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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제(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베랑제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7년간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했다. 그는 프라도사제회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 있었다. 1996년 생드니 교구 주교로 서품된 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통해 두 나라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프라도 사제로서 서약했던 초심의 자리를 향했다. 은퇴 후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겼다. 그는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프라도회가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동네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살기를 자청했다. 말년에는 고향 양로원에서 '주교님'이 아닌 친근한 형제로서 노인들과 똑같은 처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이 박제된 훈장이 아닌,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가치의 실천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전남 강진교육지원청의 최 모 전 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인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안락한 원로의 자리를 사양했다. 대신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타국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베랑제 주교처럼,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격과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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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라는 말은 교과서에서 너무도 익숙하지만, 사실 그 통일은 제한적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포함되지 않았고, 한반도의 북쪽은 여전히 미완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언제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표가 남아 있다. 실제로 몇 해 전 학자 100인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을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이 꼽힌 답은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패배의 순간임에도,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한국사의 자존심과 대륙적 상상력을 찾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이름, ‘고구려’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 국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 건국 연대, 단순한 연표가 아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적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다르다. 『신당서』는 고구려가 “한(漢) 대부터 있었고, 지금 900년에 이른다”라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등장하지만, 신라는 훨씬 늦게 독립된 항목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연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썼는지, 그것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 ‘구려’라는 이름의 뿌리 『삼국지』 동이전에는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邑)이다”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구루’는 ‘굴(동굴)’, ‘골짜기’, ‘고을’로 이어지는 어원망을 품고 있다. 즉, 집단이 모여 사는 거처, 곧 성(邑)을 뜻했다. 따라서 ‘구려’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원래는 ‘성’이나 ‘고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가 국호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높은 성, 위대한 고을’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 졸본이 아니라 홀본, 해의 근본 고구려 건국지로 잘 알려진 곳은 ‘졸본(卒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413년)에 기록된 표기는 ‘홀본(忽本)’이다. 시기상 더 원 사료에 가까운 비문을 따른다면, ‘홀본’이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홀’은 문자학적으로 ‘해(태양)’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홀본’은 곧 ‘해의 근본’, ‘해 뜨는 곳’을 의미한다. 조선의 ‘아사달’, 단군신화의 태양적 국호 전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건국지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연결된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高)’ 자의 기원 그렇다면 ‘고(高)’는 무엇일까. 흔히는 다층 성곽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들여다보면, ‘고’는 원래 솟아오름,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에서 출발한 글자였다. ‘높다’라는 추상적 의미는 그 뒤에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높은 성’일 뿐 아니라, 태양의 상징과 맞닿아 있었다. 시조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 전통이 이 ‘높음’과 ‘태양’을 겹겹이 담아낸 셈이다.([그림 28] ‘高’ 참조) □ 이미 쓰였던 이름, ‘고려’ 많은 사람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왕건이 새로 만든 줄로 안다. 그러나 사실 고구려 시기부터 ‘고려’는 이미 사용되었다. 충주 고구려비(397년)에는 ‘고려 태왕’이 등장하고, 539년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에는 ‘고려국’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게다가 당·원·명대의 음운서, 그리고 『용비어천가』 표기를 보면 ‘려’는 ‘리’로도 발음되었다. 고려가 곧 ‘고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단순한 약칭이 아니라, ‘골/홀(해)’ 계열 어원과 연결된 또 하나의 정통 국호였다고 볼 수 있다. □ 북경까지 뻗은 고구려의 무대 덕흥리 고분 벽화(408년)에는 ‘유주자사’와 13군 태수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화북 내륙과 접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 문헌에는 평양성·국내성·한성의 3수도 체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송·명대 지리지에는 평양성을 ‘평주=북경권’으로 비정한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가 단순히 압록강 주변이 아니라, 북경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가 수·당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계승된 국호, 고려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려’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 보덕국, 후삼국의 태봉, 그리고 왕건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왕건의 고려는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고구려 시기부터 이어진 정통 국호의 계승이었다. 조선 건국 때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채택된 ‘조선’과는 달리, 고려라는 이름은 대륙적 상상력과 민족적 자존을 담은 이름이었다. □ 다시 불러야 할 이름 1948년 제헌 국회에서도 국호는 논쟁거리였다. ‘대한민국’과 ‘고려공화국’이 경쟁했고, 결국 표결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쓰려 했던 흔적은 분명 남아 있다. 오늘날 통일 한국의 국호를 논의한다면, ‘고려’는 가장 국제성과 역사성을 겸비한 후보일 것이다. 북한 역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제안한 바 있다. ‘고려’라는 이름에는 남과 북이 함께 이어받을 수 있는 전통이 담겨 있다. □ 결론: 태양과 높음의 나라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높음’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단군의 아사달에서,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에서, 홀본이라는 건국지에서,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의 지속에서 확인된다. 고구려는 패망했지만, 그 이름은 꺼지지 않았다. 민족의 자존심, 대륙적 상상력, 그리고 태양과 높음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언젠가 통일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이 이름을 불러야 할지 모른다. 고려(高麗). 그 이름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전사의 기억과 미래의 자존을 함께 만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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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 우리가 아는 도깨비는 어떤 모습일까? 뿔이 달린 장난꾸러기, 씨름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사람과 흥정을 벌이는 친근한 존재로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도깨비의 뿌리는 훨씬 더 묵직하다.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고대의 전쟁신과 맞닿아 있는 상징이자, 동이족의 기억을 품은 형상이다. □ 잊힌 이름, 도깨비의 기원 도깨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갑골문과 청동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대 중국의 제기와 무기 위에는 무시무시한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도철(饕餮)이다.([그림 27] 도철 문양 참조) 크고 날카로운 눈, 튀어나온 송곳니, 뿔 달린 이 형상은 보는 이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 도철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전쟁과 제사의 기운을 상징했고,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중국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치우(蚩尤)라는 전쟁의 신은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운 전사였다. 그의 투구에는 소머리와 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장식되어 있었고, 이 형상이 훗날 도철 문양으로 정착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친근하게 부르는 도깨비는, 그 뿌리를 따라가면 전장의 피비린내와 무기, 청동기의 도철에 닿아 있는 셈이다. 두려움의 상징이 시간이 지나 민속 속 귀물로 변신한 것이다. □ 전장의 깃발, ‘독기’ 치우와 동이족은 전쟁터에서 늘 독기(纛旗)라는 깃발을 세웠다. 독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깃대 끝에 괴이한 형상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 깃발을 늘어뜨렸다. 사람의 얼굴, 짐승의 머리, 괴물의 형상이 독기의 꼭대기를 장식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과 전운을 점치고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 장치였다.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였고, 그 위의 괴물 얼굴은 전사의 군기를 고취시키며 적군에게 공포를 심었다. 이 전통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으로 이어졌다. 몽골군 역시 독기와 유사한 군기를 사용했고,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전통이 한반도에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시기의 궁중 행렬을 담은 「화성능행도」를 보면, 화려한 깃발 행렬 속에 독기가 등장한다. 다만 이 시기의 독기는 전투 장비라기보다 왕권과 의례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변해 있었다. 전장의 공포에서 왕실의 권위로, 상징의 의미가 변모한 것이다. □ ‘도깨비’라는 이름의 비밀 그렇다면 ‘도깨비’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바로 ‘도철(饕餮)’과 ‘귀(鬼)’가 합쳐졌다는 것이다. 도철의 ‘도-’와 귀신의 ‘귀’가 합쳐져 ‘도귀비→도깨비’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즉, 고대 전쟁신의 상징이 민간 신앙 속 귀물 이미지와 섞여 탄생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음운 변화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이 이름의 변천은 도깨비 이미지의 변화를 보여준다. 전투와 무용의 상징에서, 민속 속 장난꾸러기로 변신한 과정 말이다. 도깨비가 씨름을 좋아하고, 쇠붙이를 잘 다루며, 때로는 흥정을 벌이는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사의 기운이 민속 속에서 장난기와 융합한 것이다. □ 치우, 전사에서 민속까지 다시 치우로 돌아가 보자. 중국의 역사서에 치우는 종종 ‘반역자’나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방과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동이족의 대표적 영웅이었다. 소머리, 뿔, 날카로운 이빨을 장식한 그의 모습은 전쟁의 신, 혹은 강력한 부족의 수장을 상징했다. 이 형상이 도철 문양으로, 독기 장식으로, 그리고 민속 속 도깨비의 이미지로 변해 내려온 것이다. 결국 도깨비는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동이족 전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패자의 기록이자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기억인 셈이다. □ 전사의 기억, 민족의 추억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장난꾸러기나 민속 신앙의 대상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잊힌 전사의 기억이 숨어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 전쟁터의 독기, 그리고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기억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민화 속 도깨비로, 민담 속 장난꾸러기로, 아이들의 놀이 친구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친근함으로, 공포의 전사는 민속의 장난꾸러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알면 도깨비는 단순히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이족의 기억을 잇는 상징이고, 민족의 추억을 담은 문화적 자산이다. □ 맺으며 도깨비, 도철, 독기. 세 단어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모두 동이족의 흔적을 품고 있다. 도깨비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민속학이 아니다. 그것은 패자의 기록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만날 때, 씨름판에서 씨름을 벌이는 장난꾸러기를 떠올리든, 민화 속에서 금빛 방망이를 휘두르는 귀물을 떠올리든, 그 뒤에 겹겹이 쌓인 전사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도깨비는 그저 웃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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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 한 사람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매일같이 바람을 느낀다. 여름날 더위를 식혀 주는 산들바람, 가을 들판을 흔드는 갈바람, 태풍처럼 무섭게 몰아치는 강풍. 하지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들은 ‘바람’을 글자로 표현하는 데 큰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풍(風)’ 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놀라운 사실과 만난다. 갑골문 속 초기의 ‘풍’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벌레(虫)’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새’, 특히 봉황 같은 거대한 조류의 형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바람을 새로 그렸다는 발상, 여기에 고대인의 자연 인식과 신화적 상상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왜 바람을 ‘새’로 그렸을까? 갑골문 초기의 ‘풍’ 자를 보면, 머리와 날개를 단 새의 모습이 분명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깃털이 흩날리고, 깃발이 펄럭이고,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은 눈앞에 보인다. 고대인에게는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날개 치는 새였다.(그림 26 ‘風’ 참조) 특히 봉황은 단순한 새가 아니었다. 머리 위에 삼각형·역삼각형 같은 권위의 표식을 얹고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표지가 아니라 제사와 권력, 신성의 영역과 연결된 기호였다. 바람은 농업과 직결되는 힘이었고, 봉황의 형상은 그 힘을 길들이고 제어하려는 사회적·종교적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음운학적 흔적도 남아 있다. 최춘태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갑골문 시기 바람의 발음은 [팔람] 계열로 추정되며, 이것이 오늘날의 ‘풍(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헌에는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나라 장군의 이름이기도 한 ‘비렴’은 날개 달린 전설적 존재로, 곧 바람을 의인화한 신이었다. 즉,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사회와 전쟁, 제사의 질서를 좌우하는 거대한 존재였고, 그 형상은 새, 특히 봉황으로 그려졌다. □ 그런데 왜 ‘벌레(虫)’가 끼어들었을까? 문제는 후대다. 상 후기 이후부터 ‘풍’ 자 오른쪽에 이상한 부호가 붙는다.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虫’ 혹은 ‘凡(범)’과 비슷한 글자가 따라붙어 지금 우리가 아는 ‘風’의 형태가 된다.([그림 26] ‘風’ 참조) 민간에서는 이를 억지로 설명하려 했다.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문자학적 분석은 이것이 가차(假借)와 형태 전이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음을 빌려 쓰는 과정에서 발음 표식이 덧붙고, 후대 필사 과정에서 벌레 모양으로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벌레는 본래 바람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다만 문자 사용과 전승의 과정에서 우연히 끼어들었을 뿐이다. □ 봉황과 대붕, 그리고 오로라의 기억 봉황을 왜 바람의 상징으로 택했는가에 대해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바로 오로라와 같은 북방의 자연현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거대한 빛의 장막이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을 고대인은 거대한 새, 날개짓하는 대붕(大鵬)의 형상으로 기억했을 수 있다. 이 상상은 후대로 이어져 다양하게 변주된다. 유가에서는 봉황을 인의예신의 덕목을 상징하는 도덕적 존재로 만들었고, 장자 같은 도가 사상에서는 대붕을 자유와 초월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홍산문화 등 북방 문화권의 상상력이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용과 봉황이라는 거대 상징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 왜 복잡한 봉황 그림을 고집했을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고대 문자라면 간단한 기호를 쓰는 것이 효율적일 텐데, 왜 굳이 새의 머리와 날개를 그려 넣는 복잡한 도형을 고집했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봉황은 단순한 자연 표지가 아니라 의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사와 정치의 질서를 나타내는 글자이니 함부로 간소화할 수 없었다. 둘째, 시각적 기억 때문이다. 오로라 같은 거대한 현상을 집단이 기억하는 방식은 상징과 그림이었다. 그 기억은 문자 속에서도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문자적 보수성이다. 초기의 형식이 한 번 정착되면, 실용성보다 전통과 관습이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 용봉 문화의 한 뿌리 ‘풍(風)’ 자의 변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의 기원을 본다.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새로 형상화했고, 그 새는 봉황으로 신성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바람은 자연을 넘어 권위와 제사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후대에 벌레 부호가 끼어들고 형태가 바뀌었지만, 봉황과 대붕 신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동아시아의 상징 세계를 지배했다. 용과 봉, 이 두 상상의 동물이 결합해 ‘용봉 문화’를 형성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고대의 집단적 상상과 기후·신화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의 질문 우리가 매일 보는 ‘풍(風)’ 자는 단순한 언어 기호가 아니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는 고대인의 고뇌, 거대한 자연현상을 기억하려는 집단적 상상력, 그리고 의례와 권위를 중시한 사회 질서가 겹겹이 녹아 있다. 다시 말해, ‘풍’ 자 하나를 통해 우리는 자연–신화–권력–문자의 복합적 교차를 읽어낼 수 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을 붙잡으려 한 사람들의 상상은 오늘날까지도 글자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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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아내(妻)는 정말 약탈당한 여자의 흔적일까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김씨, 이씨, 박씨 같은 성(姓)만큼이나, 우리의 일상 언어에 늘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아내’와 ‘처(妻)’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妻’ 자의 기원을 두고 오랫동안 널리 퍼진 이야기가 있다. 고대 사회에 흔했던 약탈혼(창혼, 娶婚)의 흔적이라는 해석이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女)’ 옆에 ‘손(又)’ 모양이 붙어 있으니,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채 끌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그림 25] ‘姓’ 참조) 언뜻 그럴듯하다. 고대에는 전쟁과 약탈이 일상이었고, 다른 부족 여성을 빼앗아 오는 일이 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강준식 선생은 이 통설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동이(東夷) 전통의 눈으로 보면,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오히려 예(禮)에 따른 혼례와 성인 의식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 무릎 꿇은 사람들, 글자의 출발 먼저 문화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상(商)·주(周)·한(漢) 시대까지 사람들은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좌식 생활을 했다. 갑골문이나 금문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무릎을 접은 형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나라 이후 북방에서 의자 문화가 들어오면서 좌식이 점차 줄었지만, 일본의 세이자(正座) 같은 풍습은 여전히 고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고대 문자의 자형 속 ‘사람’은 오늘날의 의자에 앉은 모습이 아니라 무릎 꿇은 자태다. 이 점을 놓치면 문자의 의미를 오독하기 쉽다. □ 머리채를 낚은 손? 아니면 머리를 올려주는 손? 이제 문제의 ‘妻’ 자를 보자. 갑골문과 금문에서 ‘妻’는 ‘여자(女)’와 ‘손(又)’이 결합된 모양이다. 통설은 이 손이 여자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채는 장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손이 여인의 머리를 ‘끌어내리는’ 손이 아니라 ‘올려주는’ 손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이 있다. 고대의 혼례와 성인 의식에는 계례(髻禮)가 있었다. 성년이 된 여성이 머리를 올려 쪽을 틀고, 비녀를 꽂아 성숙한 여인으로서 사회에 나아감을 알리는 의식이다. 남자도 관례(冠禮)를 통해 상투를 틀고 동곳이나 비녀로 고정했다. 금문을 자세히 보면 손이 여자의 머리 쪽으로 들어가 정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소전(小篆)에 이르면 헝클어진 머리가 가지런히 다듬어지고, 해서체에서는 머리 위의 짧은 가로획이 나타나는데, 강 선생은 이를 비녀를 뜻하는 기호로 해석한다.([그림 25] ‘妻’ 참조) 즉, ‘妻’는 여인을 머리채 잡아 끌고 가는 모습이 아니라, 혼례 예식을 치르며 동반자로 맞이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 ‘부(婦)’와 ‘노(奴)’와의 구별 혼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妻’와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婦)’ 자는 ‘빗자루(帚)’와 ‘여자(女)’의 결합이다. 살림을 맡는 여인을 뜻하는 글자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妻’에도 빗자루가 들어 있다고 착각해 ‘빗자루 든 여자’로 설명하기도 했다.([그림 25] ‘婦’ 참조) 또 ‘노(奴)’ 자는 일부 갑골 자형에서 여자의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포로와 노예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妻’ 역시 노예처럼 약탈된 여인을 가리킨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갑골문을 보면 ‘妻’에는 ‘노’와 같은 강제성 기호가 애초에 없었다고 지적한다.([그림 25] ‘奴’ 참조) □ 약탈혼 통설의 문제점 중국의 고문자학자들 가운데는 상고시대 약탈혼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런 풍습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갑골문·금문·소전·해서에 이르는 자형의 연속성을 보면, ‘妻’를 약탈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에 따른 혼례 준비’라는 맥락에서 일관성이 드러난다. □ 동이의 예(禮), 동반자의 탄생 동이 문화권에서는 혼인이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니라 성인으로 인정받는 통과의례였다. 계례에서 여인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그 순간 그는 아이가 아닌 어른, 사회적 동반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妻’는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는 표지가 아니라, 함께 가정을 이루는 동반자를 맞이하는 의식의 문자였다. □ 부호(婦好)의 묘, 존중받은 여인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도 있다. 1976년 은허에서 발굴된 부호(婦好)의 무덤이다. 그녀는 무정왕의 아내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장수이자 제사 주관자였다. 무덤에서는 수백 점의 청동기와 옥기, ‘婦好’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나왔다. 갑골문 점사에는 무정왕이 부호의 병세를 염려하거나 군사를 맡기는 장면이 남아 있다. 이 사례는 당시 여성도 정치와 군사, 종교의 주체로 존중받았음을 보여준다. 오랑캐적 약탈과 억압의 상징이라던 해석과는 사뭇 다르다. □ 처와 첩의 차이, 핵심은 예(禮) 고대 문헌에 ‘빙위처(聘爲妻)’와 ‘분위첩(奔爲妾)’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通說은 ‘빙(聘)’을 안부 묻는다, ‘분(奔)’을 달아난다로 풀지만, 강 선생은 다르게 본다. ‘빙’은 예를 갖추어 맞이함, 곧 정례 결혼이고, ‘분’은 예 없이 결합한 비정례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妻)’와 ‘첩(妾)’의 구분 기준은 경제력이나 신분 차이가 아니라 예의 유무였다. 첩(妾) 자의 갑골 자형에는 무릎 꿇은 여자와 머리에 형틀 같은 표지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죄수나 포로 여성과 연관되었음을 시사한다.([그림 25] 참조) 즉 첩은 예가 생략된 강제적 결합의 산물이었다. □ 맺으며 결국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계례와 혼례를 통한 동반자의 탄생을 상징하는 문자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부(婦)’는 살림의 역할, ‘노(奴)’는 강제와 포로, ‘첩(妾)’은 예 없는 결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동이적 전통은 예를 중시했고, 부호의 사례처럼 남녀가 동반자로 존중받는 문화도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동이는 약탈혼의 민족’이라는 도식은 지나친 단순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아내’라는 말 속에도 사실은 고대인의 예절과 존중, 동반자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문자의 기원을 바로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도 하나씩 벗겨낼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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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성(姓)과 씨(氏), 우리 이름 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김씨, 이씨, 박씨...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앞에 붙는 그것.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묘하다. 왜 굳이 성과 이름을 나누어야 했을까? 더구나 옛 문헌을 보면 성(姓)과 씨(氏)는 본래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한다. 지금은 하나로 뭉뚱그려졌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신비로운 세계와 맞닿아 있다. 성과 씨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족보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사회의 생식 숭배, 조상 숭배, 정치 권력의 재편, 그리고 문자와 기록의 편집 과정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 성은 왜 ‘여자(女)’에서 시작했을까 ‘성(姓)’이라는 글자를 보자. 전통적 해석은 단순하다. ‘여자가 낳는다.’ 그러나 갑골문과 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단순한 ‘출산’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원형에는 여성의 형상, 풀과 씨앗, 불꽃 같은 생명의 상징이 섞여 있었다. 성은 곧 생명의 원천, 생식력을 이어가는 힘을 가리켰다는 것이다.([그림 24] ‘姓’ 참조) 하지만 세상이 변한다. 부계 중심 사회가 등장하면서, 문자의 모양조차 달라졌다. 원래 여자 그림이 들어있던 글자가 어느 순간 인(人) 자로 바뀌거나, 여성적 요소가 사라지고 추상적 부계 표지가 들어섰다. 문자학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글자의 뼈대를 다시 짠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의 모습은 그 변형의 결과물이다. □ 씨(氏), 씨앗일까, 말뚝일까 ‘씨(氏)’의 기원은 더욱 난해하다. 학계에는 다섯 가지 설이 있다. 오이를 닮았다느니, 동굴의 형상이라느니, 흐르는 물을 뜻한다느니, 절벽을 본뜬 글자라느니… 심지어 남성 성기를 상징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중 ‘씨앗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본다. 곡식을 뿌리는 사람의 동작,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씨앗의 힘이 글자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묘지(소화 묘지)에서는 남녀 무덤마다 다른 말뚝과 목주가 세워져 있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성기 상징과 생식 숭배의 흔적으로 본다. 씨(氏)라는 제도 역시 이런 신앙과 깊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림 24] ‘氏’ 참조)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씨는 씨앗이자 말뚝, 곧 생식과 토지, 신분을 함께 뜻했을 수 있다. 문자와 유물, 민속 상징이 한데 얽혀 만들어진 다층적 개념이었다. □ 조상 숭배는 곧 생식 숭배였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예의로 이해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조상 숭배는 곧 생식력 숭배였다. 선조가 자손을 낳아 이어주었듯, 제사와 제의는 ‘생명이 다시 이어지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타클라마칸 미라 옆에 세워진 남녀 상징 말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성과 씨라는 제도가 단순히 ‘가문 구분’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제도화한 장치였음을 시사한다. □ 정치와 권력이 성씨를 바꿔 놓다 그러나 생명의 상징은 곧 권력의 도구가 된다. 주나라 이후 정치 권력은 모계 중심 전통을 약화시키고, ‘덕(德)’과 ‘천명(天命)’ 같은 추상적 개념을 내세워 지배의 정당성을 재편했다. 사마천 같은 역사 편찬자들은 성과 씨의 구분을 흐리게 적었고, 후대 독자들은 그 차이를 잊어버렸다. 진(秦)의 중앙집권은 성씨 제도를 또 한 번 바꿔 놓았다. 호적과 행정 체계가 정비되면서 씨(氏), 곧 봉토와 신분을 구분하던 표식은 의미를 잃고, 성과 통합되어 버렸다. 이제 성씨는 혈통과 행정이 결합한 제도가 되었다. □ 한국에서 성씨는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한국의 성씨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씨가 사회 전반에 정착한 시기는 4~6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귀족층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이름만 있었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왕권이 호적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씨가 확대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동이계 후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씨의 뿌리는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단정하기는 어렵다. □ 이름은 곧 역사다 성과 씨는 단순한 가계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생식과 조상 숭배의 상징이었고, 사회 구조와 권력 재편의 흔적이었으며, 문자와 행정 제도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결과물이다. 우리가 성씨를 부를 때마다, 사실은 수천 년 전의 신앙과 생활, 권력의 흔적을 동시에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 남은 과제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 선생은 문자 연구와 고고학 발굴, 민속 연구를 종합해 성씨의 원형을 더 치밀하게 밝히는 과제를 제안한다. 타클라마칸 묘지의 말뚝, 갑골문 속의 여성 형상, 고려·조선의 성씨 확산 과정은 그 단서가 될 수 있다. 성씨 제도를 둘러싼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과거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삼 자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오늘도 부르는 성씨. 그것은 단지 행정상의 호칭이나 족보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생명을 숭배하고 조상을 기렸던 인간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증거다. 우리의 이름 앞에 붙은 글자 하나에, 그렇게 깊고 먼 역사가 겹겹이 스며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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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제(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베랑제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7년간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했다. 그는 프라도사제회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 있었다. 1996년 생드니 교구 주교로 서품된 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통해 두 나라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프라도 사제로서 서약했던 초심의 자리를 향했다. 은퇴 후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겼다. 그는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프라도회가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동네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살기를 자청했다. 말년에는 고향 양로원에서 '주교님'이 아닌 친근한 형제로서 노인들과 똑같은 처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이 박제된 훈장이 아닌,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가치의 실천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전남 강진교육지원청의 최 모 전 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인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안락한 원로의 자리를 사양했다. 대신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타국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베랑제 주교처럼,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격과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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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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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라는 말은 교과서에서 너무도 익숙하지만, 사실 그 통일은 제한적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포함되지 않았고, 한반도의 북쪽은 여전히 미완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언제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표가 남아 있다. 실제로 몇 해 전 학자 100인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을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이 꼽힌 답은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패배의 순간임에도,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한국사의 자존심과 대륙적 상상력을 찾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이름, ‘고구려’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 국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 건국 연대, 단순한 연표가 아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적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다르다. 『신당서』는 고구려가 “한(漢) 대부터 있었고, 지금 900년에 이른다”라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등장하지만, 신라는 훨씬 늦게 독립된 항목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연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썼는지, 그것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 ‘구려’라는 이름의 뿌리 『삼국지』 동이전에는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邑)이다”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구루’는 ‘굴(동굴)’, ‘골짜기’, ‘고을’로 이어지는 어원망을 품고 있다. 즉, 집단이 모여 사는 거처, 곧 성(邑)을 뜻했다. 따라서 ‘구려’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원래는 ‘성’이나 ‘고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가 국호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높은 성, 위대한 고을’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 졸본이 아니라 홀본, 해의 근본 고구려 건국지로 잘 알려진 곳은 ‘졸본(卒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413년)에 기록된 표기는 ‘홀본(忽本)’이다. 시기상 더 원 사료에 가까운 비문을 따른다면, ‘홀본’이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홀’은 문자학적으로 ‘해(태양)’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홀본’은 곧 ‘해의 근본’, ‘해 뜨는 곳’을 의미한다. 조선의 ‘아사달’, 단군신화의 태양적 국호 전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건국지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연결된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高)’ 자의 기원 그렇다면 ‘고(高)’는 무엇일까. 흔히는 다층 성곽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들여다보면, ‘고’는 원래 솟아오름,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에서 출발한 글자였다. ‘높다’라는 추상적 의미는 그 뒤에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높은 성’일 뿐 아니라, 태양의 상징과 맞닿아 있었다. 시조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 전통이 이 ‘높음’과 ‘태양’을 겹겹이 담아낸 셈이다.([그림 28] ‘高’ 참조) □ 이미 쓰였던 이름, ‘고려’ 많은 사람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왕건이 새로 만든 줄로 안다. 그러나 사실 고구려 시기부터 ‘고려’는 이미 사용되었다. 충주 고구려비(397년)에는 ‘고려 태왕’이 등장하고, 539년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에는 ‘고려국’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게다가 당·원·명대의 음운서, 그리고 『용비어천가』 표기를 보면 ‘려’는 ‘리’로도 발음되었다. 고려가 곧 ‘고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단순한 약칭이 아니라, ‘골/홀(해)’ 계열 어원과 연결된 또 하나의 정통 국호였다고 볼 수 있다. □ 북경까지 뻗은 고구려의 무대 덕흥리 고분 벽화(408년)에는 ‘유주자사’와 13군 태수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화북 내륙과 접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 문헌에는 평양성·국내성·한성의 3수도 체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송·명대 지리지에는 평양성을 ‘평주=북경권’으로 비정한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가 단순히 압록강 주변이 아니라, 북경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가 수·당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계승된 국호, 고려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려’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 보덕국, 후삼국의 태봉, 그리고 왕건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왕건의 고려는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고구려 시기부터 이어진 정통 국호의 계승이었다. 조선 건국 때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채택된 ‘조선’과는 달리, 고려라는 이름은 대륙적 상상력과 민족적 자존을 담은 이름이었다. □ 다시 불러야 할 이름 1948년 제헌 국회에서도 국호는 논쟁거리였다. ‘대한민국’과 ‘고려공화국’이 경쟁했고, 결국 표결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쓰려 했던 흔적은 분명 남아 있다. 오늘날 통일 한국의 국호를 논의한다면, ‘고려’는 가장 국제성과 역사성을 겸비한 후보일 것이다. 북한 역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제안한 바 있다. ‘고려’라는 이름에는 남과 북이 함께 이어받을 수 있는 전통이 담겨 있다. □ 결론: 태양과 높음의 나라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높음’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단군의 아사달에서,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에서, 홀본이라는 건국지에서,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의 지속에서 확인된다. 고구려는 패망했지만, 그 이름은 꺼지지 않았다. 민족의 자존심, 대륙적 상상력, 그리고 태양과 높음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언젠가 통일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이 이름을 불러야 할지 모른다. 고려(高麗). 그 이름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전사의 기억과 미래의 자존을 함께 만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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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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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 우리가 아는 도깨비는 어떤 모습일까? 뿔이 달린 장난꾸러기, 씨름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사람과 흥정을 벌이는 친근한 존재로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도깨비의 뿌리는 훨씬 더 묵직하다.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고대의 전쟁신과 맞닿아 있는 상징이자, 동이족의 기억을 품은 형상이다. □ 잊힌 이름, 도깨비의 기원 도깨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갑골문과 청동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대 중국의 제기와 무기 위에는 무시무시한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도철(饕餮)이다.([그림 27] 도철 문양 참조) 크고 날카로운 눈, 튀어나온 송곳니, 뿔 달린 이 형상은 보는 이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 도철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전쟁과 제사의 기운을 상징했고,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중국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치우(蚩尤)라는 전쟁의 신은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운 전사였다. 그의 투구에는 소머리와 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장식되어 있었고, 이 형상이 훗날 도철 문양으로 정착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친근하게 부르는 도깨비는, 그 뿌리를 따라가면 전장의 피비린내와 무기, 청동기의 도철에 닿아 있는 셈이다. 두려움의 상징이 시간이 지나 민속 속 귀물로 변신한 것이다. □ 전장의 깃발, ‘독기’ 치우와 동이족은 전쟁터에서 늘 독기(纛旗)라는 깃발을 세웠다. 독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깃대 끝에 괴이한 형상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 깃발을 늘어뜨렸다. 사람의 얼굴, 짐승의 머리, 괴물의 형상이 독기의 꼭대기를 장식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과 전운을 점치고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 장치였다.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였고, 그 위의 괴물 얼굴은 전사의 군기를 고취시키며 적군에게 공포를 심었다. 이 전통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으로 이어졌다. 몽골군 역시 독기와 유사한 군기를 사용했고,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전통이 한반도에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시기의 궁중 행렬을 담은 「화성능행도」를 보면, 화려한 깃발 행렬 속에 독기가 등장한다. 다만 이 시기의 독기는 전투 장비라기보다 왕권과 의례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변해 있었다. 전장의 공포에서 왕실의 권위로, 상징의 의미가 변모한 것이다. □ ‘도깨비’라는 이름의 비밀 그렇다면 ‘도깨비’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바로 ‘도철(饕餮)’과 ‘귀(鬼)’가 합쳐졌다는 것이다. 도철의 ‘도-’와 귀신의 ‘귀’가 합쳐져 ‘도귀비→도깨비’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즉, 고대 전쟁신의 상징이 민간 신앙 속 귀물 이미지와 섞여 탄생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음운 변화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이 이름의 변천은 도깨비 이미지의 변화를 보여준다. 전투와 무용의 상징에서, 민속 속 장난꾸러기로 변신한 과정 말이다. 도깨비가 씨름을 좋아하고, 쇠붙이를 잘 다루며, 때로는 흥정을 벌이는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사의 기운이 민속 속에서 장난기와 융합한 것이다. □ 치우, 전사에서 민속까지 다시 치우로 돌아가 보자. 중국의 역사서에 치우는 종종 ‘반역자’나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방과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동이족의 대표적 영웅이었다. 소머리, 뿔, 날카로운 이빨을 장식한 그의 모습은 전쟁의 신, 혹은 강력한 부족의 수장을 상징했다. 이 형상이 도철 문양으로, 독기 장식으로, 그리고 민속 속 도깨비의 이미지로 변해 내려온 것이다. 결국 도깨비는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동이족 전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패자의 기록이자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기억인 셈이다. □ 전사의 기억, 민족의 추억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장난꾸러기나 민속 신앙의 대상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잊힌 전사의 기억이 숨어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 전쟁터의 독기, 그리고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기억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민화 속 도깨비로, 민담 속 장난꾸러기로, 아이들의 놀이 친구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친근함으로, 공포의 전사는 민속의 장난꾸러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알면 도깨비는 단순히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이족의 기억을 잇는 상징이고, 민족의 추억을 담은 문화적 자산이다. □ 맺으며 도깨비, 도철, 독기. 세 단어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모두 동이족의 흔적을 품고 있다. 도깨비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민속학이 아니다. 그것은 패자의 기록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만날 때, 씨름판에서 씨름을 벌이는 장난꾸러기를 떠올리든, 민화 속에서 금빛 방망이를 휘두르는 귀물을 떠올리든, 그 뒤에 겹겹이 쌓인 전사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도깨비는 그저 웃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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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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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 한 사람들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매일같이 바람을 느낀다. 여름날 더위를 식혀 주는 산들바람, 가을 들판을 흔드는 갈바람, 태풍처럼 무섭게 몰아치는 강풍. 하지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들은 ‘바람’을 글자로 표현하는 데 큰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풍(風)’ 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놀라운 사실과 만난다. 갑골문 속 초기의 ‘풍’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벌레(虫)’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새’, 특히 봉황 같은 거대한 조류의 형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바람을 새로 그렸다는 발상, 여기에 고대인의 자연 인식과 신화적 상상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왜 바람을 ‘새’로 그렸을까? 갑골문 초기의 ‘풍’ 자를 보면, 머리와 날개를 단 새의 모습이 분명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깃털이 흩날리고, 깃발이 펄럭이고,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은 눈앞에 보인다. 고대인에게는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날개 치는 새였다.(그림 26 ‘風’ 참조) 특히 봉황은 단순한 새가 아니었다. 머리 위에 삼각형·역삼각형 같은 권위의 표식을 얹고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표지가 아니라 제사와 권력, 신성의 영역과 연결된 기호였다. 바람은 농업과 직결되는 힘이었고, 봉황의 형상은 그 힘을 길들이고 제어하려는 사회적·종교적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음운학적 흔적도 남아 있다. 최춘태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갑골문 시기 바람의 발음은 [팔람] 계열로 추정되며, 이것이 오늘날의 ‘풍(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헌에는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나라 장군의 이름이기도 한 ‘비렴’은 날개 달린 전설적 존재로, 곧 바람을 의인화한 신이었다. 즉,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사회와 전쟁, 제사의 질서를 좌우하는 거대한 존재였고, 그 형상은 새, 특히 봉황으로 그려졌다. □ 그런데 왜 ‘벌레(虫)’가 끼어들었을까? 문제는 후대다. 상 후기 이후부터 ‘풍’ 자 오른쪽에 이상한 부호가 붙는다.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虫’ 혹은 ‘凡(범)’과 비슷한 글자가 따라붙어 지금 우리가 아는 ‘風’의 형태가 된다.([그림 26] ‘風’ 참조) 민간에서는 이를 억지로 설명하려 했다.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문자학적 분석은 이것이 가차(假借)와 형태 전이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음을 빌려 쓰는 과정에서 발음 표식이 덧붙고, 후대 필사 과정에서 벌레 모양으로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벌레는 본래 바람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다만 문자 사용과 전승의 과정에서 우연히 끼어들었을 뿐이다. □ 봉황과 대붕, 그리고 오로라의 기억 봉황을 왜 바람의 상징으로 택했는가에 대해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바로 오로라와 같은 북방의 자연현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거대한 빛의 장막이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을 고대인은 거대한 새, 날개짓하는 대붕(大鵬)의 형상으로 기억했을 수 있다. 이 상상은 후대로 이어져 다양하게 변주된다. 유가에서는 봉황을 인의예신의 덕목을 상징하는 도덕적 존재로 만들었고, 장자 같은 도가 사상에서는 대붕을 자유와 초월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홍산문화 등 북방 문화권의 상상력이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용과 봉황이라는 거대 상징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 왜 복잡한 봉황 그림을 고집했을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고대 문자라면 간단한 기호를 쓰는 것이 효율적일 텐데, 왜 굳이 새의 머리와 날개를 그려 넣는 복잡한 도형을 고집했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봉황은 단순한 자연 표지가 아니라 의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사와 정치의 질서를 나타내는 글자이니 함부로 간소화할 수 없었다. 둘째, 시각적 기억 때문이다. 오로라 같은 거대한 현상을 집단이 기억하는 방식은 상징과 그림이었다. 그 기억은 문자 속에서도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문자적 보수성이다. 초기의 형식이 한 번 정착되면, 실용성보다 전통과 관습이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 용봉 문화의 한 뿌리 ‘풍(風)’ 자의 변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의 기원을 본다.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새로 형상화했고, 그 새는 봉황으로 신성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바람은 자연을 넘어 권위와 제사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후대에 벌레 부호가 끼어들고 형태가 바뀌었지만, 봉황과 대붕 신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동아시아의 상징 세계를 지배했다. 용과 봉, 이 두 상상의 동물이 결합해 ‘용봉 문화’를 형성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고대의 집단적 상상과 기후·신화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의 질문 우리가 매일 보는 ‘풍(風)’ 자는 단순한 언어 기호가 아니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는 고대인의 고뇌, 거대한 자연현상을 기억하려는 집단적 상상력, 그리고 의례와 권위를 중시한 사회 질서가 겹겹이 녹아 있다. 다시 말해, ‘풍’ 자 하나를 통해 우리는 자연–신화–권력–문자의 복합적 교차를 읽어낼 수 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을 붙잡으려 한 사람들의 상상은 오늘날까지도 글자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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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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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아내(妻)는 정말 약탈당한 여자의 흔적일까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김씨, 이씨, 박씨 같은 성(姓)만큼이나, 우리의 일상 언어에 늘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아내’와 ‘처(妻)’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妻’ 자의 기원을 두고 오랫동안 널리 퍼진 이야기가 있다. 고대 사회에 흔했던 약탈혼(창혼, 娶婚)의 흔적이라는 해석이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女)’ 옆에 ‘손(又)’ 모양이 붙어 있으니,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채 끌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그림 25] ‘姓’ 참조) 언뜻 그럴듯하다. 고대에는 전쟁과 약탈이 일상이었고, 다른 부족 여성을 빼앗아 오는 일이 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강준식 선생은 이 통설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동이(東夷) 전통의 눈으로 보면,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오히려 예(禮)에 따른 혼례와 성인 의식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 무릎 꿇은 사람들, 글자의 출발 먼저 문화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상(商)·주(周)·한(漢) 시대까지 사람들은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좌식 생활을 했다. 갑골문이나 금문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무릎을 접은 형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나라 이후 북방에서 의자 문화가 들어오면서 좌식이 점차 줄었지만, 일본의 세이자(正座) 같은 풍습은 여전히 고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고대 문자의 자형 속 ‘사람’은 오늘날의 의자에 앉은 모습이 아니라 무릎 꿇은 자태다. 이 점을 놓치면 문자의 의미를 오독하기 쉽다. □ 머리채를 낚은 손? 아니면 머리를 올려주는 손? 이제 문제의 ‘妻’ 자를 보자. 갑골문과 금문에서 ‘妻’는 ‘여자(女)’와 ‘손(又)’이 결합된 모양이다. 통설은 이 손이 여자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채는 장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손이 여인의 머리를 ‘끌어내리는’ 손이 아니라 ‘올려주는’ 손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이 있다. 고대의 혼례와 성인 의식에는 계례(髻禮)가 있었다. 성년이 된 여성이 머리를 올려 쪽을 틀고, 비녀를 꽂아 성숙한 여인으로서 사회에 나아감을 알리는 의식이다. 남자도 관례(冠禮)를 통해 상투를 틀고 동곳이나 비녀로 고정했다. 금문을 자세히 보면 손이 여자의 머리 쪽으로 들어가 정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소전(小篆)에 이르면 헝클어진 머리가 가지런히 다듬어지고, 해서체에서는 머리 위의 짧은 가로획이 나타나는데, 강 선생은 이를 비녀를 뜻하는 기호로 해석한다.([그림 25] ‘妻’ 참조) 즉, ‘妻’는 여인을 머리채 잡아 끌고 가는 모습이 아니라, 혼례 예식을 치르며 동반자로 맞이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 ‘부(婦)’와 ‘노(奴)’와의 구별 혼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妻’와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婦)’ 자는 ‘빗자루(帚)’와 ‘여자(女)’의 결합이다. 살림을 맡는 여인을 뜻하는 글자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妻’에도 빗자루가 들어 있다고 착각해 ‘빗자루 든 여자’로 설명하기도 했다.([그림 25] ‘婦’ 참조) 또 ‘노(奴)’ 자는 일부 갑골 자형에서 여자의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포로와 노예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妻’ 역시 노예처럼 약탈된 여인을 가리킨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갑골문을 보면 ‘妻’에는 ‘노’와 같은 강제성 기호가 애초에 없었다고 지적한다.([그림 25] ‘奴’ 참조) □ 약탈혼 통설의 문제점 중국의 고문자학자들 가운데는 상고시대 약탈혼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런 풍습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갑골문·금문·소전·해서에 이르는 자형의 연속성을 보면, ‘妻’를 약탈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에 따른 혼례 준비’라는 맥락에서 일관성이 드러난다. □ 동이의 예(禮), 동반자의 탄생 동이 문화권에서는 혼인이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니라 성인으로 인정받는 통과의례였다. 계례에서 여인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그 순간 그는 아이가 아닌 어른, 사회적 동반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妻’는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는 표지가 아니라, 함께 가정을 이루는 동반자를 맞이하는 의식의 문자였다. □ 부호(婦好)의 묘, 존중받은 여인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도 있다. 1976년 은허에서 발굴된 부호(婦好)의 무덤이다. 그녀는 무정왕의 아내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장수이자 제사 주관자였다. 무덤에서는 수백 점의 청동기와 옥기, ‘婦好’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나왔다. 갑골문 점사에는 무정왕이 부호의 병세를 염려하거나 군사를 맡기는 장면이 남아 있다. 이 사례는 당시 여성도 정치와 군사, 종교의 주체로 존중받았음을 보여준다. 오랑캐적 약탈과 억압의 상징이라던 해석과는 사뭇 다르다. □ 처와 첩의 차이, 핵심은 예(禮) 고대 문헌에 ‘빙위처(聘爲妻)’와 ‘분위첩(奔爲妾)’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通說은 ‘빙(聘)’을 안부 묻는다, ‘분(奔)’을 달아난다로 풀지만, 강 선생은 다르게 본다. ‘빙’은 예를 갖추어 맞이함, 곧 정례 결혼이고, ‘분’은 예 없이 결합한 비정례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妻)’와 ‘첩(妾)’의 구분 기준은 경제력이나 신분 차이가 아니라 예의 유무였다. 첩(妾) 자의 갑골 자형에는 무릎 꿇은 여자와 머리에 형틀 같은 표지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죄수나 포로 여성과 연관되었음을 시사한다.([그림 25] 참조) 즉 첩은 예가 생략된 강제적 결합의 산물이었다. □ 맺으며 결국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계례와 혼례를 통한 동반자의 탄생을 상징하는 문자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부(婦)’는 살림의 역할, ‘노(奴)’는 강제와 포로, ‘첩(妾)’은 예 없는 결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동이적 전통은 예를 중시했고, 부호의 사례처럼 남녀가 동반자로 존중받는 문화도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동이는 약탈혼의 민족’이라는 도식은 지나친 단순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아내’라는 말 속에도 사실은 고대인의 예절과 존중, 동반자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문자의 기원을 바로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도 하나씩 벗겨낼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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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아내(妻)는 정말 약탈당한 여자의 흔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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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성(姓)과 씨(氏), 우리 이름 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김씨, 이씨, 박씨...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앞에 붙는 그것.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묘하다. 왜 굳이 성과 이름을 나누어야 했을까? 더구나 옛 문헌을 보면 성(姓)과 씨(氏)는 본래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한다. 지금은 하나로 뭉뚱그려졌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신비로운 세계와 맞닿아 있다. 성과 씨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족보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사회의 생식 숭배, 조상 숭배, 정치 권력의 재편, 그리고 문자와 기록의 편집 과정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 성은 왜 ‘여자(女)’에서 시작했을까 ‘성(姓)’이라는 글자를 보자. 전통적 해석은 단순하다. ‘여자가 낳는다.’ 그러나 갑골문과 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단순한 ‘출산’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원형에는 여성의 형상, 풀과 씨앗, 불꽃 같은 생명의 상징이 섞여 있었다. 성은 곧 생명의 원천, 생식력을 이어가는 힘을 가리켰다는 것이다.([그림 24] ‘姓’ 참조) 하지만 세상이 변한다. 부계 중심 사회가 등장하면서, 문자의 모양조차 달라졌다. 원래 여자 그림이 들어있던 글자가 어느 순간 인(人) 자로 바뀌거나, 여성적 요소가 사라지고 추상적 부계 표지가 들어섰다. 문자학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글자의 뼈대를 다시 짠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의 모습은 그 변형의 결과물이다. □ 씨(氏), 씨앗일까, 말뚝일까 ‘씨(氏)’의 기원은 더욱 난해하다. 학계에는 다섯 가지 설이 있다. 오이를 닮았다느니, 동굴의 형상이라느니, 흐르는 물을 뜻한다느니, 절벽을 본뜬 글자라느니… 심지어 남성 성기를 상징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중 ‘씨앗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본다. 곡식을 뿌리는 사람의 동작,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씨앗의 힘이 글자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묘지(소화 묘지)에서는 남녀 무덤마다 다른 말뚝과 목주가 세워져 있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성기 상징과 생식 숭배의 흔적으로 본다. 씨(氏)라는 제도 역시 이런 신앙과 깊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림 24] ‘氏’ 참조)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씨는 씨앗이자 말뚝, 곧 생식과 토지, 신분을 함께 뜻했을 수 있다. 문자와 유물, 민속 상징이 한데 얽혀 만들어진 다층적 개념이었다. □ 조상 숭배는 곧 생식 숭배였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예의로 이해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조상 숭배는 곧 생식력 숭배였다. 선조가 자손을 낳아 이어주었듯, 제사와 제의는 ‘생명이 다시 이어지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타클라마칸 미라 옆에 세워진 남녀 상징 말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성과 씨라는 제도가 단순히 ‘가문 구분’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제도화한 장치였음을 시사한다. □ 정치와 권력이 성씨를 바꿔 놓다 그러나 생명의 상징은 곧 권력의 도구가 된다. 주나라 이후 정치 권력은 모계 중심 전통을 약화시키고, ‘덕(德)’과 ‘천명(天命)’ 같은 추상적 개념을 내세워 지배의 정당성을 재편했다. 사마천 같은 역사 편찬자들은 성과 씨의 구분을 흐리게 적었고, 후대 독자들은 그 차이를 잊어버렸다. 진(秦)의 중앙집권은 성씨 제도를 또 한 번 바꿔 놓았다. 호적과 행정 체계가 정비되면서 씨(氏), 곧 봉토와 신분을 구분하던 표식은 의미를 잃고, 성과 통합되어 버렸다. 이제 성씨는 혈통과 행정이 결합한 제도가 되었다. □ 한국에서 성씨는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한국의 성씨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씨가 사회 전반에 정착한 시기는 4~6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귀족층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이름만 있었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왕권이 호적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씨가 확대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동이계 후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씨의 뿌리는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단정하기는 어렵다. □ 이름은 곧 역사다 성과 씨는 단순한 가계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생식과 조상 숭배의 상징이었고, 사회 구조와 권력 재편의 흔적이었으며, 문자와 행정 제도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결과물이다. 우리가 성씨를 부를 때마다, 사실은 수천 년 전의 신앙과 생활, 권력의 흔적을 동시에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 남은 과제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 선생은 문자 연구와 고고학 발굴, 민속 연구를 종합해 성씨의 원형을 더 치밀하게 밝히는 과제를 제안한다. 타클라마칸 묘지의 말뚝, 갑골문 속의 여성 형상, 고려·조선의 성씨 확산 과정은 그 단서가 될 수 있다. 성씨 제도를 둘러싼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과거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삼 자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오늘도 부르는 성씨. 그것은 단지 행정상의 호칭이나 족보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생명을 숭배하고 조상을 기렸던 인간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증거다. 우리의 이름 앞에 붙은 글자 하나에, 그렇게 깊고 먼 역사가 겹겹이 스며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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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성(姓)과 씨(氏), 우리 이름 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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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 설립을 제안하며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목전에 다가왔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 역시 근본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은 직업교육이다. 이제는 단순히 개인의 기술 습득을 넘어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직업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때다. 그 해법으로 중앙 정부 수준의 한국직업교육원(가칭)과 광역 단위의 직업교육 거점, 특히 행정과 교육의 대통합을 이뤄낸 지역 모델로서 전남광주직업교육원(가칭) 설립을 적극 제안한다. □ 정치적 이해타산을 넘어선 국가적 책무 반세기 전 故김대중 前대통령은 옥중에서도 지식산업 사회와 초지능 시대의 등장을 예견하며 인본주의적 기술관을 강조했다. 이러한 통찰은 이후 보수와 진보라는 정권의 색채와 상관없이 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명제 아래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이어져 왔다. 직업교육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존이 걸린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 사회의 허리를 지탱해야 할 특성화고와 전문대, 폴리텍대학은 여전히 견고한 학벌주의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기업은 현장에 바로 투입할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치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한숨짓는 인력 미스매치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교육이 산업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지금의 구조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 학벌의 늪을 건너 실무 중심의 고등교육 개편으로 뿌리 깊은 학벌 중심 사회는 유능한 청년들조차 현장 대신 대학 간판을 쫓게 만든다. 심지어 일부 특성화고 학생들마저 직업교육 그 자체보다 대입 가산점을 위한 통로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직업교육원의 설립은 이러한 왜곡된 흐름을 바로잡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기관 하나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로 이어지는 직업교육의 끊어진 고리를 잇고,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를 만드는 고등교육 구조개편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교육의 형식이 아닌 내용에 집중할 때 우리 청년들은 비로소 당당한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 칸막이를 허무는 통합적 컨트롤타워 현재 우리나라 직업교육은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로 이원화되어 있다. 부처 간의 행정적 칸막이는 현장의 목소리를 빠르게 반영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새로 설립될 직업교육원은 교육부가 주관하되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긴밀히 협력하는 범부처 통합 기구여야 한다. 학문적 기반과 현장의 실무 훈련이 한데 어우러지는 AI 시대의 기술 사령탑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독일 경제를 지탱하는 저력은 학교의 이론과 기업의 실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이원화 시스템(Dual System)에서 나온다. 독일에서 직업교육은 단순한 기술자 양성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인간의 품격을 완성하는 빌둥(Bildung), 즉 자기 형성의 과정이다. 우리도 산업과 교육이 유기체처럼 움직여 미스매치를 해결하는 독일식 구조의 강점에 주목해야 한다. □ 통합 전남광주교육청의 핵심 과제 지역 소멸의 위기 속에 전남과 광주는 행정과 교육의 대통합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이 통합의 시너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모델이 바로 전남광주직업교육원이다. 이곳은 초등과 중등 단계의 진로 탐색부터 고등 단계의 전문 교육까지 아우르는 지역 인재 양성의 거점이 될 것이다. 광주의 인공지능 및 데이터 산업과 전남의 에너지 및 모빌리티 등 지역 전략 산업을 직업교육과 직접 연결해야 한다. 지역 내 기업과 학교가 하나로 묶여 한국형 독일식 교육을 구현할 때 우리 아이들은 기술의 부속품이 아닌 세계적인 전문가로 자라날 수 있다. □ 사유하는 직업인 기술의 주인을 기르는 길 직업교육은 단순히 먹고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넘어선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본주의적 과정이다. 이제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육 행정가들은 교육의 본질을 바꾸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은 우리 아이들이 거친 인공지능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갈 든든한 구명정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사유하는 힘을 가진 자유인이자 숙련된 전문가를 길러내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가장 인간답게 살아낼 따뜻하고도 확실한 해법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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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 설립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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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갑골문 속에서 되살아난 우리 풍습의 그림자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느 민족이든 과거를 돌아보면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이 교차한다. 한민족의 오랜 생활 풍습 가운데도 그렇다. 상투, 옷깃, 무릎 꿇어 앉는 자세, 때로는 무덤 속 순장 풍습까지.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오늘까지 이어져온 걸까? 갑골문, 고분에서 나온 옥인형, 고구려 벽화, 고려와 조선의 기록들을 교차해 읽으며, 동이족과 한민족의 문화적 연속성을 추적해보면,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완전히 동일하다 말할 순 없다. 그러나 풍습과 생활 속 흔적은 생각보다 많이 이어져 있다.” 이는 단순한 민족주의의 외침이 아니라, 차근차근 증거를 꿰는 실증적 접근이다. □ 왜 동이족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고조선, 부여, 고구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우리의 옛 나라들이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면 기록은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다. 삼국지의 몇 줄 기록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후대의 서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헌이 부족하다면, 물증으로 보완해야 한다. 갑골문, 옥인형, 무덤 유물, 벽화, 고려도경 같은 외부인의 기록까지 모아 서로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의 퍼즐 맞추기와 같다. 문헌만으론 모양이 안 나오던 그림이, 유물과 문자와 풍습을 함께 놓아보면 윤곽을 드러낸다. □ 상투와 옷깃, 생활 속의 흔적 첫 번째 사례는 상투다. 갑골문 가운데 ‘지아비 부자’(夫)라는 글자를 보면 머리 위로 머리를 틀어 올린 듯한 모습이 보인다. 상나라 옥인형에서도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고구려 벽화 속 인물이나 신라 토우에도 상투가 그려져 있다. 진나라 병마용의 머리 모양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진의 군사들은 속발, 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렇게 문자와 유물, 벽화가 한데 모이면, 상투라는 풍습이 단순한 ‘머리 모양’이 아니라 동방 세계의 문화적 표식이었음을 알게 된다.([그림 23] ‘夫’ 참조) 옷깃 방향도 흥미롭다. 갑골문과 고구려 벽화 속 옷깃은 왼쪽으로 여민 ‘좌임’이다. 반면 한나라의 유물은 ‘우임’이 주류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 이는 활쏘기와 연관이 있다. 좌임은 활을 당길 때 화살이 옷깃에 걸리지 않도록 고안된 궁수 문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스키타이 기마병들의 판금 갑옷도 좌임이었는데, 이 역시 활쏘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확산되면서 좌임은 ‘오랑캐의 풍습’으로 낙인찍히고, 대륙의 표준인 우임으로 수렴된다. 풍습이 정치·이데올로기와 만나 변용된 것이다. □ 무릎 꿇은 옥인형과 ‘여자(女)’ 은허에서 나온 작은 옥인형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 자세는 단순한 예배 동작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상 자세였다.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아 생활하던 시대, 무릎 꿇기는 자연스러운 기본 자세였다. 이 인형은 곧 갑골문의 ‘女’와도 연결된다. 여자의 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구부린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강조된 듯한 선까지 남아 있다. 문자란 결국 생활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맞는 경우도 드물다. □ 앉는 풍속의 변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양반다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상·주·한 시대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어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대 이후 서역에서 ‘호자’라 불린 의자가 전래되며 앉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온돌의 보급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따뜻한 바닥 덕에 무릎을 꿇기보다는 다리를 풀어 앉는 습관이 자리잡은 것이다. 일본은 다다미 문화 덕에 무릎 꿇어 앉는 풍습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생활기술과 환경이 사람의 몸짓을 바꾸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 편두와 순장, 낯선 풍습의 그림자 편두(偏頭), 즉 납작한 머리 모양은 고대 기록마다 묘사가 엇갈린다. 어떤 사서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뒤통수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적고, 또 어떤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지증대사비… 자료는 제각각이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자의 인식·편견에서 나온 문제로 본다. 건륭이 남긴 비판적 언급도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풍습이 어땠든, 후대의 눈으로 본 모습은 언제나 가감과 왜곡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순장 풍습은 더욱 극적이다. 상나라 무덤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확연하다. 『삼국지』에도 부여에서 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벽화에도 피장자 곁을 지키는 듯한 인물상이 보인다. 신라의 지증왕은 공식적으로 순장을 금지했고, 고려 시대에 이르면 법으로 철저히 막는다. 그러나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실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풍습은 권력과 사회구조의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사라진다. □ 왜 바뀌었을까? 풍습의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교류다. 스키타이, 페르시아, 몽골과의 만남이 머리 모양, 옷차림, 무기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사상이다. 유교의 확산은 옷깃 하나까지도 ‘문명 vs 오랑캐’라는 틀로 재해석했다. 셋째는 생활기술이다. 의자와 온돌 같은 작은 발명품이 사람들의 몸짓과 풍습을 완전히 바꿨다. 넷째는 정치다. 순장 금지 같은 국가적 법령이 사회 풍습을 강제로 바꿔놓았다. □ 연속성과 단절의 기억 그렇다고 해서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을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교류와 전쟁, 제국의 흥망이 있었다. 그러나 상투, 좌임, 무릎 꿇기, 편두, 순장 같은 풍습이 문자와 유물, 벽화, 기록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보여준다. 문화는 시간의 겹을 통과하며 남고, 사라지고, 또 변형된다. 갑골문과 유물은 그 겹 사이에 박힌 단서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꿰어내어, 한 민족의 옷자락을 다시 펼쳐보는 것이다. □ 오늘의 함의 흔히 역사는 먼 과거의 일이어서 우리와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상투를 틀던 손길, 옷깃을 여미던 습관, 무릎 꿇어앉던 자세, 그리고 순장에 담긴 사회 질서까지……. 모두가 오늘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민족 정체성이란 단순히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활 속에 스며든 몸짓과 관습, 그 변형과 지속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흰옷을 고집하듯, 상투나 옷깃, 앉는 방식 하나에도 수천 년의 이야기가 겹겹이 배어 있다. 결국 역사를 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오래된 몸짓을 발견하는 일이다. 동이족을 다시 보는 것은, 그 속에서 현재 우리를 다시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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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갑골문 속에서 되살아난 우리 풍습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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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흰옷을 입은 민족, 그 오래된 빛의 기억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3·1운동의 사진을 떠올려보자. 거리마다 모여든 군중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함께 사람들의 옷도 하얗게 빛났다. 일제 당국은 이 장면을 경계했다. 흰옷은 너무나 눈에 잘 띄었고, 동시에 민족의 상징으로 번져갔다. 그래서 일제는 ‘백의(白衣) 금지령’을 내려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흰옷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일까? 흔히 “우리 민족은 가난해서 흰옷만 입었다”, “염색 기술이 부족해서 그렇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 어떤 이는 “상복을 오래 입는 풍습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어딘가 부족하다. 과연 흰옷이 단순히 염색 비용을 아낀 가난의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상복의 연장이었을까? 흰옷 숭상이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관념 즉, 태양과 광명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 갑골문 속 ‘白’자의 비밀 먼저 문자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白(백)’의 갑골문과 소전(小篆) 형태를 보면, 그 기원은 흥미롭다. 글자는 해(日)와 닮아 있으면서도 그 위에 빛줄기 같은 표상을 얹은 모습이다. 다시 말해, ‘白’은 원래 햇빛, 특히 정오의 눈부신 빛을 상징했다는 것이다.([그림 22] ‘白’ 참조) 물론 다른 해석도 많다. 어떤 이는 쌀알을 본뜬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촛불, 또 어떤 이는 누에고치라 말한다. 그러나 ‘日(해)’과의 관계, 선사시대 제천 맥락을 고려할 때 ‘광명 → 흰색’으로 읽는 해석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흰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태양이 내리쬐는 찬란한 빛 그 자체였다.([그림 22] ‘日’ 참조) □ 태생의 빛, ‘소(小)’자의 단서 청동기 문자 가운데 ‘小(소)’의 초기형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학자들은 이 글자의 원형을 태반이나 탯줄과 연결 짓는다. 아이가 태어날 때 맺는 탯줄, 그 창백한 빛깔에서 ‘흰색’의 의미가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결국 ‘흰색’은 태어남과 빛, 생명의 상징과 이어진다. 이처럼 문자 속에서 흰색은 처음부터 신성하고 생명적인 의미를 지녔다. □ 은나라에서 조선까지 흰색의 역사적 전승 문자학적 단서가 흰색과 태양을 이어준다면, 역사 기록은 이 관념이 실제 사회 풍습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중국 고대의 은(殷, 상)나라는 흰색을 신색(神色)으로 삼았다. 제천 의식과 왕실 제사에서 흰색이 신성한 색으로 쓰였다. 이 관습은 은나라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부여,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그리고 『세종실록』에도 흰옷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백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단절되지 않고 기록 속에 계속 이어졌다. □ 오행과 색채 정치 그렇다면 왜 은은 흰색을, 주는 붉은색을 숭상했을까? 이는 고대 중국의 색채 정치, 즉 오행 사상과 관련 있다. 오행에서 흰색은 서쪽과 금(金)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남쪽과 화(火)를 상징한다. 은은 흰색을, 주는 붉은색을 통해 각기 자신들의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냈다. 조선에 들어오면 흰옷은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 자리했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은 색을 통제하려 했다. 푸른색 염색을 금지하거나, 특정 계급만이 특정 색을 입게 하는 제도적 규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흰옷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단순한 경제적 이유일까? 여기서 반론이 제기된다. “조선 사람들은 가난해서 흰옷을 입은 것 아니냐?” 염색에는 비용이 들고, 흰옷은 값이 싸니 자연히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반론은 “조선은 상복을 중시했으니 흰옷 풍습은 상복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난이나 상복으로는 왜 왕실과 제사에서조차 흰색이 신성하게 쓰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왜 이웃 민족들과 달리 한민족은 지속적으로 흰옷을 고집했는지도 풀리지 않는다. 기후나 지역적 조건만으로는 더더욱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자·제천·왕실 풍습에서 이어진 ‘광명 숭배’의 일관성이 이런 현상을 더 잘 설명해 준다. 흰옷은 가난의 표지가 아니라, 태양의 빛을 입는 행위였다. □ 근대의 백의는 저항과 정체성의 상징 이 오래된 관념은 근대에 들어와 또 다른 의미로 부활한다. 일제강점기, 흰옷은 항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3·1운동의 군중이 흰옷을 입고 거리를 메운 장면은 세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는 이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백의 착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흰옷은 여전히 민족 정체성과 저항의 코드로 살아남았다. 즉, 흰옷은 단순한 의복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의 영혼이 담긴 문화적 표상으로 기능했다. □ 오늘날 흰옷의 의미 오늘날 우리는 예복이나 제례에서조차 흰옷을 자주 입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흰색은 특별하다. 결혼식의 드레스, 장례식의 상복, 국기와 체육대회 단체복까지 흰색은 여전히 ‘순수·광명·정화’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흰옷은 단순한 옷감의 색깔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적 기호가 응축된 상징이다. 그것은 태양의 빛을 입고자 했던 제천의 기억이고, 왕실과 민중이 공유한 신성의 색이었으며, 근대에는 저항과 정체성의 옷이 되었다. □ 맺으며 흔히 우리는 “흰옷 입은 민족”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뿌리를 따라가면 태양 숭배와 제천, 문자와 왕실 제사, 색채 정치와 항일 저항이 서로 얽힌 깊은 역사를 발견한다. 흰옷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 광명과 신성의 표상,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오늘 우리가 흰옷을 입을 때, 비록 그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몸은 이미 수천 년 이어온 빛의 전통을 다시 입고 있는 것이다. 흰옷은 단순히 눈에 띄는 색이 아니라, 한민족이 기억 속에서 지켜온 빛의 언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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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흰옷을 입은 민족, 그 오래된 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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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의 시대, 다시 인문학의 시간을 걷다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불과 몇 년 전까지 교육 현장과 우리 사회는 '코딩', '3D프린팅', '메타버스'라는 기술적 주문(呪文)에 함몰되어 있었다. 모든 교육의 지향점은 기계적 숙련도에 매몰되었고, 대학의 인문학은 취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숨을 죽인 채 고사(枯死)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우리는 거대한 역설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정점에 다다를수록 세상은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것’을 강력하게 호출하고 있으며, 인문학적 사유와 소통 능력이 기술적 기량을 압도하는 핵심 자본이 되는 ‘인류사적 디지털 르네상스’가 그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담론이 아닌 실증적 지표로 증명되고 있다. AI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안드레이 카파시(Andrej Karpathy)는 최근 “이제 가장 핫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인간의 언어”라고 단언했다. 복잡한 코딩 언어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비판적 사고력’과 협업을 이끌어내는 ‘공감 능력’이 AI 활용의 성패를 가른다는 뜻이다. 실제로 뉴욕 연방준비은행(New York Fed)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이공계 전공자의 실업률(5.9~7.2%)보다 인문학 전공자의 실업률(3.0~3.8%)이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이는 기술의 유효기간이 급격히 짧아지는 시대에 특정 기술에만 매몰되기보다, 변화하는 환경을 유연하게 읽어내고 맥락을 짚어내는 인문학적 소양이 노동시장에서 훨씬 더 높은 생존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방증이다. 파편화된 정보를 엮어 통찰을 만드는 능력이 AI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한국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며 2023년 이래 ‘국제 컴퓨터·정보 소양 연구(ICILS)’ 등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어 왔다. 하지만 자부심 이면에 도사린 과제는 무겁다. 이제는 하드웨어의 확충을 넘어 그 안을 채울 ‘질적 소프트웨어’, 즉 교육의 본질을 혁신해야 한다. 기술 도입에 앞서 ‘비판적 미디어 수용 능력’을 최우선 가치로 세워야 하며,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사회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게 하는 교육 모델로의 전격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시급한 실천은 교사의 역할 재정의다. 지식의 전달은 AI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겠지만, 학생의 윤리적 판단력을 길러주고 기술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인간 교사만이 가능하다. 교사는 이제 지식 공급자가 아니라 인문학적 성찰을 이끄는 ‘조력자’이자 기술의 오남용을 막는 ‘윤리적 등대’가 되어야 한다. 교육 현장은 이제 단순히 기기를 다루는 법이 아니라, AI의 결과물을 의심하고 재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질문의 장'으로 변모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찰을 넘어 구체적인 교육 혁신에 나서야 한다. 첫째, 교과 과정을 기술 습득과 더불어 인문학적 사유와 비판적 글쓰기를 동시에 함양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둘째, AI 학습 도구 활용 시 기술적 오류와 편향성을 탐색하는 ‘디지털 혹은 인공지능 문해력(AI Literacy)’ 교육을 정규 과정에 전면 배치해야 한다. 셋째, 정답을 찾는 경쟁보다 인간과 기술의 공존 방안을 모색하는 프로젝트형 인문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교육적 실천은 교실의 담장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 확장되어야 한다. AI가 가져올 고용 구조의 변화와 윤리적 혼란은 어느 한 분야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학·연이 머리를 맞대어 인문학적 통찰이 기술 개발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민사회가 기술의 공공성을 감시하는 역량을 키울 때 비로소 우리는 기술에 매몰되지 않는 단단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 인문학적 가치는 결코 먼지 쌓인 옛 유물이 아니라, AI 시대를 당당하게 헤쳐 나갈 가장 품격 있는 삶의 전략이다. 우리가 고유한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 거센 기술의 파도를 넘는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교육은 그 존재의 이유와 근본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교육 현장의 체질을 인문학적 성찰 중심으로 유연하게 바꾸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 인문학이 우리에게 부여한 소중한 과업이자, 인간과 기술이 공존하는 미래를 열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김춘식 ◇ 동신대학교 교수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 ◇ 前국가교육위원회 전문위원 ◇ 前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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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의 시대, 다시 인문학의 시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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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강강수월래, 춤추는 글자의 기원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여름 보름달 아래,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있는가. “강강수월래―” 소리를 높이면, 어느새 우리 몸은 노래와 하나가 되고, 둥근 원 속에서 삶의 고단함도 흩어진다. 이 단순한 원무(圓舞), 곧 손잡고 도는 춤은 어쩌면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 공동체의 원초적 몸짓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춤’이라는 글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을까. 오늘 우리가 쓰는 ‘舞(무)’자는 갑골문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단순한 몸놀림 이상의 의미, 곧 공동체가 하늘에 기도하고 자연과 소통하던 오래된 제의적 기억이 숨어 있다. □ 팔 벌린 사람, 손에 든 도구 갑골문 속 ‘舞’는 단순하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사람의 형상(大) 위에, 양손에 나뭇가지나 깃털, 혹은 꼬리 같은 도구가 들려 있다. 이 도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이는 소의 꼬리라고 했고, 어떤 이는 깃털 장식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제의적 도구, 이를테면 바람과 비를 불러들이는 가지나 부채와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림 21] ‘舞’ 참조) 중요한 건, 춤의 본래 모습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양손에 든 도구는 하늘에 대한 기도, 특히 기우제와 같은 제천의식의 상징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흔들고, 땅을 두드리며, 무리를 지어 돌던 춤. ‘舞’의 출발은 곧 공동체 전체가 하나 되어 하늘과 소통하던 몸짓이었다. □ 발자국이 더해지다 흥미로운 점은 글자의 변화다.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팔 벌린 사람과 도구만 그려졌지만, 금문(청동기에 새겨진 문자)과 소전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바로 발자국이다. 글자 아래 ‘止(발자국 지)’ 모양이 덧붙으며, 이제 ‘무’는 단순히 도구를 든 사람이 아니라 발을 옮기며 움직이는 장면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춤은 손의 동작과 함께 발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며 본격적으로 ‘춤’의 의미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舞’와 ‘無(없을 무)’가 일시적으로 의미 관계를 맺은 흔적도 보인다. 어떤 제의에서는 손에 든 도구를 불 속에 던져 태움으로써 ‘없어짐’을 상징했는데, 이런 의례적 맥락이 ‘무(無)’의 뜻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학적 세부는 복잡하지만, 분명한 것은 춤과 제의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춤은 제사였다 우리는 춤을 흔히 예술이나 오락으로 본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춤은 무엇보다 제사였다. 춤은 신과 만나는 길이었고,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었다. 중국의 종묘대제 기록에는 ‘무구(舞具)’라는 도구가 등장한다. 북과 피리뿐 아니라, 춤추는 이들이 손에 들던 도구가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종묘제례악에서도 춤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다만 조선시대의 종묘무는 송나라와 고려를 거쳐 들어온 양식을 계승한 것이어서, 갑골문 ‘舞’의 원형과 동일시하기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의식에서 춤이 빠질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춤은 곧 기도였고, 기도는 춤이었다. □ 고고학과 민속의 증언 문자의 해석을 넘어 고고학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요하 지역의 우하량 유적에는 제천을 위한 원형 재단이 발견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구현한 구조다. 흥미롭게도 강화도의 참성단도 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우연일까, 전승일까? 또한 중국과 티베트 일대에서는 4~5천 년 전 도자기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는 무리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선 채 발을 구르며 춤을 춘다.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문득 오늘날의 ‘강강수월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강수월래가 곧 갑골문 ‘舞’의 원형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화는 복잡하게 전파되고 변용된다. 그러나 원무, 즉 원을 그리며 집단으로 추는 춤이 인류 보편의 오래된 제의적 몸짓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강강수월래는 그 기억의 한국적 변주라 할 수 있다. □ 춤은 어떻게 전승되었나 고대의 춤이 제의적 기원에서 출발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수용과 변용의 과정이었다. 송나라에서 유입된 궁중무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종묘제례악에 자리 잡았듯, 춤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옷을 갈아입으며 이어졌다. 고구려의 넓은 소매춤을 갑골문 ‘舞’와 직접 연결 짓는 해석도 있지만,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춤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과 형식을 입었어도 그 뿌리에는 늘 공동체적 기도와 제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곧 춤의 본질이었다.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춤이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춤은 곧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풍년이 들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늘에 기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몸을 흔들고, 손에 도구를 들고,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하늘에 비를 빌기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그러나 축제와 무대, 혹은 운동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노래하며 몸을 흔들 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춤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강강수월래는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한 오래된 기도의 기억이자, 공동체가 함께 살아남고자 했던 몸짓의 유산이다. □ 맺으며 갑골문 ‘舞’는 단순히 춤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팔 벌린 사람과 양손의 도구, 그리고 발자국이 새겨진, 살아 있는 의식의 기록이다. 춤은 오락이 아니라 제사였고, 기도였다. 우하량의 재단, 강화도의 참성단, 고대 도자기의 원무, 그리고 오늘날의 강강수월래. 이 모든 것이 서로 닮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춤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몸짓으로 하늘에 닿고, 서로의 마음에 닿고자 했던 몸의 언어. ‘舞’라는 글자 속에는 바로 그 언어가 새겨져 있다. 춤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였고, 글자는 그 기도를 잊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수천 년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그 글자 속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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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강강수월래, 춤추는 글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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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의 빛과 단종의 그림자: 기술 권력 시대, 왜 우리는 다시 슬픔의 공동체를 찾는가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 프롤로그: 0과 1의 세계에서 터져 나온 집단적 통곡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단종)가 개봉 31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투자배급사 쇼박스가 관객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하고자 마련한 ‘통곡 상영회’는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효율과 논리가 지배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현대인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울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현상은 단순한 흥행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시사한다. 스크린 속 어린 왕의 비극에 수많은 이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감상적 동조를 넘어선다. 그 이면에는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소외된 현대인의 깊은 실존적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기계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인간성의 최후 보루를 확인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기술의 초가속과 인간의 정서적 지연 인공지능은 어제의 불가능을 오늘의 일상으로 치환하며 진화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물학적 뇌와 정서 체계는 이토록 빠른 기술 속도에 적응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기술 문명은 삶의 중심을 잡아주던 기준점인 닻을 흔들어 놓았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고도화된 기술 사회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실용적 공포와,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감정적 교감이 거세당하고 있다는 근원적 두려움을 동시에 낳는다. 기술이 가속화될수록 우리 내면에는 기묘한 정서적 지연 현상이 발생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단종의 비극에 대한 열광은 바로 이 길을 잃은 세대가 찾아낸 역설적인 안식처인 셈이다. □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과 통곡 상영회의 평행이론 현대인들이 통곡 상영회로 집결하는 모습은 수천 년간 특정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Wailing Wall)’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성벽 앞에 모여 자신의 고통을 하늘에 고하고 집단적으로 슬픔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지켜냈듯, 오늘날의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현대적 성벽 앞에 모여 디지털 시대에 상실해 가는 인간의 원형을 붙잡으려 한다. 인공지능은 결코 눈물을 흘릴 수 없기에, 인간의 눈물이 지닌 실존적 가치는 이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AI는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가장 그럴듯한 답변을 출력할 수는 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는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실제적 경험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슬픔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기계가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신호다. 통곡 상영회는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따뜻한 위로와 연대를 확인하는 현대판 통곡의 벽이라 할 수 있다. □ 아날로그적 결핍과 살롱 문화의 귀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역설적으로 심각한 정서적 굶주림을 겪고 있다. 온라인 소통이 강화될수록 대면 소통은 줄어들고, 이모티콘과 ‘좋아요’는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 계몽주의 시대 유럽의 교양 사회를 이끌었던 ‘살롱 문화(Salon culture)’에 주목해야 한다. 살롱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여 철학과 예술, 정치와 사회를 논하며 고립된 자아를 확장하던 소통의 장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기계적 회의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지적으로 자극하며 인간적 유대를 쌓는 ‘취향과 감성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디지털의 범람 속에서 아날로그적 온기를 간직한 작은 살롱들은 우리를 기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해 줄 정서적 피난처가 될 것이다. □ 역사적 고비로서의 AI 혁명과 기술 권력에 대한 공포 역사적으로 기술의 급격한 전환기는 언제나 인간 소외와 정체성 붕괴라는 혹독한 대가를 요구해 왔다. 산업혁명의 가속화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듯, 현재의 4차 산업혁명 역시 인류에게 거대한 실존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현대인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은 AI가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는 걱정을 넘어, 기술을 장악한 소수 권력에 의해 인간의 판단과 감정이 통제당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를 소비하고 데이터가 분석한 감정에 의존하는 삶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점차 희미해진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기술의 방향을 결정할 것인가. □ 에필로그: 인간 중심의 5차 산업혁명과 공동체 리빙랩의 시대 결국 해답은 기술의 거부가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에 둔 기술의 통제와 관리에 있다. 기술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로 남을 수 있도록 윤리적·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 시대의 정서적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인간 중심의 5차 산업혁명’의 핵심 가치다. 이러한 가치를 현실화할 구체적인 대안으로 생활 현장 기반의 ‘리빙랩(Living Lab)’ 공동체에 주목해야 한다. 리빙랩은 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기술을 도구 삼아 지역 사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나가는 ‘살아있는 실험실’이다. 이는 전문가의 일방적인 주도를 넘어 사용자 중심의 사회 혁신을 실현하며, 기술이 만남을 대체하는 고립의 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따뜻한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통곡 상영회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눈물은 기술 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고 존엄한 인간으로 남겠다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선언이다. 슬픔은 기계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영토다. 우리가 여전히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 울 수 있는 한, 인류의 이정표는 차가운 알고리즘이 아닌 따뜻한 공감의 선율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결국 슬픔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그 공감의 능력이 바로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내야 할 진정한 이유다. ▣ 김춘식 ◇ 동신대학교 교수 ◇ 2024 칼만 해외석학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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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의 빛과 단종의 그림자: 기술 권력 시대, 왜 우리는 다시 슬픔의 공동체를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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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죽은 자의 발자국, 살아 있는 자의 기억-은자 ‘복(復)’의 이야기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낯설고도 친근하다. 눈앞에 있는 돌 하나, 땅속에서 나온 기와 조각 하나에도 수천 년의 기억이 서려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읽어내는 방식은 시대와 권력, 그리고 우리의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갑골문 이야기도 그렇다. 중국에서는 흔히 갑골문을 ‘중화문명의 뿌리’라 부른다. 맞는 말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상황은 조금 다르다. 정작 갑골문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글자 하나하나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갑골문 글자 하나만 해독해도 10만 위안을 번다더라”는 식의 괴담이 대중 속에 퍼져 있을 정도다.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비하고도 난해한 문자일 뿐이다. 하지만 갑골문을 단순히 난해한 고문자로만 본다면 그 속의 생생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오늘 다루려는 ‘복(復)’자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보통 ‘복’이라 하면 ‘되돌아온다, 회복한다’는 뜻을 떠올린다. 하지만 갑골문 속 ‘복’은 조금 다르다. 글자의 형상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돌아옴’ 이상의, 생과 사를 오가는 깊은 상징을 만나게 된다. □ 발자국, 집을 나서다 먼저 글자의 아랫부분을 보자. 거기에는 ‘止(지)’라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글자를 오늘날 ‘그칠 지’라고 읽지만, 본래의 뜻은 달랐다. ‘발자국’ 혹은 ‘발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이었던 것이다. 즉, ‘앞으로 걸어간다’는 의미가 기본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복’자의 갑골문에서는 이 발자국이 거꾸로 뒤집혀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다. 발길이 안쪽을 향하지 않고 바깥으로 향한다는 점이 중요한 대목이다. 이 발자국 위에는 직사각형 구조물이 놓여 있다. 마치 성곽이나 움집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그 중앙에는 삼각형, 혹은 역삼각형의 표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출입구를 뜻하는 기호로 자주 쓰였다. 그렇다면 이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해석하면 ‘집에서 발길이 밖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갑골문은 늘 단순한 그림 이상이다. 당대의 삶과 죽음을 담아내는 기호였으니, 여기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의 거처, 곧 신옥(神屋)이나 무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발자국이 밖으로 향하는 장면은? 바로 ‘죽은 자의 영혼이 집을 나서 세상으로 나온다’는 뜻이다.([그림 20] ‘復’ 참조) 즉, 복(復)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발길이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을 담고 있는 셈이다. □ ‘아(亞)’와 ‘복(復)’의 친연성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亞)’자와의 연관성이다. ‘亞’ 하면 우리는 흔히 ‘버금, 차순위’의 뜻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이 글자는 조상의 영혼이 거처하는 종묘를 둘러싼 길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귀신의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림 20] ‘亞’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亞’는 단순히 위계나 순서를 표시하는 용도로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갑골문 단계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장소’를 뜻했다. ‘복(復)’자가 ‘죽은 자의 발자국’이라면, ‘亞’는 그 발자국이 오가는 길과 공간이었다. 두 글자는 같은 세계관 속에서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진 셈이다. □ 고고학이 말해주는 것들 갑골문 해석은 종종 고고학의 발견과 맞닿는다. 하북성에서 발견된 조조의 무덤을 보자. 무덤 구조가 ‘복’자의 형상과 닮아 있다. 직사각형의 집 모양, 출입구, 바깥으로 향한 통로. 조조 무덤이 실제로 그 시대의 것인지 여부를 떠나, 이 형식이 상나라 이래 이어져 온 전통임을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건 한반도의 사례다. 2007년 경북 문경의 고모산성에서 5세기 지하 목조건물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그 내부 구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직사각형의 집 모양과 출입구, 그 배치가 갑골문 속 ‘복(復)’자의 형상과 거의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상나라의 건축 전통, 나아가 동이족 문화권의 신앙과 생활양식이 한반도 신라에까지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결국 ‘복’자는 단순히 문자 차원의 해석이 아니라, 건축, 장례, 종교적 의례 전반과 연결되는 문화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 돌아옴은 곧 ‘영혼의 귀환’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글자를 일상적으로 쓴다. 회복, 반복, 복귀. 모두 되돌아옴을 뜻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 되돌아옴은 단순히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영혼의 귀환’을 가리켰다. 죽은 자가 저승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발자국, 그것이 곧 ‘복’이었다. 동이족의 세계관에서는 죽음은 단절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문을 열고 드나드는 관계였다. 영혼은 저승으로 떠났다가도 제사와 의례를 통해 언제든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무덤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양쪽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였고, 갑골문 속 ‘복’은 그 문턱에서 찍힌 발자국이었다.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다. 왜 동이족은 죽음을 ‘복’이라 불렀을까. 왜 발자국이 집을 나서는 장면을 글자로 새겼을까. 그것은 아마도, 죽은 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산다. 영혼의 귀환 같은 이야기는 미신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믿음이 담고 있던 삶의 태도, 곧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되돌아옴’으로 바라보던 시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절 대신 순환을, 끝 대신 이어짐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문경 고모산성 지하 건축물의 발자취를 바라보며, 혹은 갑골문 속 ‘복’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삶과 죽음을 하나의 길 위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발자국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을.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갑골문 속 작은 발자국 하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귀환이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시 ‘복’할 존재라는 것. □ 맺으며 중국에서조차 대다수는 알지 못하는 갑골문. 그러나 그 안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 나아가 한반도까지 이어진 깊은 문화의 흔적이 숨어 있다. ‘복(復)’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단순히 돌아옴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상징,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통로였다. 이제 우리는 ‘복’자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반복되는 일상의 귀환이 아니라, 선조들의 영혼이 오늘도 우리 곁에 되돌아오는 발자국이다. 고대의 무덤과 건축물, 그리고 문자 속에 살아 있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도 조금은 가까워질 것이다. 죽은 자의 발자국은 살아 있는 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갑골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가장 따뜻한 위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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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죽은 자의 발자국, 살아 있는 자의 기억-은자 ‘복(復)’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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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무지개, 한자 속에 새겨진 색과 신화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무지개는 누구에게나 신비롭다. 비가 갠 뒤 하늘에 걸리는 곡선, 일곱 가지 색이 겹쳐진 장면을 우리는 자연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 과학책에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순으로 줄 세워 배웠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이 현상은 단순한 스펙트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고대 동이족 사회에서는 무지개의 색을 자연 관찰과 신화, 인간과 연결해 해석했고, 그 흔적이 한자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먼저 서양에서 무지개 색을 기억하는 방법을 떠올려보자. 영어권에서는 R.O.Y.G.B.I.V.라는 이니셜, 즉 Red(빨강), Orange(주황), Yellow(노랑), Green(초록), Blue(파랑), Indigo(남색), Violet(보라)를 외운다. 15세기 영국,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미 전쟁 패배와 연결해, 교육과 기억을 돕는 장치로 정착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세기도 코구세이(世も世も今や昔)'’란 이름으로 비슷한 체계를 가졌지만, 중국이나 고대 동이족 사회에는 이렇게 알파벳식 축약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무지개의 색은 자연과 인간, 신화적 존재를 결합해 문자와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 홍색(빨강) - 용과 불타는 색의 상징 무지개의 첫 색, 빨강은 동이족에게 단순한 색상이 아니었다. 갑골문 속 기록을 보면 무지개는 ‘북쪽에서 내려와 강에서 물을 마시는 신비한 생물’로 묘사되었고, 종종 머리가 두 개인 용으로 그려졌다. 이 용은 암용과 수용으로 나뉘는데, 수용은 화려한 색, 특히 빨강을 띠었다. 초기 갑골문에서는 뱀과 공(큰 것)을 합쳐 거대한 용으로 표현했고, 이후 소전과 해서에 이르러 용이라는 상징이 정교하게 확립되었다.([그림 19] 참조)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 빨강을 ‘불타는 붉은색’으로, 중국에서는 비단에 염색한 ‘홍자’로 표현했다. 관련 글자로는 적(赤), 홍(紅), 주(朱), 단(丹), 비(緋) 등이 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색을 넘어, 인간과 신화적 상상, 그리고 제의적 의미까지 포괄한 색이었다. □ 주황색 - 등자와 황자 주황색은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연결한 색이다. 한국에서는 ‘불굴 주자’와 ‘황자’를 합쳐 주황색을 표현했다. 등자는 인도에서 유래해 한국에서 재배가 어려웠지만, 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채택됐다. 황색은 갑골문에서 태반과 출산 장면을 묘사하면서 발전했다. 갓 태어난 아이의 피부색, 건강과 번식의 상징, 그리고 귀중함을 나타내는 황금과 황제, 옥토와 연결된다. 이렇게 주황과 황색은 단순한 색을 넘어 생명과 번영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그림 19] 참조) □ 초록색 - 풀과 우물, 생명의 색 초록은 무지개의 자연적 색상을 대표한다. 갑골문에서는 우물가의 싱싱한 풀 그림에서 비롯됐다. 당시 동이족은 녹색과 청색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자연 속 푸른 풀과 물빛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소전과 해서에 이르러서는 명주실과 우물물 그림으로 발전해, 청록빛을 표현하는 문자가 만들어졌다. 즉 초록색은 자연의 생명력과 물의 신비를 동시에 담은 색이었다.([그림 19] 참조) □ 파란색 - 쪽람과 청자 파란색은 쪽람, 즉 쪽 염색과 연결된다. 소전 단계에서는 풀과 감 그림으로 발전해, 쪽을 물에 적셔 햇볕에 말린 청색 천을 상징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속담은 청자가 먼저 있었고, 쪽람은 소전 시대 이후 등장했다는 연구가 많다. 동이족의 색 개념에서 파랑은 염색 기술과 자연의 색이 결합해 문자가 된 사례다.([그림 19] 참조) □ 자주색 - 명주실과 색의 혼합 마지막으로 자주색은 명주실에 빨강과 파랑을 혼합해 얻은 색이다.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사람, 발, 명주실 그림이 합쳐져 자주빛을 나타내는 글자로 정착했다. 현대적 감각에서 자주색의 범위가 넓어 명확한 정의는 어렵지만, 혼합과 조합을 통한 색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그림 19] 참조) □ 무지개 색과 문화적 의미 이처럼 무지개는 단순히 하늘의 현상에 머무르지 않았다. 고대 동이족은 비 온 뒤 나타난 하늘을 통해 자연, 인간, 신화적 존재를 연결했다. 각 색은 생명, 풍요, 불, 물, 염색 기술 등 구체적 경험과 결합해 의미화되었다. 문자의 발전도 흥미롭다. 갑골문에서는 그림처럼 구체적 도상을 사용했고, 금문과 소전을 거치며 도상과 의미가 점차 추상화됐다. 해서에 이르러 현대 한자로 정착하면서도 초기 의미와 상징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지역별로 색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한국과 일본은 동이족 전통의 색상과 상징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했지만, 중국에서는 문화적, 지역적 차이에 따라 일부 색상을 선택하거나 방식이 달라졌다. □ 결론 : 무지개, 자연과 인간의 기록 무지개의 색은 단순한 스펙트럼이 아니었다. 고대 동이족에게는 인간, 자연, 신화가 결합된 문화적 상징이었다. 그 의미는 문자 속에 새겨졌고, 시대를 거치며 한자로 정착했다. 오늘날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 속에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고 기록한 경험이 겹겹이 쌓여 있다. R.O.Y.G.B.I.V.라는 영어 축약법은 현대인의 기억 장치일 뿐, 동이족은 용, 풀, 물, 명주실, 신화적 존재를 통해 색을 이해했고, 문자로 남겼다. 한 글자, 한 색 속에는 자연 관찰, 인간 생활, 신화, 사회적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무지개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긴 시간과 문화의 흐름을 함께 보는 셈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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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무지개, 한자 속에 새겨진 색과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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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글자 속에 새겨진 계절의 기억(春夏秋冬)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춘하추동”이라 부른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나타내는 이 네 글자는 마치 처음부터 추상적인 시간의 구분을 뜻하는 듯하다. 그러나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훨씬 생생하다. 계절을 나타내는 글자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고대인이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관찰한 자연과 생명의 순간들이 그림처럼 새겨진 흔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춘풍(春風), 하계(夏季), 만추(晩秋), 동면(冬眠) 같은 단어를 쓰며 계절을 언어로 호명한다. 하지만 이 네 글자가 어떻게 지금의 형태로 정착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가 자연과 맺어온 관계의 깊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 봄 - 새싹이 움트는 순간, 春 봄은 언제나 시작의 계절이다. 갑골문 속 春은 해(日)와 땅에서 막 솟아나는 새싹을 그린 모습이었다. 마치 한 점 씨앗이 움트며 땅 위로 고개를 내미는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그림 18] ‘春’ 참조) 시간이 흘러 금문에서는 풀(艹의 전신)과 뿌리내림(屯의 초기형)이 결합되고, 거기에 해(日)가 더해졌다. 결국 해서체에 이르러서는 艹(풀) + 屯(싹 틔움) + 日의 구조로 정리되어 오늘의 春자가 되었다. 즉, 봄이라는 계절은 추상적인 “시간 단위”가 아니라 햇살을 받아 씨앗이 깨어나는 생명의 관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입춘(立春), 춘설(春雪) 같은 말 속에도 늘 생명과 새로움의 이미지가 배어 있다. □ 여름 - 더위에 지친 몸, 夏 여름은 뜨겁다. 갑골문 속 夏는 해 아래서 팔다리가 축 늘어진 사람의 형상을 담았다. 태양의 열기에 머리에서는 열기가 솟고, 사지(四肢)는 힘없이 처져 있다. 글자 하나에 “더위에 지친 몸”이라는 생생한 체험이 담겨 있는 셈이다. 금문으로 가면 이 사람 형상 위에 해(日)가 얹혀진다. “뜨거운 햇볕 아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소전 단계에서는 머리 부분이 頁(혈)의 전신으로 정리되고, 해서체에 이르러서는 팔이 생략되고 다리만 夂 모양으로 남아 지금의 夏자가 완성되었다.([그림 18] ‘夏’ 참조) 우리가 하복(夏服)을 입고, 하계(夏季)를 보내며, 여름방학을 즐긴다고 말할 때, 그 속에는 사실 고대인이 더위에 늘어진 몸을 문자로 남겨둔 기억이 숨어 있는 것이다. □ 가을 - 귀뚜라미와 곡식의 계절, 秋 가을, 한자로 秋를 쓰면 흔히 벼(禾)와 불(火)의 결합이라고 배운다. 볕에 벼가 익는 계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초기의 秋자는 귀뚜라미를 옆으로 눕혀 그린 상형이었다. 다리와 더듬이가 표현된 이 작은 곤충은 울음소리가 “추추”로 들려 가을을 알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리로 계절의 변화를 느꼈고, 글자에도 담았다.([그림 18] 秋 참조) 이후 금문 단계에서 귀뚜라미 옆에 벼(禾)와 불(火)이 더해졌다. “볕에 곡식이 익는다”는 농경적 의미가 추가된 것이다. 소전과 해서에 이르러서는 곤충 도상이 생략되고 禾와 火만 남아 오늘날의 ‘秋’ 자가 되었다. 그래서 추호(秋毫, 털끝처럼 미세함), 만추(晩秋), 추상(秋霜) 같은 말 속에는 단순히 곡식만이 아니라, 곤충 소리에 귀 기울이던 고대인의 감각이 함께 녹아 있다. □ 겨울 - 차가움과 탯줄, 冬 겨울은 차갑고 고요하다. 그런데 갑골문 속 冬은 의외로 갓난아이의 탯줄을 닮은 형상에서 출발했다. 둥글게 휘어진 선이 마치 배꼽과 탯줄을 연결한 듯하다. 왜 겨울에 탯줄일까?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은 바로 “춥다”는 것이었다. 고대인은 이 신체적 체험을 겨울이라는 계절에 빗댄 것이다. 금문에서는 그 안에 해(日)가 들어가 ‘계절의 한 시점’을 강조했고, 소전에서는 해 대신 얼음을 뜻하는 부호(冫의 전신)가 자리 잡았다. 해서에서는 위쪽의 움직임 표지 夂와 좌측의 冫이 결합해 오늘날의 冬이 되었다.([그림 18] 冬 참조) 그래서 동계(冬季), 동면(冬眠), 월동(越冬) 같은 단어에는 단순히 추위 이상의 삶과 탄생의 기억이 겹겹이 깔려 있다. □ 문자에 새겨진 시간의 철학 춘하추동, 이 네 글자는 갑골문에서 출발해 금문, 소전, 해서로 이어지며 점점 간결해졌다. 처음에는 그림 같은 도상(icon)이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부수와 구조가 정제되며 체계적인 문자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이 단순히 필기 효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관찰(햇살, 초목, 곤충, 추위)과 인간의 체험(더위에 지친 몸, 아기의 탯줄)이 문자로 응축되었고, 그 의미가 세대를 거쳐 농경적·사회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춘추전국(春秋戰國)’이라든가 ‘하계 올림픽(夏季)’,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 ‘동지(冬至)’처럼 당연하게 쓰지만, 그 뿌리에는 고대인의 감각적 경험과 생명에 대한 통찰이 배어 있다. □ 오늘의 독자에게 이제 “춘하추동”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은 단순히 사계절을 나열한 말이 아니다. 씨앗이 움트는 새싹, 더위에 지친 몸, 귀뚜라미 소리, 아기의 탯줄 같은 구체적 체험이 문자로 응고된 언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글자 하나하나는 사실 자연과 인간이 나눈 오래된 대화의 기록이다. 그래서 한자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뜻을 아는 일이 아니라, 그 속에 새겨진 수천 년 전 사람들의 감각과 세계관을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춘하추동은 시간의 이름이자, 인간과 자연이 맺어온 관계의 압축 파일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순간, 우리는 언어를 넘어 삶과 문화의 깊은 층위에 닿게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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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글자 속에 새겨진 계절의 기억(春夏秋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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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에 새겨진 나침반(東西南北)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동서남북’을 너무나 당연하게 쓴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 서쪽은 해가 지는 곳, 남쪽은 따뜻한 곳, 북쪽은 차가운 곳. 그러나 이 네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곰곰이 물어본 적이 있는가. 방향이라는 추상 개념이 문자로 기록된 것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고대인의 삶과 도구, 그리고 눈앞의 자연을 관찰한 결과였다. 이에 갑골문 해석은 흥미로운 시각을 던져준다. 전통적 해석은 ‘동(東)’을 나무와 태양으로, ‘서(西)’를 새의 보금자리로 풀이하지만, 이 강연은 생활사적 흔적에 주목한다. 즉, 방향 문자는 일상 도구와 행위에서 비롯되었고, 후대에 의미가 정제되어 오늘날의 동서남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 동(東) - 자루를 메고 떠난 사냥꾼 갑골문 속 ‘東’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무(木)와 해(日)를 합친 모양이 아니다. 오히려 굵은 막대와 잔가지를 엮고 짐승 가죽으로 씌운 자루의 그림과 닮았다.([그림 17] ‘東’ 참조) 고대인에게 자루는 삶의 필수품이었다. 사냥으로 얻은 고기, 채집한 열매를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도구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루가 해 뜨는 쪽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냥과 채집은 이른 아침, 동쪽에서 떠올리는 태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자연스레 ‘자루’라는 그림은 곧 해 뜨는 방향, 동쪽을 뜻하게 되었다. 그 후 문자 변천의 과정을 거치면서, 갑골문의 자루 그림은 금문과 소전에서 도식화되었고, 해서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가 쓰는 ‘東’자가 되었다. 이처럼 문자 속 자루 하나가 인류의 동쪽 인식의 뿌리가 되었으니, 동방을 ‘해 뜨는 쪽’으로 이해한 관습이 단순한 천문학적 관찰을 넘어 생활 도구와도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 서(西) - 물항아리에 깃든 석양 ‘西’자는 흔히 둥근 새집 속 새가 날아드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갑걸문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홍산문화의 채색 토기, 즉 물 항아리 그림과 ‘西’자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그림 17] ‘西’ 참조) 고대 농경사회에서 하루의 마지막은 물과 함께 정리되었다. 사냥에서 돌아와, 밭일을 마치고, 저녁을 준비하는 시각. 그때 물항아리가 중요한 도구로 등장했다. 해가 지는 서쪽은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풍경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서쪽(西)’은 단순한 방위가 아니라, 하루가 저무는 시간과 행위를 상징했다. 이후 ‘서양, 서구’ 같은 의미로 확장되었지만, 그 기원에는 물항아리를 들고 석양을 바라보던 고대인의 일상이 스며 있다. □ 남(南) - 악기와 따뜻한 바람 ‘남쪽’은 의외로 음악과 관련이 깊다. 은허에서 출토된 고대 악기 모양의 도상이 곧 ‘南’의 초기 형태라는 해석이다.([그림 17] ‘南’ 참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발음이다. 고대 중국어에서 ‘南’[남]과 ‘暖(따뜻하다)’[난]의 발음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악기의 이름이 따뜻한 방향, 곧 남쪽을 가리키는 말로 차용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남쪽을 따뜻한 지역으로 인식한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북반구에서 남쪽은 햇볕이 강하고 기후가 온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골문 속 남자는 단순히 기후적 특징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던 악기의 이미지와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문자에 담긴 남쪽은 따뜻한 바람처럼, 음악처럼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향이었다. □ 북(北) - 그림자의 방향 네 방향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北’이다. 갑골문 속 ‘北’은 등진 두 사람처럼 보인다. 왜 사람 둘이 서로 등을 지고 있을까?([그림 17] ‘北’ 참조) 설명은 이렇다. 고대인은 늘 남쪽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남쪽을 마주할 때, 사람의 그림자는 북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곧, 그림자가 지는 방향이 북쪽이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문자의 형태로 옮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 둘이 서로 등을 지고 선 형상으로 단순화한 것이 오늘날의 ‘北’자가 되었다. 북쪽은 차갑고 음울한 방향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갑골문 속 북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태양과 사람, 그림자의 구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상징이었다. □ 문자 변천과 해석의 여지 동서남북 네 글자는 갑골문에서 출발해, 금문과 소전, 해서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처음에는 그림에 가까운 표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단순화·도식화되었다. 강연자는 이 과정에서 주류 문자학의 해석, 특히 ‘동=나무와 태양’ 같은 전통 설명에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대신 고고학 유물, 생활 도구, 풍습을 바탕으로 새 해석을 제안했다. 물론 이는 추정과 상상력을 포함한다. 따라서 문자학·고고학의 더 많은 증거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문자는 삶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동서남북은 단순한 나침반의 방위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이 들었던 자루, 썼던 항아리, 울려 퍼지던 악기, 그리고 태양 아래 드리운 그림자의 기억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문자라는 껍질 속에 간직한 채 오늘도 “동쪽 해가 떴다” “서쪽 하늘이 붉다” 말하고 있다. 이제 동서남북을 떠올릴 때, 단지 지리적 방향만이 아니라 그 속에 새겨진 고대인의 삶과 상징을 함께 느껴보면 어떨까. 문자가 곧 문화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쓰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새로운 풍경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한자는 풍경이요, 스냅샷이요, 압축 파일인 것이다. □ 한눈에 보는 동서남북 문자 기원 ㅁ동(東) : 자루 그림 → 해 뜨는 쪽(사냥·채집의 시작) ㅁ서(西) : 물항아리 그림 → 하루 끝, 해 지는 쪽 ㅁ남(南) : 악기 모양 → 따뜻한 발음과 연결 → 남쪽 ㅁ북(北) : 사람+그림자 → 그림자가 향하는 쪽 → 북쪽 방향은 언제나 길을 찾게 해준다. 그러나 문자가 말하는 방향은 단순한 나침반의 좌표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의 눈과 손, 그리고 삶의 궤적이 새겨진 문화적 나침반이다. 오늘 우리가 동서남북을 부르는 순간, 사실은 수천 년 전의 사냥꾼, 농부, 음악가, 제사장의 세계와 조용히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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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에 새겨진 나침반(東西南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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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에 새겨진 동이족의 삶(學, 孫, 布, 妻)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매일 쓰는 한자는 단순히 뜻을 전하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의 삶과 습속, 주술과 의례, 노동과 놀이가 응축된 문화의 기록이다. 특히 갑골문 속에서 네 글자-學(배울 학), 孫(손자 손), 布(펼 포), 妻(아내 처)-의 기원을 살펴보면, 동이족의 생활 풍습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흔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 □ 學(학) - 윷판에서 시작된 학문 오늘날 ‘학교’의 ‘학(學)’은 배움, 교육을 뜻한다. 그러나 갑골문을 보면 그 뿌리는 의외로 점(卜), 그것도 윷점에서 비롯되었다. 자형을 보면 두 손이 막대기 네 개를 쥐고 있고, 그 위로 집(宀)이 얹혀 있다. 막대기 네 개는 오늘날의 윷과 꼭 닮았다.([그림 16] ‘學’ 참조) 즉, ‘학’이란 원래 ‘윷점을 배우는 집’이었다. 고대 동이족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윷을 던지고 점을 치며 우주의 이치를 탐구했다. 점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세상 이치를 해석하는 지적 훈련이었다. 은나라 시절, 이 글자는 학문을 닦는 관청의 이름으로 쓰였고, 한나라에 이르러 중앙 교육기관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 ‘학교’라는 개념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설날마다 즐기는 윷놀이가 수천 년 전의 윷점과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이다. 놀이로 남은 윷이 사실은 학문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배운다(學)’는 말 속에 이미 동이족의 놀이와 점술, 그리고 학문의 기원이 함께 숨어 있는 것이다. □ 孫(손) - 탯줄과 새끼줄에 담긴 자손의 의미 ‘손자 손(孫)’의 갑골문을 보면, ‘아들(子)’과 더불어 배꼽에서 이어지는 선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탯줄이다. 아이와 어머니를 잇는 생명의 끈이 바로 자손(子孫)의 연속성을 상징한 것이다.([그림 16] ‘孫’ 참조) 동이족은 출산 후 집 대문 앞에 새끼줄을 걸고, 고추나 솔가지를 달아 아이의 성별을 알렸다. 새끼줄은 부정을 막는 주술적 도구였고, 동시에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표식이었다. 지금도 설이나 장례 때 대문에 금줄을 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 ‘孫’의 변천을 보면, 처음에는 탯줄 모양이 강조되다가, 점차 ‘작을 소(小)’와 결합하며 ‘이어짐, 계승’이라는 의미가 굳어졌다. 그래서 손자는 단순히 자녀의 다음 세대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혈맥과 삶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문자 속 탯줄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가 자손을 ‘대(代)를 잇는다’고 말할 때 그 깊은 뿌리를 전해주고 있다. □ 布(포) - 다듬이질 소리에 남은 기억 ‘펼 포(布)’는 오늘날 ‘배포하다, 보급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은자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두 손에 방망이를 들고 천을 두드리는 모습, 곧 다듬이질이다.([그림 16] ‘布’ 참조) 고대 동이족 여성들은 짠 천을 두드려 반듯하게 펴고 매끈하게 만들었다. 그 리듬 있는 소리와 동작이 글자에 남아 ‘布’가 되었다. 다듬이질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 여성들의 생활을 이끄는 리듬이자 노래였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포(布)’의 발음은 우리말 ‘배’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고대에는 ‘괴 → 배’로 발음이 변해왔는데, 직물을 펴고 나누는 행위가 ‘배(포)’라는 말로 이어졌을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포포하다’ 대신 ‘배포하다’라고 한다. 문자 속 다듬이질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발음과 뜻에 남아 있는 것이다. □ 妻(처) - 머리를 올린 여인의 상징 마지막으로 ‘아내 처(妻)’를 보자. 갑골문에서 妻는 무릎 꿇은 여인 위에 손이 얹히고, 머리에 장식이 얹힌 모습이다. 이는 ‘머리를 올린 여성’을 가리킨다.([그림 16] ‘妻’ 참조) 동이족 사회에서 머리를 올리는 행위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소녀에서 성인 여성으로 넘어가는 성인식, 그리고 혼인 의례에서 여인은 머리를 올렸다. 머리를 올린다는 것은 곧 성숙, 결혼, 새로운 역할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 풍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조선시대까지도 혼례 때 여인이 쪽을 찌는 관습으로 남았다. 문자 속에 담긴 상징이 수천 년 뒤의 생활까지도 영향을 준 셈이다. 그래서 妻라는 글자는 단순히 아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의 인생 전환점을 기록한 문화적 표지였다. □ 문자 속에 남은 동이족의 삶 네 글자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한자는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대인의 생활 풍습과 주술, 놀이와 노동이 굳어져 남은 문화의 화석이다. 學은 윷판에서 하늘의 뜻을 배우던 점술에서 출발해, 오늘날 ‘학교’로 이어졌다. 孫은 탯줄과 새끼줄에서 비롯되어, 자손 번영과 생명의 연속을 상징했다. 布는 다듬이질의 소리와 동작에서 나와, ‘펼치고 나누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妻는 머리를 올린 여인의 모습에서 시작해, 성인식과 혼례의 풍습을 문자에 새겼다. 이 글자들은 모두 동이족의 삶과 직결되어 있으며, 지금도 우리의 언어와 풍습 속에 숨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 오늘의 우리에게 우리는 문자 속에서 과거를 읽는다. 學, 孫, 布, 妻라는 네 글자는 동이족의 놀이와 주술, 노동과 혼례가 어떻게 언어와 문화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언어와 풍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설날 윷놀이를 하면서, 집 앞에 금줄을 보면서, 다듬이질 소리를 떠올리면서, 혼례 때 쪽진 머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고대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는 죽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흔적이며, 문화의 기억이고, 시간을 건너온 메시지다. 學, 孫, 布, 妻 네 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희가 쓰는 말과 글 속에는 이미 우리의 삶이 남아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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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에 새겨진 동이족의 삶(學, 孫, 布, 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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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옛이야기(公, 私, 古, 今)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쓴다. 하지만 정작 ‘공(公)’, ‘사(私)’, ‘고(古)’, ‘금(今)’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드물다. 고대 중국의 문자, 특히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이 네 글자가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몸과 생활, 그리고 구체적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글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담은 문화적 산물이었다. □ 공(公) - 남성 집단의 방귀에서 시작된 ‘공평’ 오늘날 ‘공(公)’은 공정하다, 공적인 일,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갑골문 속 ‘공’의 기원은 의외로 익살스럽다. 당시 모계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은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지내야 했다. 개인의 방이나 물건은 따로 없었고,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이 기본이었다. 이 집단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현상, 바로 방귀 소리를 공유하게 된다. 갑골문 학자들에 따르면, 엉덩이와 입 모양을 결합한 그림이 ‘공’의 원형으로, 집단적 삶에서 울려 퍼진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이는 ‘함께 나누는 삶’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그림 15] ‘公’ 참조) 방귀 소리에서 출발한 ‘공’은 ‘공유하다’, ‘공개하다’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공평하다’는 가치로 발전했다. 또한 남성 집단에서 존칭으로 쓰이다가 ‘공자(公子)’, ‘공짜’라는 호칭에도 스며들었다. ‘공’의 뿌리를 알고 보면,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말하는 ‘공정’이라는 말도 가볍게 쓰기 어려워진다. 본래 ‘공’은 집단 속에서 모두가 나누는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사(私) - 올가미에 걸린 짐승에서 개인 소유로 ‘공’의 반대말인 ‘사(私)’는 어디에서 왔을까. 갑골문은 그 답을 사냥 장면에서 찾는다. 글자의 원형은 올가미에 걸린 짐승 그림이었다. 짐승이 잡히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해야 했고, 여기서 ‘사사로운 소유’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그림 15] ‘私’ 참조) 이후 글자에는 ‘벼 이삭(禾)’이 더해졌다. 농경 사회에서는 곡식 한 알 한 알이 곧 개인의 재산이었기에, ‘사’는 점차 개인 소유, 사사로운 권리, 사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글자가 되었다. 오늘날 ‘사감(私感)’, ‘사견(私見)’, ‘공사(公私) 구분’ 같은 말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즉 ‘사’는 단순히 혼자만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를 가리키는 실질적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 □ 고(古) - 되돌릴 수 없는 말, 이미 지나간 시간 ‘고(古)’자는 흔히 ‘옛날’을 뜻한다. 갑골문을 보면 그 원형은 입(口)에서 나온 말이 잘려나가는 모습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이는 곧 이미 일어난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상징한다.([그림 15] ‘古’ 참조) 그래서 ‘고’는 시간이 지나며 ‘옛날’, ‘전통’, ‘고문(古文)’, ‘고서(古書)’ 같은 의미로 확장되었다. ‘말은 곧 과거가 된다’는 직관이 문자의 근원이 된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통과 과거를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한 번 지나간 시간의 무게를 인정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 금(今) - 막 끝난 순간, 바로 지금 ‘금(今)’은 현재를 뜻한다. 갑골문 속 그림을 보면 다소 난해하지만, 남성의 생식기와 작대기 기호가 결합된 모습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결’이나 ‘끝남’을 상징하는 표시로 해석한다.([그림 15] ‘今’ 참조) 즉 ‘금’은 어떤 일이 막 끝난 순간, 완료된 상태를 나타냈다. 그 연장에서 ‘지금’, ‘오늘’, ‘올해’라는 시간 개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고금(古今)’이라는 말은 곧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 ‘금’의 뿌리를 알고 보면 ‘현재’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막 끝난 일 위에 서 있는 찰나라는 점이 흥미롭다. 순간순간이 과거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문자학은 우리에게 일깨운다. □ 공과 사, 고와 금 - 삶에서 비롯된 문자들 이처럼 ‘공과 사, 고와 금’은 단순한 철학적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의 생활, 신체적 경험, 사회적 질서에서 탄생한 구체적 산물이었다. ‘公’은 집단적 삶에서 비롯된 공유와 공평의 가치, ‘私’는 개인 소유와 사적인 감정의 표현, ‘古’는 되돌릴 수 없는 말과 과거, ‘今’은 막 끝난 순간, 곧 지금의 시간. 한자의 기원을 알면, 우리가 쓰는 말의 뿌리에 얼마나 생생한 삶의 흔적이 스며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사(公私)의 구분’은 정치와 기업,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사회적 분노가 커진다. 이는 고대인들이 이미 공과 사를 구분하려 애썼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또 ‘고금(古今)’이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 위에 서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갑골문 속 글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과거의 무게를 기억하며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있느냐.”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기록한 흔적이며, 역사를 담은 상징이다. ‘공과 사, 고와 금’ 속에 새겨진 고대인의 경험과 지혜는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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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옛이야기(公, 私, 古, 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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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정치, ‘정(正)’을 잃고 방황하다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정치 뉴스는 피곤하다. 규범은 무너지고, 도덕은 잊혔으며, 정직과 원칙은 자취를 감췄다. 정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상실했고, 정당은 권력을 쫓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시민들의 냉소가 깊어지는 이유다. 정치인은 마치 배가 산으로 가듯 제 갈 길을 잃었다. 비전도, 원칙도 없이 권력욕만 쫓는 현실은 참담하다. 대통령 후보에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왜 대통령이 되려 하는가.” 둘째,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가 내세우는 공약과 화려한 말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정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을, 오래된 갑골문 속 글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 ‘정(正)’ - 똑바로 가는 발걸음 ‘정(正)’의 갑골문을 보면 놀랍게도 한 사람의 발자국 모양에서 출발한다. 목표를 향해 “곧게 나아가는 발걸음”이 바로 ‘정’의 원형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걷는 동작을 넘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치가 담겼다. ([그림 14] ‘正’ 참조) 또 다른 맥락에서는 회초리를 든 모습도 함께 들어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선 이를 바르게 돌려세우는 의미다. 따라서 ‘정’은 올곧음과 추진력을 동시에 품은 글자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방향을 바로 잡아주고, 추진력을 실어 사회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 목표 없는 정치는 제자리만 맴돌 뿐이다. 추진력 없는 정치는 제도만 남기고 무너진다. □ ‘민(民)’ - 눈을 깔아야 했던 사람들 그렇다면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갑골문에서 ‘민(民)’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림 14] ‘民’ 참조) 고대 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백성은 권력자 앞에서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은 단순한 ‘사람(人)’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눈을 깔아야 했던 낮은 신분의 백성을 가리켰다. 그래서 우리는 ‘인민(人民)’이라는 표현을 쓴다. 권력자와 구별되는 보통 사람들, 즉 정치의 대상이자 동시에 정치의 주체가 되는 존재다. 정치가 바로 서려면, 권력자는 백성을 위하는 ‘인의(仁義)’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 ‘관(官)’ - 집 안의 엉덩이 ‘관(官)’의 기원은 조금 익살스럽다. 갑골문 속 관(官)은 집 모양 안에 놓인 엉덩이 그림에서 시작했다. 이는 우두머리가 집 안에 앉아 지방을 다스리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 14 ]‘官’ 참조) 점차 ‘관’은 벼슬아치, 나아가 행정기관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본질은 여전히 같다. ‘관료’는 집 안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돌보고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관료제는 때때로 집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폐쇄적 ‘엉덩이’로 변질되곤 한다. □ ‘군(軍)’ - 병거를 둘러싼 병사들의 집단 ‘군(軍)’은 병거를 중심으로 둘러선 병사의 무리에서 유래했다. 전쟁의 현장에서 집단적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후 군사, 군대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그림 14] ‘軍’ 참조) 정치에서 군대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백성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때로는 권력을 지키는 칼이 되었기 때문이다. ‘군’의 기원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군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백성을 위한 병사 집단이었는지, 권력자를 위한 무력 장치였는지. 정치가 ‘정(正)’을 잃으면 군대 또한 본래의 역할을 잊는다. □ 정치의 본질 - 목표, 추진력, 그리고 관계 이처럼 ‘정(正)’, ‘민(民)’, ‘관(官)’, ‘군(軍)’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정치의 뼈대를 구성하는 개념들이다. 정치란 목표를 향해 똑바로 가게 하고(正), 잘못된 길을 고쳐주는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그 대상은 눈을 깔며 살아야 했던 보통 백성들(民)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집단은 행정을 맡은 관료(官)와 공동체를 지키는 군대(軍)다. 네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정치가 바로 선다. 오늘의 정치는 이 균형을 잃었다. 백성을 외면하고, 관료는 책임 대신 기득권을 지키며, 군은 정치화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정치 자체가 ‘정(正)’의 본질을 잃었다. 목표와 추진력이 없는 정치가 백성과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수 있겠는가. □ 맺으며 - 다시, 정치를 묻다 결국 정치에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복잡하지 않다. 대통령 후보, 국회의원, 정치인 누구에게나 던질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권력을 잡으려 하는가?” “그 권력을 잡아 무엇을 하려 하는가?” 갑골문 속 오래된 글자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정치란 곧게 나아가는 발걸음이며, 잘못된 길을 고쳐주는 힘이다. 백성을 주인으로 삼고, 관료와 군대는 그 뒷받침이어야 한다. 정치가 이 본질을 잃는 순간, 사회는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오늘 우리의 정치는 다시 ‘정(正)’을 배워야 한다. 똑바로 가는 발걸음, 회초리로 바로잡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을 향한 마음. 고대 갑골문이 새겨진 글자 속에서, 정치가 되찾아야 할 길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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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정치, ‘정(正)’을 잃고 방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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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오래된 윤리학 - ‘인(仁)’과 ‘의(義)’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흔히 공자를 떠올리면 “인(仁)”이라는 글자를 함께 떠올린다. 공자가 평생토록 강조한 핵심 덕목이자,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근본 기둥이다. 맹자 역시 공자의 계보 위에서 ‘인의예지’ 네 가지를 세우며, 그 가운데 특히 ‘의(義)’를 인(仁)과 나란히 놓았다. 그래서 “어진 마음과 의로운 행동”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윤리의 상징처럼 쓰인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 하나. 과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과 “의”라는 글자의 의미는 본래부터 그랬을까? 대부분의 교과서 해설은 한자의 모양을 단순히 분석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仁)은 사람(人)과 둘(二)의 결합이다. 두 사람이 마주해 있는 모양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짊’이 생겼다.” 얼핏 그럴듯하다. “의(義)” 역시 ‘양(羊, 희생 제물)’과 ‘나(我)’가 합쳐져,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뜻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는 모두 지금의 한자 모양을 근거로 한 후대적 추측에 가깝다. 실제로 은자(殷字)를 들여다보면, 인(仁)과 의(義)의 뿌리는 훨씬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그림에서 시작한다. 글자가 태어나던 순간, 고대 동이족의 삶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 ‘인(仁)’ -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 은자에 나타난 ‘인’의 초기 형태를 보자. 얼핏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다. 사람의 정강이 부분에 난 다리털, 그리고 심장 모양이 결합된 형상이다. 다리털은 많음을 상징했다. 그래서 여기서는 ‘천(千)’, 곧 무수히 많다는 뜻으로 쓰였다. 심장은 말 그대로 마음, 정서, 동정심을 나타낸다. 이 두 요소를 합쳐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단순히 ‘사람 두 명’이 아니라, 무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품는 너그러움과 연민, 곧 ‘어짐’이 글자의 기원인 셈이다.([그림 13] ‘仁’ 참조) 이후 갑골문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의미가 더 확장된다. ‘천 개의 마음’ 대신에 ‘윗 상(上)’ 기호가 들어가, 윗사람이 백성을 향해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발전한다. 다시 말해, 임금이 여러 백성을 향해 자애로운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정치적 함의가 덧붙여진 것이다. 즉, 인(仁)은 공자보다 수천 년 앞서 이미 동이족 사회에서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자가 새롭게 창안한 덕목이 아니라, 문자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사유의 계승이었다. □ ‘의(義)’ - 정의를 세우는 무기 맹자가 강조한 또 다른 핵심은 ‘의’였다. 흔히 우리는 ‘의’를 추상적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은자 속 ‘의’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이다. 은자를 보면, ‘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윗부분은 ‘수양’이라 불리는, 집단 내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는 도상이다. 아래는 ‘戈(과)’라는 창 모양, 당시 특수한 무기였다. 이 둘을 합쳐 ‘의’는 “집단 내 질서를 지키고 옳은 일을 위해 무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의(義)는 단순히 마음속의 정의감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무기를 들고라도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였다. 사회 질서를 세우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적극적 윤리의 실천이 바로 ‘의’의 뿌리였던 것이다.([그림 13] ‘義’ 참조) □ 동이족이 남긴 철학적 사유 이처럼 은자 속 ‘인(仁)’과 ‘의(義)’는 사람과 사회, 마음과 행동의 결합을 보여준다.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어진 사람’, ‘질서를 세우기 위해 무기까지 드는 정의’는 추상적 덕목을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장면 속에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흥미롭게도 후대 서양 철학자들이 논한 사회계약론이나 정의론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 권력과 정의의 균형,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 질서의 유지라는 질문은 이미 수천 년 전 문자 속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셈이다. 공자와 맹자의 사유는 이러한 오랜 축적 위에서 다시 체계화된 것이다. □ 오늘의 의미 - 인의의 정신은 살아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인’과 ‘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민과 배려를 가리킨다. 자연재해 때 서로 돕는 손길,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대, 나와 다른 존재를 향한 공감은 모두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인간의 실천이다. ‘의’는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로 드러난다. 역사 속 의병 활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현대 사회에서 불의한 제도에 맞서는 집단적 저항도 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는 정신, 그것이 바로 의(義)다. 은자 연구는 단순히 글자의 원형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동이족이 남긴 윤리학의 맥락을 오늘에 불러오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인의예지”라고 말하는 개념은 수천 년 전 문자 속에서 이미 실천적 윤리 개념으로 형상화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 맺으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인(仁)과 의(義)의 해설은 대체로 지금의 글자 모양을 근거로 한 후대적 추측이다. 그러나 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仁)은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어진 사람’, 의(義)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무기와 권위를 동원하는 실천’이었다. 이 발견은 단순히 학문적 흥밋거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동아시아 사상의 뿌리가 단순한 도덕 훈계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장면에서 출발했음을 일깨운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는 교과서의 추상적 표어가 아니라, 사람과 사회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 규범이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불평등, 불공정, 분열의 문제 앞에서 “어진 마음”과 “의로운 실천”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낡은 구호가 아니다. 은자가 전해주는 오래된 그림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형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천 개의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은 옳음을 위해 무기를 들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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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오래된 윤리학 - ‘인(仁)’과 ‘의(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