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3(목)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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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사설학원의 역사

 

대한민국 발전의 원인 중의 하나는 엄마들의 극성(열성)이고, 또 하나는 교육열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부산도 제2의 도시로서 한때 명문 학교들도 많았고 특히, 서면 학원골목에는 수업을 마치는 시간대에는 학원 수강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추억해 보면 경남학원, 청산학원, 부산학원, 서면문리학원, 현광문리학원, 서전학원, 대신학원 등등 60대 이후 세대들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기억되는 학원 이름들이다. 그 시절 한때 부산 학원가의 주역이었던 영어는 OOO, 수학은 OOO, 국어는 김광휘 선생이었다. 

 

1980년엔 학생 과외가 금지돼 재학생들의 학원 출입도 불가, 재수생만 학원을 다닐 수 있는 제도가 되면서 종합학원이 성업했고, 부산은 물론 저 멀리 경남, 경북, 울산 심지어는 전라도에서까지 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는 학원 관련 규제가 풀리면서 옛날과 달리 로타리를 중심으로 한샘, 성문, 대동, 서전, 대신학원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어학원도 큰 인기를 모았다. 

 

2000년대 중, 후반에는 개인 PC와 휴대용 동영상 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인터넷강의(인강)'가 보편화돼 학원가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KTX의 개통으로 부산 등지에서 서울 유명 학원으로 주말에 원정 수강도 일약 유명해졌다. 따라서 부산의 유명 학원들은 통폐합하거나 기숙학원으로 전환해 이웃 김해나 양산, 울산 등 변두리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2010년대 중반에는 학령아동의 급감으로 보습학원이 등장해 대형학원들이 사라지게 됐다. 학생들로 붐비던 서면 학원가 골목엔 공무원, 경찰 등을 준비하는 고시학원으로 변모했다. 이것이 개략적인 부산 입시학원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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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그사람 - 전설의 강사 국어 김광휘 선생이 걸어온 길 

부산 서면 학원 골목에는 현광문리학원이 있었는데 당시 부산의 유명 강사 2명(현 모씨, 김광휘)이 각자 이름 한 자씩을 따서 현광으로 지은 학원이다. 서울 출신에 인천 교대를 졸업, 20대 군 생활을 부산에서 시작하면서 인연이 됐다. 서면 대한극장 옆 한성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시작했는데 주변 공장에서 근무하던 공원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무료 학원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폐쇄되었고, 서면 방직공장을 빌려 대안학교 격인 '부일재건중고등학교'를 세워 교무부장, 담임, 국어선생을 겸하면서 뒤에 교장을 맡았다. 

 

학생들은 5백여 명 되었고 집까지 팔아가며 운영했지만 결국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폐교됐다. 그 후 생계를 위해 학원에 투신, 잠시 혜광고등학교에 근무하다 1972년 범일학원에 강사가 되었고, 부산에서 가장 큰 부산학원으로 개명되어 많을 때는 한 강의실에 500여 명을 강의한 적도 있었다. 부산의 명문학원으로 국내 유명대에 천 명이 넘는 합격자를 배출해 전국적으로 수험생 및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최강의 학원이 됐다. 

 

그 후 부산 종로학원 원장, 현광문리학원 원장 등을 거쳐 2014년부터는 남천동 한 학원 공간을 빌려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과외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어는 읽는 법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배우면 중3도 수능문제를 풀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학생들에게 '읽는 법 강의'를 개설해 손자 같은 학생들에게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전설적 학원강사이자 추앙받는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새는 창공을 날아야 한다'는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하면서 동시에 “꿈을 가지고 살라”고 당부도 한다. 고맙게도 유통기간이 끝난 잊혀진 강사인 줄 알았는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을 위안 삼으며 몇 년 전 부산일보의 '레코드 부산'의 탐방기사와 유튜버 등에서도 찾아 주어 감사드린다고 했다. 김광휘 선생은 교육연합신문 부산지사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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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학원계 1세대임에도 지금도 강의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특별히 관리하는 비결은 없고, 새벽 5시경 조간신문에 관심있는 기사 읽으면서 발끝차기를 하다가 신문지를 들고 그냥 잠든다. 다시 일어나면 보통 10시쯤 아침 겸 점심으로 미숫가루+ 혼합커피(믹스커피 1봉, 계란 2개, 계피가루 약간, 소금, 꿀)로 때운다. 그냥 막 산다고나 할까.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술, 담배, 과자, 떡 다 좋아한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께 심하게 혼도 난다. 하지만 그 때뿐이다. 밤에 수업이 있으니 시간이 나면 주로 TV(서부영화), 팝송 듣다 또 잔다. 1년 내내 이렇게 살았다. 

 

■ 1980~1990년대 부산 학원가에서 국어에는 단연 '김광휘'였는데 그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받은 자랑을 한다면?

학원강사는 단과반과 종합반으로 나뉜다. 1980년대는 서울역 앞에 있는 대일학원에서 단과반 강사로 있을 때이다. 대일은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학원으로 영어강사 20명, 수학 20여명, 국어 10명, 사회·과학 10여 명씩으로 전국 내로라하는 강사진들로 구성된 학원으로 학원강사라면 누구나 그 곳에서 강의를 하고 싶어하는 1지망 학원이었고, 후에 서울 수도공고 학교 건물 전체를 학원으로 개원해 500명, 300명, 200명 강의실 등 총 50여 개 강의실을 마감시켜 정말로 학원계 신화로 전해지고 있었다. 또 이 때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까지 들어와 휴강도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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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입 재수생까지 있었던 시절이라 386세대에 해당하는 극도의 사회 혼란 속에서도 대학입시경쟁은 치열했다. 'S.K.Y' 아니면 싫다며 수강생들이 구름처럼 밀려 수강등록을 못해 학원 주변 만화방, 서울역 앞 여인숙 방에 자리잡고 수강등록 대기증을 두세 개씩 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수강 대기자들에게 파는 전문적 몰이꾼들도 있었다. 그래도 수강등록 못한 학생들은 홧김에 강의실 유리창을 깨, 주변 유리점 사장들은 희열을 느낀 때도 있었다. 1개월 수강인원 전 타임 마감으로 2천여 명, 10년 연속 1타 강사의 왕좌를 누렸다. 과외 금지시대 어느 날 야간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검은 정장의 건장한 두 사람이 나의 팔을 잡으며 탑차에 납치돼 그 집 자녀 과외를 했는데 몇 년 뒤에 보니 당시 권력의 실세로 막강한 집안의 자녀임을 알게 됐다. 

 

■ 20세기(1999년 이전) 입시제도와 현재 경험을 비교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시대에 따라 입시제도가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능시험으로 변천하면서 암기 중심 평가에서 사고능력 측정 평가로 바뀌었다. 본고사 시절 이화여대 국어시험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송강 정철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주관식 문제가 출제돼 암기시험의 극치를 보여 실소를 금치 못한 때도 있었다. 당시 대입 저자 하 모 선생이 강화도에 있다고 신문에 정답 발표를 했는데 후에 이대 측에서는 충북 진천이라 발표돼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망지는 강화도였고 묘소는 진천이다. 정말 웃기는 출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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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가 안정돼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며 사고능력의 필요성이 적극 고려되어 국정교과서 각 과목 1개 출판사에서 간행한 교과서로 수업하는 학력고사 시대에는 국어는 국정교과서 단일 권으로 강의를 하다 보니 몇 쪽 어디에 어떤 단어까지 기억이 생생하기도 해서 나중에는 교과서 없이 줄줄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수능시험 시대 검인정교과서로 국어만 해도 비상, 미래N, 천재, 신사고 기타 18여 종이 넘는 교과서로 다양한 교육과정을 반영한 신소재 개발 단원이 깊게 수록돼 있어 대학 수학능력시험 대비에 적절성을 보이고 있었다. 참 다행이다. 다만 과목 지도하시는 선생들께서 수능시험에 대비한 사고력 향상을 위한 지도 계획이 철저함을 요구한다. 나의 경우 ‘국어영역’이라는 개념부터 제 나름대로 비문학분야에서 경제, 법, 생명과학, 화학, 물리, 지구과학 제시문이 출제된다. 그리고 '다음 글을 읽고 답하시오' 한다. 즉 '읽고 답하라' 따라서 사회탐구 분야든 과학탐구 분야든 그 문제의 정답 결정은 ‘국어영역’이 결정함을 간과하고 있지 않나 싶다. 여기에 제 나름대로 국어 출제요소(출제자가 출제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문장들) 12가지로 티칭-메소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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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시대 명퇴나 정년퇴직 후 제2의 창업 등 인생 재출발하는 후진들에게 한말씀 하신다면?

 

학령인구가 급속히 감소하는 현실이다. 대형입시학원이 10여 개 있을 당시에는 현직 선생들을 적극 초빙해서 강사 수급을 했던 때도 있다. 지금은 골목 보습학원, 소형 단과학원이 운영되고 있고, 건물세도 만만찮고 운영비(봉고비, 강사료)도 많이 들어 실제 학원 사업이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는 배정받은 학생을 교육하지만, 학원은 학생이 선택하니 경쟁력에서 성패가 갈린다고 봐야지. 학원강사도 이젠 어엿한 직업군에 속해 20~30대 신세대 교육받은 강사들의 무대로 전환된다. 새로운 교육 기술과 최첨단 기재로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학생들 또한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직에서 40년간 오직 신념과 열정으로 제자들을 키우고 고귀한 경험과 경력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겠나.

 

부산 도심보다 외곽 신설 아파트단지는 수용 대상이 증가하고 있어 교습소 및 소형 단과학원들이 성업하고 있다. 100세 시대 정년퇴임 연세는 젊은 시니어라 생각하고 평소 자기의 취미와 잠재력이 있는 분야를 찾아 개발하고 연마해서 퇴직 후 직업과 취미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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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휘 선생

◇ 前현광문리학원 원장

◇ 前부산종로학원 원장 

◇ 前부산학원 부원장

◇ 언어영역 문학(창과창) 

◇ 언어영역 독해(한샘출판사) 

◇ 홀로서기 논술(대학진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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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부산 학원가의 전설…김광휘 선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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