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5(토)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자 이전의 시대는 어둠처럼 흐릿하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도 인간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바위 위의 동굴벽화, 나무껍질에 새긴 무늬, 그리고 동방의 옛사람들이 택한 특별한 매개체, 거북의 등과 짐승의 뼈가 바로 그것이다. 기원전 13세기 전후, 은(殷) 왕조의 제사장은 거북 등껍질과 소의 어깨뼈를 정성껏 손질해 그 위에 글자를 새겼다. 불에 넣어 금이 가면, 그 균열을 하늘의 목소리로 해석했다. 이때 새겨진 문자가 바로 은자(殷字)다. 
 
은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대화하려는 시도의 흔적이자, 초월과 소통하려는 간절한 몸짓이다. 우리는 오늘날 종이에 활자를 찍어 지식을 전하지만, 최초의 문자 창조자들은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의 뼈와 껍질을 빌려 썼다. 그 뼈마디에 새겨진 글자는, 인간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연과 신을 향해 귀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 갑골문 속에 남은 동이족의 발자취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갑골문이 단지 은(殷) 왕조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 문자 속에 동이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갑골문에 등장하는 새, 활, 태양을 상징하는 글자들은 동이족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동이족이 숭배하던 태양과 새의 상징, 활을 든 인간의 형상은 갑골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실제로 은 왕조는 동이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때로는 충돌했다. 은의 제사에 사용된 옥, 조개껍질 화폐, 바닷새 문양은 동이 해안 문화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갑골문 속 ‘이(夷)’는 단순히 변방의 타자가 아니라, 문자 탄생의 공동 증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자가 탄생하는 순간, 그 자리에 동이족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 해, 달, 별 - 자연을 새긴 최초의 상형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연이다. 해(日)는 가운데 점이 찍힌 원으로, 달(月)은 초승달 모양으로, 별(星)은 나무에 점이 모여 있는 형상으로 그려졌다. 인간은 하늘의 빛을 문자로 옮겨 적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기록이었다.
오늘날 과학은 태양을 뜨겁게 불타는 가스 덩어리라 설명하지만, 고대인에게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자 신의 얼굴이었다. 갑골문에 새겨진 해와 달은 우주의 시계였고, 인간 삶의 리듬을 결정하는 힘이었다. 달의 주기는 여성의 몸과 연결되었고, 별자리의 움직임은 계절과 농사의 주기를 알려주었다. 문자 이전의 기억은 곧 자연의 기억이었고, 갑골문은 그것을 형상화한 첫 번째 시도였다.([그림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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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삶을 새기다 - 인간 형상의 등장
자연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갑골문에는 인간의 몸과 삶 또한 깊이 새겨졌다. 눈(目), 입(口), 손(手), 발(足) 같은 글자들은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다. 사람의 형상(人) 역시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이 글자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인식하고 정리한 최초의 시도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몸의 글자들이 사회적 관계와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父(아버지)’는 손에 도끼를 든 모습으로, 가문의 권위를 상징한다. ‘女(여자)’는 무릎을 꿇은 여인의 모습으로, 가정과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몸의 형상은 곧 관계의 형상이고, 삶의 질서를 반영하는 기호였다.([그림 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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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들고, 입으로 기원하며, 발로 걸어가는 존재. 그것을 고대인은 문자로 남겼다. 문자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 기억을 불러내는 뼈의 언어
오늘 우리는 종이에, 혹은 디지털 스크린에 문자를 남긴다. 그러나 문명의 첫 기억은 종이가 아니라 생명의 뼈에, 살아 있는 껍질에 새겨졌다. 갑골문은 문자 이전의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체다.
칼럼의 자리에서 우리가 갑골문을 다시 소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고대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갑골문은 인간이 자연과 대화하려 한 기록이었고, 동이족의 흔적이 스며 있는 공동의 문화유산이었다. 그 속에는 해와 달, 별을 바라보며 시간을 새기고, 인간의 몸을 그려내며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원초적 충동이 담겨 있다.
갑골문은 말한다. 문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사유와 신앙을 담는 그릇이라고. 뼈와 껍질 위에 남겨진 그 글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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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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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 이전의 기억, 은자(殷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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