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07(목)
 

[교육연합신문=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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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에 대해 궁금해한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우고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다면, 과거에 선배들이 내린 옳지 못한 선택들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역사를 잊는 자에게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징비(懲毖)란 말의 어원은 동양의 고전인 시경(詩經)의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란(患亂)이 없도록 조심한다(予其懲而毖後患: 여기징이비후환).”에서 유래하고 있다. 특히 국가의 지도자나 기업의 CEO, 개인들이 상황 판단을 잘못해 중요한 국사를 그르치거나 공익, 개인의 일을 크게 해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다. 

  신발도 끌고 다니면 바닥이 쉽게 닳기 마련이고 쉬 헌 신발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 꼴도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지적을 여러 차례 당한 경험이 있다. 소소하지만 역시 역사 교육이나 가정교육이란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속담에 ‘집안의 우환이 도둑이다.’란 말이 있다. 나라나 지자체가 하는 짓을 보면 집안 우환이 날이 갈수록 다들 앓아누울 지경이나 다름 없다. 

 

“나라에 변고가 생겼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다면 이 나라는 허깨비가 됩니다. 장차 후학들이 뭘 배우고 뭐가 되겠습니까?” 과거 KBS에서 방영되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징비록>에서 류성룡 역을 맡은 배우 김상중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언급한 대목이다. 이 드라마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담았는데, 말하자면, 과거 조정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다시는 그런 전란을 겪지 않도록 대비하자는 유비무환의 기록이다.

 

 왜, 지금 '징비록'인가?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그것을 성찰하는 것이, 어쩌면 역사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일 수 있다. 그럼, 왜 우리가 지금부터 한참 오래전에 존재했던 조선 시대의 국제 관계를 오늘날 살펴볼 필요가 있는지 그 얘기부터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한반도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쎈 네 나라의 입김 속에서 살고 있다. 지역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과거 글로벌 강국이었던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 그리고 여전히 세계 최강국인 일본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역사적 조건이 과거라고 달랐던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자, 한반도가 이렇게 민감한 지역에 있다 보니까 조선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강대국의 입김 속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정학적 현실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다. 배와 등 양쪽에서 적을 맞이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한반도의 정면부에 있는 중국 대륙, 그리고 배후에 있는 일본 열도라는 이 강대국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이겠지요.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잘못한 후에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서 반성한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마음을 써서 반성하지 못하므로 잘못을 반복한다. 우리에게는 반성한 후에 남긴 기록물이 귀하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란을 겪었는지보다 환란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 치욕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환란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자신을 잘 살필 일이다. 환란 속에서도 사적 이익에 눈이 먼 벼슬아치들에 싸인 채, 국가 경영의 길을 잃고 정치 공학에만 빠져 있던 선조가 제일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우리에게는 그래도 류성룡과 이순신이 있었다. 지금은 누가 선조인가. 누가 류성룡이고 누가 이순신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최진석 교수는 묻고 있다. 


그럼 유성룡은 누구인가?

  

류성룡은 네 살에 글을 읽고, 여덟 살에 『맹자』를 읽었다. 고향은 안동이지만, 공부는 한양에서 했다. 퇴계 이황 문하에서 몇 달간 수업을 받았다. 퇴계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퇴계의 칭찬을 받은 큰 제자로서 이후 퇴계학파의 한 줄기를 이뤘다. 영민했던 류성룡은 25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29세에 경연에 들어가 제일의 강관(講官? 경연 시간에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던 문관)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는 당파 간 갈등이 심했고 류성룡도 이런 갈등의 파고를 타고 고향과 한양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다 좌의정 재임 중인 1592년 임진년 전쟁이 일어났다. 1년 뒤 영의정에 임명되 전쟁이 끝나가는 1598년까지 정치와 군사를 책임지는 도체찰사를 겸임했다.

  

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요 벼슬아치들은 류성룡, 이순신,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이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이들은 좌의정(정1품), 좌수사(정3품), 이판(정2품), 대사헌(종2품), 도승지(정3품)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위의 수장이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조선에는 10월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마지막 전투는 11월 19일 노량에서 일어났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 실질적으로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이 끝났다.

  

그렇다면 류성룡은 전쟁의 시기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징비록』에서는 일본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류성룡은 신숙주가 일본을 알라고 했던 유언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징비록』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명, 일본, 여진에 대한 시각을 보면, 선조는 겉으론 명나라의 은혜로 산다고 했지만, 류성룡은 남을 구원하는 것과 남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면서 명나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고 보았다.”

 

류성룡은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백성의 마음이 왜 떠났을까. 민심을 무너뜨린 임금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류성룡은 전투를 줄 세워놓고 이를 분석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다채로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시각과 평가로 체계를 세웠다. 특히 백성들이 나라의 근간이자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전투를 수행하지 못함을 강조했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전투 현장을 샅샅이 봤던 사람으로서 류성룡은 꼼꼼히 정책들을 내놓았다. 전쟁 중이지만 전쟁 중이기에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류성룡은 영의정, 도제찰사, 훈련도감, 안집도감 도제조를 거치면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발탁해서 썼다. 진관제 복구, 곡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작미법(대동법의 근간) 시행, 이순신도 같은 생각을 했던 둔전, 염전 등의 건의를 시행했다. 북방 여진족에 대비한 건의도 많이 했다. 이 중 사대부들이 특히 좋아하지 않은 것이 작미법과 훈련도감 설치였다. 또 노비를 군사로 돌리거나 공을 세웠을 때 면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대부들은 반대했다.”

  

우리는 『징비록』 이후 징비했는가?  “류성룡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봤을까?『서애문집』을 보면 죽기 전 일주일 전에 쓴 詩가 있다. 이 詩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징비록』을 보면, 한 시대의 전쟁을 겪어낸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추측할 수 있다. 류성룡은 이런 것을 반복하지 말라며 『징비록』을 썼는데 조선은 과연 징비했을까?”


산은 말이 없고 두견새는 우는데

두견새 울어대도 산은 답하지 않네.

산은 비록 말 없으나 뜻은 이미 족하니

희부연 달 떠올라 매화 가지 끝이 희구나.  - 류성룡, 1607년 4월 30일 -


임진왜란 후에도 조선은 징비를 하지 않았고 청일전쟁 때는 결국 나라를 잃는 상황까지 왔다. 지금 우리는 징비를 하고 있을까? 지금 상황을 보면, 징비를 않고 있다. 사회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갈등 상황도 심하고 국가 전체가 새로운 꿈을 꾸거나 젊은 사람에게 꿈을 꾸도록 하는 것 같지 않다. 『징비록』이 지금 대두되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 한 나라의 힘을 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처럼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국난에 닥쳤을 때 이를 해결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어려울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부끄럽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고 라고 하는 정신을 강조했는데, 이 징비록의 정신은 계승되었는가? 유감스럽게도 계승되지 않았다. 위기가 사라지니까 위기의식도 사라졌고, 개혁을 하겠다라고 하는 의지도 사라졌다. 또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위기가 사라지고 나니까 역시 공염불 비슷하게 사라진다.

   

2012년,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국치일을 앞두고 모 방송의 화면에 충격적인 장면이 잡혔다. 저 양재동에 가면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카메라에 비친 기념관의 상황은 그야말로 경악하지 못해 처절했다. 벽에는 녹이 슬었고, 전기료가 없어서, 찜통 같은 더위 속에 윤봉길이 남긴 친필들은 전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관할하고 있는 구청, 보훈처, 서울시는 서로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상대방에게 떠넘긴다. 말로는 항일을, 극일을 열심히 강조하지만, 윤봉길과 같은 인물의 기념관조차 변변히 간수하지 못하는 우리가 이웃 나라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런 얘기를 한가로이 할 수 있을까?  징비록에 나타난 임진왜란 당시의 여러 상황을 놓고 보면, 외교와 교섭의 힘은 한 나라가 갖고 있는 능력과 힘에 딱 비례한다. 이글은 징비록에 대해 교훈의 말씀을 주신 분들의 덕택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문덕근 사진.jpg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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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왜, 지금 '징비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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