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오랫동안 남이 만들어 놓은 정답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외워서 대답하는 ‘응답자’의 삶을 강요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남의 질문에 대답만 하는 삶은 결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사회는 남의 생각을 따라가는 전술 국가에 머물 뿐입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판을 짜는 ‘질문자’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이 만든 모든 시스템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취약성(음)과 장점(양)을 동시에 가집니다. 이를 노자는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즉 “화 속에 복이 입각해 있고,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성장의 꼭대기에 이름에 쉽게 부러지는 취약성을 안고 있으며, 부드럽고 약한 것은 취약해 보이지만 무한한 변화와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장점과 취약성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어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취약성은 장점이 날아오를 높이와 깊이를 제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취약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거만함을 내려놓고 겸손함(虛)을 바탕으로 타인과 공존하는 지혜가 시작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각을 낳는 사전 단계는 ‘지각(Perception)’과 ‘여백(Space)’입니다. 생각(사유)은 공중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깊은 사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의 사전 단계가 필요합니다. 관찰과 감각의 세밀화입니다.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 격물(格物)의 관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 기존 도그마에 대한 회의(疑)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일상과 권위적 지식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이성적 의심을 품는 단계입니다. 셋째, 내면의 여백(虛靜) 확보입니다. 고요하고 비워진 마음 상태가 마련되어야 비로소 편견 없이 대상의 참모습을 비추고 사유의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취약성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유의 종속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과 제도는 생각이 만듭니다. 우리 삶을 채우는 물건과 제도 가운데 우리가 먼저 만든 생각과 물건과 제도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생각해서 산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한 생각의 결과를 따라 하며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사유의 종속성이 종속적 주체를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지식과 권력, 규범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간을 특정한 틀 안에 가두는 ‘담론(Discourse)’을 형성한다고 했습니다.
타인이 만든 지식체계와 가치관을 비판 없이 내면화한 개인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종속적 주체(Subjected Subject)’로 전락하고 맙니다. 남의 생각으로 사는 삶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닌, 권력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통렬한 경고입니다.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인간이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굳혀버린 편견의 마음을 ‘성심(成心, 정해진 마음)’이라 불렀습니다. 성심(成心에 빠지면 자기 기준만 옳다고 믿고, 타인은 ‘틀렸다.’고 단정합니다. 오늘날 정치적·이념적 극단주의, 혐오와 편 가르기는 모두 이 성심이 만들어낸 사회적 병리 현상입니다.
혐오와 편 가르기를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로는 ‘심재(心齋)’와 ‘좌망(坐忘)’, 마음을 비우는 심재(마음의 금식)와, 내가 쌓아온 고정관념과 명분, 편견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는 좌망(앉아서 나를 잊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 기준을 내려놓고 우주 만물의 다양한 결을 그대로 수용하는 인지적 유연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즉 보편적 질서의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기와 녹음기를 연결한 것이 아닙니다. Steve Jobs가 창안한 스마트폰은 ‘휴대 전화(통신)’, ‘MP3/녹음기(음향)’, ‘인터넷 통신기(정보)’ ‘다치 디스플레이(직관적 UI)’라는 이종(異種)의 기술들이 창의적 은유(Metaphor)와 융합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문명으로 재창조된 사건입니다.
새로운 가치는 무(無)에서 나오지 않고,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격격타(格格打)의 요소들을 연결할 때 탄생합니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 진리를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다리를 놓아주는 사유의 창조적 도구입니다. 연결과 은유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영토의 확장이며 건너가기입니다. 그래서 삶은 연결과 은유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유와 연결의 생활화가 일상화 되어야 합니다. 인문학과 과학, 예술의 교차 읽기, 즉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번갈아 읽으며 접점을 찾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라면)’ 질문 던지기, 즉 만약 유교의 ‘정명(正名)’을 AI 윤리에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처럼 서로 다른 개념을 짝지어 보는 사유 연습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입니다.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힘, 자기를 자기로 살게 하는 힘, 자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되는 힘이 ‘德’입니다.
자기를 자기로 살게 하는 힘은 ‘덕(德)’과 질문의 힘입니다. 유교에서 덕(德)이란 단순히 선한 마음씨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본성(덕성)을 그대로 구현하여 자기를 자기답게 만드는 내면의 동력’입니다. 이 덕은 오직 주체적인 질문을 통해서만 발현됩니다.
성격이 급하고 용맹한 제자 자로가 “좋은 말을 들으면 즉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즉시 행하겠느냐?”며 말렸습니다. 만약 자로가 질문하지 않고 남의 대답만 따라 했다면 자신의 치우친 본성을 바로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치우침을 깨닫고, 고유한 인격적 덕(德)을 완벽하게 다듬어 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찾아내 즐겨야 한다는 자쾌(自快), 근원을 살피는 찰기시(察其始), 틀에 박힌 신념에 빠지지 않고 과감히 결별할 줄 아는 오상아(吾喪我) 등 장자 사상의 핵심 기둥에 관해서도 삶의 실력과 연관해 해석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 그것을 살아보고 싶었다.” 『데미안』의 이 문장은 장자의 ‘자쾌(自快)’와 닿아 있습니다.
‘자쾌’는 결코 도피나 무위(無爲)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 삶의 질과 방향을 붙잡으려는 실천적 태도입니다. “남이 입혀준 비단옷을 입고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살아내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 거기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고 여겨집니다. 장자와 함께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장자가 말한 ‘자쾌(自快)’란 외부의 평가, 권력, 부,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누리는 절대적인 내면의 기쁨과 자유’를 뜻합니다. 타인의 인정 욕구 탈피(위기지학),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爲人)을 멈추고, 오롯이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한 공부와 삶(爲己)을 즐기는 것입니다.
동양철학의 지침은 내성외왕(內聖外王)과 충서(忠恕)입니다. “안으로는 성인의 인격을 닦고(修己), 밖으로는 인류와 만물을 편안하게 하라(安人).”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역지사지의 자비와 공감 능력으로 공동체와 상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서양철학의 지침은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와 주체적 사유입니다. 소크라테스와 칸트가 강조했듯, 타인이 만들어 놓은 교리와 선동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의 용기(Sapere Aude)”를 가지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의 대답을 외우는 노예의 삶을 끝내고, 내면의 양심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주인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는 참된 덕(德)이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주입식 교육은 학생들의 생각하는 힘을 약하게 만들어 창의력을 오히려 죽입니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미래에는 도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들을 기계처럼 공부하게 하지 말고, 기계가 할 수 없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역량을 개발하게 도와야 합니다”고 외치지만 변화는 ‘글쎄요.’입니다.
지금 전남광주특별시에서는 우리가 쓰고 있는 우리말, 우리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성인과 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에서 “우리말로 배우는 한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天(하늘 천), 地(땅 지)하고 몇 번 외우고 쓰던 암기식 교육에서, 天(하늘 천)은 ‘하늘’을 왜 ‘천’이라 할까? 地(땅 지)는 ‘땅’을 왜 ‘지’라고 할까? 人(사람 인)은 ‘사람’을 왜 ‘인’이라고 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하늘’, ‘천’, ‘사람’, ‘인’이라는 우리말을 깨우치는, 대답만을 강조하는 교실에서 질문하는 교실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저만일까요?
첫째, 한자를 공부하면 한글의 뜻을 알 수 있고, 둘째, 문해력 신장의 기초․기본이 되며, 셋째, 논리적 사고력의 기반을 이루고, 넷째, 추상적 사고력의 디딤돌이 되며, 다섯째, 대답형 교실에서 질문하는 교실로의 대전환의 출발이 되며, 여섯째, 대체 불가 대한민국 교육의 신기원 구축과 아울러 한글과 한자를 결합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때, 우주 이치를 담은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형성되어, 세계를 영도할 수 있는 인재 전당의 첫 삽이 전남광주특별시에서 시작되었음에 가슴 뿌듯합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