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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지구가 보낸 경고장…국가와 교육이 답할 '기후재난'의 골든타임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해마다 지구촌을 강타하는 이상기후는 이제 일시적인 자연현상이 아닌 인류의 일상을 파고드는 복합 재난으로 고착화되었다. 올해만 보더라도 유럽 전역에서는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수만 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미와 아시아 곳곳은 기습적인 집중호우로 도시 전체가 침수되는 비극을 겪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의 장마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며, 예고 없는 국지성 폭우와 폭염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와 UN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를 넘어 '지구 열열화(Global Boiling)' 시대가 왔다"고 경고했듯, 기후재난의 발생 빈도와 피해 범위가 매년 가파르게 확산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기후는 단지 어쩌다 찾아오는 계절적 불운이 아니라 인류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국가적 재난이다. 과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겪는 혹독한 더위와 기습 폭우가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날 중 ‘가장 온화했던 날’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언급했듯 인류는 이미 '기후적 난민'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육현장의 학사 운영 중 폭우나 폭염이 엄습할 때 단축수업이나 휴업을 안내하고 주의를 당부하는 수준의 임시방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감당할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기후위기를 '국가 안보 및 국민 생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이에 발맞추어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의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과 사회가 체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 국가 차원의 '기후적응형 학교 인프라 표준화'와 재정 지원이다. 학교 건물 자체의 단열 성능을 극대화하고 옥상 녹화 및 빗물 저류 시설을 의무화하는 '그린 스마트 건축 기준'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폭염 시에도 학생들이 안전하게 신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듈러형 실내 체육/놀이 공간' 확충을 국가 예산으로 우선 지원해야 한다. 둘째, 체계적인 '기후 데이터 기반 학사운영 예측 시스템' 구축이다. 각 지자체 및 기상청과 연계하여 지역별·학교별 기후 위험도를 실시간 측정하고, 이에 따른 단계별 대응 매뉴얼(체육 수업 전환, 등하교 시간 자율 조정, 온라인 수업 전환 기준 등)이 현장에서 혼선 없이 작동하도록 행정적·법적 근거를 명확히 정비해야 한다. 셋째, 지식 전달을 넘어선 '실천형 기후 안보·생태 교육'으로의 대전환이다. 기후변화 교육을 단순한 환경 과목의 일부가 아니라, 아이들이 생존 역량을 키우고 탄소중립 사회를 이끌어갈 '기후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필수 교육과정으로 재편해야 한다. 학교 내 에너지 소비를 학생들이 직접 측정하고 줄여보는 실천형 프로젝트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중국의 고전 『서경』에는 "사전에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가르침과 함께, "망한 뒤에 도모하면 이미 늦다"는 경고가 전해진다. 교육의 본질은 우리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껏 배우며 미래를 꿈꾸도록 울타리가 되어주는 데 있다. 이상기후라는 엄중한 시대적 경고 앞에서, 국가의 선제적 장기 대책과 교육 현장의 과감한 실천을 통해 국민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든든히 지켜내야 할 때다. ▣ 박진우 ◇ 부산 해빛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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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서울교육청 ‘3·3·3 학교뜰 프로젝트’를 보며, 학교숲 현장에서 드는 기대와 우려
[교육연합신문=김태연 기고]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학교 운동장을 숲과 휴식공간, 체육시설이 공존하는 생태공간으로 바꾸는 '3·3·3 학교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학생 1인당 녹지 3㎡, 교실 창밖으로 나무 3그루가 보이는 환경, 학교당 30㎡ 규모의 나무 그늘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기후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아이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 나무와 그늘, 흙과 생명의 공간을 늘리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숲과 환경교육 현장을 오랫동안 다녀온 사람으로서 반가움과 함께 한 가지 걱정도 든다. ‘이번에는 정말 다를까?’ 학교에 숲을 만드는 사업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5여 년 동안 학교숲, 명상숲, 에코스쿨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학교에 나무를 심고 녹지공간을 만들었다. 적지 않은 예산도 투입됐다. 하지만 조성 이후 학교의 나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는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나무가 제자리를 잡도록 받쳐놓은 지지대를 걷어내기도 전에 줄기에 버섯과 곰팡이가 생겨 결국 잘려나간 나무를 보았다. 곤충이 생긴다 가지가 떨어진다는 민원 등으로 굵은 줄기만 남겨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벚나무도 적지 않다. ‘학교는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낙엽 한 장, 나뭇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내 딱딱한 흙바닥만 남은 학교 정원도 여럿 보았다. 굵은 가지를 한꺼번에 잘라내는 과도한 전지로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쇠약해지고, 결국 나무껍질이 벗겨진 채 고사하고 몇년재 방치된 수십 년 된 나무들도 보았다. 학교 정원과 어렵게 조성한 학교숲의 나무들이 경관적으로나 생태적으로, 또 아이들이 느끼는 정서적 공간으로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만났다. 학교숲에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학교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행정적 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나무는 생태적 가치를 지닌 공간이나 교육의 대상이기 이전에 관리해야 할 ‘시설’로 분류된다. 수목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시설 담당자가 나무 관리까지 맡는 경우가 많고, 결국 예산 범위 안에서 외부 조경업체에 전지를 맡기는 것으로 관리가 끝나기 쉽다. 교사들 역시 나무 관리가 또 하나의 업무가 될까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과도한 전지로 피해를 입은 나무는 바로 죽지 않는다.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쇠약해진다. 시설인 죽은 나무는 처리되는 과정도 오래 걸려 고사한 나무를 학생들이 몇 년 동안 보며 지낸다. 그 사이 교장과 담당자, 관리업체가 바뀌면 당시의 관리가 어떤 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책임은 누구인지 조차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학교숲은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무와 숲,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을 가르친다. 많은 학교가 이러한 교육을 원하고 의뢰한다. 나무가 탄소를 흡수한다고 이야기하고, 생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설명한다. 작은 풀 한 포기와 곤충 한 마리도 생태계를 이루는 소중한 구성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작 그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의 큰 나무는 과도하게 잘려 있고, 그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고사한 나무 밑에서 수업을 하는 상황이 온다. 아이들 앞에서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을 말해야 하나, 누구의 잘못으로 말해야 하나. 생태전환교육은 생태 지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나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나무를 자르고, 아이들에게 생물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학교의 작은 풀과 낙엽은 지저분하다며 모두 치워버린다면 교육과 생활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아이들이 낙엽을 치우고, 떨어진 나뭇가지를 관찰하고, 무더운 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함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노는 일상의 경험이 훌륭한 생태교육이다. 교직원 역시 떨어지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무조건 위험하거나 치워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과 공존의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계절 변화하는 나무를 살피고 관리하며 그 변화를 아이들과 공유하는 일이 학교의 일상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생태전환교육에 가까울 것이다. 이번 '3·3·3 학교뜰 프로젝트'에서 특히 반가운 것은 학교숲 조성 이후 보식 등 유지관리 비용을 지원하고, 학생과 교직원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 한다. 학교숲 조성사업의 성과를 사업이 끝나는 해에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제곱미터의 녹지를 만들었는지, 몇 그루를 심었는지, 예산을 얼마나 집행했는지만으로 학교숲의 성공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5년 뒤, 10년 뒤에도 그 나무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리고 학교와 아이들이 그 공간에서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나무를 심는 예산만큼 관리 체계가 중요하다. 과도한 전지를 막을 수 있는 관리 기준이 필요하고, 시설 담당자와 교직원이 학교 나무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나무에 대한 모든 판단을 외부 조경업체에 맡기는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학교숲을 관리해야 할 ‘시설물’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육공간이자 살아 있는 생태계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서울시교육청의 '3·3·3 학교뜰 프로젝트'가 또 하나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올해 몇 개의 학교숲을 만들었느냐보다 ‘10년 뒤 그 숲이 얼마나 잘 살아 있는지를 자랑할 수 있는 사업’이 되었으면 한다. 학교숲은 심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태연 ◇ 생태환경교육활동연구소 대표 ◇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 교육분과위원장 ◇ 가로수시민연대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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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의 미래 100년, 관광의 중심은 왜 부산진구여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이상헌 기고]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세계적인 해양도시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무역항으로 근대화를 이끌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지켜냈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해안과 국제행사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지금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인구 감소와 지역경제 침체, 청년층의 수도권 유출, 관광객의 특정 지역 편중 등은 부산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제 부산은 단순한 해양관광도시를 넘어 도시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관광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관광산업은 부산의 미래를 견인할 핵심 산업이지만, 현재 관광객의 동선은 해운대·광안리·송정·기장 등 동부산권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관광 소비와 경제적 효과 또한 일부 지역에 편중된다는 의미다. 부산이 글로벌 관광도시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해양관광'과 '도심관광'이라는 두 축을 함께 성장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부산진구가 있다. 부산진구는 단순히 행정구역상의 중심이 아니다. 교통과 상권, 문화와 사람이 모이는 부산의 심장이다. 부산 시민에게 부산의 중심을 묻는다면 대부분은 서면을 떠올린다. 서면은 오랜 시간 부산 최대의 상업·금융·유통 중심지로 성장해 왔으며 지금도 부산의 대표적인 생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서면은 부산 최고의 교통 요충지다. 부산 어디에서든 접근이 용이하며 KTX 부산역, 김해국제공항,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도 30분 안팎이면 도착할 수 있다. 관광의 첫 번째 조건이 접근성이라면 부산진구는 이미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 무엇보다 세계 관광의 흐름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 관광은 단순히 명소를 둘러보는 시대를 넘어 지역의 일상을 경험하는 체류형 관광(Stay Tourism)으로 진화하고 있다. 관광객은 유명 관광지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지역의 음식과 문화, 골목과 사람을 경험하는 여행을 선택하고 있다. ■ 부산을 가장 부산답게 느낄 수 있는 곳 역시 부산진구다. 아침에는 부산시민공원에서 시민들과 함께 산책하고, 점심에는 서면 골목상권에서 부산의 맛을 즐기며, 오후에는 전포카페거리에서 젊은 감성을 경험한다. 저녁에는 송상현광장에서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 밤에는 서면의 공연과 쇼핑, 야간경제를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이처럼 부산진구는 하루를 온전히 머물며 즐길 수 있는 체류형 관광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 부산진구의 가장 큰 경쟁력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압도적인 접근성이다. 부산 어디로 이동하더라도 가장 효율적인 거점이 될 수 있는 교통망은 부산진구만이 가진 강점이다. 둘째는 풍부한 소비 인프라다. 서면은 부산 최대 상권으로 백화점, 쇼핑몰, 숙박시설, 음식점, 공연장, 의료와 문화시설이 밀집해 있다. 관광객이 오래 머물수록 소비는 증가하고 이는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 셋째는 역사와 문화 콘텐츠다. 부산진성, 부산포의 역사, 송상현 장군의 호국정신, 근현대 부산의 성장사를 연결하면 부산진구는 상업도시를 넘어 역사문화관광도시로 발전할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넷째는 부산시민공원이라는 세계적 자산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도시의 상징이 되었듯 부산시민공원 역시 부산을 대표하는 도심관광의 중심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국제음악축제, 야간 미디어아트, 세계음식축제, 문화예술 페스티벌 등을 사계절 운영한다면 부산진구는 연중 관광객이 찾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다섯째는 MICE 산업과의 연계 가능성이다. 부산은 국제회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지만 회의 참석자들이 도심에서 충분히 체류하고 소비하는 구조는 아직 미흡하다. 국제회의와 전시 참가자들이 부산진구에서 숙박하고 쇼핑하며 지역 문화를 경험하도록 연결한다면 관광과 경제 효과는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 부산진구 관광 육성은 특정 지역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오히려 동부산과 원도심, 서부산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부산 전체의 균형발전을 이끌 수 있다. 관광객이 부산진구를 거점으로 부산 전역을 여행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관광 소비는 자연스럽게 부산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다. ■ 세계적인 도시들은 이미 이러한 전략을 실현하고 있다. 뉴욕은 센트럴파크와 타임스스퀘어를 중심으로 도시관광을 활성화했고, 도쿄는 신주쿠와 시부야, 런던은 소호와 코벤트가든, 파리는 마레지구를 중심으로 도시의 일상과 관광을 성공적으로 연결했다. ■ 부산도 이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 부산시민공원에서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열리지 못하는가. ▲왜 서면은 대한민국 최고의 야간관광 명소가 되지 못하는가. ▲왜 전포카페거리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거리로 성장하지 못하는가. ▲왜 부산진구는 부산 관광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가. 문제는 가능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가능성을 하나의 비전으로 연결하는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부산은 선택해야 한다. 해양관광도시라는 현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해양과 도심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도약할 것인가. 부산의 중심은 이미 부산진구다. 이제는 그 중심성을 관광정책으로 완성해야 할 때다. 부산진구를 관광의 중심으로 육성하는 일은 특정 지역을 위한 개발사업이 아니라 부산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미래 전략이며, 부산의 다음 100년을 준비하는 투자이다. 관광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시작되고, 도시는 사람이 머무는 곳에서 성장한다. 부산진구는 사람과 문화, 역사와 미래가 만나는 도시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부산의 중심을 관광의 중심으로 만드는 일. 그 시작은 지금이며, 그 이름은 부산진구다. "부산의 중심, 관광의 중심 – 부산진구" Stay in Busanjin, Feel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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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다
[교육연합신문=박인희 기고] 인공지능(AI)이 글을 쓰고, 자동차가 스스로 달리며, 손안의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의 단절, 세대 간 갈등, 생명의 경시, 공동체 의식의 약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 그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오랜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고전과 인문학이다. 고전은 흔히 오래된 책으로만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고전은 시대에 뒤처진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검증된 지혜의 보고이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깊은 철학이다. 시대는 변해도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교과서다. 『논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를 가르치고, 『맹자』는 의로움을 말하며, 『명심보감』은 삶의 덕목을 일깨운다. 『천자문』은 단순한 한자 학습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 주는 인생의 입문서다. 한 줄의 고사성어에는 수백 년의 역사와 인간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이를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이해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고전은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 필자는 오랜 세월 훈장으로서 한학과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강의하며 한 가지 신념을 지켜 왔다. 고전은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생활 속 인문학이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강의에서도 한자를 암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속 인물과 일화, 문화유산, 풍수지리, 전통문화와 생활철학을 함께 풀어내며 수강생들이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평생학습관과 문화원, 도서관, 복지관, 주민자치센터 등에서 진행하는 「훈장님과 함께하는 인문학, 고전의 향기」 역시 이러한 철학에서 출발했다. '궁즉통(窮則通)'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는 자세를 배우고, 허난설헌과 홍랑의 삶을 통해 인간의 품격과 절개를 돌아보며, 부산의 풍수지리와 세계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다. 또한 천자문과 명심보감이 전하는 교훈을 현대인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함께 나눈다. 오늘날 평생학습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교육을 넘어, 삶을 성찰하고 인격을 성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인문학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며, 고전은 그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특히,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좌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소중한 공간이 된다. 함께 배우고 토론하며 웃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지고, 세대 간의 이해와 존중도 깊어진다. 인문학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이 지역사회를 바꾸며, 결국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교육의 본질은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는 데 있다. 우리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고전을 통해 인성과 품성을 닦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정직과 배려, 효와 예, 책임과 신뢰 같은 가치는 결코 낡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가치가 부족한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은 편리함을 줄 수 있지만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결국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힘은 기술과 인문학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는 AI를 배우는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함께 배워야 한다. 앞으로도 저는 우리 고전과 전통문화의 가치를 보다 쉽고 흥미롭게 전하며, 누구나 인문학을 통해 삶의 품격을 높일 수 있도록 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고전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살아 있는 지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람의 길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그 길은 결국 고전 속에서 다시 만난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들고, 더 품격 있는 내일을 준비하는 일이다. 그 향기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며, 미래 세대에게 이어지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기를 소망한다. ▣ 박인희 ◇ 부산 금정서당 훈장 ◇ (사)한중문자교육협회 연수원장 ◇ 동의대학교 외래교수·부산경호고등학교 한문교사 역임 ◇ 부울경 한문지도사협의회 수석부회장 ◇ (재)한국인성교육지도사협회 지도교수 ◇ 저서: 『엉터리 선비의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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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說] 서이초 3주기, 언제까지 두려운 교실을 방치할 것인가
[교육연합신문=사설]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교사들의 외침과 정치권의 서슬 퍼런 약속이 무색하게도, 교육 현장은 여전히 악성 민원과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라는 깊은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권은 3주기를 맞아 “안심하고 가르칠 학교를 만들겠다”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뿐인 위로가 아니다. 정부와 국회는 교사의 정당한 교육활동을 법과 제도로 완벽히 보호하고, 악성 민원인을 엄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각 수립해야 한다. 이토록 강경한 법적 울타리가 필요한 이유는 교권 추락이 단순히 교사 개인의 직업적 만족도를 넘어, 공교육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서이초 사건 이후 여러 법안이 마련되었다고는 하나, 현장의 교사들은 여전히 악성 민원인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교단에 서고 있다. 교사가 위축된 교실에서 정상적인 생활지도와 훈육은 불가능하다. 결국 교권의 상실은 다수 학생의 학습권 침해와 교실 붕괴라는 부메랑이 되어 교육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 교사를 지키는 것이 곧 아이들의 안전한 배움터를 지키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교권 보호 조치를 과도하게 강화할 경우, 학생인권조례의 취지가 위축되거나 정당한 학생의 인권 및 학부모의 감시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혹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일부 교사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학생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교권과 학생인권을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만 바라보는 협소한 시각에서 비롯된 오류다. 교권을 확립하자는 것은 학생의 인권을 억누르자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고 악의적인 허위 신고와 감정적 보복성 민원으로부터 교사의 생존권을 지키자는 최소한의 방어벽 마련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정상적인 교육 지도마저 아동학대로 둔갑시키는 구조적 허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정당한 학부모의 권리를 넘어선 갑질을 방치하는 꼴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권과 교육 당국은 더 이상 눈치 보기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교사가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단호하게 가르칠 수 없을 때, 교육의 미래는 없다. 무분별한 신고에 대해 교사에게 무조건적인 직위해제 처분을 내리는 악습을 완전히 뿌리 뽑고, 악성 민원에 대해서는 기관 차원의 강력한 법적 대응 체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서이초 3주기인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엄중히 요구한다. 말로만 외치는 안심 학교 대신, 교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가차 없고 강력한 제도적 철책을 지금 당장 구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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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독한 열정이 빚어낸, 두 번째 인생의 선율
[교육연합신문=정현도 기고] “인생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음악은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가장 따뜻한 동반자입니다. 때로는 삶이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다음 길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색소폰의 한 음 한 음은 그 흐름을 다시 이어주는 작은 숨결이 되고, 잊고 있던 설렘과 용기를 다시 깨워줍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 믿습니다.” 지난 2012년, 우리는 조용히 모였다. 교단을 떠난 뒤 찾아온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낯설었다. 수십 년을 아이들과 함께 숨 쉬며 살아온 날들이었기에, 그 공백은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마음 한 켠의 빈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색소폰이었다.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는 일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처음은 쉽지 않았다. 소리는 흔들렸고, 호흡은 짧았으며,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색소폰은 거짓이 없다. 숨결이 닿는 만큼만 소리가 나고, 삶을 살아온 깊이만큼만 울린다. 그래서 우리는 연주를 배우며, 어쩌면 다시 ‘나 자신’을 배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모임은 조금씩 달라졌다. 교육계 퇴직자들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일반인들도 함께하고 있다. 직업도, 나이도, 살아온 길도 다르지만 색소폰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선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우리는 어느새 하나의 따뜻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기호 선배 교장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교단을 떠났지만 배움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 지금의 도전은 늦은 시작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색소폰의 한 음 한 음이 우리의 지난 시간을 품고, 또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길 바랍니다. 함께하는 이 시간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 말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머물렀다. 인생의 후반기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음이 제대로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작은 성취는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함께 연주하며 서로의 숨결을 맞추는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작은 공연이 끝난 뒤였다. 한 관객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저도… 지금 시작해도 될까요?” 우리는 미소로 답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인생에는 늦은 시작이 없다. 다만,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을 뿐이다. 고독 속에서 시작된 우리의 열정은 이제 서로를 지지하는 힘이 되었고,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길을 여는 작은 불빛이 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색소폰을 든다. 남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연주하기’ 위해서다. ▣ 정현도 ◇ 고독과 열정 동호회 원장 ◇ 前부산대연고등학교 교장 ◇ 前용호1동 주민자치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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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사회의 불편함과 문제점의 해결은?
-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자] 얼마 전 초등학교 5, 6학년 대상으로 북두칠성과 관련된 한자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문자를 만든 사람들이 북두칠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라는 주제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해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동쪽에서 떠오른 다음 천천히 하늘길을 걸어 서산으로 지는데,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일정한 주기(週期)를 반복하였으므로 모두가 해를 의지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해가 없는 밤이 되자 추위와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방향도 모르고 시간도 알 수가 없으니 밝은 밤은 온통 두려움이었습니다. 매일 밤 불안한 마음으로 어둠 속 하늘을 응시하던 고대인들에게 언뜻 커다란 국자 모양의 별 무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밤이면 북쪽 하늘에 위용을 자랑하며 등장하는 일곱 개의 별 무리를 이들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 불렀습니다. 북쪽 하늘에 보이는 일곱 개의 별 무리로 이루어진 두(斗)성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낮엔 해, 밤엔 북두칠성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이 장독대에서 정한수(井華水의 비표준어) 떠 놓고 비는 모습 등 우리 한겨레의 관습과 가치관이 변화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으로 고대인들의 사물을 보는 관점을 유추하게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한자를 알아가는 수업이었는데, 해가 지고 난 후 온통 세상을 덮는 칠흑 같은 어둠에 대한 감각을 아이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초적인 어둠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둠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수업이었습니다. 저도 밝음과 어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으며, 우리 조상들의 상대적인 것에 대한 의미는 결국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라는 중요한 가치관을 알아가는 수업이었습니다. 저의 경우 ‘우리말로 배우는 한자’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제야 철이 들고 세상을 이치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는데 좋은 배움은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바꾸어줍니다. 아이들에게도 지식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세워가고 발전시키는 귀한 배움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삶을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아이들과 우리말을 풀어가는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생각하는 힘’과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유치원 수업부터 교사의 일방적인 지시와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수업에서 이제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수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지도 교사의 자세와 태도의 변화가 시급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기 전의 상태는 오롯이 원초적인 어둠 곧 ‘암전(暗電)’의 상태여야 합니다. 대상에 대한 감각도, 문제의식조차 아직 싹트지 않은 순수한 시간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 무지의 상태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의식이 눈을 뜨기 직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득 자신의 비어 있음을 직면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무지(無知)’의 발견입니다. 이 순간 이미 암전 상태는 끝난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수한 상태에 도달할 때, 마음은 비로소 한없이 맑은 백지가 됩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71장에서 이를 두고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으뜸이요,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라고 말합니다. 나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솔직한 인정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배움의 출발선입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가장 위태로운 지점은 완전한 어둠 속이 아닌, ‘어슴푸레한 빛’ 속에 머물 때 찾아옵니다. 윤곽만 겨우 보이는 모호한 빛 아래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 믿는 상태, 즉 자신이 아는 것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단계입니다. 이 경계에 선 사람들의 발걸음은 결국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살피고 인정하고 거듭 노력해서 모르는 영역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설픈 확신에 기대어 스스로 만든 우물이나 동굴 속에 갇힐 것인가? 우리 사회의 선동, 혐오, 시기는 거의 모두가 기준이 없는, 혹은 기준을 제대로 가르치는 않는, 더 나아가 기준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무지와 행태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과 그보다 26세나 어렸던 고봉(高峰) 기대승이 나누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지적 겸손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생각해 봅니다. 당대 최고 학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던 대 유학자 퇴계는,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한 젊은 신진 학자 기대승이 자신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것을 어설픈 오만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퇴계는 기대승에게 보낸 답신에서 오히려 “그대의 지적을 듣고 보니 나의 생각이 닿지 못한 곳이 많았다.”며 기꺼이 자신의 글을 수정하고 다듬었습니다. 편지는 수년간 이어졌고, 퇴계는 20대 후반의 젊은 학자를 ‘주자학의 정수를 함께 논하는 동반자’로 대하며 평생 배움의 자세를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배움을 대하고 있을까요? 미디어가 쏟아내는 수많은 요약 정보와 단편적인 지식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내가 손에 쥔 몇 줄의 지식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할 때 배움의 문은 닫히고 맙니다. 동양의 오랜 고사 중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배움이 왜 한순간의 완성이나 단편적 지식의 습득이 아닌 ‘평생의 습관’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공자는 인생의 후반기에도 죽간(竹簡)를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공자(孔子)는 『논어』「술이편」에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탐구하는 사람일 뿐이다(吾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며 스스로의 한계를 낮추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승이라 추앙받으면서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라는 교만을 내던지고, 평생 끊임없이 읽고 익히며 성찰하는 습관을 유지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새로 쌓기 위함이 아니라, 앎이 깊어질수록 드러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채우고 다듬어가는 과정이 바로 배움입니다. 진짜 아는 사람은 자신의 앎을 드러내어 타인을 압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습관이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몸에 익히기까지 어려운 습관입니다. “칸트가 나타났다, 지금은 3시 30분이다.” 칸트는 매일 오후 3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회색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든 채 산책을 나섰습니다. Königsberg(쾨니히스베르크)의 주민들은 그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지금이 3시 30분이구나.” 하며 자신들의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평생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고 합니다. 칸트가 이 규칙적인 산책을 딱 한 번 거른 적이 있는데, 장 자크 루소의 소설 《에밀》을 읽다가 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산책 시간을 놓쳤을 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칸트는 철학적 사색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상생활까지도 엄격한 규칙과 시간표에 맞춰 통제했던 철저한 인물이었습니다. 프로 야구 선수들도 자기 자세를 갖기 위해 실험과 기록으로 필사적으로 자신의 루틴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치 계절의 무게와 햇살의 기운을 받아 속을 채운 벼가 가을날의 들판에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듯, 앎이 깊어질수록 성찰의 무게로 스스로를 낮추게 됩니다. 앎의 끝에 도달할수록 세상의 무한함과 자신의 미미함을 비로소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익은 지혜는 소란스럽지 않으며, 상대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그윽한 향을 지닙니다. 冊(책 책)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서 인생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책’입니다. 즉 부족한 점을 생각하고.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채우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부터 책을 펴면서 ‘무엇을 채울까?’하고 자신에게 묻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함께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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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사회의 불편함과 문제점의 해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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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신입생 0명'의 역설, 소규모 작은 학교를 '미래형 혁신 배움터'로
-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대도시 부산의 동쪽 끝자락, 푸른 바다를 품은 기장군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노라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당장 학구내의 내년도 취학 대상 아동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서글픈 현실에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강원도 두메산골이나 낙도의 외딴 섬마을 이야기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에서도 매년 수십 개의 초등학교 학급이 줄어들며, 도농 복합 지역과 원도심을 중심으로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학교'가 속출하고 있다. 실제로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추계 통계를 살펴보면 인구 절벽의 경사는 아찔할 정도다. 2023년 40만 명 선을 간신히 유지하던 전국 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 수는 2024년 35만여 명으로 급감하더니, 급기야 20만 명대 후반까지 내려앉으며 30만 명 선마저 무너졌다. 부산의 사정도 결코 다르지 않다. 부산 시내 전체 300여 개 초등학교 중 신입생이 20명 미만인 학교가 40여 곳을 훌쩍 넘어 전체의 약 14%에 달하며, 이 중 10명도 채 되지 않는 초미니 학교만 20여 곳에 이른다. 기장군과 강서구 같은 도농 복합 지역은 물론, 영도구와 중·서구 등 원도심에 이르기까지 한 학급조차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학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충격파 앞에서 제시되는 대응책은 여전히 학생 수 기준에 얽매인 통폐합과 휴·폐교 등 구조조정 중심의 양적 접근에 머무르고 있어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학교는 통계표 위의 숫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지역사회의 구심점이다. 농어촌과 원도심에서 학교가 문을 닫는 순간 젊은 층의 유입은 원천 차단되고 마을 공동체는 급속히 붕괴한다. 재정 효율성만을 앞세워 교문을 걸어 잠그는 조치는 결국 지역 소멸을 재촉하는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될 수 있다. 위기의 작은 학교를 살리고 지역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는 관성적인 통폐합 유도가 아닌 발상 전환적인 정책적 결단이 요구된다. 우선, 주소 이전 없이도 도심에서 전·입학할 수 있는 '광역 자유통학구역'과 '도시형 교육유학제'의 전면 도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도심 과밀학급의 갑갑한 교실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적지 않다. 주소지 제한의 빗장을 과감히 풀고 교육청 차원의 거점 통학버스를 적극 지원한다면, 천혜의 자연환경과 쾌적한 공간을 갖춘 소규모 학교는 도심 학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대안 배움터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국제공인 교육과정인 'IB(국제 바칼로레아) PYP'나 '해양·생태 몰입형 특색 프로그램'의 선제적 유치가 필요하다. 획일적인 교육과정 대신 질문과 탐구, 생태 체험 중심의 차별화된 브랜드를 입혀야 한다. 실제로 특색 있는 교육 모델을 도입한 소규모 학교에 도심 학부모들이 아이를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역유입 현상'은 이미 여러 지역에서 증명된 바 있다. 나아가 인근 소규모 학교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캠퍼스형 공유 학교(Co-learning Campus)'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일상적인 교과 학습은 소인수 학급의 장점을 살려 1:1 맞춤형으로 진행하되, 체육대회나 음악 합주, 체험학습 등 또래 관계 형성이 필요한 영역은 인근 학교들이 연대하여 공동 교육과정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부모들이 가장 염려하는 사회성 결핍 우려를 해소하면서도 작은 학교의 고유한 생명력을 지켜낼 수 있다. 흔히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역으로 그 마을의 숨결을 이어가는 마지막 심장은 바로 학교다. 학교가 사라진 자리에 공동체가 존속할 수는 없으며, 획일적인 효율성의 잣대로 작은 학교들을 지워버린다면 우리 교육의 미래 또한 메말라갈 수밖에 없다. 신입생 0명이라는 엄중한 경고음 앞에서, 교육당국과 지자체가 '작은 학교의 미래학교 전환'이라는 담대한 상생의 정책 결단에 적극 나서길 기대한다. ▣ 박진우 ◇ 교육학 박사 ◇ 부산 칠암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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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신입생 0명'의 역설, 소규모 작은 학교를 '미래형 혁신 배움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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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100% 내 능력이라는 오만과 착각을 넘어야 합니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현대 사회는 성공을 오롯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로 환원하는 능력주의의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 지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가 100% 나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오만이자 착각입니다. 내가 딛고 선 문명의 터전, 수많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조력, 우주 자연의 은혜가 결합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의 삶도 온전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삶의 겸손을 회복하고, 주체적 사유로 문명을 이끌어가기 위한 성찰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에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타자 및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몸과 마음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동적인 생명 활동입니다. 안다는 것(지식)은 머릿속에 정보와 활자를 쌓아두는 관념적 박제가 아니라, 앎이 곧 나의 신체적 습속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행(行)과의 일치’를 뜻합니다. 진정한 앎은 삶의 번뇌를 털어내고 매일 자기를 갱신하는 실천입니다. 결국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일치입니다. AI가 답을 쏟아내는 시대에 지식의 양은 경쟁력이 되지 못합니다. 김월회 교수가 강조하는 ‘묻는 힘’은 이미 주어진 전제와 통념에 “과연 그러한가?”라고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적 문제 제기 능력입니다. 고전은 정답을 암기하는 책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시대를 향해 던졌던 치열한 물음의 궤적이기에 고전을 통해 우리는 질문을 설계하는 힘을 배워야 합니다. AI 시대에서 실력은 고전에서 길어 올리는 ‘묻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 도덕, 이념을 맹목적으로 받들어 수행하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생각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기성의 정답을 버리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구체적 문제를 내 눈으로 직시하며 스스로 질문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최진석 교수는 말합니다.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으로’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남긴 궁극의 삶의 기술은 ‘자신의 시대적 결핍과 한계를 역이용하는 유연성’입니다. 상황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역경 속에서 고유한 사유를 구축한 인물들의 태도, 즉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맥락에 맞게 원칙과 타협을 조화시켰던 실천적 지혜(시중·時中)를 익히는 것이라고 김월회 교수는 역설합니다. 또한 고미숙 평론가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을 외부의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에서 찾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배움과 수양을 통해 무지(無明)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 자체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고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요. 워런 버핏의 평생 동반자인 찰리 멍거는 무작정 바쁘게 일하는 근면성을 경계했습니다. 그가 매일 긴 시간 독서와 사유를 우선순위에 둔 핵심은 ‘다학제적 격자틀 정신 모델(Mental Models)’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적 여백을 가져야만 어리석은 결정을 피하고 구조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찰리 멍거는 부자가 먼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핵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첫 장 전체를 부모, 스승, 조상들에게 배운 덕목과 감사를 나열하는 데 바쳤습니다. 황제의 지위와 지혜조차 우주의 섭리와 수많은 인연의 합작품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라고 믿는 지능과 환경조차 거저 주어진 것임을 인정할 때, 타인에 대한 오만을 버리고 겸허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00% 내 능력이 아니다.”라는 통찰이 절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은 조건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입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라.” 외부의 보상이나 처벌이 아닌, 내면의 도덕 법칙에 따르는 자율성이 흔들리지 않는 삶의 뼈대입니다. 칸트의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 ‘정언명령’을 자신의 ‘고삐’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서 김월회 교수는 “사기열전은 최초이자 최고이다.”라고 한 의미를 음미해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위대한 이유는 제왕과 승자 중심의 역사를 뒤엎고, ‘신념을 지키며 치열하게 고뇌했던 패자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실존’을 역사의 중심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박제된 윤리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성과 모순을 가장 입체적으로 포착한 인간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월회 교수가 말한 2,200년간 겉과 속이 달랐던 중국의 ‘외유내법(外儒內法)’을 간파해야 합니다.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 본질은 겉으로는 인의와 도덕을 내세우는 유가(儒家)의 가면을 썼지만, 실제 권력 운용에서는 가혹한 상벌과 군주 독재를 추구하는 법가(法家)의 통제술을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이 이중적 구조(외유내법)를 꿰뚫어 보아야만 동양 정치사의 권력 메커니즘과 그 한계를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읽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이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입신양명이나 스펙을 쌓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닙니다. 내가 갇혀 있는 좁은 에고(자아), 화폐와 소비 중심의 현대적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타인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공부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고미숙 평론가는 공부의 목적을 ‘탈주(脫走)와 순환’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의 패를 성급하게 다 보여주는 사람은 타인의 쉬운 먹잇감이 되거나 통제당하기 쉽다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말합니다. 속마음을 감추라는 것은 비열한 기만이 아니라, ‘상대의 예측 가능성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유지하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 자기 보호와 절제의 처세술’이라고 말입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마라.’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고미숙 평론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참뜻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독선적인 고립이나 은둔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중의 헛된 유행, 집단의 광기, 타인의 인정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도덕성과 진리의 길을 확신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단단한 내적 독립성’을 의미합니다. 강인함과 단단함이 지혜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리더의 자질과 선택 기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어떤 리더인가? 과거를 파헤치는 리더가 아니라 ‘미래의 어젠다를 제시하는 리더’, 편을 갈라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높은 도덕적 덕(德)을 구현하는 리더’를 뽑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시민이 절대 필요합니다. 자신의 이념에 취한 자가 아니라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국가의 생존 전략을 설계할 줄 아는 통찰력을 지닌 자가 참된 리더입니다. 인생을 가르는 ‘단 하나의 태도’에 대해서 구범준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을 던지고 연결하는 실행력’을 말합니다. 주어진 현실에 불평만 하며 머무는 사람과, “왜 그럴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사람과 지식을 연결해 현장에서 작은 실험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의 차이가 인생의 격차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전 로이터 통신 임원이자 전략가인 투리 문테(Turi Munthe)는 정보의 진위보다 ‘사유의 정당화 과정’을 묻습니다. “네 생각의 전제는 무엇인가? 어떤 근거로 그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을 통해, 감정적 확증편향과 가짜 뉴스의 늪을 걷어내고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품격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고의 품격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대적 경고를 날립니다. 대한민국은 중진국 추격자의 끝에 서서, ‘생각을 수입하는 나라에서 생각을 생산하는 선진 전략 국가로 넘어가느냐, 아니면 모방의 한계에 부딪혀 과거로 추락하느냐’의 거대한 문명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스로 철학하지 않는 민족에게 다음 단계의 번영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공자는 당당하게 사는 3가지 지혜를 말합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입니다. 특정 용도로 굳어진 그릇처럼 남이 규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유연성을 유지하라. 둘째 화이부동(和而不同), 남과 조화를 이루되 맹목적으로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 주체성을 지켜라. 마지막으로 내성불구(內省不疚),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세상의 어떤 비난과 궁핍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염원을 최진석 교수가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원한과 낡은 역사적 프레임에 갇혀 내부 총질을 일삼는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이 만든 정답을 모방하던 ‘전술 국가’를 넘어, 인류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스스로 개념을 던지고 판을 짜는 ‘전략국가의 아키텍트(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내가 이룬 것은 세상의 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오만을 걷어내는 출발점입니다. 당연함이라는 안이함을 버리고 매 순간 겸손함으로 세상을 응시할 때, 타인의 생각에 기생하는 노예의 삶을 끝내고 문명의 주인, 미래 설계자로 당당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 우리말로 배우는 한자 교육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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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100% 내 능력이라는 오만과 착각을 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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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을 세계에 알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민간외교관’이라 부른다
- [교육연합신문=이상헌 기고] 광안대교의 야경, 해운대의 푸른 바다, 감천문화마을의 알록달록한 풍경, 자갈치시장의 활기, 국제시장의 정겨운 골목, 돼지국밥 한 그릇의 따뜻한 맛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부산을 떠난 뒤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어쩌면 풍경이나 음식이 아니라 ‘부산에서 만난 사람’일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부산 곳곳을 함께 걸으며 역사와 문화, 음식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관광통역사는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관광통역사는 단순히 외국어를 우리말로, 우리말을 외국어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부산을 설명하고 해석하며, 때로는 문화적 오해를 풀어주고 부산 사람들의 마음까지 외국인 관광객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관광통역사를 부산 관광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민간외교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관광통역사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만날 때 영어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Hi, I’m Jason. Welcome to Busan.”이 짧은 인사가 관광객에게는 부산과의 첫 만남이 된다. 그 순간부터 관광통역사는 단순한 안내자가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관광객이 질문하면 부산을 설명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궁금해하면 이해하기 쉽게 풀어줘야 한다. 낯선 음식과 예절, 문화적 차이까지 자연스럽게 설명해야 한다. 관광통역사의 말 한마디와 표정, 태도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곧 ‘부산의 이미지’가 될 수 있는 이유다. 관광통역사는 ‘번역기’가 아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번역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상당 부분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광통역사의 역할은 줄어드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한다. 기계는 문장을 번역할 수 있지만 도시가 지닌 역사와 문화, 정서와 맥락까지 온전히 번역하기는 어렵다. 외국인에게 돼지국밥을 “Pork soup with rice”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왜 부산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식인지, 부산의 근현대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까지 이야기한다면 관광객이 받아들이는 깊이는 달라진다. 관광통역사는 단어를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와 맥락을 번역하는 사람이다. 광안대교 역시 마찬가지다. “It is a beautiful bridge.” 이 한 문장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좋은 관광통역사는 부산의 바다와 도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왜 광안리의 밤이 부산을 대표하는 풍경이 되었는지까지 이야기한다. 그 순간 관광은 단순한 ‘구경’에서 ‘이해’로 바뀐다. 관광객에게 부산은 ‘도시’가 아니라 ‘경험’이다 관광객은 부산을 평가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부산을 경험하기 위해 온다. 그리고 그 경험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관광통역사가 웃으며 “Let me show you the real Busan”이라고 말하는 순간, 부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들려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해운대에서는 바다를 이야기하고, 광안리에서는 부산의 밤을 이야기한다. 감천문화마을에서는 부산의 역사와 도시재생을, 자갈치시장에서는 부산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설명한다. 관광객이 낯선 음식을 바라보며 “What is this?”라고 묻는다면 관광통역사는 음식 이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이런 순간에 관광통역사의 가치가 생긴다. 한 명의 관광객이 부산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부산 이야기를 한다.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리고 “Busan was amazing!”이라고 말한다. 그 기억 속에는 부산의 풍경뿐 아니라 자신을 안내했던 사람의 친절과 설명, 도움도 함께 남아 있다.결국 한 관광객의 부산 경험은 또 다른 수십 명, 수백 명에게 전해질 수 있다. 이것이 관광통역사가 가진 민간외교의 힘이다. 외교관이 국가와 국가를 연결한다면 관광통역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이고 직접적이다. 부산 관광 경쟁력은 결국 ‘사람’이다 좋은 관광도시에는 호텔과 교통, 매력적인 관광콘텐츠와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설만으로 좋은 관광도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친절이 도시 전체를 따뜻하게 기억하게 만들고, 작은 불친절 하나가 도시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그래서 관광통역사는 부산 관같은 장소라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관광객의 경험은 달라진다. “이곳은 ○○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과 “Imagine you are standing here 70 years ago…”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관광통역사는 이제 정보 전달자를 넘어 이야기 전달자로 진화해야 한다. 부산을 세계에 알리는 방법은 많다. 국제행사와 광고, SNS, 유튜브, K-콘텐츠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관광객이 부산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만남이 부산에 대한 기억을 만든다. 이름은 서로 달라도 그들이 관광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하나일 것이다. “Welcome to Busan.”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Let me show you why Busan is special.” 광안대교가 부산의 밤을 세계에 보여준다면, 관광통역사는 부산의 마음을 세계에 보여준다. 부산 관광의 가장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는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늘도 부산 어느 거리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향해 웃으며 인사하는 관광통역사가 있다. 그들이 바로 부산과 세계를 연결하는 ‘사람의 다리’, 부산의 민간외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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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을 세계에 알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민간외교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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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답을 베껴 적는 손으로는 결코 새로운 문명의 지도를 그릴 수 없습니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간에게 ‘생각’이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유하지 않는 존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타인이 만든 시스템과 정답의 부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수입해 모방하던 ‘전술 국가’의 성장은 이제 명백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모방의 시대를 끝내고,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전략 국가’이자 사유하는 사회로 대전환하기 위한 본질적 화두를 시작합니다. 생각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교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의성, 상상력 등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왜, 방법은 그대로일까요? 교육자들 역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잘 알고 있으나 현장이 요지부동인 이유는 교육 내부가 아닌 외적 평가 시스템의 거대한 관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평가의 편리성과 줄 세우기 입시 때문도 한몫합니다. 수십만 명의 학생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서열화해야 하는 대입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는 객관식 시험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또한 오답에 대한 사회적 공포도 있습니다. 질문과 사유는 본질적으로 방황과 실패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오답이 인생의 낙오로 이어지는 서열 사회의 공포가 교사와 학생 모두를 “안전하게 정답만 외우는 수동성”에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입된 지식을 넘어 ‘생각하는 교실’을 만드는 근본 처방은 없는 것일까요? 남의 전략을 수입해 쓰는 종속적 삶을 독립적 삶으로 바꾸려면, 교실의 문법 자체를 ‘정답 확인’에서 ‘문제 발견’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합니다. 교사의 역할 전환이 필요합니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자에서 학생의 사유를 자극하는 ‘질문 촉진자(Facilitator)’로 물러서야 합니다. 수업의 평가를 “선생님의 설명을 얼마나 정확히 적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독창적이고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는가?”,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는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한 참된 학문은 남의 시선에 맞추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소명 확인이 먼저입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가?”, “죽기 전 세상에 남길 나의 과업은 무엇인가?”를 규정하지 못한 채 기술만 익힌 인재는 결코 문명의 개념 설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명 건설의 설계도는 타인이 아닌 ‘나’를 깊이 응시할 때 비로소 그려집니다. 미국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하크네스 테이블(Harkness Table)’의 사례입니다. 교탁을 없애고 12명의 학생과 교사가 타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교사의 강의 없이 오직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으로만 50분 수업을 채웁니다. 교사는 발언권도 통제하지 않으며 오직 학생 간의 사유 연결만을 관찰합니다. 유대인의 ‘하브루타(Chavrusa)’도 참고할 만합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에게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파헤칩니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배움을 포기한 것”이라는 인식이 교실의 기본 규범으로 작동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경쟁과 불안입니다. 자연과 문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경쟁과 불안은 회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조건입니다. 경쟁과 불안은 좋고 나쁨 이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이 아닌, 주체적 성장의 동력으로 이를 전환하는 태도입니다. 불안과 경쟁에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할 것인가가 우선돼야 합니다. ‘부쟁(不爭)’과 ‘위기(爲己)’에 대해서 노자는 말합니다. “스스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고 했습니다. 타인과의 비교 경쟁(외적 투쟁)을 멈추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덕(德)을 닦는 내면의 성장에 집중할 때 불안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스토아학파의 ‘통제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에서 에픽테토스는 세상사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나의 생각, 판단, 행동)’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타인의 평가, 결과, 사회적 경쟁)’으로 나누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경쟁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의 내면적 태도에만 집중할 때 절대적인 평정심(아타락시아)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즉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경쟁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Its True. Asians Cannot Think.”, 1999년 미국 타임지의 기사는 서구의 문화적 편견을 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답 암기에는 능하나 원천 개념 설계와 비판적 사유에 취약했던 동아시아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정곡으로 찔렀습니다. 외국에서는 생각하는 학생을 기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수업을 실행합니다. 프랑스의 철학 수업(바칼로레아)에서는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가?”, “자유는 포기될 수 있는가?”와 같은 열린 질문을 두고 1년간 논리적 에세이 작성과 반박 토론을 훈련합니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기반 정치·사회 수업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특정한 정치적 결론을 주입해서는 안 되며(주입 금지), 실제 사회의 논쟁 상태를 교실에 그대로 재현하여(논쟁성 유지) 학생 스스로 입장을 세우게 합니다. 영국·미국의 P4C(Philosophy for Children, 어린이를 위한 철학)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그림책을 읽고 “공평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같은 철학적 질문을 아이들이 직접 투표로 선정해 토론 서클을 엽니다. 핀란드의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에서는 교과서를 덮고 ‘우리 마을의 쓰레기 배출 문제’, ‘인공지능의 윤리’ 등 현실의 복합 현상을 주제로 잡아 학생들이 가설을 세우고 해법을 탐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미래를 여는 방향보다는 과거 회귀, 즉 우리 사회의 담론이 끊임없이 과거사 논쟁과 원죄 찾기로 회귀하는 이유는, 교실에서 “이미 확정된 과거의 정답을 외우는 훈련”만 반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기획하는 사유를 배운 적이 없으니 논쟁조차 과거로 향합니다. ‘과거 몰두’와 복고적 함정을 끊어내는 방법은 있는 것일까요?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방점 이동입니다. 과거의 사실을 ’정답‘으로 숭배하는 복고주의를 버리고, 과거를 단지 미래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참조 데이터’로 상대화해야 합니다. 역사 및 사회 수업의 평가를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단답형에서, “당시의 결정을 오늘날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10년 뒤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미래 기획형 과제로 전면 교체해야 합니다. “세상엔 당연함이 없다.”는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기대가 깨질 때 인간은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세상이 나의 기대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물정관(萬物靜觀)과 연기(緣起)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내가 숨 쉬는 공기, 매일 먹는 밥 한 그릇도 수많은 자연의 운행과 타인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연결되어 도달한 기적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의 연결고리를 역 추적해 보는 격물(格物)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리는 이 일상이 타인의 어떤 수고와 자연의 어떤 순환 덕분인가?”를 매일 저녁 자문하는 ‘감사 성찰’이 자리 잡을 때, 분노는 사라지고 깊은 겸손이 싹틉니다.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빈말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나와 다시 내 귀를 거쳐 영혼의 밭에 떨어지는 가장 강력한 씨앗입니다. 아이들의 거친 혐오 언어를 바로잡기 위한 외국의 실천 사례입니다. 미국의 SEL(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사회정서학습)에서는 분노나 혐오 표현을 무조건 처벌하지 않고, 그 언어 이면에 숨은 감정(외로움, 수치심, 불안)을 스스로 관찰하게 합니다. “짜증 나”, “극혐이야” 대신 “지금 내 의견이 존중받지 못해 속상해”처럼 사실과 감정을 정밀하게 분리해 말하는 ‘비폭력 대화(NVC)’를 정규 교과로 훈련합니다. 정답을 베껴 적는 손으로는 결코 새로운 문명의 지도를 그릴 수 없습니다. 대답에 익숙했던 교실의 문을 열고, 아이들의 가슴속에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자유와 여백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질문이 살아 숨 쉬고 언어의 품격이 회복되는 교실, 그곳이 바로 닫혀 있던 대한민국이 비로소 참된 생각을 시작하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한자를 ‘하늘 천’, ‘따 지’식으로 무조건 외우지 말고 ‘하늘을 왜 천이라 할까?’, ‘땅을 왜 지라고 할까?’라는 식으로 물어야 합니다. 한자를 이렇게 보는 순간, 한자는 음을 중심으로 엄정한 체계와 질서를 드러내게 됩니다. 한자 속에 한글이 녹아 있고, 한글을 알아야 한자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를 쓰지 않으면 우리말인 한글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자와 한글을 분리해서 봐서는 문자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자와 한글이 만나야 우리말의 뜻을 다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문해력 신장과 기초학력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한자 교육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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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답을 베껴 적는 손으로는 결코 새로운 문명의 지도를 그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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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AI 시대, 다시 ‘읽는 학생’을 생각하다
- [교육연합신문=신동현 칼럼] AI가 질문에 답하고 숏폼 영상이 몇십 초 만에 정보를 요약해 주는 시대다. 필요한 정보를 찾는 일은 쉬워졌지만, 정보의 진위를 판단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비교하며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능력은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AI 시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 활동이 아니라 긴 글의 맥락을 따라가고, 멈추어 질문하며,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고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독서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학생의 종합 독서율은 94.6%로 높은 편이지만 연간 평균 독서량은 2023년 36.0권에서 2025년 31.5권으로 줄었고, 평일 하루 평균 독서시간도 82.6분에서 70.3분으로 감소했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학교급별 격차다. 초등학생의 연간 독서량은 63.5권이지만 중학생은 18.9권, 고등학생은 13.7권으로 급감한다. 학교교육을 오래 받을수록 오히려 책과 멀어지는 현실은 우리 독서교육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 교육부가 지난 7월에 발표한 '학교 독서교육 활성화 방안'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학생을 주도적 독자로 성장시킨다’는 목표 아래 독서교육 집중학년 운영, 교과 연계 독서프로그램 발굴, 수업 중심 독서교육 선도학교 운영, 독서·토론·글쓰기 동아리 지원, ‘매일 아침 10분 함께 책 읽기’ 확산 등을 제시했다. 읽기를 질문·토론·글쓰기·탐구와 연결하려는 방향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이 강조하는 깊이 있는 학습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독서교육 사업이 늘어나면 학생들은 정말 책을 더 읽게 될까? 학교 현장에서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좋은 취지만이 아니라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이다. 좋은 정책도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또 하나의 공모사업과 운영계획서, 실적 관리와 결과보고서가 된다면 독서교육의 본질과 멀어질 수 있다. 독서는 특정 사업이 있을 때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 학생의 일상이어야 한다. 프로그램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하루 속에 실제로 책을 펼칠 시간이 존재하는가이다. 따라서 독서교육 정책의 무게중심을 이제 ‘무엇을 더 할 것인가’에서 ‘학생에게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로 옮겨야 한다. 가장 먼저 돌려주어야 할 것은 읽을 시간이다.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학생들이 학교에 바라는 독서 지원으로 ‘수준에 맞는 책 소개’를 가장 많이 꼽았고 학교도서관 이용 편의성, 학급문고 확대, 독서시간 확대 등이 뒤를 이었다.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거창한 독서행사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만나고 방해받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일상의 조건이 먼저다. 독서를 다시 ‘수업의 방법’으로 돌려놓는 것도 중요하다. 독서교육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분리하면 독서는 교과학습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활동이 되기 쉽다. 사회에서는 읽기를 통해 사회현상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하고, 과학에서는 기존의 설명에 의문을 품으며 새로운 탐구 질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에서도 작품과 텍스트를 연결하며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다. ‘읽기-질문하기-토론하기-탐구하기-표현하기’가 교과를 가로지르는 자연스러운 학습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독서교육의 성과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몇 권을 읽었는지, 몇 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지만으로 학생의 성장을 설명하기 어렵다. 읽은 것을 바탕으로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가, 어떤 질문을 만들어 냈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만나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확장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독서량에서 독서의 질로, 참여 실적에서 사고의 성장으로 평가의 관점을 옮겨야 한다. 학교도서관 역시 책을 대출하는 장소를 넘어 학생이 머물며 읽고, 관심을 발견하고, 생각을 나누는 학교의 지적·문화적 중심이 되어야 한다. 좋은 공간과 충분한 장서뿐 아니라 학생과 책을 연결하고 수업을 지원할 전문인력이 필요한 이유다. 2030년까지 사서교사 배치율을 30%로 높이겠다는 계획은 의미 있지만, 동시에 상당수 학교에는 여전히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독서교육은 ‘사업’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문화’의 문제다. 교실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고, 수업 중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친구와 읽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독서하는 학교문화는 거창한 프로그램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읽을 수 있는 시간, 쉽게 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 학생의 선택을 존중하는 문화가 쌓일 때 만들어진다. AI가 더 빠르게 정보를 찾고 더 정교한 답을 만들어 낼수록 교육은 역설적으로 ‘답을 얻는 능력’보다 ‘답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무엇이 중요한 정보인지, 누구의 관점이 담겨 있는지, 다른 설명은 가능하지 않은지, 그리고 결국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AI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더 많은 독서사업이 아니다. 스스로 책을 펼치고, 오래 읽고,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질문을 만들어 가는 ‘읽는 학생’이다. 학생에게 읽을 시간을 돌려주고, 좋은 책을 만나게 하며, 읽은 것을 질문과 토론, 탐구로 이어가게 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 학교 독서교육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 신동현 ◇ 부산 강서초등학교 교장 ◇ 前 부산 장서초등학교 교감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학교정책과 장학관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정책연구소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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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AI 시대, 다시 ‘읽는 학생’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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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AI 교과서 시대, 기술 너머의 '인간적 연결'을 말하다
-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인공지능(AI)과 에듀테크가 교육 현장의 지형을 급격히 바꾸어 놓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맞춤형 학습을 지원하는 AI 디지털 교과서의 도입과 에듀테크의 활용은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을 진단하고 지식의 습득 효율을 높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신기술이 선사하는 화려한 가능성 뒤편에서, 우리 교육 현장이 혹여 가장 소중한 ‘교육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디지털 기기 활용 증가에 따른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와 집중력 흐려짐, 그리고 스크린 너머로 이어진 인간관계에서의 정서적 고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AI가 맞춤형 문항을 추천하고 정답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깊이 있게 사고하는 능력까지 대신 키워줄 수는 없다. 인공지능이 해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인류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정답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지성’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다. "기술은 결코 중립적인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계의 방식을 뿌리째 재구성한다"(프랑스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 디지털 도구가 수업의 주도권을 쥐게 될 때,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흐르던 눈빛 교환과 정서적 교감의 공간은 자칫 축소될 위험에 처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이를 다루는 교육은 역설적으로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처럼 더욱 '인간 중심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 시대, 학교와 교사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가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생명의 안내자’이자 ‘인격적 멘토’로서의 역할에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육당국과 학교 현장은 에듀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실효성 있는 대안을 세워나가야 한다. 우선, '디지털 활용'과 '아날로그적 문해력'의 정교한 균형(Hybrid Education)을 구축해야 한다.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한편, 종이책 읽기와 글쓰기, 깊이 있는 토론 수업을 강화하여 아이들의 어휘력과 맥락 이해 능력이 퇴화하지 않도록 단단한 기초 체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와 함께 공감과 협력의 가치를 배우는 '정서·사회성 교육'의 전면 강화가 요구된다. AI가 제공하는 개별화 학습에만 몰입하다 보면 공동체성 함양이 소홀해지기 쉽다. 모둠 활동, 체육 및 예술 활동, 생태 체험 등을 확대하여 타인과 협력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인성 교육을 학사운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나아가 교사가 '기술의 관리자'가 아닌 '인간적 연결의 주체'로 서도록 행정적·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에듀테크 도입에 따른 교사들의 기기 관리 및 행정 부담을 대폭 줄여주고, 교사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며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상담과 생활지도 시간'을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동양의 고전 『논어』에는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 도구라 할지라도 교육의 주체인 인간을 넘어설 수는 없으며,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따뜻한 격려 한마디와 친구와 함께 땀 흘리며 배우는 협동의 기쁨을 대체할 수는 없다. 디지털 대전환의 길목에서, 기술을 지혜롭게 품어안되 '인간적 연결'이라는 교육의 고귀한 본질을 더욱 단단히 지켜내는 국가적 안목을 기대한다. ▣ 박진우 ◇ 부산 해빛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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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AI 교과서 시대, 기술 너머의 '인간적 연결'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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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각의 한계에 닫힌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곳으로 만들어 보지 않겠습니까?”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오랫동안 남이 만든 정답과 기술을 모방해 가장 빠르게 추격해 온 ‘전술 국가’, ‘추격 국가’, ‘따라 하는 국가’로서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남의 지식과 삶의 전략을 수입해 쓰는 단계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육이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를 길러내지 못할 때, 사회는 극단적 혐오와 분열에 갇히고, 개인은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는 종속적 삶을 살게 됩니다. 지식 수입국을 넘어 주체적인 사유의 전략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오직 서열화된 상대평가와 입시를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에 갇혀 있습니다. 미래 교육은 정답을 외우는 수동적 지식인을 넘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문제를 정의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완성하는 공부)’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유하지 못해 타인의 선동과 진영 논리라는 ‘성심(成心: 정해진 마음, 莊子)’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없으니 외부의 잣대로 타인을 낙인찍고 배척합니다. 여기서 孔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태도,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서(恕)의 정신을 일상의 언어와 공론장에 복원해야 합니다. 지식 수입국 탈피를 위해 학교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 채점’에서 ‘문제 제기(Problem Framing)’로의 전환입니다. 선진국이 해결해 놓은 문제의 해법을 암기하는 교육을 멈추고,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정의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시험 체제를 걷어내고, 학생의 논리적 맥락과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는 서·논술형 평가 및 토론 수업을 정규 수업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남이 해결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방으로는 결코 선도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삶과 현장의 결핍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를 이론적 도구로 해결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생각’은 ‘남’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도 “자신을 향해 걷는 길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할 만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수고 중에 제일 큰 수고는 ‘지적인 수고’입니다.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알려고 하는 그런 수고도 하지 않고,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대책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가?”와 같이 정해진 답이 없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4시간 동안 자신의 논리로 에세이를 작성하게 합니다. 또한 핀란드의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에서는 교과목의 경계를 허물고 ‘기후 변화’, ‘도시의 교통 혼잡’ 등 실제 현실의 복합적인 문제를 프로젝트 단위로 학생들이 직접 분석하고 대안을 설계하게 합니다. 생각하는 삶으로의 이동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판단의 유보’와 ‘인지적 여백(虛靜)’의 확보입니다. 자극이나 정보가 주어졌을 때 즉각 반응하거나 남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심(多聞闕疑)을 품는 3초의 간격을 확보하는 훈련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치를 부여하고 제도를 만들어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주체’입니다. 학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예술·기술·도덕 규범을 직접 설계하고 표현하는 ‘창작자(Creator)’의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발도르프(Waldorf) 교육은 기성 교과서를 쓰지 않고,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에포크(Epoch) 공책을 직접 글과 그림으로 완성하며, 수공예와 연극을 통해 물질과 문화를 몸소 빚어내는 주체성을 기르도록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물건을 창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후기 이후 근현대 압축 성장기 동안, 서구 선진국이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철학과 기술을 ‘빠르게 베껴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은 선진국이 하고, 우리는 실행만 한다.”는 지식의 하청 기지 구조가 교육과 사회 전반에 무의식적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1999년 타임지 기사(“Asians cannot think.”)의 함의와 한국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동아시아 국가들이 뛰어난 암기력과 제조 기술로 경제 성장은 이루었으나, 독창적인 개념 설계, 비판적 사유, 원천 철학을 창출하는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 뼈아픈 통찰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우월주의이자 인종차별적 편견”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분노하는 민족주의적 반응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성찰하고 창의성 교육을 논의하는 자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와 철학을 기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기적인 경제 성장과 입시 중심 사회에서 철학은 ‘돈이 되지 않고 비효율적인 학문’으로 치부되었으며, 질문하는 시민보다 지시에 잘 순응하는 기능적 인력을 대량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고등학교 3학년 전 계열 학생에게 주당 수 시간씩 철학을 필수로 가르치며 국가 대입 시험(바칼로레아)의 첫 관문으로 치릅니다. 미국/영국에서는 초등 단계부터 ‘어린이를 위한 철학(P4C: Philosophy for Children)’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그림책이나 일상의 딜레마를 두고 교사와 학생이 둥글게 앉아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문화를 운영합니다. ‘지적인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는 습관을 기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질문 일기’의 생활화입니다. 매일 마주치는 일상이나 뉴스에 대해 “이 현상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최소 하나씩 스스로 던지고 3줄 이상 답을 추론해 보는 훈련을 합니다. 더 나아가 즉답(Easy Answer) 피하기입니다.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때 포털이나 AI의 단편적 검색 결과에 즉시 의존하지 않고, 최소 5분간 스스로 가설을 세워본 뒤 교차 검증하는 ‘지적 인내심’을 체화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서 왔을까요? 외적 비교와 획일화된 정답의 강요입니다. 어릴 적부터 “너는 무엇을 원하니?(不言之敎)”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명령(言之敎)만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불안이 한 몫을 합니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문화가 청년들의 내면적 욕망을 마비시키고 안전한 기성 경로(공무원, 대기업 등)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수월한 삶을 위한 도구로는 ‘추상’과 ‘은유’입니다. 추상(Abstraction)은 복잡한 현실의 군더더기를 쳐내고 핵심 뼈대(본질)만을 추출하는 능력입니다. 은유(Metaphor)는 서로 전혀 다른 두 영역을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을 빚어내는 능력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를 복잡한 전자 기계가 아닌 “정신을 위한 자전거(A bicycle for the mind)”로 은유하여, 인간의 사고력을 확장하는 도구라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규정했습니다. MIT 미디어랩에서는 순수 과학, 공학, 예술, 인문학 연구자들을 한 공간에 섞어 이종(異種) 개념 간의 은유적 융합을 통해 혁신적 인터페이스를 창조합니다. ‘생각하는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내 안의 기준’ 세우기(爲己之學)입니다. 남의 시선과 사회적 명예(爲人)를 위해 살던 관성을 멈추고,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내 양심을 비추어보는 신독(愼獨)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들이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닌 “내 양심과 이성은 무엇을 요구하는가?”로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의 대답을 외우는 삶은 노예의 삶이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삶만이 주인의 삶입니다. 주입식 암기의 굴레를 벗고 아이들에게 질문할 권리와 사유의 여백을 돌려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남의 뒤를 쫓는 전술 국가를 넘어 세계의 문명을 선도하는 당당한 전략 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생각을 시작하는 곳으로 만들 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바꿀 때입니다. 경쟁과 불안은 존재의 조건입니다. 좋고 나쁘고 이전의 문제입니다. 경쟁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약하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강인함을 만드는 원천입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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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각의 한계에 닫힌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곳으로 만들어 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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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감투 나눠 먹기’로 끝난 부산강서구의회 파행
- [교육연합신문=한난희 기자] 주민 복지도, 아이들의 교육 예산도 안중에 없었다. 부산 강서구의회가 두 달 가까이 멈춰 선 진짜 이유는 정책 대립이 아닌, 그저 '누가 의장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눈치 싸움 때문이었다. 참다못한 학부모들이 의회를 찾아 성명서를 전달하고 강력히 항의한 지 나흘 만인 9월 1일, 강서구의회는 임시회를 열어 의장에 김주홍 의원(국민의힘), 부의장에 김정용 의원(더불어민주당)을 선출하며 원 구성을 늦게나마 끝마쳤다. 그러나 이 억지 합의와 의결 과정은 구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분노, 그리고 또 다른 씁쓸함만을 남겼다. 이번 표결 과정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출석 의원 수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 4명은 전원 참석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1명의 의원이 본회의에 불참했다. 그간 여야가 팽팽하게 맞서던 '4대 4 동수 구도'에서 민주당 의원 1명의 불참은 표결의 균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개월간 이어진 줄다리기 끝에 발생한 당론 불일치이든, 9월 1일 전·후반기 의장단 분배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수치상 구도를 맞추려 한 '정치적 셈법'이든, 이번 불참은 의회 정치의 무능과 파행을 여실히 증명해 냈다. 본질은 공공의 이익을 뒷전으로 미룬 정치적 파행이다. 북부교육지원청 학교학부모연합회 최훈기 회장을 비롯한 강서구학부모단이 현장에서 강력히 지적했듯 원 구성이 미뤄지는 동안 이미 확보된 국·시비를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했고, 내년도 교육 예산 삭감과 통학로 안전 관련 조례 제정 지연이라는 실질적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과 주민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교육 환경을 조성해야 할 의회가 도리어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잡고 정쟁을 벌인 셈이다. 주민들이 만들어 준 4대 4라는 숫자는 대화와 협치를 통해 균형을 맞추라는 명령이었지, 약속을 뒤집거나 이탈 표를 낳아가며 의정을 마비시키라고 준 무기가 아니었다. 결국 학부모회의 전격적인 항의 방문으로 합의와 표결은 이뤄냈으나, 감투싸움에 몰두하다 1명 불참이라는 이례적 구도로 억지 마침표를 찍은 강서구의회가 무너뜨린 주민의 신뢰는 쉽게 회복되기 어렵다. 구민과 아이들의 삶을 정쟁의 도구로 삼았던 여야 의원 모두는 이번 자리 배분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구민들의 준엄한 경고와 엄중한 정치적 책임 앞에 고개 숙여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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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감투 나눠 먹기’로 끝난 부산강서구의회 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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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관광, 500만 넘어 1000만 도시로 가야 한다
- [교육연합신문=이상헌 기고] 2025년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64만 3천여 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6년 상반기에도 242만여 명이 부산을 찾으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부산시는 2028년까지 외국인 관광객 500만 명, 관광지출 1조 5천억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부산의 질문은 “500만 명을 달성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500만 명 이후 부산 관광을 어떻게 1,0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발전시킬 것인가가 새로운 과제가 돼야 한다.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는 단순히 방문객 숫자를 두 배로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부산이라는 도시 전체를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도시혁신의 문제다. 세계적인 관광도시의 경쟁력은 유명 관광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광객이 만나는 택시기사, 버스기사, 음식점과 카페 직원, 전통시장 상인, 공무원, 자원봉사자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산의 이미지를 만든다. “Welcome to Busan.” “Can I help you?” 이 정도의 간단한 인사와 친절한 길 안내만으로도 외국인 관광객이 느끼는 부산의 인상은 크게 달라진다. 부산이 1,000만 관광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시민을 단순한 관광객 맞이의 주체가 아니라 ‘관광시민’으로 키워야 한다. 부산시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관광객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공항·항만·철도, 교통, 숙박, 음식, 쇼핑, 전통시장, 문화공연, 의료·웰니스, 야간관광까지 하나로 연결하는 관광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앞으로는 몇 명이 부산을 찾았느냐보다 얼마나 오래 머물고, 얼마나 소비하며, 어떤 경험을 하고 돌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산관광공사 역시 단순한 홍보기관을 넘어 세계 관광시장과 부산의 관광상품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 국가별·연령별·관심사별 관광 수요를 세분화하고, 관광객의 소비와 이동 데이터를 분석해 새로운 관광상품 개발에 활용해야 한다. 16개 구·군의 역할도 중요하다. 외국인 관광객의 동선이 해운대·광안리·남포동 등 일부 지역에만 집중돼서는 부산 전체가 관광 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중구·동구는 근현대 역사와 피란수도 문화, ▲영도구는 해양·예술, ▲남구는 UN평화문화와 청년문화, ▲해운대구는 MICE와 해양레저, ▲수영구는 야간관광, ▲기장군은 해양·미식·웰니스 등 각 지역이 자신만의 관광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관광객의 질문도 달라진다. “부산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가 아니라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가 된다. 결국 1,000만 관광객보다 중요한 것은 1,000만 개의 부산 경험이다. 부산에서 처음 먹어본 음식, 처음 만난 친절한 시민, 처음 본 바다, 처음 들은 부산 사투리, 처음 방문한 전통시장과 골목길, 부산에서 남긴 사진 한 장까지 모두가 한 사람에게는 ‘부산의 기억’으로 남는다. 부산은 이제 관광하기 편한 도시를 넘어 외국인이 다시 찾고 싶고, 머물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목표로 해야 한다. 워케이션, 의료·웰니스, 골프, 크루즈, MICE, 교육, 문화예술, 스포츠 등 장기체류형 관광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은 부산시 혼자 만들 수 없다. 부산시는 큰 전략을 세우고, 부산관광공사는 세계시장과 부산을 연결하며, 16개 구·군은 지역별 관광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기업과 소상공인은 관광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시민은 부산의 첫 번째 관광홍보대사가 돼야 한다. 관광객 증가의 효과도 일부 관광지와 특정 업종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음식점, 숙박업, 문화예술계, 청년 일자리까지 확산돼야 한다. 500만 명은 부산 관광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1,000만 명의 글로벌 관광도시로 가는 중간 정거장이어야 한다. 부산이 세계인이 찾는 도시를 넘어 ‘다시 찾고 싶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행정 중심의 관광정책을 넘어 시민과 기업, 관광업계, 대학, 16개 구·군,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가 함께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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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관광, 500만 넘어 1000만 도시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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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정,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 [교육연합신문=이정현 기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사용돼 온 속담이다.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대책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 속담이 낯설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재난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알 수 없다. 평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아무 일이 없을 때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진정한 안전행정이 아닐까. 기자는 과거 한 지방자치단체장을 만나 수동심폐소생기 등 응급상황에 대비한 안전장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다들 건강해서 이곳에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예비군 훈련과 민방위 훈련은 왜 실시하는가. 실제 전쟁이나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평소 훈련하고 대비하는 것 아닌가. 안전장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고가 발생한 뒤 “그때 설치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준비돼 있어야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특히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기후로 인한 폭염과 집중호우, 산불 등 각종 재난이 잇따르고 있다. 재난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피해 규모 역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안전 대응체계는 과연 충분한가. 얼마 전 기자는 최근 혁신제품으로 출시된 산소마스크를 접했다. 화재 등 비상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제품으로, 제품 설명상 마스크를 착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산소가 발생해 대피 과정에서 호흡을 돕는 방식이다. 특히, 화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이 불길만은 아니다. 화재 현장에서는 유독가스와 연기 때문에 질식 위험이 매우 크다. 실제 화재에서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속한 대피와 함께 ‘골든타임’ 안에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자는 이 제품이 지자체와 공공기관 등에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궁금해 몇몇 구청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봤다. 일부 지자체에는 관련 제품이 샘플 형태로 설치된 곳도 있었지만, 상당수에서는 산소마스크 자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품의 취지와 필요성을 설명해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접하면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다시 한 번 그 속담이 떠올랐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물론 새로운 안전제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관공서나 사업장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품의 안전성과 성능, 인증 여부, 실제 재난 상황에서의 효용성, 비용 대비 효과 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검토조차 하지 않는 행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사업장에서 화재 등 중대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관계자들은 중대재해처벌법 등 관련 법령에 따른 책임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사고가 발생한 뒤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 자체를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화재는 단 몇 분, 아니 몇 초가 생사를 가를 수 있다. 그래서 안전에는 ‘나중’이 없다. 관공서와 공공시설뿐만 아니라 학교, 복지시설, 전통시장, 다중이용시설, 사업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는 어떤 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지 미리 살펴보고, 필요한 장비와 대응체계를 갖추는 것이 행정의 기본 책무다. 몇 달 뒤 화재 예방의 달을 맞아 각 기관이 일제히 캠페인을 벌이고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물을 배포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보여주기식 캠페인’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수막 한 장을 더 거는 것보다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을 했다는 실적을 남기는 것보다 실제 상황에서 시민과 공무원이 당황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도록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에게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 재산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다면 ‘적극행정’이라는 말도 안전 분야에서부터 실천돼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지역에서는 아직 사고가 없었다.”, “건강한 사람들이라 필요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때 대응하면 된다.” 이런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안전불감증일 수 있다. 재난은 행정기관의 결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고가 발생한 뒤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열고 장비를 구입하는 행정보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위험요인을 찾아내고 필요한 장비를 준비하는 행정이 진정한 적극행정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장비 하나가 평소에는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재난의 순간에는 그 하나가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더 이상 안전행정의 현실을 표현하는 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고가 난 뒤의 후회가 아니라 사고가 나기 전의 준비다. 그리고, 그 준비의 출발점은 바로 행정기관의 작은 관심과 적극적인 검토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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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정,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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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말과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말의 성찬’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는 화려한 수사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련된 말재간, 그리고 타인을 설득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완이 곧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진실, 그리고 말에 대한 엄중한 책임 의식이 빠진 말들은 당장의 이득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결국 서로의 품격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진단할 때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진단은 바로 ‘염치(廉恥)의 실종’과 ‘말의 타락’입니다. 말이 도구화되고 수치심이 사라진 사회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너진 말의 질서를 바로잡고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본질적 질문에 답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타인을 비난하고 시기하는 거친 말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본질에는 외부의 문제가 아닌 자기 내면의 깊은 불안과 결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은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말의 질서가 무너질 때 사회 전체가 붕괴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그 말 속에 과연 진실과 책임이 담겨 있습니까?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를 떠나는 것 같지만, 그 말이 만들어낸 파문과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타인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내면의 결핍을 오롯이 마주하고 성찰하는 ‘반구저기신(反求諸己身)’의 태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 속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오디세우스는 서양 문학사에서 지혜롭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윤리를 저버린 간교한 사기꾼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무력에 의존하던 기존의 영웅들과 달리 탁월한 지략과 이성을 활용하여 10년 동안 끝나지 않았던 트로이 전쟁을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끝내고 온갖 신들의 방해와 여신의 유혹 속에서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고자 했던 불굴의 집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직한 동료들을 속이고 수호신상을 도둑질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아가멤논의 요청으로 화해 신청을 하러 온 오디세우스의 언변에 대해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옥의 문만큼이나 위선을 미워한다.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자를 나는 참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단테의 신곡에서는 화려한 언변과 꾀로 타인을 속이고 사지로 몰아넣은 말의 죄, 즉 구업(口業)을 물어 제8지옥에서 혀 모양의 두 갈래의 불꽃에 휩싸여 영원히 고통받는 벌을 받습니다. 구업(口業)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불교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나쁜 언어적 행위를 사구업(四口業)이라 하는데, 먼저 망어(妄語)는 자신의 이익이나 타인의 해악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고하는 행위이며, 기어(綺語)는 진실성이 결여된 채 타인을 아첨하거나 현혹하고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허황되고 도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양설(兩舌)은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오가며 말을 와전시키고 분란을 일으켜 다리를 놓아야 할 언어로 오히려 관계를 갈라놓는 이간질이며, 악구(惡口)는 거칠고 모난 언어로 상대방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인격을 모독하는 폭언과 험담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중하지 못한 말로 짓는 구업은 결코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언어의 주체에게 업보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의 결과는 말했던 그 사람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말에 대한 엄중한 결과가 이러한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난무하는 온갖 비방과 저주와 폭력의 말의 대가는 과연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입으로 악한 말을 내뱉어 구업을 짓게 되는 본질적인 원인은 타인이 아닌 자기 내면의 불안과 결핍에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내공이 부족할 때 인간은 깊은 열등감을 느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게 됩니다. 또 타인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비교 의식, 질투, 열등감 같은 심리적인 요소가 내면의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 억압된 분노는 비방과 저주, 모함의 거친 언어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시선이 자기 내면을 향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서만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莊子)』에는 추호(秋毫, 가을철 짐승의 가느다란 털)만큼 작은 이익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느라, 정작 하늘처럼 넓은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털끝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 남을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의 〈질투의 힘〉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노라.”라는 고백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타인의 삶을 두리번거리며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지금의 어떤 사람들의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온전히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조금은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은 바로 독서와 사유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 문장을 읽는 시간은 자기 자신과 단둘이 마주하는 기회가 됩니다. 책 속 문장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거부감이 드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지금 자신 내면의 결핍이 어디에 있는가를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신의 사유를 거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갈 뿐, 아직 자신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유란? 남이 세상을 보고 개념화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를 사유하게 되면, 자기의 삶은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면서 자기의 삶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면 마침내 얻게 된다. 무릇 책을 읽을 때 생각함이 깊지 않으면,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한들 남의 언어에 휘둘릴 뿐이다. 사유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우물에서 지혜의 두레박을 퍼 올리는 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유한준(조선 후기 문신, 문장가)에게 전한 이 문장에서도 사유가 없는 독서의 결과인 ‘지적 종속’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쌓아온 구업(口業)을 끊고 신언(愼言)의 태도를 다짐하며 타인을 향해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유일한 길은 ‘독서’와 ‘사유’, 그리고 이를 통한 ‘신독(愼獨)’에 있습니다. 내면이 단단하게 채워진 사람은 타인을 시기하거나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높일 필요를 느끼지 않기에, 그의 언어 또한 자연스럽게 절제되고 담백해집니다. 오늘도 묵묵히 책을 펼치고 깊은 사유의 정적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그 순간이야말로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넘어, 마음의 지평을 하늘만큼 넓히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거니는 '소요(逍遙)'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삼갈 줄 아는 삶의 주인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말은 생각의 집이자 존재의 표현입니다. 한자 言(말씀 언)은 입(口) 위에 매운 침(辛)이 얹혀 있는 형상입니다. 이는 말이 타인을 찌르는 칼이 될 수도, 스스로를 경계하는 죽비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르고 품격 있는 말은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사람을 살리지만, 혐오와 기만의 언어는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고 국가의 근간을 뒤흔듭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恥心)이 회복되고 내뱉은 말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무너진 말의 질서가 바로 서고 건강한 신뢰 사회가 열릴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함께 꿈꾸어 보는 삶! 이것이 한겨레인으로서 마땅한 꿈이 아닐까요?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모든 철학의 최상위에 용기가 있는 이유입니다.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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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말과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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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신뢰받는 무기는 ‘생각’과 ‘말’입니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문명의 거대한 격변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기술이 인간의 육체와 단순 지능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이 짐승이나 기계와 구별되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최후이자 최고의 무기는 바로 ‘사유(생각)하는 힘’과 그것이 빚어내는 ‘도덕적 신뢰’입니다. 생각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남이 만든 정답을 외우는 전술 국가에서 벗어나, 주체적 사유로 삶과 사회를 개척하기 위한 전략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철학적 성찰을 나누어 보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노자의 지혜로 시작합니다.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인간의 궁극적 필살기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누워 있는 방관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억지스러운 욕심, 사리사욕, 고집스러운 통제(爲)’를 하지 않음으로써(無爲), ‘자연과 만물의 순리가 스스로 조화롭게 흘러가지 못함이 없게 한다(無不爲).’는 뜻입니다. 억지로 군림하고 조작하려 들지 않고, 구성원 각자가 지닌 본성을 자유롭게 꽃피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무위의 통치이자 문제 해결의 궁극적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과 태도를 정의하였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본능과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 언어와 상징, 예술과 도덕을 일구어내는 ‘문화적 존재(Homo Culturalis)’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어떤 변화를 야기하고 있습니까? 가치 창조의 주체는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의미와 질서를 직조해 나가야 합니다. 생물학적 욕망(식욕, 지배욕,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예(禮)’와 ‘인(仁)’이라는 고유한 규범으로 다듬어내야 한다고 孔子는 말합니다. 후진국은 물건에 시선을 집중하고, 중진국은 제도에 모든 관심을 나타내고, 선진국은 ‘물건과 제도의 이면에 있는 ‘생각과 철학’에 시선을 집중한다고 합니다. 모든 탁월한 물질문명(물건과 제도)은 보이지 않는 ‘고도의 철학과 생각’이라는 토양에서만 싹을 틔웁니다. 즉 철학(사유와 가치관) → 생각(개념 설계) → 제도(시스템) → 물건(기술과 제품)의 순서로 즉, 모든 탁월한 물질문명(물건과 제도)은 보이지 않는 '고도의 철학과 생각'이라는 토양에서만 싹을 틔운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을 설계했듯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편리함과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體)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인류에게 유익한 제도와 혁신적인 물건(用)이 탄생합니다. 철학 없는 기술은 흉기가 되고, 생각 없는 제도는 폭력이 된다고 성현들은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돈과 출세만을 목표로 삼는 얕은 생각(爲人之學)에 머물면, 삶 또한 천박한 경쟁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눈앞의 득실을 따지는 일차원적 계산에서 벗어나,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공동체에 어떤 유익을 남길 것인가?”라는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품어야 합니다. 즉,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독(愼獨)의 실천으로 행동의 품격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원천 개념을 창조한 물건이 드문 이유는, 오랫동안 선진국의 지식을 빠르게 베껴 쓰는 ‘전술 국가(추격자)’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입식 교육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도성장기에는 정해진 정답을 빠르게 습득하는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오지선다형 시험과 서열화된 입시 중심의 ‘위인지학’이 교실을 지배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교실의 평가 기준을 “누가 정답을 맞혔는가?”에서 “누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는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서·논술형 평가, 프로젝트 기반 토론 수업을 정착시키고, 교사 양성 과정부터 철학적 사유와 자율적 교육과정 구성을 허용하는 혁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혁신은 교육지자체 장의 선출에 달려 있습니다. 교육철학과 제도를 창안하고 국민을 시민으로 바꿀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장자가 경계한 ‘인위(人爲)’와 ‘자연(自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질문에서 장자가 인위를 강조했다는 것은 오해이며, 사실 장자는 ‘작위적인 인위(人爲)’를 철저히 비판하고 ‘자연스러운 본성(無爲自然)’을 회복할 것을 필생의 가르침으로 삼았습니다. 인간이 억지로 도덕과 법률, 제도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통제하려 들수록 세상에는 위선과 도둑, 분열이 늘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장자가 강조한 것은 인위적 규범을 내려놓고, 우주와 사물이 지닌 본래의 결대로 자유롭게 노니는 소요유(逍遙遊)의 삶입니다. 하버드 학생들이 느끼며 자라는 ‘이것’은 ‘지적 겸손(결핍과 호기심)’이라고 합니다. 하버드대를 비롯한 세계적 리더들이 자라며 체화하는 핵심 감각은 ‘결핍에서 비롯된 주체적 호기심’이자 ‘지적 겸손(무지의 자각)’입니다. 왜, 지적 겸손이 필요한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오만은 배움을 멈추게 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소크라테스적 ‘무지(無知)의 자각’이 있어야만 비로소 지식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개척자적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시점에서 ‘언지교(言之敎)’에서 ‘불언지교(不言之敎)’로 나아가는 교육 방법이 절실합니다. 노자는 말로 하면, 가르치고 지시하는 ‘언지교(言之敎)’는 상대방에게 저항과 방어 기제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스승이나 부모가 말로 잔소리하고 명령하기보다, 자신의 삶과 태도를 통해 침묵 속에서 행동의 본을 보이는 ‘불언지교(不言之敎, 말 없는 가르침)’를 최고의 교육으로 꼽았습니다. 학생 스스로 감화되어 깨닫게(自化) 만드는 ‘환경과 여백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욕망과 편견이라는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단합니다.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보여지는 대로 보는 방법으로는 ‘심재(心齋)’와 ‘격물(格物)’입니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관조’라고도 합니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 즉각적으로 好不好(좋다./싫다.)를 내리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섭니다. 판단을 일단 유보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선입견을 비워내는 ‘마음의 금식(심재)’을 통해, 사물과 인간이 처한 객관적 맥락과 결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인지적 유연성을 훈련해야 합니다. 莊子가 말하는 成心의 비움입니다. ‘정해진 마음(成心)’의 폐해와 장자의 ‘成心’ vs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가슴에 절절히 밀려옵니다. 내가 살아오며 쌓은 작은 경험과 이념을 절대적 진리로 착각하여 타인을 재단하는 완고한 고정관념입니다. 장자의 成心과 법정의 무소유를 비교해 보면, 장자는 “마음의 집착을 비워라.” 정신적인 지식과 도덕적 확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유의 여백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는 “물질적 집착을 비워라.” 불필요한 소유욕에 눈이 멀어 영혼의 자유를 잃지 말라는 실천적 경고입니다. 두 가르침 모두 ‘비움(虛)’을 통해 집착의 노예에서 벗어나 ‘삶의 참된 주인으로 서라.’는 영적 해방을 의미합니다. 인간 최고의 무기 ‘신뢰(信)’라고 하는 공자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공자는 국가를 유지하는 세 가지 기둥으로 군대(足兵), 식량(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뢰(民信)를 들며, 위기 시에는 군대와 식량을 차례로 버릴지언정 신뢰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民無信不立)고 단언했습니다. 법가 사상가 상앙조차 개혁을 시작할 때, 성문 앞에 나무 기둥을 옮기는 자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백성들의 신뢰를 얻은 후에야 법을 집행했습니다. 상앙의 ‘徙木立信’입니다. 공자의 신(信)은 말(言)과 사람(人)이 하나가 되는 언행일치입니다. 수레에 바퀴와 멍에를 잇는 쐐기(輗, 軏)가 없으면, 수레가 단 한 치도 굴러갈 수 없듯이, 인간과 사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은 정직함에서 나오는 ‘상호 신뢰’입니다. 이제는 남의 생각에 기대어 사는 노예의 안락함을 버리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주인의 사유’를 시작할 때입니다. 깊은 생각에서 피어난 단단한 신뢰야말로 이 혼란한 시대를 건너갈 우리 모두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생각과 말은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말과 생각의 질서가 무너질 때 사회 전체가 붕괴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적 자정 장치’입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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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신뢰받는 무기는 ‘생각’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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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지구가 보낸 경고장…국가와 교육이 답할 '기후재난'의 골든타임
-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해마다 지구촌을 강타하는 이상기후는 이제 일시적인 자연현상이 아닌 인류의 일상을 파고드는 복합 재난으로 고착화되었다. 올해만 보더라도 유럽 전역에서는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수만 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미와 아시아 곳곳은 기습적인 집중호우로 도시 전체가 침수되는 비극을 겪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의 장마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며, 예고 없는 국지성 폭우와 폭염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와 UN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를 넘어 '지구 열열화(Global Boiling)' 시대가 왔다"고 경고했듯, 기후재난의 발생 빈도와 피해 범위가 매년 가파르게 확산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기후는 단지 어쩌다 찾아오는 계절적 불운이 아니라 인류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국가적 재난이다. 과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겪는 혹독한 더위와 기습 폭우가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날 중 ‘가장 온화했던 날’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언급했듯 인류는 이미 '기후적 난민'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육현장의 학사 운영 중 폭우나 폭염이 엄습할 때 단축수업이나 휴업을 안내하고 주의를 당부하는 수준의 임시방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감당할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기후위기를 '국가 안보 및 국민 생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이에 발맞추어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의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과 사회가 체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 국가 차원의 '기후적응형 학교 인프라 표준화'와 재정 지원이다. 학교 건물 자체의 단열 성능을 극대화하고 옥상 녹화 및 빗물 저류 시설을 의무화하는 '그린 스마트 건축 기준'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폭염 시에도 학생들이 안전하게 신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듈러형 실내 체육/놀이 공간' 확충을 국가 예산으로 우선 지원해야 한다. 둘째, 체계적인 '기후 데이터 기반 학사운영 예측 시스템' 구축이다. 각 지자체 및 기상청과 연계하여 지역별·학교별 기후 위험도를 실시간 측정하고, 이에 따른 단계별 대응 매뉴얼(체육 수업 전환, 등하교 시간 자율 조정, 온라인 수업 전환 기준 등)이 현장에서 혼선 없이 작동하도록 행정적·법적 근거를 명확히 정비해야 한다. 셋째, 지식 전달을 넘어선 '실천형 기후 안보·생태 교육'으로의 대전환이다. 기후변화 교육을 단순한 환경 과목의 일부가 아니라, 아이들이 생존 역량을 키우고 탄소중립 사회를 이끌어갈 '기후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필수 교육과정으로 재편해야 한다. 학교 내 에너지 소비를 학생들이 직접 측정하고 줄여보는 실천형 프로젝트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중국의 고전 『서경』에는 "사전에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가르침과 함께, "망한 뒤에 도모하면 이미 늦다"는 경고가 전해진다. 교육의 본질은 우리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껏 배우며 미래를 꿈꾸도록 울타리가 되어주는 데 있다. 이상기후라는 엄중한 시대적 경고 앞에서, 국가의 선제적 장기 대책과 교육 현장의 과감한 실천을 통해 국민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든든히 지켜내야 할 때다. ▣ 박진우 ◇ 부산 해빛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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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지구가 보낸 경고장…국가와 교육이 답할 '기후재난'의 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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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서울교육청 ‘3·3·3 학교뜰 프로젝트’를 보며, 학교숲 현장에서 드는 기대와 우려
- [교육연합신문=김태연 기고]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학교 운동장을 숲과 휴식공간, 체육시설이 공존하는 생태공간으로 바꾸는 '3·3·3 학교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학생 1인당 녹지 3㎡, 교실 창밖으로 나무 3그루가 보이는 환경, 학교당 30㎡ 규모의 나무 그늘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기후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아이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 나무와 그늘, 흙과 생명의 공간을 늘리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숲과 환경교육 현장을 오랫동안 다녀온 사람으로서 반가움과 함께 한 가지 걱정도 든다. ‘이번에는 정말 다를까?’ 학교에 숲을 만드는 사업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5여 년 동안 학교숲, 명상숲, 에코스쿨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학교에 나무를 심고 녹지공간을 만들었다. 적지 않은 예산도 투입됐다. 하지만 조성 이후 학교의 나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는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나무가 제자리를 잡도록 받쳐놓은 지지대를 걷어내기도 전에 줄기에 버섯과 곰팡이가 생겨 결국 잘려나간 나무를 보았다. 곤충이 생긴다 가지가 떨어진다는 민원 등으로 굵은 줄기만 남겨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벚나무도 적지 않다. ‘학교는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낙엽 한 장, 나뭇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내 딱딱한 흙바닥만 남은 학교 정원도 여럿 보았다. 굵은 가지를 한꺼번에 잘라내는 과도한 전지로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쇠약해지고, 결국 나무껍질이 벗겨진 채 고사하고 몇년재 방치된 수십 년 된 나무들도 보았다. 학교 정원과 어렵게 조성한 학교숲의 나무들이 경관적으로나 생태적으로, 또 아이들이 느끼는 정서적 공간으로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만났다. 학교숲에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학교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행정적 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나무는 생태적 가치를 지닌 공간이나 교육의 대상이기 이전에 관리해야 할 ‘시설’로 분류된다. 수목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시설 담당자가 나무 관리까지 맡는 경우가 많고, 결국 예산 범위 안에서 외부 조경업체에 전지를 맡기는 것으로 관리가 끝나기 쉽다. 교사들 역시 나무 관리가 또 하나의 업무가 될까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과도한 전지로 피해를 입은 나무는 바로 죽지 않는다.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쇠약해진다. 시설인 죽은 나무는 처리되는 과정도 오래 걸려 고사한 나무를 학생들이 몇 년 동안 보며 지낸다. 그 사이 교장과 담당자, 관리업체가 바뀌면 당시의 관리가 어떤 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책임은 누구인지 조차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학교숲은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무와 숲,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을 가르친다. 많은 학교가 이러한 교육을 원하고 의뢰한다. 나무가 탄소를 흡수한다고 이야기하고, 생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설명한다. 작은 풀 한 포기와 곤충 한 마리도 생태계를 이루는 소중한 구성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작 그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의 큰 나무는 과도하게 잘려 있고, 그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고사한 나무 밑에서 수업을 하는 상황이 온다. 아이들 앞에서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을 말해야 하나, 누구의 잘못으로 말해야 하나. 생태전환교육은 생태 지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나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나무를 자르고, 아이들에게 생물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학교의 작은 풀과 낙엽은 지저분하다며 모두 치워버린다면 교육과 생활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아이들이 낙엽을 치우고, 떨어진 나뭇가지를 관찰하고, 무더운 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함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노는 일상의 경험이 훌륭한 생태교육이다. 교직원 역시 떨어지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무조건 위험하거나 치워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과 공존의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계절 변화하는 나무를 살피고 관리하며 그 변화를 아이들과 공유하는 일이 학교의 일상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생태전환교육에 가까울 것이다. 이번 '3·3·3 학교뜰 프로젝트'에서 특히 반가운 것은 학교숲 조성 이후 보식 등 유지관리 비용을 지원하고, 학생과 교직원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 한다. 학교숲 조성사업의 성과를 사업이 끝나는 해에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제곱미터의 녹지를 만들었는지, 몇 그루를 심었는지, 예산을 얼마나 집행했는지만으로 학교숲의 성공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5년 뒤, 10년 뒤에도 그 나무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리고 학교와 아이들이 그 공간에서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나무를 심는 예산만큼 관리 체계가 중요하다. 과도한 전지를 막을 수 있는 관리 기준이 필요하고, 시설 담당자와 교직원이 학교 나무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나무에 대한 모든 판단을 외부 조경업체에 맡기는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학교숲을 관리해야 할 ‘시설물’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육공간이자 살아 있는 생태계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서울시교육청의 '3·3·3 학교뜰 프로젝트'가 또 하나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올해 몇 개의 학교숲을 만들었느냐보다 ‘10년 뒤 그 숲이 얼마나 잘 살아 있는지를 자랑할 수 있는 사업’이 되었으면 한다. 학교숲은 심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태연 ◇ 생태환경교육활동연구소 대표 ◇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 교육분과위원장 ◇ 가로수시민연대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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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서울교육청 ‘3·3·3 학교뜰 프로젝트’를 보며, 학교숲 현장에서 드는 기대와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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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15 광복, 이 땅에 무궁화 꽃은 다시 피어날까
-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환희와 함께 서늘한 서러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광복 81주년을 맞이했지만, 정작 나라를 상징하는 꽃인 무궁화는 법적 지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부르며 반만년 역사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무궁화를 자수해 품으며 민족의 혼을 지켰다. 도산 안창호가 외쳤던 "무궁화 동산"은 단순히 꽃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겨레의 기상을 의미했다. 일제가 그토록 무궁화를 부정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광복된 땅 위에서 무궁화의 처지는 참담하다.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의해 보호받지만, 무궁화는 법률 그 어디에도 명문 규정이 없다. 정부 문양이나 각종 배지에 도안으로 쓰이는 관습적 상징일 뿐이다.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도심과 학교 교정에서조차 무궁화는 외래종에 밀려 잡목 취급을 받기 일쑤다. 진정한 광복은 영토와 주권의 회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빼앗겼던 문화적 정체성과 민족의 혼을 완벽히 복원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완성해야 할 광복이다. 호국영령이 피로 지킨 이 땅에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나라꽃조차 법적 국화로 지정하지 못한 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이제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무심했던 지난날의 미안함을 털어내야 한다. 정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무궁화를 대한민국 법정 국화로 공식 지정하는 법률을 즉각 제정해야 한다. 법과 제도라는 토양 위에서 무궁화가 시들지 않는 진정한 나라꽃으로 다시 피어날 때, 비로소 우리의 광복은 그 완성된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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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15 광복, 이 땅에 무궁화 꽃은 다시 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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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각과 성찰! 주체적 인간으로 서는 길입니다
- [교육연합신문=김성희 기고] 옛 성현들의 많은 훌륭한 글귀, 시대를 아울러 전해오는 현인들의 많은 좋은 교훈들, 세상에 넘쳐나는 많은 좋은 지식들, 세상의 많은 좋은 책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식과 지혜가 담긴 글을 실컷 공급받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많고 좋은 지식들이 나에게 어떤 유익함을 줄 수 있을까요? 잠시 자신의 유식함에 취하는 것 이상의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요? 학(學)은 반드시 습(習)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학’과 ‘습’은 단지 공부하고 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學’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의 흡수, 즉 타인의 지혜, 사물의 이치,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와 개념을 새로이 접하고 깨닫는 인식의 확장입니다. 또한, 습(習)은 어린 새가 날개짓을 길들이듯(習), 배운 바를 일상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적용하고 몸에 체화하는 실천적 익힘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학’이 AI나 미디어를 통해 지식을 접하는 단계라면, ‘습’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증하고 나만의 삶의 언어로 승화시켜 실천하는 ‘자기화 과정’입니다. 다른 의미로 불교에서는 습을 ‘향을 감쌌던 종이’에 비유합니다. 종이에 배어 있는 오래된 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습'은 마음과 행위가 반복되면서 영혼과 무의식(아뢰야식)에 깊게 물드는 훈습(熏習) 또는 그 남은 단단한 버릇인 습기(習氣/업식)를 의미합니다. 아침잠을 줄여서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기 쉽지 않죠. 부단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습관이 되었더라도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다시 이른 시간에 일어나기 어려워집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습’이란 없애야 할 몸에 밴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옷에 향이 은은히 배어들듯, 우리가 반복하는 생각과 행동이 내면의 성품과 운명을 규정짓는 유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습은 나쁜 습기(선입견, 번뇌)를 비워내고,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들이는 성찰적 수행을 가리킵니다.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마음과 행동에 익혀야 할 ‘習’은 무엇이고, 비우고 없애야 할 ‘습’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曰: “有惡.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而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子貢이 말하였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미워하는 것이 있다. 남의 단점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며, 용맹만 있고 예의가 없는 자를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융통성이 없는 자를 미워한다.” 曰: “賜也, 亦有惡乎?” “惡徼以為知者, 惡不孫以為勇者, 惡訐以為直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賜야,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남의 일을 엿보아 아는 척하는 자를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고, 남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정직하다고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입니다. 미워하는 것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결국 말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사적인 감정을 말하는 미움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과 질서,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공분(公憤)입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말입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라는 혼란기, 왕의 권력을 누르고 대부가 실질적 힘을 행사하는 하극상의 시대 상황에서 이루어진 대화지만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말과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어떠한 것을 몸에 익히고(習) 어떠한 말과 태도(습)를 버려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다(그만 두다), (둘둘)말다, (둥그렇게)말다, 末(끝 말)에서 ‘말’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데 우리가 쓰는 말은 마음의 짝입니다. 마음을 반영한 것이 말이지 않습니까? 또 둥근 것을 하늘의 상징으로, 세상을 회전하는 순환의 과정으로 본다면 처음 시작한 말은 반드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때문에 말의 끝이 좋으려면 처음이 좋아야 합니다. 말은 하면 할수록 말하는 사람의 실체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책임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말’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서 깨우친다면 아이들 스스로 말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른 말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바른말뿐만 아니라 상황에 맞는 말, 경우에 맞는 말, 겸손한 말, 결국 자신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노자는 말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언지교(言之敎)'는 반발을 부르지만, 말없이 몸소 삶으로 보여주는 '불언지교(不言之敎)'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스스로 깨어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판단의 ‘여백’의 제공, 정답을 즉시 알려주거나 행동을 지시하지 않고, “너는 이 상황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스스로 이성적 추론을 하게 돕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다운 태도에 대해 말합니다. 惡勇而無禮者, 惡不孫以為勇者,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己所不欲’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도 원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가까울수록 ‘다 너를 위한 말이야’라며 과도한 개입, 조언, 간섭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만큼 상대방도 그만의 살아온 방식이 있습니다. 편하다고 해서 친한 사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을 마음대로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공자가 제시한 인간의 길, 修己安人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내면을 바르게 가꾸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지식이 지혜가 되고 배움이 삶이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의 그릇된 성향을 끊임없이 다스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언행을 부단히 몸에 익혀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올바르게 가꾸고 주변의 모든 이를 편안하게 만드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덕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수행은 해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는 살이를 하면서, 모든 동물, 식물이 살아가게 합니다. 자신이 사는 길이 남들을 살리면서 살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살림살이’입니다. 한겨레의 철학입니다. 이 철학을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 김성희 ◇ SLA 어학원 원장 ◇ 무등 환경단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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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각과 성찰! 주체적 인간으로 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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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을 반드시 이깁니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낀 안경의 색깔에 갇혀, 세상을 오직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사람은, 선입견을 내려놓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즉 ‘보여지는 대로’ 직시하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전자가 편견과 도그마의 노예라면, 후자는 진실과 사유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통(疏通)이 시대의 담론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소통의 중요성만 강조될 뿐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론이 생략돼서입니다. 어쩌면 소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우리 사회에 불통이 지배한다는 논리가 역설적으로 성립합니다. 소통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서양의 대표적인 학자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J 하버마스를 들 수 있다. 그가 창안한 커뮤니케이션이론(communication theory)은 지난 50년 가까이 서양의 사회과학계를 꾸준히 지배해 왔을 정도로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이 높은 이론입니다. 하버마스는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 사회 문제들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을 부탁받는 자리에서 “명륜당과 해인사에 모든 답이 있는데 굳이 내 철학을 통해 한국 사회를 연구하려느냐?”는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은 한국 학자들을 위한 단순한 말 잔치가 아니라 체류하는 동안 유가와 불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그 당시 장자를 접했더라면 장자 사상이 소통 해법의 진수라고 말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장자가 제시하는 소통의 해법은 무엇인가? ‘소요유’, 대붕(大鵬)의 비상에서 보듯이 대붕처럼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물론이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나 생각도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걸 발견할 것입니다. 이때 타협은 물론이고, 소통의 가능성까지 열립니다. 그래서 장자는 한 단계 더 높거나, 더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큰 지혜(大知)와 큰 말(大言)로, 또 한 단계 더 낮거나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작은 지혜(小知)와 작은 말(小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莊子는 성심(成心)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면 어느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현자(賢者)만이 어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愚者)에게도 스승이 있다는 경고를 남깁니다. 성심이란 ‘이룬 마음’인데 이는 각자가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마음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이룬 마음이 있어 이것이 불통(不通)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장자는 이룬 마음 그 자체를 불통의 원인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누구나 다 이룬 마음을 지닌다는 현실을 수용해서입니다. 장자가 문제시하는 건 이룬 마음을 각자의 스승(師)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각자의 의견을 절대시하면서 타협은 고사하고, 소통의 가능성마저 없애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모와 자식 간의 불통도 따지고 보면 각자 만들어낸 이룬 마음을 스승으로 삼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부모라도 자식의 이런 이룬 마음을 무시하면 서로 간에 당장 갈등이 빚어지고 맙니다. 여기서 자식 된 도리, 즉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식의 복종을 강요하면 이는 유가적 해법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유가처럼 윤리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또 자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갈등을 막연히 빈 마음(無心)으로써 벗어나고자 하면 이것은 불가적 해법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소통 해법은 불가에 비해 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넘칩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해서 아는데’란 어법을 자주 사용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 참모들은 침묵이 최선의 처신임을 바로 깨닫습니다. 이 점에선 박근혜 대통령도 비켜 나가지 못합니다. 박 대통령 말을 곰곰 씹으면 분명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리로 인해 자기 생각만을 스승으로 삼으면 호소력이 반감됩니다. ‘머리와 머리 간(brain-to-brain)’ 소통은 가능해도 ‘가슴과 가슴 간(heart-to-heart)’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통(疏通)이란 단어는 통함(通)과 뚫림(疏)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누군가와 통하려면 뚫림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성심으로 막혀 있는 걸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을까요? 莊子는 성심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허심(虛心)입니다. 허심은 무심(無心)처럼 빈 마음으로 번역되지만, 뉘앙스에선 큰 차이가 있다. 허심이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면 무심은 마음 자체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런 허심의 모습을 ‘산목(山木)’ 편에서 보여줍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좁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화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당장 비키라고 소리칩니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거기에는 욕설이 따릅니다. 아까는 화내지 않다가 지금 화내는 것은 아까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어서입니다. 자기를 텅 비움으로써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 어느 누가 그를 해치겠습니까? 장자(莊子)가 《제물론(齊物論)》에서 말한 ‘성심(成心)’이란,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지식, 편견으로 굳어진 ‘정해진 마음(고정관념)’을 뜻합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이념의 말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상대 진영의 말은 아무리 객관적인 진실이라도 무조건 거짓이자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대표적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성심’이라는 틀로만 재단하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비현실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며,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집착의 노예가 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님이 펼치고 싶었던 세계는 만물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조화와 비움의 공동체’였습니다. 인간을 짐승이나 기계와 구별 짓고 가장 고귀한 단계로 올리는 동력은 ‘아무도 보지 않는 홀로 있는 공간에서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내면의 양심(신독·愼獨)’입니다. 외부의 처벌이나 남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도덕적 자존감을 지키려는 의지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성숙이란 타인이 만든 개념(남의 시선, 사회적 성공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치란 무엇인가?”, “나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만의 고유한 삶의 개념을 스스로 정립하고 거기에 삶을 매칭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즉, 성숙은 ‘종속적 주체’에서 ‘자율적 주체’로 변모하는 인격의 완성 단계입니다. 사회의 수준은 시민의 수준과 지도자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시민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질문을 권장하는 사회’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특히 오지 선다형 시험을 폐지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묻는 서·논술형 평가와 토론 수업을 의무화해야 합니다. 가짜 뉴스나 진영 언론이 던져주는 자극적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이 프레임의 전제는 무엇인가?”를 의심해 보는 시민 인문학 교육을 확산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날이 그날이라고 지겨워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이 일침은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해하는 인간의 무지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며, 매 순간의 일상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우주 전체에서 단 한 번도 똑 같이 반복된 적이 없는 ‘새로운 순간의 연속’입니다. 지루함은 세상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관찰하는 내 마음의 감각이 마비(成心)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은 덕(德)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덕(德)은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답게 발현시키는 내면의 동력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멈추고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맹자가 말했듯,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측은지심(사랑), 수오지심(정의), 사양지심(겸손), 시비지심(지혜)이라는 선한 싹에 매일 질문과 성찰의 물을 주어 울창한 나무로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이라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려면 내 안의 고집과 편견(성심)을 비워내는 ‘심재(心齋)’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비움(虛)’과 ‘경청(聽)’입니다. 내 잔이 이미 내 주장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어떤 고귀한 지혜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틀림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과 다름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깊은 경청’을 실천할 때 비로소 사람의 함량과 품격이 거대해집니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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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을 반드시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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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생명을 살리는 안전장비, 선택의 기준은 '가격'이 아닌 '성능'이다
-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화재는 언제 어디서든 예고 없이 발생한다. 화재 현장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일으키는 원인은 화염보다 유독가스와 산소 부족이다. 결국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시간은 대피용 안전장비의 성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학교와 공공기관, 복지시설, 공동주택 등을 중심으로 화재 대피용 안전장비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이지만, 이제는 얼마나 많이 보급했는가보다 어떤 성능의 장비를 선택했는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안전장비는 일반 소비재와 다르다. 재난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사용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이나 외형보다 실제 성능과 검증 결과가 우선되어야 한다. 산소 공급 기능, 유독가스 차단 성능, 사용 가능 시간, 내구성, 공인시험기관의 시험 결과와 국가 인증 여부 등은 반드시 꼼꼼히 확인해야 할 핵심 요소다. 특히 화재 대피용 안전장비는 실제 위기 상황에서 충분한 호흡 시간을 확보하고 유독가스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할 수 있는 성능이 입증되어야 한다. 기술력이 검증된 제품은 단순한 보호장비를 넘어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안전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장비는 예산 절감만을 위한 구매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 구매 비용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재난 상황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지이며, 성능이 우수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비용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투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공공기관 역시 가격 중심의 구매 관행에서 벗어나 성능 중심의 평가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객관적인 성능 검증 자료와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제품을 선정하고, 도입 이후에도 정기적인 점검과 사용 교육을 실시해 언제든 활용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안전 수준은 검증된 기술과 우수한 품질을 갖춘 안전장비를 얼마나 올바르게 선택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술 혁신을 통해 성능을 높인 우수한 안전장비가 공공 안전 현장에 적극 보급될 때 국민의 생명은 더욱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 생명을 지키는 안전장비는 결코 가격으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품질과 검증된 성능, 그리고 실제 재난 현장에서 입증될 수 있는 기술력이 안전장비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며, 안전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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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생명을 살리는 안전장비, 선택의 기준은 '가격'이 아닌 '성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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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뢰는 최고의 품질에서 시작된다.
- [교육연합신문=김문찬 기고] 오늘날 소비자는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철학과 가치까지 함께 선택한다. 특히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식품산업은 무엇보다 안전성과 신뢰, 그리고 책임 있는 경영이 요구되는 분야다. 건강한 먹거리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연을 존중하고, 품질을 지키며, 소비자와의 약속을 끝까지 실천하려는 기업의 진정성이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식문화가 완성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DACO 안데스 청염을 이끌고 있는 김문찬 대표는 '신뢰를 품질보다 앞세울 수는 없지만, 품질을 통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경영철학으로 기업을 성장시키고 있다. 김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민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식재료'이다. 학교급식과 병원, 복지시설, 공공기관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급식 현장에서는 식재료 하나도 생명과 건강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기업의 경쟁력은 화려한 광고나 일시적인 판매 실적이 아니라 소비자가 오랫동안 믿고 선택할 수 있는 품질에서 나온다"며 "식품기업일수록 국민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은 DACO 안데스 청염의 생산과 품질관리 과정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데스 산맥의 청정 고산 염호에서 자연 증발 방식으로 생산되는 천연 호수염은 자연이 오랜 세월 만들어낸 귀한 자원이다. 여기에 철저한 품질관리와 안정적인 공급체계를 더해 소비자가 믿고 사용할 수 있는 프리미엄 식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학교급식은 친환경 농산물과 우수 축산물, 수산물뿐 아니라 소금과 조미료 등 기본 식재료까지도 원산지와 생산환경, 품질관리 수준을 꼼꼼히 살피는 시대가 되었다. 김 대표는 이러한 변화가 대한민국 식문화가 한 단계 성숙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한다. 특히, 성장기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학교급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건강한 생활습관을 형성하는 교육의 일부이다. 아이들이 매일 먹는 한 끼 식사는 미래세대의 건강을 좌우하는 중요한 투자이며, 급식에 사용되는 식재료는 그만큼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김 대표는 "좋은 식재료는 좋은 음식을 만들고, 좋은 음식은 건강한 사람을 만든다"며 "미래세대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는 것이 식품기업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기업의 역할을 단순한 제품 판매에만 머물지 않는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실천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생산방식과 사회적 가치 창출,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야말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건강 증진과 안전한 먹거리 문화 확산에 기여할 때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DACO 안데스 청염은 학교급식을 비롯해 병원, 복지시설, 공공기관, 외식산업 등 다양한 급식시장으로 공급을 확대하며 건강한 식문화 조성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품질혁신과 공급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천연 호수염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소금은 모든 음식의 시작이자 기본이다. 기본이 바로 서야 음식의 품질도 높아질 수 있다"며 "앞으로도 소비자가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품질과 책임 있는 경영으로 대한민국 식문화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김문찬 대표가 꿈꾸는 기업은 단순히 매출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다. 소비자가 가장 먼저 신뢰하고, 학교와 병원, 공공기관이 안심하고 선택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 품질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소비자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책임감이 쌓일 때 비로소 기업은 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는 작은 식재료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기업에서 시작된다. 자연이 만든 건강한 가치를 국민의 식탁으로 이어가는 김문찬 대표의 경영철학은 오늘도 건강한 먹거리 문화와 안전한 급식환경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식문화와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길이 될 것이다. ▣ 김문찬 ◇ DACO(다코) 안데스 청염 설립 경영 대표 ◇ 금령장학회 사무국장 겸 등기이사 ◇ 부산광역시 테니스협회 부회장 ◇ 국민통합위원회 부산지역 자문위원 ◇ 부산 금정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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