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1-07(토)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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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식과 정보, 물질은 넘쳐나지만, 갈등의 파고를 가라앉히고 세대와 진영을 아우를 ‘큰 어른’의 부재로 깊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큰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가 많거나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타인의 평가나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을 지니고, 스스로 삶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며,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시대를 밝히는 큰 어른의 품격과 삶의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와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그릇의 크기를 ‘담담함’과 ‘욕망의 절제’로 규정했습니다. “풍랑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는 배처럼, 뜻을 이뤘다고 기뻐 날뛰지 말고 실패했다고 풀죽지 마라(득의담연 득실담연·得意淡然 失意泰然).”고 일렀습니다. 


정약용 선생이 말한 ‘큰 어른’이란? 사소한 칭찬에 교만해지지 않고, 억울한 비난이나 역경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남의 잘못을 품어줄 줄 아는 넉넉한 여백과 자신의 결핍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단단한 침묵을 지닌 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남 탓하지 않는 태도’와 ‘과제의 분리’를 어른의 자질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으며, 남 탓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법으로 ‘과제의 분리’라는 실천적 태도를 제시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 사람의 과제이고,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는 나의 과제라고 말입니다. 타인의 반응이나 환경을 탓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로 머물려는 자기기만이며, 오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선택에만 책임을 다할 때 자유가 열린다고 합니다. 제 머리가 망치를 맞은 듯합니다. 


쇼펜하우어도 아들러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마라.”입니다. 이 말은 인간을 혐오하거나 사회와 인연을 끊으라는 냉소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적 결핍을 타인이라는 외부적 존재로 메우려 하지 말라.’는 자립의 선언문이라고 여겨집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과도한 기대는 필연적으로 실망과 분노, 예속을 낳습니다. 행복의 중심축을 남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의 ‘풍요로운 고독(Solitude)’에 둘 때, 비로소 상처받지 않고 타인과도 건강하고 대등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삶의 기준은 자신이면서 타인과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나폴레옹 힐은 ‘하기 싫어도 계속하는 힘’의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기부여나 기분에 의존하는 행동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실천 방법으로 ‘명확한 목적(Definiteness of Purpose)과 자동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감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하기 싫다.”라는 감정적 평가를 행위의 전제조건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즉 마이크로 루틴화입니다. 진입 장벽을 극단적으로 낮추어 생각할 틈 없이 즉각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환경적 자동 장치’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먼저 나가면 감정은 뒤따라온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최진석 교수는 47년 철학 공부 끝에 강조한 ‘매일 반복할 두 가지’ 주체적 인간의 일상 실천을 ‘읽기(관찰)’와 ‘쓰기(질문)’의 루틴이라고 말합니다.


즉 세상과 고전을 정면으로 응시하기(읽기)입니다. 타인이 요약해 둔 지식에 기대지 않고 세계의 결을 내 눈으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내 언어로 질문을 기록하기(쓰기)입니다. 오늘 마주한 문제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매일 나만의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는 사유의 훈련이라고 말입니다. 생각의 시대로 전환의 시작입니다.


“때가 오지 않았을 때 옳은 것도 틀린 것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대 종횡가의 비조 귀곡자는 사물의 ‘시중(時中: 때에 들어맞음)’을 역설했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대의명분과 진리라도, 시대적 조건과 상대방의 수용 역량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 강요하면 분란을 일으키고 역풍을 맞습니다. 큰 어른은 옳음을 앞세워 세상을 윽박지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조건을 성숙시키는 인내(待時)를 안다.’고 말입니다.


데니스 웨이틀리는 불평을 멈추고 주체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법을 제시했습니다. 최선의 생각은 “외부 상황은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황에 반응하는 내 태도는 100% 내가 결정한다.”라고 말합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불평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질문의 주어를 ‘세상’에서 ‘나’로 바꿉니다.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 대신 “이 혼란 속에서 지금 내가 즉시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로 즉각 프레임을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강요하는 교육이 아니라 깨닫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시대입니다.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어원을 스스로 찾아서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 저를 가슴 뛰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지속적으로 쉼 없이 제거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행동하기 전에 3초 정도 생각하는 습관이 저를 다르게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부자’가 된 사람은 ‘부자가 된 이유’가 반드시 있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된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因果法則이 적용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말을 거르는 ‘세 가지 체’, 선교사 에이미 카마이클이 제시한 언어의 정화 기준입니다. 그것은 사실인가?(Is it true?): 추측, 풍문, 진영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객관적 진실인가? 그것은 친절한가?(Is it kind?): 상대를 조롱하고 깎아내리려는 가시 돋친 칼날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고 품어주는 배려의 온기가 담겨 있는가? 그것은 꼭 필요한가?(Is it necessary?): 지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잡담이나 분란을 일으키는 말이 아닌, 공동체에 유익한 말인가?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잭슨 브라운 주니어는 시간에 담아야 할 것에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투명한 그릇입니다. 흘러가는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그릇 속에 정직, 헌신, 배움,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는 질감 있는 가치를 얼마나 새겨 넣었는가입니다. 삶의 성패는 수명이 아니라 밀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버리 실즈는 실패와 실수가 주는 배움의 궤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전진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넘어졌던 그 자리는 나의 취약성과 오만을 가르쳐주는 가장 단단한 교실이며, 잘못 디딘 발끝의 통증은 다음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디뎌야 할지 가르쳐주는 나침반이라고 말합니다.


실패를 치욕으로 여겨 숨기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이 실수가 나에게 가르쳐 준 사유의 한계는 무엇인가?”를 겸허히 읽어내는 사람만이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어른으로 성숙한다고 믿습니다.


“문제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조엘 챈들러 해리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직면한 고통과 문제를 피해 물리적 장소를 옮기거나 술, 오락, 회피로 달아나도, 내면의 번뇌와 삶의 빚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옵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먼 곳은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결단뿐입니다. 


‘하루를 가늠하는 질문’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전설적인 미식축구 감독 루 홀츠는 매일 밤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나는 옳은 일을 했는가?(Do what is right) 오늘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Do your best) 오늘 만난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배려와 관심을 보였는가?(Treat others as you want to be treated)입니다. 도덕적 품격과 성장의 척도를 완성하는 질문입니다.

  

‘죽은 물고기와 시대의 조류’; 영국의 언론인이자 비평가 맬컴 머거리지가 던진 통렬한 경고입니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편안하게 떠내려가는 것은 오직 생명을 잃은 ‘죽은 물고기’뿐입니다. 살아 숨 쉬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치고 올라갑니다.


시대의 유행, 대중의 광기, 편협한 진영 논리에 아무런 비판 없이 휩쓸려 가는 삶은 정신적으로 죽은 삶입니다. 비바람과 거센 물결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도덕적 원칙을 지키며 역류할 줄 아는 ‘사유하는 주체’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말을 줄여라. 선을 그어라. 즉답하지 말라.”의 진실, 다산의 언어 절제학입니다. ‘말을 줄여라(寡言).’ 말이 많으면 허물이 생기고 내면의 기운이 밖으로 흩어진다. ‘선을 그어라(有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예(禮)의 경계를 넘지 않아야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 ‘즉답하지 말라(愼諾).’ 순간의 감정이나 체면 때문에 덜컥 승낙하면 평생의 화가 된다. 한 템포 호흡을 고르고 이성으로 검증한 뒤 답하는 것이 신뢰(信)의 뼈대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시류에 휩쓸려 가는 자는 결코 세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작은 일희일비에 흔들리지 않는 다산의 침묵을 배우고, 톨스토이처럼 지금 내 곁의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죽은 물고기처럼 떠내려가지 않고 양심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결기, 이 단단한 품격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큰 어른이 우뚝 선 품격 있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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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 우리말로 배우는 한자  교육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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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유하는 주체’만이 진정한 큰 어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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