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사람은 말과 글로 소통한다. 다른 동물들도 나름대로 소통 장치가 있지만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지성은 물론 살아온 환경까지 담아낸다.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로 그 사람의 전부를 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말은 신중하고 또 진중해야 한다는 금언이다. 그래서 口禍之門이라 하지 않는가?
요즈음 사람 다르고 말 다르고 실천도 다르다는 말을 자주 하고 듣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진기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일까? 한 사람이 말을 걸면 상대는 자신의 휴대전화기에 집중한다. ‘너는 너 하고 싶은 것 하고, 나는 내 하고 싶은 것 한다.’는 요즘 대화의 풍경이다. 각자도생인가?
공자는 '부지언(不知言)이면 무이지인야(無以知人也)'라 했다. 말의 잘잘못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정당성과 그릇됨을 분별할 수 없다는 말 아니겠는가? 더구나 우리말과 한자를 몰라 어휘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그 말과 글의 어원을 모르고 말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도통 아리송할 따름인 상황을 맞고 있을 뿐이다.
가을밤 뜨는 ‘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처음 글자는 만든 사람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어떻게 나타냈을까? 고등학교 교과목에서 ‘家庭科’인가 아니면 ‘家政科’인가? 만약 ‘家政科’가 옳다면 왜 그런가? 거기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말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 맞는 행동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 지도자들의 말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한다. 같은 말과 글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익혀지는 횟수가 늘어가고, 그런 삶을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치관의 혼돈과 좌절을 하게 된다. 말이란 실천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믿을 수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여기서는 이 말, 저기서는 저 말, 말하는 사람만 있고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불통의 사회를 만들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러한 불합리한 실제에 대처하는 기관이나 단체, 우리 사회에는 없는 것인가? 결과에만 매달려서 책임 지우려고만 하고,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자세, 책임을 지우려고만 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만 생각하는 사회?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말과 글이란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여 하나 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말과 글이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르게 생각하고, 왜곡된다면 사회 존립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매사에 일관된 모습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모든 꽃은 흔들리면서 줄기와 가지를 세운다. 만물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피어난다. 그것이 하늘의 섭리요 자연의 이치다. 개인이나 사회도 끊임없이 궤도 수정을 되풀이하면서 기준을 조정한다.
언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언행일치를 생각할 수 없다. 그 낱말이 지시하는 것에 맞는 행동이 언행일치다. 말의 정확한 이해가 없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행동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말의 뜻과 한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아울러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개념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다면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통합과 발전은 기대 난망하다 할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개념 정립과 아울러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또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분별하는 눈이 필요하다. 무자격자의 무한한 연수, 무엇을 얻고자 하는 일인가?
정말로 말과 행동에 품격 있고 기품 있는 그런 대통령, 지도자를 보고 싶다. 당연한 국민의 권리인데 간절한 소망이 된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