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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지역일꾼의 첫 번째 책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
    [교육연합신문=이현우 기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일상 속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그중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실천이 바로 헌혈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나는 대한적십자사 서구지회 회원들과 함께 동아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헌혈캠페인에 참여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마음들이 모인 자리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기꺼이 팔을 걷어 올리고 헌혈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 있는 따뜻한 공동체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날 49번째 헌혈에 참여했다. 헌혈을 할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헌혈은 특별한 누군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봉사라는 사실이다. 위급한 환자에게 한 봉지의 혈액은 단순한 의료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이어주는 희망이며, 한 가족에게는 다시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귀중한 기회다. 그래서 헌혈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면 봉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지역일꾼의 역할은 정책을 말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주민과 함께 호흡하며 삶의 어려움을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먼저 손을 내미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부산서구의회 의원으로서 구민들의 삶과 직결된 다양한 구정 현안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을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골목과 시장, 주민들의 생활 현장을 찾아 목소리를 듣고, 지역의 작은 불편과 어려움이 행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지역일꾼의 역할은 책상 위 정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주민과 함께 답을 찾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 서구지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우리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생명 나눔을 위해 시간을 내어 헌혈캠페인을 펼치고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모습은 공동체 정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한다. 특히, 이번 동아대학교 캠퍼스 헌혈캠페인에서는 젊은 학생들의 참여가 더욱 의미 있었다. 미래세대가 나눔과 봉사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49번째 헌혈을 마치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말보다 행동으로, 약속보다 실천으로 봉사하는 지역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앞으로도 구민의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의정활동과 함께 생명 나눔과 봉사의 가치를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힘을 보태겠다." 헌혈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봉사다. 우리가 팔을 걷는 작은 용기가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이어주는 기적이 된다.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 그것이 지역일꾼의 첫 번째 책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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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3
  • [교육단상] 고병구 '어쩌다 의사가 되어'를 읽고
    [교육연합신문=송근식 기고] 한 해의 작은 달 2월, 설 명절과 입춘이 들어 있는 달, 봄이 다가오는 기다림과 설렘이 있는 달도 벌써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되었다. 옛말에 복(福)은 받는 것이고, 덕(德)은 쌓는 것인데, 손(手)으로는 나누고 발(足)로 걸어서 건강을 지키고, 얼굴(容)은 항상 미소를 짓고, 마음(心)으로는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책(冊)을 골라 독서 하면서 자아(自我)의 성숙과 마음을 키우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번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으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읽을거리를 찾다가 몇 권의 책 중에서 우연히 “어쩌다 의사가 되어”라는 에세이집을 발견하고 단숨에 반쯤 읽었는데 바로 이 병원의 대표원장이자 저자인 고병구 원장이 의사로서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보면서 환한 얼굴로 설명하는 열정이 존경스럽고 위의 말에 부합된 분이라 이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둘째는 우리 교육연합신문 전국 애독자와 네트워크를 통해 이 귀한 자료를 알리고, 국내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향후 진로와 직업선택에 도움이 되고 또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이 저자의 경험을 공유해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권장하고 싶다,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없는 이익에 대한 탐닉에 빠진 부류들이 많다. 노동을 조롱하고 성실함을 비웃으며 요행을 미덕처럼 기대하고 비트코인, 주식, 불법도박, 마약, 스포츠베팅 같은 투기에 쉽게 빠져드는 현실의 일탈에 젖어 드는 청소년들에게는 시금석이 되고 나침판이 될 것을 확신한다. 노력으로 쌓은 인생만이 결국 흔들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필요한 것은 쉽게 버는 돈이 아니라 땀과 기다림, 인내, 그리고 정당한 성공, 공정함과 책임감, 사회적 신뢰감을 갖추는 것이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돼 있고 ▲어쩌다 의사가 되어 ▲추억 속의 나날들 ▲내가 잘 할수 있는 것 ▲나를 위한 시간 ▲흔들리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시에 담다.로 나누어 구성됐다. ■ 보이지 않는 얼굴들 "의사로서 나 자신을 평가한다면 나는 그저 평범한 의사에 불가하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의사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보통의 의사다. 대부분 의사들처럼 내가 배운 지식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직업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환자들과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저자 고병구 원장은 겸손(謙遜)이 넘친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 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슈바이쳐 박사는 “겸손은 크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숙이는 것”이며, 상대를 존중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진솔하게 이해하면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가 의사인데도, 40년 전에는 부산 1급지(광복동, 서면 등)에 개업해서 부를 창조했을 수 있는 충분조건에도 중심지를 벗어나 어렵고 불우한 환경의 당감동을 선택해, 지금의 준종합병원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고, 외아들 고지환 원장도 부산의대를 졸업, 동 대학에서 소화기내과 진료 교수를 역임했고, 지난해에는 소화기 종양학 분야의 세계적인 SCI급 국제학술지 저널 표지모델로 선정돼 장식한 능력가인데도 대학병원, 대형병원에 보내지 않고, 가족 3명의 의사와 외부 원장 3명과 함께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전혀 과시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다. 또, 책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도 좀 멋지게 지을 수 있는데도, 의사 가운을 입고 근엄한 모습을 취한다거나 진찰하는 모습을 택할 법한데, 순하고 연한 녹색 바탕에 별이 새겨진 나무(Tree) 한 그루가 전부일 만큼 겸손하다. 물론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책의 머리말에서 나오긴 한다. ■ 머리말 '무슨 말을 해야 할까?'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의 답으로 주말이면 가끔 아내와 함께 운전대를 잡고 시골길을 달릴 때 고향처럼 느끼는 마을 어귀마다 서 있는 고목의 모습을 본다. 그래, 저 나무처럼 살자. 저 나무처럼 늙어 가자. 나무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마지막 날에 나는 웃으면서 떠나리라”는 문장을 대하면서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무는 우리에게 열매를 제공하고, 잎은 그늘을, 봄에는 새싹으로 희망을, 여름에는 잎의 그늘로 쉬는 휴식처로,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겨울에는 나목으로 우리에게 인내심과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워 준다.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겠다는 고병구 원장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90년대 중반 한 직장 동료가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의 수좌스님을 뵈러 간다기에 금일봉을 보시했더니 법명을 하나 받아 왔는데 '하목(夏木)'이었다. 나의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상태인데 나는 깜작 놀랐다. 우연히도 내 한자 이름에는 나무목(木)이 3개 들어 있어, 나는 내 아이디도 hamoksong으로 쓰고, 호(號)도 하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 잊을 수 없는 한마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생을 본적이 없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많이 배운 사람으로 여기던 한적한 시골, 산간벽지의 오지 경북 문경의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오직 농사일만 선택할 수 있었던 운명에서, 그래도 꿈이 있어 전액 국비 지원인 철도고등학교를 가려고 했을 때, 김천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재종형(고무림 선생)이 찾아와 아버지와 나의 진로를 의논하던 중 ”애를 왜 바보로 만들려고 하세요?“하던 그 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고무림 선생의 안내로 오늘날 고병구 저자가 된 것은, 마치 존 레논이 아들을 위해 작사한 Beautiful Boy의 가사 일부를 연상케 한다. ”너의 마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 날지 못한다고 미리 겁먹지 마라. 세상에는 너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있단다.“ 그 울타리는 가정, 부모, 형제, 학교, 선한 이웃 등이 있다. 문경에서 못살던, 오직 철도고를 꿈꾸던 소년에게 김천고와 경북의대를 안내한 울타리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사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고 인생길이 바뀌게 되는 숙명적인 계기가 되는 일이 간혹 있다. 바로 이 저자도 그 은혜를 입었지만,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과 행복은 유지할 수 없었다. 요즘도 의과대학에 진학 하려면 초등학교부터 과외를 받고, 고교 성적이 상위 1~5%에 들어야 하며, 경제적 능력과 부모의 관심과 본인의 숱한 어려움과 특출한 성적을 유지하지 못하면 힘드는데, 하물며 50년 전 국립의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재종형님의 선견지명과 본인의 얼마나 혹독(酷毒)한 노력을 했을지 예견할 수 있다. ■ 나의 모교 송설학원 김천고등학교 김천고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마지막 궁녀이자 육영사업가였던 최송설당 여사가 설립, 영친왕 보모상궁으로 책봉, 고종황제로부터 송설당 칭호 하사. 재산 전부를 해인사에 희사 예정이었는데, 만해 한용운 스님의 권유로 조국의 암울한 미래를 위해 인재 양성을 결심, 1931년 김천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평북 전주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더불어 민족사학 칭호. 개교 당시 영남의 오아시스로 통함. 지금도 3.1절에 입학하는 전통. 1907년 을사늑약 앞두고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 잡혀간 후 귀국 때는 부산에 상륙해 김천에서 내려 김천고 '정걸재'에 들려 송설당을 친견하였다고 함. 지금은 자립형 사립고(자사고)로 전국적으로 240명 선발. 교훈은 ”깨끗하게, 부지런하게“(남자고 아닌 여자고 교훈처럼). 풀어 쓰면 마음(心)은 깨끗하게(眞實), 몸(身)은 부지런하게(誠實)라는 뜻이다. 저자는 김천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이 일생일대의 자부심이자 자신의 은혜로 여기고 있다. 이 책이 인연이 되어 올해(2026년) 3월 1일 모교 입학식에서 동문 대표 격려사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도산 안창호(1878 ~1938)선생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했다.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행할 것을 강조. 實은 힘쓰자는 것으로 진실, 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하며 역행은 반드시 이루자는 뜻. ■ 연좌제의 희생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무관 후보생으로 중위, 대위 계급을 받고 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6.25때 당숙의 월북으로 연좌제에 걸려 무관 후보자격을 박탈당하고 이등병 의사가 되어 위생병으로 3년을 보낸 원통함이 있었다. 전역을 석 달 남긴 1980년 10월 어느 날 영내 보초를 서고 있는데 국보위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기로 했다는 방송을 듣고 할 수만 있다면 남은 3개월이라도 군위관으로 보내고 싶었다는 말이 나온다. 얼마나 원통하고 가슴 아파 제대 후 한동안 동기들 모임에서 군대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뒷자리로 물러났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0년 후 대전 군의학교에서 열리는 아들 지환 군(부산의대 졸)의 임관식에서 대위 계급장을 다는 아들의 모습에서 ”비로소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구나“하는 위로와 묘한 감회를 느꼈다고 했다. *연좌제(緣坐制) : 범죄자의 친족 또는 기까운 사이, 범죄자의 주변인이란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제도. 해방 후 납북, 월북자 가족은 공무원은 물론 사회 생활에 불이익을 당함. 1980년 헌법 금지됨. ■ 잊을 수 없는 추억 추억에는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 그리고 부끄러운 추억과 가슴 아픈 추억이 있다. 좋은 추억은 잔잔하게 스쳐 지나가는 산들 바람같은 어릴적 동심의 추억부터 기억하기 좋은 것. 나쁜 추억은 죄를 지었거나 상처를 입힌 잔인한 추억이고 그리고 부끄러운 추억은 미숙함으로 수치(羞恥)가 담겨있는 추억으로 자신이 좀 더 자랄 수 있었던 것이고, 가슴 아픈 추억은 칼날 같이 날카롭게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보석 같은 추억이고 나를 자라게 하는 추억이다. 저자는 시간은 과거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요술 지팡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세월은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추억을 심어 주는 일에 내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 꽃과 바람과 물 사방이 병품처럼 산으로 둘러쌓인 문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보이는 것이 산과 꽃과 바람과 물이었는데, 이젠 도시의 빌딩숲 속에서 매일 병원 건물 사무실 속에서 환자만 대하는 숨막히는 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산뜻한 들국화가 되고, 시원한 솔바람이 되고, 맑은 물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두고두고 이 자리를 지키다가 고향 언덕에 재로 뿌려지는 게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한 부분에서는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감을 느끼며, 70대 중반을 넘긴 저자나 독자인 내가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면서 그래도 남은 삶의 막바지에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로 1년 늦게 입학했고, 의예과 시절엔 고열, 오한을 동반한 장티푸스에 고생했고, 43세 땐 갑자기 대장에 천공이 생겨 장 절제 수술과, 곧 B형 간염에 걸려 친구들 사이엔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처럼 허약하고 병치레 심한 몸이 어느 날 B형 간염균이 사라졌고, 이것은 로또 당첨될 만큼 드문 확률이라고 한다. 그 후 식사를 잘하고 60이 넘어 운동을 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고기와 채소, 날과일과 비빔밥 등 ”밥이 보약이다“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즐겁게 먹고 담배를 피지 않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맛있게 먹고,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게 건강한 삶의 비결이라고 했는데 위의 내용은 의사의 전문적 처방이 아닌 일반 생활인들이 경험에서 말하는 순수한 지혜의 덕담 같아서 더욱 친근감과 신뢰감이 든다. 의사인 저자가 오히려 환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오래 사세요“란다.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했으면 이런 격려를 받을 수 있을까? 위 내용 외에도 '소 팔자 인생', '나를 위한 시간', '눈썹과 인덕',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굽은 인생길' 등 수많은 울림과 되새겨야 할 내용과 말들이 많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를 독립시킨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생각 났다. ”절망을 느낄 때 마다 나는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진리와 사랑의 방법은 늘 승리했다. 우리에겐 선과 진리와 사랑은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를 준다. 글 전체가 연좌제에 대한 불평 즉 돌은 던지지 않았지만 약간 주먹을 쥐고 울분을 터뜨린 것 외는 모두가 긍정적이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심장을 안정시켜 주었다. 결국 자기 직분을 다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기쁨과 행복이 멀리 있다 생각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인연이 되어 지난 3월 1일(삼일절)날 모교 김천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동문 대표로 ”격려사(檄勵辭)“를 한 내용을 소개한다. ■ "송설 후배들에게"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것,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세상을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는 비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오늘 여러분처럼 김천고 입학이었으며,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김천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김천고는 내 정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우리 김천고는 일본의 압제하에 있던 암흑기에 대한의 미래를 위해 송설당 할머니께서 세운 민족학교이다. 초대 정열모 교장 선생께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고, 학교는 공립전환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러 개교 100주년을 눈앞에 두었다. 이처럼 유서깊은 학교에 여러분이 들어오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며 영광이다. ---중략--- 의사로서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 후배 여러분께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시오. 장차 술과 담배, 혹은 다른 약물들을 가까이 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단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는 70대 중반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큰 수술을 받았고, 수개월 동안 병을 앓으면서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하루 8시간 이상 환자를 보고, 나머지 먹고 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은 뭔가를 하면서 보냈다.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진다. 별도의 휴식 시간을 갖지 않아도 지치는 일이 없다. 나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바빠도 성취 여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내가 가진 비결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 뿐이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길을 찾아 실천하시기 바란다. ▣ 송근식 ◇ 교육연합신문 부산지사장 ◇ 前부산예문여고·광명고·경혜여고·건국중학교 교장 ◇ 학교법인 선화학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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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7
  • [최윤용의 100세칼럼] 100세 시대를 위한 내 몸 사용 설명서
    [교육연합신문=최윤용 칼럼] ‘오십견’은 시간이 약일까? 방치하면 굳어지는 어깨 어깨가 굳어 팔을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극심한 통증. 흔히 '오십견'이라 불리는 이 질환의 정확한 의학적 명칭은 '유착성 관절낭염(Adhesive Capsulitis)' 또는 '동결견(Frozen Shoulder)'입니다. 이름 그대로 어깨 관절을 둘러싼 주머니(관절낭)에 염증이 생기고 두꺼워져, 관절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지는 질환입니다. 50대 전후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오십견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PC의 장시간 사용, 운동 부족 등으로 인해 30~40대에서도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 일반적인 오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낫는다?" 오십견에 대해 대중이 가진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특별한 치료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병"이라는 인식입니다. 과거에는 이 질환을 스스로 치유되는 질환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최신 임상 연구에 따르면 이는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린 사실입니다. 미국 의학 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에 게재된 2026년 최신 리뷰 논문에서는 상당수의 오십견 환자가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할 경우 수년이 지나도 통증이 지속되거나 어깨 관절의 운동 범위가 영구적으로 제한되는 후유증을 겪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염증기에는 극심한 통증이 발생하고, 이후 관절이 굳어지는 동결기를 거쳐 서서히 풀리는 해동기로 진행되는데, 이 과정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 이상 소요됩니다. 따라서 '시간이 약'이라며 고통을 참는 것보다는,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염증을 빠르게 가라앉히고 굳어진 관절의 가동 범위를 회복시키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현대 과학이 밝혀낸 부드러운 침 치료의 힘 굳어진 어깨를 부드럽게 풀고 통증을 덜어내는 데 있어 침치료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최근 여러 국제 연구를 통해 그 과학적 원리가 명확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첫째, 침과 일반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회복이 훨씬 빠릅니다. 2024년 발표된 통증 관리 전문 국제학술지의 메타분석 연구에서는, 두 치료를 함께 받은 환자들이 물리치료만 받은 환자들보다 어깨 통증이 더 많이 줄고 움직임도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침 자극이 우리 몸의 천연 진통 물질인 엔돌핀 분비를 돕고, 환부의 혈류를 늘려 손상된 조직의 회복을 돕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침이나 약침 같은 다양한 한의 기법은 어깨 속 굳은 조직을 직접적으로 풀어줍니다. 2024년과 2025년의 최신 연구들은 전기 자극을 더한 전침이나 정제된 한약 성분을 주입하는 약침이 단순한 일시적 통증 완화를 넘어 어깨 관절 주변의 염증 물질을 억제하고, 유착되어 엉겨 붙은 근막 조직을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 집에서 실천하는 굳은 어깨 회복 운동법 굳어진 관절의 운동 범위를 안전하게 회복하고 2차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스트레칭 프로그램이 필수적입니다. 집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자가 운동법을 소개합니다. ▶ 전자 운동: 테이블이나 카운터에 건강한 쪽 손을 짚고 상체를 살짝 숙인 뒤, 아픈 팔을 아래로 편안하게 늘어뜨립니다. 시계추처럼 팔을 앞뒤, 좌우, 그리고 원형으로 부드럽게 흔들어줍니다. ▶ 막대를 이용한 수동적 내회전: 등 뒤로 가벼운 막대(예: 자)를 잡고, 건강한 손으로 막대의 반대쪽 끝을 가볍게 쥡니다. 건강한 팔로 막대를 가로 방향으로 당겨, 아픈 쪽 어깨가 통증이 없는 범위 내에서 수동적으로 당겨지도록 30초간 유지한 뒤 30초간 휴식합니다. ○ 오십견 자가 관리 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 오십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세심한 관리는 병원 치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스트레칭을 시작하기 전에는 걷기나 고정식 자전거 타기 같은 부담 없는 활동으로 5~10분간 체온을 높여 몸을 웜업해주어야 근육과 인대 손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엄격히 지켜야 할 원칙은 '운동 중 결코 통증을 억지로 참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팽팽한 느낌이 드는 부드러운 범위 내에서만 관절을 움직여야 합니다. 또한 환자의 병기(초기 극심한 염증기인지, 이후 굳어지는 동결기인지)와 환자가 가진 동반 기저질환에 따라 관리 및 운동 방법이 철저히 개별화되어야 합니다. 극심한 염증기에 무리한 운동을 강행하면 오히려 관절낭의 염증이 덧나게 됩니다. 따라서 막연한 자가 판단보다는, 전문가의 정확한 상태 평가를 바탕으로 안전한 치료와 맞춤형 재활 운동을 병행하여 튼튼한 어깨 건강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1. Achilova F, Daher M, Nassar JE, Daniels AH, Abboud JA. Frozen shoulder: Diagnosis and treatment of adhesive capsulitis. Am J Med. 2026 Jan 23:S0002-9343(26)00055-0. doi: 10.1016/j.amjmed.2026.01.021. 2. Xu B, Zhang L, Zhao X, Feng S, Li J, Xu Y. Efficacy of Combining Acupuncture and Physical Therapy for the Management of Patients With Frozen Shoulder: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Pain Manag Nurs. 2024 Dec;25(6):596-605. doi: 10.1016/j.pmn.2024.06.009. 3. Kim D, Park KS, Kim SA, Seo JY, Cho HW, Lee YJ, Yang C, Ha IH, Han CH. Pharmacopuncture therapy for adhesive capsulitis: A pragmatic randomized controlled pilot study. Integr Med Res. 2024 Sep;13(3):101065. doi: 10.1016/j.imr.2024.101065. 4. Ji R, Huang W, Weng M, Zhang M. Comparative effectiveness of acupuncture-related therapies for frozen shoulder: a systematic review and network meta-analysis. Front Med (Lausanne). 2025 Nov 26;12:1673193. doi: 10.3389/fmed.2025.1673193. ▣ 최윤용 ◇ 큰나무한의원 대표원장 ◇ (주)으뜸생약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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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5
  • [기자수첩] 동래의 만세, 기념을 넘어 도시의 품격으로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3월의 동래는 단순히 봄을 맞이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1919년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내며, 도시의 정체성과 책임을 동시에 환기하는 무대가 되었다. 동래구가 주관한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는 해마다 열리는 기념행사라는 틀을 넘어, 지역 역사자산을 교육과 공동체의 가치로 확장하려는 의지가 담긴 자리였다. 행사는 부산3·1독립운동 기념탑 참배로 시작됐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헌화는 형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어 내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이 이어졌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태극기를 들었다. 그 장면은 세대 간의 기억 계승이라는 상징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동래구가 역사적 동선을 세밀하게 반영했다는 점이다. 동래시장과 수안인정시장 일대를 잇는 만세 행렬은 1919년 당시 실제 만세운동이 전개됐던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과거의 현장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걷게 함으로써 체험형 역사교육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래는 부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3·1운동에 응답한 지역이다. 장터와 골목, 동헌과 읍성 일대는 민족의 자존을 외치는 공간이었다. 평범한 상인과 학생, 이름 없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동래구가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도시 브랜드의 일부로 재해석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올해 행사에서는 동래 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강화됐다. 지역 인물을 통해 독립의 의미를 구체적 서사로 전달했다는 점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역사적 인물을 지역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재조명한 점 또한 교육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수동식 태극기 인쇄 체험과 독립선언서 낭독 프로그램은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을 남겼다. 먹 냄새가 번지는 인쇄 체험 공간에서 학생들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했나요?” 이 질문은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성과일지 모른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는 순간 살아난다. 동래구가 마련한 이 재현의 장은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질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3·1운동의 본질은 ‘만세’라는 구호에 있지 않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결단,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았던 책임에 있다. 오늘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공간에서 그 장면을 되살린다. 그렇기에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가치 앞에서 용기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동래구의 이번 재현행사는 지역 역사자산을 문화·교육 콘텐츠로 확장한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학교 교육과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 청소년 참여 확대, 역사 공간의 상시 해설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이어진다면 동래의 3·1정신은 도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역사를 품은 도시는 단단하다. 기억을 자산으로 만드는 도시는 품격이 있다.동래의 봄바람 속에서 울린 만세는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동래가 어떤 도시로 서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다. 기념을 넘어 교육으로, 교육을 넘어 책임으로 이어질 때, 동래의 3·1정신은 도시의 품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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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기고] 孔子의 진채지액(陳蔡之厄)에서 배우는 ‘역경 극복의 기술’: ‘자가 동력’입니다.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삶은 외부의 자극을 넘어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 사회는 ‘동기부여’의 과잉 시대입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열정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로 가득 차 있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쉴 새 없이 우리에게 성공한 이들의 조언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러한 외부적 자극은 휘발성이 극히 강합니다. 누군가의 강연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가도, 다음 날 아침 차가운 현실과 마주하면 그 열정은 마치 일회용 배터리처럼 금방 방전되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왜 금새 무기력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동력의 근원이 ‘나’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보상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응원과 달콤한 보상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에너지가 바닥나는 순간, 즉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서야 하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결정적 동기(Self-Determined Motivation)’이자,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자가 동력(Self-motivation)’입니다. 이는 외부의 칭찬 없이도 돌아가는 내장형 발전기와 같습니다. 2,500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거문고를 켰던 공자의 일화는 이 자가 동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 자가 동력을 구축하는 세 가지 기둥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긍정(Self-Affirmation)입니다. 훼손되지 않는 본질적 가치의 발견입니다. 기원전 489년,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유람하던 중 인생 최악의 사건인 ‘진채지액(陳蔡之厄)’을 맞이합니다. 초나라로 가던 길에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의 방해로 외딴 들판에 포위된 것입니다. 7일간 끼니가 끊겼고, 제자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쓰러졌습니다. 그 절망적인 정적 속에서 공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었습니다. 울분을 토하는 제자인 자로에게 공자는 답합니다. “군자고궁(君子固窮), 소인궁람(小人窮濫).” 군자는 역경에 처하면 더욱 단단해지지만, 소인은 역경 앞에 도리를 어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단단함(固)’은 단순한 인내를 넘어선 ‘강력한 자기 긍정’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진정한 자기 긍정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상황은 비록 비참할지언정, 나의 존재 가치와 내가 지향하는 도(道)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단단한 자아 수용입니다. 환경이 나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내 안의 중심축을 지키는 힘이 자가 동력의 첫 번째 연료입니다. 둘째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 원망의 에너지를 성찰의 에너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군자가 곤경 속에서도 자가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내면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자신의 도가 현실과 어긋난 지점을 점검했습니다. 이는 맹자가 강조한 “행유부득 반구저기(行有不得 反求諸己)”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책(Self-Blame)은 에너지를 안으로 고이게 하여 자존감을 썩게 만듭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물음은 동력을 갉아먹습니다. 성찰(Reflection)은 에너지를 밖으로 흐르게 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게 합니다. “나의 방법이 부족했는가? 아니면 시대가 담기에 너무 큰 것인가?”를 묻는 비판적 사고는 자가 동력을 더욱 정교하게 만듭니다. 원망의 화살을 외부(세상, 타인, 환경)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피해자가 되지만, 그 화살을 나 자신의 성장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상황의 주인이 됩니다. 셋째, 관점의 변화(Reframing)는 시련을 가치의 증명으로 재정의 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커서, 천하가 능히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현실의 실패가 곧 진리의 실패는 아님을 선언하는 ‘인지적 재구성’입니다. 7일간의 굶주림은 공자에게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평생 구축해 온 철학이 죽음이라는 극한의 물리적 압박 앞에서도 유효한지 검증하는 ‘결정적 실험’이었습니다. 심리학의 재구성 기법처럼, 시련을 ‘막다른 길’이 아닌 ‘나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로 재정의할 때 동력의 흐름은 바뀝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수동적 물음에서 “이 상황을 통해 나는 무엇을 완성할 것인가?”라는 주체적 질문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비로소 환경을 활용하는 거인으로 거듭납니다. 질문하는 자에게는 구제 불능이란 없습니다. 자가 동력을 갖추기 위한 자기 긍정, 자기반성, 관점의 변화보다 더 근원적인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 머물고 있는 생각의 지점’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해주는 위로와 조언을 내 동력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남의 생각에서 빌려온 에너지는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생각대로 나를 살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자기부정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공자는 무언가에 마음을 쓰지 않고(無所用心), 안일하게 지내는 것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고난이 오는 곤란함보다,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 곤란함이 훨씬 큽니다. 질문을 던지는 그 찰나, 우리 마음의 엔진은 이미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질문하는 자에게는 결코 ‘구제 불능의 상태’란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인 메리 올리버는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로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을 꼽았습니다. 이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인 동시에, 불필요한 껍데기를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꽃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눈앞이 캄캄해진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당신 내면의 발전기를 가동할 가장 완벽한 기회입니다. 거문고를 들었던 공자처럼, 이제 당신만의 질문을 던지십시오. 당신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십시오. 저도 이 순간, ‘나만의 무대에서 나만의 불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묻습니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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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6
  • [기고] 인간은 판단하는 ‘자세’에서 대상에게 머무는 ‘태도’만큼 존재한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근거리는 갈잎 새를 혼자서 떠다니겠지. 박홍근 선생이 쓰고, 윤용하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다. 이때가 자기 생각을 하는 시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세계는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과 생각의 결과인 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먼저 만든 물건이 없고, 먼저 만든 제도도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여서 살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며 산다. 그래서 미디어 평론가나 토론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의 생각으로 숭배하며 산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을 바꿀 방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 생각의 결과를 받아서 살기 때문에 바꾸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 생각은 현실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구하며 산다. 자기는 없다. 모양은 자기일지 몰라도 생각은 자기가 아니다. 남이 ‘정해준 마음’으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로 바뀐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 지내라.” “장자는 실력 없는 삶을 정당화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내내 실력 있는 삶을 살다 가라고 독려했다.” 또 ‘자존과 독립과 주체와 존엄’을 중시했고, 가치(價値)보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떤 틀에 갇히는 것을 경계했던 사상가였다. 따라서 《장자》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사)들을 통해 정해진 마음을 깨부수고, 자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차원을 향해 건너가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다. 변화를 범주로 하는 책이다. 문명은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다.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 문명 세계에서 탁월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야기하는 이 일을 잘한다는 의미다. 최진석 교수는 보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과 무관하게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뭐 어렵다고 저렇게 푸념을 하느냐 하겠지만,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이것이 세상이 보여주는 그 자체인지, 아니면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을 거친 것인지 사실 구분할 수 없다. 무엇인가 보고 들을 때 이미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이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보고 싶은 지표만을 봐서는 안 된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다툼에서 승리를 거둔 유방이나, 손권, 유비 등과 천하 패권을 다퉜던 조조 그리고 당나라의 태종 등이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천민 출신 유방은 중앙집권제를 취했던 진나라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귀족 출신이었던 항우는 중앙집권제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패권에만 관심을 뒀다. 그래서 유방은 중앙집권제와 봉건제를 혼합한 지배 시스템을 제시해 천하의 우군을 모아 항우와 싸울 수 있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될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높고, 가장 치명적인,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와의 투쟁으로 나온 것이다. 남이 만들 때는 머릿속에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따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매커니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냥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받아서 쓰고 만족한다. 그러니까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고 할 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컴퓨터를 알려고 하는 사람 사이에 생존의 질과 양은 어느 쪽이 더 크고 높겠는가? 그 컴퓨터의 구성 원리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이 그 컴퓨터를 가지고 훨씬 더 높고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알려고 할 때,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고, 이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보다 훨씬 더 질과 양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알려고 하는 욕구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고 삶을 자기한테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어떤 큰 출발점이 된다. 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문명이라고 한다. 이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 때, 생각을 사용해서 만든다. 그래서 문명은 ‘생각의 결과. 질문의 결과,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 문제를 해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에서 온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오지 않고, 그 세계를 자세히 보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앞서가려면, 문명에서 더 우위에 서려면, 생각해야 되고, 질문해야 되고, 문제와 불편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불편함을 찾아내고, 질문하는 이런 일들은 다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발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는 相을 짓지마라(정해진 생각)고 한다. 그다음에 정해진 기능에만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숟가락을 들고 이것을 밥 먹는 도구로만 이해해서는 자기의 지적 유연성이나 어떤 동질성을 발견하는 은유력이 개발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모든 창조 활동은 전부 은유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이미 있는 것들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창의성은 연결이다. 창의성은 은유다, 스마트폰을 보자. 그 이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물건이다. 전혀 새로운 물건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부속품을 보자. 다 이미 있던 것들이다. MP3,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전화기, 이미 있던 것이다. MP3하고 전화기가 연결됐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은 은유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창조 행위는 다 은유다. 이 세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싶으면, 이미 있는 ‘유’들을 연결하여야 한다. 이미 있는 ‘유’의 연결이 창의고 창조다. 누가 세계를 움직이는가? 낯설게 볼 줄 아는 사람이 움직이게 한다. 그다음에 동질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낯설게 보고, 동질성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낯설게 보려는 의지가 나와야 한다. 연결하려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의지가 나오는 원천이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사랑,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다.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고,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없으면,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없으면, 그냥 익숙한 판단, 습관적인 인식으로 살게 된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있으면, 습관적인 인식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 이 세계를 사랑하고,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있으면 나한테 야망이 생긴다. 포부가 생긴다. 야망과 포부가 강렬하거나 절실하면, 이 세계를 습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이 습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이 세계가 익숙함을 벗고 전혀 새로운 얼굴로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보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은유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창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해처럼 하는 게 어떤 것이냐? 해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인격이나 의식의 차원이 높다. 이것이 사람이 나아갈 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다. 그냥 모든 일은 내가 할 일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가족,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된다. 이게 우리 弘益情神의 핵심이다. 한자 공부는 은유의 지름길이다. 한글을 알기 위해서는 한자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에 쓰이는 말이 모두 우리말이다. 외우려고 하는 순간에 한자 공부는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雨(비 우), ‘비’를 ‘우’라고도 한다는 말이다. 雨 자를 보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느냐? ‘비’를 왜 ‘우’라고 했을까를 생각해야 된다. 글자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모두 詩다. 알고 싶어 하도록 해야 사람이다. 이제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문화를 바꾸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코드다. 생각을 키우는 방법으로 한자를 활용하자. 상상력, 사고력을 키워주는 논리적인 연계성을 일깨워주는 이런 공부가 지금 절실하다. 이제 판단에서 자세히, 낯설게 보는 사람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탈 때이지 않은가? 과감하게!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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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4
  • [기자수첩] 부산 민주당 경선 앞두고 고개 드는 ‘세 과시 정치’
    [교육연합신문=정윤영 기자] 부산 지역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경선을 앞두고 내부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전직 구청장 출신 인사들이 연대 움직임을 보이며 특정 후보 중심의 구도를 형성하자, 당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세 과시 정치’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전직 구청장 출신 인사들이 공동 출마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후보론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후보는 정해진 것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론이 난 듯한 분위기가 형성될 경우, 경선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다. 경험 많은 인사들의 조언과 연대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직력과 인지도를 앞세운 세 과시가 경선 이전부터 이어질 경우, 민주적 경쟁 구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민주당 관계자는 “경선은 당원과 시민의 선택을 묻는 핵심 과정”이라며, “세력화된 움직임이 결론을 기정사실화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부산 민주당의 중장기 전략과도 맞물린다. 인지도 중심의 후보 구도가 반복될 경우, 정책 경쟁과 미래 비전 제시는 설 자리를 잃고 정치 신인들의 도전은 위축될 수 있다. 당명에 ‘민주’를 내건 정당이라면 결과보다 과정에 더 엄격해야 한다. 부산 민주당의 이번 경선은 인물 경쟁을 넘어, 정당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낼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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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1
  • [기고] 카산드라의 眞面目?, 지식에서 지혜로 나아가는 길?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신화 속 카산드라의 비극은 단순한 ‘미래 예지’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이 타인의 내면에 가닿지 못하는 ‘소통의 단절’이자, 편견에 갇혀 본질을 외면하는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카산드라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기후 위기를, 누군가는 사회적 재앙을, 누군가는 조직의 붕괴를 예견하며 외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길한 소리’라며 귀를 막습니다. 이 글에서는 카산드라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왜 배워야 하며, 지식을 어떻게 삶의 지혜로 승화시켜 ‘진면목’을 찾아갈 것인지 말하고자 합니다. 지식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안개 속에서 사물의 형체를 정확히 식별하기 위한 ‘빛’입니다. 첫째, 지식은 현상 너머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합니다. 카산드라가 목마 안의 죽음을 보았던 것처럼, 지식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기회를 읽어내는 힘을 줍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지식은 타인의 언어를 해석하는 도구입니다.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청취는 단순한 소리의 전달에 불과하지만, 지적 토대가 마련된 상태에서의 경청은 상대방의 ‘절박함’과 ‘선의’를 읽어내는 고도의 해석 행위가 됩니다. 결국 지식은 나를 보호하는 방패이자, 타인과 연결되는 가장 단단한 가교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단절보다는 연결고리를 찾는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인문학적 지식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왜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갈등은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을까요? 그 원인은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孔子는 사람을 판단할 때, 시(視)·관(觀)·찰(察)의 단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인은 첫 번째 단계인 ‘시(視)’, 즉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훑어보는 수준에 머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틀에 지식을 끼워 맞추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그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아니라, 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허영의 장식품’이 되고 맙니다. 또한 지식이 현실의 문제와 충돌하며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내면화되어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을 때, 그것은 ‘금송아지’를 집에 모셔두고 굶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지식이 지혜로 승화될 때 우리 삶은 양적으로 확장되고 질적으로 심화합니다. 삶의 양적 제고(Quantity Increase)와 연관되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지식(察)은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난제들을 더 효율적으로 해결하게 합니다.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한정된 시간 속에서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 삶의 물리적 지평을 넓힙니다.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데 쓰여져야 합니다. 삶의 질적 제고(Quality Increase)와 관계되는 지식은 우리에게 ‘유연함’을 선물합니다. 타인의 의견을 단순히 ‘나와 다름’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이면의 본질을 살피는 힘(觀)은 인간관계의 깊이를 바꿉니다. 단절의 아픔을 공감의 환대로 바꾸는 지적 성찰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철학자들의 문장이 박제된 지식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현장의 땀’과 섞어야 합니다. 먼저, 철학자의 말을 나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대상을 단순히 보는(視) 것에서 나아가 그 동기를 살피고(觀), 그 본질을 분석하는(察) 과정을 매일의 습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그의 말(視)만 듣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觀), 그 기저에 깔린 불안이나 욕구는 무엇인지(察)를 들여다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지식이라는 씨앗을 현실의 갈등이라는 토양에 심고, 실천의 거름을 줄 때 비로소 철학은 나의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뼈대가 됩니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면목(眞面目)’의 회복에 있습니다. 불교적 의미에서 진면목은 나의 참모습을 뜻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요구라는 화장품으로 스스로를 덧칠합니다. 배움은 이 두꺼운 화장을 지워내고,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내가 아는 것이 진정 나의 것인지를 묻는 과정입니다. 진정으로 배우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내가 아는 것이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고, 진실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배움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며, 세상을 향해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카산드라의 비극을 끝내는 열쇠는 아폴론의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에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은 명확합니다. 단순히 현상을 보는 ‘시(視)’에 머물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관(觀)’과 세밀하게 분석하는 ‘찰(察)’의 태도로 세상을 대해야 합니다. 지식을 축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온도를 1도 올리는 실천적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나의 진면목을 바로 세우고, 타인의 의견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환대의 지성’을 가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카산드라의 외로운 절규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성은 세상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넓은 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 이상을 꿈꿉니다.’ ‘꿈’은 불가능을 품는 것이 아닐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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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 [기고] 삶? 단단해지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생이란?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이런 고통과 혼돈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을 인류의 고전에 물어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그 해결의 과정에서 “자연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먼 산을 보며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보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나의 삶과 연결시켜보려눈 노력은 하고 살았을까? 조선시대의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문학가였다. 특히 서화에 능했던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대성시켰으며, 예서, 행서의 새로운 전형을 남긴 분으로도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를 포함해 다양한 인생 역정을 겪었던 그가 1844년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준 그림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180호로 지정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을 받는 이유도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도 다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세한도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孔子가 춘추 말 전국 시대 초,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립하고자 했을 때, 그 기반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고 할 때, 인간에게 있는 바로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바로 인(仁)이다. 孔子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신에게 있다고 하는 그 믿음 체계를 벗어나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松)와 잣나무(柏) 그림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려운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믿는다. 세한도 왼쪽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다. 논어의 한 구절이 들어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상이 추워지고 온통 눈으로 뒤덮여 추위와 바람만이 가득할 때 푸름을 잊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상을 그린 세한도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세월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를 깨달을 때쯤은 언제일까? 위기가 닥쳐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정감 많은 사람이 위기가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줄 모르고, 의리와 신념을 쉽게 포기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나’를 두고 한 말 같은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에 어떤 나무가 정말 강한 나무인지 알 수 있듯이, 어렵고 힘든 위기 상황은 그 사람의 정신력과 위기 대응 지수를 알게 해 주는 좋은 기회다. 논어(論語)에서는 군자(君子)를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을’, 君子固窮’으로, 소인(小人)을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 ‘小人窮濫’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의 일이다. 그들은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많은 제자들이 병들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을 때였다. 다혈질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가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따지고 든 셈이다. 공자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고 마는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세한도는 君子다운 삶을 버리고 小人輩들로 넘쳐나는 모습을 질타하는 모습이다. 이말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인간의 두 가지 형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즉 어려움(窮)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궁(窮)한 상황에서 더욱 단단해(固)질 것인가? 아니면 넘쳐(濫)흘러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할 것인가? 자신은 어떠한가? 성공한 사람,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면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1999년 5월 31일 ‘Time’ 매거진은 ‘It’s True. Asians Can’t Think.’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다. 신밍 셔우라는 기자는 싱가폴 정치인인 키쇼 마부바니가 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1,000년 전 송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 서방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시안들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했다.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에게는 먼저 만든 제도, 물건, 생각이 없다. 그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생각은 가치다. 수준 높은 가치를 가지려면 우리 국민들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왜? 그런가? 책 속에는 높고 넓은 가치의 생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가방도 좋지만, 좋은 책을 들고 다니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왜 생각을 하는 나라와 생각을 하지 않는 나라로 나뉘어질까? 또 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갈리는 걸까? 우리는 인간의 노력이 투입되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땀과 피가 들어가서 이루어지는 문명이라는 두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한다. 따라서 문명사회를 일구어 가는데 책임을 지닌 사람들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움직이고 이해하고 통제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 세상이 인위적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 맞추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삶 자체가 인위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다 일부러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 한다. 우리는 왜? 생각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은 생각의 결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들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이루어놓은 것을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문화가 주도한다. “K-culture” 모든 삶의 비밀은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느냐에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낸 고궁(固窮)의 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위기 때 애국심을 발휘해 자신의 조국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고전은 어떤 것보다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갑옷이 된다. 고전으로 점철된 자기를 만드는 길은? 당신, 지금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나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고, 앞으로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시대의 흐름에 몸을 채 못 가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파도가 높을수록 자세를 낮추고 정신을 또렷이 차려야 하는 법, 모든 게 뒤바뀌고 엎어지는 시기일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다. 격변의 흐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하다. 이제는 ‘자기로 존재하고 자기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우리’를 강조하는 사회여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대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꿈을 가지려면 기존에 있는 모든 것들과 결별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자기 것을 다 잃어야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있다. 기존에 있는 것과 불화를 빚지 않고 새로운 전진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굉장히 높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거다. 자기가 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기준이 자기한테 있지 않고 외부에 있으면 안 된다. 자기를 보는 시선이 외부에 있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행복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롭지 않으면 창의적일 수 없게 된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내가 주인이고, 자유로움과 차이도 내가 기준이고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 행위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바람직함에 매몰되지 말고 자기가 바라는 것에 더 집중하고, 해야 하는 것에 매몰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야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희망을 만들어내려고 덤비느냐, 덤비지 않느냐다. 단 한 명이라도 정말 진실하게, 정말 가장 높은 지성적 차원에서 역사와 사회를 걱정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주역(周易)에 ‘지중유산(地中有山)’이란 말이 있다. ‘땅속에 산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큰 산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이념의 노예가 되거나 기준의 노예가 된다. 큰 산 하나를 품고 있으면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 된다. 남의 위대함에 대해 손뼉 치고 숭배하는 삶은 이제는 접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위대해지는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사람의 삶? 멋지지 않은가? 오늘은 문득 ‘나는 얼마나 단단한 사람일까?’를 생각해 본다.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과 마주한다.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 앞에서 무너질 때도 많다. 그래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단단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단지 강해지는 게 아니다. 부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과 몸을 돌보면서, 삶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서 자신이 한 답으로 살아가는 삶? 단단해지는 삶이 아닐까요?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제대로 된 당신을 꿈꾼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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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5
  • [기고] 광안리를 넘어 골목으로
    [교육연합신문=김진 기고] 부산 수영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분명하다. 광안리의 바다, 광안대교의 야경, 관광과 축제의 공간. 그러나 이 이미지가 수영구 행정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다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바다에서 몇 걸음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수영구가 펼쳐진다. 시장과 골목, 주거지와 학교, 그리고 그 안에서 이어지는 주민들의 일상이다. 도시의 얼굴과 삶의 중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정은 화려한 상징보다, 조용히 반복되는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최근 수영구를 둘러싼 여러 논의의 중심에는 행정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광안리만 수영구가 아니다”라는 문제의식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이는 특정 인물이나 선거를 전제로 한 주장이 아니라, 수영구 행정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화두로 읽힐 수 있다. 관광 중심의 외형 성장은 도시의 인지도를 높이고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생활권과의 간극, 주민 체감도의 한계라는 과제도 남겼다. 이 지점에서 골목경제, 주거환경, 노인과 청년의 삶을 행정의 중심 의제로 다시 바라보자는 제안은 충분히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도시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보다, 그 성장이 주민의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방행정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요소는 갈등 관리다. 개발, 복지, 예산 배분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행정을 ‘결정의 속도’가 아닌 ‘조정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협치와 소통이 필수 조건이 된 오늘의 지방자치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특정 개인의 강점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지방행정이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역량에 가깝다. 아울러 행정을 개인의 성과 경쟁이 아니라 조직과 지역 공동체의 협업 구조로 이해하는 관점도 중요하다. 공직자와 의회, 주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어떤 정책도 지속되기 어렵다. 보여주기식 성과보다 과정의 투명성과 참여가 강조되는 이유다. 결국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수영구는 앞으로도 상징과 이미지의 도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생활과 일상이 기준이 되는 도시로 나아갈 것인가. 이는 특정 인물을 평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수영구 행정 전반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지방자치는 인물을 넘어 방향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바다를 넘어 골목으로’라는 문제 제기는, 수영구의 다음 행정을 상상하고 논의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진 ◇ 부산수영구 출생(1964년생), 50년 지역 거주 ◇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 졸업 ◇ KBS 방송작가 10년 ◇ 제8, 9대 수영구의회 의원 ◇ 제8대 수영구의회 의장(의회 청렴도 평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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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 [기고] 아이의 하루는 어디까지 이어져야 할까
    [교육연합신문=한난희 기고]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모인 자리는 늘 그렇듯 정겨운 온기로 시작된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위로 웃음이 번지고, 아이들 이야기가 오가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그러나 그 온기 아래에는 쉽게 꺼내지 못한 현실의 무게가 함께 놓여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버텨낸 이들이 안부를 묻다 보면, 대화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멈춘다. “둘째는 생각도 못 해요.” 그 한마디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수없이 고민하고 계산한 끝에 나온 솔직한 고백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또 한 명의 하루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이 장면은 특정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설렘 뒤에는 많은 부모들이 비슷한 현실과 마주한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정규 수업은 대체로 정오 무렵, 길어도 오후 1시 전후면 마무리된다. 아이의 하루는 아직 한참 남아 있지만, 학교에서의 시간은 그 지점에서 멈춘다. 부모에게 그 이후의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선택을 요구받는 순간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돌봄의 책임은 자연스럽게 가정으로 이동하지만, 모든 가정이 그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혼자 두기 어렵고, 일터를 비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들은 여러 선택지 앞에 선다. 그중 가장 손쉬운 대안은 학원이다. 그렇게 사교육은 교육의 연장이기보다 돌봄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계의 몫으로 남는다. 최근 초등 저학년을 위한 다양한 돌봄 정책이 논의되고 시행되고 있다. 이는 분명 필요한 시도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돌봄이 ‘선택’의 형태로 제공될 때, 그 선택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는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보호를 위한 제도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구분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정책의 방향을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돌봄을 별도의 선택으로 남겨두기보다, 초등 저학년의 하루를 오후 3시까지 하나의 연속된 교육 과정으로 설계할 수는 없을까. 오전에는 기존 교과 수업을, 오후 시간에는 AI 기반 기초학습과 디지털 소양, 예체능과 탐구 활동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는 담임교사의 부담을 늘리는 구조가 아니라, 전담 교사와 전문 인력이 역할을 나누어 함께하는 체계로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하교 시간을 늦추는 문제가 아니다. 사교육으로 흘러가던 돌봄 비용을 공교육 안에서 흡수하고, 아이의 하루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는 구조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나누지 않고, 모든 아이가 같은 시간·같은 공간에서 배우며 성장할 수 있다. 동시에 청년 인재와 지역 강사가 학교로 유입되며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될 수 있다. 아이를 낳으라는 말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태어난 아이의 하루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부모가 일터에서 시계를 보며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사회, 아이가 학교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며 자신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는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정오 무렵 멈춰버리는 아이의 하루를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단단하게 이어보자는 제안. 그것이야말로 출산 장려라는 구호보다 먼저, 아이의 하루를 책임지는 사회가 지금 교육 정책에 가장 시급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한난희 ◇ 모동중학교 학부모 운영위원 ◇ 前모동중학교 학부모 운영위원장 ◇ 前부산광역시교육청 학부모 운영위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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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기고] 省察?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지금 우리의 경제 구조, 정치 구조, 교육 구조가 새로운 방향으로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교육자들도,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기업인들도 다 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누구의 철학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포착해야 할 우리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다른 곳에서 나타난 철학을 훈고하거나 끌어들여 사용해 보려는 습성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신적 독립을 시도해 보는 일이 아닐까? 선진 사회, 선진 국가 수준으로 상승하는 일이 아닐까? 이쯤에서 1880년에 태어나 1936년에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의 말을 다시 듣는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생각, 즉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사회나 모두 각자가 가진 시선의 높이를 넘어서 사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아무리 잘 살아야 딱 시선의 높이만큼 산다. 그래서 시선의 높이는 치명적이다. 시선이 높아야 마음이 크고, 시선이 낮으면, 마음도 작다. 작은 마음은 쉽게 차고, 큰마음은 어지간한 양으로도 잘 차지 않는다. 쉬이 차는 작은 마음은 쉽게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르는 마음에 자만과 교만이 깃든다. ‘마음의 크기’가 삶의 크기다. 그래서 老子도 말한다. ‘大器免成’, 진정 큰 그릇에는 완성이 없다. 큰 그릇이 되는 건 끝이 있는 '완료형'이 아닌 계속해서 완성해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만족함에 머무르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혁신해 나가는 그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된 평화조약)부터 문명은 ‘국가’ 주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인 새로운 국제질서가 시작되었는데, 1800년대 중반부터 ‘근대’의 큰 흐름이 동아시아에 닥칠 때, 우리가 식민지 상태에 처해있어, ‘근대’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학습·수용할 수 없었다. 공부도 시켜서 할 때와 주체적으로 알아서 할 때 사이의 실력에 큰 차이가 나듯이, 국가나 문명의 형성과 학습도 주체적이냐 종속적이냐에 따라 큰 실력 차이를 내게 된다. 개인이건 사회이건 국가이건, 앞선 생각으로 주도권을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갖는 분기점은 상상력과 창의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기입인들만 앞장 서서 실천을 한다. 왜, 실천을 하느냐? 안 하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 교육자들, 관료들은 앞장서서 실천을 안 해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기업인들은 자기가 한 의사결정이 한 공동체의 승패를 직접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인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데,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동시에 생각하는 예민함이 있다. 인문학은 생존과 직결되며,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성공과 실패의 경계에 서는 예민함의 필요함을 일러주므로 기업가들이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늘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전방에 보초를 서는 척후병처럼, 모든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주시하는 경계 태세, 즉 조짐을 찾는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불안하고 모호하다.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경계에 서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다. 결국, 모호함과 두려움을 오롯이 감내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용기이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함량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려준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제까지 선진국에서, 즉 일류 국가에서 인류와 미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메시지’, ‘비전’, ‘생각들’을 받아들여서 그 사람들 대신에 잘 수행해 왔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가?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창의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을 조금 더 앞서가는 일이다. 그럼,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계속 꿈꿔보는 일이다. 그럼, 창의력과 상상력을 높이는 길은 무엇일까?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높이는 문화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 특히 교육은 모든 정치 구조, 인재의 틀을 만드는 디딤돌이다. 한국 사회에서 요체는 뭐냐? 국민 각자가 역사적 책임성을 갖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의 역할’을 몸소 수행하는 것이다. 교육은 역사적 책임을 몸에 배게 하는 훈련장이다. 우리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정치, 교육, 행정을 가지고 욕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시민들이 다 만들었다. 시민들이 만든 정치 구조며, 교육 구조, 교육 정책이다. 다 우리가 만든 것이다. 시민이 국가 운영의 방관자가 아니라 국정 운영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인, 관료, 교육자들을 욕하기에 앞서, 그분들을 만든 근본이 우리 국민이라는 역사적 책임성을 회복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자각과 실천의 시급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이 역사적 책임성을 갖추는 것은 한국 사회의 발전과 관련되는 일이고, 우리의 생존과 관련되는 중차대한 일이다. 이것을 자각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연수나 강의를 통해서 강조하는 일로써 자신의 역할이 끝나서는 어렵다. 이 역사는 우리의 눈물과 피와 열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일은 앞으로도 쉼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모두가 曾子 선생의 ‘吾日三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曾子 선생의 성찰은? 인간성의 실현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모든 정치, 경제, 교육의 구조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성을 발휘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는 이 말도 曾子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선조들의 진정한 삶의 가치인 ‘살림살이’, 즉 ‘三一哲學’에 이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깊이 있는 자기 탐구를 통해 지혜를 얻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주로 제자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 전해졌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경구처럼, 그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철학은 질문과 성찰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숙제는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인간의 본질을 묻게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만드는 존재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은 변화를 만들며 산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존재다. 인간이 만든 세계, 곧 문명, 인간이 안 만든 세계,자연, 두 무대에서 사는 인간은 보이던 것에서 살다가 안 보이던 것으로 이동해서, 자기 영토를 건축하는 존재다. 해석되지 않은 것을 꿈꾸는 존재고, 생각하는 존재다. 어떻게 변화를 이루는가? 관념에 대한 생각과 질문을 통해 변화를 만든다. 변화는 어떻게 만드는가? 생각을 통해서다. 질문하고 관념을 깨고,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 변화를 만드는 삶을 살 것인가? 변화를 수용하는 삶을 살 것인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 종속적인 삶을 살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짐으로써 자신을 변화시켜 간다. 행복과 자유 또한 질문의 대상이지, 행복과 자유는 실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이 들어간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꿈꿀 수 있어야, 자유나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세계에만 매몰되지 말고, 질문하며 추상의 세상을 사유하는 삶의 태도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묻고 묻는 성찰의 시간이 현재의 자기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왜? 인간이 변하고 달라지는가?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해결해야 될 내용과 방법도 달라진다. 그 해결하는 내용과 방법을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인간은 그냥 들쑥날쑥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人文이라고 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크고 작은 선택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간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평생에 걸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하나둘, 세어보는 삶, ‘自快’하는 삶의 길이지 않을까?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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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0
  • [기고]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으로!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주역(周易)은 중국 고대의 철학적 경전으로, 변화와 우주의 법칙을 설명하는 체제입니다. 주역은 64괘(卦)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괘는 음양(陰陽)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변화의 원리에 있으며, 이는 개인의 삶에서의 선택과 결정을 돕는 지혜로 여겨집니다. 주역은 음양의 조화와 자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역』이라는 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상의 삶에 묻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의 세 가지 의미로 설명되는데, 음양의 변화를 통해 이 우주 자연과 모든 존재들이 생겨났고, 음양의 규칙적인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변화해 간다는 음양 사상은 『주역』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저를 매료시키기에 차고 넘칩니다. 특별히 제 마음을 사로잡는 곤위지괘(坤爲地卦)의 괘상의 설명을 보면,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은 사유를 요구하며, 하늘이 창조하고 주도하는 힘이라면, 땅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끝내 생명으로 길러내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앞서 나서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 침묵과 낮음 속에는 만물을 살리는 근본의 힘이 있다.’ 하니 홀로 그런 사람을 사유하게 괘상입니다. 그래서 주역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인 철학의 시대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를 가지고 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시민들이 다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이 만든 정치구조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이라고 믿습니다. 왕정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왕에게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市民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왕정에서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왕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주역』에서 언급되는 주옥같은 말들이 우리 시민의식의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올바른 시민으로 거듭나는 일이고, 이 일에 앞장서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곤위지괘가 말하는 삶의 태도는 ‘이기는 삶’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삶’이며,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지탱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곤위지괘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以厚德載物”,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 땅은 스스로 높아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친다. 슬픈 일, 안타까운 현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닥쳤을 때, 나의 인생이 절망스러워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의 심연에 빠졌을 때 그냥 순순히 응하며 흐름에 흘려보내는 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해진 말을 따르지 않고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념, 개념, 지식은 세계의 공통된 부분만을 짜맞추어 놓은 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현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입니다. 이 시대 역사적 책임성이 왕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왕이 책임진다고 하면 왕정이고, 아니여, 시민이여, 우리가 책임자면, 그러면 민주주의입니다. 이제는 시민 각자가 왕입니다. 왕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시민입니다. 이 시민의식이 없으면. 대통령을 왕으로 알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그러고 있습니다.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대통령입니다. 소하는 한나라 건국의 중심에 있었으나 스스로를 중심에 세운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방처럼 결단으로 돌파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한신처럼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소하의 자리는 언제나 뒤였습니다. 군량을 마련하고(糧道), 법과 제도를 정비하며(制度), 인재를 관리하는 일(任人)을 맡아, 전쟁이 가능하도록 보이지 않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싸움이 눈앞의 승부라면, 소하는 그 싸움이 성립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이는 주역 곤위지괘(坤爲地卦)가 말하는 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곤(坤)은 앞서지 않고(不先), 다투지 않으며(不爭), 감당함으로 만물을 싣는 덕입니다. 또한 ‘월하추한신(月下追韓信)’의 일화는 곤(坤)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유방이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려 했을 때, 소하는 밤길을 달려 한신을 붙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을 내세우지 않았습다. 한신은 장수의 자리에, 유방은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질서(位)를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소하는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고(不居功), 공을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坤卦의 가르침인 ‘암말의 바름’(利牝馬之貞)과 닮아 있습니다. 따르되 흐트러지지 않고, 낮되 자리를 잃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소하는 끝까지 그 땅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면에 서지 않았으나, 그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제국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老子를 흔히 세상과는 등지고 사는 반문명적인 성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孔子와 老子 둘 다 급변하는 현실을 타개할 통치 질서를 모색하려고 했던 위인들이었습니다. 공자는 당시를 혼란으로, 노자는 변화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 다 현실 타개에 대한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老子를 말하면 흔히 ‘無爲’라고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글자는 ‘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帝國’의 꿈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곤위지는 성취의 괘가 아니라 수용의 괘입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네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지금 또는 앞으로 필요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나를 알고, 내가 왜 사는지 분명하고 확실해졌을 때, 잠시 멈춘 걸음을 다시 걷고, 가속력을 더해 달려가면 됩니다. 지식이 지식으로만 머물고, 실용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은 창고에 쌓아 둔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 자체로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땅에 심고 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곡식의 이름과 성질을 줄줄 외우고 있어도 밭에 뿌리지 않는다면 굶주림은 그대로인 것과 같습니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살게 됩니다. 생각은 그냥 머릿속을 스치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 선택, 태도까지 결정짓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결국 내 인생의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 우리의 꿈이 아닐까요? 모든 것은 일상의 변함없는 지속,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있지 않을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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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8
  • [기고] 남자 프로배구, 강서에서 확인한 잠재력
    [교육연합신문=김상수 기고] 부산 강서실내체육관이 주황빛 열기로 가득 찼다.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 읏맨의 첫 부산 홈 개막전 입장권이 티켓 오픈 하루 만에 전석 매진되며, 경기 당일에는 3층 스탠드까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단 한 경기만으로도 부산 시민이 얼마나 오랫동안 배구를 기다려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OK저축은행 읏맨의 부산행은 상징성이 크다. 안산에서 부산으로 연고를 옮기며 ‘영남권 최초 남자 프로배구단’을 공식화했고, 이는 한국배구연맹 이사회 승인을 통해 확정됐다. 이로써 부산은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농구에 이어 프로배구까지 더한, 4대 프로스포츠 구단을 모두 보유한 도시가 됐다. 흥행 성적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개막전 대한항공전 4,300여 명을 시작으로 현대캐피탈전 3,500여 명, KB손해보험전 2,500여 명, 삼성화재전 2,100여 명, 우리카드전 4,300여 명이 입장했다. 홈 초반 경기 평균 관중은 3,300명을 넘어섰다. 이는 수도권과 충청권이 아닌 지방에서도 프로배구가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분명한 근거다. 이 열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부산에는 초·중·고 13개 배구팀과 실업선수 197명, 생활체육 배구동호인 약 1,700명이 활동하는 탄탄한 저변이 있다. 그동안 프로구단이 없었을 뿐,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현장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이번 연고 이전을 통해 ‘우리 팀’을 만난 셈이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경기장 밖의 변화다. 경기가 열린 강서실내체육관 일대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과 타지역 원정 팬들이 몰리며 활기가 넘쳤다. 문화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서부산권에 새로운 동력이 더해졌고, 지역 상권에도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다. 홈경기 평균 관중 3,000명 기준으로 연간 약 5만 명이 강서체육공원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수단과 구단 관계자의 숙박·외식·카페 이용, 경기일 주변 상권 매출 증대까지 고려하면 프로배구는 서부산권 지역경제 활성화의 확실한 촉매가 될 수 있다. 구단과 지역의 상생 구상도 본격화되고 있다. 배구단은 유소년 배구교실과 초등학교 대상 찾아가는 배구교실, 시민 참여형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이다. 부산시 역시 배구 꿈나무 육성과 생활체육 저변 확대, 시설 개선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제 과제는 분명하다. 시즌 내내 꾸준한 관중 참여를 유지하고, 유소년·학교·생활체육을 아우르는 촘촘한 배구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나아가 부산의 경제·문화·관광과 결합한 장기적인 스포츠 도시 전략을 마련하고, 영남권 전체가 함께 응원하는 광역 팬 베이스를 형성해야 한다. 강서실내체육관에서 시작된 이 열기가 부산 전역, 더 나아가 영남 전역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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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0
  • [기고] 폭염에 갇힌 교실…‘찜통 교실’이 학생 학습권을 위협한다
    [교육연합신문=이윤규 기고] 해마다 반복되는 여름철 폭염은 이제 예외적 재난이 아니라 일상이 됐다. 그러나 학교 현장의 대응은 여전히 임시방편에 머물러 있다. 특히 옥상층 교실은 낮 동안 축적된 열이 밤새 빠져나가지 못해, 아침부터 ‘찜통 교실’이 된다. 이 공간에서 학생들은 집중력을 잃고 두통과 피로를 호소하며, 교사는 수업을 이어가기조차 버거운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온 환경은 학습 집중도와 인지 능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장시간 노출 시 학생 건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교육의 질과 학생의 안전이 동시에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학교의 주된 대응책은 에어컨 가동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 해법이 될 수 없다. 냉방을 강화할수록 전력 소비는 급증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교육 예산과 탄소 배출 증가로 이어진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학교 전기요금은 급격히 늘었고, 냉방이 에너지 소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냉방을 강화해도 옥상층 교실의 구조적 열 유입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전국 학교 전기요금은 7260억 원으로, 2020년 4223억 원 대비 72% 늘었다. 특히 여름철(6~7월) 전기요금은 전년 대비 42.8% 증가했으며, 학교 에너지 소비 중 냉방 비중은 약 3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상층 교실의 경우 열 축적으로 인해 냉방 부하가 기준 대비 30~40% 이상 초과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 대응도 속도를 내고 있으나 현장 체감도는 낮다. 교육부는 2024~2028년까지 학교 시설 개선에 총 29조 원을 투입하고, 이 중 냉난방 및 창호 교체에 9.5조 원을 배정했다. 그러나 연간 냉방 시설 개선 예산은 515억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장에서는 이미 한계를 호소하고 있다. “아침부터 교실이 달궈져 에어컨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시설 담당자의 말은, 지금의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일부 학교가 옥상층 수업을 지하나 1층으로 옮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후퇴’에 가깝다. 현장에서는 이 모순이 반복되고 있다. 냉방을 강하게 하면 에너지 절약 지침에 걸리고, 가동을 줄이면 학생 불만과 학습 저하가 발생한다. 결국 갈등의 책임은 학교장과 교사에게 전가된다. 이는 명백한 정책 실패의 결과다. 이제 정책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핵심은 분명하다. ‘냉방을 늘리는 정책’에서 ‘열을 차단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이미 충분히 검증돼 있다. 첫째, 옥상층 교실의 단열 성능을 우선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둘째, 최소한 옥상층이라도 고반사·복사냉각(Radiative Cooling) 도료를 통해 태양 복사열 유입을 구조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셋째, 교실에는 천장형 공기순환팬을 표준 설비로 도입해 냉기가 교실 전체에 효율적으로 순환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냉방 부하를 30~40%까지 줄일 수 있으며, 전기요금 절감과 탄소 저감이라는 이중 효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학생이 체감하는 실내 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된다. 이제 질문은 기술이 아니라 의지다. 학교장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 폭염 속 교실 문제를 ‘예산 부족’이라는 말로 반복 설명하는 데서 멈출 것인가? 교육부와 교육청은 결단해야 한다. 기후변화로 여름철 평균 기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상황에서 ‘찜통 교실’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 건강과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로, 학교 건물의 친환경 개보수와 지속 가능한 냉방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찜통 교실 문제를 시설 관리의 부차적 사안이 아닌, 교육의 핵심 인프라 문제로 규정해야 한다. 단년도 예산이 아닌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하고, 폭염 취약 학교부터 단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학생에게 “조금만 참아라”라고 말하는 교육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매년 같은 여름’, ‘같은 고통’, ‘같은 책임 회피’가 반복될 뿐이다. 폭염 시대의 교육은, 건물과 기술을 바꾸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폭염은 앞으로 더 잦아지고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매년 같은 논쟁과 같은 고통이 반복될 뿐이다. 에어컨 몇 대를 더 설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학교 건물과 기술을 바꾸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생의 학습권을 지키고, 교육 현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이윤규 ◇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실내환경관리센터 센터장 ◇ 한국환경한림원 홍보협력위원장 ◇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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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기고] 스마트팜으로 도약하는 중장년, 제2의 재배를 꿈꾸다
    [교육연합신문=이고은 기고] 은퇴 이후의 삶은 더 이상 ‘일의 끝’이 아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지금, 중장년에게 은퇴는 또 하나의 선택지 앞에 서는 전환점이다. 문제는 선택의 폭이다. 제조업 구조조정, 기술 변화, 산업 전환 속에서 중장년이 다시 설 수 있는 현장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농업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데이터와 자동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팜은 중장년에게 ‘제2의 재배’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무대가 되고 있다. 스마트팜은 더 이상 경험과 감각에만 의존하는 농업이 아니다. 센서로 환경 데이터를 수집하고, PLC와 제어 시스템으로 온·습도와 생육 조건을 관리하며,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 산업이다. 이는 기계, 전기, 설비, 자동화 분야에서 오랜 현장 경험을 쌓아온 중장년에게 결코 낯선 영역이 아니다. 공장에서 설비를 다뤘던 경험은 이제 작물을 키우는 기술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기반 스마트팜 운용·관리 교육과정이 본격화되고 있다. 해당 과정은 단순한 귀농 교육이 아니라, 스마트팜 자동화 이론, PLC 제어 실습, 센서·계측, 환경제어, 설비 보전, 빅데이터, 드론 활용까지 아우르는 실무 중심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한국폴리텍대학 충남캠퍼스 디지털기계시스템과의 스마트팜 중장년 과정은 ‘배워서 끝나는 교육’이 아니라 ‘현장에서 바로 쓰는 기술’을 목표로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스마트팜을 단독 산업이 아닌 디지털기계시스템과의 융합 영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팜 설비는 결국 기계와 전기, 제어, 유지보수의 집합체다. 센서 고장 진단, 제어 로직 수정, 설비 트러블 대응 능력은 중장년의 강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 재배 인력을 넘어, 스마트팜을 ‘운영·관리’하는 전문 인력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지역 산업 구조 측면에서도 스마트팜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충청남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대규모 스마트팜 단지 조성과 디지털 농업 확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설비를 운영하고 관리할 전문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스마트팜은 지어졌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사람은 부족한 현실이다. 중장년 인력이 이 공백을 채운다면, 개인의 재취업 문제와 지역 산업의 인력 수요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제2의 재배’란 단지 작물을 다시 심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경험을 새로운 산업에 옮겨 심는 일이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던 손은 이제 스마트팜 설비를 관리하고, 데이터를 읽던 눈은 작물의 생육 상태를 분석한다. 과거의 경력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토양 위에서 다시 자라난다. 스마트팜은 중장년에게 묻는다.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고 동시에 답을 제시한다. “당신의 경험은 아직 쓸모가 있다.” 기술로 재배되는 두 번째 인생, 스마트팜은 중장년에게 선택이 아닌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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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5
  • [기고] 배움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일이 아니다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배움과 성찰의 지난한 반복의 과정으로 채워진다. 배움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으며, 최근의 경향은 평생학습사회의 길을 재촉하고 있고, 그 기여는 더욱더 강화․심화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론과 지식만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자기의 삶을 창출하는 능력을 갖춰가는 길, 즉 일상이 달라지는 삶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길의 추구라는 점에서 배움을 '의미 찾기'와 '의미 만들어 내기'로 표현하고 있는 김성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배움의 길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 세계는 모두가 질문에 의해서 건설된 것이지, 대답에 의해 건설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제도, 새로운 생각은 전부 다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人格이다.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을 그대로 삼켰다가 어떤 사람이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중간역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데 남이 가르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암기하는 데 급급한 배움은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고 보기 힘들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할 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만들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莊子는 ‘有眞人而後眞知.’라는 말을 남겼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내용을 공부했다고 해서 똑같은 발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강의 내용을 똑같은 색깔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장자의 이 말은?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를 많이 결정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핵심이다. 질문과 대답은 비교를 자주한다. 자기의 일상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배움의 기본이고 기초다. 인간의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교육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점심 차림을 정하는 것보다 고민을 적게 하는 것 같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나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수함으로써 진화·발전되어 왔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타인과 교류하는 특이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으로 학습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배움에 대한 수동적 이해해 초점을 둔 입장은 노장철학 분야의 석학인 최진석 교수의 저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책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에서 그는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보내버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배움을 끊으라고 권하고 있다. 최진석 교수의 의견은 아마도 배움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만을 습득하고 따라 하는 수동적 배움은 그만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이에 대해 강남순 교수는 소극적인 배움을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 적극적 배움을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배움이 왜곡된 배움이며, 어떤 종류의 배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먼저 제시되어야 함을 웅변하는 것이다. 크게 보자면 두 종류의 배움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율곡 이이는『격몽요결』에서 ‘人生斯世에 非學問이면 無以爲人이니 所謂學問者는 亦非異常別件物事也.’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새해 아침, 배움이란? ‘나’를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힘으로 작동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배움은 표현과 창의로 거듭나야 한다. 배움의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학문이 없는 자를 가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배움이 부족한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배우고 싶어도 여간 배울 기회가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이 들으면 억울한 심정일 수도 있겠다. 배움의 많고 적음의 정도는 누가 판단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를 배울 때, 그래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제대로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불만을 품고 살았다. ‘그냥’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옛날부터 그랬어.’라는 주입식보다는 설명하는 태도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해소되기를 기대한다. 학문이란, 묻고 물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정말 아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에게 설명해 보라. 어떤가? 정말 알고 있는가? 그래서 최고의 아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에게는 ‘설명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큰 틀에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세상 어떤 것도 ‘수명이 있다.’라는 절대적 명제 앞에 서 있는 존재다. 그런데 지금 지성인, 지도자들은 어떤가? ‘자신의 말과 지식이 영원하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맹신하는 집단과 개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배움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이 주어진다. 그러나 실제는 집단의 생각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고유한 생각으로 자신을 가꾸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은 특별하게 탄생된 단 하나의 고유명사다. 나도 너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가치가 자신에게만 유일하고 구체적이고 특별하다. 어떻게 하면 부여받은 이 고유명사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고유명사로의 나의 삶’, 이것이 ‘일상’이 되고, 종속적이 아닌 주도적이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 앞선 ‘나’를 만드는 새해 삶의 주제로 만들고 싶은 ‘나’만의 꿈을 그린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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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1
  • [기고] 상장에 담긴 감사…세대 간 따뜻한 어울림
    [교육연합신문=이정아 기고] 아침 등굣길에서 아이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학교, 그 인사에 어르신들이 미소로 답하는 학교. 나는 그 짧은 순간이 교육의 시작이라고 믿어 왔다. 수영초등학교에는 오랜 시간 학교를 지켜 주신 지역 어르신들이 계신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살피고, 운동장과 복도를 정리하며,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맞아 주는 분들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지만, 그분들의 하루하루가 모여 학교의 일상이 되었다. 학교는 대한노인회와 시니어클럽 소속 어르신들께 감사의 상장을 전달했다. 사실 상장은 형식에 불과했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고맙습니다”, 그리고 “존중합니다”라는 말이었다. 상장을 받으시던 한 어르신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상장”이라는 말씀에, 그동안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도움을 받아 온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아이들한테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지만, 학교는 그 마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단상에 오르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존중을 알고 있었다. 그 박수는 연습된 예절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쌓인 신뢰의 표현이었다. 수영초등학교는 현재 부산광역시교육청 인성교육 연구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인성교육은 특별한 프로그램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교문 앞 인사 한마디, 함께 지켜낸 하루의 경험 속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어르신들의 묵묵한 봉사는 아이들에게 책임과 배려, 공동체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사는 어르신들께 다시 학교에 오고 싶은 이유가 된다. 이 순환이 바로 학교와 지역이 함께 만들어 가는 교육의 힘이라고 믿는다. 학교는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과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앞으로도 수영초등학교는 어르신들과 손을 맞잡고,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따뜻한 학교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상장은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감사와 존중,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이 담겨 있었다. 그 약속을 지켜 가는 것이, 내가 교장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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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9
  • [기자수첩] 퇴근 이후의 행정, 내일을 밝히다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주거지전용주차장 공개 추첨이 열린 시간은 이미 하루가 저물어가던 때였다. 주민들의 참여를 조금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퇴근 이후로 정해진 일정은 누군가에게는 배려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더 내어주는 선택이었다. 회의실 안은 조용했다. 이름을 부르며 확인하는 목소리,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모습, 절차를 다시 살피는 손길까지. 그 어떤 장면도 요란하지 않았지만, 모든 순간에는 책임이 깃들어 있었다. 공무원들은 앞에 나서기보다 현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뒤에서 자리를 지켰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주민 한 사람의 질문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고, 작은 혼선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공정함을 지키는 일이 곧 신뢰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주민을 위한 행정은 종종 숫자와 문서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날 현장에서 마주한 행정은 기록보다 태도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조금 더 내어주는 일, 그 평범한 선택이 행정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현장의 모습이 과연 한 번의 미담으로만 남아도 되는가 하는 점이다. 주민의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시간을 내어준 행정이 개인의 책임감에만 의존한다면, 그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민 참여형 행정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생활 민원과 마을 단위 의사결정이 확대될수록 행정은 점점 더 현장으로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야간·주말 행정은 예외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에 현장의 수고를 당연하게 소비하지 않는 제도적 고민이 함께 필요하다. 작은 보완만으로도 변화는 가능하다. 근무 체계의 유연화, 인력 분산 운영, 현장 행정에 대한 합리적 지원은 공무원의 사기를 지키는 동시에 행정의 품질을 높이는 길이다. 주민에게는 신뢰로, 공무원에게는 존중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다. 그날 늦은 시간,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공무원들의 모습은 행정의 미래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퇴근 이후에도 이어진 그 책임과 배려가 내일의 행정을 밝히는 기준으로 남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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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기고] 스테이블코인 혼선, 이제는 국가가 답해야 한다
    [교육연합신문=정광우 기고] 1990년대 초, 전 세계는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급격한 변화와 혁신을 경험했다. 이 시기 각국 중앙은행은 자원 절약, 탄소중립 실현, 위조·변조 방지를 목적으로 지폐 및 주화를 CBDC로 전환할 장기 계획을 수립하게 됐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비트코인이었다. 일부 중남미 국가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지폐 발행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CBDC처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ECB(유럽중앙은행)는 비트코인은 거래의 대상일 뿐 화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했고, 중국 역시 코인 전반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가했다. 반면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따라 CBDC 개발에 속도를 내며, 디지털 달러 형태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는 ‘가상화폐’, ‘암호화폐’, ‘탈중앙화’라는 표현이 번역 과정에서 혼재되며, 코인이 마치 화폐처럼 인식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부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사이, 국부 유출은 꾸준히 심화되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CBDC 시범사업 ‘한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국내 주요 기업과 시중은행을 동원해 예금 기반 토큰 발행, 디지털 지갑 제공, QR 결제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시범사업이라기보다는 랩 수준의 시뮬레이션에 가까웠고, 특히 실패한 제로페이 정책의 QR 방식을 다시 채택한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한강 프로젝트는 매끄럽지 않았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 더 큰 문제, 스테이블코인 정책의 혼선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정부·정책 당국의 메시지도 일관되지 않았다. 한국은행 총재는 ECB 초청 자리에서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표했고, 반면 김용범 정책실장은 민간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민병덕 의원은 민간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용 법안까지 발의했다.절충적으로, 발행 주체를 은행으로 한정하자는 논의도 존재한다. 전 세계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든 지 30년이 넘었고, 디지털은 산업과 생활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디지털 금융 분야는 아직 글로벌 스탠더드가 정립되지 못했다. ■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제언 1. 블록체인 코인과 법정화폐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코인은 미래 가치 보장이 없는 블록체인 기반 자산이다. 특히 달러 표시 스테이블코인(USDT, USDC 등)은 외환관리법 영역에서 다뤄져야 한다. 또한 국민이 보유하는 코인에 대해서는 “정부는 가치 변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담배 경고문처럼 명확히 고지해 국민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CBDC와 화폐가 될 수 없는 코인(암호화폐·가상화폐) 개념을 명확히 구분해 국민이 오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언 2. CBDC·디지털화폐·디지털원화·스테이블코인은 모두 법정화폐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며, 중앙은행의 발권 영역이다. 따라서 위임 발권 역시 한국은행의 고유 권한임을 명확히 선언해야 한다. 한국은행이 한강 프로젝트에서 발행한 예금 토큰은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해당한다는 점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제언 3. 결제 방식은 크게 카드 기반, QR 기반으로 구분된다. 정책적으로 특정 방식을 밀어붙이기보다, 가맹점을 지정선택하는 것 보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 제언 4. CBDC 시범사업은 디지털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진 도시를 선정하여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언 5. 디지털 금융의 안착을 위해 전자금융거래법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국내에는 실제 의미의 ‘지역화폐’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지역화폐는 지역사랑상품권을 편의상 부르기도 하는데 이 상품권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해 CBDC와 결합하자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상품권이나 교통카드 자체가 이미 블록체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구조이며,기술적으로는 블록체인 없는 스테이블코인의 형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디지털화폐에 관한 사항은 한국은행의 의무이며, 미래 가치가 보장되지 않은 블록체인 코인에 대해서는 금융위원회가 국민 재산 보호 차원에서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반면, 미래 가치가 보장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블록체인 코인은 적극적으로 발굴·육성해야 한다. 또한, 디지털 달러든 블록체인 코인이든 외화 유출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외환관리법을 적용해야 하며, 디지털 원화를 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지갑과 디지털 금융결제 플랫폼의 표준 역시 조속히 정립되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디지털 원화가 역외에서도 사용 가능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디지털 원화의 영토를 확장하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선도해야 할 것이다. ▣ 정광우 ◇ 이호기술단(주) 회장 ◇ 한국핀테크 블록체인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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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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