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30(일)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본지는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기념관에서 알고리즘까지, 역사를 둘러싼 네 가지 질문’을 주제로 김춘식 논설위원의 기획 칼럼을 총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본 칼럼은 필자가 포스텍(POSTECH) 재직 당시 공동 저자로 참여한 기획 도서 《기억하는 인간, 호모 메모리스: 기억과 망각에 관한 17가지 해석》(책세상, 2014) 제3장 수록작 〈기억과 망각의 역사: 역사 소환과 기억 정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원작의 학술적 통찰을 토대로,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적·기술적 맥락과 현안에 맞게 한층 깊이 있게 재구성된 이번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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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의 상징적 반환점을 돌아선 오늘날, 달력 속 기념일과 추모일은 더욱 빼곡해졌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벌어진다. 과거를 함께 기억하자고 약속한 날들이 늘어날수록, 역사를 둘러싼 반목과 갈등도 한층 첨예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의 타래를 풀려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역사'라는 말이 겪어낸 신세 변화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20세기 전반, 인류는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사이,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스탈린 독재가 연이어 도래했다. 인류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18세기 계몽주의 이래 인류가 이성의 힘으로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진보하리라 믿어왔건만, 그 이성의 절정에서 가장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거대한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차가운 의심이 싹텄다. 우리가 배운 역사란 한낱 승자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엮어낸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여기에 두 번의 거센 파도가 더해졌다. 1968년 유럽을 흔든 학생·문화운동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던 권위주의 역사관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어 냉전이 해체되고 세계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단일한 국가 단위로 설명되던 전형적인 역사 서술은 설 자리를 잃었다. 문화비평가 호이센(Andreas Huyssen)은 이 시기를 "시간 질서가 무너진 시대"라 파악했다. 거대 서사로서의 역사가 비틀거리며 비워둔 그 열망의 자리를 파고든 것이 바로 '기억'이었다. 

 

역사학 내부의 지형도 크게 개편되었다. 과거의 역사학이 "누가 더 객관적으로 과거를 복원했는가"를 겨루었다면, 국가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지워버릴 때 객관성이라는 공식적 잣대만으로는 역사의 비극을 모두 담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곧 '기억'이 진실을 드러내는 강력한 통로로 떠올랐다. 동시에 역사학의 시선은 거시적 국가사에서 미시사(Microhistory)로 이동했다. 거창한 왕조와 전쟁 대신, 이름 없는 한 사람, 한 마을, 일상의 한 장면을 파고들며 개인이 고통을 어떻게 통과하고 기억해 냈는지가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학이 다루는 기억은 개인의 사사로운 추억에 머물지 않는다. 여럿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규정하고 구성해 온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이다. 사회학자 알박스(Maurice Halbwachs)가 통찰했듯, 기억을 떠올리는 주체는 개인일지라도 그 기억을 형상화하고 채색하는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틀이다. 우리가 무엇을 또렷이 기억하고 무엇을 까마득히 잊을지조차 사회적 관심사와 권력 관계에 의해 조율된다는 뜻이다.

프랑스 역사가 노라(Pierre Nora)는 여기에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라는 상징적 개념을 보탰다. 기념관, 기념비, 추모일 같은 공간과 의례들이다. 그의 통찰은 자못 매섭다. 이러한 장소가 도처에 들어서는 것은 기억이 풍요롭게 살아 숨 쉬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기억'이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고통의 서사가 끊어질 때, 사회는 서둘러 돌과 철근으로 비석을 세운다. 독일의 얀 아스만(Jan Assmann)과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 부부 역시 이를 '기억문화'(Erinnerungskultur) 연구로 승화시키며, 상징물이라는 제도적 그릇 없이는 기억이 오랫동안 전승될 수 없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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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터는 기억이 살아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워진다. 기념비 또는 기념관 전경(예: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기념관, 5·18민주묘지 추모탑)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엄엄한 사실이 있다. 기억은 지나간 과거에 고정된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의 욕망에 의해 호출되는 '현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정치학자 허시(Herbert Hirsch)의 지적처럼, 이제 기억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 누가, 언제, 어떤 목적을 위해 과거를 불러내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전혀 다른 얼굴로 재구성된다. 하나의 과거를 두고 무수한 기억이 각축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기억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망각이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기억에 한계가 있듯 지나간 일들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망각이 순수한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을 쥐어잡은 주체가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장면만 도드라지게 조명하고, 불리하거나 수치스러운 장면은 어둠 속에 침묵시킬 때가 많다. 이를 우리는 '기억의 정치'라 부른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기득권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일은 너무나 손쉽게 일어난다. 

 

그렇기에 기념관은 숭고한 추모의 장소인 동시에, 극도로 위험한 기억의 전장이 된다. 기념관은 사라져가는 고통의 기억을 보존하는 소중한 공간이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릴지 누군가의 의도가 정교하게 개입된 건축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The U.S. Holocaust Memorial Museum)과 중국 난징의 난징대학살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을 나란히 비교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곳 모두 참혹한 인류적 범죄를 기록한 진지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국가적 기억의 정치가 강렬하게 작동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답은 명료하다. 과거를 접할 때 두 가지 질문을 주체적으로 던지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첫째, "이것은 검증된 사실인가?" 둘째, "누가, 언제, 어떤 의도로 이것을 기억의 상징으로 호출했는가?" 지역의 작은 기념비나 국가 기념일을 조명하며 건립 주체와 배경을 추적하는 활동은 훌륭한 시작점이 된다. 나아가 중등교육과 대학 등 고등교육 현장에서는 사료와 증언, 기념물, 그리고 후대의 해석을 엄격히 구분하여 인용하고 논증하는 '논리적 글쓰기와 발표·토론'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 구분을 스스럼없이 혼동하는 글은 아무리 수사가 화려해도 논증이 아니며, 근거와 해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발언은 아무리 유창해도 성찰적 토론이 될 수 없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기억은 맹목적인 신화로 전락하고, 기억의 온기를 잃은 사실은 차디찬 통계표에 갇히고 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화와 통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엄정함과 기억의 서사를 융합하여 역사적 통찰을 다듬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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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식

동신대학교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역사철학부 석사학위(역사학, 교육학, 정치학), 동 대학 철학박사학위(서양근현대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2024 칼만 펠로우(독일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초대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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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기념일은 늘어나는데, 왜 다툼도 늘어날까: '역사'와 '기억'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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