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07(목)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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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는 가장 순수하게 친구를 만나는 시기이다. 네이버 ‘동창 찾기’ 밴드로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며 한동안 활발하던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한동안 시들해졌다. 그러더니 이제 나이가 들어 늦바람이 불었는지 모임에 꼭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오랜만에 본 동창들은 부쩍 늙어 보였다. 자신도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유난히 장난을 좋아했던 친구 하나가 불쑥 말을 건넸다. “야, 우리 솔직히 수업 내용 기억나냐?” “근데 말이야. 나를 무시하던 그 선생 표정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70년대 학교는 폭력의 장소였다. 대나무 뿌리, 당구 큐대, 봉걸레, PVC 등 도구 종류도 많았다. 엉덩이나 손바닥이 주요 대기 장소였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시절의 다양한(?) 추억을 깔깔거리며 이야기했다. 교직에 있는 나로서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지만 졸업을 하면 대부분을 잊는다. 하지만 ‘비인간적 대우를 받은 상처’는 잊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습관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태도와 감정의 축적이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학생은 무엇을 배웠는지는 잊어도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는 오래 기억한다는 점이다. 존중받았던 순간은 자존감을 키우지만 무시당한 경험은 마음 깊은 곳에 화상으로 남는다. 학생은 무엇을 배웠는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대우받았는지를 기억한다. 교사가 하는 그림에 대한 칭찬이 화가를 만들고 글쓰기에 대한 칭찬이 작가를 만들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과 무시하는 말은 평생의 상처로 남는다. 
 
오늘날 학교 현장은 여전히 성취와 경쟁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은 학생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태도다. 오늘날처럼 경쟁과 비교가 심화된 교육 환경에서는 학생이 쉽게 위축되고 자신을 낮게 평가하기 쉽다. 한 학생의 인생 방향이 단 한 번의 인정과 격려로 바뀌는 일도 드물지 않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지하는 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좋은 수업은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학생에게 남는 것은 설명의 완벽함이 아니라 태도의 진실함이다. 아무리 명강의를 해도 그 속에서 한 학생이 모욕을 느꼈다면 그 수업은 실패한 것이다. 수업의 내용은 시간이 지나 잊힐 수 있다. 하지만 교실에서 느꼈던 감정은 한 사람의 삶에 오래 남는다. 교육의 진정한 성과는 시험 점수가 아니다. 학생의 마음속에 남겨진 기억이다. 교사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모르냐’는 말 한마디가 어떤 학생에게는 질문할 용기를 영영 빼앗는다. 반대로 ‘좋은 질문이네’라는 짧은 인정은 한 사람의 인생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성적표는 몇 년 후 사라지지만 교실에서 받은 감정은 수십 년을 버틴다. 그 감정은 또 다른 사회로 번져간다. 동창회에서 들었던 말들이 질문으로 가슴에 남는다. 선생님의 오늘 수업은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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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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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당신의 수업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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