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교육연합신문=송근식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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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말하면서 살아간다. 성격상 또는 마음속에 품고 표현 못하고 지나는 경우도 많다. 기독교에서도 감사예배, 감사기도, 감사찬송 등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 때문인지 수없이 사용한다. 

 

지난 호에 나의 인생사용설명서에서 '네 번째, 감사하며 살자'에 부연 설명하면 '감.인.대(堪;견딜감, 忍;참을인, 待;기다릴대)'가 어떻게 감사하고 관계되는지 의아해질 수 있다. 견디고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감사한 일이 찾아온다. 

 

옛날 시골에 늦장가를 들어 자녀 없이 오순도순 사는 젊은이가 있었다. 농한기 어느 여름날 뒷산 절에 놀러 갔다가 스님께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법문 하나 써 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설명과 함께 '감인대'를 써 주었다. 너무나 기뻐 그것을 집에 와서 계속 연습하고 큰방 문 위에 붙여두고 본인이 쓴 글씨는 방, 부엌 등 여기저기 붙여두고 자랑스러워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틀간 볼일이 생겨 집을 부인에게 맡기고 출타를 했는데 영 맘이 불안했다. 부인에게 당부와 위로를 하고 일을 보러 갔는데 다행히도 하루 만에 끝내고 밤이 늦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주춧돌에 남자 신발과 부인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지 않는가? 창호지를 침으로 뚫고 보니 두 명이 누워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분노에 차서 부엌으로 뛰어가 식칼을 찾아 나오는데 부엌문 위에 붙어 있던 감인대 글이 떨어졌다. 표적을 주워서 잠시 마음을 돌려 인내하기로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아내가 인기척을 느껴 문을 열고 나왔고, 친정에 비구니 스님이 있었는데 마침 그 동네를 지나다 집에 들렀고, 남편이 먼 길을 떠나 혼자 있었기 때문에 같이 있었다고 자초지종을 말했다. 만약 그때 견디고, 인내하고,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방으로 뛰어들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참으면, 기다리면 감사할 일은 찾아온다. 

 

□ 감사(Ⅰ) 

내가 부산 삼성여고에 근무하던 1987년도에 전에 담임을 맡았던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내 나이 불과 37세였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고3 때 부모 없이 할머니가 돌본 조손가정이고, 내가 장학금과 모 여자전문대학 유아교육학과에 진학하도록 권유하여 졸업 후 울산에 있는 현대재단에서 경영하는 유치원 교사로 부임해 열심히 근무했는데, 마침 원장선생이 현대에 근무하는 직원과 소개팅을 시켜 결혼하게 됐다며 남편에게 주례만은 본인이 청하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꼭 내가 해야 된다고 우겼다. 그 학생은 고3 때 내가 진로지도를 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없었고 이런 멋진 결혼도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께 말씀했더니 그때 가정 방문 때를 기억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그렇지만 난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고 너의 감사한 마음만 받고 섭섭하겠지만 그렇게 권유해 다른 사람을 추천해 주기로 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와서 신랑 측에서 주례할 사람이 있어 원만하게 결혼식을 마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주례 이야기가 나왔으니 두 가지만 언급하면, 1997년도(나이 47세 때)에 갑자기 부산 연산동 모 예식장에 내일 주례를 맡아 달라는 친지 분의 전화가 왔다. 본인이 하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사업차 해외 출장을 가게 돼 너도 이젠 교장의 위치라면 주례를 해도 아무 상관없으니 당부한다고 했고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생 첫 주례를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고, 완벽한 성공은 아니겠지만 하객(賀客)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 오픈한 것이 소문이 나서 후배 교사들, 동료 선후배의 자녀들, 특히 친구 자녀들 등 2014년까지 50회를 기점으로 사양을 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대부분 젊은이들이 결혼 주례 없이 사회자나 혹은 본인들이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며 즐기는 시대변천사도 볼 수 있다. 

 

에피소드 하나는 내가 아는 보수동 어느 예식장에서 연락이 와서 예식을 거행하러 갔는데 보통 주례는 대기실에 기다리다 시작 5분 전쯤 단상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신랑 측 하객은 꽉 차 있고  신부 측은 몇 명 없었다. 혼주를 비롯하여 아주 극소수였다. 불안한 감이 들면서도 혼주의 사회생활 혹은 신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서 신랑입장 시간이 지났는데도 신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옛날 '졸업'이란 영화에는 예식 도중 전 애인과 도망을 갔지만 이번에는 신부가 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은 황당하고 소설 같은 일도 있다. 이번 사건은 양측 부모들이 중매를 했고, 특히 여자 측에서는 교제하던 남자가 너무 싫어서 중매로 결혼을 강행했는데 결국 망신만 당하는 꼴이 되었고, 나도 거마비를 주는 것을 도로 반환하고 씁쓸히 돌아온 참담한 회고도 있다. 

 

□ 감사(Ⅱ) 

2009년도 부산의 건국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중간, 기말고사 시험기간이 보통 목~토 3일간 실시된다. 그런데 3학년 학생 중에서 전교 상위권 한 학생이 토요일에 결시를 해야 되므로 담임이 교장실로 찾아와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건의를 해 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종교적 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그 학생은 제칠안식예수재림교회 목사의 아이였고, 재림교회에서는 안식일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 저녁까지)에는 회사원은 직장, 자영업자는 영업, 학생은 공부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이 시험에 불응시하면 영점 처리 되므로 내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기획모임에서 시험을 수, 목, 금으로 하루 당겨 실시하고 토요일은 해방감으로 시험결과 풀이 및 여가 시간으로 하루를 활용하기로 했다. 한 학생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누구에게도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변하고 대처하는 것이 한 방법이자 해결이라고 설득하고, 모든 선생들도 반대의견 없이 잘 따라 준 고마운 일이었다. 얼마 후 그 부모님이 교장실로 찾아와서 장학금으로 금일봉(백만 원)을 가져와 감사와 고마움을 표시한 적도 있다. 모든 일에는 공짜가 없고 조그마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 생각한다.

 

그 학생의 부친 권 목사는 그 후 울산교회, 포항교회 등을 거쳐 지금은 김천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고, 그가 발행하는 '민들레 홀씨'라는 책자를 한 번도 잊지 않고 집으로 배달해 주는 성의를 갖고 있고, 3년 전부터는 삼육재단에서 발행하는 'Home&Health'라는 잡지도 보내주고 있다. 그렇다고 포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난 변하지 않는 불교신자라는 것을 그분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년퇴임한 지도 벌써 10여 년이 넘었고, 내게 기대할 아무런 이유나 유효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자식을 위한 배려에 대한 감사함이라고 생각한다. 

 

□ 감사(Ⅲ) 

여자학교에 근무하면 소소한 일에 고맙고 감사할 일이 참 많다.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 따끈한 커피포트가 놓여 있다. 하루를 즐겁게 해 너무 고맙고 미안해 학생을 불러 마신 걸로 할 테니 그만 멈추라고 해도 첫 마음먹은 대로 1년은 계속하겠단다. 속으론 얼마까지 가는지 보자고 기다려 봤지만 역시 대단한 각오로 졸업하는 날까지 봉사를 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그 작심한 마음 때문인지 결과가 좋아 서울로 진학했고, 나 또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견한 일이기도 하다. 

 

7~80년대 스승의 날 혹은 명절 선물은 인삼과 양주, 과일, 파카 만년필, 향수, 화장품, 넥타이 등이 주류였다. 나도 화장품, 넥타이는 내 손으로 사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삼성여고에 근무할 때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3학년 담임들은 '진학지도실'이라 하여 12명의 담임들이 별도 공간에 있다.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유되기 쉽고 또 누가 인기 있는지 단번에 표시가 난다. 스승의 달이 지나고 추석 전날의 일이다. 첫 3년 담임을 맡은 김 모 선생 학급의 학생 대표가 책상 위에 큰 박스 하나를 올려 두고 나갔다. 모두가 저 상자 속엔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면서 개봉을 은근히 바라면서 박수를 보냈다. 흥분된 마음으로 김 선생의 상자는 개봉됐는데 또 안에 상자가 있고 다섯 번째 열었더니 마지막 조그마한 상자 속에는 '연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사연인가? 모두 화기애애하던 표정들은 일순간 사라지고 김 선생의 표정은 순간 사색으로 변했고 우리 모두는 아연실색했다. 평소 타 교사들보다 선물을 적게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해 아마 학생들에게 은근히 강요를 한 것 같았다. 어리다고만 여겼던 고3 학생들의 신랄한 반항의식이 유머와 위트로 표현됐지만 당사자에겐 너무 치명적이었다. 당시 3학년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김 선생을 옆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반장을 불러와 사과를 시킨 사건(?)이 지금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 번씩 떠오른다. 

 

나는 인물도 능력도 없었지만 그래도 학생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누려온 것을 항상 행운으로 받아들이고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교장시절에도 카드나 엽서 등을 교장실 문 틈 밑으로 수없이 전달받았고 이사를 다니면서 많이 없어지긴 해도 지금도 한 상자 정도 남아 있는데 언젠가 책으로 한번 출간해 볼 생각도 한다.

경혜여고에 근무할 때다. 박 모 교사는 일 년에 두 번씩(설, 추석) 꼭 과일을 보내왔다. 특별히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당연히 윗사람에 대한 인사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2002년 광명고 교장으로 이동을 했는데도 빠짐없이 보내와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젠 제발 그만해도 충분히 마음 전달이 됐고, 서로 부담을 없애자고 전화를 했더니 본인이 퇴임할 때 까지만 할 테니 부담 갖지 말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런 지극정성의 마음은 박 선생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사모의 정성과 마음에 감사와 고마움을 보냈다. 그 후 박 선생은 그 학교에서 교감, 교장으로 2021년에 퇴임을 했고 지금은 약속대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곧 부부간에 식사 자리를 꼭 한 번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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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근식

◇ 교육연합신문 부산지사장

◇ 前부산예문여고·광명고·경혜여고·건국중학교 교장

◇ 학교법인 선화학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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