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위클리피플=오미경 기자]

 

우리 아이 건강한 성장, 미술교육에서 답을 찾다!

 

‘아동미술’과 함께한 오용환 교수의 아름다운 人生

 

오용환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 주임교수/ 한국미술협회자문위원/ 관인 꽃동산 어린이집 이사장

 

 아기들이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장 먼저 접하는 환경은 눈부신 빛과 소리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각은 모든 감각기를 이용해 자신이 앞으로 생존해 나갈 곳을 탐색하는 아기들에게 다른 감각기의 발달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데, 아동기의 창의·인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시각발달에 좋은 미술교육에서 자녀 성장의 답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 아동미술 교육의 변천사를 온 몸으로 흡수하며 어린이 미술교육의 진보를 위해 한 평생을 걸어온 경기대학교 오용환 교수의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을 꾸밈없이 표현해내는 창구로써 아동미술교육을 말해 온 그를 만나 30년이 넘도록 쉼 없이 이 길을 내달리고 있는 아름다운 인생화폭을 펼쳐보았다._오미경 기자

 

예기치 않았던 시작, 운명이 되다

 오용환 교수가 ‘아동미술’과 인연을 맺어 온, 그의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은 흔히 떠올리는 화가나 미대교수의 모습과는 시작부터가 사뭇 다르다. 원래 그림그리기를 좋아해 화가를 꿈꾸던 오 교수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어려운 집안환경과 부모님의 완고함에 부딪쳐 맏이로서 직업전선을 택한 것이다. 그는 선배가 운영하는 화실에 드나들며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길에 접어들었다. 애초에 계획한 출발은 아니었으나 자신을 따르는 순수한 아이들을 보며 가르치는 일의 보람을 일깨운 그는 그 뒤, ‘푸른미술연구소’를 세워 어린이와 입시생 지도에 나섰고, 불모지나 다름없던 아동미술을 알리왔다. 그러면서 서울시교육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연구소를 학원으로 변경, 입소문을 타고 곳곳에서 찾는 이들 덕분에 눈에 띄는 성장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 즈음, 덕수궁 옆 중앙국립공보관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고, 원생들과도 전시회를 갖는 등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모두 승승장구한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오 교수는 미술학원연합회 동부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아동미술의 궁극적인 발전 방향 제시를 위해 다방면으로 적극 노력했다.

 

 

어린이 미술교육의 진보를 그려온 만학도 화가의 열정

 드라마틱한 화가 오용환 교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중 하나는 해외교류를 통해 국내 아동미술 교육에 새로운 시도를 꾀했다는 점이다. “80년대 들어와 미술학원이 부흥기를 맞이하긴 했지만,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70~80년대에는 아동미술교육에 관한 책이나 연구자도 거의 없고, 순수미술에 치중하는 경향이 커 아동미술 교육의 궁극적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러던 중 학회 등을 통해 조금씩 해외의 자료들을 접하게 되면서 아동미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저를 포함한 5명의 아동미술교육 작가들이 뜻을 모아 한국청소년미술협회 주관으로 일본에서 진행된 한일합작 청소년미술제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지도한 어린이가 최우수상을 받았고, 동료들과의 전시회도 열면서 당시 일본 언론으로부터 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았어요(웃음).” 해외 무대에서 말로는 다 못할 뿌듯함과 기쁨을 맛 본 오 교수는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학문에의 열정을 더욱 불태우며 또 하나의 인생 드라마를 만들어갔다.

 

 정부의 주도로 1985년, 미술학원을 유치원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이뤄져 그는 곧바로 방통대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파란유치원의 원장이 되었고, 미술에 대한 지식을 더 쌓아 미래의 어린이 지도자들을 가르치리란 꿈으로 경기대 회화과에 편입해 수석졸업과 총장상의 영예를 누렸다. 게다가 그는 동대학 교육대학원까지 우수 졸업을 하기에 이른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놓지 않으면서 내 공부를 하다 보니 불이 붙더라고요. 이른 직업적 성공도 겪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은 늘 마음속에 있었어요. 신갈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마침내는 대학 강단에 서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숙명여대, 한양대를 지나 경기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게 된 그는 당시 속초의 동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교수 공개채용에도 응시하여 합격하는 등 미술과 유아교육을 넘나들며 대학 교수로서 원 없이 역량을 발휘하였다. 비록 출발은 평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멈추지 않는 노력과 집념이 이뤄낸, 꿈을 이룬 결과였기에 더 값진 순간이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그의 실력이 더욱 소문이 나면서 문화센터 강의 요청과 개인지도 요청까지 쇄도하였다. 종횡무진 활약해 온 오 교수는 90년대에 예술의 전당 최초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국내·국제전에도 다수 참여하는 등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자기개발 또한 이어나갔다. 1991년에는 그의 인생에서 큰 상처로 남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힘든 치료시기를 보내기도 했던 그였지만, 오 교수는 몸에 밴 듯 여전히 미술과 함께였다. 이 밖에도 세계예능미술교류협회 주관의 미술대회 심사, 소년한국일보 미술대회 심사를 10년 넘게 이어오는 등 오 교수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린이가 미래다
'꽃동산 어린이집'의 교육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연 속에서 살아온 오용환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도 자연에서 뛰놀며 아이다운 상상력과 순수함으로 성장하길 바라 3년 전, 경기도 광주에 아내와 함께 둥지를 틀었다. 오 교수는 “아동의 미술은 소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도, 직업적 목적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닌, 상상력과 꿈의 자양분으로서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은 그리기나 만들기를 통해 자신을 오롯이 표현해내고 오감을 발달시키면서 자연스레 정서안정과 인격의 형성까지 이루게 됩니다.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통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분이죠. 어린 시절에는 교과목 교육보다 마음껏 뛰놀며 잠재된 성향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밝은 성장이 중요해요.”


 

 

 오 교수는 아동미술교육의 중요성이 고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와 국회에서 미술문화를 보다 쉽게 접근하고 그 중요성을 알려야한다고 역설하며 “아동미술 교육은 명령적, 기계적이 아닌 창의성과 경험, 자유에 바탕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작품세계만큼이나 자연냄새 물씬 나는 동화 같은 꽃동산어린이집에서 지금도 미술교육을 하고 있는 오 교수는 음악과 사회복지까지 전공한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풍요로운 교육 환경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에도 발 벗고 나서며 스스로 아이들의 본이 되고자 하는 마음 또한 그대로 전하고 있다.

 

 오용환 교수는 앞으로 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후배들에게 그간의 배움과 경험을 나누고, 세계 18개국 아동미술 교육을 연구한 책도 출간할 예정이다. 꿈꾸는 이의 얼굴은 언제나 빛이 나지 않던가. 또 하나의 계획을 전하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에게서 아동미술을 향한 변치 않는 열정만큼이나 빛나는 순수함을 발견 할 수 있었다.

 

 

profile.
現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 주임교수
   한국미술협회, 경기대학 총동문회 자문위원
   한국기독교미술협회운영위원
   한국국제미술협회부이사장
   아트피아미술협회부이사장
   서울미술협회이사, 사실련예술분과위원장
   관인 꽃동산 어린이집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여가문화지도자연합회 부이사장
   퇴촌 주민자치위원 홍보분과

-경기대학교 동 교육대학원 미술과 졸업
-개인전 9 회(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한국, 프랑스 50주년 한인회 초대전
-타쉬켄트 국제 비엔날레 특별전
-추상수채화협회 회장 역임
-경기대학교 인문예술학부 전담교수 역임
-동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겸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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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학교 오용환 교수 특별인터뷰] 우리 아이 건강한 성장, 미술교육에서 답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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