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4(목)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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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아마 이름일 것이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동서양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절대의 세계는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없기에 ‘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相對의 세계에서는 記憶하고 기리기 위해 이름을 짓는 것이었으리라.


우리가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한자에서 살펴보면, ‘이름 名’이라는 글자는 ‘이름’과 ‘명’이라는 우리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름이라는 글자는 ‘∼에 이르다.’ ‘드러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名’이라는 글자는 ‘해의 발(夕)’이 현재에 이르는 곳(ㅁ)를 의미한다. 따라서 태어나서 현재에 이르는 곳이 名이다. ‘어디에 이르다.’이다. 


그래서 이름을 듣거나 인터넷에서 이름을 치면 그 사람의 현재 위치나 상황을 알 수 있다. 名(이름 명)이라는 한자에서, 이름을 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말 명은 ‘드러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름을 보거나 들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나이나 관직에 이르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지위에 맞게 언행을 일치하게 하려는 선인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사회 기풍은 어디에서 찾고 볼 수 있을까? 


이제까지의 ‘이름 명’하고 외우는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자는 모양도 중요하지만 ‘이름’을 왜 ‘명’이라고 했을까? 이름도 명도 우리 말이지 않은가? 우리말을 잘 알아야 한자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한자의 생명은 음가(소리)를 아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말도 한자도 잘 알아서 어휘력의 신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어휘력이 중요하고 그래서 어휘력 신장을 위한 각종 연수회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 말의 의미를 가르치는 연수회는 있기나 한가?


이름은 사람이나 사물을 대변한다. 그래서 인사 발령 시기가 되면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관장으로 온다는 이름만 보고도 그 기관의 미래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인간의 언어 시작 또한 사물이나 인간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부터 시작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저물어가는 나라에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이야기했던 한 청년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의 첫아들에게 지어준 필립(必立)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보면서 손에 불끈 힘을 쥐면서 “나도 저처럼 되리라.”는 희망의 경험 아니면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하고 힘이 빠지면서 이름값도 못한다고 생각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私心을 버리고 公心으로 살았다는 삶의 가치를 국민의 이름으로 훈장을 드리는 것이리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같은 이름을 갖고서 빛나는 이름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는 부모, 온 가족의 희망이 응축되고 이어져 내려와서 지금에 있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김소월이 ‘招魂’이란 시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에 헤어진 이름이여!”라고 절규한 것도 이름과 생명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중국이나 한국 사람의 이름에는 깊은 철학과 운명이 나타나 있다.


가르침이란 어쩌면 후세들에게 좋은 이름을 남기도록 마음을 다잡고 행동으로 옮기는 최고의 값있는 어른들의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배우는 사람이 “나도 저분처럼 되어야지”하고 다짐을 하게 하는 과정은 아닌가? 그저 남의 이론이나 먼저 읽은 것을 전달해 주거나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무나 돌에도 무늬가 있듯이 사람의 말과 행동에도 무늬가 있다. 가르침은 제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 진리는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삶의 이치인 것이다. 가르침의 내용은 실천할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란 그 속에 사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소중히 여기는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히는 것이다. 그럼 어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는 모습은 아닐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외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혹시나 외국에서 공부했던 것을 자랑하고 그 문물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것을 폄훼하는 일은 없었는가?


더 나아가 우리 후세들에게 事大主義 사고를 주입하게 한 일은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말을 배우는 것보다 외국말을 먼저 배우게 하고, 거기에서 외국의 것이 우수하다는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일은 없었는가? 대화 중간에 영어를 섞어서 사용하면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태도를 부추기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가?


이름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로부터 구분되게 해줌으로써 ‘자아’를 부여하게 한다. 그래서 이름은 인간에게는 거룩하고 무거운 과제라고 이규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이 아닌 본인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학교에서는 이름을 소중히 하는 행사는 있는가? 아니면 출석부는 있는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눈 맞춤을 해 본 적은 얼마나 되는가? 자신의 마을 이름과 유래를 아는가? 가슴에 기억하는 이름은 누구인가?


이제마(李濟馬, 1838~1900)는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보약은 현인을 현인으로 알아볼 줄 아는 것 외에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賢其賢의 사회 기풍이 보다 좋은 사회로 가는 보약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賢者들의 이름이 이야기되는 사회를 그려보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 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하는 안창호 선생의 외침이 주는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삶의 자세는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안부를 묻고 꿈과 희망을 그리는 자신과의 아침 인사는 유일무이한 삶의 향연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더 나아가 하루에 한 분의 성인을 불러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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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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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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