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오랫동안 남이 만든 정답과 기술을 모방해 가장 빠르게 추격해 온 ‘전술 국가’, ‘추격 국가’, ‘따라 하는 국가’로서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남의 지식과 삶의 전략을 수입해 쓰는 단계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육이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를 길러내지 못할 때, 사회는 극단적 혐오와 분열에 갇히고, 개인은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는 종속적 삶을 살게 됩니다. 지식 수입국을 넘어 주체적인 사유의 전략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오직 서열화된 상대평가와 입시를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에 갇혀 있습니다. 미래 교육은 정답을 외우는 수동적 지식인을 넘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문제를 정의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완성하는 공부)’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유하지 못해 타인의 선동과 진영 논리라는 ‘성심(成心: 정해진 마음, 莊子)’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없으니 외부의 잣대로 타인을 낙인찍고 배척합니다. 여기서 孔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태도,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서(恕)의 정신을 일상의 언어와 공론장에 복원해야 합니다.
지식 수입국 탈피를 위해 학교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 채점’에서 ‘문제 제기(Problem Framing)’로의 전환입니다. 선진국이 해결해 놓은 문제의 해법을 암기하는 교육을 멈추고,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정의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시험 체제를 걷어내고, 학생의 논리적 맥락과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는 서·논술형 평가 및 토론 수업을 정규 수업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남이 해결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방으로는 결코 선도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삶과 현장의 결핍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를 이론적 도구로 해결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생각’은
‘남’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도 “자신을 향해 걷는 길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할 만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수고 중에 제일 큰 수고는 ‘지적인 수고’입니다.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알려고 하는 그런 수고도 하지 않고,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대책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가?”와 같이 정해진 답이 없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4시간 동안 자신의 논리로 에세이를 작성하게 합니다.
또한 핀란드의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에서는 교과목의 경계를 허물고 ‘기후 변화’, ‘도시의 교통 혼잡’ 등 실제 현실의 복합적인 문제를 프로젝트 단위로 학생들이 직접 분석하고 대안을 설계하게 합니다.
생각하는 삶으로의 이동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판단의 유보’와 ‘인지적 여백(虛靜)’의 확보입니다. 자극이나 정보가 주어졌을 때 즉각 반응하거나 남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심(多聞闕疑)을 품는 3초의 간격을 확보하는 훈련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치를 부여하고 제도를 만들어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주체’입니다. 학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예술·기술·도덕 규범을 직접 설계하고 표현하는 ‘창작자(Creator)’의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발도르프(Waldorf) 교육은 기성 교과서를 쓰지 않고,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에포크(Epoch) 공책을 직접 글과 그림으로 완성하며, 수공예와 연극을 통해 물질과 문화를 몸소 빚어내는 주체성을 기르도록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물건을 창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후기 이후 근현대 압축 성장기 동안, 서구 선진국이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철학과 기술을 ‘빠르게 베껴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은 선진국이 하고, 우리는 실행만 한다.”는 지식의 하청 기지 구조가 교육과 사회 전반에 무의식적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1999년 타임지 기사(“Asians cannot think.”)의 함의와 한국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동아시아 국가들이 뛰어난 암기력과 제조 기술로 경제 성장은 이루었으나, 독창적인 개념 설계, 비판적 사유, 원천 철학을 창출하는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 뼈아픈 통찰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우월주의이자 인종차별적 편견”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분노하는 민족주의적 반응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성찰하고 창의성 교육을 논의하는 자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와 철학을 기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기적인 경제 성장과 입시 중심 사회에서 철학은 ‘돈이 되지 않고 비효율적인 학문’으로 치부되었으며, 질문하는 시민보다 지시에 잘 순응하는 기능적 인력을 대량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고등학교 3학년 전 계열 학생에게 주당 수 시간씩 철학을 필수로 가르치며 국가 대입 시험(바칼로레아)의 첫 관문으로 치릅니다. 미국/영국에서는 초등 단계부터 ‘어린이를 위한 철학(P4C: Philosophy for Children)’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그림책이나 일상의 딜레마를 두고 교사와 학생이 둥글게 앉아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문화를 운영합니다.
‘지적인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는 습관을 기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질문 일기’의 생활화입니다. 매일 마주치는 일상이나 뉴스에 대해 “이 현상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최소 하나씩 스스로 던지고 3줄 이상 답을 추론해 보는 훈련을 합니다.
더 나아가 즉답(Easy Answer) 피하기입니다.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때 포털이나 AI의 단편적 검색 결과에 즉시 의존하지 않고, 최소 5분간 스스로 가설을 세워본 뒤 교차 검증하는 ‘지적 인내심’을 체화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서 왔을까요? 외적 비교와 획일화된 정답의 강요입니다. 어릴 적부터 “너는 무엇을 원하니?(不言之敎)”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명령(言之敎)만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불안이 한 몫을 합니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문화가 청년들의 내면적 욕망을 마비시키고 안전한 기성 경로(공무원, 대기업 등)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수월한 삶을 위한 도구로는 ‘추상’과 ‘은유’입니다. 추상(Abstraction)은 복잡한 현실의 군더더기를 쳐내고 핵심 뼈대(본질)만을 추출하는 능력입니다. 은유(Metaphor)는 서로 전혀 다른 두 영역을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을 빚어내는 능력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를 복잡한 전자 기계가 아닌 “정신을 위한 자전거(A bicycle for the mind)”로 은유하여, 인간의 사고력을 확장하는 도구라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규정했습니다. MIT 미디어랩에서는 순수 과학, 공학, 예술, 인문학 연구자들을 한 공간에 섞어 이종(異種) 개념 간의 은유적 융합을 통해 혁신적 인터페이스를 창조합니다.
‘생각하는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내 안의 기준’ 세우기(爲己之學)입니다. 남의 시선과 사회적 명예(爲人)를 위해 살던 관성을 멈추고,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내 양심을 비추어보는 신독(愼獨)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들이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닌 “내 양심과 이성은 무엇을 요구하는가?”로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의 대답을 외우는 삶은 노예의 삶이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삶만이 주인의 삶입니다. 주입식 암기의 굴레를 벗고 아이들에게 질문할 권리와 사유의 여백을 돌려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남의 뒤를 쫓는 전술 국가를 넘어 세계의 문명을 선도하는 당당한 전략 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생각을 시작하는 곳으로 만들 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바꿀 때입니다. 경쟁과 불안은 존재의 조건입니다. 좋고 나쁘고 이전의 문제입니다. 경쟁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약하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강인함을 만드는 원천입니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