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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해(解): 삶의 문제와 희생을 통한 성장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뢰수해괘를 보면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는 것이 해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백성의 과실을 용서하고 죄와 형벌을 너그럽게 하여 그 고통을 풀어준다.’고 되어 있다. ‘뢰수해’의 ‘해(解)’는 刀(칼)로 牛(소)의 角(뿔)을 발라내는 모습이다. 여기서 ‘나누어 풀어 헤친다’는 의미가 나왔다. 그래서 ‘풀다’, ‘풀리다’, ‘문제가 해결되다’의 의미다. ‘수(水)’를 비(雨로) 해석하여, 우레가 울리면서 봄비가 내리면 얼었던 모든 것들이 풀리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성의 모습이다. 이런 뢰수해괘의 모습을 담은 문학작품으로 우리나라의 동화, 황선미가 쓴 『마당을 나온 암탉』이 있다. 이 우화 소설은 자신의 알을 부화시켜 병아리를 키우는 것을 꿈꾸는 잎싹이라는 암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잎싹의 여정은 사회적 기대를 극복하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필요한 내면의 힘과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세 종류의 암탉에 대해 말한다. 이때 암탉은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암탉, 전전긍긍하는 암탉, 소망을 굳게 간직하고 실천하는 암탉 이렇게 셋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잎싹은 세 번째 암탉이다. 편안한 양계장에서 알이나 낳아주면서 사는 삶이 좋았을 거다. 그러나 잎싹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계장을 나와 마당으로, 갈대밭으로, 저수지로 이동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냈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안전한 길을 떠났다. 굶주려야 했고, 추위에 떨어야 했고, 다른 동물들의 따돌림에 외로움을 견뎌야 했고, 족제비의 위협 앞에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소망했던 알을 품는다. 자기 알도 아닌 오리알을 품어 아기 오리 초록을 키웠지만 초록은 동료인 야생 오리 떼에 섞여 잎싹을 떠났다. 늙고 비쩍 마르고, 털이 다 빠져 볼품없어진 잎싹은 결국 족제비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동화이지만 어른의 인생 이야기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과 반성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쉽게 대답할 수도 없다. 이 동화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잎싹이 족제비의 새끼들을 보며 자기의 몸을 주는 장면. 감동이었다.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있었다. 활자들이 여러 겹으로 보여 책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 먹고 먹히는 관계, 간디가 말한 아힘사의 정신이 숨겨져 있었다. 잎싹도 분명히 눈부시게 파란 하늘로 크고 아름다운 자신의 날개짓을 힘차게 바람을 가르며 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해(解)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다. 잎싹의 희생으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예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일반인들의 죄를 씻었다. 희생은 인간의 덕목 중 최고의 가치다. 그리고 희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법제화다. 그 법제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몸으로 희생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새겨 사건이나 사고가 생겨야 비로소 허겁지겁 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정치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그래서 모든 것이 불통이던 세상에 우레가 치고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얼었던 세상이 풀리기 시작한다. 험난함의 밖으로 나아간다. 우레와 더불어 봄비가 흐뭇이 오고 나면 이 강산에 눈은 녹고 얼음은 풀리고 산과 들에는 아지랑이가 일고 봄물은 못마다 호수마다 가득히 푸른 물결을 일렁인다. 그러한 계절이 하루하루 짙어가면 매화,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진달래가 차례로 피고 나무와 풀들은 새순이 잎으로 자라면서 가지가 뻗고 잎순이 벌어진다. 나비가 날고 새가 노래한다. 그렇게 봄비와 봄 우뢰는 이른 봄을 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때가 왔을 때 빨리 잡아야 한다. 인생살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아갈 길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빨리 감이 좋다. 길은 이제 험난에서 벗어나 순조로 향하고 있으니 나아가면 순풍에 돛을 단 배가 된다. 뢰수해의 시기, 즉 풀려날 시기에는 조속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비가 내리고 있다. 이른 봄이 온 것이다. 빨리 논과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해야 한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때가 왔을 때 그 때를 잡아야 한다. 그것이 상책이다. 『주역』은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잠깐! 뢰수해괘의 효사를 보자. 지의 자리다. 험난을 헤치고 나가다가 길이 막히거든 되돌아와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것이 중요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의 자리다. 나아갈 길이 있거든 주저 말고 빨리 감이 좋다. 길은 이제 험난에서 벗어나 순조로 향하고 있다. 천의 자리다. 천지에 겨울이 풀리니 우레가 울고 비가 온다. 온갖 실과와 초목이 모두 껍질을 깨고 새싹을 비춘다. 때(타이밍)의 힘은 진실로 크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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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2
  • [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주변에 명예퇴직이 늘고 있다. 힘들다는 하소연도 늘고 있다. 교사만이 아니라 관리자도 명예퇴직이 늘고 있다. 명예퇴직을 한 지인의 소식이 들려온다. 축하를 해 준다. 지금 보람을 느끼고 있는가를 되돌아본다. 사람들은 연금을 계산하면 출근을 하나 안하나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명예를 위해 명예퇴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견딜 만큼 견디었으니 이제 퇴직을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교원의 명예퇴직을 거의 다 받아주고 있다. 명예 속에는 자긍심과 존경심이 있다. 안으로 자긍심이 있고 밖으로는 존경을 받는 직업이 교직이었다. 학생지도로 범법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긍심은 고사하고 인간의 자존감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로 만들었다. 요즘 명예퇴직은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다. 1월 중순에 명예퇴직이 결정되는데 2월에 등교를 하지 않는 학교도 있어서 학생과 인사를 하지도 못한다. 명예퇴직을 보면서 열심히 교직생활을 하던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려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학교시설과 기기는 현대화하고 있다고 하지만 교사들이 명예와 보람을 갖고 학생들이 배움과 존중을 배우는 환경은 가파른 비탈길에 서 있다. 그런 명예와 존중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꿈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교원노조는 교원의 복지만이 아니라 진정한 학생들의 학습권을 위해 정부와 협상을 해야 한다. 행정실이나 관리자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보다는 진정한 교육을 위해서 학생들이 행복한 환경조성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농부가 편하면 농작물이 거칠게 자라듯이 교사가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학생과 학교가 건강해 진다. 교사는 방학에도 수업, 상담, 교양에 대한 자기 연찬의 노력을 해야 하고 교육청은 이를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학생은 교사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는 학생은 교육할 방법이 없다. 그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지금보다 10배 이상을 더 만들어야 한다. 이유 없이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대안학교가 많아져야 한다. 수업에 관심이 없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인적자원을 투입해서 개별적인 상담과 교육을 시켜야 한다. 학생들과 교사가 갈등을 일으키게 방치하면 안 된다. 그 대안은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대안학교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과거의 학생기준에 맞추어서 교육예산을 줄이려고 하면 안 된다. 한국을 일으킨 것은 교육이다. 학교는 가장 좋은 시설이 있어야 한다. 학교에 가장 좋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학교가 가장 민주적이고 좋은 환경이 되어야 한다. 학교는 미래다. 우리의 미래가 허물어지고 있다. 교사들이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스스로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 무너지는 현상을 보면서 나중에 천천히 해결하겠다는 태도로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보는 정부와 현실이 안타깝다. 장자 외편에 나오는 ‘수레바퀴가 만든 우묵한 곳에서 가쁜 숨을 쉬는 붕어’가 연상되는 교육의 현실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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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육우균의 周易산책] 여행은 방황의 미학(화산려)-김삿갓의 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여행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여행은 우리를 다른 장소로 데려가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며,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인도에서 평생 빈민 구제를 한 테레사 수녀가 죽기 전에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우리 모두 여인숙에서 하룻밤 머물다 가는 것이니 인생에 대해 너무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러면 번뇌가 쌓인다. 이러한 여행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화산려’와 김삿갓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대상전」에 화산려괘를 보면 ‘산 위에 불이 있는 모습이다. 산 위로 불이 붙어가는 모습이니 산은 움직이지 않고 불은 계속 붙어가며 움직이니 여행자의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아주 명쾌하게 신중하게 형(刑)을 적용하는데 확실하게 벌줄 사람은 벌을 주고 또 용서할 사람은 확실히 용서하여 재판을 질질 끌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화산려(火山旅)의 ‘려(旅)’는 ‘여행’이다. 옛날에는 ‘여행’이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옛날에는 농경 사회여서 여행이 없는 사회였다. 그래서 려(旅)는 자기 본래 삶의 터전을 잃고 타향에 기탁해서 사는 삶을 려(旅)라 했다. 구차스럽게 간신히 생존하는 삶. 새롭게 자리를 마련한다 한들 그것이 광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서 소극적인 삶을 말한다. 괴나리봇짐 하나 등에 걸머지고 험란한 산봉우리를 두 발로 넘고 넘어 자기가 모르는 타향이나 타국으로 가는 것이니 그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방황하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떠나가며 한군데 처하지 아니하는 모양이다. 방황하는 나그네의 모습이다. 개미는 먹이를 찾기 위해 멋대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먹이를 찾았을 때 직선으로 제 집 구멍까지 최단거리로 돌아간다. 그것도 페로몬이라는 물질을 분비하여 자신의 궤적을 냄새로 동료들에게 알려주어 다른 개미들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사방팔방으로 쏘다녀야 어디엔가 있는 행운을 만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무질서, 혼란, 방황 등의 단어가 부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부정을 넘어 긍정으로 가는 단어들이다. 진리는 나그네요 방황이다. 상상력을 추구하는 문학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방랑 시인 김삿갓처럼 늘상 나그네이기도 하지만 또 몽상가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일탈이라는 데서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김삿갓. 김병연. 김립. 그는 어떤 모욕에도 껄껄 웃으며 풍자와 해학이 담긴 시로 오히려 상대방을 조롱했다. 백일장에 나갔다. 시제가 “논 정가산총절사(論 鄭嘉山忠節死) 탄 김익순죄통우천(嘆 金益淳罪通于天)”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 충성을 다해 목숨 바쳐 죽은 가산 군수 ‘정시’를 찬양하고, 아울러 비겁하게 적군에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핵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붓을 잡자 거침없이 써 내려갔는데 이 시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라. “대대로 국은을 입어온 김익순아 내 말을 들어보아라. 가산 군수 정시는 하찮은 벼슬이나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지 않았느냐 (중략) 임금을 버린 그날이 또한 조상을 버린 날이니 한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너는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충신을 아낌없이 극찬하고 죄인에겐 서릿발같이 차가운 냉소를 퍼부은 그의 시는 명작으로 전해 온다. 당연히 장원으로 뽑혔으며 큰 상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김병연은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된다. 김익순은 바로 김병연의 친조부님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김병연은 서천 부사인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멸족을 당했지만 형 김병하와 함께 하인 김성수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후일 멸족에서 페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살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지만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으로 하늘 보기가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며 시를 쓰고 다녔던 것이다. 김삿갓(김립)이 한겨울 금강산에 들어갈 때 지은 시라고 한다. 「천황씨가 돌아가셨나, 인황씨가 돌아갔나. 만수 청산이 모두 흰상복을 입었도다. 내일 만약 해님이 조상하러 온다면 집집 추녀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눈이 와서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덮여 있다. 집 추녀마다 고드름이 달려 있는데, 거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김삿갓하면 그 유명한 숫자시가 생각난다.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 스무(20)나무 아래 서러운(30) 나그네에게 사십가중오십식(四十家中五十食) - 망할(40) 집에선 쉰(50)밥을 주는구나. 인간기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 - 인간에 어찌 이런(70)일이 있으리요? 불여귀가삼십식(不如歸家三十食) - 집에 돌아가 설은(30)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방랑 길 35년. 김삿갓은 57세 되던 철종 14년(1863년), 전라도 회순 땅 ‘동복’이란 곳에서 친구를 아끼는 안 참봉 댁 사랑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 쉬다가 “저. 등잔. 불을. 좀. 꺼. 주시오”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 참봉의 기별로 달려온 그의 아들 익균은 3년 뒤 유골을 수습하여 등에 진 채, 풍기를 거쳐 부석사 뒷산 고개인 고치령을 넘어 강원도 영월 와석리 노루목에 장사 지냈다. 그의 묘터를 보고 풍수가들은 ‘유지앵소’ 혈이라 부르는데 이는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꾀꼬리 둥지’란 뜻으로 명당을 일컫는다. 그의 시를 보면 고달프고 외로웠던 인생사가 함축되어 있다. 이문열은 '시인'이란 장편소설로 김삿갓을 추모하기도 했다. 뜬구름 같았던 그의 생애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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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직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매년 2월이면 각 초중고 학교에서는 떠나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가 거행된다. 명예퇴직과 정년퇴직을 하는 이들을 위한 퇴임식과 송별연이 함께 거행되기 때문이다. 보통 30~40년을 교직에서 봉직하다가 퇴임을 하는 이들에게 일정기간 함께하며 정든 학생들과 동료교사들이 그간의 공훈을 기려 마련하는 조촐한 행사는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자리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불어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함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기도 해서 전통적인 훈훈한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교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물질 추구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삶의 조건에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국경제(2024. 1.27.)에 의하면 현직 교사들이 교직을 떠나 의대(한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특히 20~30대 MZ세대들을 중심으로 교직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 갑질, 아동학대 신고에 따른 극단적 선택이 증가하는 교권 침해의 여파가 크기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와는 달리 교직에 대한 낮은 보상이 1순위라는 것에는 측은지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기사에 나온 어느 30대 초등교사가 밝힌 이유를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면 “교사는 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다. 수업도 열심히 하고 학교 업무도 열심히 하면서 일하는 것 같아도, 또래 친구 중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이나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턱 없이 보수가 작다.”고 말하며 “이럴 바엔 수능 다시 봐서 미래 보장이 확실한 한의사를 하자는 생각이다”라고 말을 덧붙인다. 자고로 교직이 박봉으로 알려져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가 되기를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금전적 보상은 미래 세대를 육성하는 국가백년지대계의 더할 나위 없는 숭고한 가치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청출어람, 후생가외의 제자 양성과 교학상장은 보수의 낮음과 비교할 수 없는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현재 이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필자의 아들도 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 관광학을 공부하고 재학 중 2번이나 미국으로 교환 학생 및 어학연수의 과정을 거쳤다. 그 덕분인지 졸업하기 1달 전에 취업이 확정되어 국내 대기업의 여행사에서 근무해 왔다. 5년을 근무하면서 대리로 승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MZ세대의 일원답게 보수에 만족하지 못해 더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에 이직을 하고 4번이나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의 다른 직업군을 거쳤다. 하지만 매번 뜻하지 않은 복병들을 만나면서 많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최근에야 보수가 낮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위기와 적성에 맞는 5번째 직장에 만족하고 있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의 전공 계열로 다시 회귀한 것이다. 그가 하는 말 “그렇게 원하던 높은 보수가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의 한 마디가 그간 온갖 마음고생을 압축해 대변하고 있다. 교직은 미래 세대에 대한 사랑으로 이를 실천하는 숭고한 사도(師道)가 아니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직군이다. 신이 아닌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기에 누구나 교직생활의 순간순간에 실수와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이때 열정과 사랑을 실천하는 교육자는 피해자들이 “그분은 절대 그럴 리 없다. 무언가 잘못일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사람은 원래 그렇다. 이번 기회에 혼을 내주거나 옷을 벗게 하고 싶다”는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한다. 이것이 오늘날 학생과 학부모와의 갈등으로 소원한 교직의 이면에 내재된 많은 불행의 씨앗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높은 보수에 마음이 집중하면 결국 교직이 싫어지고 이는 부지불식간에 교육활동에 드러나게 된다. ‘행복은 만족하기에 달려있다’고 한다. 교직에서 자신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으로 묵묵히 사도를 실천하며 이 나라 교육에 봉사와 헌신,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것은 한 손에 두 가지를 동시에 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보수의 관점에서 교직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그 너머 가치를 전하고자 하는 직언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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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4
  • [김홍제의 목요칼럼]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하고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는 사기(史記)에 나온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은 후 간신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날조한다. 어리석은 호해를 황제로 만들고 나서 정적을 제거했다. 결국 환관 조고는 모든 권력을 잡고 승상이 되지만 황제까지 욕심낸다. 하지만 충직한 신하들이 반대할까봐 두려웠다.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호해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에게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이런 저런 혐의로 모두 처형했다. 누가 보아도 사슴인 것을 사슴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는 암흑과 불의의 시대이다. 명백하게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말을 하지 못하는 일들은 현실에서도 적지 않다. 조직의 불법을 보고 용기를 내서 내부고발을 하지 못하는 조직은 뿌리부터 썩어가는 조직이다. 학교를 비롯한 교육계도 예외는 아니다. 당장에는 불의한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 자리를 보존하고 현명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작은 잘못된 관행들이 결국은 숨쉬기조차 힘든 교육환경을 만든다. 임용시험 면접시험과 취업 입사시험이 한참일 때이다. 천편일률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수험생 입장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회사에서 원하는 대답과 정답에 가까운 대답만 하려는 젊은이에게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모두가 조력자다운 교사가 되겠다고 하지 엄격하고 원칙적인 교사가 되겠다고 하지 않는다. 학교 현장 현실은 엄격하고 책임감 강한 교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용기 있고 소신 있는 수험생을 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조직에서 원하는 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을 만점으로 삼는 면접은 올바른 면접이 아니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이라 한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 되는 세상이다. 명백하게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숙맥이다.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 되고 있다. 곡학아세하는 지식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사슴이 아니라 말이 틀림없다는 근거를 들어 아부를 한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오히려 가짜와 비정상을 부추긴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세상의 대부분이 된다면 세상에 희망은 없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정의로운 시민들이 만들어 간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도록 교육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조고처럼 자기편인가를 시험하는 평가를 하고 시민들이 말도 못하는 숙맥들이 된다면 민주주의 수레바퀴는 멈추게 된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는 비참한 시대이다. 결국 조고를 따르던 숙맥의 사람들만 남았던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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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1
  • [육우균의 周易산책] 중부(中孚)-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어주는 마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인간은 함께 살면서 갈등과 폭력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러한 중부의 마음, 즉 배려와 연민의 정신은 조직의 리더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중요한 가치로 작용한다. 「대상전」에 풍택중부괘를 보면 ‘못 위에 바람이 부는 모습이다. 못 위로 바람이 불면 파랑이 인다. 이는 바람이 불 듯이 사람이 진실로 사람에게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감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옥사에 관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풍택중부(風澤中孚)의 중부(中孚)는 우리의 가슴 속에 진실함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의미다. 부(孚)는 새알의 부화다. 알이 깨어나 생명이 움트는 모습이다. 결국 중부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요, 배려의 마음이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느낌이다. 갓 태어난 병아리를 어미닭이 보듬고 부화시키는 모습이다. 어미의 사랑과 헌신이다.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에 보면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도 그렇다. 태아는 세상에 나와 스스로 걷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출산한 여성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자식을 1년 이상 젖을 먹여 키우고, 그 이후 자립할 수 있도록 12∼13세까지 양육을 책임진다. 이때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데 바로 ‘교육’이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씨앗인 사랑을 심어 놓는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개념과 유사하다. 인(仁)은 무엇인가. 씨앗이다. 살구씨를 한자로 ‘행인(杏仁)’이라 한다. 현대 중국어로 아몬드를 가리킨다. 그러면 인(仁)은 어떤 씨앗인가? 바로 ‘사랑의 씨앗’이다. 즉 자기 희생적 배려다.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이다. 배려라는 씨앗을 심은 인종이다. 이들이 살았던 곳(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을 뒤져보니 화로, 주먹도끼, 나무창이 발견되었다. 특히 쇠닝겐창의 발명은 더 빠르고 더 날카로운 무기였다. 이 쇠닝겐창을 창조한 이면에 폭력성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술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선별해서 엮어내는 능력이다. 쇠닝겐창은 나무와 가죽, 돌을 서로 엮어내어 자신들의 도구를 한층 더 혁신시켰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자신보다 훨씬 큰 육식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상상력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료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인간은 얼마든지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다스리면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심을 동시에 길러 나갔다. 이를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황금률(Golden rule)’이라 칭했다.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라는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사람을 포함해 생물은 다 본성이 자기 중심적(이기적)인데, 왜 이타 행동을 할까?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슨은 생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았다. 결국 그가 쓴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유전자 선택론’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그 무엇도 설계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복제할 뿐이다. 자연선택은 어떤 종, 어떤 개체한테도 특권을 주지 않으며 진화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유전적 연관도가 전혀 없는 타인에게도 이타 행동을 한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고등동물일수록 더 확실하게 이타 행동을 한다. 이기적인 행동보다 이타적인 행동이 훨씬 고귀하다. 철학자 밀의 “남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은 유전자는 복제할 뿐이고, 인간 개체는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란 뜻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 이기적인 동물을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는데 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후대 등장하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 후 성인들의 각성과 전파로 이타적 유전자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어주는 마음이 바로 중부(中孚)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중심을 잘 잡는 일이다. ‘명학재음(鳴鶴在陰)’이라 했다. 학이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있어도 그 울음소리로 학의 가치를 알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늘에서 우는 학처럼 중부란 드러나지 않아도 그 힘이 엄청나다. 중부는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 문화의 정수다. 그래서 조직의 리더는 흔들리면 안 된다. 흔들리는 순간, 그 조직은 무너진다. 리더는 중심을 잡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볼링은 볼링공과 10개의 핀으로 구성된다. 10개의 핀 중 그 중심에 있는 핀을 ‘킹핀’이라 한다. 10개의 핀이 역삼각형으로 모여 있는데 그중 가운데 중심에 있는 킹핀을 공략해야 10개의 핀을 모두 무너뜨릴 수 있다. 중부(中孚)에 관해 「대상전」에서는 ‘의옥완사(議獄緩死)’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옥사에 관한 말인데, 특히 사형은 한번 집행되면 돌이킬 수가 없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때 중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연민의 정을 살려, 사형의 죄를 경감시키는 인(仁)의 마음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뜨거운 논쟁이 된 사형폐지론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요즘 묻지마 범죄 등의 인륜적으로 말이 안 되는 범죄가 행해지고 있어 사형제도를 다시 도입하자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지만 그런 범죄에 있어서는 죄인에게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판결해서라도 사형 폐지론을 유지해야 한다. 누쿠이 도쿠로가 쓴 중편 소설 『종이 올빼미』(직선과 곡선)를 읽어보시라. 이 소설은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일본의 사형제도를 비판한 이야기다. 섣불리 사형제를 시행하자고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사형폐지론은 판결의 형법주의가 아니라 우리 옛 선조인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중부(中孚)의 마음,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는 마음이 현대에도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부(中孚)는 성(誠)과 경(敬)과 신(信)을 한 마디로 줄인 말이라는 도올의 견해는 탁견이다. 풍택중부괘는 정직하고 근면한 삶에는 대길한 괘다. 성의를 다하여 전진하며 큰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미 닭이 사랑으로 알을 품고 있는 상태이므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처해 있다. 잘못 경솔하게 굴거나 일관성이 없으면 실패하기 쉽다. 매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시기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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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9
  • [전재학의 교육칼럼] ‘곤이학지(困而學之)’의 청소년 교육을 강화하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인류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고전 『논어』는 호학(好學)의 성인이자 교육에 차별 없던 무류(無類)의 참스승인 공자에 얽힌 이야기다. 제자들이 스승과 직접 질의⋅응답 식으로 기술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대가 변할수록 더욱 돋보이는 배움과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 하듯이 한 번, 두 번… 횟수를 더해 읽을수록 곱씹는 새로움과 유익함, 슬기로운 지혜를 새롭게 터득할 수 있기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특히 자발적인 배움의 자세를 갖춘 청소년에게는 그 어느 공부보다 효과가 크다. 과학 영화의 진수인 <인터스텔라>에는 주인공 조셉이 딸 머피에게 웜홀(wormhole)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영특했던 딸 머피가 모스부호로 전달되는 ‘STAY’라는 메시지를 해독해 과거의 자신에게 전해주기를,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우주로 떠나지 않고 지구에 머물며 딸과 영영 이별하지 않기를 원했다. 따라서 절박한 심정으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벽에 난 구멍을 찾아 그 웜홀을 통해 과거에 있는 딸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필자는 이 영화에서 매우 유의미한 교육적 교훈을 찾는다. 그것은 웜홀로 연출된 공간이 바로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이라는 점이다. 책에는 시공간을 초월해 머물렀던 누군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특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보고(寶庫)인 고전을 읽는 것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현명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가성비가 뛰어난 시간 여행과 같다. 한창 배움의 터전에 머물고 있는 청소년들이 ‘배움(學)’에 관련한 메시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웜홀이 바로 『논어』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배우고 가르치는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것은 스승 공자가 후학들에게 전하는 숭고한 가치를 지닌 메시지를 통해서다. 『논어』 ‘계씨편’ 9장에는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최상(最上)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그 다음이고,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배우는 자가 또 그 다음이니,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최하(最下)가 되는 것이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했다. 얼핏 보면 인간의 수준을 네 단계로 나눠 타고난 천재와 우둔한 바보의 등급과 위계를 구분 짓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자가 말한 천부적인 위대한 스승 격인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다음으로 교육적으로 높이 평가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는 공부를 통해 진정한 앎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들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과 식견이 뛰어나며 인격적으로도 아주 성숙한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많이 배웠고 아는 것이 많아도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도덕적인 행동과는 괴리된 채, 배워서 남을 지배하려거나 오직 출세와 성공의 가치만을 쫓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이는 진정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곤경에 처해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실패를 맛보면 그동안의 배움을 포기하는 사람, 많이 배우기는 했으나 어려운 상황을 핑계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즉 ‘곤이불학(困而不學)’하는 사람들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청소년 교육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배워나가는 용기와 도전의 기개를 강조하고자 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실패와 실수를 해도 포기하지 않고 삶의 지혜들을 하나씩 깨닫고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청춘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최근 언론을 통해 ‘수능 No’를 외치며 학벌 타파의 선봉에 선 고등학생들의 사연이 매년 보도되고 있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미루고 지역인재 공무원에 도전하여 일찍부터 전문적인 경험을 쌓아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포부와 의지는 가히 ‘곤이학지’의 모델이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청소년들에게 무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곤궁하다 하더라도 이를 극복하는 배움이야말로 진정한 승자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이 시대 교육은 바로 여기에 보다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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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8
  • [김홍제의 목요칼럼] 유해 가습기 살균제와 인간의 가치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당신이 유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이라고 상상해 보라.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위해 가습기를 더 깨끗하게 사용하기 위해 유명 회사의 살균제를 사서 사용했다. 그런데 그 살균제가 사실은 독약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가족이 죽거나 평생을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죄책감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 포털에 따르면 2023년 12월 31일 기준 지원 대상 피해자는 5,691명이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1,262명이다. 1심에서 무죄를 받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등 가습기살균제 제조, 판매업체 관계자들이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2011년에 시작된 지 13년 만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제품을 출시하기 전 동물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하여 사실상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독성시험을 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1심 재판부는 가습기메이트 주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연관성을 입증할 연구 결과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회사가 1994년 독성 시험을 해야 한다는 내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CMIT, MIT 성분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고 다음 해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어 실험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계속 판매를 했다고 했다. 여기에 심각한 윤리 문제가 있다. 이러한 회사 결정은 인간의 가치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증표이다. 인공지능 분야는 예외일까? 자율주행 중인 차량을 무단 횡단하는 다수의 사람이 가로막았을 경우 자동차 회사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자율자동차를 작동하게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핸들을 꺾으면 운전자가 확실히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자율주행 차량은 상품이기 때문에 타인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상품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사회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면서 윤리 문제는 복잡해지고 있다. 재난의 크기도 커지고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도자를 키우는 기관에서는 매년 실질적이고 토의중심의 윤리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반드시 의무 교육과정에 넣어야 한다. 선진국이 지도자의 윤리를 강화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로봇과 인공지능과 자동화, 거대화, 편리주의, 사물인터넷으로 가고 있다. 인간 존재가 점차 주체가 아닌 객체로 물러날 위험이 보인다. 소수의 생산자와 다수의 소비자 사이에서 인공지능은 소수 생산자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다. 소비자는 주기적으로 국가와 기업과 시스템을 감시하고 시정사항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는 소비자 감시 체제를 제공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회사 이익을 위해 만들어 진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고 활용하는 대상은 인간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안전이나 가치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모델이라면 단호히 거부하고 감시해야 한다. 교육은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인간의 가치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인공지능 적용은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유해 살균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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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5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시작점을 향한 탐구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이병철 삼성전자 초대회장의 미꾸라지와 메기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경제적 이익 창출에 도움을 입었겠지만, 살면서 만나는 스트레스, 고난, 어려움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것임을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살면서 만나는 지속적인 어려움, 문제, 고난은 필요악이다. 이겨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스트레스와 어려움은 염증처럼 마음에 남아 곯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무서운 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건강한 가장은 결코 망가亡家를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였던 故칼 세이건 Carl Sagan(1934-1996) 박사는 '지구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우리에게 마음의 고요를 허락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별, 마음의 고요를 허락하는 위대한 별에서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고무적인 데다 자상하기까지 한 칼 세이건 박사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마음의 병은 치료가 중요하다. 새벽산책, 늦은 밤 서재에서의 묵상, 간헐적 단식, 혼자 걷기 등은 내가 사랑하는 습관들이다. 덕분에 우울증 테스트에서 0점이 나올 정도로 나의 정신은 건강하다.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고 한다. 이 모든 습관에 앞서 글쓰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습관이라고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종교는 없으나, 글쓰기가 소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미분과 적분이 천지가 창조되던 어느 시점부터 있던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라 고집불통에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어느 천재의 사색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뉴턴 Isaac Newton(1643-1727)은 런던 대역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고향에서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다. 지독한 경쟁심과 탐구력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결과를 책(프린키피아 Principia)으로 엮었다. 투퀴디데스는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연합군의 27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전쟁기록을 남겼고, 이는 출간 즉시 고전이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되었다. 그들의 글은 그들의 천재성과 리더십, 사리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의 증거가 되었고,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친 고전이 되었다. 우리의 글도 그러할 수 있다. 글쓰기가 단순히 일기나 에세이 쓰기, SNS 홍보용으로 국한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각기 다른 경험을 갖고 산다. 대부분 글의 소재가 경험과 깨달음의 집약체라는 점에서 나와 당신의 글이 훌륭한 보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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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4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한마음으로 모이는 힘-택지췌의 교훈과 공동체의 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종종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 협력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특히 4차 산업시대는 창조성과 협력성이 강조된다. 택지췌괘는 협력과 공동의 노력을 통해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길임을 상기시킨다. 「대상전」에 택지췌괘를 보면 ‘연못이 땅 위에 있는 모습은 물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모여들게 되면 항상 쟁송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자신의 통치의 질서를 도모한다. 우선 병기를 점검하고 소제하고 수리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태들에 대비한다.’고 되어 있다. ‘택지췌(澤地萃)’의 ‘췌(萃)’는 ‘모이다’, ‘모으다’, ‘가려 뽑아 모으다’란 뜻이다. 만물이 모여들어 풍성해지고 인심이 모여들어 한마음이 되면 모든 사회 현상이 여유롭고 풍족해진다. 택지췌는 연못에 물이 모이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연못은 겸허한 태도로 스스로 몸을 낮은 곳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계곡으로부터 오는 물길이 자연스럽게 즐겁게 노래하면서 모여들게 한다. 못은 무한한 포용성과 아량을 가졌다. 큰 개천물도 가냘픈 시냇물도 구분하지 않는다. 맑은 물도 흐린 물도 차별하지 아니한다. 자기를 향하여 찾아드는 모든 물은 이것을 반가이 그 품에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 넓고 깊은 품 안에서 맑았던 물도 흐렸던 물도 그리고 가냘펐던 것도 거대했던 것도 마침내는 혼연일체가 되어 커다란 하나의 맑은 못물로 만들어 놓는다. 작위하지 않는다. 선(善)의 분위기 속에서 저절로 정화된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라는 것이 아닐까.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능히 만물을 좋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하며, 여러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택지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시가 있다. 바로 이성부의 「벼」라는 시다. 감상해보자.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한 그루 한 그루의 벼는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릴 만큼 약한 존재이지만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몸을 기대고 살아가기 때문에 강인한 힘을 가지는 것처럼, 민중은 서로를 돌보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민중들은 벼들이 서로 기대어 살 듯이 서로 어우러져 기대어 산다. 외적인 고난과 어려움이 심할수록 민중들은 스스로 자숙하고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 민중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죄가 없으면서도 마치 죄인처럼 짓눌려 살아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민중들은 달관의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도 안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이루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정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중들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남을 위해 혹은 올바른 역사를 위해 사랑을 바칠 줄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벼’를 재배해 왔다. 즉 벼는 우리와 오랫동안 지내왔으며, 풀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적 삶의 뿌리이자 역사의 저력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 시적 화자는 벼의 서로 어우러져 기대는 모습으로부터 공동체적 유대와 신뢰감을, 서로의 몸을 묶고 떠나는 모습으로부터 민중의 저력과 희생의 모습을, 서러움을 달래고 노여움을 삭이는 모습으로부터 민중의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발견하고 있다. 한 포기의 벼와 들판을 가득 메운 벼들을 보라. 모이면 강해지고 풍족해진다. 택지췌괘는 동지와 협력자를 얻고, 발전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 행운의 징조를 보이는 괘다. 이 괘의 모양을 보면 아래로 세 개의 음효가 연속하여 있고 맨 위에도 음효가 있는 사이에 두 개의 양효가 있어서 마치 잉어가 폭포를 치달려 올라가서 이제 막 마지막 코스의 문턱에 도달한 상태와 같다. 그래서 이 괘를 잉어가 용문에 오르는 기상이라고 말한다. 이 괘는 매우 운세가 강력하고, 또 모인다는 뜻이므로 동지와 협력자를 얻을 수 있다. 항상 겸허한 마음과 정성되고 정직한 태도와 유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라. 그리하면 모든 일은 저절로 순조롭게 성취될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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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실력주의에 관하여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근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층 간의 갈등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른바 흙수저 논란이 그 대표적 증거다. 매년 고등학교 졸업자 수는 줄어드는데 대입 경쟁은 약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청소년의 자살률은 매년 최상위권을 달리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뿐이랴. 역으로 행복지수는 늘 최하위 수준에서 맴돈다. 역대 정부가 학벌타파를 위한 능력주의 사회구현을 내세워도 이는 언어의 희롱에 불과하며 어떤 정책 보완도 미미하다. 이러한 문제의 뿌리는 무엇일까? 교육학자 박남기 교수는 우리사회가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력(능력+노력)주의 사회가 구현되면 학교교육이 정상화되고, 대입경쟁도 완화되며, 우리가 꿈꾸는 보다 정의롭고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지 않은가? 실력주의가 극으로 치달은 결과 교육에도 신자유주의 물결의 부작용과 사회적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가 큰 노동시장의 이중화 및 분단 구조의 양극화가 우려의 수준이지 않은가.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은 지금 우리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과도한 경쟁, 교육전쟁, 학벌, 사회 양극화 등은 실력주의(meritocracy)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과도한 실력주의가 가져온 폐단이라고 말했다. 실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지는 실력주의가 보완되지 않는 한 실력 판단의 잣대인 학력은 또 다른 이름의 학력을 향한 경쟁으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해 공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직장이 SKY를 중심으로 졸업한 대학과 학과를 실력의 잣대로 삼는다. 그러니 해당 대학과 학과를 향한 치열한 경쟁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는 학교가 경쟁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 학교가 실력주의 사회의 극심한 경쟁의 장(場)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 학부모의 입장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노동시장의 분단화 및 양극화 실상을 극복하지 않는 한 교육을 통한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통적인 실력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새로운 실력주의로 나아가야한다. 어떻게 말인가? 이는 실력과 대학 및 직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되 직업과 보상의 함수 관계를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직업 간 사회적 분배의 차이를 줄이는 제도적⋅사회 문화적 보완장치가 마련되어 근로의욕을 고취하는 복지사회 정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마이스터고 학력으로 전문가로 인정받고 행복하게 사는 독일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박 교수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보다 앞서 진보학자 김누리 교수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보장된다면 부모들은 자녀를 무작정 입시경쟁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고 학생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꿈과 적성을 찾아 원하는 공부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친구가 경쟁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재화를 창출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며 성공과 출세 지향의 교육 가치 또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실력주의 사회로 가는 첫 걸음이라 믿는다. 이제 학교는 사회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교육개혁에 나서야 한다. 여기엔 상생(win-win)을 추구하는 교육이 우선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신에게서 받은 능력에 상응하는 부분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의 노력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희생과 봉사 그리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몸과 마음에 익힌 정치인을 육성하는 정치교육을 학교교육에서부터 실시해야 한다. 더불어 교육당국은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원하며 각종 교육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사회의 기반이듯 학교가 올바른 실력주의를 통해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보루여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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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0
  • [김홍제의 목요칼럼] 개 식용 금지와 생명의 무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2027년부터 개고기가 불법이 된다.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 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 재석 210명 중 찬성 208명으로 통과되었다. 미국 시엔엔(CNN)은 이 법안이 한국의 분열된 정치 지형에서 드물게 초당적 합의를 얻었다고 보도했다. 대한육견협회 회장은 국민이 먹는 것을 금지해서 성공한 역사는 없다며 반발했다. 같은 날 참사 발생 후 437일 만에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도 통과되었다. 여당은 표결에 불참했다. 정부는 반려동물 연관산업을 육성해 2027년까지 국내 시장 규모를 15조 원까지 키우기로 했다. 반려동물 문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동물장묘업체 화장 시설을 갖춘 업체는 60개가 넘어서 사람 화장 시설 수 62개와 비슷한 수준이다. 반려동물용 유모차 판매 비중은 가파르게 상승하지만 유아용 유모차는 2022년 64%에서 2023년 43%로 떨어지고 있다. 출생아 수가 줄어 2024 의무취학 대상자는 최초로 40만 명 선이 무너지고 있다. 2026년 초등학생 입학생 수는 20만 명대로 내려올 수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학교도 무너지고 있다. 개는 약 4만 년 전부터 인류가 길들인 가축이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저팔계의 별명을 지을 때 8가지 음식을 금하고 있다고 해 팔계(八戒)라고 지었는데 8가지 음식 중 하나가 개고기였다. 개는 인간에게 가장 오랜 친구 같은 동물이다. 개를 먹으면 혐오스럽고 돼지를 먹으면 건전하다는 것은 문화적 관점이다. 모든 육식에는 살생과 잔인성이 존재한다. ‘슬견설(蝨犬說)’은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글이다.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광경을 보고 참혹하고 마음이 아파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손님이 말했다. 이규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에 이를 잡아서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손님은 자신을 놀리느냐며 대들었다. 이규보는 미물부터 사람까지 다들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같으며 어찌 큰 것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것들은 그렇지 않겠느냐고 한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본질을 보는 안목을 말하고 있다. 높은 직위 사람의 생명과 서민 노동자의 생명은 현실에서 같은 무게일까.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이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OECD 평균에 비해 두 배나 높아 38개국 중 1위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39분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2021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연간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은 1만 3,352명이다. 한국은 산재공화국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산재 승인 통계 기준으로 2021년 사고사망자는 828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다. 2022년 중대 재해 사망자는 644명이다. 동물에 대한 새로운 복지나 관점의 전환은 필요하다. 다만 반려동물보다도 못한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없도록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행복에도 한층 노력해야 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하는 인구는 늘어나는데 입양시설의 아이 입양이 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생명의 무게에 대소가 없지만 인간 생명 무게가 동물 복지보다 낮아서 되겠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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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8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올바르지 않은, 올바른 선택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메데이아는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의 딸이자 이아손의 아내다. 남편 이아손을 배반한 펠리아스를 죽이고 추방되어 코린도스로 옮겨와 살지만, 이민족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그런 메데이아에게 싫증을 느낀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하기로 하자 크레온과 크레온의 딸을 죽이고 자식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이아손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을 확인한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향해 조롱하며 용 수레를 타고 아테나이로 도망간다. 메데이아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한없이 연약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그야말로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와 여성에게는 국가행사 참여는 물론 투표권도 허락되지 않았고, 남편이 여성의 존엄 자체를 짓밟는 발언과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당신들 여자들은 어떤가 하면, 결혼 생활만 원만하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낳고, 여자 같은 것은 없어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인간들에게도 불행이란 것이 없어질 텐데! -<메데이아>570-575, 이아손의 독백 남편인 이아손의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 즉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공주와의 결혼을 두고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지만, 이아손은 공주와의 결합이 아내의 행복과 가정의 평화가 아닌 가문의 영광과 영화를 위한 선택임을 이야기한다. 당신을 구하고 자녀들에게 왕족의 피를 받은 형제자매를 낳아 주어 우리 집안의 울이 되게 하려는 것이란 말이오. -<메데이아>595-597, 이아손의 대답 남편에게 아내는 가정의 수호자이며 영육의 동반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삶의 동반자나 자녀의 선한 인도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직 집안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순종적인 여인 정도로 생각하는 가장의 경우를 많이 본다. 언젠가 모임에서 페미니즘(혹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토론을 경험한 적이 있다. 모임의 인도자는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페미니즘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또다른 한 분은 여성이었다. 이야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었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약간의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자 금세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고,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을 띠게 되는 경험을 했다. 다행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었기에 곧 자신들의 실수를 언급하며 서로에게 양해를 구했고 이전과 같은 토론이 진행되었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상당히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제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나 역시 여성의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생활과 성장을 위한 페미니즘 운동 그 자체는 적극 지지하고 찬성하는 바이지만, 일각에서는 레디컬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퇴행성 세력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성별을 무론하고 어느 한쪽의 일반적인 성장과 성취를 두둔하기란 어렵다. 다만 작품 속에서 메데이아가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요소를 보인다는 점에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남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반면, 일차원적인 생각과 사고의 흐름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침내 비극으로 마주하는 모습에서 광기와 잔악성을 갖춘 어리석은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아! 어떡하지? 애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요, 여인들이여. 차마 못하겠어. 지금까지의 계획은 사라져 버려라! 나는 내 자식들을 이 나라에서 데리고 나가겠어. 왜 애들의 불행으로 애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려다가 나 스스로 두 배의 고통을 당하는 거야? 그건 안 돼! 그런 계획들은 사라져 버려라! 내가 뭐 잘못된 것 아니야? 원수들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웃음거리가 되겠다고? 해치워야지! 부드러운 말에 마음이 솔깃해지다니 나야말로 얼마나 비겁한가! 얘들아, 집안으로 들어가거라! -<메데이아>1042-1053, 메데이아의 독백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메데이아 1399) 자식들을 죽였으며, 아이들을 죽인 것은 아버지의 악덕과 교만, 그리고 새 장가로 말미암았다(메데이아 1363-1366)고 이야기한다. 메데이아는 자식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 신들로부터 비롯된 운명과 같은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손으로 자식들을 죽이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메데이아 1105-1115)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차원적인 생각의 결과다. 자식은 하늘의 선물이며, 가정에 따사로운 빛을 선사하는 귀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저주이며,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다. 자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메데이아의 분노는 남성에게 억압받는 여성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영웅의 심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내릴 수 있지만,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오오, 제우스에게서 태어난 빛이여, 그녀를 막고 저지하고 이 집에서 내쫓아 주소서! 그녀는 살의에 찬 악령들에게 쫓기는 가련한 복수의 여신이에요. -<메데이아>1258-1260, 코로스 좌 제 혈육에게 저지르는 범행은 지상의 인간들에게 가혹한 벌을 가져다주는 법. 제 혈육을 살해한 자들에게 걸맞은 재앙이 신들에 의해 그들의 집에 떨어진다네. -<메데이아>1267-1270, 코로스 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페미니즘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종속적 존재, 조건적 평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과소평가받아온 것이 사실이며, 작품 속에도 그러한 평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항거, 복수를 위한 비이성적인 선택을 체면, 혹은 남성에 대한 분노로 돌리려는 인물 정도로 메데이아를 평가한다면 곤란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다양한 선택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오랫동안 저울질하는 존재(그 저울질이 자신에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듯하다. 결국 모든 인간은 메데이아처럼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습관적으로 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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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육우균의 周易산책] 우물-공동체 정신과 인간 삶의 근원(수풍정)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물은 많은 면에서 고요하고 정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심오한 의미와 상징성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대상전」에 수풍정괘를 보면 ‘나무 위에 물이 있는 모습이다. 이때 풍은 나무를 가리킨다. 나무가 물 밑으로 깊게 들어가 물 위로 나온다는 것은 우물을 긷는 모습을 말한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백성들을 위하여 근로하며, 또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도울 것을 권면한다.’고 되어 있다. ‘수풍정(水風井)’의 ‘정(井)’은 ‘우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물은 원형이고, 중국의 우물은 사각형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는 명백하다. 만주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영역의 옛 우물들은 모두 원형으로 남아 있다. 중국의 우물이 사각인 것은 바로 이 ‘우물정(井)’의 모양에서 출발한다. 사방 1리의 밭(田)을 9등분하여 주변의 8개를 사전(私田)으로 하고, 가운데 하나를 공전(公田)과 택지로 사용했는데, 그 중앙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어, 공동으로 사용했다. 우물은 문명의 센터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생명의 근원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퍼내어도 샘물이 솟아난다는 새로움의 이미지가 우물에 겯들여져 있다. 우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우물은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선물이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 물을 공급하여 주는 것이 우물이다. 인류의 생활은 물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원시인들은 사냥으로, 방목으로, 어로로, 그들의 유랑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항상 물 있는 곳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물 있는 곳에 생활의 근거가 되어 정착했을 것이다. 우물은 자아의 근원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보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은 원래 화가가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뜻하는 말이다. 화가들이 흔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듯이, 윤동주는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면서 시에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일 터다. 이 시에서 우물은 거울과 똑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시적 화자 자신의 근원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시인은 그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부끄러움으로 인한 미움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란 결벽이라고까지 할 만한 시인의 양심과 그 양심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도 어려웠던 일제 강점하의 암울한 현실로 말미암은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우물은 공동체 정신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자연 발생적인 부락이 구성되고 공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사회 생활도, 문화도, 역사도 우물과 더불어 시작되고 우물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 유구한 세월을 우물은 인류의 목을 축여 주고 마음을 적셔 주고, 정서를 길러 주고 생명을 키워 주었던 것이다. 우물은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도모하는 창조의 상징이다. 우물은 언제나 맑고 시원한 물을 가득 담고 있어서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퍼서 쓰면 쓸수록 새로운 맑은 물이 고이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나 자유로이 마실 수 있는 개방성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물은 반드시 두레박이 있어야 물을 퍼 올려 마실 수 있다. 수풍정괘는 의욕과 노력이 있는 자에게는 대성을 약속하는 행운의 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흉운의 괘인 것이다. 행운이냐 흉운이냐는 오직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것을 실천하느냐의 차이로 결정된다. 그래서 정이천은 「대상전」에서 ‘로민권상’이라 했다. 로민(勞民)은 우물의 쓰임을 본받는 것이고, 권상(勸相)은 우물의 베풂을 본받는 것이다. 정(井)은 우물, 우물의 두레박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형상이다. 가득한 맑은 물도 두레박이 없으면 퍼 올릴 수 없다. 두레박이 있어도 퍼 올리려는 의욕과 노력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물은 사람의 일상생활에 없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퍼올려려는 의욕과 노력을 가지라. 우물은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솟아오르는 것, 자신만의 목마름을 풀어주려 하지 않고 남에게도 봉사해야 한다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은 부하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목마름을 풀어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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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부끄러움을 아는 교육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제목이다. 종로 학원가에서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일본인 단체 관광객에게 일본말로 소근거린다. 중년여성 화자인 나는 일본어를 알아듣고 모처럼 찾아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말한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것이 소설의 ‘나’뿐만은 아니다. 후안무치, 적반하장, 견리망의. 정작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지도층이라면 더욱 서글프다. 맹자가 성선설의 싹에 해당하는 4단(端) 중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밝힌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맹자는 ‘염치를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유교경(遺敎經)’에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부끄러움은 내적 두려움이고 양심의 발로이다. 창피함은 외적 두려움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창피한 것은 타인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세상은 동물의 왕국이 된다. 야만의 시대에는 저항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가둔다.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죽여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라는 마법의 허리띠로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었다. 그 허리띠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매력이고 아름다움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을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있는가. 지식이 부족해서 사회가 불안한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이다. 한동안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본 기억이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부모들이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이제 어디서도 부끄러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모처럼 찾아온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은 교육자들이 되새겨야 할 인간교육의 사명이다.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이 교육이라면 모름지기 양심과 연민과 공감을 깨워야 한다. 잠들어 있는 부끄러움을 깨워야 한다. 부끄러움은 모두에게 있다. 교육이 할 일은 그것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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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1
  • [육우균의 周易산책]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다(수화기제)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수화기제괘는 64괘 중 가장 음양의 위치가 바르고 서로 호응하는 상태를 갖춘 이상적인 괘다. 기제(旣濟)는 ‘이미 성취하였다’는 뜻이다. 성취한 것을 그 상태로 유지하는데 힘쓰고 있는 시기를 표현한다. 모든 것이 흐뭇하고 만족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가득찬 상태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균형을 유지하도록 크게 힘써야 한다. 현상 유지는 전진하는 것보다 더욱 힘드는 일, 교만하거나 해이하는 일이 없어야 행운을 유지할 수 있다. 새로운 일에 착수하거나, 더 큰 성공에 욕심을 부리면 크게 전락할 위험이 있다. 현재의 일을 그대로 한결같이 계속하라.고 『주역』에는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성취를 되돌아보면 기제(旣濟)는 종종 하찮은 느낌이 들곤 한다. ‘내가 이걸 이루려고 젊을 때 그렇게 노력했나’하는 허망함이 밀려온다.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를 보자. ”산다는 건 좋은 거지/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그런 게 덤이잖소.“ 결국 우리가 힘들게 버텨온 한평생이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입고 가는 것이다. 삶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나라 탕왕은 자신의 청동거울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새겨 놓아 나날이 새롭게 태어남을 기뻐했다. 이렇게 허무한 인생에서 우리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 있는 싯구에서 위안을 찾아야 한다. 시인은 어느 날 저녁 자신이 머물고 있는 좁은 방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에 잠겨 있다. 희미한 전등의 지친듯한 불빛과 그 아래 걸린 낡은 셔츠의 피곤한 그림자가 시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외로움에 잠겨 있는 시인의 눈앞, 바람막이로 친 흰 벽 위에, 마치 스크린에 영상이 지나가듯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가난하고 늙은 어머니와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추운 겨울날 차가운 물에 무와 배추를 씻고 있을 늙은 어머니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떠올리며, 시인은 자신의 불효를 생각하고 회한과 아픔에 젖는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포구 마을의 집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함과 외로움을 곱씹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드높은 운명을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외롭고 가난하고 쓸쓸한 삶은, 높은 것을 지향하며 이루고 살도록 하려는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프란시스 잼과 도연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이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갔듯이, 하늘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그렇게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 속에서 사랑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게 했듯이 말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때 이 구절을 묵상해보자. 위로의 원천이 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허망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진다. 전문을 읽어볼수록 백석의 절창 중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빼어난 명작이다.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잠재력을 계발하는데 온 힘을 써야 한다. 결국 인생은 잠재력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잠재력의 실현 후에는 허무함, 허망함이 찾아오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라 할 수 있다. 「대상전」에 수화기제괘를 보면 ‘물이 불 위에 있는 모습이다. 물이 불 위에 있으면 물은 불을 꺼트린다. 군자는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방지한다.’고 되어 있다. 수화기제(水火旣濟)의 ‘기제(旣濟)’는 ‘이미 끝났다’, ‘이미 넘어갔다’, ‘이미 건넜다’, ‘개울을 건넌다’는 의미다. 생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불이 밑에서 물을 끓일 수 있고, 물은 아래로 불을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기제는 생명의 완성인 동시에 생명의 쇠락이다. 물과 불이 각기 자기의 위치를 지니고 있어서 서로 잘 교섭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쓰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에 몇 년이라는 세월을 바치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일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벽 안에 갇히게 된다. 건물을 세우는 일이 끝나면 그 삶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 참조) 미완성이 좋은 것이다. 우리말에 ‘거의’란 말이 있다. “밥이 거의 다 됐어!”, 혹은 “거의 다 왔어”라고 말한다. ‘거의’란 말은 기제로 향하는 길의 막바지를 뜻한다. 그래서 이 낱말을 좋아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직전의 과정, ‘거의’의 과정에 도달했을 때 기쁨과 즐거움은 절정에 오른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기쁨이나 즐거움도 그 과정에 비해 반감된다. 완성 직전.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점 하나 찍기 직전의 기쁨과 짜릿함, 그 비어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을 때, 삶은 새벽별처럼 빛나는 것이다. 화룡점정하는 순간, 즉 완성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과 짜릿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수화기제괘의 효사 95를 보면 ‘하느님은 완전보다 불완전, 완성보다 미완성을 사랑하신다’고 되어 있다. 또 효사 64에도 ‘완성의 길에는 항상 위험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기제는 처음에는 길하지만 끝은 어지럽다. 완성은 비극이다. 완성은 일종(一終)일 뿐이다. 미완성을 성취하라.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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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전재학의 교육칼럼] 2024년, ‘갈등’을 ‘공존’으로 ‘함께하는 교육운동’이 필요하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야당 대표의 테러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날로 악화되어 이제는 ‘혐오’로 굳어진 것 같다. 그 배경에는 일찍이 보수와 진보의 거대 양당 체제로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던 정치 구조가 이제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중도층의 압도적인 증가를 불러 공고하게 구축된 거대 양당 체제의 불합리한 점들을 깨고 다당 체제로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제3지대의 신당창당 흐름은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얻어가면서 정치세력화를 추구하고 있다. 갈등은 늘 우리 사회에 존재해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정치 구조가 이념적 편가르기에 의한 양분화로 굳어짐에 따라 철지난 낡은 이념 대결로 다시금 복귀하고 있다. ‘좌빨’ ‘빨갱이’로 불리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내몰린 진보 진영과 ‘극우’ ‘태극기부대’로 불리며 운동권 특권세력의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보수 진영은 이미 서로 돌아올 수 없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상호 간에 극한 혐오로 굳어졌고 이의 추종자들은 서로 상대방 죽이기에 나서 백주(白晝)에 테러도 불사한 채 갈등을 악화시키는 정치저급화를 초래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공존’의 필요성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 공존은 양당 체제의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갈등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차단하거나 해소하려는 대화와 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소위 칼자루를 쥔 주인공인 국가 지도자의 독단과 아집으로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또는 국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여론을 강력하게 차단하려 검찰통치의 수단을 강화하는 것이 큰 문제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편에 선 야당도 과거 운동권의 특권의식으로 시대의 흐름에 부적절한 한계를 노출하는 것도 또한 문제다. 마치 한반도의 남과 북이 정치적 이념으로 양분되어 상호 체제의 고수와 우월함을 내세워 끝없는 대치 상태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우리는 공존의 개념과 사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공존은 갈등과 함께 가는 것이다. 갈등 없이는 상호 발전과 성장이 불가하다. 갈등 없는 안정 추구는 획일적인 사상을 부르고 이는 전체주의적 문제해결의 발상을 초래한다. 강력한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사실은 긍정적인 민주제도의 명분을 넘어 그 이면에는 인도주의적 해결이나 상호 존중과 배려의 차원을 제거하고 오직 차갑고 냉정한 법의 심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우려된다. 오늘날 우리의 유⋅초⋅중등학교 체제는 구성원 간의 갈등을 오직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교육의 사법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 실로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부재’를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상호 존중과 배려 없이 오직 냉정한 법의 논리로 인간적인 교육행위를 처음부터 차단하는 부정적인 ‘교육 법정주의’는 그래서 기계적이며 반교육적이고 창조적인 인간행위가 배제된 인공지능(AI)의 로봇에 의한 문제해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공정하고 갈등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를 내세우나 결국은 인간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결코 높이 평가할 수는 없는 소위 필요악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 토론 문화를 시급하게 정착시켜야 한다. 갈등을 관리하는 것은 대화와 소통으로 가는 토론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이견이 있다고 인연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와 같이 학교 구성원들 간에 심한 갈등이 있다고 교육행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소란이 두려워 갈등의 장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편견이고 이는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새해 들어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상대에게서 어짊과 지혜를 발견하는 ‘견인견지(見仁見智)’의 자세로 공존의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간에 상호 경청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강력한 공존의 조건은 교류와 소통이다. 상대에 대한 열린 마음과 애정 어린 눈길로 학교에서의 모든 교육활동에 임하자. 이것이 갈등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교육이다. 그래서 2024년은 ‘함께 하는 교육 운동’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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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김홍제의 목요칼럼] 죽음으로 증명해야 하는 슬픔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유명 영화배우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다가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수사 당시에 비공개 소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망하기 하루 전까지 두 달 동안 유튜브 동영상과 언론 기사 수가 1만이 넘었다. 그렇게 많은 기사가 모두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작년에 4년 동안 학부모 악성 민원에 시달렸고 아동학대 가해자로 신고당해 힘든 생활을 하던 초등학교 교사도 생을 달리했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은 학부모 민원에 대한 후폭풍을 남겼다. 죽음으로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시도는 노동자나 교사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죽기 전까지 때로는 죽을 때까지 법적 고소로 약자를 괴롭히는 법은 공정의 수호자이기보다 유전무죄를 굳건하게 믿고 있는 특권 계층의 수호자가 된 듯하다. 한국 사회가 죽음으로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다면 우울하고 암담한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음의 의미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왜곡하는 일도 안타깝다. 목숨을 스스로 버려야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정당한 소통이 차단된 사회다. ‘경찰, 언론, 유튜브’로 이어지는 선정적 보도의 순환 고리는 견고하다. 이익을 얻으려 하는 고리이다. 유튜브는 조회 수, 슈퍼챗(후원)으로 금전적 이익을 얻기 때문에 고리가 더 복잡하다. 언론과 검찰, 경찰, 악성 민원은 약자에 대하여 유독 강하고 잔인하다. 죽음으로 고발하는 억울함은 잠시 이목을 끌다가 사라진다. 마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듯 억울한 죽음이 끝나면 다른 방향으로 채널을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넘어간다. 언론기관과 법 집행기관은 국민을 권력, 범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회가 용인해준 권력기관이다. 그 권력을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서울의 봄’에 나온 쿠데타와 무엇이 다른가. 국민 보호를 위해 군인에게 세금을 쓰고 권한을 주었는데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쿠데타를 한 집단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국민을 위해 준 권력을 자신들의 카르텔을 위한 무기로 쓰는 집단에게는 국민이 준 권한을 빼앗거나 감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강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강한 견제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속도가 빠른 자동차일수록 더 강하고 효율적인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도구인 법 집행, 언론, 댓글문화가 사회적 흉기가 되면 안 된다. 언론과 검찰과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자유와 행복을 위한 도구이자 장치이다. 이 막강한 힘은 사회의 약자와 민주주의를 향상하는 일에 써야 한다. 그것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역할이고 교육의 역할이다. 약자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함이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억압적 기제가 강한 사회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다. 대중의 성숙하고 올바른 시민의식이 필요하고 여기에 교육의 지속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자정과 자성이 필요하다. 스스로 자정이 어려울 때는 국가와 사회가 강제적인 수단으로 마땅히 제재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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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4
  • [육우균의 周易산책] '연을 쫓는 아이'에게서 '지천태'의 모습을 본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지천태괘를 보면 ‘하늘과 땅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 교섭하는 소통의 모습이다. 천지가 소통(교태)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삶이 풍족해지도록 만든다.’고 되어 있다. 음은 가라앉고 양은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땅은 무거워 가라앉고, 하늘은 가벼워 떠오른다. 그런데 지천태괘의 자리를 보면 땅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려 하고, 하늘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접점에 있는 모습이다. 서로 도와 화합하는 모습이다. 즉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면 만물이 생성되고 세상이 태평하게 된다. 자연과 문명의 상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64괘 중 가장 이상적인 괘라 할 수 있다. 갑진년 새해 벽두 지천태괘로 시작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전축 때문에 사계절이 생기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자전축이 더 기울어진 원인이 바로 70억 인간들이 지하수를 마구 퍼내어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 파괴의 모든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 언제부터 지구라는 행성을 인간이 독점해도 된다고 했는가? 걷는 발자국 위에 개미가 한 마리 지나갈 때 무슨 생각이 드나? 이 땅은 인간만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지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의 공유지다. 어떻게 인간만이 지구의 회전축이 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자원을 인간 마음대로 쓰다 보니 자연이 황폐화되고 결국에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보다 더 기울어지는 사태까지 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근 소설인 『꿀벌의 예언』에도 “꿀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남은 시간은 4년뿐이다.”라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가 되었다. 이제는 인간이 신이 되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다. 이 시대에 지구는 망가져 가고 있다.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지구의 자원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빌리고 내려놓는 찰나의 순간인 우리의 삶처럼 존재의 순환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생의 선순환이 되느냐 파괴의 악순환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시대에 당대를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 우리가 남기는 유산이 결정된다. ‘지천태(地天泰)’의 ‘태(泰)’ 는 ‘태평’, ‘평화’를 의미한다. 도올에 의하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은 해부학적 사실이고, 땅이 하늘의 자리에 있고 하늘이 땅의 자리로 내려가 있는 것은 생리학적 진실이라면서 우리 생명의 생존 자체가 ‘다름’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중력에 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하늘이 땅의 자리에 있고 땅이 하늘의 자리에 있을 때만, 즉 지천태의 모습이 되어야만, 이 다름을 화해하려는 음양의 화합이 일어나게 된다. 생명은 무차별한 평등이 아니라 다름의 조화다. 작게 가고 크게 온다는 ‘소왕대래(小往大來)’는 조화로운 존재를 약속하는 장엄한 화해인 지천태의 모습을 담고 있다. 흥미롭게도 할레드 호세이니의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지천태의 정신을 유난히 잘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197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1990년대 탈레반의 부상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주인공 아미르의 여정이 펼쳐지며 인간관계와 연민의 심오한 영향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갈등이 개인, 가족, 공동체에 미치는 파괴적인 결과를 탐구하며, 궁극적으로 용서의 변혁적인 힘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소설은 공감과 이해가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아미르와 그의 친구 하산의 관계는 인간관계와 연민이 어떻게 인종, 종교, 국적의 장벽을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화는 다름의 조화"라는 표현은 현대적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 신념, 의견을 분별할 수 있지만 여전히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을 때 진정한 평화가 달성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차별은 부정적이거나 편견이 있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관점을 구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평화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공통의 기반과 이해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평화라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생각한다. 소랍의 엷은 미소나, 아미르의 환한 미소처럼 이 소설은 서로의 미소를 이해하는 것이 평화의 보물창고를 여는 심오한 열쇠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현대 고전이 된 이 놀라운 소설은 마음을 열고, 마음이 국경을 넘어 통합할 때 펼쳐지는 무한한 잠재력을 숙고하도록 손짓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의 실에서 조화가 짜여지는 미래를 예고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소랍의 엷은 미소든, 아미르의 환한 미소든, 그 미소를 서로 바라볼 줄 아는 자세가 더소중하다. 소통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벽이 없는 마음, 벽을 넘어서는 마음에서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진다. 진정한 평화는 그렇게 찾아온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로고송으로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는 이런 지천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가사 중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란 구절이 지천태와 딱 맞는 말이다. 손에 손을 잡고 자신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분별심을 버리면 평화는 다름의 조화가 되고 오해의 벽, 분별심의 벽을 넘게 된다. 서로의 손을 잡을 때 공감이 더욱 커지고 벽이 무너지고 지속적인 평화가 정당한 자리를 찾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의 여정을 따라가며 지천태의 효사를 풀어보자. 지(地)의 자리다. 이 소설에서 아미르와 그의 친구 하산은 인간관계와 연민이 어떻게 인종, 종교, 국적의 장벽을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미르(Amir)는 하인인 하산(Hassan)과 함께 형제처럼 자란다. 태어난 순간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진 못했지만 그는 하산과 함께 책을 읽고 놀이를 하며 비교적 즐겁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효사(초9)와 같이 뿌리가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인(人)의 자리다. 어느 날 언덕으로 놀러가는 아미르와 하산을 불량배 아세프 일당이 막아서고 하산의 새총 덕에 두 사람은 위기를 모면한다.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는 마침내 대회에서 우승하고 하산은 마지막으로 잘린 연을 쫓아 달려간다. 하산을 찾아나선 아미르는 하산이 아세프 일당에게 붙잡혀서 성폭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겁이 나서 나서질 못하고 골목에 숨어버린다. 그후 하산을 보기 괴로운 아미르는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서 결국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효사(93)처럼 태평하던 국면이 기울어진 것이다. 소설가로 성공한 아미르에게 아버지의 친구이자 아미르의 어릴적 정신적 지주였던 라힘 칸이 전화를 걸어온다. 파키스탄으로 라힘 칸을 찾아간 아미르는 라힘 칸에게서 하산이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하산의 진짜 아버지이며 아미르와 하산이 형제 사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평생을 산 아버지의 죄와 어린 시절 하산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속죄한다. 효사(93)의 내면의 성실함을 다하는 아미르의 모습이다. 아미르는 탈레반에게 처형당한 하산의 아들 소랍을 구하러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효사(94)의 모습이다. 이상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이다. 성실한 아미르의 속죄의 씻음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하산에게 진 마음의 빚을 해결한다. 소랍을 파키스탄으로 피신시킨다. 이윽고 아미르는 소랍을 미국으로 입양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천(天)의 자리다. 미국으로 온 소랍은 실어증 증세를 보이며 감정적 반응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어느 날 공원에서 소랍과 함께 연싸움을 하게 된 아미르는 처음으로 소랍의 눈에서 생기를 발견하고 그를 위해 연을 쫓아 달려간다. 효사(상6)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옛날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가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하고, 잘린 연을 쫓아 달려갔던 하산의 순수했던 표정이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만의 감정일까.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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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의 바오바브(baobab)나무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정식 판매 부수가 8,000만 부가 넘는 책이 있다. 1943년 4월 6일 뉴욕에서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동시 출간한 그 책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이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작은 별에서 우주여행을 온 어린 왕자와 만나서 나누는 이 이야기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겨우 집 한 채보다 클까 말까 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공간 크기가 어쩌면 소혹성 B612호와 비슷할 듯하다. 지구는 어린 왕자가 찾아오는 일곱 번째 별이다. 그 전에 방문한 별은 이상한 어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명예와 허영과 술과 일에 매몰된 자기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행사를 만난 어린 왕자가 처음 한 말은 ‘양 한 마리만 그려주세요.’였다. 왜 어린 왕자는 맨 처음 본 사람에게 양을 그려달라는 부탁부터 했을까.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는 별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 별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다. 무엇이 위기인가.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너무 큰 나무로 커져서 별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린 왕자는 양이 바오바브나무를 먹을 수 있냐고 묻는다. 씨앗에는 이로운 씨앗과 해로운 씨앗이 있다. 바오바브나무는 조금이라도 자라면 영영 없애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왕자는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기 전에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재앙이 온다고 걱정했다. 그것 때문에 어린 왕자는 바오바브나무를 먹어 없애는 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의 종류로 알려져 있다. 나무가 너무 커버리면 작은 별 전체는 나무로 가득 찬다. 나무뿌리가 별을 뚫는다. 별은 작은데 바오바브나무가 많으면 별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규칙적으로 신경을 써서 바오바브나무를 뽑아야 한다고 한다. 어린 왕자는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는 어느 별을 이야기한다. 다른 별에 사는 게으름뱅이가 작은 바오바브나무 세 그루를 무심히 내버려 두었다가 낭패를 당할 것을 걱정한다. 우리도 자기만의 특성을 지닌 작은 행성이다. 외로운 작은 별이다. 자신의 작은 행성에 많은 씨앗들이 날아온다. 씨앗이 장미가 될지 바오바브나무가 될지는 모른다. 자신의 몸과 내면을 망가지게 하는 씨앗은 어린 왕자가 한 것처럼 계속 정리를 해 주어야 한다. 잘못된 만남은 암처럼 속도가 빠르다. 새해가 온다. 자그마한 씨앗 중에도 바오바브나무처럼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거대한 인습이 되는 씨앗이 있다. 바오바브나무 씨앗들이 더 크기 전에 정리하자. 새해에는 나쁜 습관의 씨앗이 커가지 못하게 부지런하게 뽑아내자. 바오바브나무가 소중한 행성에 멋대로 커나가게 둘 것인가. 학교든 자신이든 바오바브나무 씨앗과 같은 파괴적 조짐은 뿌리를 내리기 전에 단호하고 꾸준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세 그루 바오바브나무를 방치해서 자신의 별을 바오바브나무에게 온전히 내 준 게으름뱅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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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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