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0(월)
 

[교육연합신문=손경희 기고] 

흔들림 없이 우아한 자태로 하얀 눈밭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부드럽게 받쳐주던 능선의 영향도 있었을 터이다. 찾아보니 비에이의 크리스마스트리! 하얀 겨울과 초록의 색감이 그립던 날, 이나무를 찾아 홋카이도의 배꼽이라 불리는 후라노와 비에이를 향해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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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이 크리스마스트리

 

삿포로에서 출발한 버스는 모래가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스나가와 휴게소에 들렀고, 비에이와 후라노 지역으로 가는 동안 하얀 옷을 입은 자작나무 군락, 설탕을 뿌려 놓은 듯한 넓은 설원이 쭈욱~ 이어졌다. 

 

유황 냄새가 나는 땅이라는 후라노와 땅이 기름지다는 비에이를 잇는 파노라마로드는 CF 촬영 배경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후라노의 언덕, 팜토미타! 매년 약 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이곳은 6월부터 개화 시기와 특징이 다른 4종의 라벤더들이 보랏빛으로 피어나는 곳이다. 매리골드나 안개꽃, 포피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이 농원을 색색으로 화려하게 수놓는다. 겨울의 윈터 가든은 라벤더에 둥글둥글 엠보싱으로 내려앉은 눈꽃들이 넓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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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도미타의 여름과 겨울 풍경

 

비에이 지역의 탁신관은 마에다 신조의 사진과 수집한 카메라 등을 전시한 갤러리이다. 1987년 폐교한 비에이 소학교 터에 개관했으며, 자작나무 회랑이 뒤편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 

 

도쿄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취미생활로 인물사진을 찍던 중 48세에 일본 종단 여행길에서 만난 비에이의 경치를 30년 동안 카메라에 담아냈다. 갤러리 내부에는 비바우 소학교를 비롯, 검은 구름 아래 붉은 보리밭 등 다양한 시선과 색감의 사진들이 빛나고 있다. 

 

유사한 색감으로 표현한 화가 김영국의 작품들이 오버랩된다. 그는 설원 속에서 참고 기다리는 비에이의 풍경부터 화려하게 터트리는 여름날의 라벤더까지 긴 호흡을 했을 것이다. 매일매일 비에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결정적 순간을 향해 수없이 눌렀을 셔터, 기다림과 꾸준함의 결과에서 그 자신이 위로와 평화를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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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신조의 사진(좌) 유영국의 작품(우)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을 예술의 반열로 올려놓은 앙리 까르띠에 브뢔송은 일상의 귀중함을 결정적 순간의 감동으로 보여준 사진 예술가이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의 빛을 존중한 그는 사진을 일기이자 삶의 메모라고 했다. 나에게 사진은 기억이다. 사진을 찍고, 장소별로 모으며, 날짜별로 분류하는 추억의 저장소이다. 문득, 사진을 꺼내보면 지난날들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며,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술 같은 힘을 갖고 있다. 

 

5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구릉지대 사계채의 언덕은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색의 농작물을 재배하는 풍경이 여러 가지 천을 이어 붙인 수공예품처럼 보여 패치워크의 언덕이라 불린다. 이곳의 느릿느릿한 여유와 목가적 경치의 아름다움은 영화와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한다. 2020년에 비에이 배경 ‘마음에 부는 바람’은 겨울연가의 윤석호 감독이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에서 촬영한 영화이다. 

 

영국에서 찾아온 비디오 아티스트 히다카는 휴대폰을 숙소에 놓고, 몰고 가던 작은 트럭마저 고장난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 민가를 찾아 벨을 누른다. 문 앞에는 고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하루카가 서 있고... 

 

서먹했던 23년 만의 재회, 옛 시절의 이야기로 마음을 열고, 비에이의 아름다움을 담는 촬영에 동행하면서 마음에 바람이 분다. 시간과 우연이 만든 양철 벽면에 빗방울이 더해져 계속 변화되는 모습을 촬영하는 비디오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긴다. 내일도 패치워크 언덕에서 기다린다는 히다카의 말에 하루카는 마음이 복잡하다. 들판에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히다카와 하루카의 망설임과 설렘을 바람으로 표현해 준 세련된 연출의 영화였다. 다시 촬영에 동행하고, 하늘과 구름, 바람과 나뭇잎, 밤하늘의 별과 패치워크 언덕, 호수 너머의 도카치다케의 모습이 동영상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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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작품

 

내일이면 떠난다는 히다카에게 보여줄 곳이 있다며, 함께 밤을 지새우고 찾아간 곳은 청의호. 투명하고 파란 호수를 바라보며, 이별이 아쉬운 하루카. 함께 공항으로 향했으나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만나게 되고, 히다카는 말없이 떠나는 그녀를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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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호의 아침

 

청의호의 사계절이 흐르고, 그림 작가에 전념하던 어느 날, 히다카의 전시회장을 찾은 그녀는 같이 촬영한 작품을 바라보다, 고교 시절 약속한 오로라 사진을 발견하며 회상에 젖는데 작가 프로필 마지막에 ‘런던에서 사망’을 발견한다. 친구는 오로라를 찍으러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며, 유언에 따라 청의호에시신을 뿌렸다고 전한다. 청의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남기며 영화는 끝난다. 

 

뛰어난 영상미에 더하여 우연한 만남이 애틋함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가슴 설렌 영화였다. 나이가 들어보니 여운이 남겨지는 잔잔한 영화가 더 좋다. 그 속에 잠심완색, 즉 물속에 잠겨있듯 마음을 푹 담그고, 사색해 봄으로써 나의 삶을 깨닫고 돌아보는 귀중함을 얻게 된다. 

 

청의호에서 5분 거리 흰수염 폭포는 절벽 틈새에서 가늘게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정말 흰수염을 닮았다. 폭포 바로 위에는 시로가네 온천이 있어 간혹 온천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영하 20도 정도가 되는 비에이의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해서 폭포가 흐른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나뭇가지에 붙어 눈꽃이 되는 수빙을 볼 수 있다. 겨울을 따뜻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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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증기가 눈꽃이 되는 수빙

 

켄과 메리의 나무는 1972년 닛산 자동차에서 발표한 스카이라인이라는 차종의 CF에 등장해 화제가 된 사시나무이다. 세븐스타의 나무는 1976년에 담배 세븐스타의 디자인 패키지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탄 떡갈나무이다. 여행객들은 도로에 줄지어 선 자작나무를 더 반겼다. 역시 겨울 비에이 언덕에는 하얀 자작나무가 파수꾼처럼 서 있다. 

 

오밀조밀한 설원의 구릉지를 뒤로하고 점심을 먹으러 비에이 역으로 향했다. 연평균 18만 명이 이용하는 비에이 역은 석조 역사로 한 시간에 1량짜리 1대 정도의 기차가 지나간다. 이용자보다는 관광객이 훨씬 더 많은 비에이역 자체도 유명하여 광고에 종종 나온다. 주변 맛집 쥰페이는 돈가스 새우튀김 전문점. 새우튀김 카레밥을 먹었는데, 매콤한 카레가 기름진 튀김 맛을 잡아주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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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튀김 카레밥

 

비에이 역 주변 마을의 건물마다 번호가 적혀있는데 이곳에 정착한 년도를 표시하고 있다. 개별 건물들의 전면에 새긴 특별한 표시에 시선이 간다. 눈이 흘러내리도록 세모난 모양의 지붕들이 많았고, 유럽풍의 거리는 작지만 정갈하고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빵집에서 갓 구운 빵과 완두콩을 넣어 곱게 만든 쿠키를 샀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비에이 쿠키맛은 분명 나를 손짓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나도 마에다신조처럼 4계절의 비에이를 만나고 싶고, 이른 새벽의 안갯속, 아침 햇살과 저녁노을, 비 오거나 바람불 때의 비에이를 만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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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경희

◇ 인천 아라고등학교 교장

◇ 前인천 작전여고, 인천 청라고 교감

◇ 前인천광역시교육청 정책기획조정관

◇ 前인천서부교육지원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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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후라노와 비에이의 하얀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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