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3(수)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문덕근 사진.jpg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겨울’을 견디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불청객이 삶의 문턱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건강의 악화,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경제적 위기, 혹은 끝을 알 수 없는 정신적 우울감이 그것입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말하듯, 모든 인류는 역경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성장하며 빛나는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나 존재가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황제가 뮬란에게 한 명대사, “The flower that blooms in adversity is the most rare and beautiful of all”가 대표적 예로, 힘든 상황을 극복한 사람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중국 로맨스 고장극《석화지》(2024, 40부작, YOUKU 방영)에서는 이 표현이 주인공 화지의 성장 서사와 연결됩니다.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여성의 성장과 자립, 역경 극복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시청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달합니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은 문학, 영화, 드라마 등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뮬란》에서는 개인의 용기와 희생을, 《석화지》에서는 여성 주인공의 지혜와 강인함을 통해 이 메시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려움을 견디고 성장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혹은 홀로 남은 거실에서, 혼자만의 생각과 세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갈등, 입장 다름에서, 각자의 역경과 마주하며 고뇌하며 삶에 지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화를 내고, 누군가는 환경에 끌려다니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환경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당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논어』는 우리에게 놀라운 답을 제시합니다.   5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검찰총장직(대사구)을 내려놓고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 그 여정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14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을 했고, 끝내 진나라에서는 양식이 완전히 바닥나는 ‘재진절량(在陳絶糧)’의 위기를 맞습니다.


제자들은 굶주려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고, 다혈질이었던 자로는 화를 내며 묻습니다. “군자도 이렇게 궁할 때가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하늘을 향해 던지는 “성실하게 산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는 원망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합니다.


공자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군자고궁(君子固窮)’, 군자는 역경이 닥쳤을 때 오히려 그 상황을 견뎌내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지는 사람이다. ‘소인궁사람(小人窮斯濫)’, 소인은 역경이 오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넘쳐흐르며(濫), 자신을 잃고 주변에 화를 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곧 군자라고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건 분명 슬프고 괴롭다. 그렇다고 남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공자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해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는 공자의 충고는 자기의 길을 가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비난이나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지우지하려는가? 내 참모습은 내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데’ 달려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준엄한 말씀이겠지요. 말을 들을 때는 ‘그래야지’ 하지면 조금 지나면 ‘나도 모르는 일이 되어버린다?’


공자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높이 평가한 건 ‘그들이 과거의 원수를 기억하지 않았고, 따라서 원한도 적었다(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포숙(鮑叔)을 기억하는 건 물론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판단이 냉철했던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관중(管仲)에 대한 끝없는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관중이 “자신을 낳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고백한 것만 봐도 그의 그릇을 알 수 있다. 관중을 천거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리까지 관중에게 내주고도 그가 자신을 챙겨주지 않았을 때조차 전혀 불평하지 않은 포숙이 없었다면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조차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만나서 시시덕거려도 뒤끝이 허전하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주머니의 송곳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본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지만 그걸 꼭 재주에만 국한할 까닭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 특히 나는 그렇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유형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자신보다 아래 직급의 직원에게 그 화를 푸는 경우가 흔하다. 국장이 과장을 깨면 과장은 사무관이나 주무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학교에서도 그렇다. 담임선생이 아침부터 교장에게 한 소리를 들으면 그 학급의 기상도는 하루 종일 흐려진다. 밖에서 일어난 일로 가족들에게 원망을 하는 내가 부끄럽다. 


그런데 顏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다. 간단한 것 같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화를 옮기지 말아야 할 때 화를 옮김으로써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조직의 인화 단결이 깨지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봐왔다.


안연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에서 초범과 재범의 양형을 달리 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야구에서 내야수를 보는 선수들이 한 번 실수한다고 교체를 하는 감독은 드물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교체를 한다. 심리적 부담감으로 똑같은 실수가 또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한 교체여야 한다. 그것이 결단이다. 


공자는 실천윤리로서의 인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도 안연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공자는 인의 기준을 거창한 것에서 찾지 않는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인의 기준이다.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貳過)! 하루에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다. 오늘부터라도 외쳐보련다. ‘不遷怒 不貳過’


우리가 겪는 직장 내 갈등, 사업의 실패, 인간관계의 균열은 공자가 겪은 ‘굶주림’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역경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나다움’을 유지하는 정신력이야말로 군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 ‘호학(好學)’과 ‘중용(中庸)’입니다. 자기 초월의 힘은 ‘호학(好學)’입니다. 공자는 스스로를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열 가구 정도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만큼 충성되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역경을 이기는 힘은 ‘배움’에서 나옵니다. 배움은 고정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여 ‘건너가는’ 행위입니다. 내 무지를 자각하고 남의 말을 듣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역경이라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습니다.


균형의 감각은 중용(中庸)에서 시작합니다. 최근 우리 시민들이 보여준 상식적인 행동들은 유교의 ‘중용’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용은 멈춰있는 고정된 값이 아닙니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으려는 ‘동적인 균형’이자 ‘노력’입니다.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삶의 균형감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우리를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지식은 머리에 이고 다니는 과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깨뜨려 먹고 내 몸의 양분으로 삼는 ‘실천의 철학’이 필요합니다. 막스 베버가 강조한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듯, 유학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라는 황금률은 이제 세계인의 공동체 윤리가 되어야 합니다. 1988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제18차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인류의 golden rule로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己所不慾 勿施於人’이 최고 투표율을 2번이나 기록했다고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나다움’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묵묵히 자아를 닦아나간다면, 당신의 삶 또한 외부의 도움 없이도 고결한 향기를 내뿜으며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겪는 그 역경은, 당신을 파괴하러 온 재앙이 아니라 더 단단한 존재로 빚어내기 위한 ‘축복의 신호’입니다. 더 단단한 나를 빚는 하루하루를 생각합니다. 

 

문덕근 사진.jpg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전체댓글 0

  • 08257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고] 君子固窮! 역경이라는 폭풍 속에서 더 단단한 나를 빚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