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 '명문'과 '학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높은 명문대 진학률과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교과목의 성적이 우수하면 '명문'이고 '학력'이 뛰어난 것일까?
산업화 사회에서 지식정보화 사회로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다양성과 다원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학교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요구에 맞는 모습으로 진화해야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사회적 역할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명문'은 교육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학교를 말하며, '학력'은 학교가 수행한 사회적 역할의 성과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문'과 '학력'의 개념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학교성적이 좋은 학생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수학성적 못지않게 리더십과 창의성, 공동체 정신과 국제적 감각을 중시한다. 수학, 과학의 영재 못지않게 문학, 예술분야의 영재를 소중히 한다.
결국 우리 시대에 '학력'이란 개별 학생이 학교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 특기와 적성, 창의력, 인격의 '총합'이고 이를 통해 학문, 문화·예술,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분야의 발전을 이끌고 이로써 더 밝은 미래를 만드는 인재를 키워내는 학교가 '명문'이다.
공부만 잘하는 학생, 수능성적만 좋은 학생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 일반계 고등학교의 미래형 모델을 앞장서 보여주는 곳, 서울고등학교(교장 이경복)를 찾았다.

서울고 학생들의 병영체험 모습.
굳건한 민족관·호국정신, 교육의 바탕
"우리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애국, 애족, 호국 정신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경복 교장이 학교의 특징으로 맨 처음 꺼낸 말은 의외였다.
뛰어난 대학 진학률, 영어 몰입교육, 영재반 운영 등을 학교의 자랑이자 특색으로 드는 현실과 비교하면 이 교장의 답변은 더욱 뜻밖이었다.
이 교장은 학교의 교화(校花)가 무궁화라고 했다. 교목(校木)은 소나무였다.
애국가 가사가 떠올랐다.
교장의 명함에도 학교가 보내는 축전 등 공식 편지지에도 무궁화문양이 선명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주위에는 담장대신 3천 수가 넘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었다. 그 품종만도 60종이 넘는다고 했다. 이와는 별도로 모두 98종에 이르는 무궁화 묘목을 학교에서 기르고 있었다.
교장실은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어디에나 무궁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강당과 체육관 등 학교 건물 곳곳에도 무궁화와 소나무, 우리나라의 사계(四季)를 담은 사진들이 학교를 방문한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경복 교장은 말했다. "우리 학교에 처음 부임하는 선생님들은 예외 없이 백두산 천지를 답사합니다."
동문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행사는 학교의 전통이 된 듯 했다.
교정 중앙에는 3.1탑이 있다.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0년 세운 국가 지정 현충시설이다.
휘호는 1919년 3.1 만세운동의 주도자로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이갑성 선생이 썼다.
이 학교 출신으로 6.25와 4.19혁명 당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기리는 포충탑과 강재구 소령 동상 또한 보훈처가 지정한 국가 현충시설이다.
교정 곳곳에 스며든 유달리 강한 국가관과 민족관은 학교가 개교 이래 지금까지 '명문'의 자리를 잃지 않는 정신적 원천이 무엇인가를 소리없이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전통 '명문' →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명문'의 모습 보여줘
학교의 이른바 명문대 진학률은 학교가 위치한 서울 강남지역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학교 어디를 둘러보아도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오직 공부만 강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눈 쌓인 학교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전통'이 반드시 '명문'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특별한 그 무엇이 있을 터였다.
이경복 교장에게 평준화 이후에도 '명문'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이번에도 돌아온 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만이 '명문'은 아닙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학생의 특기와 적성, 잠재력을 중시해야 합니다.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교과목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성공적으로 키워내는 것. 이것이 '명문'의 본질입니다."
이 교장은 학교의 야구, 사격, 골프 등 운동반과 국제반, 준 과학고 형태로 운영되는 과학중점학교 특화반 등을 예로 들며 학생이 가진 잠재된 소질과 적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표이자 의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학교는 미국 명문 고등학교인 월트 휘트먼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정기적인 학생 상호 방문 행사를 갖고 있다.
'학력신장'… '교육을 받아 이뤄낸 변화의 총합'
이경복 교장은 서울시교육청에서 '학력신장'정책을 입안하고 주도했다. 일반적으로 '학력'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입시위주의 수업에 '올인'하는 살벌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경복 교장은 '학력'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교육을 받은 변화의 총합'이라고 말했다.
성적표로 나타나는 교과 성적만이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보이는 생활태도의 변화, 창의력의 계발, 체력향상 등… 이 모든 것이 '학력'이라고 했다. 단순히 수학 점수가 30점에서 50점으로 오르는 것만이 '학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학교 2학년생들은 매년 2박3일간 충북 음성 꽃동네 봉사체험을 한다. 학교가 바라보는 '학력신장'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담장을 없앤 자리에 무궁화를 심고 그 묘목을 기르며 각별한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도 '학력신장'이 지닌 의미의 한 자락을 읽을 수 있었다.

‘변화’는 ‘의지’가 만드는 것
'서울비전 아카데미(방과후학교)' … '사교육비 제로' 목표, 유명 학원 강의 못지않아
학교는 '서울비전 아카데미'라는 특별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방과후학교'의 다른 이름이다.
학교의 '방과후학교'는 이름만큼이나 그 운영면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미리보는 생물', '쉬운 물리', '알기 쉬운 고전문학' 등 각 교과별 입문단계부터 '완전하게 정리하는 화학', '고전시가 완전정리', '언어영역 심화', '수학 심화' 등 정리, 심화단계에 이르기까지 맞춤형, 단계별 특화된 방과후 과정을 운영한다.
국·영·수 종합반을 운영하고 CNN청취반, 한국사 능력시험 대비반 등 특화된 단과반을 운영하는 모습은 유명 입시학원의 수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학교의 방과후학교는 두 가지 점에서 더욱 눈길을 모으게 한다.
하나는 모든 개설 강좌가 수준별·무학년제로 운영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녁 6시부터9시까지 이루어지는 강의가 끝난후 10시까지 한 시간 동안 대학생 멘토와 일대일 문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생 멘토와의 일대일 문답은 배운 것을 익히는 '복습'이 학습능력 향상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 철저한 출결관리, 강사실명제, 학생 자율선택제 등은 학교의 '서울비전아카데미'를 방과후학교의 선도적 모델로 만들고 있다.
강좌수 무려 108개…사교육비 25% 줄어
현재 5기를 맞이하는 이 과정에 개설된 강좌수는 무려 108개에 이른다.
1, 2학년 학생들의 참여율은 60%를 넘어선다. 그만큼 만족도도 높다.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본래 목표대로 사교육비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학교가 자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각 가정에서의 사교육비는 전년도에 비해 25%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이 교장의 특별한 노하우가 숨어 있다.
이 교장은 서울 강남교육청 교육장 재임시절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방과후학교 거점학교'사업을 추진했다.
사업의 성과는 대단했다.
사교육 1번지 강남에서 사교육 수요가 감소하는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이다.
현재 교과부가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핵심사업으로 추진하는 '사교육 없는 학교' 사업은 이 사업을 모태로 한 것이다.
학생들의 수준과 수요를 고려해 교과 영역을 세분화하고 단계별로 구분해 수업 효율을 극대화한 학교의 '서울비전 아카데미'에는 '사교육 없는 학교' 사업의 선구자인 이 교장의 노하우가 담겨있다.

학교의 영어전용교실 수업 장면.
과학중점학교, 준과학고 형태 4개반 운영,
특목고 가지 않고도 같은 효과
학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학교는 '과학중점학교' 운영에서도 학교만의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학교는 모두 4개 반을 '준 과학고' 형태로 운영한다. 과학고나 과학영재학교를 가지 않고도 수학과 과학에 소질과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연구와 심화학습 과정을 크게 강화한 교육과정을 통해 그들의 잠재된 소질과 적성을 최대한 기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경복 교장>
교육계의 '이슈메이커'
학교교육 회생의 불씨를 지피다
겨울날 오후의 햇빛처럼 갈수록 그 빛을 잃어가는 우리 학교 교육의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으게 만들었던 굵직한 교육정책들이 있다.
'학력신장' 정책은 학교 교육의 경쟁력 확보와 함께 입시 경쟁에 메몰되어 가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목표로 했으며, '교육격차 해소사업'은 서울시 교육청의 '좋은 학교 만들기 자원학교'로 모습을 드러냈고 정부의 '교육복지투자 우선지역 지원사업(이른바 '교복투' 사업)'으로 확대됐다.
지금 또 하나의 화두가 된 '학교선택제'는 학교 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계 구성원들이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울 강남교육청에서 시작한 '방과후학교 거점학교'사업은 교과부의 '사교육 없는 학교'사업으로 확대·재탄생했다.
이경복 교장은 이들 사업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이슈메이커'이다.
'명문'과 '학력'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학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학교 교육의 경쟁력을 되살리는 과정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계고와 전문계고, 시도 및 지역교육청, 교육부 등 일선 교단에서부터 교육정책의 수립, 추진의 산파역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보다 다채로운 경륜을 가진 그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면서 우리 학교육이 생명력을 되살리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