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문덕근 사진.jpg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근거리는

갈잎 새를 혼자서 떠다니겠지.


 박홍근 선생이 쓰고, 윤용하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다. 이때가 자기 생각을 하는 시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세계는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과 생각의 결과인 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먼저 만든 물건이 없고, 먼저 만든 제도도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여서 살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며 산다. 그래서 미디어 평론가나 토론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의 생각으로 숭배하며 산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을 바꿀 방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 생각의 결과를 받아서 살기 때문에 바꾸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 생각은 현실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구하며 산다. 자기는 없다. 모양은 자기일지 몰라도 생각은 자기가 아니다. 남이 ‘정해준 마음’으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로 바뀐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 지내라.” 


“장자는 실력 없는 삶을 정당화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내내 실력 있는 삶을 살다 가라고 독려했다.” 또 ‘자존과 독립과 주체와 존엄’을 중시했고, 가치(價値)보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떤 틀에 갇히는 것을 경계했던 사상가였다. 따라서 《장자》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사)들을 통해 정해진 마음을 깨부수고, 자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차원을 향해 건너가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다. 변화를 범주로 하는 책이다.


문명은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다.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 문명 세계에서 탁월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 야기하는 이 일을 잘한다는 의미다. 


최진석 교수는 보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과 무관하게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뭐 어렵다고 저렇게 푸념을 하느냐 하겠지만,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이것이 세상이 보여주는 그 자체인지, 아니면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을 거친 것인지 사실 구분할 수 없다. 무엇인가 보고 들을 때 이미 내가 ‘보고자 하는 방식’이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보고 싶은 지표만을 봐서는 안 된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다툼에서 승리를 거둔 유방이나, 손권, 유비 등과 천하 패권을 다퉜던 조조 그리고 당나라의 태종 등이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보는 방법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천민 출신 유방은 중앙집권제를 취했던 진나라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귀족 출신이었던 항우는 중앙집권제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패권에만 관심을 뒀다. 그래서 유방은 중앙집권제와 봉건제를 혼합한 지배 시스템을 제시해 천하의 우군을 모아 항우와 싸울 수 있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될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높고, 가장 치명적인,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와의 투쟁으로 나온 것이다. 남이 만들 때는 머릿속에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따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매커니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냥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받아서 쓰고 만족한다. 그러니까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고 할 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컴퓨터를 알려고 하는 사람 사이에 생존의 질과 양은 어느 쪽이 더 크고 높겠는가? 그 컴퓨터의 구성 원리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이 그 컴퓨터를 가지고 훨씬 더 높고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알려고 할 때,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고, 이 원시적 지적 본능이 작용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보다 훨씬 더 질과 양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알려고 하는 욕구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고 삶을 자기한테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어떤 큰 출발점이 된다. 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문명이라고 한다. 이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 때, 생각을 사용해서 만든다. 그래서 문명은 ‘생각의 결과. 질문의 결과,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 문제를 해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현실에서 온다. 생각, 질문, 불편함, 문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오지 않고, 그 세계를 자세히 보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앞서가려면, 문명에서 더 우위에 서려면, 생각해야 되고, 질문해야 되고, 문제와 불편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불편함을 찾아내고, 질문하는 이런 일들은 다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발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불교에서는 相을 짓지마라(정해진 생각)고 한다. 그다음에 정해진 기능에만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숟가락을 들고 이것을 밥 먹는 도구로만 이해해서는 자기의 지적 유연성이나 어떤 동질성을 발견하는 은유력이 개발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모든 창조 활동은 전부 은유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이미 있는 것들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창의성은 연결이다. 창의성은 은유다, 스마트폰을 보자. 그 이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물건이다. 전혀 새로운 물건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부속품을 보자. 다 이미 있던 것들이다. MP3,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전화기, 이미 있던 것이다. MP3하고 전화기가 연결됐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은 은유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창조 행위는 다 은유다. 이 세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싶으면, 이미 있는 ‘유’들을 연결하여야 한다. 이미 있는 ‘유’의 연결이 창의고 창조다.

  

누가 세계를 움직이는가? 낯설게 볼 줄 아는 사람이 움직이게 한다. 그다음에 동질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낯설게 보고, 동질성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낯설게 보려는 의지가 나와야 한다. 연결하려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의지가 나오는 원천이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사랑,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다.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고,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없으면,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없으면, 그냥 익숙한 판단, 습관적인 인식으로 살게 된다. 


이 세계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이 있으면, 습관적인 인식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 이 세계를 사랑하고, 이 세계에 대한 자비심이 있으면 나한테 야망이 생긴다. 포부가 생긴다. 야망과 포부가 강렬하거나 절실하면, 이 세계를 습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이 습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이 세계가 익숙함을 벗고 전혀 새로운 얼굴로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보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은유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창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해처럼 하는 게 어떤 것이냐? 해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인격이나 의식의 차원이 높다. 이것이 사람이 나아갈 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다. 그냥 모든 일은 내가 할 일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가족,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된다. 이게 우리 弘益情神의 핵심이다.


한자 공부는 은유의 지름길이다. 한글을 알기 위해서는 한자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에 쓰이는 말이 모두 우리말이다. 외우려고 하는 순간에 한자 공부는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雨(비 우), ‘비’를 ‘우’라고도 한다는 말이다. 雨 자를 보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느냐? ‘비’를 왜 ‘우’라고 했을까를 생각해야 된다. 글자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모두 詩다. 알고 싶어 하도록 해야 사람이다. 이제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문화를 바꾸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한자의 훈과 음은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코드다. 생각을 키우는 방법으로 한자를 활용하자. 상상력, 사고력을 키워주는 논리적인 연계성을 일깨워주는 이런 공부가 지금 절실하다. 이제 판단에서 자세히, 낯설게 보는 사람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탈 때이지 않은가? 과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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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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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은 판단하는 ‘자세’에서 대상에게 머무는 ‘태도’만큼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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