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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노론의 300년 권력과 우리나라의 정당 정치
    [교육연합신문=김대중 전 목포시의회 의장] 조선이 왜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느냐? 사색당파(붕당) 때문에 망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붕당은 조선시대 민주주의 제도였다. 조선왕조 500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였다. 잘 짜여진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유지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권력구조는 왕권과 신권(臣權)이 5:5로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합리적인 구조였다. 이 때 붕당이 민주주의 정당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광해군이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중립(실리)외교를 실시하자, 서인이 명에 사대해야 한다는 명분 등으로 인조반정(쿠데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후 사실상 서인의 주류 세력인 노론의 1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권력이 오래가면 썩기 마련이다. 결국 조선은 패망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매국노 대다수가 노론이었다. 이 노론 세력은 을사늑약 이후 41년간 일제 치하의 지배세력으로 있다가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다시 주류 세력이 되었으며, 산업화 시대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주류로 3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어느 한 분야도 친일 잔재가 제대로 청산된 곳이 없다.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 하나 없는 나라이고, 친일파의 동상이 여러 대학에 버젓이 세워진 나라이다.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려는 국가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민족. 민주주의 세력과의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관계없이 300여 년 이어온 이 노론 세력이 사회 주류세력이다 보니 이런 갈등이 지속된다. 인조반정 이후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1당 독재가 바뀐다. 그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노론 주류 세력과의 갈등이 증폭된다. 검사들과의 대화 때 “나랑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300여 년 동안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노론 적폐세력이 대통령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 이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적폐현상은 더 심화되었고 고이게 되면서 촛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꾸준하게 지적해 온 이덕일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은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이 낯설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선장과 선원이 공모해서 승객을 버리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진입 명령을 받은 해경이 진입하지 않은 것은 광복 직후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한 반역사적 반문명적 현실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친일 세력의 뿌리는 망해가고 있는 명나라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에 닿아있고,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독살한 세력에 닿아있다. 외국 침략자에 붙어서 매국 행위를 한 자들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광복된 대한민국의 공직자로 부활했을 때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그야말로 사적, 집단적,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익 추구가 ‘관(官)피아’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온갖 학벌, 지역 카르텔로 나타났고, 그 적폐가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300여 송이의 희생으로 한국 사회를 덮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는 태극기 부대 등 각종 집회 주도 세력과 남.북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호도하는 집단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경제가 무너진 것처럼 과장하여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있다. 자기들의 위기를 나라의 위기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제도 개혁의 의지를 가진 정권, 교육, 언론, 단체를 여전히 종북좌파로 매도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나라를 가져다 북한에 바치려 한다는 그들의 거짓에 속고 또 속는 국민들을 총알받이 삼아서 재집권을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노론의 후예들, 친일파의 후손들, 군부독재의 아들들의 소행이 어쩌면 그리도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끝내는 멸망시켰던 노론 벼슬아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는지! 이러한 300여 년 노론세력의 적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정당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 정당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갈등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기존 양당의 독과점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낮은 투표율이 보여주듯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독과점이 지속되는 이유는 새로운 정당의 국회 진출을 막고 현행 선거제도(승자독식, 지역주의제)에 있으며, 그 책임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생긴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끝내 이를 고치지 않으려는 퇴행적 정치세력에 있다. 지금 국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선거법 개정이 한계는 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이마저도 못해낸다면 300여 년 동안 집권하고 있는 노론붕당은 계속될 것이고 촛불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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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1
  • [기고]『소액다수의 정치후원금』으로 깨끗하고 건전한 민주정치를...
    [교육연합신문=장성군선거관리위원회 유명숙 기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선정하는 8월 『이달의 좋은프로그램상』으로 MBC 『같이펀딩』이 선정되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여러 어려운 분야의 가치있는 아이디어를 시청자들이 보고 크라우드펀딩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배우 유준상의 태극기사랑으로 시작된 『태극기함 프로젝트』는 중소기업상공인들과 함께 펀딩하여 모은 12억원 모두 독립유공자에게 기부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태극기함은 홈쇼핑에서 높은 판매율을 올리고 있다. 꼭 필요하고 해야할 일이지만 한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태극기에 대한 관심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걸 알수 있다. 또한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음을 알게된다. 국민들의 기부로 모인 『소액다수의 정치후원금』은 “티끌모아 태산”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예이다. 더하여 정치인에게 자신을 돌아보며 책임감을 가지고 정치에 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치활동에 대한 칭찬과 지지, 동의가 담겨 있는 일종의 정치인의 성적표 역할을 하게 된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정치활동에 소요되는 적지 않은 자금을 전적으로 조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불법적인 자금이 오고 간다면 이는 특정 세력에게 편향된 정치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깨끗하고 건전한 민주정치 발전의 시작을 위해서는 소액다수의 정치후원금 기부문화 정착이 필요하다. 정치후원금은 외국인 및 법인·단체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국회의원후원회의 후원금계좌로 기부하거나 선거관리위원회의 기탁금계좌로 기탁할 수 있으며, 정치후원금센터(www.give.go.kr)를 이용하여 신용카드, 신용카드 포인트, 계좌이체, 휴대폰결제 등 다양한 방법을 선택하여 기부할 수 있다. 정치후원금을 기부하면 연말정산시 최고 10만원까지 전액 세액공제되며, 10만원을 초과하는 금액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국민들의 소중한 정치후원금은 세상을 가꾸는 노력이며, 깨끗한 정치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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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1
  • 교육적 성찰,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예전에 학교나 교실에는 ‘배워서 남주자’라는 슬로건이 자주 등장했다. 지금도 초·중등학교 학급의 고전적인 급훈으로 사용되는 이 글귀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자는 공동체의 금언이다. 자신의 배움을 본인만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학교에서는 사회의 빛과 소금인 큰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자 한다. 그래서 이 문구가 학생들에게 건전한 의식을 부여해 공동체와 국가를 위해 살아가는 민주시민이 되도록 하는 교육의 수단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 교육환경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가히 희망적이다. 아마도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더욱 진일보해 사회적으로 이타적인 인재로 살아갈 것으로 믿는다. 실제로 수많은 인재가 묵시적인 영향을 받아서 후에 자신의 배움을 필요한 사람들과 공유하거나 나눠 주는 이타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배워서 어떻게 쓸 것인가?󰡑 와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연계 질문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의식을 고취해야 하는 교육적 사명을 안고 있다. 필자가 미국 여행 중에 중남부 오스틴(Austin)에 위치한 텍사스 주립대학 캠퍼스를 둘러보면서 눈에 띄던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대학본부 건물 벽면에 크게 새겨진 핵심목표(Core Purpose)가 ‘To transform lives for the benefit of society(사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도록 자신을 전환하기)’였다. ‘진리탐구, 정의 추구’등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한 대학의 목표는 지성의 전당에서 학문을 익힌 인재들이 어떤 사람으로 변모할 것인가를 짐작게 했다. 그것이 바로 ‘배워서 남주자’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공동체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라는 이 메시지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동기를 각인시킨다. 이보다 바람직한 민주 시민교육이 있을까? 역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교육의 전당다웠다. 근래에 개봉한 영화 <증인>에서 자폐아인 주인공(지우)이 변호사 순호)에게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도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이 질문을 지금까지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던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영화 <증인>은 이 대사 한 마디를 중심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마음을 공략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진심을 녹인 대사 한 줄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증명해 보인다. 지우의 물음에 순호는 “노력해볼게”라고 대답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적어도 사람들이 순호와 같은 대답을 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한 곳이지 않을까? 경쟁을 위한 교육에서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인재를 육성할 수 없다. 지구상 유일한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는 공존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기에 신체적으로 더 강력한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이나 그 밖의 다른 인류를 물리치고 최후의 생존에 성공했다. 우리는 그러한 DNA를 가지고 있다. ‘승자독식 사회’나 ‘초경쟁사회’에서는 좋은 사람을 교육할 수 없다. 오직 살벌한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는 항상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냉철한 판단 아래 만족스런 답변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노력해볼게’라는 대답만이라도 늘 자신을 일깨우는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래야 배워서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이 되지 않고 배운 것을 남에게 베푸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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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9
  • 교육 가치의 변화, 우리가 살 길이다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미국의 오바마 전직 대통령은 여러 차례 한국의 교육열과 교사의 질적 수준을 언급하며 ‘한국 교육을 배우라’고 한껏 띄웠다. 그때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슬그머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이 지적한 사항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사실이었다. 올해 초 인기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보여줬듯 한국의 교육 현실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지나치게 긴 학습 시간, 창의력을 해치는 주입식 교육, 공교육을 능가하는 사교육비 등등, 사실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 익숙한 문제들이지만 외부인이 이를 간과하고선 그런 판단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성찰하게 된다. 그때마다 마음의 주름살은 늘어간다.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적인 우리 교육의 실상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는 마치 집안의 말썽꾸러기가 외지인으로부터 뜬금없이 효자로 인정받아 두리뭉실하게 둔갑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한민국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사교육 공화국이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9만 1000원에 달했으며 이는 2007년 이후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국가적으로 사교육비 총액은 19조 5000억 원으로 2012년 이후 최대치다. 두 말이 필요 없이 정부가 추진하는 공교육 강화 정책은 무용지물에 가깝다.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72.8%로 전년 대비 1.7%포인트 상승했다. 초등학생이 82.5%로 가장 높았고 중학생 69.6%, 고등학생 58.5%였다. 문제는 저소득층의 참여율은 증가했지만 고소득층 비율은 오히려 감소한 것이다. 이는 한때 교육열이 높은 상류·중산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교육이 이제 학령과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가정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사교육을 시키겠다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공교육 불신은 사교육 시장을 키우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방과후학교’ 비용은 2015년부터 계속 줄어들고 있다. 자율학습을 위해 제작된 EBS 교재를 구매하는 비율 역시 5년째 감소 추세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방과후학교가 저렴하지만 교육의 질에서는 사교육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또한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사회 분위기도 사교육 시장 의존도를 높이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는 자녀가 적을수록 1인당 사교육비가 높은 것에서도 확인된다. 부모가 자녀의 생존경쟁을 위해 올인하는 우리와 같은 사회에서는 공교육 강화만으로 사교육 의존을 끊을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의 교육격차는 기회균등, 제도 공정성만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근본적으로 교육 가치가 바뀌어야 한다. 대학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돼선 안 된다. 부모의 돈과 정보력이 아닌 학생의 재능과 특기, 꿈이 대학의 선택 기준이 돼야 한다. 공교육 내실화는 사교육을 경감할 수 있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대책이다. 그래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사를 신뢰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방과후학교를 활성화하고 돌봄교실을 확충하는 정책은 지속해서 추진돼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는 더디더라도 성적 지상주의와 학벌주의가 철폐되고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병행돼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 사교육비 때문에 자녀를 갖기를 꺼린다는 현실, 고급 장성이 자녀 한 명의 사교육비 때문에 가정의 생계유지가 힘들다는 현실은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갈 차세대에 인구감소를 초래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국가적 운명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길은 바로 교육 가치의 변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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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9
  • [기고] 어른들이 전(傳)해준 학교폭력
    [교육연합신문=윤창훈 기자] 아이들의 문화는 어른들의 문화를 닮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사회문화를 이끌어 나가고, 아이들은 좋든 싫든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살며 배워나간다. 인터넷의 보급과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문화를 접하기 쉬워졌고, 더 빨리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좋지 못한 문화를 더 빨리 배운다는 것이다. 서열, 차별, 권력과 같은 어른들의 나쁜 문화가 학교에서도 고스란히 보인다. 작년 4월경, 경기도 안성의 모 면장이 갑질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문제의 면장은 9급 운전직 주무관에게 갖은 폭언과 욕설을 일삼았고 사적으로 일을 부렸다. 주무관은 면장의 등쌀에 못 이겨 관용차로 술 취한 면장의 귀가를 책임졌으며,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한 명목으로 사비로 관용차 기름을 충당해야 했다. 면장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주무관은 결국 사직했고, 안성경찰서에 면장을 고소하면서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한편, 한 때 ‘빵셔틀’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모 인터넷사이트에서 확산된 이 용어는 음식인 ‘빵’과 인기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수송기 이름인 ‘셔틀’을 합성한 말이다. 교내에서 힘 있는 아이들이 힘없는 아이에게 빵이나 과자를 사오라 시키며 사적으로 부리는데, 이런 힘없는 아이들을 ‘빵셔틀’이라 부른 것이다. 이처럼, 학교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의 행태는 우리 어른들의 갑질문화와 무척 닮아있다. 어른들의 갑질문화나 아이들의 학교폭력 모두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에서 갑질문화라든지 학교폭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위아래를 철저히 구분 짓고 나보다 아래인 사람에게는 업신여기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교만한 생각에서 그런 행태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지난 2013년 SBS에서는 ‘학교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시사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당시, 학교폭력 사건을 전문적으로 맡았던 천종호 판사의 재판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여줬다.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던 아이들은 자신보다 강자인 판사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든 판사에게 잘 보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나 만화 등을 통해 흔히 봐왔던 위풍당당한 일진의 모습을 법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아이들이 권력과 서열부터 배워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작년 12월 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 불리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올해 7월 16일자로 시행 중에 있다. 우리 사회에 갑질문화가 만연했다는 반증으로써 씁쓸한 현실인 한편, 잘못된 사회문화를 정화하려는 의지가 엿보여 다행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은 우리 어른들이다. 학교폭력 문제를 아이들의 개인적인 일탈문제로만 판단하는 것은 무책임한 생각이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 했다. 학교폭력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전(傳)한 못된 문화라 할 것이다.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기에 앞서 우리 어른들의 못된 문화를 바로잡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 해남경찰서(서장 진희섭) 경무과 경무계 순경 한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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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9
  • [학생기고] 함께할게요, 기억할게요 - 광주숭일고 2학년 정유진
    [교육연합신문=정유진 기고] 국내 답사를 다녀왔지만 애초부터 서울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한일청소년 평화 교류단으로서 일본을 방문하여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하여 더 심화적인 내용을 배우고 올 예정이었지만, 한일 간 국제 정세가 악화되면서 안전 문제 상, 그리고 불매 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방문이 불가피하게 취소되었다. 그래도 우리 교류단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침울해하고만 있다면 일본에 우스운 모습만 보여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속한 회의로 서울 국내 답사가 결정되었고, 지금 이를 다녀와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보고서를 쓰려고 한다. 짧았던 2박 3일의 일정에서, 수요시위, 전태일 기념관, 효창공원, 민주인권기념관, 식민지 역사박물관, 국회의사당, 서대문 형무소, 광명동굴에 방문했고, 뮤지컬 <영웅>도 관람했다. 그 중에서 수요시위는 내가 가장 고대하던 일정이었다. 대책 회의에서 국내 답사 후보지 세 곳 중 서울을 택한 것은 수요시위에 꼭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위에는 전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시위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에 또 참여해보고 싶었다. 그 때 했던 시위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였다. 즐겁지만 질서정연한 분위기여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도 있지만, 그렇게 의사를 밝히고 문제를 알리는 시위에 참여하여 나중에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때의 보람이란, 설명하기에 벅찼다. 솔직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언제 해결될지 모른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비인간적이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때일수록 목소리를 높여 힘과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수요시위 날은 소나기가 너무나 자주 쏟아져서 너무나 습하고 힘들었다. 천막의 가장자리에서 물벼락을 맞기도 하며,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여러 학생들의 연설을 들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대부분은 학생들이었는데,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발언을 하는 사람 중 중학생도 있었는데, 우리는 시간 때문에 발언 신청을 하지 못했지만 그 학생을 보고 참 대단하고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 8월 4일,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이제 다들 너무나 연로하시다. 증언을 하고 피해 사실에 대해 목소리를 낼 분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이런 청소년들이 나서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피해자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한다. 우리라도 기억해서, 하늘에서 보고 계실 수많은 할머니들을 위해서, 그리고 현재도 고통을 겪고 있거나 앞으로 생겨서는 안 될 비슷한 피해자들을 위해서, 잘못된 일에 대한 사죄를 꼭 받아내야 할 것이다. 처음 일본 방문이 취소되었을 때는 마냥 아쉽기만 했는데, 서울에 답사를 다녀오니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고야나 도야마에서는 근로정신대 또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배울 수 있었겠지만, 서울에서 다양한 박물관과 기관을 방문하면서 일제 강점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사,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도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국회의사당에 간 소감은 더 특별한 것 같다. 국회의사당에는 처음 가 본 것이었다. 가서 국회가 하는 일과 정치에 대해 배웠는데, 솔직히 교과서를 통해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뭐 엄청나다거나 그런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사당에서 본회의를 방청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레기 시작했다. 살면서 국회 본회의를 방청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야 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그 날 본회의는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망한 마음이 너무나 컸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청소년으로서 현재 국회의 역할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의 문제점들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의회의 모습을 바꿔나가야 할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국회를 방문함으로써 단순한 역사 답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박물관이나 이렇게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해설자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거니 다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민주인권기념관의 해설자 이현주 사무국장님은 달랐다. 알고 보니 그 분은 박종철 열사의 절친한 후배였다. 해설자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박종철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왔고, 그의 업적 위주가 아닌, 인간 박종철을, 사람대 사람으로 이야기 해주셨다. 해설 일을 맡으신지 오래됐을 것 같은데, 사무국장님은 그가 받은 고문에 대해서 얘기할 때 눈빛이 흔들리셨고, 시민들이 없었다면 그의 죽음을 밝히지 못했으리라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렇게도 인간적인 설명은 처음이었다. 나도 종종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분의 말을 듣고서는 박종철이라는 사람과, 그가 했던 일, 그리고 그의 죽음이 헛되지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답사를 대체한 서울로의 국내 답사는 끝이 났다. 시간 관계 상 자세히 둘러보지 못 해 아쉬운 곳도 있었고, 정말 인상 깊어서 뇌리에 박힌 곳도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힘들게 돌아다녔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역사, 그리고 또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우선 해결되지 않은 근로정신대 문제(이에 더하여 성노예제 피해자 문제)가 이 답사가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제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도 살펴보았다. 그 모든 것들을 배우면서 느낀 것은 역사는 전부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기념관에서 나왔던 이름이 다른 박물관에서 나오기도 했고, 넓은 맥락에서 봤을 때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 된다. 어떠한 문제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고 이를 가슴 속에 새기고 있지 않는다면, 달라 보이지만 비슷한 일이 또 다시 발생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현재 있는 문제를 알리고,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청소년이라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답사까지, 직접 하면서, 오히려 청소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앞장서야한다. 우리가 힘써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어왔다. 그들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의 중심에 있는 피해자들을, 우리가 기억하고, 함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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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8
  • 학교 공기정화장치 설치 및 운영의 불편한 진실과 현실
    [교육연합신문=배석문 논설위원] 미국, 중국과 일본이 세계 강대국이 된 것은 왕중추가 쓴 “디테일의 힘” 정신과 기준 및 시스템에 기반한 국가운영과 경영체제였다. 우리는 해방이후 전쟁의 폐허속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그나마 10위권 강소국으로 발전하였지만 과속성장의적폐와 기준 및 시스템은 우리사회 곳곳에 여전히 만연한 상태다. 가습기 사태로 큰 사회적 홍역을 치렀듯이 대기오염과 미세먼지의 환경적 역습은 국민건강과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고 특히 경로당은 물론 학교, 어린이집과 같은 미래주역들이 생활하는 밀집 공공장소는 음용수인 물과 더불어공기의 질과 오염관리의 수준이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 및 지방정부, 기관의 과제가 되었고 교육부와 교육청은 막대한 국민세금을 투입하여 학교 공기정화장치의 설치 및 운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 공기정화예산 집행금 99%가 밀폐공간형 ‘공기청정기’에만 투입되고 교육부 미세먼지 지침발표 후 1년간 기계환기형 설비나 환기형 공기청정기는 완전히 소외되고 있는 현실이며 이는 학부모 및 학생들의 미세먼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실적보고 중심의 단기적 대응을 하고 있다는 지적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교육부가 실내 공기질 개선을 위해 열회수환기장치 등 기계식 공기순환기 설치를 우선하되 부족한 경우 공기청정기를 설치토록 지침을 마련했지만 일선 교육청과 학교의 공기정화장치 도입상황은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4월 ‘학교 고농도 미세먼지 대책’을 발표해 신축학교는 의무적으로 기계환기설비를 설치하고 기존학교도 기계환기설비 설치를 우선 고려토록 했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 공기청정기를 설치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달았다. 특히 ‘학교 공기정화장치 설치 및 사용기준(안)’에 따르면 부득이한 경우라도 공기청정기는 ‘보조적’으로 설치토록 권고하고 있으나 거꾸로식 편의 행정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공기청정기 선정기준과 수치도 지역별로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학교보건법에 따른 명확한 관련 고시제정 미루는 교육부-지역별 교육청의 공기정화장치 선정기준과 항목, 수치 등 상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져야할 상황이 예견되는 현실-더 늦기 전에 명확하고 통일된 기준안 마련, 전국적 적용 시급 교육부의 공기정화장치의 선정 및 설치 시 고려사항을 보면, “공기정화장치의 기능과 성능은 정화방식에 따라 다르므로 교실 내 다른 오염물질의 발생 경향을 고려하여 반드시 관련분야(실내공기질 및 환기설비 등) 전문가 그룹의 자문을 구하고 용도에 적합한 공기정화장치를 선정하여 설치하여야 한다”고 되어있다. 또한 고려할 사항으로 에너지소비량, 필터방식, 적정용량(실제평수의 1.5배), 소음(55dB이하), 공통인증(KC, KS, 환경마크 등), 공기정화설비 또는 환기설비(MERV12~15), 공기청정기인증(KS, CA, KOLAS 등), 제품A/S수준 등에 대하여 기본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으나 시행과정상 논란이 증폭되는 주요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조적으로 도입해야할 공기청정기에 전체 예산을 거의 소진하는 현실이다. 학교별 상황이 다르고 환기식 정화장치를 도입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다. 둘째, 공기청정기 선정기준과 배점 등이 일선교육청별로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CADR(분진청정화능력)은 아무런 비품이나 사람의 이동이 없는 밀폐공간에 적용되는데(교실은 책상, 학생들의 이동 등이 있는 공간임) CADR항목을 포함시켜 12이상은 10점, 미만은 0점 또는 부적격, 헤파필터 등급도 E11(95%)이상은 10점, 미만은 0점 또는 부적격 등 정량적 평가 70점, 안전 및 유지관리 등 정성적 평가 30점 합산 80 또는 85점 이상의 업체(제품)만 자격을 갖도록 입찰제안요청서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공기정화장치의 구분을 공기정화설비, 환기설비, 공기청정기 3가지로만 규정하여 더 고급성능과 사양을 갖춘 공기정화살균기 또는 환기형 공기청정기(밀폐공간기준의 CADR대신에 MERV16이상 적용필요)는 구체적 선정기준과 항목이 없어 처음부터 자격이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다. 넷째, 유해가스 제거효율과 별도로 이산화탄소, 라돈은 공기질과 건강에 필수항목인데 심사기준에 누락되어 있고 이 기능을 갖춘 제품이 0점 또는 부적격처리 되고 있다. 다섯째, 제출서류에 유지관리계획서가 누락되어있고 점검표 또한 미흡하다는 점이다. 성능을 유지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섯째, 과업지시서나 사업제안서의 예비공고 없이 바로 시행함으로써 전문가 그룹, 기관의 의견이나 기준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교육부 애매한 권고안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 일선 교육청의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명확한 기준에 의한 편의주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조금 늦더라도 치밀하고 정확하고 구체적인 “디테일의 힘”은 개인, 조직, 사회, 국가의 명운과 직결되어 있다.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과 청년들 그리고 교직에 함께하시는 모든 분들의 건강은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필수 요소이다. WHO정의처럼 건강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자신은 건강하다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시대다. 학교 공기정화장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명쾌하고 통일된 기준안을 통하여 기존의 잘못된 부분은 즉시 시정하고 향후 추진과정에 더 이상 논란이 증폭되지 않도록 교육부와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조속한 지혜도출을 촉구하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당연한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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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4
  • 잘 나가는 학생은 이유가 비슷하다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일찍이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소위 ‘안나 카레니나 법칙’으로 행복의 조건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그만큼 즐겁고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엇비슷한 패턴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 삶의 패턴은 고전적이면서도 누구나 수긍하는 삶의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교에서도 잘나가는 학생, 학교생활을 성실하고 즐겁게 보내는 학생은 나름대로 공통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에서는 3개년의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름 성공의 길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소위 잘나가는 학생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목표가 뚜렷하다. 그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목표가 확고하다. 요즘 학생들이 선호하는 3D프린팅, 건축설계, 드론 및 항공기 조종, 인테리어디자인 분야 등등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 목표가 분명하다. 이들은 성적의 등락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해야 할 공부를 찾아서 자발적으로 학습하며 교과수업도 충실히 듣는다. 이들처럼 진로 목표가 확고한 학생들에게는 학교 차원에서 각종 프로젝트를 신설해 기회를 줌으로써 자신의 꿈과 끼를 펼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둘째, 회복 탄력성이 강하다. 이들은 문·이과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로 다른 학생들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지필고사 및 수행평가 등에서 본인의 실수로 등수가 바뀌거나 점수가 떨어져도 차분하고 꾸준히, 묵묵하게 지속해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슬럼프가 오거나 공부가 안되는 날이 있을 법도 한데, 이들은 외부의 충격에 대해 회복 탄력성이 매우 높은 학생으로 항상 진지하고 차분한 자세로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 주관이 분명하다. 이들은 학업 및 다양한 교내외 활동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교사의 조언을 기꺼이 경청한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본인의 주관에 따르고 그에 따른 활동을 충실하게 그리고 성숙한 모습으로 진행해 나간다. 넷째, 우정이 강하다. 그들은 수업 교실이 바꼈다는 공지를 듣고는 친구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교실 변경에 대한 공지를 못 듣고 당황할까 봐 굳이 본인이 가서 알려주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 함께 하는 친구들에 대한 우정은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 크게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본교는 다 같이 잘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Win-Win 하려는 점이 강하다. 다섯째, 학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특별하다. 이들은 학생부의 간부이건 아니건 본인의 위치에 더해, 학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잘 보여준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학교 홍보에 앞장서고, 학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며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또래 학생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녔다. 이들이 학교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는 문화가 본교의 잘나가는 학생들의 특징 중 하나라 하겠다. 요즘 일반고는 학생의 희망대로 학교 배정이 쉽지 않다. 1순위부터 25순위가 넘는 학교 중에 어느 학교로 배정이 될지 모른다. 본교는 원도심 지역에 위치해 50% 정도가 1순위자로 지명되고 나머지는 통학에 1시간이 걸리는 학생들도 많다. 그렇지만 입학 후 걱정과는 달리 학교생활에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동문의 후원과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학교 문화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잘 적응하여 학교를 무사히 마친다. 재학 중에 학생들에게 마음껏 ‘존중의 옷’을 입혀주는 교장, 교감 그리고 교사들이 있기에 그들은 마음껏 꿈과 끼를 펼치며 학교생활에 정진하고 소위 잘나가는 학생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학창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 성적만이 결코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의 우선순위가 아님을 본교의 잘나가는 학생들은 충실히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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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1
  • 청소년의 ‘꿈 너머 현실’ 미래교육의 중요성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일본의 현재를 보면 미래 한국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많은 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과거를 거의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별로 양국 간의 시차가 얼마인지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틈새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학교와 관련해서 왕따(이지메), 학교폭력, 학부모와 학생의 교사 폭행, 등교 거부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의 그대로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재현돼 왔다. 앞으로 (초) 고령사회의 모습도 마찬가질 것이다. 문제는 일찍이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시차보다 앞당겨 지리라는 예상이 중론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다이내믹한 사회이고 그 변화의 속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제 또다시 우리가 작금의 일본 사회를 주목할 사항이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기생충족, 니트족,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등이 사회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기생충족이란 중년이 돼서도 부모에 얹혀사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이다. 일본 타임스(2017년 4월 20일)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일본 중년 세대(35~54세) 중에서 부모에 얹혀사는 사람은 45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젊은 시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며 결혼도 하지 않고 살다가 나이 들어 부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실 경우 아무런 생계 대책이 없는 이들은 일본 사회를 파괴할 일종의 시한폭탄으로 여겨진다. 니트족은 의무교육 이후 진학이나 취직을 하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청년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은 구직도 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비(非) 구직 니트족이다. 이들은 장기적으로 기생충족이 될 가능성이 높고, 기생충족 중 상당수는 은둔형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니트족 중 30%는 은둔형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해마다 커지고 있다. 주로 2차 베이비붐 세대인 이들이 기생충족이 된 주원인은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에 불어 닥친 취직난, 종신고용 붕괴 등 사회 환경적 요인이지만 이와 함께 1970년대 중반부터 시행되어온 여유(유토리) 교육을 들기도 한다. 여유 교육은 개성과 여유를 강조하며 제창됐던 일본식 전인교육 정책이다. 여유 교육 실시 이후 일본 공립 초중등학교의 학습량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재학시절을 여유 있게 보내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자신이 원할 때 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그런데 그 부작용 중의 하나가 힘든 직업 세계에 부적응 현상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아이들이 꿈과 끼를 계발하도록 이끌면서 ‘꿈 너머 현실’도 직시하게 해야 한다. 즉, 꿈이 반드시 직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교육해야 한다. 가령 2017년 현재 우리나라 연예인 상위 1%가 전체 연예인 소득의 49%를 벌고, 상위 10%가 80%를 번다. 나머지 90% 사람들은 월 60만 원도 못 버는 생활보장대상자 수준이다. 어른들의 말만 믿고 꿈을 따라갔는데 그 꿈이 생계유지에 필요한 직업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일본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는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해서 성공하는 사람은 천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기본생활비를 보장해 주는 사회가 되기 전까지 학교에서는 꿈과 끼 계발 교육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가치를 찾고, 그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역량도 함께 길러 주어야 한다. 아울러 주어진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집념과 끈기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가 되기 어렵다. 이웃 나라 일본의 현실은 우리의 미래 교육에 강력한 시사점과 경고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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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5
  • [기고] ‘아는 만큼 보인다.’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長]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을 물어보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인 사회, 저 자리가 생겨난 이유를 묻는 사람이 이상한 나라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사회, 자신이 근무하는 기관의 존재 이유는 알 필요조차 없는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 이제는 너무 잘못 나가 다시는 바름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현실에 허무함을 너머 비참함까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公私의 구별이 없는 사회, 세금으로 주어지는 자리에서도 公的이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당위성보다는 주어지는 안일만을 추구하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당연시 되어지는 사회 현상에 길들여지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현상에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들 한다. 근본 이치는 알지도 모르면서 겉치레만 번지레한 말만 넘치는 ‘말의 성찬’,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달리하는 사람일수록 ‘知行合一’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질로 ‘가슴에 품은 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말은 반복되어 몸에 체화되어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글로 그 사회의 건강함과 미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뜻을 무시하는, 뜻도 모르는 정책 추구로 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전한 가치관의 선순환이 단절되고, 교육 현장에서도 뜻은 모른 채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외우는 배움의 현장으로 내몰고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외우는 교육 병폐 속에서 말의 뜻을 모르는 무의미하고 건조한 대화는 사람을 멀리하게 하고 가족 간의 자리도 밀쳐내는 이 비극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학문이란 만물이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다. 세상사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근본 이치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의미가 가득 차 있다. ‘뜻’이란 사람이 그것을 듣거나 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뜻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법이다. 사람이 안다는 건 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것도 뜻을 알고자 함이다. 그 뜻도 자신만의 메아리어서는 안 된다. 말과 행동에 객관성이 심히 결여되어 있다면 생명력이 없으며 소통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말과 글자를 배울 때부터 글과 낱말의 어원을 스스로 찾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가 뜻을 공유해서 감정과 생각이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 학생들의 문해력이 꼴찌라는 사실을 걱정하는 어른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잊혀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는 이 현실이 언제까지 가야할 것인가? 또 언제까지 참아야만 할 것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가슴을 먹먹하게 한 적이 없다. 혼자 아무리 울부짖고 기막혀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 삶이 증명하고 있다. 말과 글 각각이 보여주는 正名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다 실천의 깨달음이 지혜로 승화하여, 경험의 중요성을 통찰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날은 올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와 덩실덩실 춤추는 국민은 될 수는 없단 말인가? 뜻을 모르는 자는 목표를 내세워봐야 객관적으로 큰 뜻은 이룰 수 없는 법이다. 인생의 뜻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뜻을 알고 있어야 남이 가진 뜻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공부를 많이 할수록 가지고 있는 뜻이 점점 달라진다. 그래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뜻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왠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우리 사회는 많이 배운 사람, 자리가 높은 사람일수록 보통 서민들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과 글을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알기로는 배운 사람, 특히 지도자는 세상의 이치를 깊고 넓게 배워서 국민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배운 사람이 자신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배움의 자세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특히 요즘은 모든 국민들이 ‘막말 대잔치’ 행진에 참여하는 배우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더하여 무서움까지 든다고 한다.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해놓고 전혀 부끄러움과 반성도 없는 無恥의 사회로 나나아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저질러 놓고, 유명 변호인에 의뢰하여 무죄를 받으면 당당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자신의 양심도 법의 심판으로 정의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교육은 밝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말과 글에서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말과 글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의 뜻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화평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 현장에서도 왜 말과 글이 만들어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말과 글로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었는지를 묻고 답하는 장이 교육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어른들이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가슴 아파할 어른도, 가르칠만한 어른도 없게 되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두렵지 않은가? ‘참는다.’는 말은 어려운 중에서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이냐 하고 끊임없이 ‘참’을 찾는다는 말이다. 즉 ‘참을 찾는다.’가 ‘참는다.’는 말이다. ‘참’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되면 참지 못하지만, 참을 가치가 있으면 참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누구를 위해 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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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1
  • 이 땅의 깨어있는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요즘 교육을 말하면서 ‘학생은 많으나 진정한 제자는 없고, 교사는 많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한다. 이는 분명 대한민국의 불행이자 우리 교육의 비극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을 그렇게 싸잡아 비난하기에는 묵묵히 ‘가지 않은 길’을 택해 사도를 실천하는 교사와 생사를 가르는 시간을 배움에 정진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아니다, 그것은 패배주의에 입각한 판단이요, 교사와 학생에 대한 지나친 모욕’이라고 항변할 자격이 있다. 이 땅에 진정한 교육을 실행하는 깨어있는 스승이 없을 리 없다. 그들이 우리 교육이 죽었다고 말하는 자괴감은 오히려 교육을 혁신하려는 의지의 반영이며 이 땅에 진정한 교육을 펼치려는 몸부림이자 아우성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을 언급할 때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 미국, 피터 위어 감독)라는 영화를 돌아본다. 이 영화는 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는 교육영화의 클래식이다. 잠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통, 명예, 규율, 최고’ 4대 원칙의 명문 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운 국어 교사로 키팅(로빈 윌리암스 분)이 부임해 온다. 키팅은 학교 기준에 맞지 않는 파격적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 학교 선배이기도 한 키팅은 자기를 "오! 캡틴! 마이 캡틴!"(월트 휘트먼의 시 제목)이라고 부르게 하며, 옛 선배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너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정신을 불어넣어 준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강의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쓰레기 같은 이론이라면서 교과서의 해당 페이지를 찢어버리게 한다. 또한, 교탁에 올라서서 세상을 넓고 다양하게 바라보라고 강조한다. 학생들은 독특한 그의 수업 방식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끌리게 된다. 그러던 중, 학생들은 키팅이 학창시절 활동했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고전문학클럽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고, 자신들도 그 클럽에서 활동하며 진정한 삶에 눈을 뜨게 되면서 자신들의 꿈을 가꾸기 위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나간다. 하지만 의사가 되길 원했던 한 부모가 아들을 강제로 군사학교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학생이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자기 자식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부모들과 책임회피에 혈안이 된 학교 측의 공작으로 키팅은 모든 책임을 지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키팅이 떠나는 날, 그 대신 수업을 맡게 된 놀란 교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자기들에게 진정한 교육을 선사했던 스승을 위해 하나둘 책상을 밟고 올라서서 경의를 표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렇듯 작금의 대한민국 교육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교사의 복지부동, 직무유기를 탓한다. 하지만 분명 대한민국 안에도 주인공 키팅 선생과 같은 눈에 띄진 않아도 보석같은 교사가 존재하리라 믿는다. 또 그가 학생들과 보여주는 진정한 사제 간의 모범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어느 교사는 익숙한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며 진취적인 교육으로의 변화를 위해 미래를 여는 선구자로 과감하게 나선다. 이것은 전국 곳곳에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 교육, 혁신 교육의 방향과 일맥상통한다. 행복나눔학교, 행복배움학교 등 이 땅에 많은 혁신학교가 대한민국 교육의 혁신을 꿈꾼다. 전통적인 ‘온고지신’의 학습은 물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과의 공존을 위한 평생교육의 추구와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인재의 육성을 위해서 애쓴다. 그들은 남들이 택하지 않은 길을 선택해 대한민국의 진정한 교육의 혁신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키팅같은 깨어있는 교사들이다. 그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내며 진정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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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0
  • 행복교육의 성공을 위한 단상(斷想)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전국 곳곳에서 행복교육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인천광역시교육청에서는 성공적인 행복교육 사업을 실현하기 위해 ‘행복 나눔 학교’와 ‘행복 배움 학교’를 운영하는 등 학교교육의 혁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좁게는 수업의 혁신을 도모하고 교육과정 운영의 다양화를 추구하며 넓게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지역주민들이 마을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기부를 통한 참여와 복지의 교육을 실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틈새전략으로 학교현장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교육복지의 혜택을 누리게 하려는 노력의 목적이다. 흔히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요, 천년대계라 한다. 그래서 국가마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한 정책에 매진하기도 한다. 미국의 전직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중에 수시로 대한민국의 높은 교육열과 질 높은 교사의 수준을 부러워하며 “한국 교육을 본받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우리는 과연 학생 개개인의 능력은 물론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고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며 글로벌 인재를 만들어 가는 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해오고 있는가? 이에 대해 학교, 지역사회,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만큼 인재양성에 의해 국가의 명운이 달린 대한민국이기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교육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의 교사는 물론 학부모들도 제대로 된 가정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올바른 인성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교육은 희망이자 미래의 비전이다. 크고 작은 교육공동체 활동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교육관계자들과 또한 행복교육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육공동체 모두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우리의 아이들이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행복교육은 지역의 교육공동체를 통해 학부모를 비롯한 지역사회가 하나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궁극적으로는 많은 지역민들이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재능기부를 비롯해 함께 참여하는 교육공동체를 만들어가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교는 졸업생은 물론 타교 출신의 교육실습생에게 학교를 넓게 개방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강사를 초빙하여 교양과 전문적 소양 함양의 기회를 학생, 학부모, 교사에게 제공하고 있다. 미래교육은 함께 하는 교육이 돼야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 행복교육지구 사업은 지역의 모든 지자체와 교육지원청이 함께 예산을 만들어 더욱 활발하게 실천해야 한다. 특히 원도심 지역의 학생들을 위한 정책적 배려와 각 기관의 진취적인 사업의 추진을 기대한다. 원도심 지역의 주민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교육공동체 활동을 실시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긴요한 일이다. 초기에는 다소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새롭게 시도함으로써 지역민에게 밝은 희망을 고취하고 앞으로의 지역교육시스템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변화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희망을 만들어가는 행복교육지구 사업에 원도심 지역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시 미래의 행복교육의 성공을 위해서는 교육의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은 물론이고 학부모를 위시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소외 없는 교육,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미래교육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공지능(AI)이 펼치는 차세대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지역 교육당국의 평생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우리의 행복교육에 더욱 희망의 꽃이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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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3
  • 학생에게 존중의 옷을 입히자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교사 : (…) 축하해~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교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요즘 학교생활이 힘들지? 학생 : 예, 장거리 통학에 많이 힘들어요. 아빠가 아침에 차로 태워다주셔서 다행이지만 아빠께 미안해요. 아침 일찍 저 때문에 바쁘시거든요. 교사 : 그래? 아빠가 많이 고마우신가보구나. 네 마음이 착하구나. 아침 등교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학생 : 약 40~50분 정도 걸려요. 아침에 차가 밀리거든요. 늘 고마우신 아빠께 감사하는 마음 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요.(…) 교사 : 그래. 좋은 아들이구나. 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건강하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해야지?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면 나중에 좋은 동창생이 돼 사회에 나와서도 서로 도와주면서 살 수 있단다. 학생 : 예, 감사합니다. 친구들과 잘 지낼게요. 격려해주시어 고맙습니다.(…) 최근 필자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의 한 신입생과 나눈 대화이다. 그는 장거리 등·하교로 학교활을 버거워했다. 중학교와는 사뭇 달라진 교육환경에 당황하고 힘들어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양한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학급에 모여 있어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다소 내성적으로 보이는 성격 탓에 먼저 다가가거나 또는 대응하기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학생의 부모가 자녀의 학교생활이 걱정됐는지 특별히 자녀에게 관심과 격려를 요청했다. 그래서 필자는 일단 학생을 만나고 최대한 존중해주면서 래포(Rapport)를 형성하고자 했다. 신학기에 학생은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많이 힘들어한다. 특히 고등학교 신입생은 더욱더 그렇다.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를 거치면서 진학한 요즘 고등학생들은 다소 자유분방하고 구속과 통제를 특히 싫어한다. 교우 간에 충돌이 잦은 이유이다. 그래서 적절한 공동체 생활의 안내가 필요하다. 스스로 늦게 터득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에서는 학생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가정 이외에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또는 어른들로부터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학교생활에서 ‘자아 존중감’을 형성하는 핵심이다. 자라면서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 성장이나 학업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존중의 옷’을 든든하게 입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존중받는 학생은 결코 일탈 행위나 학교폭력에 연루되지 않는다. 필자는 학교에서 학생과의 만남이 이뤄질 때마다 학생들을 최대한 존중해주려 노력한다.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이런 존중은 상호 간의 거부감을 낮춰 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대화가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영향을 미친다. 또한 존중은 산소 같은 생각들을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주 전달해 준다. 학생을 존중하는 대화에서는 필자 또한 존중을 받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교사나 어른이 학생들에게 존중의 옷을 입히지 않으면서 학생이 예쁘고 바른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대하고 참여시키며 존중해주는 시간들이 지속되면 아이들의 태도도 틀림없이 달라진다. 단 많은 시간을 인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통스럽다할지라도 의미와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다. 부모나 교사의 조바심을 경계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존중받고 자랄 때 진정한 인격체로 성장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온 마을이 나서서 한 아이를 키웠던 마을공동체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학생에게 존중의 옷을 입히자. 이것이 바람직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출발점이고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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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3
  • 운동부 학생의 인사, 인성교육의 시범(示範)이다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인사를 받으면 감정이 선회하게 된다. 다소 서먹서먹한 관계도 눈인사라도 하든지 아니면 한 마디라도 인사를 나눈다면 소원한 관계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부정적인 감정도 수그러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일상의 삶에서 각자 바쁘다는 이유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거나 서로 인사조차 없다면 갖가지 오해가 발생하고 심지어는 상대의 마음을 왜곡까지 한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나누는 것은 성숙한 인간관계를 위한 필수적인 지혜이다. 요즘 그런 사람을 일컬어 높은 EQ(감성지수)의 소유자라 부르며 대인관계의 달인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에 가까운 삶을 사는 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인사를 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성을 가늠하는 기본적인 척도이기도 하며 상대방을 판단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3개의 운동부를 운영하는 학교이다. 필자는 신학기 3월을 보내고 4월을 지내면서 어느 학교에서보다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교내 곳곳에서 마주치는 학생들로부터 예의 바른 인사를 받는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특히, 운동부 학생들로부터 순박하고 진실한 인사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건네는 인사가 결코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더욱 좋다. 그들의 인사를 받음으로써 그날 학교업무에 따른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곧 하루 생활이 즐거움 쪽으로 급선회하는 것은 놀라운 보너스다. 학생들의 인사가 이렇게 교사에게 행복을 유발하는지 예전에는 미처 경험하지 못해 참으로 신기하다. 대개 멈칫거리며 주뼛주뼛하는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의 인사에는 복선이 깔려 있다. 학교에 따라서는 학생들이 교내에서 마주치는 교사를 향해 반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으며 대개는 자기 반에 수업을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냉랭하게 지나치는 학생들이 많다. 아주 영악한 학생들이다. 그럴 때마다 인성교육의 실상을 되돌아본다. 필자는 본교에 부임해 거의 모든 학생과 지나치며 인사를 받는다. 특히 운동선수들의 활기차고 꾸밈없는 인사를 받으면 더 즐거울 수가 없다. 순간의 짧은 만남이지만 인사를 주고받으며 지나치는 그 순간은 순박한 운동선수와의 대면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얽힌 어른(교사)과 청소년(학생)이라는 인위적인 관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선수 개인의 순수한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물론 여기엔 지금까지 학교장이 운동부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기를 생활화했기 때문에 그 습관의 전개가 학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에 공감한다. 결국 위로부터 먼저 인사하기가 잔잔한 파급효과를 내면서 운동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이제는 그들의 자발적인 인사가 진정으로 인사의 참맛과 멋이 어우러진 학교의 예절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믿는다. 허물없이 인사를 나누는 사제 간의 정이 학생 인성교육에 지대한 역할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교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하는 운동부 학생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오늘도 앳된 얼굴의 저학년 학생과 제법 능숙함이 엿보이는 고학년 학생의 인사를 받으며 필자는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다. “이번 주말에는 야구 한일전(지역 라이벌 경기를 빗댄 말)을 기대해도 되지?”,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너희를 믿는다.”, “감사합니다. 꼭 승리하겠습니다.”(…) 이 짧은 인사와 대화 속에 우리 운동부 학생들이 지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인성교육이 이뤄진다. 학생들의 인사, 특히 운동부 학생들의 인사는 바람직한 인성교육의 시범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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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3
  • [기고] '言從作乂' - 화순도곡초 임오숙 교장
    [교육연합신문=임오숙 기고] 세대 간의 갈등(葛藤)은 물론 집단 간의 갈등, 상하(上下) 상호간(相互間)의 갈등으로 인하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은‘意思疏通의 不在’가 아닐까? 의사소통은 곧 언어로 이루어지는데 말을 잘못하면 오히려 화(禍)만 키우게 되듯이 세상의 어지러움은 言語로부터 나온다. 윗사람이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고, 아랫사람의 언어가 신중하지 못하면 자신을 해치게 된다. 사람들이 만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말 즉, 언어이다. 그러므로 말은 사람을 사귀는 처음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버릇이 없어.” 그래서 “저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겠다.”는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말이 禮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언어로써 표출된다. 그래서 언어는 곧 예인 것이다. 또, 이치를 깨달아서 다른 사람과 和合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언어이다. ‘言從作乂’라는 말처럼 ‘말은 따름이요. 그래서 다스림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따를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말이 이치에 맞는가에 따라 반응해주며 잘 따라주는 것이 언종작예(言從作乂)의 예일 것이다. 말은 입에서 한 번 나오면 다시 담을 수 없다. 사람이 사는 동안 작은 일, 큰 일을 불문하고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의 양심과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가 점점 막말로 오염되고 있다. 인터넷 댓글에서나 발견되던 공격적인 말투가 어느새 일상에 자리하더니 급기야는 지상파 방송까지 점령하고 있다. 악의적인 막말이 확산된다는 것은 곧 사회 전체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래‘관(棺)’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던 우리 사회였다는데…….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무엇을 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말이란 직접 또는 간접 경험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수준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말 속에 그 사람의 철학이 들어 있고,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생각, 가치관을 찾아내는 것이 知言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지혜를 갖추도록 본인이 끊임없이 갈고 닦는 것이 공부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하며 선생님으로부터는 방향만을 배워서 일일신우일신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말을 함께 나누기도 싫다고 하는 요즈음 아이들에게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깊고 넓게 工夫하고 배워야 한다. 이처럼 공부라는 것은 체득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무엇이 보탬이 되는지를 깨달아 자신을 가득 채워서 행동으로 보이면서 서서히 주변을 敎化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글자가 益(익)이라 하고, 그러한 그릇도 못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하는 것은 교만하다 하여 溢(교만할 일)이라고 한다. 세상은 항상 주고받는 관계이다. 하늘이 아무리 많은 것을 내려주어도 받는 땅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배우는 학생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책이 있더라도 독자가 없다면 의미가 없고, 한자 교육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인식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또한 의미가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상하, 동료, 부모와 자식 등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을 가르치는 일을 우리가 하고, 또 학교에서 해야 한다.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원하기도 하지만 進退之節(진퇴지절)의 禮를 보는 것이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 말하는 법과 행동을 본다는 것이다. 말에는 행동이 따르게 마련인데 速成교육은 입으로만 하는 지식교육이다. 그래서 모두 다 행동이 아닌 입으로만 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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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1
  • [기고] 조금 해놓고 반짝일 거라고 생각 말라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 代表․敎育學博士] 자녀를 제도권의 학교에 보내는 것은 희망의 발걸음일까? 국민의 의무라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일까? 막연하나마 부모의 바람과 함께 자녀의 미래 설계도가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취학을 앞둔 부모들은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고들 한다. 이러한 바람과 설렘이 정책으로 담아지는 나라는 없는 것일까? 아이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그것도 부족하여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소망일까? 학교 교육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까? 정책 당국과 일선 교육 책임자에 대한 불신일까? 나라의 교육 철학에 대한 불만의 몸부림일까? 학교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활동은 ‘學習’이라는 용어로 이루어진다. 學習이라는 낱말은 황하문명권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論語』學而 編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을 聖人들이 왜 중요시하였을까?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라는 말처럼 배웠으면 반드시 때에 맞춰 실천하여 함께 학습의 즐거움을 말하고 느끼는 학습의 과정인 것이다. 즉 학교에서 바르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면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 학교에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어머니는 “와!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서 배우더니, 이렇게 달라졌네.” 하며 아이를 칭찬하고 아이는 학습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서 아는 것은 말과 글로 표현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야만이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전할 수 있고, 내가 의도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이치에 따라 표현해야하기 때문이다. 공부한 것을 제대로 아는지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옆 사람 등에게 말로 해보고, 더 나아가 글로 써보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와 글쓰기는 학교 교육에서 절대 필요한 학습인데, 현재 학교에서는 어떠한가? 책에서 읽거나 배운 것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배웠더라도 배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독서를 하고 책으로 공부를 해도 말과 글에 변화가 없다면 배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아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가르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의 내용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세태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볼 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침의 본질을 몰랐던지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일 것이다. 더 나아가 교육은 깨우쳐 알라고 하는 것인데 무조건 암기위주의 교육만 하고 있다면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깨우치게 하려면 뜻, 즉 이치를 알게 해야 깨우치는 것이다. 이치는 간단한 것이다. 해가 뜨고 달이 지듯이 단순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모든 사람을 같은 거리의 마음(恕)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러며 그들의 마음의 중심이 나에게로 오는 것(忠)이다. 그래서 먼저 恕고, 나중에 忠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數를 찾는 다는 것은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또는 어떤 것을 잘 안다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다음에 큰 고통을 겪고 난 후, 안다고 했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겉모습만 보고, 드러난 것만 보고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잎과 열매가 떨어진 나무를 보고 ‘나무 이름’을 아는 것,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서 봄이 되면 ‘새싹’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볼 줄 아는 분별 능력이 진정으로 아는 것(知)이다. 知者라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學習이나 工夫는 결국인 ‘寬以居之’․‘仁以行之’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운 사람은 관대하고 너그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도 스스로 힘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整理․整頓을 잘 해야 한다. 整理․整頓을 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헤아려본다는 것이다. 공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이치란 왜 그렇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안의 모습이고, 사람이 움직이는 자극과 반응이며, 천지자연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작동원리를 말한다. 이러한 이치에 근거하는 문자가 바로 한자이다. 한자는 太極의 원리와 陰陽五行, 井田法의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뜻글자인 한자(한문)의 의미를 담아서 똑똑하고 창의적인 국민을 양성하려면, 먼저 세상 이치,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깨우치게 해야 한다. 사물의 이치를 본뜨거나 음양의 부호, 卦象, 정전법의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자의 원리를 모르면 뜻글자는 이해할 수 없으며, 황하문명권의 문화, 철학과 역사의 이해도 쉽지 않다. 배우고 읽는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漢字를 한글로 읽고 있는 우리나라의 文解力이 세계에서 꼴찌를 하고 있는데도, 이러한 사실을 공표도 못하고 있는 정부는 누구의 정부인가? ‘생각하다’는 우리말이 한자로는 思․想․念 모두가 해당된다. 그렇지만 ‘思’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 ‘想’은 서로 보고 싶은 마음, ‘念’은 지금 일어나는 마음이다. 생각이란 눈으로 보고, 맛보고, 들어보고 그쪽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 즉 耳目口鼻에 의해서 생기는 마음인 것이다. 생각이란 여러 모로 고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깊고 넓게 헤아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주었던 것이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다. 배우지 않으면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장점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고쳐야 할 점은 보지 못하고, 남의 단점은 쉽게 발견하는 것이 人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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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4
  • 살아있는 인성교육 '무감독 시험'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교육은 ‘바람직한 행동으로의 변화’를 추구한다. 개정된 2015 교육과정은 미래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육성’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미래의 세계가 창의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인 사고와 다양한 지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력을 갖춘 역량 있는 인재육성을 기저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소위 창의·융합형 인재들에게 바람직한 품성을 갖추도록 인성교육의 축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인성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함께 부각되는 셈이다. 지금처럼 적자생존의 살벌한 경쟁을 거쳐 사회에 배출되는 청소년들이 바람직한 인성을 소유하기란 쉽지 않다. 혼자서는 똑똑하고 유능해도 모래알과 같은 존재는 이 사회에 별반 힘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을 키우고 교육하는 가정과 학교 및 사회의 고민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인성을 소유한 미래의 인재를 어떻게 육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 아래 지난 65년에 걸쳐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오고 있다. 본교 출신의 명사(名士)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인 동문이 곳곳에서 역량 있는 인재로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 대부분이 무한한 자긍심을 갖는 것은 고등학교 시절인 1956년 1학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60년의 명문고 전통을 유지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무감독시험 제도를 운영하는 학교의 졸업생이라는 것이다. 또한, 학교 측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진행에 의해 재학 중에 철저한 양심 교육을 받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자신들이 받은 양심 교육이 사회적, 사상적 측면과 아울러 교육적, 전통적 측면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유산이라고 자부한다. 이것은 동문 제위가 사회에 진출해서도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 살도록 그들의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 보다 명예롭다’는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의 전통을 반백년을 넘어 60년 이상 유지한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교육의 효과는 이 나라 동량으로 활동하는 많은 동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무형문화제’급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학생들은 지금도 동문 선배들과 선생님, 부모님을 향해 당당하게 무감독 시험 선서를 외친다. “무감독고사는 양심을 키우는 우리 학교의 자랑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감독고사의 정신을 생명으로 압니다. 양심은 나를 성장시키는 영혼의 소리입니다.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서는 우리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말로만 인성교육을 부르짖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 가지 행동으로라도 인성교육의 실천을 보여주는 실용적인 것이 절실하다. 민감한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서 무감독 시험이 가능한 일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또한 주변 여건이 부정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하지만 그 반증으로 60년을 이렇게 훌륭하게 자랑스러운 전통이자 역사의 산물로 지속해서 유지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인성을 갖춘 학식인 이자 사회인을 배출하는 것은 어떠한 분야별 전문가보다 더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이바지할 수 있다. 타인을 신뢰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가치 있는 삶을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성교육의 진수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양심을 지키며 실천하고 유지해 나가며 졸업과 동시에 명예로운 ‘양심인증서’를 부여받는 본교의 사례는 널리 확산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성교육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학생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고 양심적인 생활 습관의 영유 및 자율과 책임감에 대한 인식을 불어 넣고 졸업 후 사회활동으로 이어져 양심과 진리를 실천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감독 시험제도, 살아있는 인성교육의 본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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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3
  • 텃밭 가꾸는 학생의 꿈을 키우자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학년별로 본관, 후관, 별관으로 나눠 생활한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대학 캠퍼스를 연상하는 교사동이 아름다운 전경을 이루고 있다. 어느 날 야간에 자기주도 학습을 실시하기 전에 3학년이 생활하는 별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 학생이 전날 내린 봄비에 젖은 땅을 정성껏 삽으로 파면서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3학년 학생으로 ‘텃밭 가꾸기’ 동아리의 회장이었다. 6명으로 이뤄진 자율동아리를 운영하면서 그는 제법 능숙한 손길로 땅을 파고 흙을 고르게 일구며 감자를 심고 있었다. 지금 심으면 6월경에 수확을 한다며 열심히 설명하는 그 학생에게 나는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말을 해줬다. 그 순간에 가슴에 꽂히는 무언가를 느낀 듯 󰡒아, 참 좋은 말이네요. 나무에 푯말을 걸어서 늘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씽긋 웃는 것이 아닌가. 그 표정이 너무도 순박하고 진실한 농부의 모습과 같았다. 그 후 몇 차례 저녁 시간이면 텃밭에 나와서 열심히 땅을 일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텃밭을 가꾸는 모습에 한 마디 격려를 덧붙여 “요즘 일본은 농과대학의 인기가 부활하고 농작물이 국가안보에 연계돼 그 중요성이 날로 증대된다.”고 말해주니 “저는 중국에 화훼산업으로 도전장을 내려고 합니다. 5조 9천억의 시장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떤 근거로 그러한 수치를 제시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열심히 자신의 꿈을 생각하며 키우는 모습이라 생각하니 그 학생을 다시 쳐다보게 됐다. 그렇다. 무기력한 요즘 학생들이 그런 꿈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미래인생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그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단다. 네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 꿈을 꼭 성취하길 바란다. 나중에 성공하면 교감 샘도 잊지 않고 연락을 할거지?"하고 되물으니 "물론이지요. 제가 꼭 성공해서 학교와 교감 샘에게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학생과의 만남으로 그날은 힘든 줄로 모르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학생들의 무기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비판하며 한탄한다. 필자는 그 무기력의 원인이 어쩌면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지 되묻고 싶다. 실제로 학생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꿈을 포기하거나 삶을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이 과연 생각 없이 사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고민하고 힘겨워하면서 자신들의 꿈과 목표를 생각한다. 다만 어느 순간에 어떠한 계기가 발생해 그 꿈과 목표를 좌절당하거나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심하게 무기력하게 된다. 이때 우리 어른들, 부모나 교사들이 나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혼내지 말며 낙심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청소년들을 달리 보자.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격려하자.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그들이 3포, 5포, 7포, N포 세대라 비하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미래는 무너진다. 출산율 저하로 인해서 언젠가 이 지구상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사라질 운명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긴장하고 미래를 위해 대비하며 살아가는가? 그저 생색을 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이 국가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과제이다. 그 중심에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 주인공들에겐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 칭찬과 격려와 환대, 그리고 그들과 연대해 그 꿈을 키워주고 응원하는 어른이 돼야 하지 않을까? 텃밭을 가꾸는 청소년의 꿈을 존중하고 그들을 단지 공부를 하지 않는 불량한 학생으로 간주하면서 소중한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도록 통제하고 억압하는 과오를 범하는 어리석은 어른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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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3
  • [지니쌤의 희망램프] “여러분,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교육연합신문=김진희 논설위원]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설레는 발걸음으로 등교하는 아이들 머리 위로 위풍당당한 현수막이 눈에 띈다. 공기업 취업 00명, 금융권 취업 00명, 특급호텔 취업 00명... 일반고등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흔치 않은 장면들이 해마다 펼쳐진다. 일찌감치 취업을 목표로 특성화고에 입학하여 3년간 열심히 전공과목 공부와 관련 실습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그 결과 취업에 성공한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기소개서를 들고 노크를 하는 희망찬 목소리들로 취업지원 센터 내부가 시끌벅적하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정한, 그럼에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무기로 삼는 아이들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종이 한 장엔 다듬어지지 않은, 그러나 순수하기 그지없는 무한한 가능성들로 빛이 난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꿈과 노력이 녹아있는 수십 개의 취업 자료를 검토한다. 그 원석을 다듬어주고 본인의 적성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 오늘도 학교 안 취업지원센터는 여전히 바쁘다. 이곳은 특성화고 취업지원센터이다. 내가 만나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용기가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또래들의 삶보다 좀 더 앞선, 그래서 때로는 버티기 힘들 수 있는 시선과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는다. 알고 있다시피 취업을 목표로 특성화고에 진학한다는 것은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꽤 용기 있는 선택이다. 경제적 부담이 될 수 있는 대학 등록금에 대한 염려, 청소년기에 꿈꾸는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접어두고 대학 진학이 아닌 취업을 선택한 그들의 나이는 중3의 시기, 16세~17세 남짓이다. 누구나 어렵던 우리네 시절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산업의 동력으로 키워졌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비교적 진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또 미래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다각도로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서 최종 진로를 선택하여 고교를 진학한다. 인생의 큰 선택 중 하나인 진학과 취업의 고민에서 후자를 선택한 특성화고 학생들은 재학 중 희망 취업분야의 직무수행에 필요한 기본역량을 갖추고 졸업과 함께 산업현장에 진출한다. 일정기간 실무경력을 쌓은 후, 해당 직무에 요구되는 지적 요구와 자기계발의 필요 등에 의해 추후 진학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필자의 직업은 진로와 인성 교육 전문가이며, 취업컨설턴트로서 현재 특성화고 취업지원센터의 취업지원관이다. 그동안 현직 강사와 취업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여러 대상들, 예를 들어, 특성화고 학생들, 전문대를 포함한 대졸 취업준비생, 경력단절 여성들, 인생의 이모작을 설계하는 50대 이상의 신중년 취업 예비자, 자활의 꿈을 위해 도전하는 전국의 지역자활센터 사업단 등과 함께 취업을 위해 갖춰야 할 소양과 역량을 키우는 데 동행하여 왔다. 긴 호흡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에서 누구나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 걷는 나의 직업, 보람을 넘어 기쁨으로 소통하는 이 일을 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꽃소식에 앞서 미세먼지가 온 하늘을 뒤덮으며 시작한 2019년 봄은 취업률이 뉴스의 정점에 있다. 우리의 취업에 대한 도전은 성공으로 언제나 '맑음' 상태가 될 수 있도록 현장의 생생한 취업 이야기와 취업을 위해 꼭 필요한 정보를 교육연합신문의 지면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여러분,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 김진희 논설위원 ◈ 교육N플러스 대표 ◈ 특성화고 취업지원관 ◈ 인천광역시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 고문 ◈ 前인천광역시 시민행복정책자문단 교육위원 ◈ 前인천광역시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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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9
  • [기고] 말과 글 그리고 세상 이치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長]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외국어를 외래어로 포장해서 쓰고, 우리말을 써도 충분한데 대화 중간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바람에 계층 간 , 집단 간 소통이 안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과 불안감마저 밀려온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성공의 언어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세계화가 밀려오면서 영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더욱 극성이다. 모든 분야에서 영어 낱말을 온통 남발하거나 엉터리로 갖다 붙여 사용한 나머지 한국인지 외국인지도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전담반’이라 하면 될 것을 ‘TF’, ‘왕따’를 ‘패싱’, ‘귀띔’을 ‘tip’, ‘흉내 내는’ 것을 ‘코스프레’, ‘자체 감사’를 ‘셀프 감사’, ‘학교 앞’이라고 하면 될 것을 ‘스쿨 존’이라 쓰는 등 전문가도 알아먹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기의 서투른 말을 알아듣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라도 인문학 열풍이 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인문학이란 삶 자체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말과 글의 어원을 아는 것은 인간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글의 어원은 상당 부분을 漢字에 말미암고 있다. 漢字에 있어서 말은 소리요, 글은 그림이며, 뜻은 이치이자 마음이다. 이 세 가지는 바람직한 이치로써 밝은 세상을 이끄는 축이 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바탕인 漢字의 語源을 살펴 말과 글에 담긴 이치를 깊이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다. 옳은 말과 옳은 글이 옳은 뜻으로 새겨질 때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70~80%가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한자를 모르면 개념이 정립되지 못한다. 또한 한자는 철학,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글자인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공부하면서 훈과 음만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中庸이라는 한자어를 가운데 중(中,) 떳떳할 용(庸)이라고 읽고 쓰면서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中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부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中이란 과녁판을 설치해서 그 가운데에 새(鳥) 등을 그려놓고 맞추는 것이다. 거기에다 맞추기도 하지만 과녁을 뚫는 것을 貫革이라고 하다가 우리말로 과녁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과녁에 적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中이란 가운데이면서 맞추는 것을 의미하면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까지를 함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운데’라는 말은 ‘中央’, ‘中心’의 뜻을 갖는다. ‘中心’은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음을 의미하고, 위 아래로 연결하면 ‘忠’으로 나의 중심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변된 마음, 즉 사사롭지 않고 공정하고 정당한 마음을 일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中心, 즉 忠을 잡으면 누구에게나 恕(용서할 서), 즉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중’이라고 말하면 ‘스님, 중요하다. 무겁다’ 등의 뜻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中’, ‘重’으로 쓰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즘 길을 걷다보면 기관의 이름을 한글로 쓰고 그 밑에 영어로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기관의 이름은 그 기관이 무엇을 하는지를 국민들이 알도록 해서 쉽게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우선인가? 한글로 써진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漢字語를 병기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뜻글자라는 것은 이치를 정확히 관찰해서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거의 말과 실천으로 판단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광인 김득신은 한유의《사설》을 1만 3천 번 정독했으며, 《노자전》과 《중용》의 서문을 2만 번 씩 읽었고, 《백이전》은 무려 11만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책에서 찾으려고 한 독서 대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책만 읽은 것도 중요하지만 읽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말과 행동에 담겨져야 하는 것이다. ‘신독’이라는 말도 ‘신독(愼獨)’이라고 써야 그 의미가 명확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안내할 수 있는 것이다. 愼을 파자하면 忄(心: 마음 심)과 眞(참 진)으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즉 진실한 마음을 일컫는 것이다.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듯이, 요즈음은 온통 새와 쥐로 덮인 세상이 되었다. 즉 CCTV 등이 온 세상을 뒤덮고 녹음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漢字는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우리말인 것이다. 愼獨은 중국고전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말로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고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계 미국인인 쑤린 하버드대 교수가 이 愼獨을 '하버드대 정신'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쑤린 교수는 빌 게이츠와 전설적인 미식축구 선수 제리 라이스를 예로 들면서 하버드 정신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도덕이나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2000년 전 한자문화권에서 통용되던 덕목이 이 시대에 더 요망되는 가치로 자리를 잡은 것이지 않는가? 나무의 뿌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글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바탕에는 한자가 있어서 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현재의 한글 전용 정책은 그 의미를 그냥 지나치면서 읽을 줄은 알지만 뜻을 모르는 사람을 길러내는 愚民化 정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 번째를 마다하면 첫 번째의 수고로움마저 잃게 되며, 두 번째를 하게 되면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가 있다는 삼국지 유비의 말처럼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면 한글의 위대함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할 때다. 말과 글의 근본에 대해 나지막이 물어보자. 말과 글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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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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