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현대 사회는 성공을 오롯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로 환원하는 능력주의의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 지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가 100% 나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오만이자 착각입니다. 내가 딛고 선 문명의 터전, 수많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조력, 우주 자연의 은혜가 결합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의 삶도 온전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삶의 겸손을 회복하고, 주체적 사유로 문명을 이끌어가기 위한 성찰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에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타자 및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몸과 마음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동적인 생명 활동입니다. 안다는 것(지식)은 머릿속에 정보와 활자를 쌓아두는 관념적 박제가 아니라, 앎이 곧 나의 신체적 습속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행(行)과의 일치’를 뜻합니다. 진정한 앎은 삶의 번뇌를 털어내고 매일 자기를 갱신하는 실천입니다. 결국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일치입니다.
AI가 답을 쏟아내는 시대에 지식의 양은 경쟁력이 되지 못합니다. 김월회 교수가 강조하는 ‘묻는 힘’은 이미 주어진 전제와 통념에 “과연 그러한가?”라고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적 문제 제기 능력입니다. 고전은 정답을 암기하는 책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시대를 향해 던졌던 치열한 물음의 궤적이기에 고전을 통해 우리는 질문을 설계하는 힘을 배워야 합니다. AI 시대에서 실력은 고전에서 길어 올리는 ‘묻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 도덕, 이념을 맹목적으로 받들어 수행하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생각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기성의 정답을 버리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구체적 문제를 내 눈으로 직시하며 스스로 질문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최진석 교수는 말합니다.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으로’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남긴 궁극의 삶의 기술은 ‘자신의 시대적 결핍과 한계를 역이용하는 유연성’입니다. 상황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역경 속에서 고유한 사유를 구축한 인물들의 태도, 즉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맥락에 맞게 원칙과 타협을 조화시켰던 실천적 지혜(시중·時中)를 익히는 것이라고 김월회 교수는 역설합니다.
또한 고미숙 평론가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을 외부의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에서 찾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배움과 수양을 통해 무지(無明)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 자체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고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요.
워런 버핏의 평생 동반자인 찰리 멍거는 무작정 바쁘게 일하는 근면성을 경계했습니다. 그가 매일 긴 시간 독서와 사유를 우선순위에 둔 핵심은 ‘다학제적 격자틀 정신 모델(Mental Models)’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적 여백을 가져야만 어리석은 결정을 피하고 구조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찰리 멍거는 부자가 먼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핵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첫 장 전체를 부모, 스승, 조상들에게 배운 덕목과 감사를 나열하는 데 바쳤습니다. 황제의 지위와 지혜조차 우주의 섭리와 수많은 인연의 합작품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라고 믿는 지능과 환경조차 거저 주어진 것임을 인정할 때, 타인에 대한 오만을 버리고 겸허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00% 내 능력이 아니다.”라는 통찰이 절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은 조건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입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라.” 외부의 보상이나 처벌이 아닌, 내면의 도덕 법칙에 따르는 자율성이 흔들리지 않는 삶의 뼈대입니다. 칸트의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 ‘정언명령’을 자신의 ‘고삐’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서 김월회 교수는 “사기열전은 최초이자 최고이다.”라고 한 의미를 음미해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위대한 이유는 제왕과 승자 중심의 역사를 뒤엎고, ‘신념을 지키며 치열하게 고뇌했던 패자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실존’을 역사의 중심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박제된 윤리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성과 모순을 가장 입체적으로 포착한 인간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월회 교수가 말한 2,200년간 겉과 속이 달랐던 중국의 ‘외유내법(外儒內法)’을 간파해야 합니다.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 본질은 겉으로는 인의와 도덕을 내세우는 유가(儒家)의 가면을 썼지만, 실제 권력 운용에서는 가혹한 상벌과 군주 독재를 추구하는 법가(法家)의 통제술을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이 이중적 구조(외유내법)를 꿰뚫어 보아야만 동양 정치사의 권력 메커니즘과 그 한계를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읽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이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입신양명이나 스펙을 쌓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닙니다. 내가 갇혀 있는 좁은 에고(자아), 화폐와 소비 중심의 현대적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타인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공부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고미숙 평론가는 공부의 목적을 ‘탈주(脫走)와 순환’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의 패를 성급하게 다 보여주는 사람은 타인의 쉬운 먹잇감이 되거나 통제당하기 쉽다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말합니다. 속마음을 감추라는 것은 비열한 기만이 아니라, ‘상대의 예측 가능성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유지하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 자기 보호와 절제의 처세술’이라고 말입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마라.’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고미숙 평론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참뜻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독선적인 고립이나 은둔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중의 헛된 유행, 집단의 광기, 타인의 인정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도덕성과 진리의 길을 확신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단단한 내적 독립성’을 의미합니다. 강인함과 단단함이 지혜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리더의 자질과 선택 기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어떤 리더인가? 과거를 파헤치는 리더가 아니라 ‘미래의 어젠다를 제시하는 리더’, 편을 갈라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높은 도덕적 덕(德)을 구현하는 리더’를 뽑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시민이 절대 필요합니다. 자신의 이념에 취한 자가 아니라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국가의 생존 전략을 설계할 줄 아는 통찰력을 지닌 자가 참된 리더입니다.
인생을 가르는 ‘단 하나의 태도’에 대해서 구범준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을 던지고 연결하는 실행력’을 말합니다. 주어진 현실에 불평만 하며 머무는 사람과, “왜 그럴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사람과 지식을 연결해 현장에서 작은 실험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의 차이가 인생의 격차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전 로이터 통신 임원이자 전략가인 투리 문테(Turi Munthe)는 정보의 진위보다 ‘사유의 정당화 과정’을 묻습니다. “네 생각의 전제는 무엇인가? 어떤 근거로 그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을 통해, 감정적 확증편향과 가짜 뉴스의 늪을 걷어내고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품격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고의 품격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대적 경고를 날립니다. 대한민국은 중진국 추격자의 끝에 서서, ‘생각을 수입하는 나라에서 생각을 생산하는 선진 전략 국가로 넘어가느냐, 아니면 모방의 한계에 부딪혀 과거로 추락하느냐’의 거대한 문명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스로 철학하지 않는 민족에게 다음 단계의 번영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공자는 당당하게 사는 3가지 지혜를 말합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입니다. 특정 용도로 굳어진 그릇처럼 남이 규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유연성을 유지하라. 둘째 화이부동(和而不同), 남과 조화를 이루되 맹목적으로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 주체성을 지켜라. 마지막으로 내성불구(內省不疚),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세상의 어떤 비난과 궁핍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염원을 최진석 교수가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원한과 낡은 역사적 프레임에 갇혀 내부 총질을 일삼는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이 만든 정답을 모방하던 ‘전술 국가’를 넘어, 인류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스스로 개념을 던지고 판을 짜는 ‘전략국가의 아키텍트(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내가 이룬 것은 세상의 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오만을 걷어내는 출발점입니다. 당연함이라는 안이함을 버리고 매 순간 겸손함으로 세상을 응시할 때, 타인의 생각에 기생하는 노예의 삶을 끝내고 문명의 주인, 미래 설계자로 당당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