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08(금)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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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근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를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의 고전과 전통을 척결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서구화를 위해서 변법개조(變法改造)와 전반서화(全般西化)를 동시에 결행했다는 말입니다. 서구사회에서 구축한 물리적 체계와 정신적․사회적 체계를 수용하고자 일체의 학문체계를 서구의 학문으로 대체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서구화는 미국화였습니다. 학문도 철학도 교육도 미국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미국을 본받으려고 유학길에 올랐고, 대학 강단 등에서 실력 있는 강사가 되려면 남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영어로 하고,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도 몰라야 명강사로 일컬어졌습니다. 지금도 그런 풍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문해력과 소통 능력은 세계에서 꼴찌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명문 리버럴아츠 칼리지로 꼽히는 애머스트대 마이클 엘리엇 총장은 지난 10일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인공지능 시대에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문화, 역사, 언어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마음속 호기심에 따라 지적 열정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AI 시대에도 인문학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중요성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물론 AI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AI를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질지는 인간이 결정해야 합니다. 창의력, 의사소통 능력,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AI가 가져올 수많은 도전과 해결책을 이해하고 문화, 역사, 언어의 복잡성을 알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런 능력을 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한 말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의 가치관도 20세기를 통해 미국화를 지향할 뿐이었습니다. 말도 옷도 더 나아가 책 제목도 영어로 쓰여 있어야 지식인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20세기 미국 문명은 세계 지성인들의 합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미국 쌀이라고 하면 안심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미제(美製)라고 하면 선택의 최우선 기준이었다는 것이지요. 가전도 음식 이름도, 상품 이름도, 음식점 이름도 미제를 최고 가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놓는 제국주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도덕성과 보편성, 분별성의 부재를 낳고 있지요. 오늘날 미국 여권(旅券; 패스포트)를 가지고 다니면 봉변을 당한다고 합니다. 도덕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접받지 못하는, 나쁜 나라, ‘나뿐인 나라’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며, 태어남과 죽음을 반드시 공유하며, 인간존재의 연속은 무한하다는 것이 우리 동양 철학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집을 사당이라고 하여 집의 뒤쪽 높은 곳에 짓습니다. 사당에 모셔진 조상은 살아 있는 집식구들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밖에 나갔다 오면 먼저 사당에 가서 인사를 하고 부모님을 뵙게 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자가 죽음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것이 제사입니다. 죽어도 생명으로 살아남는 것입니다. 


‘주역’ ‘계사전’에서도 “生生之謂易”(생생지위역) 곧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생생(生生)은 달리 말하면 “생겨나고 생겨남”입니다. 모든 생겨나는 것은 곧 죽고, 죽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 것뿐이라는 의미입니다.


“효(孝)”라는 언어와 그 관념은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이 도덕성의 근거를 제공해 온 위대한 무형자산입니다.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더 충실하게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孝”라는 개념은 오직 한자문화권의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인간관의 소산입니다. 서양인들에게는 “孝”라는 단일한 관념도 언어도 없습니다. 


따라서 “孝”의 가치관이나 미담도 없습니다. 우리는 개화기를 통하여 서양인들의 이러한 ‘상스러움’을 ‘독립심 고양’이라는 맥락으로 오히려 찬양하여 왔습니다. 이게 천손(天孫)이라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는 청년들에게 헌신하고 또 야단치는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국민 모두의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영국의 역사가인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년 4월 14일~1975년 10월 22일)는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973년에 국회의원을 지낸 임덕규 씨의 방문을 받아 한국의 '효 사상과 경로사상, 가족제도'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86세의 노인이었던 토인비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효 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이는 인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한국뿐 아니라 서양에도 '효' 문화가 전파되었으면 좋겠다"라며 개인적인 희망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13經 중의 하나로 경(經)의 자격을 획득한 경전이 『孝經(효경)』입니다. 경(經)이라는 글자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면 좋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대적 가치, 이념, 가치관 등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經典)이란 소명(召命)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통해서 행복해졌는지? 지혜가 커졌는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는 진실한 태도가 일상화되었는지? 등을 살피는 과정에서 경(經)의 참된 의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고루한 동네 향원(鄕愿)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멈추면 끝입니다. 사람으로 완성되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건너가기를 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생경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공부할 때는 모두 다 함께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이런 규칙은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자청한 것이어야지 부과되면 안 됩니다. 남으로부터 부과된 것은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습니다. 부과된 것을 오래 하는 사람은 바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청은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도덕경》에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無爲만 읽고 無不爲를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위하면 되지 않을 것이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노자의 시선은 무위보다는 ‘되지 않을 것이 없다’라는 뜻인 무불위를 향해 있습니다. 무불위 중에 궁극의 경지는 취천하(取天下), 즉 천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이 읽고 싶은 것만 읽어서는 세상을 알 수 없습니다.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을 배울 때는 힘 빼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고 듣습니다. 힘을 빼는 이유는 더 큰 힘을 더 정확히 구사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이유는 물러섬 그 자체에 있지 않고, 더 앞서기 위한 희망에 있습니다. 목적은 결국 앞서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힘은 계력 → 문왕 → 무왕으로 이어지는 3대 문명의 작위와 상통합니다. 주나라를 일으킴은 효의 전범이며 혁명의 3대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孝의 바탕이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혁명은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3대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태조 이성계 → 태종 이방원 → 세종의 경우를 보아도 문화를 바꾸는 것도 孝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孝란 무엇일까요? "중용"에 좋은 정의가 있습니다. “부효자 선계인지지 선술인지사야(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也)” ‘무릇 효란 사람의 좋은 뜻(유지)을 잘 이어받고 훌륭한 사람의 일(유업)을 잘 저술해서 남기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師任은 주나라 혁명의 장본인인 문왕(文王)을 낳은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간절한 의지 표현입니다. 조선왕조의 신기원을 이룩할만한 자식을 키우겠다는 결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申師任堂은 거대한 인문과 정치 혁명의 어머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孝”는 자신의 존재를 역사 속에 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만드는 일입니다. 협애한 가문, 명예의 연속이 아니라 인간세의 근원적이고도 보편적인 도덕성의 연원입니다. 또한 자신을 역사 속에 보장받는 제도입니다.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고 자청하는 것이 “孝”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역사가 심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아가페(agepe)적인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어머니와 태양입니다. 태양은 일방적으로 사랑을 줍니다. 생명의 모든 근원은 태양입니다. 태양은 feedback을 하지 않습니다. 대기권에 있는 모든 것은 feedback 체제입니다. 태양처럼 위대한 아가페(agepe)는 없습니다. 태양에 해당하는 삶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효孝”입니다. 반복하고, 반복하면, 감동이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일효 일일효 우일효(苟日孝 日日孝 又日孝)’ 하고 외치고 또 외치는 우리의 일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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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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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청(自請)하는 효(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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