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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제의 목요칼럼] 에어포켓도 없이 질식하는 교사, 공적 소통 네트워크 필요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마음이 장맛비에 젖은 이불처럼 무겁고 어수선하다. 청주 오송 지하차도에서 사망자가 14명이나 나왔다. 서울에서 작년에 교직을 시작한 초등 신규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자연과 인재가 빚어내는 비참한 실상이 우리 삶과 가까워 보였다. 평소 온순한 교사들이 서울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했다. 그들은 분노했다. 교사로서 겪는 힘겨움과 두려움을 말했다. 교육부와 국회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교권과 학생인권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교육문제 진단오류는 심각하게 문제를 키운다. 왼쪽 다리의 문제를 오른쪽 다리로 진단하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오류는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가져온다. 물이 빠지고 난 청주시 오송읍 궁평지하차도 천정에 걸려 있는 신발 한 짝을 보았다. 물이 차올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절망감은 거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무릎과 허리와 어깨와 머리까지 물이 올라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적 절망을 상상해 보라. 학교에 와서 극단적 선택을 한 신규교사 앞에도 무서운 절망이 있었을 것이다. 힘겨움이 무릎과 허리와 어깨와 머리까지 올라와도 손 내밀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오송 지하차도 사고는 국과수 직원과 경찰과 검찰이 철저한 조사를 하고 관련자를 징계하고 대책을 논의한다고 한다. 교사 죽음은 어떻게 진행될까. 진단은 적절한가. 학부모와 학생을 교사와 대립각으로 하는 법을 만들어서 이 비극적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학교에서 담임과 나이스, 학교폭력, 학년 부장 등 어려운 일들이 마음 착한 사람, 저경력자와 기간제 교사 같은 약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어려운 일은 순환보직을 해야 한다. 너무도 많은 일을 학교가 감당하고 있다. 출산과 육아를 해야 하는 여교사가 많은 학교는 더 힘겹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교사들이 생각보다 많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아동학대방지법을 악용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교직단체에서는 ‘교사들이 겪는 감정적, 정서적 스트레스는 전쟁 시 병동 간호사에 비유될 정도’라고까지 했다.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많고 법적 보호 수단은 부족하다. 학부모 악성 민원과 수업, 공문, 생활지도 등 심신의 고통을 교사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에어포켓이 보이지 않는다. 구명조끼도 옆에 없다. 교육혁명 제4의 길은 네트워크에 있다. 학교와 교육청에 교사를 위한 공적 소통 네트워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과 학생 지도와 학부모 민원 대처방안을 토의할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학교 안팎의 어려움에 대하여 토론하고 대안을 찾고 위로하고 고민하고 서로 지원해 주는 체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세밀한 법과 지원이 귀납적 방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경험이 거의 없는 교사에게 어려운 상황만 던져 주고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은 에어포켓이 없는 지하도에 밀어 넣는 것과 같고 위험한 급류에서 안전조끼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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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7
  • [육우균의 周易산책] 새싹은 우주다(수뢰준)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공간이 이 세상이다. ‘천지간’이다. 삼라만상은 하늘과 땅의 사이를 떠나서 그 어떤 개념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천과 지 사이에 최초로 등장하는 생물이 바로 새싹이다. 새싹은 우주다. 대상전에 수뢰준괘를 보면 ‘구름이 위에 있고 그 밑에서 우레가 치는 모습’이다. 이는 마른 번개, 헛천둥이다. 만물의 탄생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하늘과 땅이 만나 즉 강(强과) 유(柔)가 만나 교합하여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이다. 수뢰준의 ‘준(屯)’은 ‘一 + 屮 +丿’의 합한 글자다. 뜻은 (땅이 비스듬히 있는 데)에 + (새싹이) + (뿌리를 내리는) 모양으로 이처럼 ‘탄생의 어려움’, ‘시작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괘이다. 하늘과 땅이 첫 무대를 펼치고 사방은 어둡다. 그 어두움을 뚫고 무대 조명이 가냘픈 새싹을 비춘다. 새싹은 스스로를 덮고 있는 흙덩이를 밀치고 올라온다. 봄.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새싹이 자라서 꽃을 피우는 것은 우주의 탄생만큼이나 힘들고 절실한 일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꽃을 피우는데 쏟아붓는 행위다.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듯 기진맥진한 상태일 것이다. 꽃이 피는 어려움을 잘 나타내 주는 시가 있다. 바로 이호우의 현대시조인 「개화」다. 짤막하니까 전문을 보자.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개화(開花)란 순수 우리말로 ‘꽃 피다’이다. 한자어 ‘개화’라는 말보다 ‘꽃 피다’처럼 순수 우리말이 훨씬 본질에 가깝게 다가온다. 태어나는 것은 우주를 품에 안는 것이다. 꽃 피는 것은 한 하늘을 열어서 한 세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싹은 우주다. 특히 중장의 ‘마지막’ (꽃 송이 한 잎을 피기 위해) ‘떨고 있는 고비’는 바로 수뢰준괘의 ‘탄생의 힘듦’, ‘시작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외국시 중에서 이 수뢰준괘를 나타내는 시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다. 엘리엇의 「황무지」 전체 5부 중 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 하면서 봄의 잔인함, 새싹이 나무로 자라는 과정의 어려움 등을 말하면서 오히려 겨울이 따뜻하고 좋았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시작의 어려움’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해보려 한다. 필자는 턱걸이를 지금은 1회에 10개 정도 하는데, 처음에는 한 개 하기도 어려워 ‘제발 한 개만 턱걸이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후로 턱걸이 한 개 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턱걸이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개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자기의 몸무게를 중력으로부터 들어 올리는 일이다. 우선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푸시업(팔굽혀 펴기)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어깨 힘을 기르기 위해 운동용 고무줄을 사서 철봉대에 묶고 한쪽 발을 그 고무줄에 걸고 턱걸이를 한다. 익숙해진 다음에는 운동용 고무줄을 풀고, 맨손으로 철봉대를 잡고 해 본다. 안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팔굽혀 펴기부터 반복한다. 이렇게 계속 반복, 반복,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겨우 턱걸이 한 개를 마치면 그 기쁨에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받아 든 심정처럼. 그 다음부터 일등병, 상등병, 병장 계급장을 달 듯이 턱걸이를 2개, 3개……. 이렇게 차례로 턱걸이 수를 늘려가면 된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고 힘들지, 겪고 나면 나머지는 비교적 쉽다. 그러므로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때 온 에너지를 다 써야 한다. 꽃을 피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식물이 처음 꽃을 피울 때 온 힘을 다한다. 「개화」에서도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라 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쉽게 적응해 가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한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사람은 에드먼드 힐러리경이라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에베레스트를 3번이나 등반하다 에베레스트에 묻힌 사라진 맬러리도 기억해야 한다. "왜 굳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맬러리의 유명한 말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기억하지 말자. 역사를 만든 사람과 문명과 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반 평민들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그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꽃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리의 우주도 사라진다. 눈을 뜨면 나만의 우주가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각각의 우주를 안고 산다. 혹자는 ‘내가 죽어도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가?’하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우주는 내 우주가 아니다. 왜? 내가 죽었으니까. 죽음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보라.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나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부모가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있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다. 나만의 우주가 있는 것이다. 땅 속 어둠을 뚫고 세상에 나온 새싹은 자기만의 우주를 길러낸다. 탄생과 출발의 어려움은 단단한 알을 깨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새가 알껍데기에서 부화하기 위해 줄탁동시(啐啄同時)하고, 식물이 흙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행위는 매우 어렵고 도전적인 과정이 될 수 있다.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을 극복하려면 엄청난 힘, 결단력, 인내가 필요하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산다. 언제나 화목한 이 독실한 크리스트교 가정은 존재 양식적 삶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싱클레어가 사회에서 접하게 되는 아이인 크로머는 소유 양식적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싱클레어가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한 것을 빌미로 싱클레어를 협박하고 돈을 갈취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이기주의적이고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는 소유 양식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계문명 아래 오로지 성장과 발전만을 목표로 자연과의 생태학적 관계나 다른 구성원과의 유대는 고려하지 않으며 달려나가고 있다. 껍질을 깨기 위한 몸부림처럼 탄생이나 시작의 과정은 불편함, 고통, 불확실성을 수반할 수 있지만 최종 결과는 종종 아름다운 경험으로 끝난다. 껍질을 깨는 은유는 도전을 극복하고 성공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회복력과 끈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성장과 변화의 잠재력을 포착한다. 인간은 탄생과 함께 시작의 어려움과 마주한다. 아니, 사실 탄생 이전의 무명 단계부터 힘들었다. 어떤 것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 채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수뢰준괘는 마른 번개요, 헛천둥이다. 고난의 시작이지만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기회다. 그래서 『주역』은 이때가 경륜을 펼칠 시기라 했다. 경륜에서 ‘경(經)’이란 날실을, ‘륜(綸)’이란 씨실을 말한다. 그래서 날실과 씨실이 서로 잘 짜여지는 것 즉 세상의 틀을 짜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실을 엮는 시간이다. 따라서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때부터 경륜을 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또 다른 주인공 크로머의 소유 양식적 삶이 아닌 주인공 싱클레어의 존재 양식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세상의 틀을 잘 짜야만 한다. 생명의 탄력성은 출생과 성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에 있다. 새싹이 땅을 뚫고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우리는 벽을 뚫고 시작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우리만의 우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의미 있고 진정한 삶의 여정을 만들 수 있다. 어둠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자. 그 순간 우리의 진정한 빛이 가장 밝게 빛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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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4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자연을 사랑한 베토벤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 같다. 아침저녁은 그래도 시원한 듯하지만, 낮에는 제법 덥다. 이제 6월인데 이렇게 더우면 7, 8월은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마도 인간의 욕심과 무관심으로 인한 이상기후의 결과인 것 같다. 자연의 시간표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는 끝도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이치인데, 그마저도 순리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옛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던 우리의 조상들과 달리 이제는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자동화되고, 편리함이 극대화되고 빨라졌지만 그로 인한 자연의 파괴 또한 빨라지고 있다. 이제는 경각심을 느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심각함을 깨닫고 행동해야 될 때다. 지금을 안일하게 놓친다면 이 지구에 미래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두려움에 떨고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함도 느꼈다. 이제 그 바이러스가 좀 진정되는가 싶긴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기후 문제인데, 이건 지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 모두가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런 피해는 계속되고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주변만 둘러봐도 곳곳에 푸르름이 넘쳐난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엔 초록색 잎들이 가득하고, 말라있던 공원 대지엔 잔디가 가득하다. 알록달록 가지각색의 꽃들도 만발하다. 나무와 꽃들을 눈에 담고 있으면 기분도 싱그러워지고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주는 소중함에 더 겸손해지고 감사하게 된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배출되는 탄소로 자연이 망가지고, 그로 인해 말 못 하는 동물들이 피해를 입는 광경을 볼 때마다 반성하게 되고 지구의 미래에 두려움이 생긴다.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작곡가 베토벤도 그래서인지 자연에 대한 감동과 애정을 담은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하나인 6번 교향곡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묘사하는 음악이다. 이 곡은 그의 교향곡이 영웅을 묘사하거나 드라마틱한 무엇인가를 주제로 하던 전통적인 주제 제시 방법을 쓰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일상을 그리는 것에 중점을 둔 새로운 음악적 표현을 시도한 작품이다. 그래서 각 악장마다 자연의 요소를 묘사하며 베토벤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작품에 반영하였다. 베토벤은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연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는 요소였던 것 같다. 그는 자연의 조용한 환경에서 작곡에 몰두하곤 했으며,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자연의 소리나 풍경, 감정적인 상태 등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그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토벤 교향곡 6번에는 “전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베토벤 자신이 직접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해 많은 시간을 숲과 들판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에게 숲과 들판, 자연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을지 상상이 된다. 왜 그가 자연에 그토록 많은 애정을 갖게 되었는지 더 깊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 시기에 작곡된 곡이기에 이 곡은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것이라기보다 베토벤이 느꼈을 자연에게 받은 그의 감정적인 위로와 깊이가 같이 표현된 곡이다. 그가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었던 천상의 소리를 음악에 녹여낸 가치 있는 곡이다. “전원”이라는 제목은 이 작품이 자연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베토벤이 작품의 각 악장에 자연의 요소를 묘사하도록 작곡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 곡은 ‘전원’이라는 제목 그 이상의 감정의 깊이가 담겨있다. 따라서 “전원”이라는 이 곡에는 작품의 음악적 특징과 주제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악장마다 자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을 들으며 이 여름의 싱그러움에 흠뻑 취하길, 베토벤이 역경을 딛고 행복을 느꼈던 그 느낌이 누군가에게도 전해지길 기대해 본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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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김홍제의 목요칼럼]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교육부 장관이 된다는 것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권을 사지 않더라도 ‘1등에 당첨된다면’이라는 상상은 즐겁다.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이런 정책을 시행하고 싶다. 첫째, 오전 시간에는 지식 교과수업을 하고 오후는 원하는 선택 중심의 활동을 하게 하고 싶다.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과 교육과정을 오전에 배치하고 오후에는 동아리 중심 형태의 활동을 하고 싶다. 과학 동아리, 수학 동아리, 미술 동아리, 운동 동아리, 봉사 동아리, 독서 동아리를 매일 월, 화, 수, 목요일 오후에 실시하고 금요일에는 자율적 동아리 중심으로 심화 활동, 현장 활동, 지역사회 연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자율성은 주도성과 주체성을 키워 준다. 둘째, 중등학교는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연간 5권 이상 고전을 읽게 하고 한 가지 운동과 한 가지 악기를 배우게 할 것이다. 월1회 독서토론회와 자치토의를 통하여 민주시민으로서의 실질적인 역량을 키우게 하고 싶다. 셋째, 학교 역량으로 온전하게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사회에 돌려보내고 싶다. 학교는 성적, 인성, 식사, 건강, 정서, 지식, 안전, 태도, 적성, 진로, 돌봄 등 모든 것을 떠맡고 있다. 학교 밖에서 해야 할 것까지 학교에서 모두 받아들이고 있어서 동맥경화 상태에 있고 제대로 하는 것이 줄고 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는 척이 아닌 진정으로 학생을 변화시키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도 못하면서 책임만 잔뜩 짊어지고 있는 학교 모습은 안타깝다. 넷째, 방학 대신에 4계절에 일주일씩 개인적인 휴가를 인정해 주고 싶다. 좋은 계절에 자기가 원하는 날에 원하는 곳으로 가족, 친구들과 짝을 지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싶다. 다섯째, 교장과 교감을 없애고 순환보직제도를 할 것이다. 교직원 투표를 통하여 부장처럼 교장과 교감도 순환보직으로 하여 점수를 따거나 근무평정을 잘 받는 교사보다는 교육공동체에게 인정을 받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장과 교감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여섯째, 학교는 반드시 정원과 숲 공간을 만들도록 할 것이다. 쉬는 시간에 숲 그늘 아래 벤치에서 쉴 수 있게 할 것이다. 걷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숲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입시는 대학에 맡기고 초·중·고는 본연의 교육과정을 하도록 할 것이다. 읽으면서 벌써 짐작을 했을 것이다. 이 소망들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연역적 사고로 강제하는 교육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지금처럼 점수가 지배하고 다양성이 실종된 학교는 미래가 없다. 학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과감한 시도를 해 보아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나온 의견과 객관적인 자료를 종합하고 숙고해야 진정성 있는 개혁을 할 수 있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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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육우균의 周易산책] 땅은 어머니다(중지곤괘) 下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지곤괘의 효사] 지배 天 用6 그대에게는 이로움이 있다. 上6 -- 용이 광막한 들판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의 피가 검고 누렇다. 65 -- 그대는 누런 치마를 입었구나. 왕이 되었다. 人 64 -- 보물 주머니의 입구를 막아라. 그대의 지식이나 재능을 드러내지 마라. 민중 63 -- 빛나는 교양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 그대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地 62 -- 배우지 않더라도 불리한 일이 없다. 初6 -- 그대는 서리를 밟고 있다. 견고한 빙판이 찾아 오리라. ☷ 지 ☷ 지 대지가 너르게 펼쳐진 모습이니 천지 만물의 모든 모습을 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지(地)의 자리에서 서리와 빙판이 찾아왔다. 음의 기운이 서리는 것이다. 여성의 부드러움은 순종이 아니라 양의 건강함을 꺾을 수 있는 다른 성격의 힘이다. 유교적인 관점으로 보아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배와 순종이라는 어불성설의 관념으로 고착화시켰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 그리고 다른 성격을 지녔다. 남성은 강함, 여성은 부드러움. 중천건괘와 마찬가지로 지의 자리는 비축의 자리다. 음의 기운을 비축시키는 것이다. 생명 탄생의 준비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배우지 않더라도 불리한 일이 없다”(不習無不利). 왜? 도덕적 인간은 지식을 많이 배운다고 실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 주변의 환경에 애정을 가지고 살면 된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를 ‘인드라의 그물’이라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월드 와이드 웹(WWW)’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정보 공간’을 말한다. 인간은 이 인드라 그물에 걸려 있는 존재와 같아서 그 관계망에서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인(人)의 자리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열심히 실력을 닦으라는 말이다. 매우 위험한 자리이니 만큼 자신의 보물 주머니를 꽁꽁 동여매야 한다. 아직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지 말고 숨기라는 의미다. 천(天)의 자리다. 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을 숨긴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인다. ‘낭중지추(囊中之錐)’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진다. 그래서 황상을 입었다. 황상은 누런 치마다. 즉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이 광막한 들판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의 피가 검고 누렇다.”는 말은 천자문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교합으로 검은 피와 누런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의 교합과 상보와 긍정을 말한다. 카오스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코스모스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지곤괘처럼 되려면 ‘후덕재물(厚德載物)’해야 한다. 대지가 너르게 펼쳐진 모습처럼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고조선의 대륙을 머리를 흩뿌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여인을 상상해 보자. 중천건괘와 중지곤괘로 무대 장치가 끝났다. 이제 무대 위에서 펼쳐질 청정한 하늘 아래, 그 흙바람의 공간 속에 실린 싯귀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 중지곤괘는 음이 꽉 찬 기운이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좋은 일이 많다. 금전이나 물질은 풍부하고, 인내는 행운의 열쇠, 조급하면 불운의 시작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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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전재학의 교육칼럼] 기업인이라면 한국 대학생을 뽑지 않겠다는 교수와 우리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우리 교육의 실상을 밝히는 참담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S대 교수가 “명문대에 목매는 입시…내가 기업인이라면 한국 대학생 안뽑아”라는 제목의 신문(동아일보 2023.7.7.) 기사다. 그는 S大 국제대학원 이수형 교수다. 참담한 한국교육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학부모님께』라는 책의 저자로서 AI 발달로 취업시장은 급변하는데 학벌 지상주의의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교육에 좌절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계를 느껴 학부모들에게 직접 호소하려고 이 책을 출판했다. 내용의 요지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성적보다 좌절하지 않는 마음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배운 ’지식‘은 세계무대에서 쓸모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학벌의 소유자인 이 교수는 대학 졸업 후, 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예컨대,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참석했다가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자신에 실망했다. 이는 드문 경우일까? 아니면 보편적인 경우일까? 그는 또한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른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밀리기 일쑤며 “한국에서 뭘 배웠나”하는 자괴감에 빠졌었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이것이 이 교수 개인에 한정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으로 널려졌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이수형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주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기업에서 채용할만한 학생들을 추천해 달라는 제안에도 선뜻 추천하지 못하는 같은 이유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학생들이 이런 처지니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는 생각은 어쩌면 학자적 고뇌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대학은 졸업을 늦추며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최종 결론은 바로 그들이 받은 우리의 교육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취업시장은 급변하는데 아직도 이른바 SKY, 인(In)서울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서열에 목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뿌리 깊은 '학벌 지상주의'에 근거한 교육 가치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인재라는 학생들이 S大를 나와도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전문성이 낮아서 해외 취업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헬조선', '이생망'을 외치는 청년 중에 상대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대상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진로·진학 교육의 점검이 요망된다. 아직도 대학에 진학할 때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아무 학과나 선택하는지, 특정 학과만 고집하는지 말이다. 현실은 컴퓨터공학, 반도체공학, 화학공학 등 높은 임금을 받고 취업이 보장된 이공계 대신 초등학교부터 의대 진학 사교육을 받는 망국적인 편중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은 졸업 후에 특정 기업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나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말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결정한다면 세계적인 어느 기업이든 환영받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2021년 21조 5,000억, 2022년 26조 원의 사교육비를 지출한 명실공히 사교육 공화국이다. 우리의 학교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교육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이공계를 기피하고 수포자를 양산하는 교육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정부가 아무리 ‘킬러 문항’을 배제하여도 수능에서 비비 꼬아 변별력을 높이겠다는 착각과 질 낮은 문제를 접하는 한, 우리 교육은 낮에는 학교에서 내신을, 밤에는 학원에서 수능을 공부하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교육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생들이 삶 속에서 접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실패를 딛고 회복탄력성을 높여 정신적 건강을 굳건히 하며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여 서로 상생(win-win)하는 세계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보편교육으로의 전환은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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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20년 후 행복한 학교를 소망하며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올바른 사회는 오직 어린이들에게 참다운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페스탈로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만화광이었다. 만화를 열 권 넘게 빌려서 머리맡에 놓으면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만화방 방문을 끊었다. 서기 2002년이나 서기 2020년이라는 제목을 단 공상과학 만화에 있던 몇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미래는 인류가 상상하는 꿈을 실현하는 환상적 세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교무수첩을 펼치자 주간회의록에 주번교사를 쓰는 칸이 보인다. 숙직을 하고 운동장 조회를 했고 시험문제를 손으로 써서 출제했다. 교사들은 당구를 쳤고 삼겹살로 회식을 했고 총각 선생님 집에 모여서 2차로 순대와 막걸리를 먹었다. 숙직실에서 바둑으로 자장면 내기를 했고 다른 교직원이 쓰던 이불을 덮었다. 여교사들은 공휴일에 학교로 출근하여 일직 근무를 했다. 아이들은 스승의 날에 손수건을 선물하거나 담배 한 갑을 포장지에 싸서 선물하기도 했다. 스승의 날에는 담임반 학생들이 케이크를 교탁에 놓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불렀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라는 노래 가사에 교사 얼굴은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칠판에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라는 글씨가 색분필로 커다랗게 있었다. 학생부는 교문에서 두발과 복장단속을 했다. 그러한 시대를 거쳐서 우리는 2023년이라는 이곳까지 왔다. 수십 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경쟁 위주의 시험과 답답한 학교 시설, 틀에 박힌 교육과정, 행정 위주의 교육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개선되리라 기대했다. 세상은 기대와 어긋나 바이러스로 학교가 휴교를 하고 사교육이 맹위를 떨치고 교사들은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한다. 맬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생산의 산술급수식 증가로 인류가 빈곤의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관적 미래를 예언했다. 다행히 그 예언은 빗나갔다. 정부는 60년대부터 경제성장의 저해 주범이 인구로 규정하고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한국 작년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이다. 한국은 2013년부터 OECD 국가 가운데 합계출산율 꼴찌이다. 지금 학교는 공사 중인 공사판과 같다. 어수선하다. 고교학점제, 공간혁신, 인공지능(AI) 교육혁명, 석면철거 공사, 학생 인권, 대입시험 개선, 교육공무직 갈등 등으로 안정보다는 끓는 물에 가깝다. 세계 최고의 대학과 선진국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혁명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소망하는 세상은 올 것인가. 학교에 바라는 간절하고도 절실한 소망이란 어떤 것인가. 어릴 때처럼 로봇이 숙제를 대신해 주고 자가용 비행기로 등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고속도로, 전자산업, 인천국제공항, 전자분야 인재 양성으로 먹거리를 해결하여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앞으로 30년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안개 속과 같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떤 교육으로 어떤 인적자원을 개혁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가야할 미래는 불안정하고, 예측이 어렵고 복잡하고 애매모호하다. 핵심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이 좋은 교육이고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앞으로 20년 뒤는 2043년이다. 변화라는 물살은 더 빨라 여울을 이룰 것이다. 기술과 정치와 교육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방향으로 나가길 소망한다. 세월이 지나도 학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며 잠재력을 발견하고 억압보다는 칭찬과 존중, 억지로 가야만 하는 학교가 아닌 가고 싶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학교로 즐겁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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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3
  • [육우균의 周易산책] 땅은 어머니다(중지곤괘) 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늘이 양의 성질인 ‘확산’의 개념이라면 땅은 음의 성질인 ‘수렴’의 개념이다. 따라서 하늘은 ‘밀어내는 힘’이 지배하기 때문에 지금도 우주는 빅뱅 이래 팽창하고 있다. ‘땅은 축소하는 성질을 가진 그 무엇’이라 정의하면 되겠다. 땅은 중력으로 이 세상 만물을 수렴한다. 일종의 ‘당기는 힘’이 지배한다. 그래서 중력에 의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생명을 다한 것들이요, 그에 반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땅을 디디고 서 있다. 점차 땅에 가까이 눕게 되면 생명의 불꽃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꿈을 꾸며 이상을 좇는다. 노천명의 「별을 쳐다보며」란 시에 보면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별을 쳐다보고 걸어갑시다.//친구보다/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술 한 잔만도 못한/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현실을 땅에 디디고도 이상을 좇으며 살자고 노래하고 있다. 대지는 부패와 생성의 철학이다. 대지의 관점에서 볼 때 부패는 평상적인 현상이며, 생성이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다. 대지는 부패됨을 기본으로 한다. 부패는 사랑이다. 모든 것은 부패되어야 생성된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는다. 그리고 부패된다. 온전히 부패되어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도 죽어야 다른 세포가 생성된다. 역설적이다. 땅은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길러내지만 그 전에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죽어 부패되어야 새로운 생명이 자란다. 생명은 중력의 힘에 반작용해야 유지된다. 그 힘을 유지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부패와 생성의 과정은 일상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일어난다. 원시시대 이후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농지가 택지나 공장, 또는 발전소로 전용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땅도 자갈이나 아스팔트, 시멘트로 뒤덮여버린 토양에서 부패의 기능은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산품들은 거의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하지 않는다’ 함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토지의 부패 기능이 약화 되면 먹이 사슬의 기반이 약화 되고 결국 사슬의 연결이 이완된다. 그리하여 흙이나 바다로부터 주방을 경유하여 인간의 입에 다다르는 음식이 저급화 되거나 그 양이 감소 되어 기아를 낳게 된다. 결론은 뻔하다. 인간의 죽음이다. 버려진 것에 깃드는 재생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생성과 소멸 간에 분리하기 힘든 연속성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씨앗의 껍질이 터지며 싹이 나듯이, 알이 깨지며 유충이 얼굴을 내밀듯이, 우리가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분해 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수정란은 하나의 세포를 차례차례 분열시키면서 성장하듯이 태어났을 때 이미 분할과 붕괴로 향하고 있다. 아니 분할되고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을 일러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바다다. ‘바다해(海)’자에 ‘어미모(母)’자가 들어 있다. 영어에도 mater를 뜻하는 ‘mate’가 있다. ‘바다’를 부르는 라틴어다. 어머니의 태 안에 있는 양수를 조사해 보면 바닷물이 함유한 미네랄 성분 비율이 거의 같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에 보면 ‘태아들은 양수라는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며 자라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수정된 지 1~2개월된 뒤부터 태아는 물고기처럼 폐호흡이 아니라 양수 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고 지낸다. 해수와 양수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겨자씨만한 내 자신의 과거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어머니와 바다, 과학이 시가 되고, 시가 과학이 되는 환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태초의 어머니는 땅이 아니라 바다다. 흙이란 것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원래 지구가 탄생할 때의 모습은 땅에는 바위와 모래뿐이지 유기물인 흙은 없었다. 달처럼 생물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다에 살던 생명체가 강을 타고 육지로 올라왔다가 죽은 시체가 흙이 된 것이다. ‘대지는 어머니다’라는 은유의 개념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가이아(Gaia)’란 개념이다. 개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가이아’란 창으로 세상을 보면 지구는 세포 조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개념이 창작물에 사용될 때는 영화 「솔라리스」처럼 주로 지구 자체가 일종의 생각과 자의식을 가진 존재라거나,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설정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개념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지구의 자연 환경을 방해하는 존재는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질병에 해당하고, 지구상에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특정 개체군은 암세포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개체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환경 운동가들, 저술가, 그리고 창작가들은 “인류 문명은 암세포적 질병이다.”라는 컨셉을 도출해냈다. 특히 여러 가지 지구 종말론 가운데 가이아 이론을 채택하여 인류 문명의 붕괴는 지구 차원의 자정작용이라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의 비정상적 번성으로 지구 기온이 올라가면, 자연히 인간이 살기 어렵게 되면서 개체수가 줄어들고 지구가 깨끗해진다는 논리다. 또한 병적 요소인 인류를 제거하기 위한 살인 바이러스 출현이 인류를 멸종시키고 대체하기 위한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인형사 등의 신인류가 등장하는 등의 판에 박힌 표현도 존재한다. 펄벅(Pearl Buck)의 『대지』에서 주인공 왕룽은 부지런하고 땅을 사랑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다. 왕룽은 본능적으로 땅을 사랑하고 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한때 남쪽 도시로 가나 결국 다시 돌아온다. 왕룽은 작품 끝부분에서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자식들이 땅을 팔기 위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땅을 팔기 시작하면 우리 집안은 끝장난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게야. 땅을 갖고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다. 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만약 너희들이 땅을 팔면 그게 마지막이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게야.” 이러한 땅에 대한 동양적 사고는 서양에서도 똑같이 인식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빚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흙의 존재인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라 할 수 있다. 흙에서 나온 사람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불교에서도 ‘인드라 그물’이라 하여 수많은 구슬이 연결되어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구슬 모두가 흔들리고,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모든 구슬에 나타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세상 만물은 땅이라는 대지 위에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그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 「기러기(Wild Geese)」에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자연 세계에 대한 축하이며 초대장이다. 이 시는 우리가 완벽을 위해 노력하거나 인식된 결점을 속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전달한다. “착해지려 할 필요 없어./참회의 심정으로 무릎으로 기어/백마일 사막을 건너려 하지 않아도 돼.” 대신,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의 자연 세계에서 존재하고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올리버는 계속해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너에게 소리쳐 말하지, 기러기들처럼 들뜬 목소리로 꽥꽥 거리며 -” 당신을 부른다. 이 부분은 우리가 세상에 혼자가 아니며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생각은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란 시에 나오는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라는 구절처럼 자유의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이끌려 온 삶을 회한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기러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자연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자리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세상이 만든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대지처럼 넓다. 하늘처럼 높다. 위대하다. 시공간의 제약에도 관계 없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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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1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하늘은 하느님이다(중천건괘) 下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천건괘의 효사] 지배 天 用9 − 머리가 없는 용들이 모여 있구나. 우월의식을 버리고 무아의 지혜를 발휘하라. 上9 − 극점에 도달한 용 - 욕심을 버려라. 95 − 하늘을 나는 용 – 대 스승을 만나라. 人 94 − 연못을 벗어나 뛰어오르는 용 – 도전하고 모험하는 삶을 살아라. 민중 93 − 매일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地 92 − 밭에 있는 용 – 부지런히 밭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라. 初9 − 물에 잠긴 용 – 잠재력을 최대한 축적하라. ☰ 천 ☰ 천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쉼 없이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천(天)의 자리와 지(地)의 자리는 인생에서 무대에 해당한다. 내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고정된 자리이다. 인(人)의 자리가 그 무대에서 보이는 나만의 역할이다. 그러면 먼저 지(地)의 자리를 보자. 초9와 92효사다. 이때는 자신을 성장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잠재력을 축적하고 가능성을 키워야 하는 시기다. 인의 자리(93과 94효사)는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 한 번 내던져야 한다. 특히 93에서 94로 올라설 때는 항상 조심하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천의 자리(상9)에 오르면 무조건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대 스승을 만나야 한다. 나폴레옹, 히틀러, 차우세스쿠, 후세인, 카다피 등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최고의 위치에서 대인을 못 만나서, 겸손하지 못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처형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용9효사에 이르면 노욕이 생기고 우월의식이 생긴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봉사하며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아는 교장 중에 퇴임하고 나서 군내 버스 기사를 하시는 분이 계시다. 평소에도 존경하던 분인데 그 분이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천(天)의 자리와 인(人)의 자리, 지(地)의 자리 중, 인의 자리가 가장 중요하다. 천이나 지의 자리는 우연의 원리가 지배한다. 인의 자리는 사람의 자리다. 그만큼 필연의 원리가 지배한다.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필연적인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우연은 신의 영역이다. 지의 자리와 천의 자리는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어짜피 그렇게 될 일’, ‘이미 씌어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마크툽’이다. 그래서 인의 자리에서 인간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93과 94의 효의 자리가 인의 자리인 것이다. 민중과 지배 자리의 경계에 있다. 민중의 자리에서 지배의 자리로 올라 서려면 온 힘을 다해 잠재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반드시 도전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인의 자리인 93에서 천의 자리인 94로 올라설 때인 것이다. 마치 엉금엉금 기던 아기가 처음으로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할 때처럼. 자신의 잠재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때이다. 대입시험을 치를 때, 취직할 때, 간부로 승진할 때 등등. 우리는 도전에 성공한 후에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지 잘 알고 있다. 김연아, 손흥민, 임영웅 등은 자아의 신화에서 진정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어제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도전(모험)을 해야 한다. ‘서면 그저 땅일 뿐이나, 걸으면 길이 된다’고 하였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실천해야 한다. 지성인과 지식인은 다르다. 지식인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데 그치는 사람이고, 지성인은 이해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 도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를 계발해야 한다. ‘자강불식’해야 한다.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을 본받아 자기가 현재 처한 위치에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리고 매일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다.”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처럼. 세상 만물은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조금씩 점차로 천천히 바뀐다. 왜 그런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인내해야 꿈을 달성할 수 있다.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봄에 꽃이 피는 나무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그러면 보인다. 벚꽃이 지려고 할 때 어느새 새끼 손톱만한 연녹색 새로운 잎새들이 가지에 피어나 있는 것을. 매일 매일의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고도의 숙련을 만든다. 그러므로 자강불식해야 한다. 중천건괘를 살펴 보았다. 그 반대괘는 중지곤괘다. 하늘의 반대는 땅이다. 다음에는 중지곤괘를 살펴 본다. ☯ 점을 쳐서 중천건괘가 나오면 최고로 좋은 괘다. 중천건괘는 양의 성질이 가득하다. 남성성이 가득한 운으로 남성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해 남성은 만사형통이나,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남성은 권력이 커지고 명예도 얻는다. 일이 척척 풀려간다. 일들이 마음 먹은대로 척척 풀려가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과 도전이 필요하다. 매일 자강불식으로 건강을 지키고, 매사에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 여자의 경우 중천건괘가 나오면 매사에 주의하고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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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1
  • [전재학의 교육칼럼] 자녀교육에서 ‘투 마취 러브(Too Much Love)’를 경계하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많은 분야에 걸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 우리는 삶이 너무 빈곤해서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비어있는 무엇이든지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결과 우리는 5천 년의 가난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정치의 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기나긴 독재와의 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최단기간 내에 이루어낸 민족의 위대함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쾌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이러한 번영과 발전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 특히 우리의 교육열에서 나타나는 부작용, 후유증이 그렇다.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열은 망아지는 제주도로, 자식은 서울로 보내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소망으로 채움에 대한 열정이 넘쳤으며 이는 곧 엄청난 성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지나침은 항상 탈이 나게 마련인가? 과유불급의 현상이 우리 사회 전 영역에 들불처럼 번지면서 자녀에 대한 ‘투 마취 러브(Too Much Love)’는 이제 일종의 경각심마저 유발하고 있다. 최근의 ‘부모 찬스’가 낳은 각종 불법과 탈법은 사회 문제가 되어 이 땅에 진정한 자녀 사랑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시대적인 기치로 내세운 ‘정의, 공정, 평등’에 대한 의식과 대항함으로써 부모의 탐욕에 제동이 걸리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과유불급’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논어의 해석과 시중(市中)의 해석이다. 경전에 의하면 넘침과 모자람은 적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시중의 해석은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후자는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평가다. 일례로 ‘십 리를 더 간 것이 덜 간 것보다 손해’라는 뜻에서 못하다고 한 것이다. 십 리를 덜 갔다면 십 리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나 목적지를 지나쳐 십 리를 더 간 사람은 목적지까지 돌아오기 위해 총합 이십 리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과유불급은 투 마취 러브에 대한 시중의 생활 경험의 지혜를 따른다. 즉, 과한 행동은 모자라는 행동보다 나쁘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행동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기회도 남긴다. 반면에 과한 행동은 마음에 상처를 입혀 기회를 잃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원한을 사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두 분야에서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이 지배적이다. 우선 정치적으론 ‘인사가 만사’라 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흠결 없는 인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시시비비는 가려야 하고 정당한 비판은 수용해야 한다. 부풀린 의혹과 가짜뉴스가 진실에 앞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념과 사상에 의해 무조건적인 지지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한다. 과연 정치에 중용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교육에의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은 어찌할 것인가?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결국 자녀를 망치고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며 특히 교육 사다리를 통한 계층 이동의 국민적 희망마저 완전히 붕괴할 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몇 년 전 사퇴한 한 법무부장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은 그 후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는 외형만 바꾸어 학교폭력의 징계를 모면하려 ‘부모 찬스’이자 권력의 위력을 동반한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 대한 사랑에 차이가 있을까마는 직위와 권력, 부를 이용한 편법적이고 불법적인 지나친 사랑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이는 필자와 같은 필부필녀가 자기 연민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불러온 불행은 부모와 자녀에게 각각 절제와 자립심, 양심, 부끄러움 등 수많은 인성적 측면에서도 성찰과 과제를 남긴다. 자녀교육이란 명분으로 부모의 영향력을 내세운 지나친 사랑은 궁극적으로 이 사회의 왕따를 길러내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민주적 가치마저 통째로 파괴하는 야만적 행위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훨씬 못하고, 손해이고 위험하며 남겨둬야 할 기회마저 잃고 남의 원한을 산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자.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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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김홍제의 목요칼럼] 교각살우(矯角殺牛)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옛날 중국 풍습에는 종을 만들 때 짐승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제물로는 잘 생기고 뿔이 곧은 소를 바쳤다. 한 농부가 뿔이 조금 삐뚤어져 있어서 바로잡으려 팽팽히 뿔을 동여매었다. 그러다가 뿔 전체가 빠지는 바람에 소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유래이다. 결점(缺點)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手段)이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의미할 때 흔히 쓰는 고사성어이다. 교육계에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백년대계라는 나무가 흔들리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교육은 공룡처럼 커다란 사회 분야이다. 이렇게 큰 분야를 수술하려면 준비가 치밀해야 한다. 사교육비를 없애기 위해 이른바 ‘킬러문항’을 없애라고 대통령이 발표했다. 발표 나흘 만에 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임했다. 정부에서는 대입 수능 5개월을 앞두고 평가원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사교육시장에 만연한 ‘카르텔’을 잘라내겠다는 것이다. 친척이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는데 피부약을 계속 바르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단다. 전문병원에 가자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이 금방 나와서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잘못된 진단과 치료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차량수리나 병원치료에 서 잘못된 진단으로 고생했다는 사례를 들은 경험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진단을 잘못한 수술은 생명까지 위협한다. 살을 가르고 혈관을 자르고 내용물을 꺼내고 다시 살을 꿰매는 일에는 반드시 커다란 출혈이 있다. 그 일이 자기 몸이라면 걱정이 클 것이다. 그 의사가 최고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큰 수술을 앞둔 사람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전문의사가 아닌 병원 관계자가 수술을 잘 안다고 내 몸에 메스를 댄다면 어떨 것인가. 지금 세계는 교육에 대하여 대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에는 크고도 중요한 시기이다. ‘OECD 교육 2030’, ‘UNESCO 교육의 미래’ 보고서는 전 지구적 ‘위기’ 인식에서 교육의 변혁을 강조한다. 환경과 경제와 사회에 대한 도전은 인류가 함께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존의 경제 중심 · 경쟁주의 교육관에서 벗어나 사회를 변혁하고 미래를 만들어갈 역량을 제시한다. 다양한 교육 전망과 미래 교육 시나리오를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교육을 통해 지구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한 호소를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 교육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대이다. 학벌과 경쟁은 그대로 두고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변별력을 없애는 시도는 효용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다. 대학 서열, 입시 체제,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 현장이 현실이다. 변혁적 교육론이 필요하다.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의 대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험문제 한두 개에 얽매이기보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육 변혁에 대한 큰 계획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평가를 통한 경쟁과 불평등한 교육체제에 대한 정비가 없이 급조된 갈등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한국교육에 대한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수능 킬러문항을 킬(kill)하려다가 교육을 죽이는 교각살우는 없어야겠다. 섣부른 집도는 위험하다. 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크고 심각할수록 전문의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메스를 들어야 국민이 가지는 근심이 적을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과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생각들이 쓸데없는 걱정이 되길 바란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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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누가 죄인인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기본적으로 죄의 기준은 법이다. 공동 관심사를 조정하고 보편적 평온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 연방 정부를 수립하려면, 정부의 보호 및 관리·감독에 맡겨질 대상과 관련해 헌법안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원칙과 반대되는 원칙 위에 연방 정부가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 정부는 정부의 힘을 시민 개개인에게까지 확장해야만 한다. 연방 정부는 중간에 게재하는 어떤 입법의 도움 없이도 성립해야 하며, 연방 정부의 결정을 집행할 상임 집행관이라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중앙 권위의 통치권이 법원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명되어야만 한다. -연방주의자(Federalist) 17권, 제4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 외 4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법은 죄의 경계선을 지었다. 법이 없다면 죄는 죄로 성립될 수 없고, 법이 있다면 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죄가 된다. 국가 사법체제 아래에서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은 없다. 법이 있기에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상호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형성된다. 오레스테스의 죄는 친족살인이다.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 오레스테스는 그들을 죽인 친족살해범이다. 반인륜적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국가정치체제인 폴리스 police와 친족, 가족, 혈연관계인 오이코스 oicos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오레스테스의 친모살인죄를 두고 공방전을 펼치는 배심원제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자 그의 아들은 오레스테스와 누이인 엘렉트라는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어머니와 정부를 죽이고 난 뒤 오레스테스는 아테나이에서 아테네 여신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인류사회에서 법은 정의의 실현과 정당성 부여를 위한 권력과 통제의 권한을 갖는다. 독특하게도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인간의 법, 혹은 보편적 진리와 사실에 대한 고찰을 장려하기보다는 아테네라는 신에 의한 직접적인 판결이 내려진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신의 직접적 개입Deus ex machina'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B.C25~A.D50, 고대 유대인 철학자)은 신을 두고 "신은 선한 것보다 더 선하며 완전한 것보다 더 완전하다(Er ist besser als gut, vollkommener als vollkommen)"고 이야기한 바 있다. 결국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의 뜻과 의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닿을 수 없는 완전한 세계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아테네가 내린 친모살인에 대한 무죄 판결은 신의 직접적인 판결이며 인간의 법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소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테네의 무죄 판결이 절대적으로 옮거나 신이 내린 판결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작품이라고 단정 짓기엔 위험할 수 있다. 아테네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들이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사건은 너무나 중대하다. 그렇기에 극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이 사건을 심판할 권한은 나에게도 없다. 다만 그대(오레스테스)는 관습에 따라 이미 정화되어 아무런 해가 없는 탄원자로 나의 집에 왔노니, 내가 그대를 받아들이겠다.(중략) 사건이 이미 나에게 떨어졌으니, 나는 선서를 하되 절대 불의한 마음으로 선서를 어기지 않을 사건의 재판관들을 선정하여 영원히 그 법규를 세워갈 것이다. -아테네의 대답, 자비로운 여신들 470-484행 본 작품 속에서 여신 아테네의 개입은 인간(오레스테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등 상황을 해석하고 해결해 내는 능력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이어야 했는가에 대해 가부동수가 나온 상황에서 아테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두고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하며 맞대응하는 복수의 여신들이 자비로운 여신들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테네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내 임무다.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진다.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온전히 아버지의 편이다.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는 집안의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다. 투표가 가부 동수라도 오레스테스가 이긴 것이다. -아테네의 판결, 자비로운 여신들 734-741행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지금보다 미미했을 거라는 평가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일상이었기에 강한 힘과 권력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남성의 권한이 더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우월주의를 이야기하는 듯한 아테네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을 수는 있으나, 전쟁과 정치, 권력을 제외한 부분에서의 재능, 역량, 가능성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작품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전쟁영웅인 아가멤논을 살해한 친족살인의 첫 번째 피의자로 등장하긴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아내이자 정절의 상징인 페넬로페와 달리 용기 있고 대담한 여성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이자 오레스테스의 누나인 엘렉트라 역시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을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유발함으로써 결정적인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 역시 희생제물로 바쳐졌지만, 이후 재구성된 작품(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신전의 여사제로 봉사하는 역할로 등장함으로써 그리스 비극 작품 속 남성이 결코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테네와 아르테미스는 여신 아닌가! 유한 성격에 세상만사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나에 비해, 아내는 트집을 잘 잡으며 말에 졸하다. 말로 여러 사람 죽이는 모습을 꽤 많이 봐왔다. 반면 생각이 복잡한 나에 비해 단순한 아내는 일처리 능력치만 두고 봤을 때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어느덧 결혼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엘렉트라 같은 아내보다는 페넬로페 같은 아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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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6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하늘은 하느님이다(중천건괘) 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하늘은 광활한 공간이다. 한없이 열려 있다. 현대 수학으로는 ‘∞’라 표시한다. 하늘은 무한을 상징한다. 상상으로 공간은 확장된다. 실물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눈을 감는다. 즉 하늘은 확산의 존재를 가리킨다. ‘하늘’은 ‘한+늘’(ㄴ탈락)에서 왔다. ‘한’은 ‘크다’의 의미고, ‘늘’은 ‘시간의 영속성’, 즉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은 무한 공간, ‘늘’은 무한 시간을 말한다. 한자문화권에서도 ‘우주(宇宙)’라고 할 때 우(宇)는 공간을, 주(宙)는 시간을 의미했다. 즉 ‘우주’의 순우리말이 ‘하늘’이다. 주역에서 하늘은 ‘☰’로 표시한다. 양의 성질이 세 개나 있다. 따라서 ‘하늘이란 무한히 확산되는 그 무엇’이라 정의한다. 「대상전」에 보면 “하늘의 운행하는 모습이 건강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쉼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天行, 健, 君子以自强不息)라고 씌어 있다. 하늘을 잘 관찰해 보면 천체의 운행이 잠시도 쉬지 않고 운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늘은 하느님이다. 즉 하늘은 완전하여 거칠 것 없이 무한히 확장하는 성질로 신과 같이 우러러본 자연이다. 우리 선조들은 해가 뜨고 지는 일, 달이 뜨고 지는 일, 12황도의 움직임,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바뀌는 일 등 그런 건강한 모습을 닮고자 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움직임이 지속되어야 건강하다. 동물은 움직여야 한다. 식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물을 땅 속에서 끌어올려 이파리로 올려주고 이파리들은 쉴 새 없이 광합성 작용을 한다. 건강한 사람의 몸속 세포도 쉴 사이 없이 움직인다. 용으로 상징되는 중천건괘의 효사93을 보더라도 ‘하루 종일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93의 효에서 94의 효로 올라가려면, 즉 민중의 자리에서 지배의 자리로 올라서려면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을 본받아 잠시도 쉬지 않고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중천건괘’의 모습이 잘 나타난 소설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이다. 『연금술사』는 개인 전설 또는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티아고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주인공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양 60마리를 키우는 양치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집트 피라미드 가까운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여정이 시작된다. 크리스탈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거기에서 양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피라미드에 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가지게 된 산티아고는 삶에서 여러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는 영국인도 만나고, 낙타몰이꾼도 만나고, 대상행렬을 따라가며 사막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오아시스에서 파티마라는 아리따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환상의 꿈을 꾼다. 산티아고는 여정에서 ‘모든 일에는 결국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많은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한없이 자애롭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면 단순함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의 표지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의 표지란 나의 인생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소통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우주와의 소통이요, 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내가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들, 쓰레기 청소부, 배달하는 사람, 집주인,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 등이 모두 신의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신의 대리인들이다. 산티아고가 피라미드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러므로 하루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위대한 업은 열려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업’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의 충실함이다. CBS에서 아침에 방송하는 ‘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프로그램 맨 마지막 멘트가 ‘오.하.당’이다. “오늘 하루도 당신 거예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즉 하루를 주인으로 살아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업을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이다.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해 준 말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에서 나온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해진 말이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일은 곧 우리에게 예정된 진정한 보물을 찾아내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삶의 연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신화는 결국 주역의 중천건괘에서 말하는 ‘자강불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면 사계절이 모두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지 마라. 현실에 얽매여서 진정한 인생의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변명도 하지 마라. 현재를 열심히 성실히 자강불식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자아의 신화에서 진정한 보물을 갖게 되는 길임을 『연금술사』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현재에 사는 것이다.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만 영원한 것이다. 현재에 머물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보물이 무엇이겠는가.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가치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서 행한 일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발 씻고 방석에 가만히 앉아 밥 먹고 강의했다. 현실에 매어져 있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한 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았을 때,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던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었기 때문에,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했다.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우리 선조들은 마음속으로 염원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달이 뜨는 밤에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홀로 기도를 올렸다. 그 오롯한 한 마음, 당연히 신이 함께 하지 않겠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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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요즘 젊은 사람들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동을 걸어도 ‘딱딱딱딱’하는 소리만 나면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라서 자동차 안은 모래 없는 사막이었다. 땀도 흐르고 인내심도 바닥을 쳤다. 제주해비치아트페스티벌에 참여하느라 여러 날 동안 제주도 출장을 다녀왔다. 천안에 오니 더운 날씨에 며칠 동안 자동차를 그대로 두어서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보험회사 고장출동 서비스를 신청했다. 10여 분 후에 50대 후반의 남자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차에서 내렸다. 사장은 푸념조로 말했다. “이제 이 일도 더 못할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직업 찾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하면서도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혼자서 여러 가지를 하려니 힘이 들어요. 이제 이 일도 오래 못할 것 같습니다.” 사장은 시동이 걸리도록 배터리를 임시로 충전시켜 주었다. 에어컨을 켜지 말고 한 시간 이상을 시동이 꺼지지 않게 운전하며 돌아다니라고 했다. 20분이면 집에 도착을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야산 근처에 차를 대놓고 시동을 켜놓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아카시아 나무가 흔들리고 나무 아래에서는 차분하고 곱게 핀 망초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춤을 추는 듯 보였다. 강한 햇살에 나무와 풀들은 싱싱해 보였다. 자족이란 저런 것인가. 스스로 가진 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생명력을 발산하는 식물들의 행복은 조용하고도 깊었다. 교사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얼마나 잘 찾아주었던가. 그들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다.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은 과거보다 많아졌다. 갈등이 많은 시대이고 걱정이 많은 시대이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피로감이 심한 시대이다. 진정한 스승은 보이지 않고 사방에서 경쟁적으로 몸과 능력에 숫자로 점수를 매긴다. 그들은 외모, 능력, 유머를 장착하고 로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일까. 맞벌이를 하며 바쁜 부모일까. 내신 성적으로 경쟁을 하는 학교 친구일까. 소비를 조장하는 게임회사일까. 교육정책을 펴는 교육부일까. 학교홍보에 열을 올리는 대학일까. 학생이나 학부형에게 고소를 당할까 걱정하는 교사일까.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어떤 말과 생각을 하는지 들어주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받아 적게만 하는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지금 있는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때 관계는 힘들어진다. 욕심이 생기고 비교를 하면 서로가 불행해진다. 아기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자기 안에서 만족감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아실현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것이 우선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구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가 욕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성공 욕구를 자식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삶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내용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강요의 교육이 궁극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다. 강요의 교육은 노예로 만드는 교육이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시동을 거니 차는 다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고장출동 서비스에 전화를 했다. 지역이 달라서 어제와는 다른 사장이 왔는데 어제와 비슷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아침 면도를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차에 상황 설명을 하자 배터리를 교환해야 한다고 했다. 서비스센터 사장은 배터리를 교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제 이 일 오래 못할 듯합니다.” 익숙한 말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기름을 3리터 보충하면 정확히 양이 맞느냐 어떤 회사 기름이냐 속이지는 않았느냐 등 불만과 의심을 계속합니다. 자식 같은 젊은이에게 그런 말에 대해 고분고분 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배터리를 교환했다. 나는 수리비를 계좌로 송금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고개까지 숙이며 몇 번이나 했다. 어디를 가고 있다가 차가 고장 나서 움직이지 못하면 낭패감을 느낀다. 그때 정비 기사가 와서 수리를 해 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고마웠다. 왜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마움보다는 서비스의 질을 의심하고 불만을 말하는 것일까. 소비시대에 ‘손님은 왕이다’라는 기업의 광고를 정말이라고 믿어서일까. 자신의 어려움을 없애 주고 나이도 자신보다 많은 분에게 감사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이런 태도라면 다른 상황에서는 어떨 것인가. 마음이 거북하다. 감사함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예쁜 마음들이 사라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보다는 나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요즘 젊은이가 많아 보인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배웠을까.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마음과 내 권리주장에 충실하면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가치관이 있는 것일까.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와 감사와 고마움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캄캄한 터널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의 교육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일에 큰 기반이 되었지만 내적인 성장에 대한 교육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스승이 보여주는 지표가 보이지 않고 있다.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공존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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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독자의 메세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인스타그램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전준우 작가님, 안녕하세요?'하고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였다. 연기를 전공한 27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자기 계발과 책 쓰기에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탁월한 책쓰기>를 읽게 되었고, 무척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며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나도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답장을 했고, 맞팔을 했다. 최근에 물류회사를 인수했다. 새벽 4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쓰고 독서를 하기 위해서 4시에 일어나는 것과 일을 하기 위해 4시에 일어나는 것은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직원도 한 명 뽑았지만,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처리하는 데 10시간이 걸렸다. 직원관리, 일처리, 재무, 회계, 세금처리까지 어느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너무 바빠서 육아와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일상이 지쳐갔다. 김훈 작가의 책 <연필로 글쓰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동네에서 만난 어린 아이랑 아이의 엄마가 김훈 작가를 향해 '할아버지'하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마을 할머니들이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는 몰래 엿듣는 내용도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그런 내용이다. 흥미로웠다. 일흔이 훌쩍 넘는 노신사에게 할아버지라고 이야기한 게 뭐 그리 대수이며, 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행위가 뭐 그리 추천할 만한 일일까마는,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김훈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대大작가다. 김훈 작가의 책은 출간되는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탄탄한 스토리 구성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수십 년간 신문 기자로 살아오면서 터득된 기술일 수도 있고, 내면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일 수도 있다. 여하튼 평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정경사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훈'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는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때우는 '할아버지'이며, 할머니들의 속내를 엿듣기 위해 곁귀를 쫑긋 세우고 연신 입을 삐쭉거리는 동네 할배에 불과한 것이다. 나를 돌아보았다. 작가는 무엇일까. 작가는 뭘 하는 사람일까. 책을 쓰는 것, 작가가 되는 것, 소설가가 되는 것. 그것은 어린 시절에 내가 가졌던 막연한 꿈이었다. 그렇기에 책을 출간해서 작가가 되고 난 뒤, 이후에도 몇 권의 원고들이 출판사와 계약이 되고 난 뒤, 소설 집필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순간, 막연한 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놀랍도록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권 두 권 쓰다 보니 책을 써내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고, 꿈이란 게 이다지도 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일을 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서 마음을 꽤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글을 쓰는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요즘,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마음을 두고 살아왔다. 까짓것 책 몇 권 써낸다고 해서 그 자체가 큰돈이 될 리도 없을뿐더러, 살면서 책 몇 권 써낸 사람들도 세상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원 강사로 일하는 아내는 오후 3시쯤 출근해서 밤 11시, 12시가 되어 들어오는데, 덕분에 저녁 시간 육아를 병행하며 글까지 써내는 것도 상당히 버겁고 힘든 일로 느껴졌다.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매일 주야장천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때 20대 젊은 독자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향한 반항의 일환으로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걸리는 순간 사형이다. 사각사각 글 쓰는 소리도 도청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글을 쓴다. 체제에 대한 반항, 자유를 향한 몸부림, 숨죽여가며 글을 쓰는 행위에 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난데없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물류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적어도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사형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며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독자가 남긴 메시지가 주는 울림은 컸다. 나는 다시 책을 손에 쥐었고, 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문장들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노트를 펴서 글을 쓰고,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 창을 켜고,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 두었던 원고들을 꺼내서 수정하기 시작했다. 밀린 칼럼을 쓰고, 묵혀두었던 소설의 퇴고를 시작했고, 출판사 등록서류도 마무리지었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 즐거움인지 모른다. 책을 출간하고 난 뒤, 무슨 일을 했던지간에, 나는 작가로 살아왔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그 자체 만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들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그렇다고 지체하지도 않고 꾸준히 글을 써 왔다.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나를 살아있게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내기 위하여 글을 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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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생을 추동(推動)시키는 교육을 실현하려면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세계적인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TED 강연에서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망가진 모델”이라며 “개선이 아니라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치를 획일적인 잣대로 정량화하고 단일한 기준으로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교육을 되돌아보면 개인의 개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국⋅영⋅수에 몰입한 학습과 사회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 되라고 종용해 왔다. 이는 우리 교육이 지식 축적이 주요한 산업화 시대에나 맞는 획일화를 추구한 거대한 프로세스임을 보여준 것이다.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한 인간이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의 배경은 지금까지의 교육 시스템은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투자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님과 같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교육을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학생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삶과 연계된 경험 중심의 교육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일찍이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가 “1그램의 경험이 1톤의 지식보다 낫다”고 말한 것과도 축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전통적인 핵심 지식의 습득을 기반으로 여기서 더 나아가 디지털 대문명이 요구하는 창의성 기반의 뉴노멀(New Normal)의 가치 창조를 위해 새로운 교육철학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 교육은 아직도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와 강의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흥미나 관심은 규정된 제도를 벗어나 통제 대상일 뿐이다. 학교는 제도적으로 정해진 것을 교육하고 그것만 공부하도록 만드는 수동적인 배움터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교육의 틀인 시스템만 남고 교육의 목적인 학생의 배움은 멀어져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학생의 배움이다. 당연히 배움은 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배움은 교사가 잘 가르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 배우는 것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생 스스로 배움의 의미를 깨닫게 해서 자발성과 적극성을 유도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학생들은 점수와 평가에만 민감하게 반응해 순간의 과정이 고통스럽게 지나면 더 이상의 배움은 없다. 이는 점수로 첫째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는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이 점수가 아닌 공부의 재미를 발견하는 교육은 어떤 것일까? 현재처럼 입시라는 커다란 교육의 장애물이 존재하는 한 이는 이상(理想)에 그칠지 모른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며>처럼 말이다. 배움이 있는 교육 시스템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필수 과업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는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내적 동기를 발현시켜야 한다. 즉, 교육자는 학생들이 배움의 의미를 깨닫고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도의 비노바 바브의 “교육은 학생의 머리에 정보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생의 배움은 역설적으로 교사가 많이 가르칠수록 오히려 촉발되지 않는다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는 “미래 교육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주입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배움이 일게 하려면 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학생의 포트폴리오를 지속적으로 살펴주고 피드백을 해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는 학생들이 배움의 재미와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인에블러(enabler)’이자 배움의 과정을 돕는 ‘헬퍼(helper)’, 즉 코치(coach)이자 멘토(mentor), 조력자(facilitator)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육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이제 교사는 학생들에게 있는 둥 마는 둥한 존재(exist)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상호작용을 이끌어가는 존재(present)로서 교육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학생을 추동(推動)시키는 교육의 근본적인 처방이라 믿는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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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7
  • [육우균의 周易산책] 프롤로그 2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에도 이 ‘태극’과 ‘8괘 중 4괘’가 나타나 있다. 건(☰), 곤(☷), 감(☵), 리(☲)이다. 『주역』을 모르면 태극기의 원리나 기원도 모른다. 이렇게 『주역』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나라 때 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자연법칙을 중시하는 상수 역학이 발달했고, 인간의 법칙을 중시하는 의리 역학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왕필의 “뜻을 얻었으면 이미지는 잊어 버려라”는 ‘득의망상(得意忘象)’에 힘입어 상수 역학에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의리 역학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주역』은 사주명리학과는 다르다. 『주역』에는 ‘절대’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 만물은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낸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도 평생을 기호학 연구에 바쳤으면서도 ‘죽어있는 기호보다 살아 움직이는 만물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지식과 질서는 언제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새로운 변화 앞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주역』도 초월적 시간의 세계는 배척한다. 현실 속에서 인간들의 일정한 법칙을 찾으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현세 지향적인 세계관이며, 관계 철학을 추구했다. 『주역』을 일컬어 “일음일양지도(一陰一陽之道)”라 한다. 『주역』에는 남녀평등사상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삶 속에서 주역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아볼 것이다. 다만 문학작품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갈등과 그 해결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을 추적해 봄으로써 인생에서 주역의 괘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주역』은 인생 처세술이다. 지금 당신의 ‘때’는 무엇이며, 그 ‘때’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괘와 효사 보는 법] <예시> 화천대유괘의 효사 지배 자 리 天 자리 上9 − 하늘로 도움을 얻고 신들로부터 축복을 받으리라. 길하다. 65 -- 자신을 비울 줄 알며, 아랫 사람들과 진심어린 마음의 교류를 할 줄 안다. 人 자리 94 − 성대하고 강장한 모습니다. 허물이 없다. 민중 자 리 93 − 풍요로운 산물을 천자에게 바친다. 소인들은 공적 마인드가 없다. 공적인 향연이 일어나지 않는다. 地 자리 92 − 큰 수레에 물건을 잔뜩 싣고 있다.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난다. 허물이 없다. 初9 − 고독하다. 윗사람과 교섭이 없으니 허물이 있을 수 없다. ☲(화) ☰(천) 태양이 하늘 위에서 빛나는 모습이다.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크게 풍요로운 것은 비움이고 베풂이다. 1. 민중 자리 - 아래에 있는 괘(천 : ☰) 2. 지배 자리 – 위에 있는 괘(화 : ☶) 3. 지(地)의 자리 – 힘든 민중의 자리다. 4. 인(人)의 자리 – 가장 중요한 자리다. 피지배 자리에서 지배 자리로 가야 하는 위치라서 성실, 베풂,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천지가 무대이고 그 무대 위에서 인생이 펼쳐진다면 당연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天의 자리, 地의 자리는 그저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人의 자리에서 그 인생의 무대가 좋을 지, 나쁠 지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5. 천(天)의 자리 – 왕의 자리다. 6. 한 개의 괘는 6효로 되어 있다. 맨 아래 첫 번째 효가 ‘초’다, 2, 3, 4, 5, 순서대로 올라가고, 맨 위의 마지막 6효가 ‘상’이다. 그래서 괘의 밑에서부터 ‘초→2→3→4→5→상’의 순서로 효가 자리한다. ‘1’을 ‘初’라 한 것은 효가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6’을 ‘上’이라 한 것은 효의 맨 위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각 효의 앞에 붙는 숫자는 9와 6인데, 9는 양효(−), 6은 음효(--)다. 예를 들어 ‘62’하면 두 번째 효가 음(--)이라는 것이고, ‘93’하면 세 번째 효가 양(−)이라는 것이다. 7. 「대상전」과 각 괘의 효사는 『도올 주역 강해』를 따랐다. 8. 지면에 연재할 때는 한 괘에 2회 연재를 기본(1회는 1/2, 2회는 2/2)으로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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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어떻게 살 것인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새벽 5시 전에 일어났다. 초저녁에 잠을 잔 탓이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서재로 갔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팝송 ‘마이 웨이(My way)’를 들었다.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가 생뚱맞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불쑥 올라왔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살아왔는데 그것이 내가 원하던 삶인가. 아니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명예퇴직을 신청해야 하나. 새삼스럽게 사춘기 소년처럼 혼란스러웠다. 책장에서 딸이 사놓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소제목을 ‘나답게 살기’로 해 놓고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나다운 인생이라고 썼다. 나에게 나다운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소설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몬을 등장시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사랑’이라는 대답을 보여주었다.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나다운 올바른 삶을 사는 길일까. 고등학생 때 행복론에 대한 철학책을 읽었는데 머리말에서 읽은 행복에 대한 비유 이야기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물레방아로 밀을 찧어서 대대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물레방아를 잘 관리하고 조상이 가르쳐준 경험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물레방아 원리를 잘 알기 위해 방아굴대를 넓히기도 하고 방아공이의 높이를 높였다 낮추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물레와 방아는 완전히 이상해져서 삐걱거리게 되었다. 그는 더 나아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질은 물이기에 물을 연구해야 한다고 물이 내려오는 상류로 올라갔다. 물길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물레방아는 돌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물레방아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망가졌다. 주변 사람들이 물레방아의 원래 기능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를 했다. 그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 자신은 물레방아를 돌리는 원리를 연구해서 조상보다 더 훌륭한 최고의 물레방앗간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내의 물레방아는 더이상 밀을 찧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조사하고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연구했다. 핵막에 따라 진핵세포와 원핵세포를 찾아내고 효소와 아미노산과 미토콘드리아를 연구했다. 급기야 단백질이 최초로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과연 세포의 구성 물질을 알아내서 세포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면 그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구심점이 인간을 떠나면 안 된다. 2025년부터 AI 디지털교과서를 학교에 도입해서 2028년부터 모든 교과목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한다고 한다. 학교에 전보다 많은 돈을 투입하고 있다. 급식도 교복도 수업료도 교과서 대금도 공짜다. 그래도 학교 구성원들은 행복하지 않다. 무슨 이유일까. 컴퓨터가 발전하고 기계가 발전해서 인간의 일을 대신해 주면 인간은 행복해질까. 밥솥이 밥을 하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고 청소기가 청소를 하고 쌀밥을 매일 먹는데도 행복하지 않다. 옛날에 서로 밥을 비벼 먹고 이웃들과 칼국수를 나누어 먹을 때보다 왜 웃음은 더 없어진 것일까. 행복은 편리함보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행복이라는 구심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레방앗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물레방아에 집중해야 한다. 물레방아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 물레방아를 내던지고 인간과 먼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먼저이다. 기계와 돈과 명예가 행복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과 멀어질수록 인간은 피폐해질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세 가지를 실천하려 한다. 솔직함과 단순함과 깨끗함이다. 솔직하게 살면 세상을 온전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솔직함이 최선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솔직한 것이 건강과 성장과 존중에 도움이 된다. 지도층이 솔직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사회적 비용이 더 들어가고 감시와 점검의 체계가 늘어나는데 불신도 함께 늘어난다. 마음 편히 사는 방법도 솔직함이다. 좋은 친구를 만드는 방법도 솔직함이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다. 솔직하면 너무도 부끄러울 일이 많지만 나중에는 사람이기에 이해를 한다. 솔직하면 추가 비용이 필요 없다.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상사와 아래 직원, 기업과 정치가 솔직하면 얼마나 세상이 환상적이겠는가. 단순함은 복잡하게 사는 현대인의 생존 조건이다. 카드나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공황 상태에 빠진다. 자동차를 사면 고민해야 할 일이 많다. 보험, 수리, 관리, 법규, 기름값, 비용 등 할 일들이 생겨난다. 복잡한 관계는 심신을 괴롭게 한다. 하나씩 줄여나가야 한다. 미루지 말고 정리를 해야 한다. 인간관계, 책, 모임, 생각, 소유물을 되도록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깨끗함이다. 마음의 깨끗함도 있지만 주변과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기본이다. 책상의 정돈 상태를 보면 주인의 생활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편견이겠지만 임상적으로 높은 확률을 경험했다. 깔끔한 사람 곁에는 같이 있고 싶다. 솔직함, 단순함, 깨끗함이 내가 잘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 조건을 지켜가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고민할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학생에게 더없이 좋을 듯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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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5
  • [육우균의 周易산책] 프롤로그 1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자 ‘易’은 日+月을 합친 글자이다. 일은 태양이고 월은 달이다. 태양은 양(−), 달은 음(--)을 뜻한다. 이 일과 월은 항상 바뀐다. 이 ‘역’은 ‘바뀐다’,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역』을 번역할 때 “The book of changes”이라 쓴다. 『주역』은 주나라 때의 역으로 문공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주역』은 점치는 책, 변화를 읽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4서 3경 중 가장 어려운 책이고 가장 심오한 책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수없이 읽어서 대나무로 만든 책을 엮은 끈이 세 번 끊어졌다는 데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정약용도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주역』을 읽고 『주역사전』을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춘추전국시대 나온 유가, 법가, 노장 사상의 뿌리가 『주역』이다. 주역을 연구한 성과를 보면 동양인보다 오히려 서양인들이 더욱 과학적 입장에서 그 성과를 빛냈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칼 융의 ‘동시성’이라는 개념, 라이프니츠의 ‘2진법(0과 1, 이후 컴퓨터의 언어가 됨)’의 원리를 모두 『주역』에서 얻었다. 『주역』은 자연계를 연구하는 ‘최고의 지침서’이고, ‘세상의 지혜’다. 역은 원래 점술서였으나 이후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에 관한 논문으로 해석하여 심오한 철학서가 되었다. 역이 나오자 자아 중심의 세계관에서 관계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된다. 역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이고, 만남과 교류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역은 하나라, 은나라 때에도 만들어졌으나,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역은 주나라 때 문공이 저술했다고 알려진 『주역』이다. 당시에는 농경사회라 하늘에서 비를 내려야 농사가 잘되는 천수답이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의 관계 그 사이에 있는 인간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8괘(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는 복희씨가 문자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이 8개의 원소를 ‘ㅡ’ ‘--’라는 2개의 부호를 3번 겹쳐서(3선) 각 상징물마다 다르게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8개의 상징물은 자연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계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상화되고 나아가 형이상학적 사유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우주의 변화와 자연의 변화 이치를 담고 있다. 사물을 기호로 표시하면 그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주역』은 ㅡ, --으로(3선) 또는 그것의 중첩(6선)으로 된 기호로 표시한다. 세상의 근원을 보다 정확히 알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수학, 물리, 화학 등의 과학적인 학문엔 기호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과학이다. 복희씨 이후 약 3,800년이 지날 무렵에 은・주의 교체기에 문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므로 64괘에 괘를 설명하는 ‘괘사’도 붙이고, 나아가 괘를 이루는 6개의 효 하나 하나를 설명하는 ‘효사’도 붙였다. 8괘를 중첩하면 8괘 × 8괘 = 64괘다. 이 64괘(대성괘)를 중국 위나라 때 천재였던 왕필(226~249, 23세에 요절)이 편집하고 주를 단 것이 일반적인 『주역』이다. 그런데 64괘는 절반인 32괘만 알면 된다. 왜냐하면 반대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그 반대인 것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음-양, 만유인력-만유척력, 당기는 힘-끄는 힘, 천사-악마 등. 따라서 『주역』도 하늘-땅, 연못-산, 물-불, 우레-바람 등이 반대의 괘인 것이다. 천지비의 반대괘는 지천태이고, 천수송의 반대괘는 지화명이괘인 것이다. 물론 그 의미도 당연히 반대가 된다. 천수송(날이 개인다) ↔ 지화명이(날이 흐리다)처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음양의 규칙적인 변화가 64괘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주역』은 64괘 384효로 되어 있다. 그런데 건괘와 곤괘는 효가 하나씩 더 있는데, 건괘는 용구(用九), 곤괘는 용육(用六)이다. 용구와 용육은 건괘와 곤괘의 특수한 경우라서 전체 효(384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건곤일희장(乾坤一戱場), 인생일비극(人生一悲劇)”. 건괘와 곤괘는 모든 연극을 위해 펼쳐진 무대일 뿐이고, 우리 인생은 그 무대 위에서 연출된 하나의 비극이다. 64괘 중 건괘와 곤괘에 용구(用九)와 용육(用六)의 효사가 더 있는 이유다. 그리고 나머지 62괘의 각 효사가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고조선의 생활사라 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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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3
  • [전재학의 교육칼럼] ‘액체 현대’와 미래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현대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기술(記述)하기는 무모한 시도일 것이다. 왜냐면 현대사는 흥망성쇠로 얼룩진 질곡의 역사이고,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다양한 사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현대사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매 순간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은 빛의 속도와 같이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 한 시기에만 집중하면 이는 곧 편협한 해석으로 이내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특성을 ‘고체 현대’와 ‘액체 현대’로 구분하여 사상적 접근을 시도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큰 사상가이자 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다. 그는 21세기를 한마디로 ‘불안의 시대’라 지칭하고 이를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탐구 정신이 뛰어난 그는 70세가 넘어 ‘액체 현대’ 이론을 발표했다. 그래서 ‘액체 현대’는 바우만의 사상을 대표하는 사회이론으로 고착됐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지난 20세기 후반에 ‘고체 현대’에서 ‘액체 현대’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양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체 현대란 계획적이고 합리적이고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사회를 일컫는다. 반면에 액체 현대란 우연적이고 불확실하고 끝없이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그럼 이러한 액체 현대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세 가지 측면을 주목했다. 첫째, 세계화의 진행이다. 세계화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범지구적인 현상이 됐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등장이다. 이는 복지국가가 후퇴하고 일자리 등 우리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소비의 영향력이다. 우리 생활 전반에서 소비가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우리는 변덕스러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우연성, 불확실성, 이동성, 예측 불가능성이 부각되었고 탐색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현시대에의 함의(含意)는 무엇인가? 그는 우리 시대가 각자도생,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불안 사회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액체 현대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 둘째, 권력에 대한 정치의 통제력 회복. 셋째,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회의주의적 태도, 이렇게 세 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연대와 경쟁, 자유와 불안이 공존하는 21세기에, 우리 인류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자유와 연대를 회생(回生)시키는 것이다. 이는 비관적 현실에 회의적(懷疑的)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마치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언뜻 듣기에는 역설적인 것 같지만 결국 의미 있는 삶과 사회의 방향을 모색하는 석학의 제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가 2020년대에 바우만을 계속 만나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로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지향하며 국가백년대계(百年大計)로서의 교육만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희망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여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5천 년 역사 이래 가난을 극복하고 비로소 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가 그동안 살아 온 삶을 성찰하고 진정한 한국인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가치와 삶의 자세를 다시금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액체 현대의 지속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새로운 표준인 ‘뉴노멀(New Normal)’이라 생각한다. 비 온 뒤에는 땅이 더욱 굳어질 것이다. 이제 역사학자이지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주장처럼 ‘변화만이 상수(常數)’인 미래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미래에 적합한 교육만이 확실한 변화의 힘이자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해줄 수단이라 믿는다. 교육은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 삶의 좌표이며 생존의 전략이어야 한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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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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