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4(목)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뢰풍항괘는 위에 우레(☳)가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는 모양이다. 우레와 바람은 항상 같이 간다. 우레와 바람은 움직임 속에서도 만물을 소통시키고 생장시킨다. 그 모습이 항상성이 있다. ‘뢰풍항(雷風恆)’의 ‘항(恆)’은 하늘과 땅 사이(亘)에서 가장 한결같은 日(태양)처럼 변함없는 忄(마음)을 표현한 글자다. 그래서 ‘항상’, ‘지속’을 의미한다. 즉 ‘항상’은 ‘변화의 지속’을 말한다. 예를 들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은 변화하지만 지속되고 또 순환한다. 한결같은 변화가 지속되는 곳에서 삶은 유지된다. 
 
한용운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의 첫 구절은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다. 강물은 늘 흐른다. 강물은 논개가 살던 임진왜란 당시에도 흘렀고, 지금 논개의 충절을 노래하는 한용운이 살던 시대에도 흐른다. 그러니 남강은 흐르지 않고 그냥 거기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남강은 흐른다’는 변화를 말하고,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흐른다’는 ‘지속’을 말한다. 따라서 ‘항상’은 변화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다. 변화가 지속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아남는다. 가만히 있으면 죽음으로 간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식물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임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절묘한 균형 감각의 유지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살아있을 때 줄곧 죽음이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을 늘 생각하는 자가 현명한 인간이다. 과학이나 의학에서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우리 몸의 혈관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혈관이 원활하지 못하면 뇌혈관 질환 즉 치매, 파킨슨병 등이 와서 삶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 뇌혈관 질환을 예방하려면 당연히 운동과 비타민 C를 겸해야 하고, 이것을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해야 한다. 항상성이다. 
 
노자는 자신을 아는 것이 밝음(明)이라 했다. 자신을 어떻게 아는가? 우선 항상성을갖춘 자연의 도(道)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비로소 밝아진다. 무엇이 밝으려면 주위는 어두워야 한다.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에 보면 일엽스님이 제자에게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밝은 달이냐고 묻는다. 제자는 보름달이라고 답한다. 스님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먹(墨)을 갈던 제자는, 한참을 생각하다 까만 먹물 속에 먹이 자나가며 순간적으로 만드는 그믐달이라고 답한다. 밝을 명(明)자도 갑골문에 보면 해 일(日)이 창문의 상형인 빛날 경(冏)이 변한 것으로 ‘창문에 비치는 달빛’이란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해와 달이 합쳐져 밝다’는 뜻이 아니다. 밝은 창문 옆에 달을 배치한 모습이다. 어두운 밤 밝게 비치는 창문을 보니 거기 달이 걸쳐 있다. 이보다 더 밝은 희열을 느낄 수 있나? 해와 달이 함께한다는 단순한 결합보다 훨씬 극적이고 문학적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항상은 변화의 지속이다. 변화하는 삶도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굴곡진 삶으로 볼 수도 있고, 항상성이 있는 삶으로 볼 수도 있다. 넘치는 파도를 바로 앞에서 보면 집채만한 크기이지만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보면 바다의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길게 멀리 보는 시각을 가져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논어』에서도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라 했다. 멀리 보지 않으면 가까이에 근심이 있는 법이다. 
 
항성성은 밸런스를 유지해야만 한다. 틀에 박힌 규제 속에서의 삶이 좋다고 기득권만 유지하려고 하면 삶의 비상은 없다. 틀에 박힌 규제 속의 삶에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비상할 수 있다. 그래야 삶의 역동성이 살아나고 만물이 생장한다. 
 
안정된 삶 속에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한결같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다. 한결같음 속에서 신뢰가 쌓이고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결같다’는 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샘물은 항상 새로운 물을 뿜어낸다. 그래서 항상 맑다. 변화와 항상성은 늘 함께 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늘 변화해야 한다.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인 폴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보면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오직 차이만 있다는 말이다. 쌍둥이도 얼굴이 다르다. 차이만 있다. 심지어 자기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한다. 신경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루리아도 변화에 민감해서 아침의 ‘너’와 저녁의 ‘너’가 다르다고 말하며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했다. 들레즈는 반복과 차이의 철학을 만들었다. 차이란 반복의 결과라 하며, 반복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라 했다. 반복은 같음이 아닌 차이의 생성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역』에서 말한 ‘변화와 항상성’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들뢰즈는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모네의 그림(루앵 성당 연작들)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모네는 루앵 성당을 계절, 시간, 기후,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들을 그렸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빛을 포함한 여러 조건들에 의해 루앵 성당은 시시각각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차이’가 있었다. 이정우 교수에 의하면 A가 A′로 변화했을 때 그 둘의 공통인 A는 반복된다. A가 A′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만일 A와 A′가 완벽하게 동일했다면, 즉 차이가 없었더라면 A는 더 이상 반복될 이유가 없다. 모네의 경우로 말하자면, 더 이상 루앵 성당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반복은 헐벗은 반복과 내적이며 풍요로운 반복이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내적 반복과 외적 반복의 구분은 차이를 낳느냐 낳지 못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역으로 차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반복이 있다. 차이와 반복은 뫼비우스띠처럼 얽혀 있다. 
 
여기에서 차이와 반복의 철학적 의미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자. 차이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천덕꾸러기처럼 생각되어 왔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논리로 정해진 일관된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는 사회 통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이 소수자들이 만들어내는 생성이다.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관용이나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차이를 계기로 사회가 조금은 변화되고, 그것이 질적으로 더 나은 생성이었다면 우리는 차이 나는 것들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게 된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99년 한(漢)나라 조정은 크게 술렁였다. 이릉(李陵)이 흉노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릉은 뛰어난 무장으로 보병 5000명을 거느리고 열 배가 넘는 흉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 화살은 모두 바닥이 났고 병사들도 지쳐갔다. 흉노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채 며칠 밤낮을 싸웠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릉은 남은 부하라도 살리기 위해 부득이 흉노에 투항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漢武帝)는 크게 진노했다. 문명 대국 한나라의 군대가 오랑캐로 치부하는 흉노에게 패했으니,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황제의 자존심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제의 눈치를 보던 신하도 하나같이 이릉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다른 목소리를 낸다. 바로 사마천이었다. “이릉은 항상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하며 작은 것도 나누었기에 부하들은 죽음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비록 패하였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적은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훗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뒤에서 편안하게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신하들이 그의 단점을 부풀려 말하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러면서 최고 지휘부의 작전 실패도 지적했다. 이릉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으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사마천에게로 향했다. 작전 실패를 거론한다는 것은 무제가 총애하던 이광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인 데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황제에게 찬물을 끼얹으니 황제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광리를 비난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기원전 97년 항복한 이릉이 흉노족 지도자에게 병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면서 이릉의 가족이 몰살됐고, 사마천의 처지도 더욱 어려워졌다. 사형을 앞둔 사마천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냥 사형을 받든지, 돈 50만 전을 내고 감형받든지, 아니면 대신 궁형(宮刑)을 당해 사형을 면제 받든지다. 이 중에서 사마천은 궁형을 자청했는데, 그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치욕적인 궁형의 치욕을 감내하고 불후의 저작인 『사기(史記)』를 쓰게 되었다.(중앙일보 2018. 04.16.) 
 
이처럼 사회가 좀 더 선순환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차이’에 있다. 그것은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생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변화를 가져온다. 반복은 차이를 낳고 차이는 항상성을 낳는다. 우리 몸도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 인체의 전체 세포가 교체되는 회전 주기는 80일로 밝혀졌다.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 몸도 세포가 죽고 사는 반복으로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우리 몸을 성장시킨다. 변화와 항상성은 우리 삶의 균형 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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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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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변화와 항상성은 삶의 균형 인자다(뢰풍항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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