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원하는 배움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흔해진 만큼 인스턴트 음식을 대하듯 너무나 쉽게 배를 채우고 너무나 가볍게 내던지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쇼핑하듯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봅니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철학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자신의 삶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함’, 즉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책 속에서 물어야 합니다.
과연 ‘책’이란 무엇일까요? 책을 한자에서는 ‘冊(책 책)’이라고 합니다. ‘책’은 ‘冊封’에서 기원했으며, 관리의 임명장과 임명에 관한 기록을 말합니다. 기록에는 이 사람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왕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는데, 거기에는 세상의 이론, 논리, 이치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책’이라는 말은 ‘채우다.’라는 어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 채우기 위해 책을 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자연과 문명에 관해 채워야 할 철학, 즉 모든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문인 ‘뒤퐁’은 ‘글이 곧 사람’이며,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인간의 존재는 그가 읽은 책이 결정한다.’고 했으며,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우리 속담도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깊은 지식과 축적된 통찰을 배우고자 하면서도, 정작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자세와 의지조차 갖추지 않은 채 ‘어렵다.’거나 ‘바쁘다.’는 변명과 합리화로 너무나 쉽게 뒷걸음질 치곤 합니다.
그러나 배움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 지식의 깊이가 주는 묵직함과 광범위한 사유 속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제대로 마주 보고 고민하고 견디고 버텨본 적이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세상에 노력 없이 얻어지는 빠른 성과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눈부신 결실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쓰디쓴 인고의 세월과 고독한 노력이 깊게 스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지식은 누군가가 홀로 눈물과 친구 하며, 묵묵히 흘려보낸 정직한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마땅히 깨달아야 합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의 삶은 참된 배움의 자세로 채워졌습니다. 젊은 시절의 세잔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거칠고 어두운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매번 낙선하며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알아보고 손을 잡은 이가 바로 인상주의의 스승, 카미유 피사로였습니다.
피사로는 세잔을 자신이 살던 시골 마을 퐁투아즈로 불러들여, 날마다 나란히 이젤을 세우고 빛과 색채를 관찰하는 법을 정직하게 가르쳤습니다. 세잔은 스승이 평생을 바쳐 깨달은 가르침 앞에 편법이나 요령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승의 곁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붓을 잡으며, 스승이 걸어간 고된 관찰의 길을 묵묵히 따라 걸었습니다. 치열한 의지로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뒤에야 세잔은 비로소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찰나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의 영원한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그는 남프랑스의 뙤약볕 아래서 수천 번이나 같은 산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지평을 열어냈습니다.
훗날 이름난 거장이 된 후에도 세잔은 자신의 이름 뒤에 늘 이렇게 적곤 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의 제자.” 세잔이 위대한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스승의 노고를 깊이 경외할 줄 아는 배움의 겸손함이 있었고, 그 가치를 온전히 익히기 위해 정직하게 시간을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움의 경외심은 『맹자(孟子)』에서 말하는 ‘불협(不挾)’, 즉 나이나 신분, 귀천, 자존심 같은 외적인 조건(挾)을 내려놓고, 오직 상대의 ‘덕(德)’과 지혜를 순수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맹자는 “나이가 많음을 기대지 말고, 신분이 높음을 기대지 말며, 형제의 세력을 기대어 벗하지 말라. 벗을 사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니, 무언가를 의지하고 내세우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不挾長 不挾貴 不挾兄弟而友 友也者 友其德也 不可有挾也).”라고 말하며, 배움이란 타인의 성과를 눈요기하듯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구자의 성과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가 흘린 땀방울, 인고의 시간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더 나아가 맹자는 단순히 당대의 지식을 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속 성현들의 시와 글을 읽으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인품까지 깊이 헤아리는 ‘상우(尙友, 옛 성현을 벗 삼음)’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시를 읽고 글을 논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삶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우이다(讀其詩 論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爲尙友也).”라는 구절처럼, 배움은 단순한 정보의 수집이나 스펙의 도구가 아니라 선구자가 걸어간 고독과 인내의 시간을 나의 삶 속으로 불러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현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은 지독하리만큼 단조롭고 엄격합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어김없이 원고지 20매 분량의 글을 씁니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라고 해서 욕심을 내어 더 쓰지 않고, 글이 막히는 날이라 할지라도 핑계를 대며 펜을 놓지 않은 채 어떻게든 약속한 분량을 채워냅니다.
집필이 끝나면 매일 10km를 달리거나 1.5km를 수영하며 몸을 단련하고, 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영감이나 요령에 의존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동일한 일과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이러한 철저한 ‘일상의 루틴’에 대해 “동일한 루틴의 반복 자체가 일종의 자기 최면이 되어 결국 마음 깊은 곳에 다다르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위대한 작품이란 찰나의 천재성이나 순발력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매일 정직하게 시간을 쏟아부으며 몸과 마음의 한계를 견뎌낸 자에게만 허락되는 인고의 결실입니다. 매일의 루틴을 타협 없이 지켜낸 이 정직한 배움과 훈련의 태도는 마침내 그를 세계 5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수천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현대 세계 문학의 거장’이자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독보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면, 마땅히 그 기회 자체에 대한 깊은 감사함과 배우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세월과 인내, 그리고 고독한 노력 끝에 쌓아 올린 성과에 대해 아주 작은 존경심이라도 있다면, 감히 바쁘다거나 습득 능력을 핑계로 배움의 무게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을 다루고 관리한다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무게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마음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앞에 겸허해질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삶을 바로 세우는 데 다른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루키가 매일 몸을 다지며 고집스럽게 원고지를 채워나가는 것처럼, 그리고 세잔이 스승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라 걸으며 자신만의 화풍를 만들어낸 것처럼,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아무리 그 과정이 고되고 어려울지라도 선구자가 묵묵히 걸어갔던 그 길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정성을 쏟고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과정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가치 또한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라는 명제와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정의 앞에 서서 다시 묻습니다. 내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손에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묻습니다. 인생은 한 마디 ‘묻다.’에서 시작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