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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기고] 늦게 배운다는 것의 의미
    [교육연합신문=황영식 기고] 사람은 언제까지 배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부산 남구 기러기문화원 해람학교에는 조금 특별한 학생들이 있다. 대부분 노년의 학습자들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 가난과 전쟁,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시대 속에서 배움은 늘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이 다시 교실에 앉는다. 오상호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박춘화 할머니는 만주에서의 유년 시절을 지나 평생을 생계에 묶여 살아왔다. 두 사람에게 학교는 언제나 ‘다음에’로 미뤄진 삶의 영역이었다. 처음은 쉽지 않다. 글자는 낯설고, 손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한 글자를 쓰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교실에서는 그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이 말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배움의 속도가 아니라, 배움의 지속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선언이다. 해람학교의 교실에서 배움은 경쟁이 아니라 과정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다. 입학식에서 교장은 말한다.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졸업식에서는 다시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왔느냐가 아니라, 끝까지 걸어왔느냐입니다.” ‘시와 음악의 밤’과 같은 자리에서는 배움이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것을 넘어, 삶을 노래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배움은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이어주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배움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삶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못 배운 사람’이라는 낙인처럼 따라다녔던 자기 인식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새롭게 이해하는 시간이다. 그 변화는 일상의 작은 장면에서 드러난다. 버스 정류장에서 목적지를 읽고, 거리의 간판을 소리 내어 읽고, 키오스크 앞에서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들에게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경험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이제 와서 배우느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편지를 쓰고 싶어서입니다.” 자식들에게,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는 글로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그 편지는 과거의 자신에게 닿는다. 힘겨운 시간을 견뎌낸 어린 날의 자신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 주는 방식으로. 해람학교의 교실은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시 읽는 장소이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다림이 있다.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 비교가 아닌 존중, 경쟁이 아닌 동행. 이러한 교육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된다. 성인 문해교육은 단순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사회 참여를 회복하는 공공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기러기문화원 해람학교는 오랜 시간 한글교육을 이어오며, 늦게 시작한 배움이 결코 늦지 않았음을 증명해 왔다. 이곳에서 졸업장은 학력의 증명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시 선택했다는 기록이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다. 다만 시작이 있을 뿐이다. 오늘도 이 교실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첫 문장을 써 내려간다. 서툴지만 분명하게, 그 문장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 황영식 ◇ 기러기문화원 해람학교 교장 ◇ (재)하정육영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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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기고] 아이마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다
    [교육연합신문=고선화 기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하루하루 기적이 쌓이는 과정이다. 아이마다 성장의 속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발달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시간은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배우게 한다. 작은 변화 하나에 담긴 기쁨,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결코 한 가정만의 몫이 아니다. 아이 한 명이 성장하기까지는 학교와 지역사회, 그리고 제도의 뒷받침이 함께해야 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어려움을 안고 있다.누군가는 말이 느리고, 누군가는 움직임이 불편하다. 또 어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렵고, 교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의 마음은 모두 같다는 것이다. 함께 웃고 싶고, 함께 배우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마음. 그 단순하고도 당연한 바람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쉽지 않은 현실이라는 점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나누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그 안과 밖을 구분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할 때다. 아이를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이들을 품어야 한다. 학교는 더 따뜻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이 한 명 한 명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돌봄과 교육 역시 더 이상 가족에게만 맡겨질 문제가 아니다. 그 책임은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다행히 지역사회 곳곳에서는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함께하는 프로그램, 주민과 봉사자들이 참여하는 돌봄 활동,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작은 손을 잡아주고, 한 걸음을 함께 내딛어 주는 일.그 사소한 실천이 아이들에게는 세상과 연결되는 큰 힘이 된다. 아이들이 차별 없이 웃을 수 있는 사회, 부모가 조금 덜 불안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그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곁에 있는 아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부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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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2
  • [기고] 만우절에 남기는 작은 연극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나는 매년 4월 1일이면 200만 원짜리 거짓말을 한다. 영화의전당에서 근무한 지도 어느덧 16년. 직장 옆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라 불리는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다. 그 규모만큼이나 사람도 넘쳐난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 낮에도 도로가 주차장처럼 막히기 일쑤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5시 야외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나는 오후 2시에 출근한다. 연주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리허설을 지켜본 뒤 관객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차를 가지고 가려면 정오 무렵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두 시간쯤 지나면 백화점 인파로 도로가 꽉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불편한 교통 체증 속에서도 한 가지 위안이 있다. 점심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백화점 식당가에는 언제나 다양한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다. 1년 전 오늘, 2025년 4월 1일 화요일.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됐다. 오전 10시, 부산의료원장이 영화의전당을 찾았다. 새로 취임한 배우 출신 대표에게 병원 홍보영상 제작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환자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료원의 회생을 위해 대대적인 홍보를 준비 중이라는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11시에는 서울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생중계 회의가 진행됐다. 예상보다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관객들에게 따뜻한 복장을 안내하는 문자 발송과 현장 안내판 설치까지 세세한 논의가 이어졌다. 회의를 마친 뒤 공연팀 동료들과 백화점 식당가로 향했다. 그날의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라면과 우동사리를 추가해 배가 터질 듯 먹고 나왔다. 그러나 배부름도 잠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신호가 찾아왔다. 급히 1층 스타벅스 뒤편 화장실로 향했다. 두 번째 칸에 들어가 앉는 순간, 시야에 낯선 물체 하나가 들어왔다. 왼쪽 휴지걸이 위에 놓인 큼지막한 손지갑. 순간 손이 멈췄다. 조심스럽게 지갑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대략 100장, 500만 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걸 그냥 들고 나가면…?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여긴 CCTV 천국이다.’ 짧은 갈등 끝에 나는 안내센터로 향했다. 분실물 습득 신고를 하고 명함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 괜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후 3시, 부산시의회 정책지원담당관 미팅이 있어 자리를 옮겼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해운대경찰서 우동지구대였다. 조금 전 습득한 지갑과 관련해 확인할 사항이 있으니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보상금. 법적으로 습득자는 일정 비율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만약 20%라면 100만 원. ‘100만 원….’ 그 숫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구대에 도착하자 경찰관은 신분 확인을 마친 뒤 봉투 하나를 건넸다. 지갑 주인께서 감사 인사와 함께 전해달라고 하셨다. 봉투를 여는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오만원권 40장. 200만 원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잠시 망설이자 경찰관이 덧붙였다. “보상금은 100만 원이고, 나머지는 법적 기준에 맞게 전달된 금액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갑 주인은 어떤 분입니까?” 경찰관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해운대역 인근 사찰의 스님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스님은 신분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봉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때 경찰관이 작은 종이 하나를 건넸다. 사찰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펼쳤다.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한 줄을 바라보았다. 만우절. 이 이야기를 나는 매년 4월 1일이면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사람들은 처음엔 진지하게 듣는다. 이야기가 중반을 지나 ‘200만 원 봉투’ 대목에 이르면 분위기는 금세 달아오른다. “대박이다!”, “오늘 저녁은 네가 쏴라!”, “회에 소주 가자!” 그들의 기대가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나는 마지막 한 줄을 꺼낸다. "그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었냐면, 만우절.”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내 한숨과 야유가 터져 나오고, 곧 웃음이 번진다. 나는 그 순간이 좋다. 짧은 이야기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결국 웃음으로 끝나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연극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또 하나의 거짓말을 준비한다.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웃음을 남기기 위해... ▣ 서승우 ◇ (재)영화의전당 공연본부장 ◇ 동천고등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 부산시 영화영상정책위원회 위원 ◇ 부산 남구립예술단 운영위원 ◇ 부산연극연극상 선정위원 ◇ 부산창작오페라단 이사 ◇ 前부산문화재단 이사 ◇ 前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운영위원 ◇ 前부산국제연극제조직위원회 부집행위원장 ◇ 前부산연극협회 부회장 ◇ 2025년 국무총리표창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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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 [기고] 다시 일상을 이어가게 하는 시간, 보호관찰
    [교육연합신문=김미정 기고] 뒷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한 드라마에 빠져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다양한 이유로 정신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병동에서 벌이는 해프닝을 주제로 다룬 드라마다. 정신병동 간호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드라마는 정신질환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이해와 회복의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우울한 주제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들의 회복은 극적인 완치가 아니라 조금 덜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보호관찰 현장에서 마주하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최근 보호관찰 대상자 가운데 정신건강 문제를 동반한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개인과 가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문제가 이제야 사회 밖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우울증, 양극성장애, 조현병과 같은 질환을 숨기거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치료를 통해 증상이 조절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이해가 확산되고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개선되고 있어 사회가 한 걸음 더 책임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그러나 정신질환과 관련된 강력범죄가 보도될 때마다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불안은 결국 ‘누가, 어떻게, 계속 이런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살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보호관찰은 바로 그 지점을 담당하며 치료와 사회내 관리를 이어주는 안전장치의 기능을 한다. 정신질환을 가진 대상자에 대한 보호관찰은 판결문을 검토하는 단계부터 시작된다. 범죄의 내용, 양형의 이유를 꼼꼼히 살피고, 보호관찰 기간 중 지도·감독의 방향과 지원 방안을 모색한다. 정신질환 대상자는 진단서를 제출하고, 정신질환이 의심되는 대상자는 정신건강 선별검사를 실시하여 판단한다. 정신질환 대상자로 판명되면 보호관찰 기간 중 치료를 임의로 중단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기적인 진료 및 복약 사실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보호관찰관이 병원에 동행하기도 한다. 2023년부터는 보호관찰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정신질환자의 보호관찰 종료사실을 경찰과 지자체에 통보하여, 종료 후에도 치료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는 최근 강조되고 있는 기소유예 마약사범의 회복과 사회복귀를 위한 ‘사법-치료-재활 연계모델’의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보호관찰은 결국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재범이나 보호관찰관의 정당한 지시를 위반할 경우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보호관찰 대상자를 지역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복귀시키는 데 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보호관찰관은 생계지원이 필요하면 행정복지센터와 협력하고, 치료 지속여부를 더 면밀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역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계한다. 취업과 자립을 돕기 위해 법무보호복지공단 등 다양한 지역자원과 협력하는 일도 보호관찰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다. 드라마 속 의료진이 환자의 작은 변화에도 의미를 두듯, 보호관찰관의 현장도 그렇게 흘러간다. 보호관찰 대상자의 극적인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 없이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일,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된 일상을 이어가게 하는 일이다. 그들이 다시 일상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책임지는 일, 그것이 지금 보호관찰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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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 [기고] 자아 완성! 시대의 거친 바람을 이기는 나만의 고결한 향기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알고리즘의 시대, ‘나’에 대한 본질을 묻습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AI가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초연결 시대’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타인이 정해 놓은 유망 직종이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길에서 ‘천직(天職)’을 찾으려 방황합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참된 천직은 단 하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직업’이 아니라, 내면의 씨앗이 꽃을 피우는 ‘과정’,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天職은 배움과 실천으로 빚어내는 자신만의 길이고 모습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말합니다. ‘태생적 천재’는 없다, 오직 ‘구하는 자’만 있을 뿐이라고! 우리는 흔히 천직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특별한 재능’이라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인(聖人) 공자조차 『논어』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그것을 구하는 자(好古敏以求之者)일 뿐이다.” 공자가 강조한 천직의 핵심은 ‘역동적인 배움’입니다. 배움은 지식을 채우는 행위를 넘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고 끊임없이 가능성을 확장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즉, 천직은 완성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공자가 ‘배움의 태도’를 말했다면,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 배움을 삶에서 어떻게 ‘실천’으로 구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밤새 읽은 문장을 다시 써보는 ‘재구성 훈련’을 통해 지식을 손끝의 감각으로 익혔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인격을 닦기 위해 ‘3가지 덕목’을 세우고, 매일 밤 검은 점을 찍으며 자신을 점검했습니다. 절제: 배부르도록 먹지 말 것, 결단: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할 것, 겸손: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절제, 결단, 겸손, 이 세 가지 덕목이 자신의 몸에 흐르도록 하고, 그것를 점검하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자기 수련(Self-Discipline)을 통해 그는 인쇄공에서 과학자로, 다시 외교관으로 자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에게 직업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수련의 장’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천직이란 특정 직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자아 완성의 과정입니다. 우세남의 시 <선(蟬)>에 등장하는 매미가 생각납니다. “居高聲自遠(거고성자원), 높은 곳에 머무니 소리 절로 멀리 퍼지는 것이지, 非是藉秋風(비시자추풍), 가을바람을 빌린 것이 아니라네. 매미의 울음소리가 멀리 퍼지는 것은 가을바람, 외부의 환경이나 타인의 도움 덕분이 아니라, 높은 곳, 고결한 인격과 수련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남의 힘을 빌려 돋보이려 하기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닦아 빛을 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읽은 한 줄의 문장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이 자신을 지키고 키워주는 내면의 힘이 되어 비로소 하늘이 내린 단 하나의 진짜 직업, ‘자아 완성’의 천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완성을 넘어 ‘공동체의 완성’으로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경계를 허무는 공감, 초연결 시대의 기술은 우리를 잇지만, 마음은 단절시키기 쉽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나’라는 개인은 비로소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프랭클린이 자신의 덕목을 사회적 헌신(외교, 과학적 발견)으로 연결했듯, 지속 가능한 배움과 나눔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쓰여져야 합니다. 외부의 평가나 알고리즘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인격을 닦는 사람들의 ‘고결한 향기’가 모일 때, 인류는 비로소 기술에 매몰되지 않는 존엄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가을바람을 빌리지 않아도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처럼, 당신의 진심 어린 실천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세계인을 향한 공동체 의식과 ‘더 나은 나’를 위한 묵묵한 발걸음만이 ‘나’를 ‘나’이게 하고 ‘세계’를 ‘세계’이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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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9
  • [기고] 君子固窮! 역경이라는 폭풍 속에서 더 단단한 나를 빚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겨울’을 견디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불청객이 삶의 문턱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건강의 악화,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경제적 위기, 혹은 끝을 알 수 없는 정신적 우울감이 그것입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말하듯, 모든 인류는 역경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성장하며 빛나는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나 존재가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황제가 뮬란에게 한 명대사, “The flower that blooms in adversity is the most rare and beautiful of all”가 대표적 예로, 힘든 상황을 극복한 사람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중국 로맨스 고장극《석화지》(2024, 40부작, YOUKU 방영)에서는 이 표현이 주인공 화지의 성장 서사와 연결됩니다.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여성의 성장과 자립, 역경 극복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시청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달합니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은 문학, 영화, 드라마 등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뮬란》에서는 개인의 용기와 희생을, 《석화지》에서는 여성 주인공의 지혜와 강인함을 통해 이 메시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려움을 견디고 성장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혹은 홀로 남은 거실에서, 혼자만의 생각과 세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갈등, 입장 다름에서, 각자의 역경과 마주하며 고뇌하며 삶에 지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화를 내고, 누군가는 환경에 끌려다니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환경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당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논어』는 우리에게 놀라운 답을 제시합니다. 5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검찰총장직(대사구)을 내려놓고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 그 여정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14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을 했고, 끝내 진나라에서는 양식이 완전히 바닥나는 ‘재진절량(在陳絶糧)’의 위기를 맞습니다. 제자들은 굶주려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고, 다혈질이었던 자로는 화를 내며 묻습니다. “군자도 이렇게 궁할 때가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하늘을 향해 던지는 “성실하게 산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는 원망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합니다. 공자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군자고궁(君子固窮)’, 군자는 역경이 닥쳤을 때 오히려 그 상황을 견뎌내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지는 사람이다. ‘소인궁사람(小人窮斯濫)’, 소인은 역경이 오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넘쳐흐르며(濫), 자신을 잃고 주변에 화를 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곧 군자라고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건 분명 슬프고 괴롭다. 그렇다고 남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공자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해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는 공자의 충고는 자기의 길을 가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비난이나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지우지하려는가? 내 참모습은 내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데’ 달려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준엄한 말씀이겠지요. 말을 들을 때는 ‘그래야지’ 하지면 조금 지나면 ‘나도 모르는 일이 되어버린다?’ 공자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높이 평가한 건 ‘그들이 과거의 원수를 기억하지 않았고, 따라서 원한도 적었다(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포숙(鮑叔)을 기억하는 건 물론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판단이 냉철했던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관중(管仲)에 대한 끝없는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관중이 “자신을 낳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고백한 것만 봐도 그의 그릇을 알 수 있다. 관중을 천거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리까지 관중에게 내주고도 그가 자신을 챙겨주지 않았을 때조차 전혀 불평하지 않은 포숙이 없었다면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조차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만나서 시시덕거려도 뒤끝이 허전하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주머니의 송곳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본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지만 그걸 꼭 재주에만 국한할 까닭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 특히 나는 그렇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유형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자신보다 아래 직급의 직원에게 그 화를 푸는 경우가 흔하다. 국장이 과장을 깨면 과장은 사무관이나 주무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학교에서도 그렇다. 담임선생이 아침부터 교장에게 한 소리를 들으면 그 학급의 기상도는 하루 종일 흐려진다. 밖에서 일어난 일로 가족들에게 원망을 하는 내가 부끄럽다. 그런데 顏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다. 간단한 것 같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화를 옮기지 말아야 할 때 화를 옮김으로써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조직의 인화 단결이 깨지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봐왔다. 안연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에서 초범과 재범의 양형을 달리 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야구에서 내야수를 보는 선수들이 한 번 실수한다고 교체를 하는 감독은 드물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교체를 한다. 심리적 부담감으로 똑같은 실수가 또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한 교체여야 한다. 그것이 결단이다. 공자는 실천윤리로서의 인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도 안연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공자는 인의 기준을 거창한 것에서 찾지 않는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인의 기준이다.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貳過)! 하루에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다. 오늘부터라도 외쳐보련다. ‘不遷怒 不貳過’ 우리가 겪는 직장 내 갈등, 사업의 실패, 인간관계의 균열은 공자가 겪은 ‘굶주림’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역경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나다움’을 유지하는 정신력이야말로 군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 ‘호학(好學)’과 ‘중용(中庸)’입니다. 자기 초월의 힘은 ‘호학(好學)’입니다. 공자는 스스로를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열 가구 정도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만큼 충성되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역경을 이기는 힘은 ‘배움’에서 나옵니다. 배움은 고정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여 ‘건너가는’ 행위입니다. 내 무지를 자각하고 남의 말을 듣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역경이라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습니다. 균형의 감각은 중용(中庸)에서 시작합니다. 최근 우리 시민들이 보여준 상식적인 행동들은 유교의 ‘중용’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용은 멈춰있는 고정된 값이 아닙니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으려는 ‘동적인 균형’이자 ‘노력’입니다.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삶의 균형감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우리를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지식은 머리에 이고 다니는 과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깨뜨려 먹고 내 몸의 양분으로 삼는 ‘실천의 철학’이 필요합니다. 막스 베버가 강조한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듯, 유학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라는 황금률은 이제 세계인의 공동체 윤리가 되어야 합니다. 1988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제18차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인류의 golden rule로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己所不慾 勿施於人’이 최고 투표율을 2번이나 기록했다고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나다움’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묵묵히 자아를 닦아나간다면, 당신의 삶 또한 외부의 도움 없이도 고결한 향기를 내뿜으며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겪는 그 역경은, 당신을 파괴하러 온 재앙이 아니라 더 단단한 존재로 빚어내기 위한 ‘축복의 신호’입니다. 더 단단한 나를 빚는 하루하루를 생각합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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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7
  • [기고] 태권도 남북 공동 유네스코 등재를 기대한다
    [교육연합신문=최재춘 기고] 태권도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는 정신문화다. 오늘날 태권도는 200여 개국, 수천만 명이 수련하는 세계적 무도이자 교육문화로 자리 잡았다. 기술과 경기의 영역을 넘어 예절과 인내, 존중과 평화를 강조하는 태권도 정신은 한국이 세계에 전해온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이제 그 가치를 남북이 함께 세계에 알릴 중요한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필자는 태권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남북 공동 등재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이어왔다. 태권도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남북이 공유하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태권도계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필요했고, 남북 공동 등재라는 정치적 현실 또한 넘어야 할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 태권도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측을 대표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소속 태권도인들까지 응원 메시지와 챌린지로 힘을 보태며 태권도가 민족 공동의 문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태권도는 이미 국경을 넘어 세계인이 함께하는 문화이지만, 동시에 남과 북이 함께 발전시켜 온 민족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초기 등재 추진 과정에서는 곳곳에서 어려움과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태권도인들의 열망과 국내 태권도 가족들의 전폭적인 응원, 그리고 관련 기관과 단체의 협력 속에 최근 유네스코 본부에 등재안이 신청되는 성과를 이뤘다. 이제 남은 과제는 국제사회의 공감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우리는 이미 중요한 선례를 가지고 있다. 2018년 남북의 전통 스포츠인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사례다. 당시 유네스코는 분단국가인 남북이 공동 문화를 통해 화합과 평화를 모색하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고,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과 국제사회의 협력 속에서 공동 등재라는 역사적 결과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남북 관계는 과거보다 더 경색된 상황이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며 남북 관계가 긴장 국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문화는 갈등을 넘어서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정치와 외교가 막힌 상황에서도 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7월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적 문화유산 회의인 만큼, 정부와 관련 기관이 문화 외교 차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면 태권도의 남북 공동 등재는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태권도는 1960년대 이후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며 한국의 예절과 정신을 알리는 문화 외교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단순한 스포츠 기술을 넘어 예의와 배려,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태권도 교육은 세계 곳곳에서 한국 문화의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지난 70여 년 동안 축적된 태권도의 저력은 이제 스포츠를 넘어 평화와 화합의 문화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권도가 남북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이는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남북이 공유하는 민족 문화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태권도가 남북을 잇는 문화의 다리가 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길이 세계 속에서 한국 문화의 품격과 정신을 더욱 빛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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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6
  • [기고] “지역일꾼의 첫 번째 책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
    [교육연합신문=이현우 기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일상 속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그중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실천이 바로 헌혈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나는 대한적십자사 서구지회 회원들과 함께 동아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헌혈캠페인에 참여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마음들이 모인 자리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기꺼이 팔을 걷어 올리고 헌혈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 있는 따뜻한 공동체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날 49번째 헌혈에 참여했다. 헌혈을 할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헌혈은 특별한 누군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봉사라는 사실이다. 위급한 환자에게 한 봉지의 혈액은 단순한 의료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이어주는 희망이며, 한 가족에게는 다시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귀중한 기회다. 그래서 헌혈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면 봉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지역일꾼의 역할은 정책을 말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주민과 함께 호흡하며 삶의 어려움을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먼저 손을 내미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부산서구의회 의원으로서 구민들의 삶과 직결된 다양한 구정 현안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을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골목과 시장, 주민들의 생활 현장을 찾아 목소리를 듣고, 지역의 작은 불편과 어려움이 행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지역일꾼의 역할은 책상 위 정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주민과 함께 답을 찾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 서구지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우리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생명 나눔을 위해 시간을 내어 헌혈캠페인을 펼치고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모습은 공동체 정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한다. 특히, 이번 동아대학교 캠퍼스 헌혈캠페인에서는 젊은 학생들의 참여가 더욱 의미 있었다. 미래세대가 나눔과 봉사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49번째 헌혈을 마치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말보다 행동으로, 약속보다 실천으로 봉사하는 지역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앞으로도 구민의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의정활동과 함께 생명 나눔과 봉사의 가치를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힘을 보태겠다." 헌혈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봉사다. 우리가 팔을 걷는 작은 용기가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이어주는 기적이 된다.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 그것이 지역일꾼의 첫 번째 책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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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3
  • [교육단상] 고병구 '어쩌다 의사가 되어'를 읽고
    [교육연합신문=송근식 기고] 한 해의 작은 달 2월, 설 명절과 입춘이 들어 있는 달, 봄이 다가오는 기다림과 설렘이 있는 달도 벌써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되었다. 옛말에 복(福)은 받는 것이고, 덕(德)은 쌓는 것인데, 손(手)으로는 나누고 발(足)로 걸어서 건강을 지키고, 얼굴(容)은 항상 미소를 짓고, 마음(心)으로는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책(冊)을 골라 독서 하면서 자아(自我)의 성숙과 마음을 키우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번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으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읽을거리를 찾다가 몇 권의 책 중에서 우연히 “어쩌다 의사가 되어”라는 에세이집을 발견하고 단숨에 반쯤 읽었는데 바로 이 병원의 대표원장이자 저자인 고병구 원장이 의사로서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보면서 환한 얼굴로 설명하는 열정이 존경스럽고 위의 말에 부합된 분이라 이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둘째는 우리 교육연합신문 전국 애독자와 네트워크를 통해 이 귀한 자료를 알리고, 국내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향후 진로와 직업선택에 도움이 되고 또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이 저자의 경험을 공유해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권장하고 싶다,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없는 이익에 대한 탐닉에 빠진 부류들이 많다. 노동을 조롱하고 성실함을 비웃으며 요행을 미덕처럼 기대하고 비트코인, 주식, 불법도박, 마약, 스포츠베팅 같은 투기에 쉽게 빠져드는 현실의 일탈에 젖어 드는 청소년들에게는 시금석이 되고 나침판이 될 것을 확신한다. 노력으로 쌓은 인생만이 결국 흔들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필요한 것은 쉽게 버는 돈이 아니라 땀과 기다림, 인내, 그리고 정당한 성공, 공정함과 책임감, 사회적 신뢰감을 갖추는 것이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돼 있고 ▲어쩌다 의사가 되어 ▲추억 속의 나날들 ▲내가 잘 할수 있는 것 ▲나를 위한 시간 ▲흔들리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시에 담다.로 나누어 구성됐다. ■ 보이지 않는 얼굴들 "의사로서 나 자신을 평가한다면 나는 그저 평범한 의사에 불가하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의사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보통의 의사다. 대부분 의사들처럼 내가 배운 지식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직업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환자들과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저자 고병구 원장은 겸손(謙遜)이 넘친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 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슈바이쳐 박사는 “겸손은 크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숙이는 것”이며, 상대를 존중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진솔하게 이해하면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가 의사인데도, 40년 전에는 부산 1급지(광복동, 서면 등)에 개업해서 부를 창조했을 수 있는 충분조건에도 중심지를 벗어나 어렵고 불우한 환경의 당감동을 선택해, 지금의 준종합병원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고, 외아들 고지환 원장도 부산의대를 졸업, 동 대학에서 소화기내과 진료 교수를 역임했고, 지난해에는 소화기 종양학 분야의 세계적인 SCI급 국제학술지 저널 표지모델로 선정돼 장식한 능력가인데도 대학병원, 대형병원에 보내지 않고, 가족 3명의 의사와 외부 원장 3명과 함께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전혀 과시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다. 또, 책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도 좀 멋지게 지을 수 있는데도, 의사 가운을 입고 근엄한 모습을 취한다거나 진찰하는 모습을 택할 법한데, 순하고 연한 녹색 바탕에 별이 새겨진 나무(Tree) 한 그루가 전부일 만큼 겸손하다. 물론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책의 머리말에서 나오긴 한다. ■ 머리말 '무슨 말을 해야 할까?'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의 답으로 주말이면 가끔 아내와 함께 운전대를 잡고 시골길을 달릴 때 고향처럼 느끼는 마을 어귀마다 서 있는 고목의 모습을 본다. 그래, 저 나무처럼 살자. 저 나무처럼 늙어 가자. 나무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마지막 날에 나는 웃으면서 떠나리라”는 문장을 대하면서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무는 우리에게 열매를 제공하고, 잎은 그늘을, 봄에는 새싹으로 희망을, 여름에는 잎의 그늘로 쉬는 휴식처로,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겨울에는 나목으로 우리에게 인내심과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워 준다.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겠다는 고병구 원장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90년대 중반 한 직장 동료가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의 수좌스님을 뵈러 간다기에 금일봉을 보시했더니 법명을 하나 받아 왔는데 '하목(夏木)'이었다. 나의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상태인데 나는 깜작 놀랐다. 우연히도 내 한자 이름에는 나무목(木)이 3개 들어 있어, 나는 내 아이디도 hamoksong으로 쓰고, 호(號)도 하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 잊을 수 없는 한마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생을 본적이 없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많이 배운 사람으로 여기던 한적한 시골, 산간벽지의 오지 경북 문경의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오직 농사일만 선택할 수 있었던 운명에서, 그래도 꿈이 있어 전액 국비 지원인 철도고등학교를 가려고 했을 때, 김천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재종형(고무림 선생)이 찾아와 아버지와 나의 진로를 의논하던 중 ”애를 왜 바보로 만들려고 하세요?“하던 그 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고무림 선생의 안내로 오늘날 고병구 저자가 된 것은, 마치 존 레논이 아들을 위해 작사한 Beautiful Boy의 가사 일부를 연상케 한다. ”너의 마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 날지 못한다고 미리 겁먹지 마라. 세상에는 너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있단다.“ 그 울타리는 가정, 부모, 형제, 학교, 선한 이웃 등이 있다. 문경에서 못살던, 오직 철도고를 꿈꾸던 소년에게 김천고와 경북의대를 안내한 울타리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사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고 인생길이 바뀌게 되는 숙명적인 계기가 되는 일이 간혹 있다. 바로 이 저자도 그 은혜를 입었지만,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과 행복은 유지할 수 없었다. 요즘도 의과대학에 진학 하려면 초등학교부터 과외를 받고, 고교 성적이 상위 1~5%에 들어야 하며, 경제적 능력과 부모의 관심과 본인의 숱한 어려움과 특출한 성적을 유지하지 못하면 힘드는데, 하물며 50년 전 국립의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재종형님의 선견지명과 본인의 얼마나 혹독(酷毒)한 노력을 했을지 예견할 수 있다. ■ 나의 모교 송설학원 김천고등학교 김천고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마지막 궁녀이자 육영사업가였던 최송설당 여사가 설립, 영친왕 보모상궁으로 책봉, 고종황제로부터 송설당 칭호 하사. 재산 전부를 해인사에 희사 예정이었는데, 만해 한용운 스님의 권유로 조국의 암울한 미래를 위해 인재 양성을 결심, 1931년 김천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평북 전주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더불어 민족사학 칭호. 개교 당시 영남의 오아시스로 통함. 지금도 3.1절에 입학하는 전통. 1907년 을사늑약 앞두고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 잡혀간 후 귀국 때는 부산에 상륙해 김천에서 내려 김천고 '정걸재'에 들려 송설당을 친견하였다고 함. 지금은 자립형 사립고(자사고)로 전국적으로 240명 선발. 교훈은 ”깨끗하게, 부지런하게“(남자고 아닌 여자고 교훈처럼). 풀어 쓰면 마음(心)은 깨끗하게(眞實), 몸(身)은 부지런하게(誠實)라는 뜻이다. 저자는 김천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이 일생일대의 자부심이자 자신의 은혜로 여기고 있다. 이 책이 인연이 되어 올해(2026년) 3월 1일 모교 입학식에서 동문 대표 격려사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도산 안창호(1878 ~1938)선생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했다.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행할 것을 강조. 實은 힘쓰자는 것으로 진실, 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하며 역행은 반드시 이루자는 뜻. ■ 연좌제의 희생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무관 후보생으로 중위, 대위 계급을 받고 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6.25때 당숙의 월북으로 연좌제에 걸려 무관 후보자격을 박탈당하고 이등병 의사가 되어 위생병으로 3년을 보낸 원통함이 있었다. 전역을 석 달 남긴 1980년 10월 어느 날 영내 보초를 서고 있는데 국보위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기로 했다는 방송을 듣고 할 수만 있다면 남은 3개월이라도 군위관으로 보내고 싶었다는 말이 나온다. 얼마나 원통하고 가슴 아파 제대 후 한동안 동기들 모임에서 군대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뒷자리로 물러났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0년 후 대전 군의학교에서 열리는 아들 지환 군(부산의대 졸)의 임관식에서 대위 계급장을 다는 아들의 모습에서 ”비로소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구나“하는 위로와 묘한 감회를 느꼈다고 했다. *연좌제(緣坐制) : 범죄자의 친족 또는 기까운 사이, 범죄자의 주변인이란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제도. 해방 후 납북, 월북자 가족은 공무원은 물론 사회 생활에 불이익을 당함. 1980년 헌법 금지됨. ■ 잊을 수 없는 추억 추억에는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 그리고 부끄러운 추억과 가슴 아픈 추억이 있다. 좋은 추억은 잔잔하게 스쳐 지나가는 산들 바람같은 어릴적 동심의 추억부터 기억하기 좋은 것. 나쁜 추억은 죄를 지었거나 상처를 입힌 잔인한 추억이고 그리고 부끄러운 추억은 미숙함으로 수치(羞恥)가 담겨있는 추억으로 자신이 좀 더 자랄 수 있었던 것이고, 가슴 아픈 추억은 칼날 같이 날카롭게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보석 같은 추억이고 나를 자라게 하는 추억이다. 저자는 시간은 과거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요술 지팡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세월은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추억을 심어 주는 일에 내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 꽃과 바람과 물 사방이 병품처럼 산으로 둘러쌓인 문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보이는 것이 산과 꽃과 바람과 물이었는데, 이젠 도시의 빌딩숲 속에서 매일 병원 건물 사무실 속에서 환자만 대하는 숨막히는 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산뜻한 들국화가 되고, 시원한 솔바람이 되고, 맑은 물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두고두고 이 자리를 지키다가 고향 언덕에 재로 뿌려지는 게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한 부분에서는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감을 느끼며, 70대 중반을 넘긴 저자나 독자인 내가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면서 그래도 남은 삶의 막바지에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로 1년 늦게 입학했고, 의예과 시절엔 고열, 오한을 동반한 장티푸스에 고생했고, 43세 땐 갑자기 대장에 천공이 생겨 장 절제 수술과, 곧 B형 간염에 걸려 친구들 사이엔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처럼 허약하고 병치레 심한 몸이 어느 날 B형 간염균이 사라졌고, 이것은 로또 당첨될 만큼 드문 확률이라고 한다. 그 후 식사를 잘하고 60이 넘어 운동을 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고기와 채소, 날과일과 비빔밥 등 ”밥이 보약이다“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즐겁게 먹고 담배를 피지 않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맛있게 먹고,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게 건강한 삶의 비결이라고 했는데 위의 내용은 의사의 전문적 처방이 아닌 일반 생활인들이 경험에서 말하는 순수한 지혜의 덕담 같아서 더욱 친근감과 신뢰감이 든다. 의사인 저자가 오히려 환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오래 사세요“란다.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했으면 이런 격려를 받을 수 있을까? 위 내용 외에도 '소 팔자 인생', '나를 위한 시간', '눈썹과 인덕',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굽은 인생길' 등 수많은 울림과 되새겨야 할 내용과 말들이 많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를 독립시킨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생각 났다. ”절망을 느낄 때 마다 나는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진리와 사랑의 방법은 늘 승리했다. 우리에겐 선과 진리와 사랑은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를 준다. 글 전체가 연좌제에 대한 불평 즉 돌은 던지지 않았지만 약간 주먹을 쥐고 울분을 터뜨린 것 외는 모두가 긍정적이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심장을 안정시켜 주었다. 결국 자기 직분을 다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기쁨과 행복이 멀리 있다 생각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인연이 되어 지난 3월 1일(삼일절)날 모교 김천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동문 대표로 ”격려사(檄勵辭)“를 한 내용을 소개한다. ■ "송설 후배들에게"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것,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세상을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는 비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오늘 여러분처럼 김천고 입학이었으며,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김천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김천고는 내 정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우리 김천고는 일본의 압제하에 있던 암흑기에 대한의 미래를 위해 송설당 할머니께서 세운 민족학교이다. 초대 정열모 교장 선생께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고, 학교는 공립전환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러 개교 100주년을 눈앞에 두었다. 이처럼 유서깊은 학교에 여러분이 들어오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며 영광이다. ---중략--- 의사로서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 후배 여러분께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시오. 장차 술과 담배, 혹은 다른 약물들을 가까이 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단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는 70대 중반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큰 수술을 받았고, 수개월 동안 병을 앓으면서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하루 8시간 이상 환자를 보고, 나머지 먹고 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은 뭔가를 하면서 보냈다.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진다. 별도의 휴식 시간을 갖지 않아도 지치는 일이 없다. 나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바빠도 성취 여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내가 가진 비결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 뿐이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길을 찾아 실천하시기 바란다. ▣ 송근식 ◇ 교육연합신문 부산지사장 ◇ 前부산예문여고·광명고·경혜여고·건국중학교 교장 ◇ 학교법인 선화학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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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7
  • [기자수첩] 동래의 만세, 기념을 넘어 도시의 품격으로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3월의 동래는 단순히 봄을 맞이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1919년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내며, 도시의 정체성과 책임을 동시에 환기하는 무대가 되었다. 동래구가 주관한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는 해마다 열리는 기념행사라는 틀을 넘어, 지역 역사자산을 교육과 공동체의 가치로 확장하려는 의지가 담긴 자리였다. 행사는 부산3·1독립운동 기념탑 참배로 시작됐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헌화는 형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어 내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이 이어졌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태극기를 들었다. 그 장면은 세대 간의 기억 계승이라는 상징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동래구가 역사적 동선을 세밀하게 반영했다는 점이다. 동래시장과 수안인정시장 일대를 잇는 만세 행렬은 1919년 당시 실제 만세운동이 전개됐던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과거의 현장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걷게 함으로써 체험형 역사교육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래는 부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3·1운동에 응답한 지역이다. 장터와 골목, 동헌과 읍성 일대는 민족의 자존을 외치는 공간이었다. 평범한 상인과 학생, 이름 없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동래구가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도시 브랜드의 일부로 재해석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올해 행사에서는 동래 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강화됐다. 지역 인물을 통해 독립의 의미를 구체적 서사로 전달했다는 점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역사적 인물을 지역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재조명한 점 또한 교육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수동식 태극기 인쇄 체험과 독립선언서 낭독 프로그램은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을 남겼다. 먹 냄새가 번지는 인쇄 체험 공간에서 학생들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했나요?” 이 질문은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성과일지 모른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는 순간 살아난다. 동래구가 마련한 이 재현의 장은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질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3·1운동의 본질은 ‘만세’라는 구호에 있지 않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결단,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았던 책임에 있다. 오늘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공간에서 그 장면을 되살린다. 그렇기에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가치 앞에서 용기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동래구의 이번 재현행사는 지역 역사자산을 문화·교육 콘텐츠로 확장한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학교 교육과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 청소년 참여 확대, 역사 공간의 상시 해설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이어진다면 동래의 3·1정신은 도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역사를 품은 도시는 단단하다. 기억을 자산으로 만드는 도시는 품격이 있다.동래의 봄바람 속에서 울린 만세는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동래가 어떤 도시로 서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다. 기념을 넘어 교육으로, 교육을 넘어 책임으로 이어질 때, 동래의 3·1정신은 도시의 품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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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기고] 孔子의 진채지액(陳蔡之厄)에서 배우는 ‘역경 극복의 기술’: ‘자가 동력’입니다.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삶은 외부의 자극을 넘어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 사회는 ‘동기부여’의 과잉 시대입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열정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로 가득 차 있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쉴 새 없이 우리에게 성공한 이들의 조언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러한 외부적 자극은 휘발성이 극히 강합니다. 누군가의 강연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가도, 다음 날 아침 차가운 현실과 마주하면 그 열정은 마치 일회용 배터리처럼 금방 방전되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왜 금새 무기력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동력의 근원이 ‘나’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보상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응원과 달콤한 보상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에너지가 바닥나는 순간, 즉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서야 하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결정적 동기(Self-Determined Motivation)’이자,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자가 동력(Self-motivation)’입니다. 이는 외부의 칭찬 없이도 돌아가는 내장형 발전기와 같습니다. 2,500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거문고를 켰던 공자의 일화는 이 자가 동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 자가 동력을 구축하는 세 가지 기둥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긍정(Self-Affirmation)입니다. 훼손되지 않는 본질적 가치의 발견입니다. 기원전 489년,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유람하던 중 인생 최악의 사건인 ‘진채지액(陳蔡之厄)’을 맞이합니다. 초나라로 가던 길에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의 방해로 외딴 들판에 포위된 것입니다. 7일간 끼니가 끊겼고, 제자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쓰러졌습니다. 그 절망적인 정적 속에서 공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었습니다. 울분을 토하는 제자인 자로에게 공자는 답합니다. “군자고궁(君子固窮), 소인궁람(小人窮濫).” 군자는 역경에 처하면 더욱 단단해지지만, 소인은 역경 앞에 도리를 어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단단함(固)’은 단순한 인내를 넘어선 ‘강력한 자기 긍정’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진정한 자기 긍정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상황은 비록 비참할지언정, 나의 존재 가치와 내가 지향하는 도(道)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단단한 자아 수용입니다. 환경이 나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내 안의 중심축을 지키는 힘이 자가 동력의 첫 번째 연료입니다. 둘째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 원망의 에너지를 성찰의 에너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군자가 곤경 속에서도 자가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내면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자신의 도가 현실과 어긋난 지점을 점검했습니다. 이는 맹자가 강조한 “행유부득 반구저기(行有不得 反求諸己)”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책(Self-Blame)은 에너지를 안으로 고이게 하여 자존감을 썩게 만듭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물음은 동력을 갉아먹습니다. 성찰(Reflection)은 에너지를 밖으로 흐르게 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게 합니다. “나의 방법이 부족했는가? 아니면 시대가 담기에 너무 큰 것인가?”를 묻는 비판적 사고는 자가 동력을 더욱 정교하게 만듭니다. 원망의 화살을 외부(세상, 타인, 환경)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피해자가 되지만, 그 화살을 나 자신의 성장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상황의 주인이 됩니다. 셋째, 관점의 변화(Reframing)는 시련을 가치의 증명으로 재정의 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커서, 천하가 능히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현실의 실패가 곧 진리의 실패는 아님을 선언하는 ‘인지적 재구성’입니다. 7일간의 굶주림은 공자에게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평생 구축해 온 철학이 죽음이라는 극한의 물리적 압박 앞에서도 유효한지 검증하는 ‘결정적 실험’이었습니다. 심리학의 재구성 기법처럼, 시련을 ‘막다른 길’이 아닌 ‘나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로 재정의할 때 동력의 흐름은 바뀝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수동적 물음에서 “이 상황을 통해 나는 무엇을 완성할 것인가?”라는 주체적 질문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비로소 환경을 활용하는 거인으로 거듭납니다. 질문하는 자에게는 구제 불능이란 없습니다. 자가 동력을 갖추기 위한 자기 긍정, 자기반성, 관점의 변화보다 더 근원적인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 머물고 있는 생각의 지점’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해주는 위로와 조언을 내 동력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남의 생각에서 빌려온 에너지는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생각대로 나를 살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자기부정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공자는 무언가에 마음을 쓰지 않고(無所用心), 안일하게 지내는 것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고난이 오는 곤란함보다,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 곤란함이 훨씬 큽니다. 질문을 던지는 그 찰나, 우리 마음의 엔진은 이미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질문하는 자에게는 결코 ‘구제 불능의 상태’란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인 메리 올리버는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로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을 꼽았습니다. 이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인 동시에, 불필요한 껍데기를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꽃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눈앞이 캄캄해진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당신 내면의 발전기를 가동할 가장 완벽한 기회입니다. 거문고를 들었던 공자처럼, 이제 당신만의 질문을 던지십시오. 당신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십시오. 저도 이 순간, ‘나만의 무대에서 나만의 불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묻습니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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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6
  • [기고] 인간은 판단하는 ‘자세’에서 대상에게 머무는 ‘태도’만큼 존재한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근거리는 갈잎 새를 혼자서 떠다니겠지. 박홍근 선생이 쓰고, 윤용하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다. 이때가 자기 생각을 하는 시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세계는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과 생각의 결과인 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먼저 만든 물건이 없고, 먼저 만든 제도도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여서 살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며 산다. 그래서 미디어 평론가나 토론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의 생각으로 숭배하며 산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을 바꿀 방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 생각의 결과를 받아서 살기 때문에 바꾸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 생각은 현실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구하며 산다. 자기는 없다. 모양은 자기일지 몰라도 생각은 자기가 아니다. 남이 ‘정해준 마음’으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로 바뀐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 지내라.” “장자는 실력 없는 삶을 정당화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내내 실력 있는 삶을 살다 가라고 독려했다.” 또 ‘자존과 독립과 주체와 존엄’을 중시했고, 가치(價値)보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떤 틀에 갇히는 것을 경계했던 사상가였다. 따라서 《장자》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사)들을 통해 정해진 마음을 깨부수고, 자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차원을 향해 건너가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다. 변화를 범주로 하는 책이다. 문명은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다.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 문명 세계에서 탁월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야기하는 이 일을 잘한다는 의미다. 최진석 교수는 보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과 무관하게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뭐 어렵다고 저렇게 푸념을 하느냐 하겠지만,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이것이 세상이 보여주는 그 자체인지, 아니면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을 거친 것인지 사실 구분할 수 없다. 무엇인가 보고 들을 때 이미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이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보고 싶은 지표만을 봐서는 안 된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다툼에서 승리를 거둔 유방이나, 손권, 유비 등과 천하 패권을 다퉜던 조조 그리고 당나라의 태종 등이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천민 출신 유방은 중앙집권제를 취했던 진나라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귀족 출신이었던 항우는 중앙집권제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패권에만 관심을 뒀다. 그래서 유방은 중앙집권제와 봉건제를 혼합한 지배 시스템을 제시해 천하의 우군을 모아 항우와 싸울 수 있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될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높고, 가장 치명적인,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와의 투쟁으로 나온 것이다. 남이 만들 때는 머릿속에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따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매커니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냥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받아서 쓰고 만족한다. 그러니까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고 할 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컴퓨터를 알려고 하는 사람 사이에 생존의 질과 양은 어느 쪽이 더 크고 높겠는가? 그 컴퓨터의 구성 원리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이 그 컴퓨터를 가지고 훨씬 더 높고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알려고 할 때,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고, 이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보다 훨씬 더 질과 양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알려고 하는 욕구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고 삶을 자기한테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어떤 큰 출발점이 된다. 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문명이라고 한다. 이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 때, 생각을 사용해서 만든다. 그래서 문명은 ‘생각의 결과. 질문의 결과,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 문제를 해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에서 온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오지 않고, 그 세계를 자세히 보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앞서가려면, 문명에서 더 우위에 서려면, 생각해야 되고, 질문해야 되고, 문제와 불편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불편함을 찾아내고, 질문하는 이런 일들은 다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발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는 相을 짓지마라(정해진 생각)고 한다. 그다음에 정해진 기능에만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숟가락을 들고 이것을 밥 먹는 도구로만 이해해서는 자기의 지적 유연성이나 어떤 동질성을 발견하는 은유력이 개발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모든 창조 활동은 전부 은유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이미 있는 것들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창의성은 연결이다. 창의성은 은유다, 스마트폰을 보자. 그 이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물건이다. 전혀 새로운 물건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부속품을 보자. 다 이미 있던 것들이다. MP3,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전화기, 이미 있던 것이다. MP3하고 전화기가 연결됐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은 은유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창조 행위는 다 은유다. 이 세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싶으면, 이미 있는 ‘유’들을 연결하여야 한다. 이미 있는 ‘유’의 연결이 창의고 창조다. 누가 세계를 움직이는가? 낯설게 볼 줄 아는 사람이 움직이게 한다. 그다음에 동질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낯설게 보고, 동질성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낯설게 보려는 의지가 나와야 한다. 연결하려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의지가 나오는 원천이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사랑,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다.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고,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없으면,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없으면, 그냥 익숙한 판단, 습관적인 인식으로 살게 된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있으면, 습관적인 인식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 이 세계를 사랑하고,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있으면 나한테 야망이 생긴다. 포부가 생긴다. 야망과 포부가 강렬하거나 절실하면, 이 세계를 습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이 습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이 세계가 익숙함을 벗고 전혀 새로운 얼굴로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보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은유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창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해처럼 하는 게 어떤 것이냐? 해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인격이나 의식의 차원이 높다. 이것이 사람이 나아갈 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다. 그냥 모든 일은 내가 할 일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가족,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된다. 이게 우리 弘益情神의 핵심이다. 한자 공부는 은유의 지름길이다. 한글을 알기 위해서는 한자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에 쓰이는 말이 모두 우리말이다. 외우려고 하는 순간에 한자 공부는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雨(비 우), ‘비’를 ‘우’라고도 한다는 말이다. 雨 자를 보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느냐? ‘비’를 왜 ‘우’라고 했을까를 생각해야 된다. 글자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모두 詩다. 알고 싶어 하도록 해야 사람이다. 이제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문화를 바꾸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코드다. 생각을 키우는 방법으로 한자를 활용하자. 상상력, 사고력을 키워주는 논리적인 연계성을 일깨워주는 이런 공부가 지금 절실하다. 이제 판단에서 자세히, 낯설게 보는 사람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탈 때이지 않은가? 과감하게!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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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4
  • [기자수첩] 부산 민주당 경선 앞두고 고개 드는 ‘세 과시 정치’
    [교육연합신문=정윤영 기자] 부산 지역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경선을 앞두고 내부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전직 구청장 출신 인사들이 연대 움직임을 보이며 특정 후보 중심의 구도를 형성하자, 당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세 과시 정치’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전직 구청장 출신 인사들이 공동 출마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후보론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후보는 정해진 것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론이 난 듯한 분위기가 형성될 경우, 경선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다. 경험 많은 인사들의 조언과 연대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직력과 인지도를 앞세운 세 과시가 경선 이전부터 이어질 경우, 민주적 경쟁 구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민주당 관계자는 “경선은 당원과 시민의 선택을 묻는 핵심 과정”이라며, “세력화된 움직임이 결론을 기정사실화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부산 민주당의 중장기 전략과도 맞물린다. 인지도 중심의 후보 구도가 반복될 경우, 정책 경쟁과 미래 비전 제시는 설 자리를 잃고 정치 신인들의 도전은 위축될 수 있다. 당명에 ‘민주’를 내건 정당이라면 결과보다 과정에 더 엄격해야 한다. 부산 민주당의 이번 경선은 인물 경쟁을 넘어, 정당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낼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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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1
  • [기고] 카산드라의 眞面目?, 지식에서 지혜로 나아가는 길?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신화 속 카산드라의 비극은 단순한 ‘미래 예지’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이 타인의 내면에 가닿지 못하는 ‘소통의 단절’이자, 편견에 갇혀 본질을 외면하는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카산드라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기후 위기를, 누군가는 사회적 재앙을, 누군가는 조직의 붕괴를 예견하며 외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길한 소리’라며 귀를 막습니다. 이 글에서는 카산드라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왜 배워야 하며, 지식을 어떻게 삶의 지혜로 승화시켜 ‘진면목’을 찾아갈 것인지 말하고자 합니다. 지식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안개 속에서 사물의 형체를 정확히 식별하기 위한 ‘빛’입니다. 첫째, 지식은 현상 너머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합니다. 카산드라가 목마 안의 죽음을 보았던 것처럼, 지식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기회를 읽어내는 힘을 줍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지식은 타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도구입니다.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청취는 단순한 소리의 전달에 불과하지만, 지적 토대가 마련된 상태에서의 경청은 상대방의 ‘절박함’과 ‘선의’를 읽어내는 고도의 해석 행위가 됩니다. 결국 지식은 나를 보호하는 방패이자, 타인과 연결되는 가장 단단한 가교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단절보다는 연결고리를 찾는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인문학적 지식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왜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갈등은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을까요? 그 원인은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孔子는 사람을 판단할 때, 시(視)·관(觀)·찰(察)의 단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인은 첫 번째 단계인 ‘시(視)’, 즉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훑어보는 수준에 머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틀에 지식을 끼워 맞추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그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아니라, 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허영의 장식품’이 되고 맙니다. 또한 지식이 현실의 문제와 충돌하며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내면화되어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을 때, 그것은 ‘금송아지’를 집에 모셔두고 굶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지식이 지혜로 승화될 때 우리 삶은 양적으로 확장되고 질적으로 심화합니다. 삶의 양적 제고(Quantity Increase)와 연관되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지식(察)은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난제들을 더 효율적으로 해결하게 합니다.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한정된 시간 속에서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 삶의 물리적 지평을 넓힙니다.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데 쓰여져야 합니다. 삶의 질적 제고(Quality Increase)와 관계되는 지식은 우리에게 ‘유연함’을 선물합니다. 타인의 의견을 단순히 ‘나와 다름’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이면의 본질을 살피는 힘(觀)은 인간관계의 깊이를 바꿉니다. 단절의 아픔을 공감의 환대로 바꾸는 지적 성찰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철학자들의 문장이 박제된 지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현장의 땀’과 섞어야 합니다. 먼저, 철학자의 말을 나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대상을 단순히 보는(視) 것에서 나아가 그 동기를 살피고(觀), 그 본질을 분석하는(察) 과정을 매일의 습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그의 말(視)만 듣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觀), 그 기저에 깔린 불안이나 욕구는 무엇인지(察)를 들여다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지식이라는 씨앗을 현실의 갈등이라는 토양에 심고, 실천의 거름을 줄 때 비로소 철학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뼈대가 됩니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면목(眞面目)’의 회복에 있습니다. 불교적 의미에서 진면목은 나의 참모습을 뜻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요구라는 화장품으로 스스로를 덧칠합니다. 배움은 이 두꺼운 화장을 지워내고,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내가 아는 것이 진정 나의 것인지를 묻는 과정입니다. 진정으로 배우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내가 아는 것이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고, 진실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배움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며, 세상을 향해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카산드라의 비극을 끝내는 열쇠는 아폴론의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에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은 명확합니다. 단순히 현상을 보는 ‘시(視)’에 머물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관(觀)’과 세밀하게 분석하는 ‘찰(察)’의 태도로 세상을 대해야 합니다. 지식을 축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온도를 1도 올리는 실천적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나의 진면목을 바로 세우고, 타인의 의견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환대의 지성’을 가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카산드라의 외로운 절규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성은 세상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넓은 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 이상을 꿈꿉니다.’ ‘꿈’은 불가능을 품는 것이 아닐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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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 [기고] 삶? 단단해지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생이란?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이런 고통과 혼돈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을 인류의 고전에 물어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그 해결의 과정에서 “자연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먼 산을 보며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보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나의 삶과 연결시켜보려눈 노력은 하고 살았을까? 조선시대의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문학가였다. 특히 서화에 능했던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대성시켰으며, 예서, 행서의 새로운 전형을 남긴 분으로도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를 포함해 다양한 인생 역정을 겪었던 그가 1844년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준 그림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180호로 지정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을 받는 이유도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도 다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세한도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孔子가 춘추 말 전국 시대 초,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립하고자 했을 때, 그 기반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고 할 때, 인간에게 있는 바로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바로 인(仁)이다. 孔子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신에게 있다고 하는 그 믿음 체계를 벗어나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松)와 잣나무(柏) 그림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려운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믿는다. 세한도 왼쪽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다. 논어의 한 구절이 들어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상이 추워지고 온통 눈으로 뒤덮여 추위와 바람만이 가득할 때 푸름을 잊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상을 그린 세한도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세월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를 깨달을 때쯤은 언제일까? 위기가 닥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정감 많은 사람이 위기가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줄 모르고, 의리와 신념을 쉽게 포기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나’를 두고 한 말 같은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에 어떤 나무가 정말 강한 나무인지 알 수 있듯이, 어렵고 힘든 위기 상황은 그 사람의 정신력과 위기 대응 지수를 알게 해 주는 좋은 기회다. 논어(論語)에서는 군자(君子)를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을’, 君子固窮’으로, 소인(小人)을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 ‘小人窮濫’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의 일이다. 그들은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많은 제자들이 병들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을 때였다. 다혈질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가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따지고 든 셈이다. 공자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고 마는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세한도는 君子다운 삶을 버리고 小人輩들로 넘쳐나는 모습을 질타하는 모습이다. 이말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인간의 두 가지 형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즉 어려움(窮)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궁(窮)한 상황에서 더욱 단단해(固)질 것인가? 아니면 넘쳐(濫)흘러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할 것인가? 자신은 어떠한가? 성공한 사람,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면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1999년 5월 31일 ‘Time’ 매거진은 ‘It’s True. Asians Can’t Think.’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다. 신밍 셔우라는 기자는 싱가폴 정치인인 키쇼 마부바니가 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1,000년 전 송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 서방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시안들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했다.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에게는 먼저 만든 제도, 물건, 생각이 없다. 그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생각은 가치다. 수준 높은 가치를 가지려면 우리 국민들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왜? 그런가? 책 속에는 높고 넓은 가치의 생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가방도 좋지만, 좋은 책을 들고 다니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왜 생각을 하는 나라와 생각을 하지 않는 나라로 나뉘어질까? 또 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갈리는 걸까? 우리는 인간의 노력이 투입되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땀과 피가 들어가서 이루어지는 문명이라는 두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한다. 따라서 문명사회를 일구어 가는데 책임을 지닌 사람들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움직이고 이해하고 통제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 세상이 인위적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 맞추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삶 자체가 인위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다 일부러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 한다. 우리는 왜? 생각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은 생각의 결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들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이루어놓은 것을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문화가 주도한다. “K-culture” 모든 삶의 비밀은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느냐에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낸 고궁(固窮)의 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위기 때 애국심을 발휘해 자신의 조국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고전은 어떤 것보다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갑옷이 된다. 고전으로 점철된 자기를 만드는 길은? 당신, 지금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나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고, 앞으로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시대의 흐름에 몸을 채 못 가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파도가 높을수록 자세를 낮추고 정신을 또렷이 차려야 하는 법, 모든 게 뒤바뀌고 엎어지는 시기일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다. 격변의 흐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하다. 이제는 ‘자기로 존재하고 자기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우리’를 강조하는 사회여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대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꿈을 가지려면 기존에 있는 모든 것들과 결별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자기 것을 다 잃어야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있다. 기존에 있는 것과 불화를 빚지 않고 새로운 전진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굉장히 높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거다. 자기가 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기준이 자기한테 있지 않고 외부에 있으면 안 된다. 자기를 보는 시선이 외부에 있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행복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롭지 않으면 창의적일 수 없게 된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내가 주인이고, 자유로움과 차이도 내가 기준이고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 행위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바람직함에 매몰되지 말고 자기가 바라는 것에 더 집중하고, 해야 하는 것에 매몰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야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희망을 만들어내려고 덤비느냐, 덤비지 않느냐다. 단 한 명이라도 정말 진실하게, 정말 가장 높은 지성적 차원에서 역사와 사회를 걱정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주역(周易)에 ‘지중유산(地中有山)’이란 말이 있다. ‘땅속에 산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큰 산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이념의 노예가 되거나 기준의 노예가 된다. 큰 산 하나를 품고 있으면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 된다. 남의 위대함에 대해 손뼉 치고 숭배하는 삶은 이제는 접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위대해지는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사람의 삶? 멋지지 않은가? 오늘은 문득 ‘나는 얼마나 단단한 사람일까?’를 생각해 본다.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과 마주한다.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 앞에서 무너질 때도 많다. 그래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단단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단지 강해지는 게 아니다. 부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보면서, 삶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서 자신이 한 답으로 살아가는 삶? 단단해지는 삶이 아닐까요?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제대로 된 당신을 꿈꾼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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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5
  • [기고] 광안리를 넘어 골목으로
    [교육연합신문=김진 기고] 부산 수영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분명하다. 광안리의 바다, 광안대교의 야경, 관광과 축제의 공간. 그러나 이 이미지가 수영구 행정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다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바다에서 몇 걸음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수영구가 펼쳐진다. 시장과 골목, 주거지와 학교, 그리고 그 안에서 이어지는 주민들의 일상이다. 도시의 얼굴과 삶의 중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정은 화려한 상징보다, 조용히 반복되는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최근 수영구를 둘러싼 여러 논의의 중심에는 행정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광안리만 수영구가 아니다”라는 문제의식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이는 특정 인물이나 선거를 전제로 한 주장이 아니라, 수영구 행정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화두로 읽힐 수 있다. 관광 중심의 외형 성장은 도시의 인지도를 높이고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생활권과의 간극, 주민 체감도의 한계라는 과제도 남겼다. 이 지점에서 골목경제, 주거환경, 노인과 청년의 삶을 행정의 중심 의제로 다시 바라보자는 제안은 충분히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도시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보다, 그 성장이 주민의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방행정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요소는 갈등 관리다. 개발, 복지, 예산 배분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행정을 ‘결정의 속도’가 아닌 ‘조정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협치와 소통이 필수 조건이 된 오늘의 지방자치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특정 개인의 강점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지방행정이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역량에 가깝다. 아울러 행정을 개인의 성과 경쟁이 아니라 조직과 지역 공동체의 협업 구조로 이해하는 관점도 중요하다. 공직자와 의회, 주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어떤 정책도 지속되기 어렵다. 보여주기식 성과보다 과정의 투명성과 참여가 강조되는 이유다. 결국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수영구는 앞으로도 상징과 이미지의 도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생활과 일상이 기준이 되는 도시로 나아갈 것인가. 이는 특정 인물을 평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수영구 행정 전반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지방자치는 인물을 넘어 방향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바다를 넘어 골목으로’라는 문제 제기는, 수영구의 다음 행정을 상상하고 논의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진 ◇ 부산수영구 출생(1964년생), 50년 지역 거주 ◇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 졸업 ◇ KBS 방송작가 10년 ◇ 제8, 9대 수영구의회 의원 ◇ 제8대 수영구의회 의장(의회 청렴도 평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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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 [기고] 아이의 하루는 어디까지 이어져야 할까
    [교육연합신문=한난희 기고]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모인 자리는 늘 그렇듯 정겨운 온기로 시작된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위로 웃음이 번지고, 아이들 이야기가 오가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그러나 그 온기 아래에는 쉽게 꺼내지 못한 현실의 무게가 함께 놓여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버텨낸 이들이 안부를 묻다 보면, 대화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멈춘다. “둘째는 생각도 못 해요.” 그 한마디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수없이 고민하고 계산한 끝에 나온 솔직한 고백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또 한 명의 하루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이 장면은 특정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설렘 뒤에는 많은 부모들이 비슷한 현실과 마주한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정규 수업은 대체로 정오 무렵, 길어도 오후 1시 전후면 마무리된다. 아이의 하루는 아직 한참 남아 있지만, 학교에서의 시간은 그 지점에서 멈춘다. 부모에게 그 이후의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선택을 요구받는 순간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돌봄의 책임은 자연스럽게 가정으로 이동하지만, 모든 가정이 그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혼자 두기 어렵고, 일터를 비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들은 여러 선택지 앞에 선다. 그중 가장 손쉬운 대안은 학원이다. 그렇게 사교육은 교육의 연장이기보다 돌봄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계의 몫으로 남는다. 최근 초등 저학년을 위한 다양한 돌봄 정책이 논의되고 시행되고 있다. 이는 분명 필요한 시도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돌봄이 ‘선택’의 형태로 제공될 때, 그 선택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는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보호를 위한 제도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구분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정책의 방향을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돌봄을 별도의 선택으로 남겨두기보다, 초등 저학년의 하루를 오후 3시까지 하나의 연속된 교육 과정으로 설계할 수는 없을까. 오전에는 기존 교과 수업을, 오후 시간에는 AI 기반 기초학습과 디지털 소양, 예체능과 탐구 활동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는 담임교사의 부담을 늘리는 구조가 아니라, 전담 교사와 전문 인력이 역할을 나누어 함께하는 체계로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하교 시간을 늦추는 문제가 아니다. 사교육으로 흘러가던 돌봄 비용을 공교육 안에서 흡수하고, 아이의 하루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는 구조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나누지 않고, 모든 아이가 같은 시간·같은 공간에서 배우며 성장할 수 있다. 동시에 청년 인재와 지역 강사가 학교로 유입되며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될 수 있다. 아이를 낳으라는 말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태어난 아이의 하루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부모가 일터에서 시계를 보며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사회, 아이가 학교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며 자신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는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정오 무렵 멈춰버리는 아이의 하루를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단단하게 이어보자는 제안. 그것이야말로 출산 장려라는 구호보다 먼저, 아이의 하루를 책임지는 사회가 지금 교육 정책에 가장 시급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한난희 ◇ 모동중학교 학부모 운영위원 ◇ 前모동중학교 학부모 운영위원장 ◇ 前부산광역시교육청 학부모 운영위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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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기고] 省察?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지금 우리의 경제 구조, 정치 구조, 교육 구조가 새로운 방향으로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교육자들도,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기업인들도 다 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누구의 철학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포착해야 할 우리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다른 곳에서 나타난 철학을 훈고하거나 끌어들여 사용해 보려는 습성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신적 독립을 시도해 보는 일이 아닐까? 선진 사회, 선진 국가 수준으로 상승하는 일이 아닐까? 이쯤에서 1880년에 태어나 1936년에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의 말을 다시 듣는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생각, 즉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사회나 모두 각자가 가진 시선의 높이를 넘어서 사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아무리 잘 살아야 딱 시선의 높이만큼 산다. 그래서 시선의 높이는 치명적이다. 시선이 높아야 마음이 크고, 시선이 낮으면, 마음도 작다. 작은 마음은 쉽게 차고, 큰마음은 어지간한 양으로도 잘 차지 않는다. 쉬이 차는 작은 마음은 쉽게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르는 마음에 자만과 교만이 깃든다. ‘마음의 크기’가 삶의 크기다. 그래서 老子도 말한다. ‘大器免成’, 진정 큰 그릇에는 완성이 없다. 큰 그릇이 되는 건 끝이 있는 '완료형'이 아닌 계속해서 완성해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만족함에 머무르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혁신해 나가는 그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된 평화조약)부터 문명은 ‘국가’ 주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인 새로운 국제질서가 시작되었는데, 1800년대 중반부터 ‘근대’의 큰 흐름이 동아시아에 닥칠 때, 우리가 식민지 상태에 처해있어, ‘근대’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학습·수용할 수 없었다. 공부도 시켜서 할 때와 주체적으로 알아서 할 때 사이의 실력에 큰 차이가 나듯이, 국가나 문명의 형성과 학습도 주체적이냐 종속적이냐에 따라 큰 실력 차이를 내게 된다. 개인이건 사회이건 국가이건, 앞선 생각으로 주도권을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갖는 분기점은 상상력과 창의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기입인들만 앞장 서서 실천을 한다. 왜, 실천을 하느냐? 안 하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 교육자들, 관료들은 앞장서서 실천을 안 해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기업인들은 자기가 한 의사결정이 한 공동체의 승패를 직접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인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데,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동시에 생각하는 예민함이 있다. 인문학은 생존과 직결되며,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성공과 실패의 경계에 서는 예민함의 필요함을 일러주므로 기업가들이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늘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전방에 보초를 서는 척후병처럼, 모든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주시하는 경계 태세, 즉 조짐을 찾는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불안하고 모호하다.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경계에 서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다. 결국, 모호함과 두려움을 오롯이 감내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용기이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함량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려준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제까지 선진국에서, 즉 일류 국가에서 인류와 미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메시지’, ‘비전’, ‘생각들’을 받아들여서 그 사람들 대신에 잘 수행해 왔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가?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창의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을 조금 더 앞서가는 일이다. 그럼,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계속 꿈꿔보는 일이다. 그럼, 창의력과 상상력을 높이는 길은 무엇일까?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높이는 문화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 특히 교육은 모든 정치 구조, 인재의 틀을 만드는 디딤돌이다. 한국 사회에서 요체는 뭐냐? 국민 각자가 역사적 책임성을 갖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의 역할’을 몸소 수행하는 것이다. 교육은 역사적 책임을 몸에 배게 하는 훈련장이다. 우리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정치, 교육, 행정을 가지고 욕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시민들이 다 만들었다. 시민들이 만든 정치 구조며, 교육 구조, 교육 정책이다. 다 우리가 만든 것이다. 시민이 국가 운영의 방관자가 아니라 국정 운영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인, 관료, 교육자들을 욕하기에 앞서, 그분들을 만든 근본이 우리 국민이라는 역사적 책임성을 회복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자각과 실천의 시급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이 역사적 책임성을 갖추는 것은 한국 사회의 발전과 관련되는 일이고, 우리의 생존과 관련되는 중차대한 일이다. 이것을 자각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연수나 강의를 통해서 강조하는 일로써 자신의 역할이 끝나서는 어렵다. 이 역사는 우리의 눈물과 피와 열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일은 앞으로도 쉼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모두가 曾子 선생의 ‘吾日三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曾子 선생의 성찰은? 인간성의 실현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모든 정치, 경제, 교육의 구조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성을 발휘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는 이 말도 曾子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선조들의 진정한 삶의 가치인 ‘살림살이’, 즉 ‘三一哲學’에 이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깊이 있는 자기 탐구를 통해 지혜를 얻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주로 제자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 전해졌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경구처럼, 그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철학은 질문과 성찰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숙제는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인간의 본질을 묻게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만드는 존재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은 변화를 만들며 산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존재다. 인간이 만든 세계, 곧 문명, 인간이 안 만든 세계,자연, 두 무대에서 사는 인간은 보이던 것에서 살다가 안 보이던 것으로 이동해서, 자기 영토를 건축하는 존재다. 해석되지 않은 것을 꿈꾸는 존재고, 생각하는 존재다. 어떻게 변화를 이루는가? 관념에 대한 생각과 질문을 통해 변화를 만든다. 변화는 어떻게 만드는가? 생각을 통해서다. 질문하고 관념을 깨고,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 변화를 만드는 삶을 살 것인가? 변화를 수용하는 삶을 살 것인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 종속적인 삶을 살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짐으로써 자신을 변화시켜 간다. 행복과 자유 또한 질문의 대상이지, 행복과 자유는 실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이 들어간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꿈꿀 수 있어야, 자유나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세계에만 매몰되지 말고, 질문하며 추상의 세상을 사유하는 삶의 태도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묻고 묻는 성찰의 시간이 현재의 자기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왜? 인간이 변하고 달라지는가?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해결해야 될 내용과 방법도 달라진다. 그 해결하는 내용과 방법을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인간은 그냥 들쑥날쑥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人文이라고 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크고 작은 선택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간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평생에 걸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하나둘, 세어보는 삶, ‘自快’하는 삶의 길이지 않을까?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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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0
  • [기고]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으로!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주역(周易)은 중국 고대의 철학적 경전으로, 변화와 우주의 법칙을 설명하는 체제입니다. 주역은 64괘(卦)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괘는 음양(陰陽)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변화의 원리에 있으며, 이는 개인의 삶에서의 선택과 결정을 돕는 지혜로 여겨집니다. 주역은 음양의 조화와 자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역』이라는 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상의 삶에 묻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의 세 가지 의미로 설명되는데, 음양의 변화를 통해 이 우주 자연과 모든 존재들이 생겨났고, 음양의 규칙적인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변화해 간다는 음양 사상은 『주역』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저를 매료시키기에 차고 넘칩니다. 특별히 제 마음을 사로잡는 곤위지괘(坤爲地卦)의 괘상의 설명을 보면,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은 사유를 요구하며, 하늘이 창조하고 주도하는 힘이라면, 땅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끝내 생명으로 길러내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앞서 나서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 침묵과 낮음 속에는 만물을 살리는 근본의 힘이 있다.’ 하니 홀로 그런 사람을 사유하게 괘상입니다. 그래서 주역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인 철학의 시대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를 가지고 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시민들이 다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이 만든 정치구조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이라고 믿습니다. 왕정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왕에게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市民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왕정에서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왕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주역』에서 언급되는 주옥같은 말들이 우리 시민의식의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올바른 시민으로 거듭나는 일이고, 이 일에 앞장서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곤위지괘가 말하는 삶의 태도는 ‘이기는 삶’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삶’이며,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지탱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곤위지괘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以厚德載物”,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 땅은 스스로 높아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친다. 슬픈 일, 안타까운 현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닥쳤을 때, 나의 인생이 절망스러워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의 심연에 빠졌을 때 그냥 순순히 응하며 흐름에 흘려보내는 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해진 말을 따르지 않고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념, 개념, 지식은 세계의 공통된 부분만을 짜맞추어 놓은 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현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입니다. 이 시대 역사적 책임성이 왕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왕이 책임진다고 하면 왕정이고, 아니여, 시민이여, 우리가 책임자면, 그러면 민주주의입니다. 이제는 시민 각자가 왕입니다. 왕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시민입니다. 이 시민의식이 없으면. 대통령을 왕으로 알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그러고 있습니다.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대통령입니다. 소하는 한나라 건국의 중심에 있었으나 스스로를 중심에 세운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방처럼 결단으로 돌파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한신처럼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소하의 자리는 언제나 뒤였습니다. 군량을 마련하고(糧道), 법과 제도를 정비하며(制度), 인재를 관리하는 일(任人)을 맡아, 전쟁이 가능하도록 보이지 않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싸움이 눈앞의 승부라면, 소하는 그 싸움이 성립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이는 주역 곤위지괘(坤爲地卦)가 말하는 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곤(坤)은 앞서지 않고(不先), 다투지 않으며(不爭), 감당함으로 만물을 싣는 덕입니다. 또한 ‘월하추한신(月下追韓信)’의 일화는 곤(坤)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유방이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려 했을 때, 소하는 밤길을 달려 한신을 붙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을 내세우지 않았습다. 한신은 장수의 자리에, 유방은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질서(位)를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소하는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고(不居功), 공을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坤卦의 가르침인 ‘암말의 바름’(利牝馬之貞)과 닮아 있습니다. 따르되 흐트러지지 않고, 낮되 자리를 잃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소하는 끝까지 그 땅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면에 서지 않았으나, 그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제국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老子를 흔히 세상과는 등지고 사는 반문명적인 성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孔子와 老子 둘 다 급변하는 현실을 타개할 통치 질서를 모색하려고 했던 위인들이었습니다. 공자는 당시를 혼란으로, 노자는 변화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 다 현실 타개에 대한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老子를 말하면 흔히 ‘無爲’라고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글자는 ‘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帝國’의 꿈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곤위지는 성취의 괘가 아니라 수용의 괘입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네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지금 또는 앞으로 필요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나를 알고, 내가 왜 사는지 분명하고 확실해졌을 때, 잠시 멈춘 걸음을 다시 걷고, 가속력을 더해 달려가면 됩니다. 지식이 지식으로만 머물고, 실용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은 창고에 쌓아 둔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 자체로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땅에 심고 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곡식의 이름과 성질을 줄줄 외우고 있어도 밭에 뿌리지 않는다면 굶주림은 그대로인 것과 같습니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살게 됩니다. 생각은 그냥 머릿속을 스치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 선택, 태도까지 결정짓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결국 내 인생의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 우리의 꿈이 아닐까요? 모든 것은 일상의 변함없는 지속,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있지 않을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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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8
  • [기고] 남자 프로배구, 강서에서 확인한 잠재력
    [교육연합신문=김상수 기고] 부산 강서실내체육관이 주황빛 열기로 가득 찼다.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 읏맨의 첫 부산 홈 개막전 입장권이 티켓 오픈 하루 만에 전석 매진되며, 경기 당일에는 3층 스탠드까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단 한 경기만으로도 부산 시민이 얼마나 오랫동안 배구를 기다려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OK저축은행 읏맨의 부산행은 상징성이 크다. 안산에서 부산으로 연고를 옮기며 ‘영남권 최초 남자 프로배구단’을 공식화했고, 이는 한국배구연맹 이사회 승인을 통해 확정됐다. 이로써 부산은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농구에 이어 프로배구까지 더한, 4대 프로스포츠 구단을 모두 보유한 도시가 됐다. 흥행 성적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개막전 대한항공전 4,300여 명을 시작으로 현대캐피탈전 3,500여 명, KB손해보험전 2,500여 명, 삼성화재전 2,100여 명, 우리카드전 4,300여 명이 입장했다. 홈 초반 경기 평균 관중은 3,300명을 넘어섰다. 이는 수도권과 충청권이 아닌 지방에서도 프로배구가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분명한 근거다. 이 열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부산에는 초·중·고 13개 배구팀과 실업선수 197명, 생활체육 배구동호인 약 1,700명이 활동하는 탄탄한 저변이 있다. 그동안 프로구단이 없었을 뿐,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현장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이번 연고 이전을 통해 ‘우리 팀’을 만난 셈이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경기장 밖의 변화다. 경기가 열린 강서실내체육관 일대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과 타지역 원정 팬들이 몰리며 활기가 넘쳤다. 문화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서부산권에 새로운 동력이 더해졌고, 지역 상권에도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다. 홈경기 평균 관중 3,000명 기준으로 연간 약 5만 명이 강서체육공원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수단과 구단 관계자의 숙박·외식·카페 이용, 경기일 주변 상권 매출 증대까지 고려하면 프로배구는 서부산권 지역경제 활성화의 확실한 촉매가 될 수 있다. 구단과 지역의 상생 구상도 본격화되고 있다. 배구단은 유소년 배구교실과 초등학교 대상 찾아가는 배구교실, 시민 참여형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이다. 부산시 역시 배구 꿈나무 육성과 생활체육 저변 확대, 시설 개선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제 과제는 분명하다. 시즌 내내 꾸준한 관중 참여를 유지하고, 유소년·학교·생활체육을 아우르는 촘촘한 배구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나아가 부산의 경제·문화·관광과 결합한 장기적인 스포츠 도시 전략을 마련하고, 영남권 전체가 함께 응원하는 광역 팬 베이스를 형성해야 한다. 강서실내체육관에서 시작된 이 열기가 부산 전역, 더 나아가 영남 전역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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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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