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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기고] 김광명 부산시의원, "세븐브릿지 투어를 완주하며"
    [교육연합신문=김광명 기고] 지난 청명한 가을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열린 '2025 세븐브릿지 투어'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국내·외 3000여 명의 라이더들이 참가한 이번 행사에 저 역시 한 시민이자 시의원으로서 전 구간을 완주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세븐브릿지 투어는 부산을 대표하는 77㎞와 33㎞ 두 개의 코스로 구성됐다. 참가자들은 벡스코에 집결해 100명 단위로 광안대교로 이동한 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을숙도대교 등 4개의 해상 교량과 부산항, 낙동강 하구,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코스는 그 자체로 부산의 매력을 집약한 여정이었다. 행사 당일 오전에는 주요 도로가 한시적으로 통제되어 안전하게 행사가 진행됐으며, 교통 불편을 기꺼이 감내해 주신 시민들, 그리고 현장에서 안전을 책임져주신 경찰과 자원봉사자 여러분의 헌신 덕분에 큰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세븐브릿지 투어는 단순한 자전거 대회가 아니다. 이는 부산의 풍광과 국제도시로서의 역동성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관광 브랜드이자, 자전거라는 친환경 교통수단을 통해 건강한 생활 문화를 확산시키는 소중한 계기다. 동시에 시민이 함께 즐기고 화합하는 진정한 ‘시민축제’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행사의 의미가 더욱 커지기 위해서는 시민 여러분의 참여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참가자로 함께 달리는 것도 좋지만, 가족과 함께 현장에서 응원하거나 자원봉사로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축제를 빛낼 수 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부산시민들께서 함께해 주시길 간곡히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완주를 통해 한 가지 비전도 떠올렸다. 앞으로 세븐브릿지 투어가 부산을 넘어 국내 타 도시, 더 나아가 해외 원정 행사로 이어진다면, 부산은 세계 속에서 더욱 빛나는 스포츠·관광 허브로 성장할 것이다. 부산은 언제나 도전 속에서 성장해 왔고, 시민이 함께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저 역시 부산시민과 함께 건강하고 활기찬 도시, 세계인이 찾는 매력적인 부산을 만들어 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 김광명 부산시의원 ◇ 부경대학교국제대학원 정치언론학과 석사 ◇ 제9대 부산광역시의회 해양도시안정위원회 ◇ 제8대 부산광역시의회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 제8대 부산광역시의회 운영위원회 위원 ◇ 제8대 부산광역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부위원장 ◇ 제8대 부산광역시의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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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0
  • [기고] AI, 학생 맞춤형 학습의 동반자
    [교육연합신문=최일훈 기고] 오늘날 교실에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도구의 활용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학생들은 AI가 제공하는 학습 자료를 통해 자기 속도에 맞게 공부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배움에 몰입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이 수업의 본질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취기준 달성이 여전히 교육의 핵심이며, AI는 그 목표를 지원하는 강력한 동반자다. AI가 보여주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맞춤형 학습이다. 과거에는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처지는 학생이나 너무 쉬워서 흥미를 잃는 학생 모두 같은 교재와 수업 속도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AI는 학습자의 수준을 빠르게 진단하고, 적절한 난이도의 과제를 제시한다. 학생들은 자신에게 꼭 맞는 학습 루트를 따라가면서 부담은 줄이고, 성취감은 높인다. 교실 속 격차를 줄이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주도 학습 습관을 기르게 된다. AI가 제공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검토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경험은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학습하는 힘을 길러 준다. 교사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순간에도 AI는 학습의 파트너가 되어 학생 곁에서 끊임없이 돕는다. 물론, 교사의 역할은 여전히 핵심적이다. AI가 아무리 정밀하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해도 성취기준이라는 나침반을 기준으로 수업을 설계하는 것은 교사의 몫이다. AI의 제안이 때로는 과도하거나 적절치 않을 수 있기에 교사는 그 결과를 점검하고 학생의 학습 여정을 조율해야 한다. AI의 활용이 효과적이려면, 교사의 교육적 전문성과 결합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디지털 미래 영재학교 인공지능반』을 집필하며 이러한 점을 더욱 깊이 고민했다. 책 속에는 AI가 학생들을 위한 개별화 학습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사례와 함께 담았다. 결국 AI는 교사의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사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메워주는 학습 동반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다만 AI를 통한 맞춤형 학습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AI의 답변은 데이터 편향이나 오류를 포함할 수 있으며 학생이 이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잘못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AI가 말해 준 답이 정답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교사와 친구들과 토론하며 답을 다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비판적 사고와 학습 윤리다. 앞으로의 교실에서 중요한 것은 ‘AI를 얼마나 많이 활용하는가’가 아니다. ‘성취기준을 중심에 두고 AI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관건이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수업을 설계하고 AI를 학생 맞춤형 학습에 적절히 접목시킬 때, 학생들은 격차를 줄이고 자기주도적 배움을 이어갈 수 있다. AI는 교실에서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교사의 효과적인 설계와 만나는 그 지점에서, AI는 학생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성취기준에 도달하도록 돕는 든든한 학습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어떻게 펼쳐낼지는 교사의 손에 달려 있다. ▣ 최일훈 ◇ 부산 명진초등학교 교사 ◇ 2024~2025 디지털기반 교육혁신 선도학교 주무교사 ◇ 2024 디지털기반 교육혁신 교육부 장관 표창 ◇ 2023 정보(SW·AI) 교육 발전 및 활성화 유공 교육부 장관표창 ◇ 2022 개정교육과정 과학교과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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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기고] 만드는 즐거움, 나누는 배움
    [교육연합신문=김종훈 기고] 처음 3D프린터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도전하는 것은 자기 이름표다. 단순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표를 손에 쥐었을 때의 성취감은 크다. 학교 교표를 출력해 상징색으로 색칠하며 학교의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도 좋은 계기가 된다. 이렇게 개인적이고 작은 경험에서 출발한 메이킹은 점차 교과와 연결되며 확장된다. 수학의 입체도형 단원에서는 원기둥, 원뿔, 구를 활용한 구조물을 설계하고, 모둠별 협업을 통해 태양의 고도와 방위를 고려한 집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교과와 연계된 활동 속에서 아이들은 지식을 단순히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메이커교육의 과정에서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손님이다. 종이, 나무, 디지털 도구 등 무엇을 활용하든 예상대로 되지 않는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출력이 잘 되지 않거나 모델링이 무너지는 경우는 교사인 나조차 매번 겪는다. 그러나 실패는 낙담이 아니라 학습의 일부다. 아이들은 수학 보드게임 「약통분의 피자가게」를 만들면서도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 단위분수 개념을 피자 모형으로 구현한 이 게임은, 처음에는 단순한 프로토타입으로 시작했지만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실패 없는 성공보다, 수정을 반복하며 얻은 성취가 더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경험은 단순한 교구 제작을 넘어, 학습과 놀이가 결합된 창의적 산물이 되었다. 이 보드게임은 학교 축제나 창의융합한마당 행사에서 공유되었고, 실제 상품화까지 추진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계약은 무산되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메이커교육의 또 다른 힘은 바로 협력과 나눔이다. 코로나 시기 비대면 수업이 불가피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방식의 협업을 배웠다. 6학년 아이들과 진행한 ‘각기둥과 각뿔로 미래도시 건설하기’ 프로젝트는 100%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팀별 협업 공간을 공유 링크로 열고, 아이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함께 모델링을 완성했다. 이 수업은 부산시교육청 수학과 대표 블렌디드 러닝 선도 사례로 기록되었다. 최근에는 ‘화성 거주지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협업해 모델을 완성한 뒤 실제 프린팅까지 진행했다. 그 결과물을 박람회에서 함께 전시했을 때,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넘어 서로의 상상력을 나누고 연결하는 진정한 공유의 기쁨을 맛보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 학생이 있다. 새 학급 명단에서 늘 특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표시되던 아이였다. 수업 중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뜯어내며 부정적인 지적을 자주 받곤 했다. 그러나 메이커교육 속에서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3D모델링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친구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프로젝트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해 내며 모둠의 중심 역할을 했고, 학급 분위기에도 긍정적 변화를 불러왔다. 결국 그는 발명영재 과정에 진학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갔다. 한 아이의 가능성을 깨우는 힘, 그것이 메이커교육의 진정한 가치다. 나는 『디지털미래영재학교 3D프린터반 1』을 집필하면서 이러한 현장의 경험을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담고자 했다. 이름표 출력처럼 단순한 활동에서 출발해 교과 연계 프로젝트, 협업과 공유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단계적 흐름을 안내했다. 무엇보다 교사가 부담 없이 시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구성한 이유는, 교사의 작은 용기가 아이들의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교사가 문을 열어주면, 아이들은 이미 그 너머에서 즐겁게 뛰놀 준비가 되어 있다. 메이커교육은 기술의 습득을 넘어,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실패를 성장으로 바꾸며 협력과 나눔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놀이와 배움이 만나는 지점에서 아이들은 창의적 시민으로 성장한다. 지금 우리 교실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과물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도하고, 나누고, 공유하며 만들어가는 작은 발걸음이 곧 미래를 바꾸는 큰 힘이 될 것이다. ▣ 김종훈 ◇ 부산 명문초등학교 교사 ◇ 2024 올해의 과학교사상 수상 ◇ 2023 교육부지정 지능형 과학실 운영 유공 최우수 장관상 수상 ◇ 2021 인공지능을 이용한 실험 정보 제공 방법 및 이를 이용하는 장치 특허 등록 ◇ 2019 STEAM 교육 UCC 공모대회 최우수 장관상 수상 ◇ 2019 STEAM 교육 유공 교육부 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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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5-10-03
  • [기고] 사람을 만들고, 정치를 만드는 교육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정치가 태어나고,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정치인이 생겨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교육이 기초․기본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배워서 더 나아진 사람들로 채워지는 나라는 부강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갈수록 허약하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국가는 정치와 교육이라는 매커니즘으로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국가의 기초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메시지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 而後有眞知)”라는 莊子의 가르침은 사람다움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의 기조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도 철학이 중심 학문이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철학, 인문학 중심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육에서 말이다. 변죽만 울리지 말고 교육의 핵심 개념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나라의 행태를 보면서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느낌은 “정치의 실패가 아니라 교육의 실패”라는 생각이다. 외국의 제도를 들여올 때에도 우리의 형편을 따져서 들여와야 한다. 남이 하니까 덩달아서 ‘교육감 직선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폐해가 눈덩이처럼 쌓이는데도 고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국가와 미래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재선, 3선 하겠다는 생각만 있고, 높은 권력을 잡아서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 속에는 ‘국민’이라고 쓰고, ‘오직 당선’이라는 말로 읽힌다. 국민은 선거 기간 동안에만 있는 단어라는 생각마저 든다. ‘국민’, ‘국민’하는 정치인들은 ‘말의 질서’도 없다. 이것은 知的 破倫이다. ‘公約’은 ‘空約’이다. 앞으로 선거에는 홍보물에 ‘空約集’이라고 써야 할 것 같다.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나아지는 일은 없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윤○○ 의원의 ‘국민은 내일, 모레, 1년 후면 또 달라진다.’, 즉 금방 잊어버린다는 말처럼 ‘국민’을 욕되게 하는 것은 국민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어떤 말을 해도 선거 당시만 잘하면 된다는 인격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왜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나라가 되었을까?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Émard Sartre, 1905년~1980년)의 철학은 “자유와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지 고를 때를 생각해 보자. 아이는 햄버거를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아이가 햄버거를 선택했을 때, 햄버거가 너무 기름지고 몸에 안 좋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선택은 자유롭지만,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은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친구가 슬퍼할 때 그 친구를 도와주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을 지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도 자유롭지만 책임이 따른다. 우리가 타인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자유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한 의미를 우리는 곱씹어야 한다. 우리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용어는 성찰이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병(病)과 문제점, 그리고 불편한 점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어떤 상황이 일어나면 현장을 보지 않고, 외국에서 수입한 이론과 지식에 의해서 살피거나 외국의 사례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는 어른들의 토론이 생중계되기도 한다. 우리와 외국은 세계가 다르다. 다름을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해야 할 일인가? 우리의 운명은 ‘생각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높고, 가장 치명적인,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와의 투쟁으로 나온다. 즉 추상 능력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남들이 만들 때는 머릿속에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런데 따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매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 원리나 구조)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냥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것만 받아서 쓴다. 그러니까 보이고 만져지는 것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여지고 만들어지는 것을 만들어내는 원리적인 것은 경험되지 않는다. 힘은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여기에 우리 교육의 함정이 들어 있다. 일일삼성(一日三省) 혹은 삼성오신(三省吾身)은 하루에 세 가지 일을 살피고 반성한다는 뜻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맹자로 이어주는 제자인 증자(曾子: BC 506∼BC 436)의 말이다.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증자는 “나는 매일 내 몸을 세 번 살핀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도모하는데 충실하지 않았는지, 벗과 함께 사귀는데 신의를 잃지 않았는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했다. 이 말씀은 《논어》(학이편)의 첫 단락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가,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라는 말을 재해석하고 확장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일상에서의 수양이고, 개인의 수양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가 여기에서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유학, 유교, 유도’(儒學, 儒敎, 儒道)가 고리타분하고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문명화된 현대인이 이 정도의 자기 관리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교육 지도자들이 고전을 많이 가까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니면 책꽂이에 꽂아두고 곱씹어 보는 일은 바래서는 안 되는 일일까? 국민의힘 남양주 당협위원장이 대중 앞에서 ‘정동영, 개○○’라는 표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지도자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나라의 병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의 가르침이 낡고 유효기간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이 그만큼 비천(卑賤)해짐으로써 그것이 본래의 위치보다 더 ‘고원’(高遠)해지고, 그것을 현대인은 이솝의 신포도처럼 ‘시어서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운 일은 아닐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운다. 숟가락 드는 법부터 밥 먹는 것도 배워야 한다. 말하는 것도 배운다. 걷는 것도 배운다. 모든 과정이 배우는 과정이다. 배우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삶은 배움이고 앎의 운동이다. 즉 생명이란 앎을 향한 운동이다. 왜 배우는가? 자기한테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에게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을 갖춰가는 과정을 말한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갖춰지지 않은 것을 갖추려고 하는가? 왜 그런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식은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다. 세상의 문제를 치료하고 풀기 때문에 공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다. 제대로 된 지식인이란? 시대를 아파하고, 느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치료하고 시대도 치료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을 ‘인재’라고 하는 것이다. 교육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너는 과연 누구냐?’,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물음을 교육과정에 편성하는 일보다는 선거 주민을 만나는 것이 더 급한 일일 수도 있다? 지금 ‘문해력’의 문제가 회자되고 있다. 문해력이 급선무라고 떠드는 사람만 있고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나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만 너무 예민한 것일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명언이 귓전을 맴돈다. 이 말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삶의 가를 지닌 인재를 키워가야 할 것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깊이 있는 자기 탐구를 통해 지혜를 얻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경구처럼, 그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철학은 질문과 성찰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찰’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들어보면 ‘성찰’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성찰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떻게 하였는데,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서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 더 나아지는 자기를 발견하는 교육 과정을 만드는 길은 없는지? 알고도 안 하는지? 못 하는지? 교육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서로 소통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을 찾는 길을 연구하는 시간은 필요 없는 것일까? 물음은 제대로 된 나라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교육이 국가다’라는 비전을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물음으로 바꾸는 사유가 필요하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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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기고] 디지털 도구, 학습의 날개가 되다
    [교육연합신문=최일훈 기고] 오늘날 교실은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칠판과 교과서가 중심이던 수업은 이제 인공지능, 생성형 AI, 3D 프린터와 같은 디지털 도구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보조 교구’의 차원을 넘어 교실의 문화를 바꾸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은, 디지털이 수업의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업의 본질은 언제나 성취기준 달성에 있으며, 디지털 도구는 그 목표를 더 깊고 넓게 확장하는 강력한 ‘날개’가 되어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면 학생들의 반응은 놀랍다. 인공지능 기반 학습 도구는 수준과 속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맞춤형 학습 경로를 제시한다. 덕분에 학습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던 학생, 반대로 너무 쉬워 흥미를 잃던 학생 모두 자기 맞춤형 학습을 이어갈 수 있다. 생성형 AI는 학생들의 질문에 빠르게 대응하며 탐구의 폭을 넓혀준다. 학생들은 단순히 답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질문을 설계하고 AI의 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 단계 더 깊은 사고로 나아간다. 3D 프린터는 상상을 눈앞의 실물로 구현하며 배움을 지식 습득 이상의 경험으로 확장한다. 아이들은 놀이와 도전이 결합된 활동 속에서 자발적으로 몰입하고, 친구들과 협력하며 학습을 즐긴다. 제가 집필한 『디지털 미래 영재학교 인공지능반·생성형AI반·3D프린트반』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교사들이 디지털 도구 활용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잘 모르면 학생들에게 해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본 안내만으로도 학생들은 금세 자기 생각을 구현해내며, 오히려 교사보다 더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지식이 아니라, 함께 배우고 도전하려는 교사의 용기다. 교사가 문을 열어주면, 학생들은 이미 그 너머에서 즐겁게 뛰놀 준비가 되어 있다. 디지털 도구 활용에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과제도 따른다. AI가 제공하는 정보는 편향과 오류의 가능성을 지니며, 무비판적 수용은 학습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한 도구의 오·남용은 학습 태도와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디지털의 가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교사의 전문성과 윤리적 지도가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가 된다. 학생들이 연령에 맞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하고,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며, 정직한 태도로 기술을 활용할 때 비로소 디지털은 학습의 자산이 된다. 교사의 지도는 단순한 기술 교육을 넘어, 학생들이 미래 사회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결국 수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교사의 설계, 학생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성취기준 달성이 교육의 중심이다. 다만 디지털 도구는 그 과정을 더 쉽고, 더 즐겁고, 더 창의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앞으로 교실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이다. 교사가 성취기준을 중심에 두고 올바르게 선택하고 활용할 때, 디지털 도구는 학습의 질을 한층 끌어올리고 학생들에게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길러줄 것이다. 기술은 결코 수업의 주인이 아니지만, 수업을 더 멀리 날게 하는 날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개를 어떻게 펼치느냐는 결국 교사의 손에 달려 있다. ▣ 최일훈 ◇ 부산 명진초등학교 교사 ◇ 2022 개정교육과정 과학교과서 집필 ◇ 2023 정보(SW,AI) 교육 발전 및 활성화 유공 교육부 장관표창 ◇ 2024~2025 디지털기반 교육혁신 선도학교 주무교사 ◇ 2024 디지털기반 교육혁신 교육부 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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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4
  • [기고] 상상을 현실로, 교실 속 메이커교육의 힘
    [교육연합신문=김종훈 기고]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 CEO들의 성장기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차고지다. 허름한 차고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스스로 만들며, 수많은 실패를 겪었던 경험이 결국 혁신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교실 속 무한상상실이야말로 그 차고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학생들이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패와 재도전을 거듭하며, 협력 속에서 배움의 기쁨을 발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메이커교육은 몇 해 전 우리 교육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전국의 학교에 무한상상실이 조성되고, 3D프린터를 비롯한 다양한 장비가 보급되었다. 그러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안전과 건강 문제로 장비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먼지를 쌓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메이커교육을 특정 장비 체험으로만 오해하거나, 결과물 중심의 전시 활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메이커교육의 가치는 장비 자체가 아니라, 아이들이 상상을 실현하고 실패와 재도전을 경험하며 배우는 그 과정에 있다. 나는 3D프린터를 ‘성취의 덫’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사실 모델링과 프린팅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교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진입장벽이 높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반 4학년 학생들과 함께 기초 모델링 수업을 진행해 보면, 불과 두세 시간 만에 자기 상상을 입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한다. “체육보다 3D 모델링 시간이 더 재미있다”는 말이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기기로 자기만의 모델링을 이어가며 친구들과 협업하는 모습은 메이커교육이 지닌 힘을 잘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메이킹은 놀이이자 도전이고, 또 하나의 배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커교육은 여전히 많은 교사들에게 ‘낯선 영역’이다. 교과와 별개의 특별 활동으로만 생각하거나, 결과물의 완성도에 지나치게 집착해 시도를 꺼린다. 그러나 본질은 결과물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가며, 실패 속에서 다시 도전하는 그 과정에 있다. 수학 시간에 보드게임을 만들고, 과학 시간에 친환경 제품을 설계하며, 미술 시간에 창의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는 모든 활동이 메이커교육이다. 교사가 조금만 용기를 내어 시도를 열어주면, 교실은 순식간에 혁신의 차고지로 바뀐다. 나는 『디지털미래영재학교 3D프린터반 1』을 집필하면서 이 지점을 가장 고민했다. 선생님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장벽을 낮추기 위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3D 모델링과 프린팅은 결코 거창한 전공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기본적인 안내만으로도 학생들은 곧바로 자기 생각을 실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교사가 부담 없이 수업에 도입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는 것이다. 교사가 문을 열어주면, 학생들은 이미 그 너머에서 즐겁게 뛰놀 준비가 되어 있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은 단순히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이 아니다. 상상을 실현하는 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협력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다. 메이커교육은 바로 이러한 미래 시민의 자질을 키우는 교육이다. 지금 우리 교실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기계 작동법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시도하고 부딪히려는 용기다. 무한상상실에서의 작은 시도가 결국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고, 나아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 김종훈 ◇ 부산 명문초등학교 교사 ◇ 2019 STEAM 교육 유공 교육부 장관 표창 ◇ 2019 STEAM 교육 UCC 공모대회 최우수 장관상 수상 ◇ 2021 인공지능을 이용한 실험 정보 제공 방법 및 이를 이용하는 장치 특허 등록 ◇ 2023 교육부지정 지능형 과학실 운영 유공 최우수 장관상 수상 ◇ 2024 올해의 과학교사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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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3
  • [기고] 익히고 되새김질하는 고전의 밥상으로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지식이 단순히 인식의 차원에 머물고,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삶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객관적인 세계와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항상 가치와 이념을 매개로 관계하게 되는데, 세계와 관계할 때 사용하는 자신만의 특정한 가치론적 규정을 莊子는 ‘成心’이라고 표현하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정해진 마음 즉 편견을 스승처럼 받드는데”, 그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큰 오류로서 ‘세계의 진상과 인간을 크게 어그러지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자에게 마음 쓰는 존재다. 인류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공감 능력을 타고난다.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서로 협력하는 탁월한 공감력 없이 인류의 집단 성취인 문명은 불가능했다. 요즘 이런 생각에 머문다. 열심히 뭘 하긴 하는데, 가슴 한구석에 ‘늘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해야 한다고 동서양 막론하고 성현들은 말한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게 맞아, 그렇게 해야지.’라고 주먹을 불끈 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 전에 한 후배에게 이런 넋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 같네.’라고 하니까 ‘형님, 그럼 말씀 하지 마세요. 잘 살아왔고, 잘 살고 계시는 겁니다.’라는 답변에 약간의 치유를 받았지만, 도로아미타불,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 요즈음 나를 휘감는다. ‘내 생각’과 내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어리석고 밉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의 본질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시작도 결국에는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귀결된다고 믿는다. 모든 것이 배움의 장이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배워야만 살 수가 있다. 그 아는 만큼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한다. 다시 말해 생각을 또 생각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앎과 생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주 거창한 질문인 것 같지만 답은 매우 간단하다. 생명은 앎을 향한 운동이다. 이것 포기하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버리면 소외의 삶, 인생 자체가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동안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붙들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미친다. 요즘 남학생들도 이마에 여드름만 좀 나도 학교가 아니라 마사지 숍을 간다고 한다. 지금은 ‘이런 시대’가 된 것이다. 자기를 위한 투자, 자기 계발,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위한 게 아니라는 거, 정말 헌신적인 삶인 것 같다. ‘헌신적’이란? 자기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오직 타인을 위한 헌신이라는 말이다. 왜 이렇게 남을 위해 애를 쓰는 걸까? 나한테 이로운 건 별로 없고, 오로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내 삶이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인정 욕망이라고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지수는 훨씬 줄어든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언어가 귀에 못이 박혔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욕망과의 거리 두기가 더 중요한 시대는 아닌가? 『東醫寶鑑』을 배우면서 몸에 대한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리듬을 잘 타려면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우리의 감정, 즉 칠정은 항상 널뛰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일상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걸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춘기에나 하는 짓인데, 나는 평생을 사춘기로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머문다. 사람의 감정은 원숭이 같다고 한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원숭이한테 가장 어려운 일이 앉아서 명상하는 일이라고 한다. 『西遊記』를 보면, 손오공도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딱 한 가지,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것만은 못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감정을 타고난다고 한다. 그래서 내 감정을 어떻게 제어하는가가 내 일생, 그리고 내가 맺는 관계를 결정하게 되는 거다. 감정은 훈련을 통해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나를 제멋대로 끌고 다니게 된다. 『東醫寶鑑』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들어가 있는데, 도교는 주로 단전호흡을 통한 정기신(精氣神)의 순환을 통한 양생의 기예를 펼치고 있다. 유학은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기준이다. 이 오상에 맞춰서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이 제도화되고 예법화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든 다 인의예지신을 지켜야 한다. 지키면 군자, 못 지키면 소인이 되는 거다. 왜 지키지 못할까?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수신제가(修身齊家)는 물론이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불가능하다고 성현들은 말한다. 동양에서 고대의 지혜라고 하면 유교, 불교, 도교를 말할 수 있다. 중화문명에서 유교와 도교가 발달했고, 나중에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오면서 삼교가 서로 혼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공부할 때, 삼교회통(三敎會通)을 중시했다. 지금도 이 정도의 기본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인류 지성사의 기초․기본이기 때문이다. 『논어』 외우고, 『불경』 외우고, 『동의보감』도 외우면 평생 자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 아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권위자가 아니어서 그럴까? 고전은 다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지혜란 본디 중생과 만물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자격이나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해야 한다. 그걸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반드시 해야 하는 소명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고매한 경전일수록 일용할 양식으로 써야 하다. 고전을 아득한 시공에 모셔두기만 하면 안 된다. 가장 고귀한 것은 일상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하고,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듯이, 이런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고귀한 것이다. 고전도 마찬가지다. 빛이고 공기고 물인 것이다. 빛과 공기, 물을 이해한 다음에 사는 게 아니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일단 암송한 다음 계속 되새겨야 한다. 자기 몸에 딱 붙여야 한다. 장자(莊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제(齊)나라 15대 왕 환공(桓公)과 수레바퀴 깎는 장인 윤편(輪扁) 사이의 이야기다. 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윤편은 그 앞 정원에서 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대청으로 올라와 환공에게 물었다.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무엇을 기록한 것입니까?” “옛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살아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환공이 노해서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감히 바퀴를 만드는 자가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내가 납득하도록 설명하면 모를까 아니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윤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퀴의 구멍을 깎을 때 느슨하게 하면 헐렁해서 빠지고, 빠듯하게 하면 빡빡해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빠듯하지도 않은 것은 손에 익고 마음이 그에 호응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비밀이 거기에는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들에게도 가르치지 못했고, 아들 역시 저에게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저는 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폐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 『繫辭傳上篇』12-2장에 ‘書不盡言(서부진언), 言不盡意(언부진의)’라는 말이 있다.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가슴 속의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다 드러낼 수 없다. “조선에는 공자가 들어오면 왜 공자의 조선이 되려고 하지? 조선의 공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조선 말 신채호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보자. 『般若心經』에서 관세음의 ‘觀’은 ‘본다.’보다도 ‘보여준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들, 그 현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보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11면의 얼굴을 지닌 보살이 바로 관세음(관자재)보살이라고 한다. 미래에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내게 보여준다. 사실을 전한다는 기자는 많아도 이상호 기자처럼 세상의 아픈 소리를 들어야만 기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숨겨진 소리, 보통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안 들리는 소리, 그 소리를 찾아 나선다. 기자는 모름지기 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그토록 용감하게 자신을 현장에 던지고 사는 기자는 많지 않다. 세월호 속에 사라진 슬픈 소리도 이상호의 대변이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널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호는 그러한 삶의 자세 때문에 본인이 항상 아프다. 고통스러운 소리를 들으면 같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상호를 박해하고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수없이 고소를 당하면서 얼마나 깊은 시련을 겪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제야 저도 철이 드는 걸까? 옛말에 ‘생긴 대로 논다, 산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心經』을 만나,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더 생각하고, 타인의 苦厄을 동감하며, 진리에 대하여 개방적 자세를 유지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공부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이제야 살아가야 할 소명을 더 생각하고 생각한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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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기고] AI 보편교육, 이제는 ‘노코드’로 학교 현장에서 실현해야 할 때
    [교육연합신문=김수랑 기고] 전 세계적으로 생성형 AI와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교육 현장은 ‘AI 보편교육’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교육부 역시 2025 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초·중·고 전 학년에 AI 및 소프트웨어(SW) 교육을 확대하고, 모든 학생이 디지털 소양을 갖추도록 정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다소 다르다. “시간은 늘었지만, 학생 수준차가 너무 크다”, “블록코딩만으로는 실생활 문제 해결과 연결이 안 된다”, “코딩 문법에 막혀 창의적인 시도를 못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AI 보편교육이 ‘AI 사용법 익히기’ 수준에 머물 위험이 크다. AI 보편교육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학생 모두가 디지털 소양을 갖추고, AI 시대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학생들의 수준 차이가 크고, 블록코딩으로는 실생활 문제 해결과의 연결이 부족하며, 코딩 문법 학습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해 창의적인 시도가 제한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소프트파워가 개발한 ‘스마트메이커 AI+’는 국산 교육용 노코드 플랫폼으로서, 순수 한글 기반에 완전 노코드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프로그래밍 문법 학습 없이도 앱, 웹, AI 콘텐츠를 직접 제작할 수 있으며, ChatGPT, Gemini,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 등 다양한 AI 서비스와도 연동된다. 교과 프로젝트에 즉시 적용 가능한 것이 큰 강점이다. 이미 전국 72개 대학과 1,300여 개 초·중·고교에서 스마트메이커 AI+를 활용하고 있다. 정규 수업뿐 아니라 자유학기제, 창의융합 프로젝트, 방과 후 수업 등 다양한 교육 활동에 적용되며, 교사 연수 역시 2~3일이면 충분해 프로그래밍 비전공 교사도 바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현장에서의 적용 방안은 명확하다. 정규 수업에 통합하고 자유학기제와 정보 과목 실습에 활용한다. 방과 후 활동과 동아리 운영에 투입하며, AI·데이터 활용 프로젝트에도 적극 적용한다. 교육청 주관 공모전과 캠프 프로그램과도 연계할 수 있다. 기대 효과도 크다. 학생들 간 수업 격차를 해소하고,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한다. 실생활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산출물을 제작하며, 교사의 수업 부담을 줄인다. 예측 불가능한 오류나 문법 문제 없이 수업을 운영할 수 있어, 농산어촌과 소규모 학교에서도 동일한 품질의 AI 교육을 구현할 수 있다. AI 보편교육은 단순한 도구 사용법 교육이 아니다. 학생이 문제를 정의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해법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과정이다. 노코드 솔루션은 이러한 교육 철학을 실제 학교 현장에서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교육청과 학교가 이를 적극 도입하고, 교사 연수와 커리큘럼 개발에 연계한다면 AI 보편교육은 선언적 정책이 아닌 현장 혁신으로 완성될 것이다. ▣ ㈜소프트파워 김수랑 대표 ◇ 現 ㈜소프트파워 대표이사 ◇ SW창의교육연구소 소장 ◇ 슬기로운 코딩 교육 위원장 ◇ 미래부 노코드 기반의 앱만드는 강의 초빙교수 ◇ 삼성전자, 하나카드, 포스코 등 대기업 임직원 대상 DX(Digital Tranceformation) 강의 ◇ 카이스트, 서울대대학원, 연세대 등 다수 대학에 노코드 기반의 앱만들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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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2
  • [기고] 왜?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하고 종속적인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오늘 아침에도 내 발걸음은 텃밭을 향한다. 몸은 걷기를 바라고 눈을 텃밭의 실태를 보고자 한다. 그래서 아침 시작을 이렇게 하는 것을 나의 ‘계율’로 삼고 지킨다. 기후 변화가 심하다는 말만으로는 폭염과 폭우의 깊고 큰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타들어 가는 식물의 모습이 폭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고, 산사태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의 복구 모습과 씻겨 내려간 농작물의 모습을 보고, 자식 같은 모습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농민들의 한숨에서 대통령과 지도자, 한 가정의 가장 마음과 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천재지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험난한 일을 자식에게는 이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논밭을 팔아서까지 자녀들을 유학시겼던 것이리라. 흰 와이셔츠에 번지르르한 양복, 파리도 낙상할 정도의 눈부신 구두를 입은 자식의 모습을 그리며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정성도 중요하지만 천재지변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는 하늘 농사를 시키고 싶지 않았던 조부모님, 부모님 마음에 목이 맨다. 눈물이 맺힌다. 조부모님, 부모님의 뜻은 공부도 부모님이 농사일을 하는 것처럼,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대응을 하고, 상황에 따라 조치를 달리하는 삶의 원칙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다가, 책상만을 잡고 사는 삶에서 지금부터 조금씩 세상일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사는 삶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야 공부의 원칙을 깨닫는다. 모든 이론은 현장에서 시작한다.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부모님, 조부모님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요즈음 뉴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지도자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정치가를 만난 듯하여 내가 우주의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새롭게 역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정치가가 아닐까? 이런 정치가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이런 정치인을 내 시대에 보고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한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바꿀 수 있고, 삶을 바꾸는 것은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길을 내는 것이다. 어려운 경제와 민생,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파고 속에서 국익을 구현하고, 경제와 민생을 다시 일으키고 국민의 평안한 삶을 중심에 두는 길이어야 한다. 앞으로 정치가 국민 속으로, 현장 속으로,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시선이 높이가 높지 않고, 함량의 크기가 작고, 사람의 두께가 굵지 않고, 깊이가 깊지 않으면, 권력의 정점에 이루기 위해서 온갖 권력을 동원하여 사생결단으로 투쟁하고, 상대방을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에만 의지한다. 그것이 소위 적대적 공존이다. 적대적 공존의 폐해는 항상 상대를 제거하려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갈등을 키우는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한다. 요즘 우리 정치인 중에는 나라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이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국회의원 자리만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평안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만이 최고의 길이다. 그래서 대정부 질문의 날은 다음 선거를 위한 사생결단의 날이다. 지역 구민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선명성만 부각하고, 논리는 없고, 성깔이 묻어나는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녹음기 질문을 한다. 문장은 반복되면 각인이 더 잘된다. 그래서 노래도 가사를 반복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고, 대신 자신이 스스로 성공했으며,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정신 승리’인 ‘내로남불’, ‘부정적 사고’ 등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길을 간다. 이것이 아Q들이 걷는 실패의 길이다. ‘하고 싶은 공부’와 ‘해야 하는 공부’가 있으면 둘이 충돌하나요? 하고 싶은 것이 강렬하면 그것을 할 때 다가오는 지루함이나 조급함은 디 극복할 수 있다. 체력을 기르고 싶으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한계의 수고를 견뎌내야 하는 것과 같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 하는 일은 감내가 된다. 반대로 해야 하는 것만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없으면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먼저다. 그래서 자기를 궁금해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묻는 태도 있는 상태에서 하는 공부가 좋은 공부다. 그것도 없이 그냥 지식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꿈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꿈은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자신을 궁금해하는 물음 던지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는 최고 권력자만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이르러 권력을 누리려는 자만 있었다. 거기에 이르러 국민과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할까 하는 꿈이 없었다.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의 꿈은 없다. 백성을 위해서, 국력을 기르기 위한 일은 내가 임명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대통령을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당선된 뒤로부터는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일은 수석들에게 맡기고, 개나 끌고 다니고, 좋은 안주 찾아, 좋은 술 찾아, 아첨하는 친구 찾아 비교하고 비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다음에서 다음으로 꿈을 꾸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꿈 교육이 교육에서 일어져야 꿈을 꾸는 지도자,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행복한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꿈은 새로운 질서를 찾아 건너고 건너가는 자인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자는 ‘어떠한 역사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꿈을 꾸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나쁜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좋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이제는 훌륭한 사람을 훌륭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어야 훌륭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경우 주요한 사안에 대해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그게 좋은가 나쁜가 같은 기준으로 문제를 판단한다. 전쟁에 대해서도 그렇다. ‘전쟁은 나쁘니까 무조건 피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전쟁이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나요.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전쟁에 관한 온갖 얘기가 오고 가는데, 그 수준이 너무 저열하고 천박해요. 전쟁에 반대하면 ‘종북’이고 찬성하면 ‘전쟁광’이고, 이제는 이런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지금까지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전쟁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알게 되면 좀 더 깊고, 넓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국무회의를 국가 경영의 토론 장소로 만들고, 국가 경영의 최고 결정 과정을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고, 책상에서 만든 국민 정책이 국민들에게 현장 변화를 가져오는 정치를 위해서, 장관이 자신의 정책을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듣고 수정하는 이런 정책을 펴고 국민에게 알려주는 政治家, 이제까지 보았는가? 보았으면 나에게 말씀해 주소. 대통령은 무엇이 되고,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조금만 겸손해도 우러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은 다 직업을 살지 않고 꿈을 살았다. 공자가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위리(委吏)나 가축을 관리하는 승전리(乘田吏)가 되기도 했지만, 공무원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위키백과는 다산 정약용을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 과학자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문신, 저술가, 시인,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산의 꿈은 “나의 낡은 나라를 새 롭게 하겠다(新我之舊邦)”는 것이었다. 이제는 국민들이 답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쓰신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는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런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다. 이미 짜인 판을 벗어나 새로운 판을 짜고, 남이 세운 목표나 모범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목표와 모범이 될 수 있는 나라. 새로운 국무회의 진행, 통치는 남이 하던 것을 ‘따라 하는’ 정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배 두드리고 행복해하는 ‘요순 시대’를 꿈꿔볼까 하는 고민 속에서 싹이 튼다. 우리나라가 선진 국가가 아직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따라 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이유다. 선진국이 되려고 하면 ‘따라 하기’에서 ‘먼저 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생각이 앞서면 앞선 문명을 이루고, 앞선 문명을 이루면 앞선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제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현재 교육이 생각을 키우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떤 인재를 기를 것인가?’ ‘인재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인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늘 자신에게 묻는 사람이 교육의 책임자가 되는 시대를 꿈꾼다. 생각이 물건을 만들고, 제도를 만든다. 하이데거가 ‘인생은 비교와 잡담 속에 망한다.’고 했다. 비교는 나를 잃어버리는 거고, 잡담은 이미 있는 내용을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가며 시간을 보내는 거다. 비교와 잡담을 멈추고 자신을 궁금해하는 기본을 묻는 시간을 많이 갖는 교육, 내가 열리고 가정이 열리고, 나라가 열리고. 미래가 열린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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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05
  • [기고] 아시나요? '아무거나, 아무 말 대잔치'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친구들과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 식당으로 향하면서 한 친구가 ‘뭘 먹을래?’ ‘오늘은 내가 쏜다.’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다시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뭐, 먹을 거야?’ 귀찮다는 듯이 ‘아무거나 먹어.’라고 한 친구가 말하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무거나 먹자’라고 합창을 한다. 우리 민족은 ‘獨唱’은 부끄러워서 하지 않으려고 하고, ‘合唱’은 좋아하는 민족이라서 올림픽 축구에서 하는 ‘떼창’이 세계 축구인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k-culture’로 피어나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사람으로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욕과 식욕이 발동되거나 실현될 때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안주, ‘아무거나’를 아시나요? 이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재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반응이 직접적으로 바로 나타난다.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런 반응은 주어진 상황을 자세하게 살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으면 좋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게 귀찮다는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하는 데에는 힘이 들고, 힘이 드니까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생각은 네가 하고, 나는 그저 따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삶을 보고 따라 사는 것도 의미가 있다. 태어나서 많은 말 중에서 ‘책 읽어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지 않는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많이 회자되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데 하지 않으니까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말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서도 한다. 어느 한쪽 면만을 보려 하는 사람은 반쪽 세상을 보는 것이다.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困辱을 치르기도 한다. 상대방 말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말을 모르면 ‘적대적 공존’만 가능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잘 읽어야 한다. 하늘도 사람도 잘 읽어야 한다. 국가 경영자는 국민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면 국민들이 사용하는 말과 문자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나무를 우리는 죽(竹; 대 죽)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대’라는 말은 무슨 말이고, 죽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며, 자녀를 낳을 때, 대문에 왜 ‘새끼’를 두르는지? 장례식 때, 상주들은 왜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새끼’를 두르는지를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겨레가 어떤 가치관으로 말과 문자를 만들었는지를 이해하고, 민족 공동체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말로는 민심에 부응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서 당선이 되면 민심 따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뻔뻔하게 구는 것은 왜일까? 당선되기까지 한 말은 ‘아무 말 대 잔치’ 대회에서 ‘아무거나’ 하는 그런 구태의 모습은 아닐까? 국가의 기둥은 국방과 조세이며, 운영 중심축은 정치와 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정치’가 생겨나고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정치’가 횡횡한다. 교육은 ‘어떤 사람을 키울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은 신뢰를 잃은 지가 오래며, 교육의 정치화로 ‘교육’에 전념하는 지도자보다는,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표’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치기’에 전심전력하는 교육 행정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문해력 신장 연수’ 한두 시간 하고 사진 찍었다고 문해력이 신장되는가? ‘체험 학습’ 한 번 했다고 체험 학습 가기 전과 후가 달라졌는가? 교육은 나라의 뿌리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의 재목으로 자라는 것이다. 지식이 무엇이고 인재란 무엇인지 개념 정의가 학생들의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한, 아무리 ‘창의성’을 강조하는 연수를 한다 해도 공염불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요즘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사실과는 상관없이 내 편이니까,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내 자리를 위해서, 자기의 잘남을 과시하기 위해, 내 마음대로 질러버리는 것이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질이고 품격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물론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국가의 정체성,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 등을 생각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 국민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만이 유능하고 자질 있고 교양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한 자리인가 하는 답답함이 든다. 우리 청소년들과 나라를 위해서는 국민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는 국민의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 이제는 국가적인 인재가 국회로 모이는 제도를 생각할 때다. 국민들의 높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든 제도라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 편’인가에 따라 말하는 내용과 태도가 천양지차다. 요즘 국회의원들의 말에 대한 인식은 진짜로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 전국 대회를 시청하는 것 같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국회의원들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수신(修身)의 첫 번째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몸을 닦는가? 말을 담고 있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말을 들을 때 몸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愛(사랑 애)’라는 글자의 음가는 ‘애’다. ‘아낀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또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고, ‘절약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 말은 자신만의 가치에 집착해서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지나치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말을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이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야 후환이 없다. 요즘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결점을 밝히는 것을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흑심을 감추는 교묘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 태도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왜 저렇게 말을 하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태도를 갖추어야 세계의 주도 국가가 될 수 있다. 주위에서 ‘좋아’,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너는 안 돼’ 등의 말을 많이 본다. 생각이 없는 사람의 자기표현일 뿐이다. ‘남의 말 따라하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이 말은 철저히 인간 편에서 한 말이다. 강산은 어제도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변화를 겪는다. 생각도 변한다.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물건, 제도, 철학은 생각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제도는 물건이 생산되어 흐르는 길을 만든다. 그 제도는 생각의 결과다. 공동체의 ‘문제’와 ‘불편함’을 볼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그 문제와 불편함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와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이 인재고 지도자다. 인재는 현재의 다음 단계를 꿈꾸고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다. 『道德經』 제5장에 “말이 많으면 금방 한계에 봉착한다. 중을 지키는 것이 제일이다.”(多言數窮, 不如守中)가 나오는데, 말(言)은 하나의 체계, 하나의 내용으로 지속된다. 즉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있는 말’만 내뿜어질 뿐, 말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다른 내용을 동시에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전체적인 국면을 말로는 포착할 수가 없고, 그런 의미에서 말은 제한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은 얼른 한계를 드러내고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이 모두 빠진 말도 자신이 모두 들어 있는 말도 없다. 말은 자신의 한쪽 면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쉼 없이 읽는다. 책도 읽고, 사람도 읽고, 하늘도 읽고, 식물도 읽고, 동물도 읽는다. 즉 책을 읽지 않더라도 자기와 마주치는 모든 세계와 사건을 읽고 또 읽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읽기’다. ‘오늘 뭐 할까?’,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하고 자신을 읽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학(學)’은 ‘지(知)’여야 하지 않을까? 『論語』「學而」편 제1장, 16장, 그리고 제20편인 「堯曰」편을 보면, ‘知’ 자가 여러 번 나오는데, ‘안다는 것’은 내 안에 담아두려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삶에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論語』를 20편으로 저술한 것도 『周易』20번째의 괘가 風地觀인 것도, ‘천하는 물론 우리가 대하는 사람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백성들의 삶이 어떤 줄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잘 보이는 곳에서 ‘보는 것’ 그것이 觀의 첫 번째 의미이지만, ‘본다.’는 것은 잘 보이기 위한 것이므로 ‘보이다.’라는 수동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호상적 봄이다. 그래서 ‘본다.’는 말은 ‘읽는다.’는 말을 전제한다. 그래는 ‘안다(知)’는 것은 본 것을 끊임없이 살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지식인에게 중요한 요소는 곰곰이 살피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살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思惟)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 사유(思惟)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타고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확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경탄’이라 했다.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찌하면 내게 진정 나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일’이다 라고 했다. 데카르트, 소크라테스, 타고르, 몽테뉴가 한국에 와서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그래서 지금도 나훈아는 ‘테스 형’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생각 없이 무조건 따르겠다는 사회적 현상을 절절하게 표현한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나 보다. 인생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즉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펼쳐나가는 과정이지 않는가?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 남이 생각한 대로 살겠다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는 한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한국인이 생겨날 때부터 있었던 ‘아무거나’는 왜 변하지 않을까? 인문적 통찰이란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그 조짐을 알기 위해 옛날부터 ‘점’을 쳤던 것이다. 말은 ‘말’이다. 즉 ‘끝’을 말한다. 말을 잘하면 끝이 좋고, 말을 잘 못하면 ‘끝’이다. ‘아무거나’, ‘아무 말 대 잔치’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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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기고] 時中? ‘만물은 각자 자신의 시간을 산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할 때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어떠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요즘 나를 맴돈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일 것이다. 뭔가 인생을 정리할 때인가?라는. 요즘 폭염으로 만물이 고통을 호소한다. 집 근처 텃밭에 생각이 미쳤다. 식물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식물은 움직일 수도 없으니 안타까웠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텃밭의 크기가 작아서 관정 시설도 없다. 이 식물에게 생명수를 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수레에 물통을 싣고 냇가로 가고 오기를 6회를 했다. 옛날 같았으면 ‘왜 이런 고생을 하지?’라고 했을 것은 같은데, 타 들어가는 식물이 나에게 ‘時中을 아는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옛날에 어른들이 하는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단다.’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후회된 일 중의 하나가 나는 ‘교원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다. 교재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교재를 문자적으로만 익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삶과 결부되어서 숙성되지 못한 채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기만 했던 것 같다. 특히 우리말의 기원과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단에 섰던 것이 너무나 아쉽다. 더 나아가 漢字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 없이 교단에 섰던 것이 후회스럽고, 나와 함께 했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 부끄러움이 앞선다. 나만 ‘때’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제자들에게도 ‘때’가 있는데, ‘때’를 모르고 ‘때’를 가르친 후회가 엄습한다. 유학의 4대 경서중 하나인 중용(中庸)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용은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꽂힐 때의 적중(的中)과 같이 딱 들어맞음을 의미하는 중(中)과, 떳떳함을 의미하는 용(庸)의 조합으로, 모든 일에 떳떳하게 들어맞는 진리를 뜻한다. 그리고 이 같은 중용의 도(道)를 원리와 상황 등 때에 맞춰 알맞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을 시중(時中)이라 한다. 초등학생 시절, 모내기 철이 되면 농부들이 자신의 논에 먼저 물을 대기 위해 크게 싸움박질하는 것을 많이 봤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왜 싸움을 하지? 말로 해야지,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만 했었다. 이제 퇴직을 하고 농사를 짓다 보니, 벼농사는 日照量이 벼 생육과 수확량에 비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역시 ‘때에 맞게 배워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孔子의 好學 정신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실감이 난다. 품종에 따라 씨뿌리고 김매고 거두고 저장하는 시기도 다 다르다. 중용 제20장에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일야(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고,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알게 되는데 마침내 알았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라는 의미다. 공자는 어느 유형에 속할까요? 술이편에 답이 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자왈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라는 것이다. 공자는 15세에 천명을 궁구(窮究)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여 50세에 천명을 깨달았습니다. 時習은 時中이어야 한다. 시중은 타이밍(Timing)과 가장 가깝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말이나 행위도 타이밍을 놓치면 아무런 뜻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빨라진 시대에 그때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임(Time) 자체보다 타이밍(Timing)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결국 시중이란 영혼의 민감성이요 정신의 순발력이기에,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지혜이다. 시중은 유학 실천 방법이다. 이는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한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대목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선비는 고정된 틀에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항시 겸손한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심오한 학문과 원리를 터득했다 해도 말과 행동이 때에 맞춰 적절히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머릿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살다 간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시간을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비교에 빠지고, 다른 사람이 조금만 잘 나가도, 다른 사람이 조금만 앞서도 속이 터지고, 상대를 비난하는 데 모든 것을 건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앞선 것이 생기면 우쭐대고 집안 자랑, 동문 자랑 등에 우쭐한다. 동물을 보면 막 태어나서 걷는 송아지도 있고, 1년이 다 되어야 걷는 인간도 있다. 老子 『道德經』 8장에 나오는 말이다. ‘動善時’, ‘動善時’라는 말은 때에 맞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청명이 되면 논밭을 갈고 곡우가 되면 씨앗을 뿌려야 된다. 이때에는 군사를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모두 때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보자. 자신의 계절이 지나면 그대로 뒤로 하고 다음의 길, 다음의 때로 간다. 자신의 열매를 뒤로 하고 그저 또 다른 길을 갈 뿐이다. 꽃피는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인지 각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가 보다. 그래서 老子는 인간의 길을 자연의 운행 원칙에서 찾았을까? 봄이 봄 자신의 성취와 정당성에 취해 여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봄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그래서 쓰임을 받는 시간도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일찍 취업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직장을 잡는다. 늦공부 터졌다는 말도 한다. 모든 식물이 같은 시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햇빛을 더 받기 위한 싸움과 질투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모든 것에 ‘자기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사회와 만물의 삶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습관은 時中의 결과다. 시간의 계획적이고 지속적 활용은 습관을 만든다. 습관은 바로 그 사람이다. <타이탄의 도구들>의 저자 팀 페리스는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에 관한 책을 썼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정리를 정성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큰 차이를 만드는 지점이다.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작은 행동이지만 매일매일 실행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어 긍정적인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좋은 습관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아는 것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생각이 많으면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다. 습관은 처음에는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해서 몸에 배어야 한다. 습관은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마음이 서면 뭐가 되었든 따지지 말고 바로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첫 시작이 어렵다. 거창하고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할 수 있다. ‘습(習)’은 배운 것을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행동과 실천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 ‘습’이다. ‘관(慣)’은 생각에 의해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한번 해봤다고 해서 '관'이 되지 않는다. 자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일어나자마자 하는 행동, 책을 읽는 행동, 운동, 글쓰기, 말하는 태도, 인사하는 것 등 인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 '관'이다. 習慣은 時中의 결과다. 지도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상황에 맞게 적절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화를 내야 할 때 적절히 화를 내거나 슬퍼해야 할 때 적절히 슬퍼할 줄 아는 것처럼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한다. 상황(時)은 늘 변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가장 균형 잡힌 최적의 황금률(中)을 찾아내는 것이 시중(時中)이다. 여기서 중(中)은 정해진 실체가 아니다(中無定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이다(隨時而在). 옛 어른들은 ‘사람은 때(時)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서야 할 때가 있고, 물러나야 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은 늘 때를 알아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를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왜 바탕이 다른가?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는 말한다. 行己有恥를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출발이고 時中의 결과다. 자기 시간의 적절한 활용이 답이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時中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사람’이,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사람’이 태어난다. ◇ 한자한글연구원장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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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기고] 질문하는 교실, 세계를 향한 첫걸음
    [교육연합신문=이재웅 기고]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 좌동초등학교가 최근 세계적 교육과정인 국제 바칼로레아(IB) 초등 프로그램(PYP) 인증을 공식 획득하며, 대한민국 공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인증은 단순한 학교의 성취를 넘어, 공립학교에서도 세계 수준의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좌동초는 지난 2년간 관심학교 및 후보학교 과정을 거쳐 교사 연수, 커리큘럼 재구성, 학부모 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학교 전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실천해 왔다. IB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글로벌 교육과정으로, 창의적 사고와 탐구 중심 학습, 다문화 감수성을 핵심 가치로 한다. 그간 일부에서는 ‘귀족 교육’으로 여겨졌지만, 좌동초의 도전은 공교육 내에서도 IB가 실현 가능함을 입증한 첫 사례로 주목받는다. 좌동초 교실에서는 "왜요?"라는 학생의 질문이 허용되고, 토론과 사고가 중심이 되는 수업 환경이 조성되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습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학부모 또한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학부모는 “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IB는 단지 수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학교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는 교사 연수의 정례화, 학부모 대상 설명회, 서포터즈 활동 등을 통해 가정과 함께하는 교육공동체 모델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좌동초의 성과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탐구 중심 수업을 설계·운영할 수 있는 교사의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 둘째, 연수비, 평가비용, 자료 개발 등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창의성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IB 교육과 입시 중심의 현실 간 괴리를 해소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좌동초의 사례는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벽임을 보여준다. 좌동초의 IB 인증은 한 학교의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학교들이 새로운 교육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신호탄이다. 학생의 질문을 소중히 여기는 교사, 변화를 지지하는 학부모,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청의 정책적 지원이 조화를 이룬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정답을 말하는 교육에서 질문을 기르는 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교육에서 사고를 키우는 교육으로, 경쟁 중심의 구조에서 공동체 속 배움으로 나아가는 전환점. 좌동초의 도전과 성취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미래를 밝히는 이정표다. 이 작은 교실에서 시작된 “왜요?”라는 질문이 더 많은 학교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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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기고] 특수학교 개교, 그때의 목발과 여정 - 김미영 부산한솔학교 초대 교장
    [교육연합신문=편집국] 해마다 6월이 오면, 제 마음속엔 하나의 장면이 조용히 떠오른다. 병원 침대 위에서 바라보던 흐린 창밖 풍경과 제 다리에 채워져 있던 석고 붕대. 그리고 그 이후의 믿기 어려운 여정. 그 모든 시작은 바로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학교, 부산한솔학교의 개교에서 비롯됐다. 2013년 봄, 명지에 문을 연 부산한솔학교는 유치원부터 전공과정까지 갖춘 특수학교였다. 그러나 그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설계도에 그려진 건물 하나였을지 모르나, 저에겐 기적을 바느질하듯 하나하나 꿰매며 만든,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었다. 개교 두 달 전, 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골절했고, 침대에 누운 채로 ‘초대 교장’ 임명장을 받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병실을 박차고 일어나 목발을 짚었다.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었고, 그 누군가는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저는 아침 6시면 목발을 짚고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건물은 아직 덜 지어졌고, 담장 하나에도 수많은 허가와 설득이 필요했다. 교직원은 모이지 않았고, 책상 하나도 조달이 늦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교실마다 들어설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입학할 예정인 110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할 80명의 교직원. 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웠다. 책상 위에 앉을 작은 손, 복도 끝에서 휠체어를 밀고 올 엄마의 손길, 첫인사를 건네며 눈을 피하던 학생의 수줍음까지… 그 모든 것이 제게는 기도로, 사명으로, 힘으로 다가왔다. 개교식 날, 아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스크린에 상영된 준비 과정 영상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이 무너졌다. 흘린 땀이 다 의미 있었음을, 그들이 제게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육이란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것임을. 그것이 목발을 짚고라도 제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스스로 작아지는 날도 많다. 그러나 그 시절, 목발을 짚고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의 공기와 아이들의 눈동자 속 따뜻한 희망이 여전히 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그때의 목발과 여정은 제게 가르쳐주었다. ‘누군가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두려운 일인가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교사들과 아이들이 또 다른 시작의 문 앞에 서 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다시 용기를 내고, 누군가는 함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그날의 교장으로서, 저는 오늘도 그날의 기억을 품은 채,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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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기자수첩] 왜, 아이들은 함께 떠났을까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6월 어느 새벽,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세 명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누군가는 먼저 아팠고, 누군가는 그 아픔에 함께 울었고, 결국, 세 아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서가 남겨졌다는 소식은 이들이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왜 아이들은 함께였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이들은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아이들은 여러 번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지각이 잦아졌을지도 모른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용한 구조 요청은 어른들의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혔다. 혹은, 누군가 보았지만 그 사실은 ‘공유’되지 않았다. 학교는 너무 바빴다. 수업, 평가, 행정, 민원에 쫓기느라 정작 아이들의 ‘마음’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도,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교사 간 소통은 왜 단절되었는가. 이제 교육 현장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복잡한 곳이 됐다. 한 반의 담임이 아이의 모든 신호를 감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교사들 간에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서로 신뢰하고 함께 바라본다면, 그 조각은 하나의 '위험 신호'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도 ‘말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 학생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나 혼자 감당하고 있진 않은가”라는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교무실. 이제 학교는 교사들을 위한 회복 공동체로도 거듭나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관심’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딱 한 명의 따뜻한 관심만 있었어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요즘 많이 지쳐 보여”,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가 된다. 관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하굣길 발걸음 하나에 스며든 감정의 진심. 우리의 ‘조금 더 보는 눈’, ‘조금 더 듣는 귀’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대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행정, 정치권, 언론 모두의 역할이 있다. 학교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과,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학부모는 결과보다 아이의 감정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행정은 예산과 제도로 관계를 뒷받침해야 한다. 언론은 자극보다 성찰을, 소문보다 구조를 보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경쟁이 아니라 관계야”,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몰랐다”는 말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 어떤 죽음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떠났다는 이 사실은, 사회 전체가 무너진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경고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잊히듯 보도될 것이고, 또 다른 부모가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건 그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 교육의 민낯이며, 우리 사회의 현재이며, 그리고 바로 ‘내일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는 말만의 애도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행동,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 마음을 보듬는 학교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더 이상 죽음을 ‘함께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진짜 ‘대책’이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애도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책임이 남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이 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도이자, 가장 큰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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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기고] 질문과 수고하는 습관, 행복한 삶을 만든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모든 수양과 수련은 필요한 수고를 일부러 찾아서 하는 일들이다.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나아지는 일은 없다. 孔子와 플라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孔子나 플라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자세와 시선(생각)의 높이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자세와 시선의 높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세히 살피고, 깊이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바람직한 것’, ‘해야 하는 것’, ‘좋은 것’에는 ‘내’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발성이나 자율성이 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통치술(지식)을 팔러 여기저기 제일 열심히 돌아다닌 사람이 공자였다. 공자가 한 그런 활동을 ‘周遊天下’라고 한다. 공자는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원하고 전쟁 종식을 위한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전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14년 동안의 周遊天下를 할 수 있었던 저력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지시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몰입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오직 몰입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경험만이 사람을 생기 있게 만드는 보약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먼저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었다면, ‘너 생각은 어때?’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치지도 않고 쉼도 없다. 이것은 자기 쾌락, 자기만족, 자기 희열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자유롭고 주체적이면서 창의적이며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한 여정의 길인 것이다. 길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예측 가능해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그 신뢰가 자신을 길을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모습이 사람이다. 『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非吾罪也, 人之罪也. 내 죄가 아니다. 사람들의 죄다.” 사람들은 입장이 같으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입장이 서로 다르면 반대한다. 생각이 같으면 옳다 하고,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옳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개는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으려 하고, 옳은 소리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을 때만 긍정적으로 동조한다. 즉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생각에 갇혀서 듣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악마화’하고 자신들은 ‘천사화’ 하는 사태에 이른다. 깊이 듣기는 힘이 든다. 『장자(잡편)』第27篇 寓言(우언)에 나오는 말이다. “是爲耆艾, 年先矣, 而無經緯本末以期年耆者, 是非先也.” 옛날에는 어른들이 한 말은 대개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年先矣’, 즉 ‘나이가 앞서면서도,’ ‘無經緯本末’, 즉 말이나 태도에 ‘질서가 없고 앞뒤가 안 맞으면서’ 나이가 많은 것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是非先也’ 즉 ‘앞선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끔 보면 어른이 나이만 믿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모범을 보이더라도, 말로만 하면 꼰대가 되니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있다.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젊은 사람한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모범을 보이려면 힘이 많이 들고 어렵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어른이 많지 않다. 모범을 보이는 것을 ‘德’이 있다고 한다. 장자는 어른이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젊은 사람보다 공공질서를 잘 지키고, 독서를 더 많이 하고, 신용을 더 잘 지키고, 더 예의를 잘 지키고, 더 단정하고 의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살았으니까. ‘不言則齊’, ‘不言’ 하면 세상의 흐름과 가지런히 잘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 『道德經』에도 나온다. ‘不言之敎’. 여기서 ‘不言’은 ‘특정한 의미로 정해서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딱 정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無言’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言’은 특정한 의미를 담아서 하는 말이다. 이는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과 관계된다. 소유적 태도라고 한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존재적 태도, 무소유’라고 한다. 그래야 삶의 질과 양을 높일 수 있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 경우가 있는가? 처음에는 아주 힘들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색칠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과정은 지난하고 생각보다 많은 장애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세상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생도 인위적으로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면서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면 지치지 않고 생기 있는 삶이 된다. 가장 단순한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삶이다. 반복은 사람에게 고통과 번뇌와 고달픔을 준다. 하지만 반복은 높은 수준의 達觀과 達道를 가져다 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반복하게 되어 있는 일이다. 오늘부터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고 기록하고 뚝심으로 밀고 나간다면 행복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즉, 自快, 자기만족, 자기 희열의 순간순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서 하루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싫증 내지 않고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천지자연의 섭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당신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꾸준히 그렇게 일하는 당신을 보고 사랑하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해보라.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당신의 삶은 쉬워진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당신은 ‘피리 부는 사나이’로 태어날 수도 있다. 성공과 행복은 어려운 길로 들어서서 쉬운 길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인생의 선순환이다. 어려운 길을 택하라. 시간이 지나면 루틴이 생기고 그 어렵던 길도 편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즐거움은 지치지 않는 생명수가 되고, 즐거움은 자신이 바라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혼자 즐기고 혼자 행복할 수 없다. 그건 잠깐의 행복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것처럼 “전체로부터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 떼어놓고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전체를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전체를 위해 성장하고 성장을 통해 얻은 것을 전체에게 계속 나눠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성장과 나눔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자신만의 성장으로 행복할 수 없고, 전체를 위한 나눔이 없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왜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조금 젊었으면’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시간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부터 당장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도 하기 싫을 때는 핑계부터 찾는다. 진즉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부질없는 짓을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변명과 핑계를 대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대처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다그친다. 이 세상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일 뿐이기 때문이다. ‘듀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 중 45%는 결정이 아니라 습관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습관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의 힘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습관은 쉽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면서부터 천부적으로 습관이 재능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바꾸기 위해서 쉬지 않고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 훈련에 힘쓰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는 자투리 시간도 모으면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반복적으로 습관(루틴)을 훈련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게 되면 새로운 나 자신이 만들어지게 된다.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잘 다스려지지 않은 나라로 가라.”는 말은,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안주하지 말고, 혼란스러운 나라에 가서 바로잡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바로잡는 선비의 자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말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안회는 스승에게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말했다. 최진석 교수의 글을 종합해 끝맺음을 한다.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 한 나라가 돌아가려면 정치와 교육, 두 톱니바퀴가 필요하다. 어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를 하는가다. 정치하는 사람을 공급해 주는 게 교육이니, 교육은 나라를 움직이는 근본 문제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상황은 우리나라 교육이 만들어 낸 결과다. 우리나라 사람은 질문이 아니라 대답에 익숙하게 적응됐다. 과거형 교육이란 얘기다. 이미 있는 지식을 가지고 누가 빨리,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느냐만 따진다. 과거를 사는 사회가 된 거다. 미래에 좋은 것은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어떨 때 제일 행복한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몸에 밸 때, 종속국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묻는 것은 힘이 드나 열매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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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6
  • [기고] 책 읽기,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경전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얻은 감동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해 감동이 삶으로 체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었다고 문구를 외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읽은 감동이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부과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동력이다. 경전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전이 있기에 내 삶이 풍요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성현의 삶이 내 삶의 연료가 되어 내가 거기에 스며들고 섞이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경전을 읽고 느낀 감동이 그 사람의 삶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전의 내용이 그 사람의 길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자신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에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사람의 생각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한다. 인생이란 어쩌면 생각의 구체화다. 누군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고, 그것이 방향타가 되어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방식이 서서히 바뀌던 경험, 인생의 몇몇 지점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니 내가 변하는 느낌을 받고, 그들과의 만남 뒤에 성장이 있었음을 이제야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은 흙을 사용해도 그것을 만지는 도공의 손길에 따라 도자기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은 천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남의 상대를 바꾼다. 인생에서 만난 누군가가 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다. 누구는 책이기도 하고 연극이기도 하고 영화, 자연이기도 하다. ‘지적 능력’이란? 인간이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면 사람은 조그마한 것도 자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겸손은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해 본다는 느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도 더 커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도 많아진다. 용기, 절제, 생각도 지적 능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를 ‘지적 인내’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베풀었다면, 보답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내면이 단단해지고 두께가 굵어져서 지적으로 성장하고 시선이 높아진다. 겸손함이 내공으로 쌓인 사람에게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는 선배들이나 책으로부터 좋은 내용에 감동도 하고, 다짐도 한다. 하지만 아는 것으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앎을 실천함으로써 지혜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선현들의 책이나 말씀은 실천행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씁쓸하다! 성현들의 말씀을 숙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대한 간절한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동력으로 전개될 때만이 활기찬 삶을 만들고, 지치지 않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고 지치지 않을 수 있으며 행복한 인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일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삶은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된다. 자신이 규칙을 만들어서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규칙이 자신의 삶이 될 때까지. 인생이란?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서 삶은 즐거운 과정이다. 어떨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욕됨, 치욕, 비난도 견뎌내야 한다. 공자도, 붓다도, 예수도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욕됨, 치욕, 비난을 이기고 나면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되고 싶은 자기가 분명할 때가 견디는 힘을 길러준다. 수고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솔선수범을 먼저 하는 습관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만 생각도 어제와 다르게 잉태된다. 한 사람이 겪어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일반화시켜 적용하거나 반복해서 겪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 스토리나 부자가 된 성취경험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인지를 깨달을 때 나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혀서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격변하는 시기일수록 수많은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저마다의 주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평가한다. 그 이론들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스며들어 있어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이론 구축을 시작했으며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절박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개념과 이론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축한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평생을 남들의 사유에 물들어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각자의 관점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고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남의 생각에 물들어 내 생각을 다르게 잉태시킬 수 없다. 깊은 주체적 사고 없는 경험이나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로 깨닫는 각성은 맹목일 수 있다. 좌우명이나 인생론에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인생 이론에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근거,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적 통찰력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근본적 원리나 이치가 담겨 있다. 결국 자기만의 성장 이론은 경험의 텃밭에서 경전을 일궈내는 가운데 독서와 인간관계로 나의 경험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탄생되는 이론이다. 자기만의 이론적 깊이와 넓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여기에 독서와 인간관계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 근거나 행동 규범을 갖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보장 담론을 사회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가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공자도 이런 욕망과 유혹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을 논어(語)에서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불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생기는 삶의 지혜다. 이제 나를 흔드는 뿌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인 `나의 욕망'에 있다는 점이 불혹 이전과 구분된다. 저자의 생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쓰는 데 활용했던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부딪힌 현실의 문제, 즉 병을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 그 고뇌와 태도를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실천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시종일관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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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생명존중칼럼]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한국의 자살률 관련 질문을 했으며, 지난 10일에도 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약집을 통해 자살 예방을 위해 향후 5년간 초·중등 전 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실시해 자살 위험군 학생에 대해선 전문 기관과 연계해 치료가 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청소년 상담 1388 통합 콜센터’를 신설해 24시간 전화상담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라고 해 미래를 밝게 열어줬다. 한국의 자살예방은 복지부가 2004년 시작된, 자살예방기본계획이 5차(2023~2027)까지 시행해 왔으나, 매번 목표 자살률은 달성되지 못했다. 알다시피 2024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2명으로 OECD 국가 평균(11.1명)의 2배 수준이다. 2004년 이래 줄곧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자살은 우리나라 10~30대 사망 원인 1위이며, 40~50대에서는 사망 원인 2위다. 특히 자해·자살 환자 중 10~20대 비율이 10년 새 15.4%포인트 늘어날 정도로 증가세가 가파르다.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총리실에 둔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대통령실에 자살대책위원회 신설 운영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자살예방센터 운영과 종교계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그간 종교계는 생명존중문화 확산을 위해 개별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으나 자살문제는 매우 소극적이다. 2019년 6월 18일 한국종교인연대는 한국이 경제개발도상국가(OECD)중 1위인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어나고자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라고 반성과 참회로 ‘생명살리기, 자살예방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했다. 이후 다행히 종교계는 자살예방 인식개선 사업을 종교인연대 소속 7대 종단(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협의회)이 ‘생명존중 문화확산 생명살리기 교육사업’을 전개, 고무적이나 아직도 자살률 낮추는 교육·홍보사업은 미흡하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 예산 등이 확충되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종교계는 선교, 포교, 교화에 우선하기보다는 설교나 설법, 강론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앞장서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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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기자수첩] 사각지대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청주시 이자 지원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교육연합신문=유기성 기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며 청주 지역 자영업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이를 지원하겠다며 청주시가 내놓은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대출 이자 지원 사업'이 정작 가장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신청 자격 요건이다. 이자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세 체납, 지방세 체납, 건강보험료 및 4대 보험료 미납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장사가 안 되는데, 뭘 먼저 내야 합니까" 청주시 상당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최모 씨(55)는 올해 초 은행 대출로 월세와 인건비를 겨우 맞췄다. 하지만 3개월 전부터 건강보험료가 밀리기 시작했다. "2년째 매출은 줄어드는데 월세는 그대로예요. 알바도 못 쓰고, 새벽부터 밤까지 부부가 나와 일하는데도 매달 적자입니다. 카드 돌려막기 하다가 4대 보험료, 세금까지 손댈 수 없었어요. 대출 이자도 감당이 안 돼서 청주시 지원을 신청하려 했더니 건강보험료 체납으로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너무 허탈했어요." "이자 감면만 돼도 숨통이 트일 텐데" 청원구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이모 씨(39)도 비슷한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한동안 버티다 시설을 리모델링하며 대출을 받았고, 신용등급이 6등급까지 떨어졌다. 이자 부담을 덜 수 있을까 싶어 시청의 이자 지원 정책을 찾아봤지만, 지방세 체납 1건이 발목을 잡았다. “아파트 관리비도 밀리고 있는데 세금이 우선일 수가 없죠. 이런 상황에서 자격 요건이 너무 까다로우면 정책 의미가 없지 않나요? 정작 필요한 사람은 아예 문턱에도 못 가는 구조예요.” "진짜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 “현장에선 지원 조건이 오히려 '낙인효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체납이 있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순서를 정한 사람입니다. 행정기관이 실질적 상황을 반영한 융통성을 가져야 진짜 도움이 됩니다.” 실제 경기 불황으로 인해 자영업자의 70% 이상이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체납으로 인해 각종 금융지원에서 배제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특히, 신용등급이 낮거나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일수록 체납 가능성이 높아, '저신용·저소득'을 위한 제도가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청주시 관계자는 "성실 납세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기준"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정책의 실효성을 따져볼 때 자격 조건을 완화하거나, 체납자에 대해서도 일시적 사유가 입증되면 예외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청주시뿐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유사 정책들도 대부분 동일한 한계를 보이고 있어, 전국 단위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원이 절실한 이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현실.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다. 전국 자영업자 절반 이상이 체납 위험으로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2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자영업자의 약 52.3%가 최근 1년 내 건강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중소기업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소상공인 금융접근성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8.6%가 "대출은 필요하지만 체납 등으로 지원받기 어렵다"고 했고, 이 중 40% 이상이 “정책금융의 자격 요건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답했다. 청주시 소상공인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청주시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 청주시 내 사업자등록 소상공인 약 6만여 명 중 1만 3천여 명(약 21.7%)이 국세·지방세 체납이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까지 포함하면 전체 소상공인의 30~35% 이상이 지원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현재 경기침체로 하루 매출이 100만원 하던 매출이 10~20만원으로 줄어 투잡, 쓰리잡을 해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그렇다고 직원 인건비를 줄일 수도 없고, 매달 생활비도 되지 않는 현실에 점포 폐업을 고민하는 최모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뇌리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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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기고] 제대로 된 꿈 교육! 왜 해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요즘 사회 병폐 중의 하나는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와 나라 발전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미리 생각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일, 즉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일에 너무 게으르다는 것이다. 걱정은 위대한 말이다. 나와 공동체를 지키고 하나 되는 가치관과 행복한 삶을 만드는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自問自答, 자기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설명, 결정하는 태도가 먼저다. 걱정과 관련, 공자께서는 『繫辭傳』5-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망할 것이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그 존재를 보호하는 것이다. 危者, 安其位者也; 亡者, 保其存者也.” 이것은 자신과 나라, 사회를 지키는 양면의 지혜, 즉 실력과 임기응변할 수 있는 유능함과 순발력 있는 자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시대정신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걱정이네.’ 이런 말을 듣기도 참 어렵다. 특히 大人의 걱정은 공동체에서는 중요하다. 갈등이나 분열, 증오 나아가 혐오가 빈번한 사회에 대해, ‘나 몰라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는 등 하나 되는 공동체 가치관과 어긋나는 사람이 늘어감에도 말이다. 사회나 국가, 지역 의 문제에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여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언 중 최고의 명언이 있다. 모피우스가 니오에게 하는 말인데,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라는 명언이 있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고 회자되는 문제와 병폐가 ‘문해력’이라고들 한다. 문해력 신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문해력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문해력 신장 연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언론에 게재하는 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그런데 교육 기관에서는 지금도 전시행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다. ‘지적 게으름’의 표본이다. ‘본질에는 멀고 표는 가깝다.’는 국민들의 시각을 외면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 결과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 길을 아는 것과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며 그 길을 걷는 것은 하늘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습관이 절실하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誠이다. 성이란 자신의 소명을 알고 책임감 있게 하나하나 실천하는 일이다. 왜 성실하면 다 된다. 우주가 성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성실한 언어생활을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체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실의 일차적 의미는 말의 성실함에 있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려면 한자와 한글이 만나야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아는 것은 생각이고, 걷는 것은 행동이다. 우리는 알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행동을 했을 때만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때 가서야 안다고 할 수 있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겠다고 한다. 그런데 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왜 힘들다고 말하느냐?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이다. 왜 못할 정도로 힘이 드느냐? 힘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인위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자연적이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인위적인 세상에 맞추려면 우리는 인위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 하나는 문명은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연이란 우리가 인위성을 발휘하고 발휘하고 발휘하고 또 발휘하다가 원래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숙명처럼 가지고 가야 하는 ‘우환(憂患) 의식’에 대하여 맹자는 ‘종신지우(終身之憂)’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내 몸 다할 때까지 종신토록 잊지 말아야 할 숙명 같은 지도자의 근심이다. 그 근심은 개인의 근심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혼신을 다하는 근심 즉, 평생 이웃과 함께 고민하는 우환 의식이 군자의 덕목이며, 내 안위와 출세만 생각하는 일조지환(한나절 짧은 고민)은 소인의 근심이라고 맹자는 말한다. 과연 ‘大人之憂’를 따를 것인가?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학문이자 지도자를 키우는 큰 가르침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면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인류가 인간의 고통 문제를 감정적으로 외면하지 않고 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유학의 문제의식이다. 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규범인 義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교적 현자들의 삶의 전통이 곳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림들의 시대정신은 유교적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실천을 통해서 유교의 참뜻을 알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유교는 존재의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은 무엇이고,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누가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본다. 그 몸의 움직임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래서 身을 ‘몸 신’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신’이란 ‘신다’, ‘담다’의 뜻이다. 그 행동이 마음을 담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는 뜻이다. ‘마음’은 ‘하늘’의 상대적 의미다. 몸이란 하늘을 닮아야 하고, 하늘을 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삶의 격, 삶의 효율성, 삶의 생산성, 삶의 진실성은 생각에 의존한다. ‘나는 지금도 헤어진 첫사랑을 생각한다.’ ‘지금도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은 잡념이다. 생각은 일단 목적이 분명하고 지속적이며 일정 의식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감각과 본능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수고가 많이 들고 어렵다. 따라서 수고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생각하는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일은 그 사람이 부지런한지 아닌지도 알게 해 준다. 생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일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 제도, 철학까지도 문제와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다. 생각한다는 것은 불편함, 문제를 느끼거나 발견해서 고쳐가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없다. 우리는 간혹 남의 일에 박수치면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論語』를 읽으면 자기가 공자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道德經』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노자가 된 사람처럼 생각한다. 다이어트를 고민하면 자신이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가끔 우리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보고 듣는데, 어쩌면 책 속에는 저자의 길이 있는 것이지, 그 길이 독자의 길은 아닌 거다. 자신의 길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길을 닦고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삶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존재다. 인간의 생존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장치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이 문명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만드는 일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지식을 수입하고 수용하는 일에만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 생산보다는 지식 수입에 더 의존하고 있다. 지식 생산 국가는 선도 국가라고 한다. 종속 국가, 추격 국가, 전술 국가는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탐욕이 먼저고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 상황은 어렵다. 우리나라 전체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어서다. 우리나라가 꿈이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할 일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싸울 일밖에 없는 거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기자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꿈이 없어진 거다. 검사가 되겠다. 검사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지금 성장이 멈춘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나라도 성장을 멈추게 될 수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필리핀이 그 예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어떤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존재론적 문제다. 삶에서 효율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꿈, 판타지를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꿈으로 자기 현실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결정하는 삶이다. 모든 일은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성장의 해법이다. 예를 들어, ‘꿈이 뭐에요?’ 하고 물으면 ‘기자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우리나라가 말의 질서가 무너져서 사회 분열, 갈등,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하자. ‘아! 말의 질서를 바로 한번 세워보겠다.’ ‘말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좋고 유용하겠다.’ 하는 것이 꿈이고 포부다. 왜 배우는가? 자신에게 갖춰지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갖춰지지 않은 것을 갖추기 위해서다. 왜 갖추는가? 생존의 질과 양을 높이기 위함이다. 매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남에게 의존하는 양이 줄어든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주도적이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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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기고] 코로나19와 눈높이 안전교육이란
    [교육연합신문=서동욱 기고] 최근 다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 각국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방역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것은 마스크와 손소독제였다. 마스크는 많은 이들의 호흡기를 지켜냈으며 손소독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사멸시켰다. 하지만 손소독제는 꽤나 많은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버튼은 공용 부분이니 많은 사람들이 누르게 되고 이로 인해 엘리베이터 안에 손소독제 비치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 아파트의 관리사무소에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손소독제를 엘리베이터의 손잡이 부근에 고정시켜두었다. 이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그 손소독제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통상 엘리베이터의 손잡이는 중간 부분 즉 성인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다. 이 위치가 허리를 덜 굽혀도 되니 효율성 측면에서는 좋은 위치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높이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눈높이다. 손소독제는 에탄올과 이소프로판올이 주성분이며 눈에 들어갈 경우 각막화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날 아파트에 탑승한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다. 그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손 소독의 필요성이 떠오른 듯 보였다. 손소독제로 다가가 그 학생은 버튼을 눌렀는데 그 순간 손소독제 입구에서 에탄올이 그 아이의 눈으로 튀어들어갔다. 아이는 눈을 손으로 비비며 고통을 호소했고 보호자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 과연 관리사무소에서 선택한 그 손소독제의 높이가 합당한 높이인가. 효율성 측면에서는 합당한 높이지만 안전 측면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높이라고 봐야 한다. 이 사건은 눈높이 안전교육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성인의 입장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예상하고 대처해야 한다. 나는 교실에서 손소독제는 가급적 구석 쪽에 비치하여 사방으로 튀는 것을 막고 높이는 아이들 기준 무릎 높이 정도로 낮춘다. 그리고 손소독제를 사용할 때 학생들이 반드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누르도록 지도한다. 손소독제가 튀어도 손안에서 튀도록 해야 옆의 학생들 눈으로 손소독제가 들어가는 화상사고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높이 안전교육은 우리의 시각을 학생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효율성과 안전을 맞바꿀 수는 없다. 효율성의 반대말은 비효율성이지만 안전의 반대말은 위험 또는 부상 또는 생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서는 선진국이지만 아직도 안전분야에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눈높이 안전교육이 일상화된 그런 나라가 되어 안전에서도 당당하게 선진국이라고 외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원해 본다. ▣ 서동욱 ◇ 초등학교 교사 ◇ 미국 화재폭발조사관(CFEI) ◇ 소방안전교육사 및 소방학교 외래강사 ◇ 한국119청소년단 지도교사 ◇ 소방안전교육사 국민안전교육실무 교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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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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