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경전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얻은 감동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해 감동이 삶으로 체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었다고 문구를 외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읽은 감동이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부과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동력이다.
경전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전이 있기에 내 삶이 풍요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성현의 삶이 내 삶의 연료가 되어 내가 거기에 스며들고 섞이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경전을 읽고 느낀 감동이 그 사람의 삶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전의 내용이 그 사람의 길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자신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에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사람의 생각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한다. 인생이란 어쩌면 생각의 구체화다. 누군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고, 그것이 방향타가 되어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방식이 서서히 바뀌던 경험, 인생의 몇몇 지점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니 내가 변하는 느낌을 받고, 그들과의 만남 뒤에 성장이 있었음을 이제야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은 흙을 사용해도 그것을 만지는 도공의 손길에 따라 도자기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은 천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남의 상대를 바꾼다. 인생에서 만난 누군가가 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다. 누구는 책이기도 하고 연극이기도 하고 영화, 자연이기도 하다.
‘지적 능력’이란? 인간이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면 사람은 조그마한 것도 자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겸손은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해 본다는 느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도 더 커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도 많아진다. 용기, 절제, 생각도 지적 능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를 ‘지적 인내’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베풀었다면, 보답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내면이 단단해지고 두께가 굵어져서 지적으로 성장하고 시선이 높아진다.
겸손함이 내공으로 쌓인 사람에게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는 선배들이나 책으로부터 좋은 내용에 감동도 하고, 다짐도 한다. 하지만 아는 것으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앎을 실천함으로써 지혜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선현들의 책이나 말씀은 실천행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씁쓸하다!
성현들의 말씀을 숙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대한 간절한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동력으로 전개될 때만이 활기찬 삶을 만들고, 지치지 않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고 지치지 않을 수 있으며 행복한 인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일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삶은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된다. 자신이 규칙을 만들어서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규칙이 자신의 삶이 될 때까지. 인생이란?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서 삶은 즐거운 과정이다.
어떨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욕됨, 치욕, 비난도 견뎌내야 한다. 공자도, 붓다도, 예수도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욕됨, 치욕, 비난을 이기고 나면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되고 싶은 자기가 분명할 때가 견디는 힘을 길러준다. 수고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솔선수범을 먼저 하는 습관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만 생각도 어제와 다르게 잉태된다. 한 사람이 겪어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일반화시켜 적용하거나 반복해서 겪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 스토리나 부자가 된 성취경험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인지를 깨달을 때 나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혀서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격변하는 시기일수록 수많은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저마다의 주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평가한다. 그 이론들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스며들어 있어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이론 구축을 시작했으며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절박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개념과 이론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축한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평생을 남들의 사유에 물들어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각자의 관점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고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남의 생각에 물들어 내 생각을 다르게 잉태시킬 수 없다. 깊은 주체적 사고 없는 경험이나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로 깨닫는 각성은 맹목일 수 있다.
좌우명이나 인생론에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인생 이론에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근거,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적 통찰력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근본적 원리나 이치가 담겨 있다. 결국 자기만의 성장 이론은 경험의 텃밭에서 경전을 일궈내는 가운데 독서와 인간관계로 나의 경험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탄생되는 이론이다. 자기만의 이론적 깊이와 넓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여기에 독서와 인간관계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 근거나 행동 규범을 갖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보장 담론을 사회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가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공자도 이런 욕망과 유혹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을 논어(語)에서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불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생기는 삶의 지혜다. 이제 나를 흔드는 뿌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인 `나의 욕망'에 있다는 점이 불혹 이전과 구분된다.
저자의 생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쓰는 데 활용했던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부딪힌 현실의 문제, 즉 병을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 그 고뇌와 태도를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실천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시종일관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