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1(목)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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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요동치는 세상사 속에서 불안과 피로를 마주합니다. 수많은 사건과 갈등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사물의 겉모습만 볼 뿐, 그 이면에서 도도히 흐르는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를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먼저 하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먼저’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는 이치(牛자)의 작용(儿)이 언제나 먼저라는 뜻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회의 본질적 법칙을 직시하고, 남의 정답에 기대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을 기획하는 주인의 길을 열기 위한 화두를 정리해 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 ‘연기(緣起)와 조건’이라고 전현수 박사는 말합니다. 즉 세상의 이치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하게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내 욕심이나 의지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원인과 조건’의 인과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를 모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 현실과 싸우게 되고, 결국 분노, 불안, 우울이라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치를 알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지혜’가 생기며, 어떤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원인을 분석해 바른 조건을 짓는 능동적이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생을 바꾸는 힘을 ‘학(學)과 습(習)’으로, 《논어》의 첫 장에 나오는 ‘학이시습(學而時習)’입니다. ‘학(學)’으로 기존의 낡은 틀을 깨는 새로운 시선과 앎을 받아들이고, ‘습(習)’으로 일상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날갯짓하듯 훈련하여 몸에 체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배운 바를 삶의 행동으로 익혀내는 것만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최진석 교수는 ‘미래에 올 일을 미리 현실화하는 힘’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원한이나 현실의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치와 질서를 현재로 끌어당겨 ‘개념(Concept)’으로 설계하고 행동하는 힘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뒤따라가는 모방자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한발 앞서 읽고 스스로 미래의 아젠다(행해져야 할 일들)를 기획하는 ‘전략적 사유’를 의미합니다.


요즘 전략적 사유로, ‘루틴이 있는 사람은 못 이긴다.’는 말들을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가 말하는 루틴은 단순한 반복 일과가 아니라 ‘의지력의 소모를 막아주는 심리적 자동 보호 시스템’입니다. 감정의 기복, 슬럼프, 외부 스트레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읽고 쓰고 행동하는 기본 틀(루틴)을 가진 사람은, 순간의 열정만으로 사는 사람을 장기적 승부에서 반드시 이겨낸다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는 특정 이념, 도덕, 성공 기준이라는 획일화된 ‘유위(有爲)’의 프레임에 갇혀 극단적인 대립과 피로를 겪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안 하는 방관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편견과 도그마를 걷어내고 대상과 세계의 결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유입니다. 이 인지적 유연성이야말로 혐오와 분열을 치유하는 시대적 해독제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노자 철학이 현대에 절실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전현수 박사는 세상의 이치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정한 비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권선징악의 도덕적 설화가 아니라 ‘마음과 행위가 짓는 엄밀한 과학적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타인을 향해 혐오와 분노의 마음을 품으면, 그 감정의 파동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가장 먼저 내 몸과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한 생각과 행동을 지으면 그 평온과 신뢰가 고스란히 나의 삶으로 환류됩니다. 뿌린 씨앗대로 거둔다는 우주의 정직한 순환입니다. 


어떤 현실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작용하는 근본 이유가 존재합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마십시오. 왜? 불행해졌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어 변화를 주어야만 현실이 바뀝니다. 하버드 다니엘 골먼은 충동을 참고 조절하는 능력과 타인의 마음을 읽고 공존하는 능력을, 불교에서는 해로운 것을 인지하고 멈추는 능력을 강조합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경계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가려내는 지혜, 즉 말만 앞서는 사람을 걸러내는 방법이 생각납니다. ‘청기언이관기행(聽其言而觀其行)’, 그의 현란한 말을 듣는 데서 멈추지 말고, 반드시 뒤따르는 행동을 시간 차를 두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위기 상황이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에 책임을 회피하는지, 말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는지를 냉정히 관찰하는 것이 사람을 거르는 기준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행복을 짓는 구체적 방법으로, 전현수 박사는 인간관계의 지옥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타인은 나의 통제 영역 밖(타인의 몫)에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는 상대의 조건에 따라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다.”라고 객관적으로 수용(이해)하며, 내 쪽에서는 진실한 경청과 자애로운 태도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조한 대화의 비결은 상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 태도, 즉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생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와 같은 인지적 겸손과 경청의 언어입니다. 상대의 말을 먼저 인정하고 수긍해 주는 여백을 둘 때 비로소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많이 힘들었겠다.’ 고민을 토로할 때, ‘어떻게 생각하니?’ 결과가 아쉬울 때, ‘그거 하느라 애썼다.’ 의견이 대립할 때,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국민에서 시민으로 대전환이 절실한 때입니다. 시민이란 단순히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거민)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공공의 가치를 세우며 책임지는 ‘자율적 주체’입니다. 주입식 교육은 지시를 따르는 백성을 만들 뿐 참된 시민을 길러내지 못합니다. 일상에서 권위나 여론에 맹종하지 않고 “이것이 공익과 미래에 부합하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훈련을 가정과 학교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코비 브라이언트, 무라카미 하루키, 워런 버핏에게는 공통의 비밀이 있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매일 새벽 4시 훈련을 결코 거르지 않는 압도적인 디테일과 집념의 소유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새벽 일어나 4시간 동안 원고지 20매를 쓰고, 10km를 달리는 기계적인 자기 규율을 살았습니다. 워런 버핏은 하루의 80%를 오직 책을 읽고 생각하는 데 바치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장기적 사유의 소유자였습니다. 위대함의 비밀은 천재적 번뜩임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원칙을 매일 묵묵히 밀고 나가는 ‘지독한 자기 통제와 일상의 루틴’입니다.


황농문 교수는 생각을 늦출수록 탁월해지는 몰입(Slow Thinking)의 의미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생각 늦추기’는 조급증을 버리고 뇌를 이완된 상태로 유지하면서, 하나의 문제에 긴 호흡으로 의식을 집중하는 ‘슬로 싱킹(Slow Thinking)’입니다. 쫓기듯 결론을 내리지 않고 편안한 상태에서 몰입할 때, 뇌의 시냅스가 활성화되어 번뜩이는 영감과 차원 높은 창의적 통찰이 발현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며, 뇌과학적으로 감사는 불안과 결핍을 유발하는 편도체를 안정시키고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지적 명료성을 회복시켜 준다고 합니다. 막연한 감사가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마신 따뜻한 차 한 잔”, “아침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건강” 등 일상의 구체적인 사실 3가지를 매일 밤 기록하며 그 이면의 연결고리를 곱씹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감사함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습관을 안착시켜 보겠습니다.


인간의 진화는 생물학적 육체의 진화에서 멈추지 않고, ‘의식의 진화, 사유의 도약’으로 이어집니다. 집단의 신념이나 도덕률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단계(노예)에서 벗어나, 고유한 자아를 자각하고 문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단계(주인)로 나아가는 정신적 비약이야말로 인간이 완수해야 할 진정한 진화의 여정입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강조하는 성공의 핵심은 ‘자기 반영적 재미(슈필라움·Spielraum)’입니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동은 소진(번아웃)을 낳지만, 내가 진정으로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공간과 행위는 최고의 창의성을 분출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발견하고 일과 놀이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만이 고도의 자율성과 성공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모르면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는 종속자로 살아가지만, 이치를 꿰뚫어 보는 자는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삶의 당당한 주인으로 우뚝 섭니다. 


우리를 불행하게도 행복하게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give and take)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을 찾는 것이 인생의 성찰 과제입니다.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철저히 성찰하며 행동을 조절해야 합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능력과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지혜로운 나침반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만 좋거나 남만 좋은 것이 아닌 양쪽 모두에게 유익한 길을 찾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모두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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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 우리말로 배우는 한자  교육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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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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