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30(목)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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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새벽,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세 명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누군가는 먼저 아팠고, 누군가는 그 아픔에 함께 울었고, 결국, 세 아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서가 남겨졌다는 소식은 이들이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왜 아이들은 함께였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이들은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아이들은 여러 번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지각이 잦아졌을지도 모른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용한 구조 요청은 어른들의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혔다. 혹은, 누군가 보았지만 그 사실은 ‘공유’되지 않았다. 

 

학교는 너무 바빴다. 수업, 평가, 행정, 민원에 쫓기느라 정작 아이들의 ‘마음’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도,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교사 간 소통은 왜 단절되었는가. 이제 교육 현장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복잡한 곳이 됐다. 한 반의 담임이 아이의 모든 신호를 감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교사들 간에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서로 신뢰하고 함께 바라본다면, 그 조각은 하나의 '위험 신호'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도 ‘말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 학생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나 혼자 감당하고 있진 않은가”라는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교무실. 이제 학교는 교사들을 위한 회복 공동체로도 거듭나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관심’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딱 한 명의 따뜻한 관심만 있었어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요즘 많이 지쳐 보여”,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가 된다.


관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하굣길 발걸음 하나에 스며든 감정의 진심. 우리의 ‘조금 더 보는 눈’, ‘조금 더 듣는 귀’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대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행정, 정치권, 언론 모두의 역할이 있다. 학교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과,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학부모는 결과보다 아이의 감정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행정은 예산과 제도로 관계를 뒷받침해야 한다. 언론은 자극보다 성찰을, 소문보다 구조를 보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경쟁이 아니라 관계야”,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몰랐다”는 말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 어떤 죽음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떠났다는 이 사실은, 사회 전체가 무너진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경고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잊히듯 보도될 것이고, 또 다른 부모가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건 그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 교육의 민낯이며, 우리 사회의 현재이며, 그리고 바로 ‘내일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는 말만의 애도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행동,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 마음을 보듬는 학교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더 이상 죽음을 ‘함께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진짜 ‘대책’이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애도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책임이 남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이 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도이자, 가장 큰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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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왜, 아이들은 함께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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