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3(수)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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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등굣길, 출근길, 뱃길, 철길, 고속 도로, 산길, 들길은 그냥 자연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간곡한 인간만의 언어다. 그래서 길은 경건한 부름이다. 부름을 받아, 가고 온 길, 하나하나가 모두 인생이 지향해야 할 바를 가리키고 가르치며 부르는 말이다.

  

그 길로 가는 것에 대해 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其善者僞也”, 즉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積僞다. 積僞(僞란; 거짓과 위선이라기보다는 人爲의 僞로 해석)란? 인위적인 노력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그것이 인생의 길을 여는 물음과 답이다. 더 나아가 自問自答으로만이 자신만의 고유한 길로 들어서는 발걸음이며, 인생의 마지막에 나지막이 자신만의 미소를 만들어가는 숭고함과 자족이지 않을까?

  

존재의 근본 상태를 우리는 ‘덕(德)’이라고 말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도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우리 세계에서 불편과 수고, 불안, 경쟁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다. 불안과 경쟁, 불편과 수고를 품는 넉넉함, 불편과 수고스러움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필수조건이다. 살아가는 힘은 지적인 수고와 불안을 감내하는 강인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불평 이전에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다. 주어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고 다음은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를 자신에게 묻는 일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만이 물을 수 있고 답을 할 수 있다. 자신의 온몸으로 원하여 얻는 답만이 자신만의 세계가 된다. 

  

우리의 삶은 철저히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감각과 본능을 이겨내는 인위적인 활동으로 인간은 완성된다. 눕고 싶어도 눕지 않고, 먹고 싶어도 먹지 않고, 자고 싶어도 자지 않을 수 있고, 말하고 싶어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데에서 그 사람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제대로 사는 일은 힘이 들고 불편하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쓰레기를 줍는 일은 더 힘들다.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기는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불편하다. 

  

남에게 공부하라고 하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 하기는 어렵고 책을 보면 눈이 감긴다. 다른 사람에게 생각 좀 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공부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질문이야말로 수업의 밀도를 높인다. 그런데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학생들에게는 질문하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질문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질문하면 짜증을 낸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과정은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살이(살아감)에는 불편함이 가득 차 있다는 깨달음이 중요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정도의 불편과 노고를 감수해야 한다. 德스러운 삶에는 반드시 불편을 감수하려는 강인함과 태도, 더 나아가 불편을 자초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고 불편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天地와 더불어 사는 것이고, 인간이 天地 사이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인간이 천지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책임 의식이 절실하다. 그러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철저한 실천을 주문하고 있는 바가 주역의 부름이다.

  

계사전 3-2에 “震无咎者, 存乎悔”라는 문장이 있다. 허물을 고쳐서 허물이 없는 것으로 만드는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는 것은 후회할 줄 아는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그때 내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후회를 한다는 것은 후회되는 일이 일어났던 단초(기미, 갈림길)를 명백히 파악하여 자기를 단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후회, 자기반성이라는 게 없다고들 한다. 대신 뭉개는 것만 있다고 한다. 이 말을 공자가 들으면 무엇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는 부족한 게 많아’, ‘노력할게’.

  

조선 역성혁명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은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曰仁.”(계사 하)을 인용하지 않고 聖人之大寶曰位를 앞세운다. 그의 문제의식은 天地보다도 聖人에 두었다. 성인의 철학이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간파한 것이다. 

  

천지 대자연의 마음은 만물을 生하는 마음이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은 서로 죽이고 미워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성인은 天地之大德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살고 싶다고, 그래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이 들도록 민본주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당신 때문에 못 살겠다', `당신 때문에 되는 게 없다'고 악다구니를 퍼붓거나 그런 마음을 속으로 담아두면 정말 그리되고 만다. `아파도 당신 덕분에 낳을 것 같다고', `힘들어도 당신 덕분에 이 난관을 헤쳐 나간다고' 속삭여야 한다.

  

이쯤에서 자신에게 묻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며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되는 게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사는지, 아니면 애써 웃으며 `누구 덕분에', `무엇 덕분에' 일이 잘 풀리고 살만하다고 너스레를 떨고 사는지를 물어보고 답도 써보자. 우리는 잘못을 덮어씌울 사람을 찾는 게 일상이다. 

  

이제는 `덕분에'로 갈아타자.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당신의 남은 생은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와 모든 것들을 위해. `때문에'는 공멸과 나락의 화근이자 지름길이고 `덕분에'는 상생과 공영의 마중물이자 촉진제이며 인간관계의 디딤돌이다. 

  

인간이 天地 사이에 들어와서 天地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성현들이 깨닫고, 인간에게 바른 위치를 인식하게 하려고 周易을 만든 계기라고 한다. 길은 부름이다. 부름을 따라 태어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성현들의 말과 글, 성현들의 일상이 우리를 부른다. 길의 부름은 희망이기도 하며, 기다림이기도 하다.


인간이 삶을 꾸리는 세계인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 세계다. 인간의 길에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에 좌우된다. 그 생각은 자신을 고유한 걸음걸이를 걷게 한다.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7) 선생은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 살았는데, 그 안에 4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부자가 말년에는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今吾不勞而坐致之, 購書雖費, 不猶愈於齎糧而適遠乎?”(내가 성현들을 만나려면, 보통 같으면, 그 천리만리 길을 걸어가서, 말을 타고, 종을 데리고 가도 만날까 말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 책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모셔다 놓고, 언제든지 나를 기다리고 있게 하고, 내가 만나고 싶을 때 가서 만난다.)라는 말로 자신만의 길을 만든 선각자가 아닌가? 


또한 매천 황현은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맞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위로는 하늘이 준 양심을 지키고, 아래로는 읽은 글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영원히 잠드는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말은, 자기 죽음이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요즘 학교 수업의 일부를 보면 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잔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도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니, 외부 강사들의 이야기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실태를 듣곤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허물을 줄이려는 태도가 아쉽다. 덮어 놓지 말고 벗겨 놓고 살펴야 고칠 수 있다. 

  

교육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민주 질서란 位가 없는 질서가 아니라 位가 正命을 얻는 일이다. 선생님이라는 位가 없이는 학생들을 지도할 수가 없다. 대통령도 位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다.


位가 없는 사회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位는 모든 조직의 위계적 원리를 의미한다. 길에도 位가 있고 있어야 한다. 


내 집이 없다면? 내 나라가 없다면? 내 집도 내 길이 만들고 내 나라도 우리의 길이 만든다. 내 집과 내 나라를 위해 불편과 수고를 감수하고 자초하는 일은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길이지 않을까? 


古의 훌륭함을 인정하면 동시에 今의 훌륭함도 인정해야 한다. 옛사람이 훌륭했다고 하면 오늘에 사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我의 훌륭함을 인정하면 동시에 他의 훌륭함도 인정해야 한다. 자기의 잘난 것만 말하지 말고 남의 잘난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큰길(大道)이지 않을까? 유교는 윤리며 상식의 합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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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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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유학자(儒學者)의 덕(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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