10년 동안 끝나지 않았던 트로이 전쟁을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끝내고 온갖 신들의 방해와 여신의 유혹 속에서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고자 했던 불굴의 집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직한 동료들을 속이고 수호신상을 도둑질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아가멤논의 요청으로 화해 신청을 하러 온 오디세우스의 언변에 대해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옥의 문만큼이나 위선을 미워한다.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자를 나는 참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단테의 신곡에서는 화려한 언변과 꾀로 타인을 속이고 사지로 몰아넣은 말의 죄, 즉 구업(口業)을 물어 제8지옥에서 혀 모양의 두 갈래의 불꽃에 휩싸여 영원히 고통받는 벌을 받습니다.
구업(口業)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불교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나쁜 언어적 행위를 사구업(四口業)이라 하는데, 먼저 망어(妄語)는 자신의 이익이나 타인의 해악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고하는 행위이며, 기어(綺語)는 진실성이 결여된 채 타인을 아첨하거나 현혹하고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허황되고 도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양설(兩舌)은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오가며 말을 와전시키고 분란을 일으켜 다리를 놓아야 할 언어로 오히려 관계를 갈라놓는 이간질이며, 악구(惡口)는 거칠고 모난 언어로 상대방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인격을 모독하는 폭언과 험담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중하지 못한 말로 짓는 구업은 결코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언어의 주체에게 업보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의 결과는 말했던 그 사람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말에 대한 엄중한 결과가 이러한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난무하는 온갖 비방과 저주와 폭력의 말의 대가는 과연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입으로 악한 말을 내뱉어 구업을 짓게 되는 본질적인 원인은 타인이 아닌 자기 내면의 불안과 결핍에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내공이 부족할 때 인간은 깊은 열등감을 느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게 됩니다.
또 타인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비교 의식, 질투, 열등감 같은 심리적인 요소가 내면의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 억압된 분노는 비방과 저주, 모함의 거친 언어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시선이 자기 내면을 향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서만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莊子)』에는 추호(秋毫, 가을철 짐승의 가느다란 털)만큼 작은 이익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느라, 정작 하늘처럼 넓은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털끝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 남을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의 〈질투의 힘〉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노라.”라는 고백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타인의 삶을 두리번거리며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지금의 어떤 사람들의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온전히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조금은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은 바로 독서와 사유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 문장을 읽는 시간은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마주하는 기회가 됩니다. 책 속 문장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거부감이 드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지금 자신 내면의 결핍이 어디에 있는가를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신의 사유를 거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갈 뿐, 아직 자신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유란? 남이 세상을 보고 개념화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를 사유하게 되면, 자기의 삶은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면서 자기의 삶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면 마침내 얻게 된다. 무릇 책을 읽을 때 생각함이 깊지 않으면,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한들 남의 언어에 휘둘릴 뿐이다. 사유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우물에서 지혜의 두레박을 퍼 올리는 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유한준(조선 후기 문신, 문장가)에게 전한 이 문장에서도 사유가 없는 독서의 결과인 ‘지적 종속’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쌓아온 구업(口業)을 끊고 신언(愼言)의 태도를 다짐하며 타인을 향해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유일한 길은 ‘독서’와 ‘사유’, 그리고 이를 통한 ‘신독(愼獨)’에 있습니다. 내면이 단단하게 채워진 사람은 타인을 시기하거나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높일 필요를 느끼지 않기에, 그의 언어 또한 자연스럽게 절제되고 담백해집니다.
오늘도 묵묵히 책을 펼치고 깊은 사유의 정적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그 순간이야말로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넘어, 마음의 지평을 하늘만큼 넓히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거니는 '소요(逍遙)'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삼갈 줄 아는 삶의 주인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말은 생각의 집이자 존재의 표현입니다. 한자 言(말씀 언)은 입(口) 위에 매운 침(辛)이 얹혀 있는 형상입니다. 이는 말이 타인을 찌르는 칼이 될 수도, 스스로를 경계하는 죽비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르고 품격 있는 말은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사람을 살리지만, 혐오와 기만의 언어는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고 국가의 근간을 뒤흔듭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恥心)이 회복되고 내뱉은 말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무너진 말의 질서가 바로 서고 건강한 신뢰 사회가 열릴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함께 꿈꾸어 보는 삶! 이것이 한겨레인으로서 마땅한 꿈이 아닐까요?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모든 철학의 최상위에 용기가 있는 이유입니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