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3(목)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김성의 칼럼.jpg

주역(周易)은 중국 고대의 철학적 경전으로, 변화와 우주의 법칙을 설명하는 체제입니다. 주역은 64괘(卦)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괘는 음양(陰陽)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변화의 원리에 있으며, 이는 개인의 삶에서의 선택과 결정을 돕는 지혜로 여겨집니다. 주역은 음양의 조화와 자연의 흐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역』이라는 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상의 삶에 묻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의 세 가지 의미로 설명되는데, 음양의 변화를 통해 이 우주 자연과 모든 존재들이 생겨났고, 음양의 규칙적인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변화해 간다는 음양 사상은 『주역』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저를 매료시키기에 차고 넘칩니다.


특별히 제 마음을 사로잡는 곤위지괘(坤爲地卦)의 괘상의 설명을 보면,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은 사유를 요구하며, 하늘이 창조하고 주도하는 힘이라면, 땅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끝내 생명으로 길러내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앞서 나서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 침묵과 낮음 속에는 만물을 살리는 근본의 힘이 있다.’ 하니 홀로 그런 사람을 사유하게 괘상입니다. 


그래서 주역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인 철학의 시대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를 가지고 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시민들이 다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이 만든 정치구조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이라고 믿습니다. 왕정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왕에게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누구한테 있느냐? 市民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왕정에서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왕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가 제대로 되려면, 시민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주역』에서 언급되는 주옥같은 말들이 우리 시민의식의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올바른 시민으로 거듭나는 일이고, 이 일에 앞장서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곤위지괘가 말하는 삶의 태도는 ‘이기는 삶’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삶’이며,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지탱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곤위지괘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以厚德載物”,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 땅은 스스로 높아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친다. 슬픈 일, 안타까운 현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닥쳤을 때, 나의 인생이 절망스러워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의 심연에 빠졌을 때 그냥 순순히 응하며 흐름에 흘려보내는 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해진 말을 따르지 않고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념, 개념, 지식은 세계의 공통된 부분만을 짜맞추어 놓은 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현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주역의 핵심은 뭐냐? 역사적 책임성입니다. 이 시대 역사적 책임성이 왕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왕이 책임진다고 하면 왕정이고, 아니여, 시민이여, 우리가 책임자면, 그러면 민주주의입니다. 이제는 시민 각자가 왕입니다. 왕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시민입니다. 이 시민의식이 없으면. 대통령을 왕으로 알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그러고 있습니다. 이 역사와 사회를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대통령입니다. 


소하는 한나라 건국의 중심에 있었으나 스스로를 중심에 세운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방처럼 결단으로 돌파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한신처럼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소하의 자리는 언제나 뒤였습니다. 군량을 마련하고(糧道), 법과 제도를 정비하며(制度), 인재를 관리하는 일(任人)을 맡아, 전쟁이 가능하도록 보이지 않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싸움이 눈앞의 승부라면, 소하는 그 싸움이 성립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이는 주역 곤위지괘(坤爲地卦)가 말하는 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곤(坤)은 앞서지 않고(不先), 다투지 않으며(不爭), 감당함으로 만물을 싣는 덕입니다.


또한 ‘월하추한신(月下追韓信)’의 일화는 곤(坤)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유방이 한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려 했을 때, 소하는 밤길을 달려 한신을 붙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을 내세우지 않았습다. 한신은 장수의 자리에, 유방은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질서(位)를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소하는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고(不居功), 공을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坤卦의 가르침인 ‘암말의 바름’(利牝馬之貞)과 닮아 있습니다. 따르되 흐트러지지 않고, 낮되 자리를 잃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소하는 끝까지 그 땅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면에 서지 않았으나, 그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제국은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老子를 흔히 세상과는 등지고 사는 반문명적인 성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孔子와 老子 둘 다 급변하는 현실을 타개할 통치 질서를 모색하려고 했던 위인들이었습니다. 공자는 당시를 혼란으로, 노자는 변화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 다 현실 타개에 대한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老子를 말하면 흔히 ‘無爲’라고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글자는 ‘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帝國’의 꿈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곤위지는 성취의 괘가 아니라 수용의 괘입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네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지금 또는 앞으로 필요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나를 알고, 내가 왜 사는지 분명하고 확실해졌을 때, 잠시 멈춘 걸음을 다시 걷고, 가속력을 더해 달려가면 됩니다. 


지식이 지식으로만 머물고, 실용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은 창고에 쌓아 둔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 자체로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땅에 심고 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곡식의 이름과 성질을 줄줄 외우고 있어도 밭에 뿌리지 않는다면 굶주림은 그대로인 것과 같습니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살게 됩니다. 생각은 그냥 머릿속을 스치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 선택, 태도까지 결정짓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결국 내 인생의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 우리의 꿈이 아닐까요? 모든 것은 일상의 변함없는 지속,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있지 않을까요? 

 

김성의 칼럼.jpg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전체댓글 0

  • 1121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고]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춘 사람’으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