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5(토)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도시의 새벽, 버스 정류장 전광판에 깜빡이는 문장을 보며 생각한다. 이 짧은 문장은 어디에서 왔는가. 소리의 결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모자라다. 우리의 언어는 물론 한글이지만, 우리의 문화적 문장은 그보다 오래된 심층에서 떠오른다. 거북의 등과 짐승의 뼈에 불을 대어 균열을 읽던 시간, 그 균열 따라 새겨진 선과 점이 우주의 질서를 불러오던 순간. 갑골문은 그 선과 점의 고향이고, 한민족 문화는 그 고향에서 길어 올린 상상력으로 오늘을 말한다. 이 글은 그 뿌리의 언어가 어떻게 한반도의 삶과 신화, 오늘의 감각으로 이어졌는지, 한 편의 칼럼으로 더듬어 본 기록이다. 
 
□ 언어와 문자, 문화의 뿌리
언어는 소통의 도구 이전에 세계를 자르는 칼날이다. 무엇을 하나의 ‘것’으로 보고, 어디서 경계를 긋는가에 따라 문화는 다른 얼굴을 얻는다. 문자란 그 칼날을 눈으로 보이게 만든 도면이다. 갑골문은 하늘과 땅, 해와 달, 짐승과 사람을 몇 획으로 표상하는 법을 발명했다. ‘日’의 원과 점, ‘月’의 초승, ‘人’의 단순한 두 다리, ‘巫’의 교차하는 팔과 기립한 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압축한 결정체였다.([그림2, 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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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훨씬 훗날, 소리의 뼈대를 정교하게 설계한 위대한 발명이다. 그러나 소리가 박히는 의미의 그릇, 말의 길을 내는 상징체계는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조상들은 해를 ‘오른다/진다’가 아니라 ‘나타난다/숨는다’로 느꼈고, 새의 궤적을 길의 표식으로 삼았다. 이 감각은 언어의 은유로 축적되고, 문자의 상형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답답하다”라고 할 때 가슴을 쥐어짜는 손의 느낌으로 말하고, “하늘이 높다”라고 할 때 가을의 빛을 떠올린다. 소리의 언어(훈민정음) 위에 의미의 언어(상형과 관념)가 겹쳐진 이중 구조, 그것이 한민족 문화의 문장법이다. 
 
□ 동이족의 문화가 한반도에 전한 것
‘동이’라는 이름은 지도 바깥의 사람을 가리키는 낙인이 아니라, 바다와 숲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생활인의 또 다른 호칭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물의 길을 따라, 새의 길을 따라 흘러들었다. 해안을 타고 건너온 것은 단지 옥과 패물, 활과 배가 아니었다. 제천(祭天)의 감각, 백의(白衣)의 간결함, 옻칠과 목공의 손끝, 해와 새를 기호로 새기는 미감이 함께 전해졌다. 
 
한반도의 여러 공동체가 계절을 맞아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와 춤으로 공동체의 시간을 묶었던 기억은 이 전승의 결을 닮는다. 바다에서 온 사람에게 태양은 절대의 시계였고, 숲의 사람에게 새는 소식을 전하는 사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축제를 ‘놀음’이 아니라 ‘하늘에 보이는 일’로 삼았고, 흰옷을 단지 검소함이 아니라 빛을 받는 표면으로 여겼다. 물건의 기술과 신앙의 형식, 생활의 미학이 함께 다리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새로운 질서를 키웠다. 문화는 언제나 사물과 상징이 함께 이동할 때 깊게 뿌리내린다.

□ 한민족 신화와 갑골문적 상상력
신화는 공동체가 자신을 설명하는 첫 번째 문장이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하늘의 아들이 나라를 세우며,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 활을 쏘아 길을 연다. 이 모티프들은 갑골문이 그려낸 자연의 도면과 정확히 맞물린다. ‘弓’의 곡선은 단지 무기의 형상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잇는 장력의 기하학이다. ‘鳥’는 땅과 하늘을 횡단하는 매개이자, 태양의 길을 표시하는 움직이는 점이다. ‘日’과 ‘月’은 신화 속 영웅의 출생과 죽음, 계절의 전환과 국가의 제사를 이끄는 표지판이었다.([그림 2, 4] 참조) 
 
곰과 호랑이, 사슴과 물고기. 이 동물들은 갑골문에서 몸의 특징으로 간명하게 표상되고, 신화에서는 길을 여는 지혜로 재해석된다. 동굴과 산, 강과 바다의 문턱에서 행해졌을 통과의례는 신화 속 금기와 시험으로 형태를 바꾸고, 제사의 시간표는 별자리의 순환과 함께 영웅 서사의 배경이 된다. 갑골문적 상상력이란, 자연의 형상을 기호로 변환하는 기술이면서 인간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포갤 줄 아는 감각이다. 신화는 이 감각을 서사로 만든 기록이다.([그림 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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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의 옛이야기에는 유난히 하늘을 우러르는 장면이 많다. 활을 들어 첫 화살을 하늘로 쏘고, 새의 비상을 보며 길일을 재고, 해무리와 달무리의 변화를 날씨와 운명의 언어로 읽는다. 문자 이전에 먼저 익힌 해석법이 있었고, 그 해석법을 문자로 굳힌 것이 은자였다. 신화는 그 문자에 살을 붙여, 공동체의 기억을 노래로 만들었다.

□ 문화의 원형, 오늘의 울림
오늘 우리의 눈앞에는 뼈 대신 스크린이 있다. 그러나 원형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형이란 형태의 과거가 아니라 감각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울림만 짚어본다. 
 
첫째, 세계 읽기의 태도다. 갑골문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제의 전쟁은 왜 졌는가, 내일의 비는 올 것인가, 아이의 병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균열을 읽어 답을 얻으려는 태도는 오늘의 데이터 분석과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질문이 언제나 공동체의 안녕과 하늘의 질서를 함께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효율의 숫자만이 아니라, 공존의 징후를 함께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몸의 언어다. 눈·입·손·발의 글자가 기록하듯, 몸은 사유의 첫 도구였다. 설계도와 보고서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손의 감각과 발의 리듬이 만드는 지식이 중요하다. 장인의 손끝, 농부의 허리, 무용수의 호흡은 사전 없는 문장이다. 교육은 다시 몸의 문해력을 회복해야 한다. 글자를 안다는 것은 몸을 통해 세계를 느끼는 법을 되찾는 일이다. 
 
셋째, 축제의 문법이다. 제천의 기억은 오늘의 축제로 되살아날 수 있다. 하늘을 기쁘게 하던 의식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관계를 새로 묶는 공공의 시간으로서. 지역의 바다와 산, 별이 잘 보이는 밤을 무대로 삼아, 음악과 공예, 농사와 시장이 한데 엮이는 축제는 현대판 동맹·영고·무천이 될 수 있다. 축제는 소비의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체의 시간표여야 한다. 
 
넷째, 디자인의 문맥이다. 원과 점, 선과 획으로 세계를 환원한 갑골문은 오늘의 시각 언어로도 살아 있다. 도시의 표지판, 공공 브랜드, 학교와 도서관의 그래픽에 해·달·물·새의 최소 단위 기호를 응용하면, 장소는 말없이 자신을 설명한다. 말이 너무 많은 도시에서,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기호의 질서는 미덕이다.([그림  5] 참조)
마지막으로, 기억의 방식이다. 뼈에 새겼던 기억은 지워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쉽게 쓰고 쉽게 잊는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남길지를 다시 묻자. 기록은 많아졌지만 공명이 적다. 오래 남길 문장, 함께 돌아볼 문장을 고르고, 남기는 행위 자체를 의식으로 삼아야 한다. 학교든 가정이든 ‘기억의 의식’을 회복하는 작은 의례가 필요하다. 
 
칼럼의 지면은 늘 모자라다. 그러나 부족한 지면 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한민족 문화의 깊은 문장법은 갑골문이 열어 둔 상상력의 문간에서 시작했다. 자연을 기호로 만들고, 몸을 문장으로 삼고, 공동체를 하늘과 연결하던 그 질서. 우리는 이제 뼈 대신 픽셀에, 제단 대신 광장에, 옻칠 대신 코드에 새긴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질문은 같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남기며,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그 질문을 품고 새벽의 전광판을 다시 본다. 점멸하는 빛의 점과 선이, 문득 오래된 획처럼 보인다. 먼 옛날 불의 균열을 읽던 눈빛으로, 오늘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뿌리의 문장으로 미래를 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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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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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한민족 문화와 갑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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