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느 민족이든 과거를 돌아보면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이 교차한다. 한민족의 오랜 생활 풍습 가운데도 그렇다. 상투, 옷깃, 무릎 꿇어 앉는 자세, 때로는 무덤 속 순장 풍습까지.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오늘까지 이어져온 걸까?
갑골문, 고분에서 나온 옥인형, 고구려 벽화, 고려와 조선의 기록들을 교차해 읽으며, 동이족과 한민족의 문화적 연속성을 추적해보면,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완전히 동일하다 말할 순 없다. 그러나 풍습과 생활 속 흔적은 생각보다 많이 이어져 있다.” 이는 단순한 민족주의의 외침이 아니라, 차근차근 증거를 꿰는 실증적 접근이다.
□ 왜 동이족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고조선, 부여, 고구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우리의 옛 나라들이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면 기록은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다. 삼국지의 몇 줄 기록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후대의 서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헌이 부족하다면, 물증으로 보완해야 한다. 갑골문, 옥인형, 무덤 유물, 벽화, 고려도경 같은 외부인의 기록까지 모아 서로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의 퍼즐 맞추기와 같다. 문헌만으론 모양이 안 나오던 그림이, 유물과 문자와 풍습을 함께 놓아보면 윤곽을 드러낸다.
□ 상투와 옷깃, 생활 속의 흔적
첫 번째 사례는 상투다. 갑골문 가운데 ‘지아비 부자’(夫)라는 글자를 보면 머리 위로 머리를 틀어 올린 듯한 모습이 보인다. 상나라 옥인형에서도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고구려 벽화 속 인물이나 신라 토우에도 상투가 그려져 있다. 진나라 병마용의 머리 모양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진의 군사들은 속발, 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렇게 문자와 유물, 벽화가 한데 모이면, 상투라는 풍습이 단순한 ‘머리 모양’이 아니라 동방 세계의 문화적 표식이었음을 알게 된다.([그림 23] ‘夫’ 참조)
옷깃 방향도 흥미롭다. 갑골문과 고구려 벽화 속 옷깃은 왼쪽으로 여민 ‘좌임’이다. 반면 한나라의 유물은 ‘우임’이 주류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 이는 활쏘기와 연관이 있다. 좌임은 활을 당길 때 화살이 옷깃에 걸리지 않도록 고안된 궁수 문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스키타이 기마병들의 판금 갑옷도 좌임이었는데, 이 역시 활쏘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확산되면서 좌임은 ‘오랑캐의 풍습’으로 낙인찍히고, 대륙의 표준인 우임으로 수렴된다. 풍습이 정치·이데올로기와 만나 변용된 것이다.
□ 무릎 꿇은 옥인형과 ‘여자(女)’
은허에서 나온 작은 옥인형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 자세는 단순한 예배 동작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상 자세였다.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아 생활하던 시대, 무릎 꿇기는 자연스러운 기본 자세였다.
이 인형은 곧 갑골문의 ‘女’와도 연결된다. 여자의 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구부린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강조된 듯한 선까지 남아 있다. 문자란 결국 생활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맞는 경우도 드물다.
□ 앉는 풍속의 변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양반다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상·주·한 시대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어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대 이후 서역에서 ‘호자’라 불린 의자가 전래되며 앉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온돌의 보급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따뜻한 바닥 덕에 무릎을 꿇기보다는 다리를 풀어 앉는 습관이 자리잡은 것이다. 일본은 다다미 문화 덕에 무릎 꿇어 앉는 풍습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생활기술과 환경이 사람의 몸짓을 바꾸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 편두와 순장, 낯선 풍습의 그림자
편두(偏頭), 즉 납작한 머리 모양은 고대 기록마다 묘사가 엇갈린다. 어떤 사서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뒤통수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적고, 또 어떤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지증대사비… 자료는 제각각이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자의 인식·편견에서 나온 문제로 본다. 건륭이 남긴 비판적 언급도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풍습이 어땠든, 후대의 눈으로 본 모습은 언제나 가감과 왜곡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순장 풍습은 더욱 극적이다. 상나라 무덤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확연하다. 『삼국지』에도 부여에서 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벽화에도 피장자 곁을 지키는 듯한 인물상이 보인다. 신라의 지증왕은 공식적으로 순장을 금지했고, 고려 시대에 이르면 법으로 철저히 막는다. 그러나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실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풍습은 권력과 사회구조의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사라진다.
□ 왜 바뀌었을까?
풍습의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교류다. 스키타이, 페르시아, 몽골과의 만남이 머리 모양, 옷차림, 무기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사상이다. 유교의 확산은 옷깃 하나까지도 ‘문명 vs 오랑캐’라는 틀로 재해석했다. 셋째는 생활기술이다. 의자와 온돌 같은 작은 발명품이 사람들의 몸짓과 풍습을 완전히 바꿨다. 넷째는 정치다. 순장 금지 같은 국가적 법령이 사회 풍습을 강제로 바꿔놓았다.
□ 연속성과 단절의 기억
그렇다고 해서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을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교류와 전쟁, 제국의 흥망이 있었다. 그러나 상투, 좌임, 무릎 꿇기, 편두, 순장 같은 풍습이 문자와 유물, 벽화, 기록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보여준다.
문화는 시간의 겹을 통과하며 남고, 사라지고, 또 변형된다. 갑골문과 유물은 그 겹 사이에 박힌 단서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꿰어내어, 한 민족의 옷자락을 다시 펼쳐보는 것이다.
□ 오늘의 함의
흔히 역사는 먼 과거의 일이어서 우리와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상투를 틀던 손길, 옷깃을 여미던 습관, 무릎 꿇어앉던 자세, 그리고 순장에 담긴 사회 질서까지……. 모두가 오늘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민족 정체성이란 단순히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활 속에 스며든 몸짓과 관습, 그 변형과 지속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흰옷을 고집하듯, 상투나 옷깃, 앉는 방식 하나에도 수천 년의 이야기가 겹겹이 배어 있다.
결국 역사를 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오래된 몸짓을 발견하는 일이다. 동이족을 다시 보는 것은, 그 속에서 현재 우리를 다시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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