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제의 목요칼럼] 권력과 폭력
"우리가 문명사회로 오면서 쌓아온 것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갈등의 협상이다."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권력과 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강도가 든 총은 무서운데 경찰이 들고 있는 총은 왜 무섭지 않은가? 폭력의 시대를 걱정했던 바가 있다. 편협한 편가르기와 알고리즘에 의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싹틀 때부터 그 조짐은 보여왔다. 상대방의 폭력은 민주주의 파괴이지만 자신들의 폭력은 방어권이라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친구들이여 벌하고자 하는 충동이 강한 사람들을 모두 불신하십시오.’ 이 문장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니체는 처벌 욕구가 강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욕망이 있으며 이는 정의를 이루기보다 오히려 불의와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제선진국에 들어서던 한국에게 고소와 고발을 남발하는 정치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부분이다. 교육은 학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와 사회가 주는 교육이야말로 실제적인 산교육이다. 다른 존재를 포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보완의 대상이어야 한다. 화엄경의 핵심도 다른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갈등이 있다고 다른 쪽을 제거하면 세상은 무너진다. 공멸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고 후유증도 깊었다.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소설에서는 인간성과 권력의 대립을 통해 폭력의 본질과 권력의 잔혹함을 말하고 있다. 쿳시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두려움과 편견을 통해 만들어내는 ‘적’이 얼마나 허상적이며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이념이 만들어내는 사랑은 고귀하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반성과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위험한 사랑이다. 거짓 권력의 정신에는 사랑이 없다. 욕망만 있을 뿐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1928~2016)가 1990년 펴낸 『권력이동』에서는 농업사회(제1물결)에서 산업사회(제2물결), 정보사회(제3물결)로 옮겨가면서 권력이 이동하는 현상을 탐구했다. 사회를 통제하는 힘은 물리력과 부에서 지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제 법에 의한 판단이 권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 권력은 국민 구성원의 합의된 약속이며 곧 국가 권력은 법의 형태로 발현되고 국가 권력자는 이 법을 실행하는 자이다. 이를 법치주의라고 한다.
서로를 견제하고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지혜이다. 이미 오랜 기간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다.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진 것도 그 방법이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길이다. 쉬운 폭력의 길이 아닌 어렵더라도 사람다운 길을 가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은 결국 전 세계를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 이 말은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우리가 문명사회로 오면서 쌓아온 것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갈등의 협상이다. 그것이 폭력이었다면 가장 쉬운 야만의 길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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