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15(목)
 
[교육연합신문=김수호 기고]
한일청소년평화교류는 매년 광주지역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광주교육청이 지원하는 역사기행을 통한 한일 간 평화운동 교육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주관한다. 여러 지원자를 물리치고 선발되었을 때 난 무척 기뻤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우리 조선 근대사의 이해를 통해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국제적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가기 전 근로정신대에 관한 역사와 교류하고자 하는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미츠비시·조선여자정신대소송을지원하는모임(약칭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활동, 그리고 정신대에 끌려가셨던 할머니들의 상황에 관한 사전교육을 받았고, 설레임과 걱정이 혼재되어 마침내 평생 처음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의 창으로 비춰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비행시간 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 도착한 첫 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방문한 곳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츠비시중공업 직원으로 근로정신대 소녀들과 같이 근무하셨던 무라마쓰 할아버지의 증언을 듣는 것이었다. 강제로 데려온 조선 소녀들은 위험한 곳에서 일하게 했고, 조금 더 안전한 곳은 ‘일본부인회’ 사람들이 일하게 했다고 하셨다. 남자들도 하기 힘든 노동을 조선 소녀들은 해야 했고,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하라는 말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것, 임금은 일본인들과 달리 맨 아래 등급 즉, 가장 낮은 월급을 지급하도록 했다는 사실 등을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증거 자료와 함께 생생히 증언해주셨다. 증언을 들으면서 나라 없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징용 당해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 상황에 대하여 분노와 답답함을 느꼈다.
 
증언을 들은 후 곧바로 이어진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모비 참배가 있었다. 일본에서 약 20여 년 동안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일본 내 양심 지식인들 모임인 나고야 소송지원회는 1988년 도난카이 지진으로 희생된 조선인 소녀 6명을 포함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이 추모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이 추모비는 1944년 12월 7일 오후 1시 36분, 당시 지진 발생시각의 태양빛의 입사 각도와 직각이 되도록 경사를 맞추었으며, 창씨 개명된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을 새겼다고 했다. ‘나고야소송지원회’ 분들의 진실한 인간애가 느껴졌다. ‘평화란 인간애로부터 시작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둘째 날은 나고야 외곽에 위치한 각왕산 일태사에 세워진 조선인 희생자 순난동포위령비를 탐방했는데 이때 나고야 소송지원회 사무국장이신 고이데 상의 설명이 있었다. 그분의 설명 마지막은 “나고야에서 돌아가신 조선인 남자들 열세 명 중 열두 명은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 분들을 알거나 이 분들의 유족을 알게 되면 연락을 주라”는 당부였다. 고령임에도 자신의 일에 끝까지 목표를 완성하려는 고이데 상을 보며 평화를 위해 애쓰시는 진실을 느꼈고, 그분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오후에는 나고야 시민들의 기금으로 건립고 운영되고 있는 ‘피스 아이치’ 평화회관을 방문했다. 전쟁당시 일본이 당했던 피해뿐만 아니라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731부대, 일본군 위안부, 근로정신대에 관한 사실들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피스 아이치’를 보면서 세계평화를 향한 나고야 시민들의 훌륭한 양심을 배웠다.
 
이어서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쉼터 ‘코리안넷아이치’에서 그들의 삶의 상황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힘들게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느끼면서 재일동포 1세, 2세 노인들의 복지관 ‘세토마당’을 찾아 재롱을 피우고 이야기도 나눴다.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셨고,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깊은 민족애를 느끼게 하는 동포 할머니들의 눈물은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이 분들이다.’라고 생각케 했다. 일제강점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온 사람들이 해방 이후 일어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으며, 돌아가더라도 분단된 두 조국을 두고 선택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이 분들 앞에 놓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외국인의 신분으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는 아직 강점기에서 해방되지 못했다’는 말이 그 말이었구나.
 
넷째 날, 38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 당시 미츠비시중공업이 운영했던 세토 지하 군수공장 터가 있는 산으로 향했다. 그다지 높지 않는 산이었지만 찌는 듯한 오후 날씨와 극성스런 모기들의 공격에도 짜증내는 우리 교류단은 한 명도 없었다. 친구들과 나는 징용된 소녀들과 그때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그곳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막혀있는 군수공장 지하입구 터널을 손전등으로 비춰보면서 나이 어린 소녀들의 고통을 생각했다.
 
마지막 프로그램에 따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본 학생들(대학생과 고등학생들)과의 토론 시간을 가졌다. 이 토론은 처음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중반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원했던 주제로 흘러갔다. 주로 우리 쪽 학생들의 질문으로 촉발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강제징용문제, 이들의 분쟁해결방법, 한일 간 평화를 위한 과거사 해결 방안, 일본교과서 왜곡문제 등을 신랄하게 질문하면서 토론이 진행되었다. 결론을 내려야 할 즈음 토론회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팀 인솔교사로 참여하신 한 교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서는 폐쇄적 민족주의 관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아울러 NGO나 NPO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과거 역사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것으로 예기를 했고, 현재 닥쳐있는 문제에 대하여는 우리들과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예민한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예기할 즈음에 시간이 종료되어 큰 아쉬움을 남기고 서로 간에 인간적인 우정을 느끼며 헤어졌다.
 
이번 한일청소년평화교류의 소중한 경험 중 홈스테이도 빼놓을 수 없다. 나와 팀원 3명을 맡아주신 홈스테이 엄마 오오노상의 친절함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좋은 음식은 물론 새벽에 목마를까봐 물을 챙기는 것, 에어컨 온도에 신경 써 주시는 것 등 세세한 부분까지 자식들 대하듯 챙겨주셨다. 일본문화의 이해를 위해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혀주시기도 하였다. 한 번 입는데 다섯 번이나 끈을 묶는 과정을 두 번씩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각자 입혀주셨다.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 "다이죠부데스까?", "아리가또고자이마스"라는 말을 연신 반복 했었다. 그분의 보살핌은 그분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으며, 좋은 추억과 함께 인간적인 정에 흠뻑 빠지게 했다.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나고야 소송지원회 대표님이신 다카하시 선생님은 우리를 배웅해주시면서 “우리는 이길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길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첫 날 무라마쓰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일본인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증인으로서 생을 다할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이 분들의 진심어린 말은, 평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 번 더 일깨워 주었다. 진정한 평화와 진실은 거짓과 외면 속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이라는 것을…….
 
■ 광주송원고등학교 2학년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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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기고] 아픈 역사, 그리고 양심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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